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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돈을 써? 대학생 쓰면 되지
문제: 공공기관이나 기업이 제출한 사업 제안서에 따라 사업을 수행하는 활동. 계획서 심사, 면접 등의 과정을 거쳐 선발된 경우에만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 진행 주체는 사업 진행 과정에 대해 지속적인 평가와 감독을 받는다. 진행 주체와 상관없이 사업의 결과는 사업을 제안한 기관의 실적으로 남는다. 이는 무엇일까? (1) 공모사업  (2) 용역사업  (3) 외주사업  (4) 설마 봉사? 자원봉사, ESG, 그리고 열정페이 서울시자원봉사센터는 올해 3월부터 ‘2024 서울 청년 기획봉사단’ 사업(이하 기획봉사단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업의 내용은 문제 속 내용과 완전히 동일하다. 청년들이 팀을 이뤄 현대홈쇼핑, 아모레퍼시픽, 서울신용보증재단을 포함한 16개의 기업과 공공기관이 제출한 사업 제안서에 맞춰 기획안을 제출한다. 사전 교육, 서류 심사, 면접을 거쳐 최종 선발된 청년들은 사회공헌 사업을 진행한다. 중간평가와 최종평가를 거쳐 사업이 종료되면, 청년들은 활동혜택으로 무려 활동 인증서와 봉사시간을 제공받는다. 서울시자원봉사센터는 청년들이 이 활동을 통해 “사회 진입과 일 경험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밝혔다. 돈은 안 받지만 ‘일’을 경험해 볼 수 있다니! 청년들의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 아닌가? 기획봉사단 사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무급 노동’이다. 사실상 공모사업과 동일한 형태로 진행되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참여하는 청년들에게는 합당한 대가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약간의 실행금을 주긴 하지만, 인건비는 물론이고 장비 대여비, 교통비 등의 활동비로도 사용할 수 없어 참여자들은 오히려 자비를 들여가면서까지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봉사니까 당연히 돈이 주어져선 안 된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가? 어째서 자발적으로 공익을 추구하는 활동은 오직 공짜 노동으로만 진행되어야 하는가? 환경, 생명, 인권의 가치를 짓밟아가면서까지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대하면서, 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는 엄격한 금전적 순수성을 요구하는가?  설령 봉사의 무보수성을 인정하더라도, 기획봉사단 사업이 순수한 봉사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서울시자원봉사센터는 작년에도 기획봉사단 사업을 진행했었는데, 언론보도는 물론 센터의 웹사이트와 블로그를 뒤져봐도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이 진행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대신 기업의 봉사활동으로 둔갑한 보도나 기업이 사업을 진행한 청년들에게 ‘활동 인증서’를 수여했다는 보도만을 찾아볼 수 있다. 청년들의 무급 공익활동을 기업의 실적으로 가로챈 것이다. 기업의 사회공헌 사업을 용역 외주로 진행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청년들의 무급 노동에 ‘봉사’라는 이름을 붙이며 합리화하려는 행태는 기만적이다.  싸다 싸! 대학생의 공짜노동 청년들의, 특히 대학생들의 무급노동은 이미 흔하다. 수많은 공공기관과 기업에서 운영하는 서포터즈, 기자단, 마케터, 봉사단 등의 대외활동은 대학생들의 무급노동을 당당히 요구하거나, 무급노동에 가까운 수준의 활동비만을 제공한다.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면 대개 블로그 포스팅 및 카드뉴스 등의 기사 작성, 홍보를 위한 영상 콘텐츠 제작, 기관 행사 및 박람회 부스 운영 등의 활동을 요구받게 된다. 활동을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은 절대 적지 않다. 대외활동을 위해 휴학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참여자가 얼마큼의 노동을 하든 간에, 그에 따른 보상은 노동량에 비해 턱없이 적은 활동비를 제외하면 봉사시간과 수료증, 기업의 제품 제공 정도가 전부다.  사업 운영진 입장에서는 적은 비용으로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으니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청년들은 왜 자발적으로 공짜노동을 하는가? 대학생들의 대외활동을 향한 관심도는 문자 그대로 ‘못 해서 안달’인 수준이다. 대기업이나 대형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서포터즈는 수십, 수백 대 일에 달하는 경쟁률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결국 청년, 대학생 입장에서도 득이 되니까 참여하는 것 아닌가?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상황인데 뭐가 문제인가? 청년들이 자원해서까지 공짜 노동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취업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두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다.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무원처럼 고소득, 고용 안정, 장기근속이 보장되는 영역은 ‘1차 노동시장’이라 불리며 노동시장의 상층을 이룬다. 반면에 중소기업 재직자나 기타 비정규직으로 이루어진 ‘2차 노동시장’은 소득이 낮고 고용상 지위가 불안정하며 재직 연수가 짧다는 특징을 갖는다. 문제는 두 영역 간의 격차는 매우 큰데 노동시장 간 이동성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시장 진입을 앞둔 청년들의 입장에서 ‘1차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목표가 된 이유다. 그러나 1차 노동시장 일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청년들은 극심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무급노동이라도 ‘사서 고생’해야 한다.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청년들에게 무급노동이 강제되고 있다.  일하다 죽었지만 산재는 아니다? 이는 청년만의, 또 급여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엔 이미 사회적 약자의 노동을 노동으로 보지 않는 인식이 가득하다. 최근 보도된 다음의 사례는 한국 사회의 편협한 노동 인식을 보여준다. 만 65세 이상 기초연금 수급자인 A씨는 2021년 경기도의 한 복지관을 통해 공공형 노인일자리 사업인 ‘공익형 지역사회 환경개선 봉사사업’에 참여했다. A씨는 이 사업에서 월 30시간 동안 지역 내 쓰레기 줍기 등의 활동을 한 뒤 약 27만 원을 받았다. 2022년 아파트 인근 도로 갓길에서 쓰레기를 줍던 A씨는 도로를 지나던 차량과 부딪쳤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곧 숨졌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A씨가 복지관 소속 근로자가 아니라며 산재보상을 거부했다. A씨의 유족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재판부는 A씨의 노동은 근로 제공이 아니라 “지역사회 공익증진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봉사활동”이라며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판결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재판부는 A씨가 한 “1일 3시간 범위 내 쓰레기 줍기 활동은 이윤 창출 등을 목적으로 한 근로제공으로 보기 어렵다”고 봤다. 왜 ‘1일 3시간 범위 내 쓰레기 줍기 활동’은 노동이 아닌가? 왜 ‘이윤 창출 등’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노동이 아닌가? 재판부는 이어 “근로 제공과 그 대가로서의 임금 지급을 목적으로 체결된 계약”이 아니라 노인복지법에 따른 “노인의 사회 참여 확대를 위한 공익사업의 일환”이라면서 “복지관으로부터 받은 1일 2만7000여원”도 “생계보조금 성격으로 국가 예산에서 지급된 것으로 근로 자체에 대한 대상적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하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노인들에게 쓰레기 줍기를 ‘시킨’ 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지급된 돈도 노동에 대한 급여가 아니라 생계보조금 성격으로 주어진 것이라 노동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노동이 아니라 공익사업이므로, 급여가 아니라 생계보조금이므로 문제없는 것 아니냐고? 노동을 공익사업이라고, 노동에 대한 대가를 생계보조금이라고 말장난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노동과 봉사를 가르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재판부는 이윤 창출이 아닌 노인의 사회 참여 확대가 ‘목적’이기 때문에, 주어진 활동비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닌 생계보조금 ‘성격’이기 때문에 노동이 아닌 봉사라고 판단했다. 노동자성을 수행한 노동과 급여의 ‘목적’과 ‘성격’으로 판단하는 것은 난센스다. 대법원이 복수의 판례를 통해 세운 노동자성 판단 기준으로는 종속노동성 요소, 독립사업자성 요소, 보수의 근로대가성 요소가 꼽힌다.*** 사업 참여 노인은 복지관 등의 사업기관과 사업참여계약서를 작성한다. 이에 따라 정해진 기간, 보수, 장소, 업무내용, 업무규칙, 복무규정, 인사규정에 맞추어 업무를 수행한다(종속노동성 요소). 참여 노인은 타인을 고용할 수 없고, 사업기관이 제공한 비품과 원자재만을 사용해야 한다(독립사업자성 요소).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2020년에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전체 참여 노인의 74.2%가 급여를 목적으로 노인일자리사업에 참여한다(보수의 근로대가성 요소). 사법부의 과거 판례를 기준으로 살펴봐도 A씨의 업무를 봉사가 아닌 노동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목적과 성격을 바탕으로 억지스럽게 봉사와 노동을 구분 짓는 사법부의 판결은 약자의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돈을 안 줘도 되는 사람은 없다 대학생 기획봉사단 사업과 노인 공공일자리 사업은 업무의 종류도, 수행 주체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똑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노동을 노동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현대사 속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던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권리를 크게 신장시켰다. 물론 오늘날에도 노동권을 둘러싼 문제는 산적해 있지만, 전반적인 여건이 상당히 개선되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노동권의 보장은 필연적으로 사용자의 책임(누군가는 이를 ‘비용’이라 오역한다)을 강화한다. 사회의 인권의식이 부족해 제대로 묻지 못했던 ‘당연한’ 책임이 떠오르자, 책임의 주체들은 이를 회피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가장 쉬운 해법은 자신이 사용하는 노동자들이 사실 노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아니니 노동권을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다. 돈도 안 줘도 되고, 안전도 신경 안 써도 되고, 근로시간이든 휴식이든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학생이나 노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으로부터 먼 곳에 있는 자들의 노동은 언제나 부정당해왔다. 여성의 무급 가사·돌봄노동은 ‘집안 사정’이라서, 장애인의 저임금 노동은 ‘복지’라서, 고등학생의 저소득 노동은 ‘현장실습’이라서, 이주노동자의 차등적 최저임금은 ‘인구위기’라서 어쩔 수 없다며 노동 무시를 정당화해왔다. 기만적 수사를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차별이 드러난다. 특정한 ‘존재’라는 이유로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차별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모두의 노동이 지닌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하며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지금 바뀌지 않는다면 당신의 친구도, 당신의 가족도, 그리고 당신도 언제든지 차별받는 자의 위치에 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권혜자·이혜연의 분석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대기업 정규직 초임 평균은 305만 원인 반면, 중소기업 비정규직 초임 평균은 138만 원으로 그 격차가 매우 컸다(권혜자·이혜연, <대기업집단 및 중견기업의 임금 프리미엄>, 《노동정책연구》, 19(1), 2019.).   또한 전병유 외의 분석에 따르면 2004~2006년에는 중소기업 근로자의 3.5%가 대기업으로 이직했으나 2013~2015년에는 이 수치가 2.2%로 줄어든다. 이는 노동시장 간 이동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전병유·황인도·박광용,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정책대응 : 해외사례 및 시사점>, 한국은행, 2018.).  ** 한국고용정보원의 자료에 기반한 조귀동의 분석을 보면 1차 노동시장 일자리의 대부분을 점유하는 서울 4년제 대학 졸업자 상위 30%의 소득이 2014년을 기점으로 되려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동일 일자리의, 특히 1차 노동시장의 임금이 감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결국 일자리의 수 자체가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조귀동, 《세습 중산층 사회》, 생각의힘, 2020.)    *** 종속노동성은 특정 사용자에게 업무에 관한 지휘명령을 받아 업무를 진행하는지, 독립사업자성은 업무가 자영업자적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보수의 근로대가성은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한 것인지를 따지는 기준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법무법인 지평의 노동법 뉴스레터를 참고.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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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을 하면서 행복할 수 있다 [처음 읽는 공동자원체제]
"임금 노동 외에 돈을 버는 방법이 없을까?" 성찰과성장은 '노동시장 너머 새로운 대안 제시하기'라는 주제 아래 3편 연재를 통해, 기존 노동시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노동 구조를 상상해 보고자 한다. 이 연재는 전통적인 노동시장의 구조와 내재된 문제점을 진단하고, 지속 가능한 노동의 형태를 모색한다. 들어가며 우리는 대부분 직장인(임금 노동자)이 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1, 2편에서 얘기했다시피 직장인은 노동소외를 겪을 수 밖에 없다. 일을 하면서 행복을 얻는 직장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직장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이들은 퇴근 후에야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직장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는다. 그런데 일과 행복이 반드시 분리되어야 할까? 일하면서 동시에 행복할 수는 없는 걸까? 일을 하는 목적이 임금획득이 아니라면, 그리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일을 하면서 행복할 수 있다. ▲일과 행복이 반드시 분리되어야 할까? ⓒ성찰과성장 필자는 삶을 위해 일을 하면서 동시에 행복을 얻는 일이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구조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글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 있고, ‘일’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율성을 가지고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구조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공동자원체제와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commons)’ 공동자원체제(commons)란 사람들과 함께 공동으로 사용하는 ‘유•무형의 자원 또는 그 자원을 관리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 글에서는 ‘자원’보다는 ‘체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한 자원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이유는 그 자원이 특정 개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자연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 공동 자원이란? ⓒ성찰과성장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공동으로 만들어진 자원을 사유화, 즉 특정 개인 소유로 만들어버린다. 2편에서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으로 마을에서 공동으로 관리한 공용지를 개인 소유 토지로 만든 사례가 공동자원 사유화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가 특징이다. ⓒ성찰과성장 자본주의의 ‘공동자원을 사유화 해야한다’는 논리는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commons)’이라는 논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commons를 공유지라고 번역하는 것은 commons의 의미를 축소한다. commons라는 단어가 자원을 넘어서 이 자원을 구성원과 함께 관리하는 체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장훈교(2022)는 commons를 공동자원체제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대부분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용어에 익숙할 것이기 때문에 공유지의 비극을 설명할 때에는 공유지라고 번역하겠다) ▲공동 자원이 고갈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자 ⓒ성찰과성장 공유지의 비극은 캘리포니아 주립 샌타 바버라 대학의 교수 개릿 하딘이 1968년 발표한 논문의 제목이다. 논문의 내용을 간단히 알아보자. 여기 양을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목초지가 있는데 이 목초지는 너무 자주 사용하면 황폐화된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들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공동 자원 관리에 대해 합의를 하지 못한다. 개인이 우선시 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각 개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양들에게 최대한 많은 풀을 먹이는 것이 이익이기 때문에 목자는 목초지를 최대한 자주 사용하려고 할 것이며, 그 결과 목초지는 황폐화될 것이다. 하딘은 자원체제의 지속가능성을 파괴하는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공유지(commons)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한다(장훈교, 2022). 하딘은 공동자원을 사적 재산으로 만들거나(목초지를 각자 나눠가질 것), 중앙집중적인 관리를 해야한다(목초지를 중앙 국가가 관리)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하딘은 공유지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두 가지 제시했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주류)경제학계에서는 공유지의 ‘사적 자산화’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공유지(자원)는 어떻게 관리되어야 할까? ⓒ성찰과성장 한편 공유지의 가장 큰 역할은 바로 사회적 약자가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에 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는 공유지를 생산수단으로 삼고 살아간다. 따라서 공유지를 없애겠다는 하딘의 주장은 사회적 약자의 삶의 기틀을 무너뜨리겠다는 것과도 같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신기하게도 하딘이 우생학의 지지자였다는 사실이다(장훈교, 2022). 하딘은 “사회의 패배자는 유전학적으로 열등함과 연결되어 있고” 패배한 이들을 지원하는 복지정책은 미국사회의 유전 자본을 잠식한다고 주장했다. 하딘이 공유지를 없애려고 한 것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깔려있던 것은 아닐지 합리적 의심이 든다.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 논문은 많이 알려진만큼 사람들의 다양한 비판을 받았으며, 그 속에서 공동자원체제(commons, 이 문단부턴 공동자원체제로 번역하겠다)를 옹호하는 그룹들이 등장했다. 그 중 엘리너 오스트롬으로 대표되는 신제도경제학 그룹은 정부와 시장 외에 제3의 자원관리제도가 역사적으로 많은 곳에 존재했으며,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정부와 시장만큼이나 효율적이고 공평하며 견고한 자원관리제도”로 공동자원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그룹인 사회운동 진영에서는 공동자원체제를 단순히 공동자원을 넘어서 현대 자본주의에 의해 발생한 사회문제를 치유하고 사회 변화를 촉발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정치적 프로젝트로 여긴다. 이들에게 공동자원체제는 공동자원의 사유화(쉬운 예로 공기업의 민영화가 있다)를 막고 전통적인 국가의 관료적 해결이나 시장의 가격조절방식과 다른, 협력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양식을 의미한다. ▲공동자원체제는 허황된 꿈이 아니다. ⓒ성찰과성장 공동자원체제와 일의 관계 필자는 (굳이 선택을 하자면) 사회운동 시각에서 공동자원체제를 바라보고 있다. 즉, 자원을 넘어서 그 자원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체제이자 협력적•자율적인 활동양식으로서 공동자원체제를 본다. 그리고 ‘노동’을 공동자원체제에서 다룰 수 있는 자원으로 볼 것이다. ‘노동’도 개인이 독립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공동의 필요와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낸 무형 자원이기 때문이다. ▲노동도 하나의 자원이다. ⓒ성찰과성장 먼저 노동이 혼자가 아닌 함께 만들어졌다는 것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우리는 노동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혼자 습득하지 않는다. 학교, 학원 등에서 선생님의 강의(강의 내용도 선생님이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자료로 형성된다)를 통해 습득하거나, 책, 온라인에서 타인이 제공한 정보들을 토대로 습득한다. 학습 자료가 무료이든 유료이든, 사회가 제공한 정보를 통해 우리는 기술을 습득하고 다양한 노동을 할 수 있게 된다. 한편 노동은 ‘공동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무형의 자원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공동의 필요와 욕구’란 모두가 동일하게 갖고 있는 필요와 욕구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갖고 있는 다양한 필요와 욕구를 말한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소수가 원하는 것은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는다)는 공동의 필요와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동의 필요와 욕구는 한 사람의 노동으로 해소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고 싶은 욕구가 생겨서 KTX를 타기로 했다고 해보자. KTX를 타려면 우선 기찻길을 설치하는 사람, 기차를 만드는 사람, 기차를 관리하는 사람, 기차표를 판매하는 사람 또는 기차표 구입 어플을 개발하는 사람 등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노동을 개인의 것으로 생각하고 노동시장에서 각자 판매하는 것은 공동자원인 노동을 개인화하여 공동자원체제를 파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KTX가 운영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을 생각해보자 ⓒ성찰과성장 ‘노동’이 개인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독립 자원이 아니라 공동자원으로 정의된다면 우리는 노동의 분배를 민주적 논의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다시 직장인 생활로 돌아가보자. 생산수단이 없는 직장인은 먹고살기 위해 ‘노동시장’에서 임금을 기준으로 일을 선택하며, 하루에 8시간 이상 강제로 일한다. 그런데 만약 자원과 노동을 함께 관리하고 민주적으로 배분할 수 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서 직업적으로는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어 하고자 하는 노동을 하고 실생활에서 필요한 노동(돌봄 등)은 거주 지역의 공동체 안에서 민주적으로 논의해서 각자의 역할을 정해보는 것이다. 물론 협동조합과 지역 공동체에서의 노동 외에도 개인의 자율성을 위한 시간도 보장받아야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소유해야 하는 생산수단이 없어도,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자율성을 존중받기 때문에 노동소외가 발생할 확률이 줄어든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일을 하면서 행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산수단 소유만이 정답은 아니다. ⓒ성찰과성장 공동자원체제가 노동시장을 대체할 만큼 거대해지기 위해서는 협동조합, 지역공동체, 지방정부, 국가, 국제사회 간 연계방안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장훈교(2022)는 공동자원생활체제를 위한 참여계획의회를 제시하였다. 참여계획의회는 국가, 지방, 지역 단위에서 국가, 시민사회, 시장 영역의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로 전체 사회의 필요 충족 우선순위와 그에 따른 투자 및 시민의 참여과정 등을 공동으로 디자인 하는 곳이다. 여기에서 공동자원, 상품 및 서비스, 공공자원(국가가 중앙에서 관리하는 것을 공공자원,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관리하는 것을 공동자원이라고 한다) 간 관계와 균형지점에 대한 타협이 이루어진다.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바라며 윤석열 대통령이 그렇게 강조하듯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 비록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주의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어찌되었든 헌법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질서로 명시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권리이자 의무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하루 8시간 이상을 사무실이라는 공간에 갇혀서, 감시 속에서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하며 지내야 한다. 출퇴근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자유시간은 4시간 정도밖에 확보되지 않는다. 그리고 일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민주적 논의를 거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요 공급의 법칙과 임금 수준, 본인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자유와 민주는 법전 속 단어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의 24시간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성찰과성장 1편을 통해 노동소외를 당연하게 경험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고, 2편에서는 노동시장이 아닌 방법으로도 각자의 노동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3편에서 공동자원체제를 소개하여 노동소외 없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해 얘기하고자 했다. 장훈교(2019)는 공동자원체제를 노동시장을 통한 노동분배시스템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활용하였다. 자본가-노동자라는 계급은 노동시장을 통해 형성되는 것인데, 이에 대항하겠다는 것은 결국 산업혁명 이후에 형성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겠다는 의미이다. 노동을 공동자원으로 보고 민주적 논의를 통해 분배하겠다는 시각이, 아직은 현실성 없는 이야기로 보일 것이다. 실현된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필자는 이 개념이 불안정한 일자리가 확대되고 불평등이 증가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새로운 지향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노동시장에 연연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좀 더 행복한 삶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공동자원체제에 관심이 있다면 장훈교(2019, 2022) 책을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기고 글에 넣은 내용은 아주 일부이다. 『공동자원체제: Commons 2018-21 연구노트』, 『일을 되찾자: 좋은 시간을 위한 공동자원체계의 시각』 참고문헌 장훈교, 『공동자원체제: Commons 2018-21 연구노트』, BOOKK, 2022 장훈교, 『일을 되찾자: 좋은 시간을 위한 공동자원체계의 시각』, 나름북스, 2019
사회적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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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생에너지업계 그리고 국가보조금 - 어차피 자식도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거니깐.
** 제가 이 텍스트를 '조세정의'로 분류한 것은, 기후를 위해 무엇을 해야한다, 라는 아이디어라기보단, 관련한 정책이 대부분 세금으로부터 조달된 보조금으로 운영되는데도 이렇다, 는 문제의식에서입니다. I. 결국 내 세금인데 이렇게 쓰이는 건 싫다 저는 신재생에너지업계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습니다. 미국 회사 특유의 프로페셔널함을 상상하던 제게 회사의 분위기는 다소 충격이었습니다. 매출의 99%가 국가보조금임에도 불구하고, '국고니깐 더 깐깐히 써야지'가 아니고, '언제 끊길지 모르니깐 한 푼이라도 더 땡기자'는 마음으로 다들 지나친 연봉을 받고 오후 4시 퇴근의 라이프를 누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가정을 꾸린 마당에 정의를 논할 수 있냐,고 한다면 저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청년수당 국가장학 등 국가에서 주는 혜택엔 해당사항이 되어본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국가보조금에 대해 '어련히 잘 쓰이겠지', '다 필요한 분들이 받아서 잘 쓰고 계시겠지'라고 막연히 믿(고싶)었습니다. 그렇게 순수했던 한 청년의 기대가 어제 산 스마트폰에 아직 강화스티커도 붙이지 못한 채 콘크리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순간이었습니다. 3여년이 채 안되는 기간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저는 현금성 정책, 그 중에서도 업계에 보조금을 주는 정책에 대해 관심의 주파수를 높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년만에 다시 신재생에너지 업계에 발을 들입니다. 확실히 10년 전보다는 기후 위기에 대해 시민의 관심도가 높아졌고, 정책적 논의도 활발합니다. 저는 기후 이슈를 개개인의 단위에서 저는 일회용품을 더 쓴다고 너는 비윤리적이야, 라고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보단 텀블러를 든 분들이 훌륭하다고 봅니다. 텀블러는 마음만 먹으면 당장 지금부터라도 시작할 수 있죠. 개인의 행동양식은 이렇게 간단히 적은 비용으로도 '의지'로 바꿔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 단위로 가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적은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닐 뿐더러 짧은 시간 내에 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냉정하고 치밀한 계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하게 계량할 수 없어도, 계량해보기 위한 치열한 시도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숫자가 그나마 서로의 입장차를 좁히기 유용한 수단이니깐요. 이 계량은 자금 조달을 하는 단계와, 자금이 쓰이는 단계에서 각각 진행되어야 합니다만은, 저는 우선적으로 자금 조달 단계에서 지금이 최선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국고보조금이 더 많이 쓰이면 쓰일수록 뒷단의 편익에 대한 논의도 더욱 첨예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II. 계산을 해봅시다 저는 최근까지 투자업계에서 근무했습니다. 코로나와 초저금리라는 초유의 사태를 몸소 경험하며 사모펀드 환매 대란, 부동산 자금 경색, 전세 대란, 건설사 파산이라든가 부정 IPO(상장) 등의 사례를 실전으로 겪어냈죠. 이 과정에서 제가 배운 건, 1.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내기 위해서는, '돈'이라는 매개로 풀어내는 게 확률적으로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가장 높은 접근법이라는 씁쓸하지만 직시해야하는 현실, 2. 아무나에게 '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을 주지 않고,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되는' 사람(기업)을 초대해야 망해도 사회적 비용이 높지 않다는 점, 3. 나랏돈은 굳이 이미 자본이 충분한 자에게 충분히 지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HUG 보증이 있으면 금융기관에서는 아무리 똑똑한 사람을 채용해두더라도 다른 조건에 대한 검토를 다소 부실하게 하고 (부실 사업장이든 뭐든 HUG가 처리해주겠지~) 투자를 진행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보조금이라 함은, 불특정 다수라는 즉 여러분이나 제가 낸 세금을 국회의원 및 공무원이 편성해 분배되는 형식입니다. 솔직히 지급 과정상 시민이 간섭할 여지는 제로에 수렴합니다. 물론 하나하나의 과정에 대한 깐깐한 검토와 감사 방식도 유효하지만, 애당초에 적게 지급되는 것으로 시선을 바꿔볼 수 있지도 않을까요? 어차피 자본이 있고 이윤을 전제로 하는 주체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것은 기본조차도 누릴 수 없는 이들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전자의 정책을 위해서는 현금성 보조금 지급보다 경쟁에 대한 조정이라든가 세금 감면 등으로도 충분한 혜택을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신재생에너지 관련 정책이 핫 이슈가 된 배경엔 시장 조성보다 보조금 지급이 우선적으로 진행되고, 보조금 지급 방식이 사후에 효율성에 대한 측정 없이 진행되어온 것 때문도 높다고 생각합니다.  신재생에너지도 '업계'입니다. 까페를 창업할 때와 대단히 다른 논리가 적용될 이유는 없습니다. 은행에서도 대출을 받고, 자영업자 보조금을 구청에서 받는다고 가정합시다. 하지만 그 어떤 자영업자도, 보조금 딱 그만큼을 목표로 창업하지 않습니다. 이를 토대로 "훨씬 큰" 수익을 창출할 것이라 기대될 때 리스크를 쓰는 것이죠. 그 리스크의 일부를 국가가 같이 지는 것이구요. 신재생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뒷단의 그 모든 이야기는 차치하고 우선 맨 앞단에서, 직접적인 현금성의 국가보조금은 줄이면서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감당하게 하는 자금조달은 무엇인가, 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현재 이미 시행되고 있는 직접적 보조금 외의 각종 정책에 대해서 분석해보고, '대출성'과 '투자성'으로 나누고, '세금 감면' 측면과 '현금 지급' 측면으로 나누어 살피고자 합니다. 돈은 될 업계입니다만 돈이 별로 모이지 않는 이유 국가보조금이 적어진다면 그만큼 민간에서 투자자금을 모아야 합니다. 가장 처음 들어야 할 생각은, "국가보조금이 적어지면 여기 왜 투자해?"겠죠. 부침은 있다고 해도 세계는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는 만큼 '돈'도 이 곳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관련한 기술은 파고 들어가다보면 AI, 반도체, 배터리 등 지금 핫한 그 모든 것들이 연관되어 있죠. 한국에서 많이 더딜 뿐 금융업에서 Green fund, Climate fund 등 기후와 관련한 펀드는 펀드 하나에서 750억 달러를 유치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과거에 하나금융그룹에서 1,900억원, 최근에 이지스자산운용에서 500억원을 모은 정도 외엔 기후나 신재생에너지 관련한 큰 행보는 보이지 않아 아쉬운 바입니다. 국민연금도 해외 최고 운용사들에는 수조원의 '녹색' 펀드에 투자 중이지만 막상 국내 금융기관에는 투자할 전문 운용사도 마땅치 않고 투자처도 모호한 상태입니다. 이런 자금들이 더욱 풍부해진다면 당연히 국고보조금의 필요성은 더 줄어들겠지요! 따라서 현재 국내외 민간에서 조달하고 있는 각종 그린 펀드 관련한 현황을 알아보고, 한국에서 유난히 부진한 배경에 대해서 각종 자료를 비롯해 업계 사람들의 인터뷰를 청취해나갈 계획입니다. 특히 최근 한국에서 원자력을 강력히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그 정책 자체를 옳고 그르다라고 하는 것 이전에 세계적인 글로벌 운용사들이 만든 펀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원자력 발전 기술이 포함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보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런 펀드에는 세계 최대 국부펀드들이 투자하고 있기에 기준이 아주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국민연금을 비롯해 각종 유력 기관투자가들의 그린펀드 투자 기준과 각 그린펀드의 상세한 투자 기준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른 업계가 돈을 버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데 시너지를 못내는 이유 한국의 전력소비량은 571.93TWh로서 2020년 기준 세계 7위 (출처: https://tips.energy.or.kr/statistics/statistics_view0903.do)로서, 1인당 전력소비량은 2019년 기준 아이슬란드, 미국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s://www.index.go.kr/unify/idx-info.do?idxCd=4291) 이 소비량은 가정보다는 산업 부문의 전력 사용으로 기인하였고, 오히려 가정은 전력 사용량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적은 편이라고 합니다.이러한 점은 우리가 '전기를 아껴쓰자'는 방식으로 에너지 정책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기업의 경제 집중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논의는 우선 차치하고, 현상만을 볼 때 2021년 기준 100대 기업의 경제기여액이 명목 GDP의 60%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 중에서 1위인 삼성전자가 160조원을 기록해 대한민국 GDP의 7.8%을 차지했습니다. (출처: https://m.khan.co.kr/economy/industry-trade/article/202207200806001/amp) 이는 전력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같은 기간 삼성전자의 전력 소비량이 26.95TWh로 가장 많았습니다. 다만 2위에서는 경제 기여도는 현대자동차가 2위를 기록한데 비해 전력소비는 SK하이닉스가 2위(23.35TWh), LG디스플레이가 3위(15.37TWh)를 보였는데요, 이 또한 한국의 가장 유력한 수출종목으로 생각하는 반도체 생산이 전력소비가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업들도 잠재적인 신재생에너지 자금조달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다소 막연하지만 혹시나 이러한 시너지를 창출해낼 제도나 움직임은 없는지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것입니다. III. 결론 다소 중언부언되고 결론이 모호해보이는 이슈 제기입니다만, 기후 관련해 신재생에너지가 단순히 국고보조금을 타먹는 수준에선 탈피해야 합니다. 지금의 아이돌 비즈니스, 반도체 산업처럼 하나의 큰 장이 될 수 있고, 그렇다면 훨씬 막대한 민간 자금이 유입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가지 정책 중, 자금 조달이라는 직관적 측면에서 신재생에너지 업계가 더욱 효율적이고 '똑똑한' 분야로 나아가길 바라는 바입니다.  제가 놓치고 있거나 더 알아보면 좋겠다는 점 그 무엇이든 환영입니다!
조세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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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길’이 아닌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
'길'에서 '집'으로, 아니 다시 '거리'로 50년생, 남성 김수호님(가명. 이하 김 씨). 그는 집이 없었다. 거리를 전전하다가 한 고시원에 터를 잡았다. 오랜 거리 생활 끝에 구한 거처라 맘이 놓였다. 하지만 자꾸 복통이 시달리던 그는 대장암 초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암이라는 생각에 앞으로의 일이 두려웠다. 해서 그 길로 고시원을 나왔다. 그렇게 다시 한동안 거리를 떠돌다가 어느 지인의 집으로 거처를 두었다. 그 지인 또한 형편이 좋지 않았고 월세를 살고 있었기에 주거비 부담이 되었다. 김 씨는 그에게 조금의 돈을 지불하고 방 하나를 얻었다. 그렇게 1평 남짓의 방을 주거로 삼아 수급 신청을 했는데 행정복지센터에서 지인과 김 씨를 동거인으로 접수하였다. 이를 뒤늦게 안 김 씨는 본인의 채무로 인해 지인이 피해를 볼까 서둘러 짐을 챙겨 나왔다. 대장암 환자인 김 씨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62년생, 남성 박민수님(가명. 이하 박 씨). 그는 어디든 본인이 몸을 뉘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했다. 사업에 실패한 후 노숙을 한지 해가 지나가니 어느 날은 아침에 일어났더니 구안와사(안면마비)가 왔다고 한다. 그렇게 마비증상은 오른손까지 타고 내려왔고 시간이 지나도 증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해서 쪽방이든 고시원이든 어디든 좋다고 했다. 그저 맘 놓고 쉴 수 있는 곳이라면 괜찮다고 했다. 휴대폰이 없던 그가 수급 신청을 할 때 필자의 휴대폰 번호를 빌려주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서 이따금씩 박 씨를 찾는 전화가 온다. LH에서 주거 실태조사를 나가겠다는 전화이다. 그가 살던 쪽방에 찾아가봤지만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 걸까. '주거' , 빈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상     나 한 몸 쉴 수 있는 곳 ‘집’을 찾으려 하지만 찾을 수 없는 힘든 여정을 지금 이 순간에도 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필자가 만난 이들도 그러했다. 그들이 거리로 흘러나오기까지 이유는 다양하지만 특별하지 않았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하는 그런 이유들이다. 그렇게 극한의 빈곤 상황에 내몰린 이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포기하는 것이 집이다. 그렇기에 주거는 빈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상이다.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누구에게나 있어야만 하는 것. 그것이 매우 열악하거나 그조차 없다는 사실은 그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위기의 상태에 놓였다는 의미다. 혹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그에게 있다고 한다. 온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결코 옳은 말도 아니다. 우리 사회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이를 글로 명시한 것이 헌법 제10조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10조는 국가의 목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명시했다. 최저빈곤선에서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최저수준의 주거비를 보조하는 수준인 현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사회는 어떻게 국민의 주거의 안정을 보장하고 있는가. 정부는 저소득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수요자 보조방식(주거급여, 보조금 지원 등)과 공급자 보조방식(공공임대주택 공급 등)을 통해 주택 정책을 추진해왔다. 이 모든 방식이 대상과 지원 범위를 확장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효과가 유효하지 못하다는 문제가 있다. 대표적으로 주거급여의 경우 급여 대상이 매년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주거급여 지급액도 증가하였다.(아래 표 참고)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024년 기준 중위소득의 48%의 가구가 주거급여 대상이며, 서울에 거주하는 1인 가구의 경우 34만 1천원이 최대로 지급된다. 하지만 이는 물가 상승에 따른 수준의 변동이며, 더욱이 빈곤 비즈니스의 형태로 쪽방과 고시원은 급여에 맞춰 임대료를 올리고 있다. 지금의 주거급여는 그저 거리에서 생활하지 않을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주거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정권에 따라 흔들리는 공공임대주택, 후퇴하는 공급물량 공공기관이 직접 주택을 공급하거나 주택공급이 확대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것은 보다 주거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공공임대주택은 지속적으로 공급되어 왔는데 2021년 국토교통부는 "10년 이상 장기 공공임대주택 재고가 2020년 말 기준 170만 가구를 기록해 재고율은 8% 수준으로 추산된다"며 "OECD 국가들 간 상이한 산정기준을 감안할 경우에도 임대주택 공급 수준이 상위권에 진입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했다. 이는 한국은 공공임대 재고율이 8.9%로 OECD 평균의 6.9%를 상회한다. 당시 38개국 중 8번째로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면밀히 들여다 보면 이또한 상당 수 부풀려져있다. 전세임대와 분양전환 아파트 등 민간이 소유하고 있거나, 일정시간이 지나면 민간 소유로 넘어갈 주택도 정부가 추산한 공공임대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한국도시연구소 분석 결과에 따르면 10년 임대(10년 후 분양전환)와 전세 임대를 빼면 2022년 기준 공공임대 주택 비율은 5.8%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정권이 바뀜에 따라 관련 공공임대 정책은 시대를 역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거·시민단체 모임인 ‘내놔라 공공임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연평균 18.8% 삭감되었고 2024년 예산에서는 6조원으로 축소됐다. 반면 분양주택·민간임대지원(융자) 예산은 2023년 3조 2000억원, 2024년 4조 3000억원으로 연평균 40.4% 늘어났다. 그나마도 지난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급한 공공주택이 당초 목표 대비 11.7%에 그친 것으로 밝혀지면서 공공임대주택 공급 부족 문제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실제로 서울 내 매입임대주택에 입주하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대기 기간만 1년 이상 걸린다. 취약계층에게 주거는 당장에 닥친 문제인데 정권의 방침에 따라 이들의 주거안정은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밀려간다. 계속해서 늘어가는 취약거처 거주자, 총선에서 주거권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고시원·판잣집·쪽방 등 집이 아닌 취약거처에 사는 사람들은 최근 5년간 7만 3,625가구가 늘었다. 이는 국토교통부의 2022년 ‘주택 이외의 거처 주거실태조사’ 에 따른 것으로 서울에만 9만 2,890가구이고 전국으로 44만 3,126가구가 주택이 아닌 곳에서 거주하고 있다. 주거는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가 이번 총선에서 ‘주거권’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비적정 거주지로 밀려나가는 이들이 늘어나는데 이에 대한 대책이 요원한 지금, 모두의 주거권을 보장하는 사회로 만들어가기 위한 첫발로서의 투표가 절실한 때다. 22대 국회의원 선거일인 2024년 4월 10일, 주거안정을 당연히 요구하고 그것이 지켜지는 사회로의 변곡점이 되기를 마음 속 깊이 희망한다.  
주거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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