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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실패 이야기] 청소년인권 관점의 교사가 되지 못했어요
청소년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십대 시절, 어린 건 이용해볼만한 소재였다. 나이주의와 청소년혐오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서도 그걸 이용하려고 했으니 어찌 보면 영악한 편이었다. 열일곱 살이니까, 뒤로 물러서도 괜찮겠지. 이럴 땐 하고 싶은 걸 내세워도 괜찮겠지. 좀 시무룩해지면 내 말 들어주겠지? 아방하게 굴면 뭐라고 못하겠지. 적어도 스물 셋 넘은 어른들은 아이에게 약해서 난 좀 더 무책임할 수 있었다. 나이주의를 공부한 반골 십대가 자기 편하자고 나이주의를 역이용한 셈이었다. 정작 청소년 인권 활동가 동료들 사이에선 누굴 어리다고 특별대우 해주는 건 없었다. 걔넨 나이주의에 찬성하지 않았고, 열넷이고 스물셋이고 우린 모두 대등한 "야"였으니까. 그땐 또 소심하고 여성적인 내 특징을 내세워 뒤로 숨었던 적 많았다. 그래도 어린 게 무기일 순 없었으니 조금 덜 바보인 척 했다. 그러더니 엉겁결에 20대가 되었다. 또 덜컥 2년 전엔 중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어버렸다. 십대를 '아이'라거나 계도의 대상으로 여기지 못한 형편 없는 교사 말이다. 지금도 친구들과 부모님, 스승들, 그리고 청소년이 연령에 따라서 달리 보이지 않는다. 뭔가 다르다면, 경험의 축적이 다를 것이다. 그들은 나처럼 능수능란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를 못하겠지만 단순 경험의 차이일 뿐. 다 같은 사람인지라. 결국 나이가 아니라 상황과 경험이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당위적으로는 '아이'나 '어른'의 딱지를 떼고 서로 사람 취급하는 게 존중일 것이다. 난 열아홉 살 때까지도 서너 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린 걸로 묻어가겠다는 게으른 심보였다. 이런 날 너무 매정하고 대등하게 대해준 어느 연장자 덕분에, 무안을 당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후론 예전처럼 나이빨로 설렁설렁 지낼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제대로 존중받았고, 온전한 사람으로서 엄격하게 평가당했다. 자기가 미숙하다는 통념을 지닌 십대들이 교사인 나에게 어리광을 부릴 때가 잦았다. 그들은 사람으로 구실하는 대신 청소년의 역할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상대역인 내가 더 큰 '어른'으로 굴어줘야 짝이 맞아보였다. 상황이 우리의 관계를 그렇게 형성해온 것이다. '애들'은 스스로 지혜로울 기회를 얻지 못하고, 돌봄을 받기만 하며 미래를 유예하는 위치에 머물게 되어 있었다. 뻔히 있는 길을 편하게 갈 수 없는 난 당시에도 사잇길을 찾아서 고생을 자처했다. 이들이 '교사-아이'의 역할에 의문을 품는 과정에 동행해보자고. 갇힌 틀에서 나오는 건 그들 자신의 의무이겠지만, 교사인 내가 망치질 정도는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배움을 위한 타인의 역할은 조력과 촉진일 것이라며. 난 그럴싸한 교사로서 이렇게나 실격이었다. 넓고 무거운 등으로 필요한 권위를 짊어질 수도 있었는데, 그건 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난 교사 대 학생이 아닌 새로운 관계양식을 함께 맺어나가는 가르침만을 지향하고 있었다. 예전에 만난 연장자가 그랬던 것처럼, 대등하게 존중하는 게 어떤 건지 보여주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이 가르침은 어느 정도 실패했다. 관계는 상호 맺는 건데 나 혼자 선구자처럼 새로운 관계양식을 보여준다는 건 일방적이고 모순적이었으니까. 더구나 학교는 교사의 권위와 학생의 수동성으로 굴러가기에 그로부터 벗어나는 건 근본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상대에게 의아함만 선사한 듯했고, 그들은 틀을 깨고자 하는 의지와 당위가 없었다. 모범생같은 두 눈, 교사의 말을 들으면 좋은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과 행동들... 그런 반응은 어느 정도 무력감을 불러일으켰다. 내 권위와 명령을 기다리는 어느 청소년들의 태도 앞에서 슬기로운 제3의 제안같은 걸 떠올리지 못했다. 내가 조각해온 존중의 형태를 낙관적으로 확산하고 싶었지만 교사로 지낸 기간 동안 희망을 다소 접었다. 그래도 존중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그대로다. 단지 나의 영향력은 좁은 곳에서 내밀하게 이뤄질 때야 온전할 수 있다고 다시금 확인했을 뿐이다. 이것은 조용하지만 강단 있는 내 뜻이, 여러 곳에서 자꾸만 접히는 것을 또 목격했던 실패 이야기다. 그래도 난...난, 다시 한번 내밀하고 찌릿한 소통을 찾으려고 한다. 내일도 나이가 많고 적은 이들의 눈을 보고 대화를 청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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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정] 교육-노동시장 넘나들기: 선취업 후진학자의 생애경로와 딜레마
*본 게시물은 <연구원정 부트캠프>에 참여 중인 대원님의 연구과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1. 들어가며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매일의 일상 속 작고 사소해보이는 선택은 물론이고, 진학이나 직업 선택, 결혼과 같은 커다란 결정을 내리면서 살아가죠. 만일 여러분이 열여섯살이 되던 해 내렸던 한번의 선택이 향후 당신의 삶의 경로를 크게 좌우한다면 어떨까요? 더 나아가 그 선택에 예상치 못한 차별과 배제가 내재되어 있다면 말이죠. 여기, 열여섯의 나이에 특성화고등학교로 진학을 선택했던 청년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경제적 어려움에 대응하는 전략으로 충분히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진학을 선택했지만, 특성화고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선택지는 좁고 얕기만 합니다. 특성화고 학생들은 교육 체계 안에서 ‘일반적인’ 교육과정과 분리돼 배제와 소외를 경험할 뿐 아니라, 코로나 19의 여파로 무색해져버린 현장실습과 취업난, 진학난이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특성화고는 학생 개인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교육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 좋은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도록 지원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고등학교*를 일컫습니다. 그러나 공고한 학력주의 사회 속, 특성화고는 단순 고등학교라는 일반적 특성이 아니라, 특성화고 출신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정체성을 덧씌우는 조건으로 작동합니다. 사회 진출 이후에도, 이 청년들에게 따라붙는 이름표가 있습니다. 바로 ‘고졸’입니다. ‘대학에 못 간 사람’, ‘일반계 고등학교에 갈 내신 실력에 못 미쳐 특성화고를 선택한 사람’이라는 편견도 함께 따라오곤 하죠. 결국 청년들은 일터에서 ‘20대 초반에 대학 졸업장을 가져야만 나머지 인생이 좌우되는 현실’, ‘대학 학력이 없으면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사회에서 피부로 느끼며, (울며 겨자먹기로, 또는 전략적으로) 대학 진학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선취업 후진학자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선취업 후진학자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생애경로의 다양성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고졸 청년은 마치 성공하면 안 된다는 듯이 ‘고졸 성공신화’라는 이름으로 호명되곤 합니다. 대학 재학생들에게는 '왜 대학에 갔느냐'고 묻지 않으면서, 대한 비진학 청년과 선취업 후진학자에게는 ‘왜 (그동안) 대학에 안 갔느냐’고 묻습니다. 선취업 후진학 제도의 일환으로 추진된 평생교육단과대 사업에 대해, 이화여대, 동국대에서는 ‘학위장사’라며 학생들이 반대 시위를 벌였던 적도 있죠. 에브리타임(대학교 커뮤니티)에서는 ‘야간대’, ‘미융대(미래융합대)’ 애들과 우리(주간대)는 입갤(대학 입학 점수)부터가 다르다며 댓글마다 분리정책(Apartheid)이 펼쳐지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여집니다. 선취업 후진학 ‘제도’는 있지만, 여전히 이 제도 속에서 살아가기(go through)를 선택한 ‘사람’들의 ‘삶’은 녹록치 않습니다. 대학교 역시 아직은 비전통적 학습자에 대해 그리 친화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취업 후진학 전형을 운영하는 대학은 여전히 소수이고, 전공도, 교수진도 매우 한정적입니다. '가장 보통의 대학'을 찾아 대학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대학에서는 다른 형태의 차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대학 비진학 청년일 때에는 대학 진학 청년들에 비해 소수라는 이유로, 선취업 후진학자가 되어서는 일반적인 대학생에 비해 소수라는 이유로 관심과 담론에서 배제되어 왔던 것이죠.  그래서 제가 하고자 하는 연구는 선취업 후진학 제도에 대한 정책 타당성 연구가 아니라, 선취업 후진학자의 삶에 대한 경험적 연구입니다. 교육과 노동시장이라는 두 지대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이 청년들의 삶에는 어떤 딜레마(모순)가 놓여있을까요. 이 딜레마는 결코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네 교육이 처한 사회적 딜레마 그 자체라는 사실을 주지하면서 말이죠. * 본 연구에서 '선취업 후진학자'란 a. 특성화고등학교 또는 마이스터고등학교를 졸업자로서 b. 산업체에서 3년 이상 근무한 자가c. 지원할 수 있는 대학 특별전형인 '선취업 후진학 전형', '재직자 전형'을 통해 후학습을 경험한 성인학습자로 정의합니다.[문제 깊이읽기](Youtube) 씨리얼. 특성화고 학생들이 정부에 따질 수밖에 없는 이유. 2020. 11. 28. https://www.youtube.com/watch?... (Youtube) 씨리얼. 25년차 특성화고 선생님이 말하는 특성화고의 실체. 2020. 12. 11. https://www.youtube.com/watch?...(Aritcle) [특성화고, 교육과 노동의 중간 지대에서-3]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2021.11.07. https://chunchu.yonsei.ac.kr/n...(Aritcle) 갈 길을 잃은 특성화 고졸 취업생들. 2019.12.18. https://www.kueherald.co.kr/ne... [가설 들여다보기] 2. 연구 목적 그리하여, 제가 하고자 하는 연구는 비전통적 성인학습자인 선취업 후진학자의 삶과 학습경험을 이해함으로써, 생애경로로서 선취업 후진학의 의미와 모순점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생애경로’가 사회구조와 개인의 선택 속에서 교차적으로 만들어지는 시간의 연속체이듯이, 학습생애경로 역시 학습자 개개인의 자율적 선택과 학습자가 놓여있는 거시적 맥락(교육정책과 제도, 학습문화 및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 등) 간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됩니다. 선취업 후진학자의 학습경험과 학습경로는 개인적 학습의 의미를 넘어서서, 체계화, 조직화된 교육정책과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취업 후진학자가 고등학교에서, 일터에서, 나아가 부푼 꿈을 가득 안고 진학한 대학에서 마주한  이중구속적 상황이 있다면, 그건 곧 사회구조와 교육제도 안에 담긴 모순율일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연구는 특성화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선취업하고, 재직자 전형을 경유하여 고등교육체제로 이행(후진학)한 성인을 연구참여자로 삼으며, 이들의 학습경험에 관한 질적연구를 수행할 계획입니다. 본 연구가 질적연구를 통해 선취업 후진학자의 학습경로와 학습경험이라는 미시적 단위를 포착한다고 해서, 이것이 교육 체제와 선취업 후진학 제도라는 구조적·거시적 단위를 도외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선취업 후진학자가 살아온 생애경로와 지닌 학습경험의 틀이 제도적 맥락 위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필요에 의한 선취업 후진학 제도의 도입은 선취업 후진학이라는 학습생애경로를 배태했고, 이는 개인에게 사회문화적으로 장려 혹은 배제되어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먼저 선취업 후진학 경로를 살아내는 선취업 후진학자의 학습경험과 맥락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교육 제도와 학습자의 경험이 교차되는 지점에서의 ‘사회적 모순’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3. 연구 문제 첫째, 선취업 후진학자는 ‘어떻게’, 그리고 ‘왜’ 선취업 후진학이라는 학습경로에 진입하게 되는가?  이 질문은 선취업 후진학자가 자신의 학습생애경로를 선택하게 된 계기와 맥락, 그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삶의 특정한 목적을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① 특성화고등학교로의 이행단계 ② 선취업으로의 이행단계 ③ 후진학으로의 이행단계의 맥락을 시계열적으로 구분하여 묻고자 합니다. 이 질문의 해석과정에서 연구자는 연구참여자가 선취업 후진학이라는 학습경로를 어떻게 의미화하고, 어떠한 목적을 위해 이행하고 있는가에 주목합니다.  둘째, 선취업 후진학자들이 마주하는 학습경로상의 모순과 학습경험의 딜레마는 무엇인가? 선취업 후진학 경로 안에서 경험한 학습경험의 특징과 어려움을 구조화합니다.  셋째, 선취업 후진학자들의 학습경험과 학습경로 속에 내재한 모순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결론적으로 선취업 후진학자의 학습경험이 작동하고 있는 구조성, ‘선취업 후진학’ 구조의 의미와 모순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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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의 경험과 기회는 과연 평등할까?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을 중심으로
1. 시작하며  활동가로서의 시작 : 어떤 부끄러움에서  안녕하세요. 더 나은 교육과 사회를 위한 연구활동가를 꿈꾸는 박소영입니다. 저는 교육이란 한 사람의 지속가능한 삶을 일구는 중요한 요소이자 나아가 한 사회의 성숙과 발전에 기여하는 필수적인 영역이라는 믿음 아래 오랜 시간 교육 분야에 뜻을 두어 온 청년입니다.   교육이란 영역을 경유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던 저는, 교육이란 무엇이며 이  사회에서 교육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 오래 고민해왔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지금의 제가 되기까지 교육의 과정에서 얻은 것들이 아주 많은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교육이 지닌 힘이 소수의 운 좋은 아이들의 것이 아닌, 다수의 보편적인 아이들의 일이 되기를 바라왔습니다.   그렇게 학부생 시절, 교육과 사회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실천적인 활동을 통해 당시의 제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에 다가갔던 저는 나름 제 자신이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를 성실히 고민하는 청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를 부끄럽게 만든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경험의 양극화”란 단어를 마주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청소년기 제주라는 섬에서 자라오며 자신이 겪어왔던, 그렇지만 홀로 분투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과 기회의 격차 문제를 장학 사업으로 해결해보고자 하는 존경하는 이의 도전, <비상한 상상>*으로부터 처음 접하게 된 이 단어는 제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평생을 수도권에서 살아온 제 삶에서는 지역에 의한 경험과 기회의 격차라는 문제가 한 번도 ‘문제’였던 적이 없었거든요. 마음만 먹으면 지하철로 1-2시간 이내로 서울에 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문화 생활, 교육이나 강연은 제게 언제나 ‘접근 가능한’ 기회였습니다. ‘물리적으로 어려워서’ 이 기회들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던 존재들도 있었겠구나, 뒤늦게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청소년기의 경험이 이후의 삶과 스스로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지니는지 알고 있기에 이 문제에 더욱 마음이 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제가 주목하지 못했던 불평등이 존재했음에 부끄러웠고, 이 문제를 장학사업과 연결하여 경험의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내고자하는 이들에게 존경심마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후 지역격차라는 문제를 접하게 될 때면, 미디어 등에서는 직접적으로 주목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경험의 격차에 대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지방 출신 친구들을 만나면 혹시 친구의 학창시절에도 엇비슷한 마음과 경험이 있었는지 조심스레 묻곤 했고, 일련의 이야기를 듣고 모아보니 이는 지방 출신 친구들이 얼마간 공통적으로 느끼던 문제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 문제는 분명 해결되어야 하는 사회적 문제이나 아직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지 못해 개인이 감당하고 감내해온 문제라는 것을 여실히 느꼈습니다.  실질적인 문제의 해결이 필요하다는 마음에 이르자 저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비상한 상상>이 하나의 유의미한 시작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직 세상이 주목하지 못한 문제를 우리의 시각에서 정의하고 풀어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저는 용기를 내어 해당 단체의 문을 두드려 감사하게도 2022년 하반기부터 함께 홛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비상한 상상  : 지방 청소년의 경험의 양극화 및 기회의 격차 해소를 위한 수도권 꿈여행 장학 프로젝트. 시즌 1~3동안 총 13명의 장학생을 배출했고, 35곳 정도의 파트너 기관/단체와 함께 했다. “자신의 세계가 부서지고 깨어지는 경험이 한 개인의 성장과 도약에 얼마나 큰 자산이 되는지를, 그러나 지방의 청소년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는 현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뭐라도 해보려고 모인 마음들에 힘입어” 앞으로도 더 많은 일들을 도모해보고자 한다. (비상한상상 호스트 및 디렉터, 양소희 님 SNS 中) 📜 스물 다섯, 인생 첫 장학생을 선발하기로 했다 : 비상한상상의 설립 배경 및 활동 과정은 설립자이자 디렉터인 양소희님이 쓰신 해당 글을 참조하시면 더욱 선명히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연구활동가의 시작 : 문제를 문제로만 두지 않는 우리의 움직임에 힘을 더하기 위해 “꿈을 향한 도전에는 경계가 없어야 하니까.”. 이 믿음 아래, <비상한상상>은 우리의 문제를 풀기 위해 다양한 고민과 시도와 도전을 이어나갔습니다. 제주의 청소년들에게 어떤 경험을 선물할 수 있을까, 어떤 어른과의 만남과 대화를 주선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필요로 할까. 또 어떤 청소년에게 이 기회가 가닿아야 할까. 많은 것들을 고민하며 꿈여행을 설계하고, 장학생을 선발하고, 그들과 꿈여행을 다녀오고, 다시 지역사회에 돌아와 청소년들이 그들만의 문제의식을 실현해내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이 문제의식에 응답하는 청소년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슬퍼지곤 했습니다. 자신이 어느 곳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는 경험과 기회에 대한 접근성이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니. 교육에 희망을 거는 사람으로서 지역의 문제가 현실로 와닿은 순간이었습니다. 이내 저는 이렇게 많은 청소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이 문제가 사실인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사이의 경험과 기회의 차이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나 결과물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경험과 기회라는 단어가 주는 추상성과 거대함 때문일까 싶어 범위를 좁혀 검색했을 땐, 지역격차에만 집중했거나 교육문제에 집중하는 등 여러 하위요소들에 대한 제한적인 연구만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경험과 기회 그 자체가 얼마나, 어떻게 차이나는지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결과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경험의 양극화’라는 단어가 새로웠던 것처럼, 아마 이것이 미처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한 번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동료들은 그럼 우리가 해보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이 겪는 경험과 기회의 격차의 실태가 어떠한지 우리가 알아보자고 말입니다. 실제적으로 아이디어가 나오자 너무 중요하고 흥미로운 작업이 되겠다며 모두가 한 마음으로 반응했습니다.  비수도권 10대 청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경험과 기회는 무엇이며, 경험과 기회의 격차라는 문제를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측정할 수 있을지 열린 아이디어를 던지며 워크숍마저 뚝딱 진행하였습니다.  우리의 문제의식이 더 많은 공감과 동의를 얻기 위해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의 논의점을 잘 준비하고 마련한다면, 그렇게 우리의 문제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면, 분명 사회적으로 이 문제에 주목할  수 있는 중요한 시작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연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두려워 하면서도 문제에 대한 진심 하나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를 문제로만 두지 않는 것. 이를 같이 해결해보자고 얘기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 활동의 가장 큰 매력과 힘을 다시금 느끼며 활동에 연구를 더해 우리의 이야기를 보다 탄탄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비상한상상> 시즌 3에서는 리서치팀을 꾸려 이 문제에 집중해보자 이야기하였고, 과분하게도 팀을 리드하는 자리를 맡아 차근차근 팀의 과업과 역할을 정리해나갔습니다. 그렇게 활동 속에서 연구를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2. 기존의 연구와 그 한계청소년의 삶 속의 이야기를 향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음에도 팀의 리드 자리까지 맡겠다 용기 낼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지니고 있던 ‘연구’라는 일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여기’의 어떠한 문제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알고 모르는가를 명확히 답하는 그 과정의 엄밀성과 이를 밝혀냄으로써 펼쳐지는 추가적인 탐구와 대안의 가능성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저로 하여금 연구라는 단어에 반응하게 만들었던 듯 합니다.  <비상한상상>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연구 활동의 과업을 수행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면, 연구 꿈나무로서 저는 이 작업의 학술적 토대를 고민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안고 <연구원정>의 프로젝트 내에서 이 문제를 추가적으로 디깅해보자는 나름의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역격차 그리고 경험과 기회의 격차, 그 교차점에 서서 비수도권 지역 청소년의 경험과 기회 문제. 이 문제는 여러가지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저는 일차적으로 ‘지역 격차’와 ‘경험과 기회’라는 것의 교차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에 저는 우선 ‘지역격차’, 그리고 ‘경험과 기회의 격차’를 정의하는 일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지역격차 : 조명래(2013)에 따르면, 지역격차란 지역불균형으로도 표현되며 집단 간, 계층 간, 부문 간 사회적 기회, 자원, 권력이 불공평하게 배분된 상태를 지칭하는 사회적 불평등이 지역 간에 골고루 분포하지 못해 현격한 차이가 발생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지역격차는 사회적 불평등을 포함하여 지역이란 공간범주를 기준으로 나타나는 포괄적인 차이 혹은 불균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역격차가 문제가 되는 이유로, 지역간 기회, 자원, 권력의 불균등 분포가 구성원에게 ‘불필요하고 부당하게’ 삶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일을 겪게 하기 때문이라고 짚어 냅니다.       지역을 이유로 삶의 기회를  불필요하고 부당하게 경험하는 사회적 불평등. 이 정의를 알고 나니 그러한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 청소년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고, 청소년들의 삶에서 지역격차는 어떠한 양상으로 일어날까 더욱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음 스텝으로 경험과 기회라는 것을 규정하려고 했는데… 문제는 이 단어들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거대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발화하고 다니던 ‘경험’과 ‘기회’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예상치 못하게, 너무 이른 순간부터 난관에 봉착한 느낌으로 적잖이 당황하고 며칠, 아니 몇 주간 고민스러웠지만, 이내 방법을 찾았습니다. 제겐 함께 고민할 동료들이 있었거든요.  "개개인마다 다양한 뜻으로 소화하고 정의할 수 있을 경험과 기회를 하나의 완결된 의미로 파악하긴 어렵더라도, 경험과 기회의 요소를 우리가 정리해볼 수 있진 않을까?" 이에 저희는 청소년들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겨질 몇 가지 경험들을 떠올려 이를 범주화 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온 카테고리는 문화자본, 사회자본, 교육기회, 진로 체험 기회였습니다. 물론 이것들이 청소년들의 삶 속 모든 경험과 기회를 포괄하진 못할 것입니다. 아주 작게는 대중교통 이용 경험, 크게는 의료 경험까지. 경험과 기회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 하니까요.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당장 청소년의 삶에서 주목해보고 싶은, 또 주목할 수 있는 경험과 기회를 크게 4가지로 잡아보았습니다. 이 중의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에 대한 간략한 개념은 아래와 같습니다.  문화자본 : 문화 자본은 학자들에 의해 다소 엄격하게 사용되었지만, 각 개인들이 사회의 높은 수준의 문화를 후천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면 그들은 문화 자본을 소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자본 : 사회자본이란 개념은 다차원적이고 복합적 개념이나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사회 안에서 형성되는 인간 네트워크의 집합적 가치의 총합이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김상준(2004)에 따르면, 사회자본은 보다 포괄적인 사회 관계 속에서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연결망과 집단 소속이 당사자에게 주는 다양한 사회적 기회 자원을 총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용어들로 구체화 해볼 수 있는 청소년의 경험과 기회는 왜 중요할까요? 청소년기에 한 사람이 마주하는 경험과 기회는 그의 성장과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진로에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들여다보자면, 청소년기의 ‘경험’은 대학 입시 수시 전형 중 학생부종합전형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청소년기의 경험과 기회가 한 사람의 성장, 나아가 진학, 진로, 취업, 그리고 이후의 삶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학술적인 논의 외에도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이 지금의 여러분이 되기까지 중요했던 경험 한 두 가지 정도는 떠올리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과 기회가 한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에 의해 불평등하게 배치되는 것을 문제로 여긴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교육학은 왜 이런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교육 분야를 배우고 발 딛고 서있는 제게 들었던 또 다른 의문입니다. 제 연구가 또 주목하고 있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교육격차는, ‘학교 환경의 차이, 지역 환경의 차이, 사교육을 받는 정도의 차이, 학부모 지원의 차이, 학업성취의 차이 등 교육과 관련된 여러 형태의 차이’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이를 주된 연구 주제로 삼는 교육사회학이라는 분과 내 다양한 연구 논문들은 주로 학업성취 결과 분석을 위주로 교육격차를 확인하고 접근해왔습니다.  교육사회학 영역에서 교육평등은 교육 기회, 교육 과정, 교육 결과의 세 가지 차원에 대해 논의되지만 현행 연구들은 학업성취라는 교육의 결과 측면에서 교육격차를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측정 및 비교 가능한 학업성취도의 특성 때문일 수도, 학업성취가 한 사람의 교육성취, 나아가 직업 지위와 이후의 삶에서의 소득수준 등 다양한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실증적인 연구 분석 결과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청소년들이 교육기회와 교육과정에서 경험하는 차이를 드러내고 규명하는 연구는 아직 부족한 듯 합니다. 우리의 연구가 현행 연구에서 아직 부족한 지점을 직접 포착하며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3. 연구의 구성 그래서 저와 제 동료들는 다음과 같은 연구질문을 세웠습니다.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이 겪는 경험과 기회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격차가, 어느 정도로 존재하는가?” 이제까지 교육격차 연구에서 이루어졌던 ‘교육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의 차이’를 넘어 ‘교육기회’의 차이와 ‘교육이 이루어지는 조건과 과정’에서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실제 청소년들의 삶에서 경험과 기회가 어떠한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의 경험이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지,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보다 주목하고자 한 연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세상에 없던 청소년들의 경험 실태조사를 기획하게 됩니다. 바로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의 경험과 기회의 격차 탐구 실태조사를 말이죠. 서베이 기법을 활용하여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각 100명의 청소년들의 일상적 경험과 기회를 파악하고자 하였습니다. 앞서 구체화한 지역에 따른 청소년들의 경험과 기회를 파악할 수 있는 4가지 하위 분야에 대한 문항을 설계하여 배포하기로 하였습니다. 각 100개의 응답은 일반화하기에는 부족한 표본이지만,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청소년들의 응답을 수집해보고자 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실태조사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경험과 기회가 실제 사람들의 삶에서 드러났는지 실질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한 질적 연구 또한 동시에 준비하였습니다. 심층 인터뷰 기법을 통해 제주에서 서울로 상경한 청년 12인을 대상으로 인터뷰 하여 상경 과정을 역추적해보고자 하였습니다. 비수도권 청소년으로서의 성장해온 과정에서 어떤 유형의 부재와 결핍, 격차를 인지하거나 감각하였는지 파악하고자 하였습니다. 전문 연구자 그룹이 아니었기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족함을 메워보고자 질적 연구를 준비하며 팀원들과 심층 인터뷰에 도움을 주는 책을 찾아 읽으며 공부하던 날도 스쳐지나가곤 하네요. 4. 연구 결과 연구활동가의 특혜 : 나의 문제의식을 탐구해 볼 현장을 만날 수 있다는 것 활동과 연구의 시너지를 기대하며 시작한 활동은, 제게 정말 이 연구를 수행해 볼 기회를 선물로 안겨주었습니다. <아름다운재단>의 '변화의 시나리오' 지원 사업 선정 결과, 실제로 이 연구를 직접 수행해볼 기회와 자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감사하게도 이 연구는 연구를 수행하고 결과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지원해줄테니 마음껏 상상하고 시도하라는 디렉터님의 이야기가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어요.  연구 설계 : 3달이면 하나의 연구를 작게나마 시작해볼 수 있다고 어떻게 설계했냐구요? 2023년 10월 한 달간 팀원들과 열심히 머리를 맞대어 연구의 큰 얼개를 짜고, 구체적인 문항과 질문을 상상하고 설계하며 설문지와 질문지를 만들었습니다. “연구자의 기발한 아이디어 만큼이나 값진 것이 연구할만한 좋은 현장을 만난 것인데, 좋은 기회를 갖게 되셔서 기대가 됩니다.”라는 코멘트로 응원과 격려를 전해주시던 <연구원정> 동료 선생님의 말씀처럼 상상하고 구상했던 연구를 실제적으로 수행해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연구 수행을 앞둔 시기에 더욱 더 명확하게 다가왔습니다. 어떤 결과가 모일까, 우리의 고민이 현실일까- 하는 궁금증과 설렘을 안고 11월부터 한 달 간 설문지를 배포하였고, 눈덩이 표집방법으로 질적 연구를 위한 인터뷰이를 찾고 인터뷰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성실한 홍보와 인터뷰의 시간을 보낸 뒤 12월, 연구 수행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기대에 약간 못 미쳐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열띤 홍보의 결과로 얻은 소중한 131건의 서울/제주 청소년들의 응답과 12인의 인터뷰. 우리 손으로 만들고 얻어낸 이 결과가 너무 소중했습니다. 그렇게 12월 한 달 간 팀원들과 이 데이터를 들여다보며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의 경험과 기회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것이 유의미한 결과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연구 결과 : 경험과 기회는 과연 평등했을까요? 과연 연구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우리의 예상보다 흥미로운 결과들이 많았습니다. 우선 양적연구 결과인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의 경험과 기회의 격차 실태조사에서는 서울과 제주 청소년들이 뚜렷하게 대조적인 응답을 보이는 문항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질적연구에서 인터뷰이들의 발화는 이를 뒷받침하곤 했습니다.  문항 범주별로 양적 연구의 대표적인 결과들을 소개하며, 관련된 질적연구의 응답이 있다면 덧붙이며 설명하겠습니다.  [문화자본]  이동의 한계에 따른 문화자본의 소유, 접근의 차이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생활을 통해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연결된다는 문항에서 서울 청소년들이 제주 청소년들에 비해 긍정적인 답변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관심 분야, 취미 생활등을 위한 다양한 정보의 접근성 차이가 컸습니다. 서울 청소년은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긍정 반응이 높았던 반면, 제주 청소년은 긍정 응답 비율이 현저히 낮았습니다.  - “저는 교육 뿐만 아니라 문화 생활도 꽤 크다고 생각 하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좋아하는 가수가 있었는데 이제 콘서트를 가고 싶은데 가려면 비행기 타고 이제 숙박까지 생각을 하니까 콘서트도 못 가고 막 이런 경험도 있었던 것 같아요.” (응답자 F) - “중학교 때인가 코엑스를 방문했었는데, 그런 큰 문화시설을 접하면서 서울이 되게, 서울에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아요.” (응답자 K) [교육기회 파트] 교외에서 관심있는 분야의 강연, 멘토링 등의 프로그램에 참여해본 청소년의 수는 제주-서울 비슷하나,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청소년의 수는 제주가 현저하게 높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1회 이상 경험해본 적 있는 청소년들이 존재함을 고려했을 때, 완전한 결여-단절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진학 혹은 취업 정보 파악에 관한 문항 답변은 확연히 상반된 결과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제주 청소년은 이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청소년의 비율이 72.8%이었지만, 서울 청소년은 단 33.3%였습니다. - “요즘 제가 대학 생활을 하다 보면 되게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학교에 와서 막 탐방을 하더라고요. 저한테 와서 막 인터뷰 해도 될까요? 이러면서 오기도 하고, 너무 예쁘다 생각하는데 한편 정말 저는 그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거든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 대학 탐방을 가나는 거를 생각도 못했었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까 이렇게 애들이 잠깐이나마 대학의 문화를 느끼고 또 그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학생들의 열정을 키우는 데 되게 도움이 많이 됐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 서울에서 지냈다면 아까 제가 관심있다고 말씀드렸던 그런 교육 불평등에 대한 생각이 지금처럼 강하지는 않았겠다.” (응답자 F) - “저는 연극 전공이었거든요. 그런 연극사들을 다 그냥 걔네들(수도권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동기들)은 다 배웠대요. 고등학교 때 그래서 그런 뭐 기본적인 연기 수업이라든지 그런 흐름들을 자연스럽게 그들은 익힐 수 있어서 저는 그게 조금 부러웠어요. 경험이 많았을테니까 아무래도 서울에 살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요?” (응답자 H) [진로 체험 기회] 서울과 제주 청소년 모두 관심 직업 분야에 대한 관심도와 다양성은 동일하지만, 실제로 관심 직업 분야 교육-체험-교류의 기회를 가졌는지 여부에서 제주-서울 청소년간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서울 청소년의 경우, 관심 진로분야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음에 해당하는 응답 비율이 25.9%인 반면, 제주 청소년은 43.3%로 두 배에 조금 못 미치게 높았습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서울 청소년의 경우 교육-체험-만남의 횟수가 상승하는 모양의 그래프였지만, 제주 청소년의 경우는 아예 없거나 많은 양상을 띄며 제주 내에서도 양극화 되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기회에 대한 주관적 인식 부분에서는 제주-서울 청소년의 인식이 눈에 띄게 다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 청소년은 75%가 넘는 비율로 기회가 없다고 느낀 반면, 서울 청소년의 경우 60%에 육박하는 수가 기회가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 “(시험을 준비하는데) 그거에 대해서 면담할 선배가 없다는 거. 그래서 이게 다르구나 이런 생각도 많이 들었고. 서울은 좀 다르구나를 더 본격적으로 느낀 건 저희 회사 와서도 이렇게 진로 관련된 고민을 나누는게 되게 활발한 느낌이에요.” (응답자 A) - “서울에서 이런저런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면 뭘 느낄 수 있냐면, 그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사람들과의 인맥이라고 해야 되나요? 그런 그 사람들과의 여러 가지 경험을 나눌 수 있고 사실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나중에 이제 사회에 진출을 하고 이러다보면 비슷한 분야 또는 다른 분야에 대한 이야기들을 굉장히 많이 들을 수 있어요.” (응답자 G) [사회자본] ‘현재 거주 지역에서의 기회의 부족과 외부 제약으로 인해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싶었던 적이 있는지’에 대한 응답 결과는 실태조사 전반을 통틀어 가장 뚜렷하게 패턴의 차이를 보였습니다. 제주 청소년의 경우 약 85%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서울 청소년의 경우 약 60%의 청소년이 아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지역에 대한 애정도를 묻는 질문의 경우, ‘애정이 있다’고 답한 청소년의 비율은 제주(76%)-서울(87%) 모두 높았으나, 앞으로도 현재 거주지에서 계속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응답은 완전히 반전되어 나타났습니다 .(제주 “아니다” 63.8%, 서울 “그렇다” 68.5%) - “저는 만약에 상경을 할 학생들이 있다면 이제 고3 학생들이나 이런 친구들 싹 다 모아놓고 교육을 하거나 멘토를 매칭해서 좀 도와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저는 그 모든 걸 혼자서 구글링하면서 찾았기 때문에. 제주도 출신으로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 꽤 있는데 그들의 경험이 공유가 되고 있지 않은 거에 대한 좀 안타까움이랄까. 다 리셋이 되는 것 같아요. 경험이 누적이 돼서 쌓이는 게 아니고 리셋. 다시 또 처음 시작되고. 이게 좀 비효율적인 것 같아서.” (응답자 G) - “(다시 제주로 돌아갈) 생각이 없지는 않아요. 나중에 이제 제가 정말 유명해져서 내가 어디에 있든 나한테 작업 의뢰하러 올 정도가 된다면 당연히 전 제주도 가서 살고 싶어요. 근데 이제 그게 아니라면은 이제 열심히 영업을 해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 살아야 되는 거고. 위치가 중요하지 않게 되면 제주도에 살게 될 것 같아요.” (응답자 C) 연구결과의 종합 :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발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반화하기엔 적은 수의 응답이지만, 지금 모인 자료들을 종합해보더라도 <비상한상상>이 주목하고 있던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 사이의 경험과 기회에 어느 정도의 차이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 청소년들이 서울 청소년에 비해 문화, 교육, 진로체험, 그리고 사회자본으로 설명될 수 있는 여러 경험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으며 특히나 경험과 기회의 정보나 접근성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기회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 부분이 확연히 차이 나는 점에서, 막스 베버가 계급을 나누는 인식으로 개인의 생활 기회(Life Chance) 정도에 따라 구분한 것을 비추어 볼 때 해당 응답은 접근성 제한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해볼 만 합니다.  이러한 경험과 기회의 불평등이 단기적으로는 진학에, 나아가 시장 위치의 차이를 어떻게 만들어낼지는 추가적인 분석 및 연구로 남겨둘만하다고 생각합니다.  5. 결론 지금까지 연구활동가로서 저와 제 동료들이 수행한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의 경험과 기회의 격차를 탐구해온 과정과 결과를 보여드렸습니다.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은 성장의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차이를 겪는지, 그 차이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지 탐구해보고자 했던 우리의 시도는 제주-서울 청소년 131인의 응답과 제주에서 자라 서울로 상경한 청년 12인의 이야기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의 예상처럼 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은 문화, 교육, 진로 체험, 그리고 사회자본 모두에서 수도권 청소년에 비해 경험 및 기회에 대한 정보의 양, 접근 기회의 차이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록 우리는 이 문제를 더욱 더 성실히 알리고 풀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지역에 의한 한 사람의 경험과 성장이 차이가 존재하며 개개인은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힘으로 돌파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경험과 기회의 불평등 문제를 오롯이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까요?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이따금 이 연구가 지닌 한계에 멈칫하곤 했습니다. 전문적인 연구자가 설계한 게 아닌 만큼 이 연구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연구 결과를 일반화할 만큼 많은 수의 표본을 모으지 못했으며, 추상적인 개념인 경험과 기회를 구체화 하는 과정에서도 어설픈 지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문항들 역시 해당 문항이 오롯하게 경험과 기회라는 변수만을 측정할 수 있도록 통제되지도 못했습니다. 연구는 보다 세심한 설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저 역시 많이 배울 수 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조금 더 앎이 풍부했더라면, 조금 더 능숙했더라면, 조금 더 섬세했더라면, 그리고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이 문제를 보다 잘 구성해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는, 그럼에도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내 청소년들의 경험과 기회의 격차를 가시화 하는 중요한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 연구는 지역격차 혹은 교육격차, 어쩌면 경험과 기회의 격차에 관심 있는 많은 분들에게 또 다른 연구의 시작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교육격차 그리고 교육불평등에 대한 관심을 지닌 저는 경험과 기회의 격차가 한 가정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더욱 궁금해졌고, 이러한 경험과 기회의 격차를 공공이, 그러니까 공교육이 해결할 수는 없을지 보다 많은 물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디 많은 분들에게 이 문제와 연구가 가닿아 더 많은 논의들이 활발히 생산되고 토론되길 바랍니다.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면, 이 문제에 고심하며 몰두했던 지난 시간들은 그 자체로 값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회 문제에 대한 진심과 이를 지지하고 응원해주었던 사람들의 선의와 열정에 힘입어 가능했던 이 연구가 앞으로도 더 발전되기를 바라며 마치고자 합니다.  운 좋게 팀과 단체가 활동한 내용을 대표로 정리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제 개인이 수행한 게 아닌, <비상한상상>이라는 반짝이는 단체가 함께 수행한 결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팀의 연구에 학술적 토대를 고민하고 싶다는 욕심이 과연 얼마나 충족되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개인적인 고민만으로는 결코 실현해낼 수 없는 결과를 함께 만들어준 <비상한상상>에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연구와 현장에서 더 나은 세상을 진심으로 바라는 세상의 모든 연구활동가를 응원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조명래(2013). 격차의 새로운 양상과 통합적 균형 발전. NGO연구  제 8권 제 2호. 한국 NGO 학회. 이정화(2014). 문화예술교육의 이해. 커뮤니케이션 북스. 강석(2016). 커뮤니케이션과 자본. 커뮤니케이션 북스. 김상준(2004). 부르디외, 콜만, 퍼트남의 사회적 자본 개념 비판. 한국 사회학. 38(6), 63-95. 박주호, 백종면(2019). 교육격차 실증연구의 체계적 분석. 한국교육문제연구, 37(1), 213-238.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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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수학...쥐어짜기 수학 교육의 한계
프랑스에 살면서 관찰하고 느꼈던 이웃의 모습을 떠 올려 본다. 아이들은 늘 공부보다 놀기에 바빴다. 동네에는 개구장이 아이들이 많았고, 노인들은 길에 서서 이웃들과 하루종일 수다를 떨었다. 직장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몰려다니며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며 떠들곤 했다. 출근했다고 한 잔, 점심먹고 한 잔, 달콤한 각설탕을 찍어 먹는 에스프레소는 그야말로 수다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각설탕이 나왔으니 각설하고….  프랑스는 수학 잘하기로 소문난 나라다. 지금까지 총 64명의 필즈상 수상자 중 프랑스인이 받은 메달은 총 14개다. 물론 숫자로만 따지면 미국이 21개로 당연히 제일 많다. 하지만 미국의 인구가 5배나 많으므로 (미국 3억3천만, 프랑스 6천7백만), 인구 대비로 따지면 프랑스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야말로 원탑이다. 수학이나 물리교과서에 나오는 프랑스 수학자의 이름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미스터리 같은 통계도 있다. 바로 수학영재를 뽑는 국제수학올림피아드의 수상자 명단이다. 여기서는 중국이 단연 원탑이다. 러시아와 미국도 강하다. 우리나라 역시 강하다. 우리나라는 2012, 2017, 2019년 참가자 전원이 금메달을 받은 나라로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의 수학 강국이다. (이쯤에서 미국의 올림피아드 메달이 아시아계 학생들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살짝).  그럼 뭐가 미스터리인가? 바로 프랑스다. 눈을 씻고 봐도 프랑스의 수학올림피아드 성적은 상위권에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이 금메달을 168개나 가져갔고, 미국이 137개, 그리고 1988년에나 되서야 참여하기 시작한 대한민국도 86개의 금메달이 있는데,  자그마치 1967년부터 참여해온 수학 원조의 국가, 프랑스의 금메달은 고작 26개에 지나지 않는다. 가히 OECD 최하위 수학 성적의 나라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통계인가. 이 두 개의 통계를 연관지어 뭘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애들 쥐어짜는 수학교육 방식이 고등학교때까지는 어찌 어찌 잘 작동하지만, 그 이후 학문의 세계에서는 안 통한다는 점만 얘기하고 싶다. 덧) 여러번 언급했지만 물리에 관해서도 비슷한 통계가 있다. 일본은 물리 올림피아드 노-메달 국가로 유명하다.  반면 우리는 물리 올림피아드 최상위 국가로, 수년째 올림피아드 금메달을 휩쓸고 있다. 노벨상 수상 실적은 정반대다.  잠정적인 결론: 애들 쥐어 짜지 말자. 고등학교때까지 놀게 내버려두고, 대학 들어 온 다음부터 쥐어짜자... 작성자: 박인규(서울시립대학교 물리학과)출처본 글은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에서 제작한 콘텐츠로,  ESC에서 운영 중인 과학기술인 커뮤니티 '숲사이(원문링크) '에 등록된 정보입니다.ESC: https://www.esckorea.org/숲사이: https://soopsci.com/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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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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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다. -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인권, 노동권, 정치기본권이 필요하다.
서울 S 초등학교 교사가 숨을 거둔 지 100일이 지났다. 학생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여겼던 1학년 담임이자 1년 차 신규교사였던 그는 여름방학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모든 자원이 집중된 부유한 도심지의 학교 안에서 고인의 고통을 덜어줄 지원체계가 전혀 없었던 것일까? 7월 18일 이후 부조리한 교육 현장을 바꾸지 못했음을 성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학교의 벽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벽은 개개인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애도의 공간이 되었다. 무수한 포스트잇을 마주한 채 눈물짓는 이들 옆에서 필자 또한 오랫동안 쌓아온 체념과 무기력증을 성찰했다.   그들은 거리에서 모였다가 검은 점으로 흩어졌고 또다시 움직여 커다란 검은 물결을 일으켰다. 고인이 온전히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힘겨운 고통에 다가가며,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고, 시민들과 함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무려 7명의 교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지난 10일, 경찰은 고인의 사망 경위 수사 과정에서 범죄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는 공식 발표를 했다.   고인의 죽음은 개인의 극단적 선택으로만 볼 수 없다. 이는 분명히 사회적 고통에서 비롯된, 사회적 타살이었다. 취약한 위치에 놓인 교사가 노동 현장에서 고립되었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일자리와 삶의 질이 양극화된 현실 속에서 노동은 소득의 유일한 수단이다. 직업 서열이 경제적 사회적 계급을 결정하고 불평등한 상호 관계 속에서 개인의 자존감과 더불어 삶의 존엄성이 수시로 침해받기가 쉽다. 동시에 개인의 풍부한 삶의 경험은 노동 현장에서 끊임없이 ‘성과 및 결과’로만 평가받는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에서 생존과 노동은 너무나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노동자가 사회적 안전망 및 돌봄의 공백 속에 위치할 때, 그가 겪는 소외와 고통은 정량적인 수치로만 납작하게 표시될 뿐이다. 동시에 정부와 국가는 이 고통을 개인의 책임에서 비롯된 특수한 사례로 여기려고만 한다. 게다가 개인이 노력을 통해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슈퍼맨’ 서사까지 더해지면 어느새 정부와 국가의 사회적 책임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해진다.   교사의 죽음을 초래한 원인에 대한 분석이 토론장 바깥으로 쉽게 밀려나 버렸다. 언론은 교사를 향한 무분별한 악성 민원과 아동학대 고발에만 초점을 맞춰 보도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교육부도 비도덕적인 학생과 양육자의 가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안을 급하게 추진했다. 학생과 양육자의 의무와 책임 강화를 명시한 법제도, 교사의 교권 강화라는 명목으로 학생 인권 침해를 조장하는 생활지도 고시안, 교권 관련 법률지원 및 치유 상담 지원 제도 등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 토론장 속에서 정작 학교 교육 당사자의 목소리는 소외되고 심지어 배제되고 있었다. 특히, 지난 8월 8일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안) 마련을 위한 포럼’과 8월 10일 ‘교권회복 및 보호를 위한 교육부-국가교육위원회 공동주최 토론회’에서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발제자와 청중의 입에서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과 악의적인 비난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 속에서 그 누구도 발언을 제지하지 않고 구성원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심지어 쉬는 시간에 발제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현장 교사를 교육부 직원이 물리적으로 제지하고 포럼장에서 끌고 나갔다.* 정부와 교육부는 학교현장 ‘교육’이 삶 대신 죽음을 양산하는 시스템이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교육 당사자인 학생 및 현장 노동자와 함께 원론적으로 고민하고 논의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 그로 인해 그들의 공론장은 비민주적이었으며 폭력적인 인권 침해가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논의를 되돌려 원점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양육자와 학생의 악성 민원을 양산하는 사회적 구조부터 성찰해야 한다. 개인에게 감당하지 못할 사회적 책임을 사회에게 묻기보다는, 다른 개인에게 더 큰 책임을 묻는 것으로 모든 갈등과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는 의도가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무한 경쟁 사회에서 개인은 오랜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 토론과 숙의를 힘겹게 여기기 쉽다. 외부적 개입이나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겪을 위험과 손해를 감당하는 것조차 극도로 꺼릴 수밖에 없다. 양육자도 교사도, 학생이 원하는 좋은 삶과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눌 여유를 전혀 갖지 못한다. 성적보다는 타인에게 존중받는 일, 더 나아가 교우관계, 학교 내의 다양한 소통에 신경을 쓸 여력조차 없다. 좋은 삶을 위한 연대보다는 나 자신만, 우리 가족만 잘살면 된다는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를 선택하는 것이 더 높은 지위와 소득을 획득하는데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민주국가 교육과정의 목표에서 교육은 가정, 경제, 문화적 배경과 관계없이 개인이 사회관계를 맺으며 일상적인 연대를 통해서 민주시민 역량을 체득하고 실천해나가는 현장이다. 하지만 교육 구성원들이 지향하고 바라는 ‘교육’의 모습은 너무나 양극화되어있다. 권력 위계로 기울어진 논의를 평등하게 바꾸려면, 더욱 다양한 위치성을 지닌 구성원들이 목소리를 촘촘하게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개인은 사회적 관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개인이 정부 및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면서 각자도생의 상황에 적응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사회적 연대를 통해 문제 해결하는 대신에 적극적 또는 극단적 자기 계발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여유를 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오로지 생존을 보장하는 물질적 기반(높은 성적, 학벌, 전문직, 부동산 획득 등)을 축적하는데 골몰할 수밖에 없다. 공교육은 개인의 성취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비 능력적 요인(가족 배경, 사회적 경제적 계급 등)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차별 기제를 은폐한다. 이는 사회 구성원 스스로 ‘사회적 존재’임을 부정하게 하며 불평등한 생산(노동) 관계에 침묵하게 만든다. 기존 체제 강화를 통한 소득 안정을 확보하고자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보장하는 것에만 매달리게 만든다.   먼저, 개인이 평생에 걸쳐 촘촘하게 겪는 ‘평가 집착적인’, ‘고부담’ 시험 문화에 대한 사회적인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혈연,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은 무한 경쟁 행위의 주체로 동원된 지 오래되었다. 차별과 불평등이 공기처럼 퍼진 한국 사회 안에서 ‘수능(대학입시) 제도’는 신분제적인 직업 위계를 결정지을 수 있는 공신력을 발휘한다. (실제 수능 날 오전에는 교통 체계를 비롯한 모든 일상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믿기 힘든 광경이 벌어진다.) 일 년에 한 번 치러지는 수능과 대입을 위해 가족의 배경과 자원이 장기간에 걸쳐 총동원되고, 경쟁 속에서 개인의 실패가 곧 가족의 불명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온갖 갈등과 사건, 폭력과 불평등에 연루되면서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교사도 존엄한 삶을 보장받는 것은 너무나 불가능하다. 1986년 1월 15일 새벽, 한 중학교 3학년 학생이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난 그 성적 순위라는 올가미에 들어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삶에 경멸을 느낀다’. 여성 청소년이 외친 이 말은 1989년 5월 28일에 결성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선언문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그리고 교사들은 학교 교육 현장의 민주화를 위한 일상적 연대와 역량 강화를 지향하였고, 학생과 양육자, 모든 노동자가 힘을 모아서 비폭력 저항으로 국가의 비인간적인 억압과 차별에 대한 치열하게 맞섰다.   경쟁은 능력주의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능력주의는 개인이 노력해 만들어 낸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재화(지위)를 보상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는 사회의 신념체계이다. 이 논리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 경쟁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시험/평가 절차의 공정함’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특히 경쟁의 공정성은 현재 사회구조와 체제를 정당화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요구된다. 이로 인해 더더욱 학생과 교육 노동자가 겪는 차별과 취약한 현실은 당사자의 목소리로 제대로 나오지 못한다. 게다가 계급 차별을 없애는 복지와 소득 재분배조차 공정하지 못하다고(역차별이라고) 여긴다. 이뿐만 아니라 인권 침해와 차별을 겪고 있는 당사자가 자신과 동료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품고 약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기점으로 불평등과 양극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재난 대응 시스템은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사람들은 소외 및 낙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신자유주의와 긴밀하게 결탁하여 대기업, 초국적(글로벌)기업, 플랫폼 기업 등이 코로나19라는 기후 재난을 이윤 축적의 기회로 전유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조력하였다. 비정규직, 간접고용, 특수고용 등의 고용 유연화를 통해서 말이다. 정부와 국가 또한 경제 성장이라는 명목하에 험난하고 위험한 노동 환경에 노동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차별에 침묵하며 노동을 착취했다. 동시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부정적인 편견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발언을 통해 구성원 간의 분열을 유도한다. 실제 현 정부는 고용 불안과 돌봄 공백에 있어 취약한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노골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동시에 돌봄, 복지, 의료, 교육, 교통, 에너지 등 공공서비스에 대한 민영화를 강행하고 있다.   교사 또한 능력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할 의지를 갖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학교는 교육 본연의 목적으로부터 소외되고 수단화되어, 혈연가족의 계급 세습을 위한 진학과 취업 기능에 충실할 뿐이다. 게다가 교육개혁을 외치는 윤석열 정부는 저출생과 학령기 인구 감소를 빌미로 한 교육예산 축소로 교원정원을 감축할 계획을 발표했다. 교원평가체제를 전환하여 승진·인사·임금과 연계한 직무성과급제로의 개편으로 불안정 교육노동과 교원구조조정을 본격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 감축은 지방교육자치 통제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지난 10일에 발표한 ‘2028년 대입제도 개편안’은 통합형, 융합형 수능 과목 체계 개편과 수능 심화 수학 개설, 고교 내신을 기존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바꾸고 상대평가를 병기하는 등의 큰 변화를 예고했다. 사교육 확대와 경쟁과 불평등을 심화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난 개혁(아닌 개악)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계와 현장 교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시행을 앞두고 학교 현장에 대혼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을 둘러싼 복잡하고 여러 단계의 논의가 소거된 채 정부는 ‘교권 회복과 공교육 정상화’요구를 ‘생활지도 고시안’ 발표로 입막음하려 했다. 이는 불평등한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교사의 (학생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권위 세우기 시도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고시안 예시를 들면 학생 소지품 압수, 문제행동 학생 교실 분리 등 학생 인권 침해를 교사의 ‘정당한 교육 행위’로 정당화하고 있다. 듣기와 상호소통의 책임이 간과된 권위와 권리인 ‘교육할 권리’와 ‘학습할 권리’를 보장하자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동료 시민인 학생과 양육자와의 연대를 외면하면서, 인권 침해적인 ‘낙인’을 발행할 권리를 당연하게 여길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교권’이란 용어에 차마 담기지 못한 중요한 생명의 존엄과 보편적 권리의 가치를 한없이 상상하고 염원할 수는 없을까?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한 학생과 양육자를 ‘능력’이 부족하다는 탓을 들어 제2의 ‘김용균’처럼 살아갈 가능성을 용인하는 일을 지속할 수 없다. 정부와 국가가 ‘기본적 시민권을 실현할 권리’와 더불어 ‘소득’, ‘노동권’, ‘정치기본권’을 보편적으로 보장하도록 투쟁하려면, 교사 스스로도 ‘교권’의 위계성과 특권을 해체해야 한다. 학교가 오로지 특권층이 전유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모두가 ‘실질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고 차별받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경험하는 시공간’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교사의 비통한 죽음은 불평등과 부정의, 그리고 정부와 국가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맥락 안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척박하고 위태로운 기반에서 독박 돌봄 노동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교사의 노동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논의에서 계속 멈춰있을 수 없다. 물질 만능주의, 능력주의, 개발(추출)주의, 생태 학살이 만연한 폭력적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을 꿈꾸는, 동료 노동자와 시민의 신념과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논의로 크게 확장되어야 할 때이다. (끝)   각주 *<학생인권조례가 일진회 구성 권리? 교육부 포럼 ‘황당’ 발제- [현장] “거짓말 마라 항의한 여교사, 교육부 직원들에게 끌려 나가>, 오마이뉴스,(2023.08.09.) ** 최덕현 (교육노동자 현장실천) ‘윤석열 정권의 교육개악, 어디로 향할 것인가’ (2023.10.27.) *** 희음 (멸종반란 한국), 이 토론문을 읽고 조언해준 말 (2023.10.26.)   참고문헌 1. 김진 (교육노동자 현장실천) ‘사회적 타살, 윤석열식 해법은 틀렸다!’ (2023.9.4.) 2. 이경숙(2020), <시험/평가체제 속 인간과 교육받을 권리>, 《능력주의와 불평등》, 교육공동체 벗, pp.34~62 3. 정용주(2020), <현수는 개인의 능력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능력주의와 불평등》, 교육공동체 벗, pp.63~92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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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넘어, 함께 배우는 통합교육
사진: Pixabay의 Ofoto Ray 웹툰작가 주호민 사건으로 빚어진 통합교육 논쟁 올해 뜨거운 여름, 7월 주호민 웹툰작가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아들의 학교폭력 사건과 이 사건에 이어 주호민 작가가 아들의 담당 교사인 특수교사를 아동학대 및 장애인복지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면서 사회적으로 뜨거운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여러 논란 중에서도 자폐 아동을 일반학교에서 분리해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기에 ‘통합교육’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통합교육(inclusive education)이란 장애를 가진 학생과 일반 학생이 한 반에서 함께 공부하도록 하는 교육체제를 말합니다. 전문가들은 자폐 아동이 돌발행동을 했다고 해서 특수학교로 격리하자고 주장하는 건 차별이라고 말합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은 교실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특수교육법이 보장하는 권리입니다. 또한 비장애인 학생도 통합교육을 통해 장애 인권 감수성을 배워 장애인을 이해하고 수용하여 함께 살아갈 방법을 알게 되기에 선진국에서는 모두 통합교육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통합학급을 운영하고 있는 학교에서 장애학생이 다른 학생을 상대로 도전행동(장애학생 본인 및 주변 사람의 심리, 신체, 건강에 현저한 위험을 주거나 학교생활을 현저하게 방해하는 행동)에 대해 무방비로 노출될 수 밖에 없는 교실의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이에 대한 특수교사의 교권과 다른 비장애학생의 학습권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통합교육의 실태는? 이러한 통합교육의 문제가 대두됨으로 인해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8월 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18개 학부모·교원·시민단체와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 사회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대부분 장애가 있는 학생 개인의 탓으로 돌리거나 특수교사 개인에게 시스템 부재의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있지만, 이는 명백하게 교육현장의 지원시스템의 문제다. 부족한 예산을 당장 편성해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만들고 통합교육에 필요한 교육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8월 10일 국회의원회관에서는 ‘발달장애 통합교육 현장갈등 중재에 관한 현장증언과 개선방안’ 긴급간담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간담회는 발달장애 통합교육의 정착을 위해 학교 현장에서 필요한 사안을 논의 하는 자리였습니다.  패널로 참석한 푸른솔중학교 이수현 교사는 "발달장애인 등 특수교육대상학생과 일반학생이 함께 하는 통합교육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수용하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수많은 장애학생이 이에 따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통합교육 현장의 가장 큰 문제로 부족한 특수교사 인력을 꼽았습니다. 통합학급에서 의미있는 수업과 학생 참여가 이뤄지려면 특수교육대상자의 수준·특성에 맞는 교사인력을 반드시 배치해야 하는데 현재 특수교사의 수 자체가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특수교육대상자의 활동지원사도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합니다. "부족한 활동지원사를 사회복무요원이나 자원봉사 인력으로 채우고 있으나 전문성·책임감이 없는 임시인력은 현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며 제대로 훈련된 지원인력을 모든 학급에 적어도 1명씩 의무 배치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특수교육대상자가 있는 통합반의 교사가 기초학력보조교사·특수교사와 협력수업을 할 수 있는 시스템도 열악하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전국특수교사노동조합은 특수교사 2,957명을 대상으로 ‘안전하고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위한 제도와 정책 제안’ 설문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설문조사 결과 특수교사들은 도전행동, 교육활동 침해로 폭행을 당하고도 별다른 지원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응답자의 88.8%는 도전행동으로 부상을 입었고, 부상을 입은 응답자의 96.5%가 치료비를 지원받지 못했으며, 75.6%는 도전행동을 중재하기 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통합교육이 실시 된지 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전반에 걸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특수교육법에 따르면 학생 4명당 담당교사 1명이 배치돼야 하는데, 지난 20년간 단 한 번도 80% 이상을 채워본 적이 없습니다. 더 많은 예산과 인력이 배정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예산과 인력의 투입 없이 통합교육의 책임을 특수교사의 개인 역량에만 맡기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통합교육의 모습은? 특수교육대상자가 일반학교에서 장애 유형과 정도에 따라 차별을 받지 않고 또래와 함께 개개인의 교육적 요구에 적합한 교육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통합교육이 아직 우리 교육계에서는 제대로 실현되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국은 특수교육 대상자의 70% 정도만 통합교육을 받고 있는 반면 선진국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대부분이 같은 교실에서 배우게 하는 통합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진국들의 통합교육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애인 천국’으로 불리는 캐나다는 특수교육대상자를 위한 팀이 별도로 운영됩니다. 아이와의 면담, 설문을 통해 학습, 심리, 정서, 사회성 등 각 분야에 걸쳐 종합적인 검사를 실시합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학생의 수준을 파악해 맞춤형 교육 과정을 만듭니다. 이에 대한 교육비용은 교육청에서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2016 미국 교육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특수교육 대상 장애 학생의 94.7%가 일반 학급에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일반 학급에서 장애 학생들이 별도의 특수교육을 받는 방식인 ‘인테그레이션’(Integration)과 교실 안에서 모든 학생이 개인 수준에 맞는 개별화 교육을 받는 방식인 ‘인클루젼’(Inclusion) 등 두 가지 모델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모델 중 조기의 통합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므로 장애학생들에게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프랑스는 장애아동들도 장애 정도에 맞춰 최대한 가능한 범위에서 비장애 아동과 함께 일반 학교에서 수업을 받도록 하는 ‘포용교육’을 목표로 합니다. 장애 학생이 일반 학교에 등록한 경우 학생들을 위한 개별 맞춤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장애인 학교생활 도우미가 교사를 도와 필기와 식사 등을 돕기도 합니다.  독일의 통합교육은 단순히 비장애 학생과 같은 공간에 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실 내 모든 학생이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모든 학생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수준별 학습과 맞춤형 교육 등 학생들의 다양한 교육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들이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학급 내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모든 학생들이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함께 논의하고 결정합니다. (참고: 장애학생 95%가 일반교 다니는 미국… 1대1 맞춤지원 캐나다            [차별 없는 그날까지] 장애아동 통합교육, 해외 사례에서 답을 찾자) 차별과 편견을 넘어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실을 꿈꾸며 인간의 차이는 저마다의 강점이 있고, 가치가 있기에 무능력이나 결핍이 아닌 개인의 고유한 다양성으로 인간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장애가 장애가 아닌 강점으로 존중받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우리의 교육현장에도 접목되어서 장애 학생들의 강점을 발견하고 성장시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장애인의 문제가 다만 가족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사회가 아닌 우리 사회와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임을 깨닫고,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차별과 편견을 넘어 다양성을 인정하는 우리의 교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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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공성이란?
1 교육 공공성이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에서는 최근의 용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공공성”이라는 말을 할 때엔 늘 평등이나 공정함이 침해받는 상황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말하기 때문이다. 주택, 의료, 금융, 기업, 정보 등 여러 단어 뒤에 ‘공공성’을 붙여 사용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공공성이 대체 뭘까? 교육 공공성은 사교육이 줄어들고 공교육에 의존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달성되는 것일까? 공공성, 공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적인 것, 개인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공과 사의 경계선이 어디인가에 대한 논의는 매우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유럽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사회를 공, 가정을 사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자국인 성인 남성만이 공의 주체이고 구성원이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공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유럽의 정치사는 공의 구성원을 넓혀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공은 공개적인 것, 사는 은밀한 것, 공개적이지 않은 것 - 주로 감정, 욕망 - 을 의미했다. 그래서 국가는 물론 가정 안에서도 공과 사가 공존하였는데, 대체로 사를 나쁜 것으로 여겼다. ‘공평무사’라던가 ‘멸사봉공’ 같은 단어가 그 어감을 잘 보여준다. ‘사’, 즉 개인적인 감정과 욕망이 그 상황에 적절하면 그 사는 옳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사는 틀린 것이다. 그 상황에 적절한 감정, 슬퍼할 일을 슬퍼하고 기뻐할 일을 기뻐하는 것, 이것은 사의 영역이지만 동시에 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유교에서 공과 사가 완전히 구분되는 공간이라는 건 없다. 인간은 매 시간, 매 공간에서 늘 공과 사의 영역을 함께 가져가며 사는 존재고, 모든 순간 속에서 각자의 몸을 통해 내가 어떤 감정과 욕망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그 감정과 욕망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이 문제의식은 개인의 윤리적 고민에서부터 시작해 사회적인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문제는 곧 사회의 문제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종종 들은 바 있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다. 나와 가정의 욕망, 감정, 기호가 내가 속한 사회를 넘어 이 우주의 문제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한국 지폐에 실린 두 인물도 이 문제와 관련이 깊다. 퇴계 이황은 사단칠정론을 통해 인간의 감정이 충분히 공적으로 윤리적일 수 있음을 논증한 사람이고 율곡 이이는 인심도심설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 충분히 공적으로 윤리적일 수 있음을 논증한 사람이다.) 2 자, 내가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공’과 ‘사’라는 개념이 그만큼 모호하고 정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개념을 명확히 설명/상상하는 게 어려울 때엔 일단 국어사전을 펴보는 게 좋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젼』에선 공공성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 아, 너무 소략하다! 옥스포드 사전에선 공(public)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1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보통사람과 관련이 있는 것 2 대중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일반적으로 정부에 의해 제공되는 것 3 정부와 관련이 있는 것.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 4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5 대체로 열려있는 것. 대중이 보거나 들을 수 있게 제공되는 것 6 많은 사람들이 보거나 존재할 수 있는 곳 이렇게 생각해보면 공공성이라는 것은 ‘국가/사회가 하는 일‘이나 ’국가/사회에서 하는 일‘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그 사회에서 보편적인 것’, ‘공익적인 것’,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공공성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주목을 하는 이유는 어떤 대상이 공공성의 속성을 훼손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 공공성에 대해서도 쉽게 이야기가 가능해졌다. 1 교육공공성에 관심을 갖는 첫번째 이유는 국가나 사회가 주축이 되는 교육, 즉 공교육 자체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을 다수가 공유할 수 없게 되었다, 즉 교육이라는 것 자체를 소수가 독점하게 되는 불공정한 상황이 되었다고 느낀다고 볼 수도 있다. 2 교육에 참여하는 과정, 입시나 성적으로 대표되는 교육의 결과, 그리고 교육 안에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과의 관계,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불공정하다고 느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교육의 공익, 보편, 균형, 공정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즉 교육의 공공성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3 20 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정치 철학자 중 한 명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에서 공(public)과 사(private)를 근대와 엮어서 설명하였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 하는 일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노동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과 관련이 있는 행동이다. 작업은 인간이 하는 일들 중에서 생명과는 관계가 없는 행동들을 말한다. 행위는 인간이 하는 일들 중에서 인간 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들을 말한다. 노동은 신체와 생명, 작업은 세속성(worldliness), 행위은 사람들(men)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고대 유럽에서는 국가가 곧 공이었고 공공영역이었고, 개인과 가정은 사적인 영역이었다. 정치는 공, 경제는 사로 쉽게 구분이 가능했다. 그런데 근데 이후에는 공과 사 사이에 사회(society)라는 것이 등장했다. 사회는 시장(market)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노동과 작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친다. 시장 안에서의 노동과 작업은 지시하는 사람, 혹은 정해진 규율에 순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시장 안에서 순응에 의해 행하는 노동과 작업을 행동(behavior)이라고 하는데, 근대에는 사람들과의 행위를 순응에 의한 행동이 대체했다고 설명한다. 시장에 의한 사회가 중시되면서 국가도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으로 변모해갔는데 사회의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악이 되어버린 국가는 자신의 살 길을 새롭게 찾아냈으니 그것이 바로 민족국가(nation-state)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학문도 이에 맞춰 변화했다. 정치학이 누렸던 지위를 경제학이 가져갔는데 경제학의 중요한 특징은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설명에 따르면 과학이란 인과관계를 추구하는 지적 활동이다. 사회 영역 전반에서 인과관계를 찾는 것이 근대의 사회과학이고, 보편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것들을 비정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근대 사회과학의 특징이라고 한나 아렌트는 설명한다. 즉 사회과학은 사람들의 순응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근대는 사회의 탄생으로 인해 공공영역이 쇠퇴한 시대다. 비록 소수의 인정받은 사람(자국인 자유민 성인 남성)만이 참여하긴 했지만 토론과 숙의가 가능했던 정치가 비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었던 시대다. 또 공리주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이 추구하는 욕망의 총합이 공익으로 불리게 된 시대다. 개개인의 정치적, 윤리적 행동을 효율 극대화, 이익 극대화로 보게 된 시대다. 이것이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근대이고, 『인간의 조건』 전반부의 내용이다. (참고로 한나 아렌트는 수학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통계학으로 대표되는 사회학, 경제학에 대한 반감이 아렌트의 저작 여기저기에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리고 이런 아렌트의 생각을 발전시킨 사람이 위르겐 하버마스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과 정치에 주목했다면, 하버마스는 아렌트의 생각을 일부 수정하면서 공론과 소통에 주목하였다.) 물론 아렌트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공공성에 대한 정의와 그 실현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교육 공공성의 실현에 대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첫째, 교육의 공공성이란 교육의 주체를 민간에만 맡겨 놓지 않는 것, 교육의 공익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 교육 참여의 기회와 그 방식에 대해 고민 하는 것, 교육 그리고 교육 참여, 교육의 결과에 있어서 누군가가 배제되고 있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다. 둘째, 교육과 시장 경제 논리를 일정 정도 분리해야 한다. 교육을 시장 혹은 효율성에서 분리시키고 확장성과 공정성, 공익성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공교육-사교육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셋째, 교육의 공익성을 단순히 다수가 혜택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육의 공익성은 각자가 교육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 참여한다면 또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넷째, 교육에 있어서 순응을 강조해오지 않았는지에 대해 반성하고 교육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임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 다섯째, 인간은 이익이나 효율만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여섯째, 우리 모두가 잠시 효율이나 이익을 내려놓고, 짧건 길건 각자의 의견을 표현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오은영 박사는 종종 양육의 목표란 자녀의 독립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교육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목표는 훌륭한 학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훌륭한 선생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을 받은 모두가 그리고 교육에 참여하는 모두가 다음 세대를 위한 훌륭한 선생이 되는 것 그것이 교육에 목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교육 문제에 대한 토론은 물론 교육에 참여 하는 것 교육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그리고 교육 그 자체 있어서 깊은 고민을 가지고 참여하는 공론의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에 대해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길고 지루하면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것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참고문헌 한나 아렌트, 이진우 번역,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19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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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아니라는 이유로, 교육과 기회가 제한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까?
* 이 글은 총 4회에 걸쳐 지역 간 교육 불평등에 대한 경험과 기회의 측정을 위한 현상과 논의, 그리고 학계의 연구들에 대해 살펴보는 '교육문제 이슈 탐사 리포트' 시리즈의 1편입니다.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이 겪는 경험과 기회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격차가, 어느 정도로 존재하는가?” “애들이 저를 공부 못하는 애로 보는데, 그래서 나 의사하고 싶어 이러면 의외인 것같이 ‘너가?’ (예전에 의사가 꿈일 때 친구들한테 얘기해 본 거야?) [고개를 끄덕끄덕] (근데 친구들 반응이 그랬어?) [끄덕끄덕]” (F양·17세 - 2그룹) “되게 흔한 직업을 선택하는 친구도 있어요. (흔한 직업?) [망설임 없이 바로] 변호사요. 변호사, 판사, 의사, 이런 거.” (G양·14세 - 1그룹) “청소년들에겐 이제 꿈도 하나의 지위표식” 같은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두 청소년이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한 명은 또래 사이에서 ‘의사’라는 꿈을 갖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한 편, 또 다른 한 명은 도리어 의사를 ‘되게 흔한 직업’ 중 하나로 인식합니다. 둘은 어떤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갖게 된 걸까요? 2020년 2월 ‘한국사회학’에 게재된 ‘불평등한 미래: 청소년의 꿈, 지위표식이 되다’라는 논문에서 연구진은 양육자의 직업 및 소득에 따라 구분한 그룹에 따라 꿈에 대해 물었을 때에 그 인식의 차이가 나타났다는 점을 포착합니다. 지역 불평등은 성인 뿐만 아니라 청소년 교육에 있어서도 격차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의 격차를 비롯한 지역 간 불균형에 있어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한국일보에서 2021년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10명 중 9명이 지역 불평등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50%에 가까운 사람들이 ‘매우 심각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죠. (한국일보 2021년 6월 17일자 기사) 일자리, 교통체계, 인프라 등의 핵심적인 생활 여건 상의 격차로 인해 지역 간의 삶의 만족도가 떨어지면서 소외감과 차별대우를 느끼는 점까지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는 교육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는 청소년들이 가지는 경험과 교육의 격차는 분명한 불평등과 불균형으로 나타날 것이고 이 또한 중대한 사회문제가 될 것이라 할 수 있죠. 암암리에 청소년들의 경험에 의해 교육에 있어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의 차이를 체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역 간 교육불평등을 공론화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기회의 측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경험과 기회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쉽게 풀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에 거주하는 청소년들 사이에 경험과 교육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근거가 필요하고, 수치화된 데이터가 있어야 그에 맞는 원인과 대책마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죠. 따라서 교육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구체적으로 측정해야 한다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가 남겨져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상의 격차에 따라 꿈의 인식 자체가 차이났다는 ‘불평등한 미래: 청소년의 꿈, 지위표식이 되다’라는 논문은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교육과 기회의 차이를 ‘꿈과 진로’라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게 된 것이거든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교육 불평등을 가시화할 수 있는 경험과 기회의 정의와 측정에 대해 깊게 살펴봅니다. 이번 탐사 리포트에서는 총 4회에 걸쳐 지역 간 교육 불평등에 대한 경험과 기회의 측정을 위한 현상과 논의, 그리고 학계의 연구들에 대해 살펴봅니다. 탐사 리포트를 관통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청소년들이 겪는 경험과 기회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격차가, 어느 정도로 존재하는가?“ 이번 탐사 리포트는 교육문제 이슈를 그저 ‘문제 포착’에 그치지 않고 해당 내용들을 보다 깊이 있게 진단하고 그에 대한 연구자들의 논의까지 살펴보는 보고서입니다. 또한 동시에 해당 주제는 <연구원정 : 교육문제>에 참여하고 있는 대원분이 실제 대안을 찾기 위해 연구하고 있는 연구주제이기도 합니다. 연구원정 프로그램 알아보기 : https://naioth.net 참고 문헌 전현진. “꿈마저 현실에 맞춰 꾸는 10대들”. 경향신문. 2020. 5. 2.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005020600075#c2b 구정태. “ 성인남녀 절반 "인프라 풍부한 수도권으로 이사 원해". 한국일보. 2021. 6. 17.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61414260002046 김석호 외.(2017).한국 청년세대의 꿈-자본 측정.문화와 사회,(),289-331. 김수정, 차영화, 최샛별. (2020). 불평등한 미래: 청소년의 ‘꿈’, 지위표식이 되다. 한국사회학, 54(1), 101-138 * 본 콘텐츠는 <연구원정 : 교육문제> 1기 박소영 대원의 연구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인스타그램으로 보고 싶으시다면? (클릭!)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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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여백을 나누는 배움 <한국미술재단(KAF)>
전국 초등학교에 광풍이 불었다. 선생님들의 집단 우울증과도 같은 현상, 만연한 학교 폭력, 부당한 민원을 넣는 학부모 등 학교 전체가 시름하고 있는 가운데, 다른 한쪽에서는 세상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초등학교에 마음 교육의 밀알을 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미술재단 (Korea Art Foundation)>이 그것이다. 마침 나눔을 싣고 떠나는 황의록 이사장(아주대학교 명예교수)과 함께 경북 성주군 성주초등학교로 여백을 찾아 떠났다.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초등학교 복도, 그리고 또 다른 복도에 설치된 학교 안 작은미술관평범한 복도를 따라가다보면 예술과 상상의 세계로 통하는 길을 만나게 된다(사진: 백아인) 학교 안 작은 미술관  한국미술재단에서는 기부를 통해 한국 국내 미술작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여러 활동 중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 하나가 전국 초등학교에 작은 미술 공간을 만드는 일로, <학교 안 작은 미술관>기증사업이다. “학교 안 작은 미술관”은 아이들이 자주 오가는 복도 한켠에 미술작품을 전시, 아이들이 마치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듯한 상상의 길목이 되어준다. 상상과 예술의 공간을 새로이 창조해 내는 일이다. “아이들에게서 미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 원화 작품을 수시로 보면서, 또 나중에 자신의 작품이 유명 화가들 작품과 한 공간에 걸리는 걸 보며 공감 능력을 높이고, 마음의 확장을 얻길 바랐습니다.”  간단한 일은 아니다. 시도 교육청의 알림을 통해 직접 학교와 소통하고, 국내 화가들로부터 작품 지원을 받는다. 또 설치 전액을 자비와 후원을 받아 제공하는 방식이다. 한편으론 작품들을 직접 싣고 가 설치하고 조명까지 조율하는 세심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미술재단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다. 예술에 관심 있는 각 시도 교육청에서, 또 예술에 관심 있는 교장 및 담당선생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전국 600개 초등학교에 <학교 안 작은 미술관>을 세우는 게 목표였습니다. 처음에 한국미술재단에서 모두 지원을 하니까, 당연히 많은 신청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었습니다.”  무료 지원임에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시도 교육청이나 학교들조차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무료로 지원한다고 하니 오히려 의구심부터 갖는 사람이 많았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기도 하고, 아이들이 값비싼 원화를 훼손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한 몫 했다.  “우리는 괜찮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제껏 훼손된 원화가 단 한 점도 없습니다. 후속으로 미술작가가 그 학교에 가서 미술수업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미술 감상 예절을 가르치는 시간도 갖습니다.   우리는 작품을 어떻게 봐야 한다는 정답을 가르치고자 하지 않고, 아이들이 작품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을 귀히 여깁니다.”  미술 작가들도 처음엔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미술수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런데 편견 없는 진짜배기 감상자인 아이들을 만나고 오면  오히려 영감을 받고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게 되어 이제는 작가들이 제 발로 가고 싶어한다고. 황의록 이사장은 아주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직을 은퇴한 뒤, 무려 30년 후를 생각하며 이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시작한 지 9년, 약 60개 초등학교에 ”학교 안 작은 미술관“을 제공했다. 이 작품들은 1년마다 서로 순환되어 아이들이 매년 새로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림들은 다양하다. 극사실주의 작품부터 추상화까지. 얼마 전엔 BTS의 RM이 광고하는 데 배경이 된  조미화 작가의 작품도 그 속에 끼어 있다.  예술이 주는 심성과 공감의 배움 교장 선생님 중에 한국미술재단과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우선적으로 관심을 보인다. 성주초등학교의 조재국 교장도 이 일의 중요성을 느끼고 신청했다고 한다.  “아이들의 심성과 공감능력을 키우는 데 예술 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침 저희 성주초등학교에서도 미술이 중요하다 생각해서 한쪽 복도를 <해와 달 갤러리>로 꾸미고 있었는데, 이런 좋은 사업이 있다고 해서 신청했습니다.“  한국미술재단에서 제공하는 전폭적인 지원이지만, 학교 내 공간을 확정하고 원화 관리 등 일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는 게 사실이다. 성주초등학교에서도 좋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어디에 전시를 하면 좋을 지 많은 회의와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어려움에도 이 지원 사업이 미래에 대한 밀알을 심는 일이란 것에 대개 동의한다.  예술하는 마음 아이들은 그림을 보면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림을 통해 과연 화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자신이 그림에서 발견해내는 게 뭔지 스스로 배우는 것이다. 즉 느끼고 공감하는 삶의 여백을 배운다. 또한 자신을 예술로서 표현하고 감정을 표출하는 건강한 방법도 배우게 된다.  아이들에게 <학교 안 작은 미술관>은 타인을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또하나의 창이다. 한국미술재단과 선생님들이 바라는 것도 결국 그러한 ‘이해’와 ‘공감’이다.   아이들은 그림을 보자마자 벌써 “이 그림이 맘에 들어요.” 툭 내뱉는다. 그 속에는 예술이 주는 정서적 교감이 들어 있다. 그리고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마음을 통해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얻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매년 한국미술재단은 아이들의 그림과 유명 작가의 그림을 한 곳에 전시하는 일을 추진합니다. 자신의 작품이 큰 미술관에 그것도 유명 화가의 작품과 함께 걸리는 걸 보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을 수치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분명 이 사회에 뜻깊은 열매로 다가오리라는 걸 한국미술재단은 믿고 있다. 언젠가 30년 후 아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다각적으로 고민하고 고군분투하는 선생님들이 있었다는 것, 훌륭한 작품들이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었다는 걸 모르는 사이에 체득하게 될 것이다. 희망하자면 우리의 미래가 점차 서로 교감하는 사회로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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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현장체험학습은 노란버스로, 갑자기 왜?
초중고 시절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갔을 때 탑승했던 전세버스가 기억나실 겁니다. 이때 타는 버스를 두고 통학버스라고 부르진 않았죠. 하지만, 앞으로 통학버스와 소풍버스의 차이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관련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죠. 작년 11월 제주교육청의 유권해석 요청으로 법제처는 「도로교통법」 제 2조(정의), 제 52조(어린이통학버스의 신고)에 따라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이뤄지는 현장체험학습을 위한 [어린이 이동]은 도로교통법상 어린이 통학 등에 해당된다고 해석했습니다.(어린이 : 13세 미만) 경찰청도 현장체험학습 등 비정기적인 운행 차량도 황색 도색과 구조 변경 등 조건을 갖춰 신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제52조에 따르면, 어린이 통학버스로 사용할 수 있는 자동차는 행전안전부령으로 정하는 자동차로 한정하고. 노란 도색, 표지, 보험 가입, 소유관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춰야 한다고 나옵니다. 법제처의 유권해석에 따라 앞으로의 현장체험학습은 통학에 해당되니 노란 도색을 하고 여러 조건을 갖춘 관할 경찰서에 신고된 차량을 운행해야 합니다. 이를 위반하면 과태료를 내야 합니다. 현장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요? 초등학교는 위 법령에 따라 일반 전세버스가 아닌 노란 버스를 운행해야 하는 상황이나 적합한 대형버스가 매우 적어 난처한 상황입니다.(*13세 이상인 경우 일반 전세버스를 타고 현장체험학습을 가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전국전세버스연합회에 따르면, 현재 위 법령에 위반되지 않고 사용 가능한 어린이 통학버스는 총 6,955대입니다. 이 중 현장체험학습 이동에 적합한 대형버스는 2,431대라고 합니다. 이는, 1~6월 초등학교 체험학습 운행 차량으로 5만여 대 가깝게 계약되었던 것에 비해 매우 적은 대수입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현장 체험학습이 가을로 몰려 버스 대절조차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울산에는 26개의 전세버스 운송회사가 있지만 노란 버스는 1대도 없어 울산 초등학교에선 지역 내에서 노란 버스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나머지 4,000여 대의 버스를 법령 준수를 위해 개조하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세버스업계는 개조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 개조를 하면 학교 현장체험학습 용도 이외엔 일반 전세버스로 활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체형에 맞게 벨트도 바꾸기 때문입니다. 개조 비용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체험학습을 진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현장 교사들 입장이 난처해 보입니다. 일부 학교가 체험학습을 취소하면서 학교와 사전 계약했던 체험학습 업체도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잡아둔 9월 예약이 없던 일이 됐고, 체험활동 프로그램 준비에 사용한 금액을 날릴 처지라고 합니다. 교육부에 따르면 각 교육청이 차량을 구하지 못해 수학여행을 취소할 경우 2학기에 발생할 위약금이 총 800억 수준이라고 추산했습니다. 위 혼란에 대해 교육부는 8월 25일, 현장 혼란을 최소화할 방안이 도출될 때까지  단속 대신 계도 홍보하겠다는 경찰청의 입장을 시도교육청에 안내했습니다. 어떤 법령이든 현장에 곧바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기관은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최소화할 방안이 도출될 때까지”라는 문구를 보면 정책을 시행할 생각만 했지 후폭풍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번 혼란을 보면 현 정부와 행정부가 어떤 식으로 일을 하고, 해왔는지 보입니다. 청사진 없이 일을 벌이고, 문제가 생기면 사후약방문 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왜 갑자기 이러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보도를 찾아봤습니다. 이번 일의 시작이 법제처의 유권해석부터라고 짚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법제처가 유권해석한 내용이 적절하다면 3년 전, 5년 전에는 왜 조용했을까요? 올해가 되어서 갑자기 어린이 교통안전 확보가 중요해진 것일까요? 제 의문은 아직 시원하게 풀리진 않았습니다. 행정부의 이런  일 처리 과정을 보는 것이 착잡하고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은 노란 버스 사태와 관련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나요?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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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살아야 교육이 산다.
교육부가 8월 17일에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안)’을 발표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처음으로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지침을 고시로 마련한 것입니다. 7월 18일 서울 서이초에서 초임 교사가 사망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교사생존권을 위한 생활지도권 보장을 위해 발표된 이번 고시는 10일간의 행정예고를 거치고 9월 신학기부터 학교 현장에 적용될 예정입니다.  이번 고시를 통해 교원과 학부모 간의 상담은 사전협의 후 실시되며, 근무시간·직무 범위 외의 상담은 교원이 거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업 방해 물품 분리 보관, 물리적 제지, 수업 방해 학생 분리 등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학생이 불응 시에는 보고 조치하고, 학교의 장에게 징계를 요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원의 수업권과 학생의 학습권 보장을 위한 휴대전화 등 수업 방해 물품을 분리 보관할 수 있고, 성찰을 위한 반성문 작성, 어지른 것을 치우는 청소 등의 과제를 부여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무분별한 아동학대 신고로부터 교권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것에서는 유의미한 조치라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는 교사생존권을 위한 생활지도권 보장이라는 가장 최소한의 조치일 뿐, 이것을 시발점으로 해서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의 학습권을 위한 보다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제도적·법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2의 서이초 교사가 나오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시사점을 줄 수 있는 영국의 교사 시스템과 함께 그 대안책을 모색해 보겠습니다.(영국교사 김은영의 책 ‘영국교육은 무너지지 않았다.’ 참조) 첫째, 이론 암기가 아닌 실습위주의 교사 양성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교육 현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효과적인 교수학습 방법뿐 아니라 여러 다양한 학생들에 대한 학습지도와 생활지도 등 교사가 실질적으로 직면해서 해결해야 할 일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천차만별입니다. 경력이 없는 초임교사가 아직 학교에 적응도 못한 1학년 학생들의 담임이 된다면 교사가 겪는 교실 현장의 어려움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사 양성기관은 그것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해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2018년 5월에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번아웃 키즈’ 4부 <교사의 탄생>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교사 양성 제도의 심각한 문제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임용고시 준비를 위해 엄청난 양의 인터넷 강의를 듣고 암기 위주의 학습을 하고 있는 교대생들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2023년 현재에도 이러한 모습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입니다. 이를 개선해 보겠다고 올해 초, 교육부는 ‘교육전문대학원’의 도입을 들고 나왔지만, 임용에 영향을 받는 사범대·교육대생들의 반발로 지금은 잠정 중단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반대하는 학생들도 교사 양성기관의 교육 방식의 변화에는 동의했습니다. 윤세진(23) 경인교대 총학생회장은 "수업에서 배우는 내용이 교육 현장에서 활용되기 어렵고, 현장 실습 기회도 많지 않아 교육 과정 내실화가 필요하다"며 "임용고시에만 매몰되지 않고 교대 학부 생활을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기간으로 보낼 수 있도록 운영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장창기 공주대 전 사범대학장은 “캐나다의 경우 실습 시간이 400시간에 육박하지만 우리나라는 160시간에 불과하다. 실습 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에서는 학부 이후 교사 양성 코스인  PGCE(Postgraduate Certificate in Education)코스를 두고 있는데, 철저히 실습 위주이고 실습을 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많이 탈락합니다. PGCE는 수업과 현장 실습을 병행하는데, 1년동안 두 개의 학교에서 하는 현장 실습 과정이 전체 교육 과정의 80%를 차지합니다. 수업도 토론과 발표 위주로 진행되고, 현직 교사인 분들을 초청해서 좋은 수업의 아이디어를 소개받고, 그것을 현장 실습 수업에서 어떻게 이용할지를 논의합니다. 일년에 4~5개의 에세이를 제출하는데 전부 ‘실습에 바탕을 둔’ 것으로, 책에서 읽은 교육 이론을 바탕으로 실습 때 체험한 것을 분석하는 식의 에세이를 씁니다. 또한 20년이 넘는 교사 경력을 가진 튜터(tutor)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이들이 학생들이 쓴 에세이를 채점합니다.  이러한 1년 과정을 패스하게 되면 공립학교에 취직하여 다시 1년의 ‘NQT(Newly Qualified Teacher)’과정을 가집니다. 이 때는 일반 교사의 90% 시간표를 가르치고, 멘토 교사 및 코디네이터의 관리를 받습니다. 실습생 때보다는 독립적이지만 멘토는 여전히 수업을 점검합니다. 외부 강의로 말썽꾸러기 학생 다루기, 목소리 관리하기, 스트레스 관리하기, 현장학습 계획 시 필요한 절차 등을 배우고, 정식 수업 관찰은 1년에 9번을 받습니다. 멘토 교사와는 일주일에 1번 미팅을 하고, 멘토 교사는 일 년에 세 번의 정식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NQT과정의 최종 결정은 교장이 하는데, 교장은 멘토교사의 보고서와 함께 학생들의 노트를 걷어 보고, 학생들과 인터뷰도 하고, 수업도 관찰해서 최종 결정을 내립니다.  이렇듯 영국에서는 예비교사 및 초임교사에 대한 실습위주의 실제적인 교육과 관리, 그리고 교사가 되어가는 과정에 도움을 주는 교사 양성 과정이 존재합니다. EBS 다큐프라임 ‘번아웃 키즈’ 4부 <교사의 탄생>에서 이미경 전 귀인초 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학교로 발령받았을 때 단 하루도 미리 준비하거나 하루만 있다가 수업하는 경우는 없어요. 3월 2일자로 임용되면 바로 수업을 들어가고 바로 학생을 만나야 하거든요. 첫 1년 교사 본인이 시행착오를 겪을 동안에 아이는 어떨지 생각하면 그렇게 가벼운 문제가 아니거든요. 교사가 배우는 동안 아이들은 과연 어떨까를 생각하면 교대 교육과정의 절충안이나 보완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둘째, 혼자가 아닌 함께 협력하는 교사 문화로 바뀌어야 합니다.   교사는 처음부터 ‘좋은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선임 교사가 경험을 공유해주고 서로 도와 주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과목 수업 뿐 아니라 학생 지도까지 대부분 담당 교사 한 사람의 몫입니다. 그로 인해 도움을 청하기도, 도움을 받기도 어색하고 꺼려하는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교사 문화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학급에서 일어난 일은 대부분 담임 교사 혼자가 책임져야 하는 힘겨운 상황에 놓여진 것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영국의 모든 교사들은 라인 매니저(line manager)를 가지고 있습니다. 학기 초가 되면 라인 매니저와 미팅을 해서 한 해 동안 교사로서 해야 할 일, 올해의 목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학교가 해주어야 할 일 등을 기록합니다. 또한 목표 달성을 위한 실천 방안을 세웁니다.  그리고 라인 매니저는 ‘언제쯤 수업을 관찰하는게 좋을지 상의를 통해 정한 날’에 수업을 관찰합니다. 시간 순으로 수업시간에 일어난 일을 자세히 적고 관찰 기준표에 나온 ‘반드시 수업시간에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는지를 체크합니다. 수업 관찰이 끝나면 미팅을 해서 잘한 점을 칭찬해 주고 격려해 줍니다. 그리고 더 잘 할 수 있는 방안을 서로 토론을 통해 함께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전략을 세웁니다. 영국에서 전체 교사들이 모이는 정기 회의에 서빙을 하는 사람은 부교감이나 교감이고, 학교식당 대타로 서빙하는 사람도 교감이라고 합니다. 학생이 잘못해서 평교사의 지시를 안 따르면 주임교사로 책임이 넘어가고, 주임교사의 지시를 무시하면 교감에게로 넘어가서 더 큰 벌을 받게 됩니다. 주임교사는 주임으로서 동료 교사를 서포트해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고, 모든 선생들이 맡고 있는 아이들이 다 자기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영국 학교에는 상급 교사들이 더 큰 권한을 가지는 동시에 함께 책임을 지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사 협력 문화를 현장에서 실현시키고 있는 한국 학교의 좋은 사례를 찾게 되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충북 청주의 수곡중학교인데, 2019년부터 한 명의 학년부장을 증원하여 교육과정부장과 생활교육부장 2명을 두는 ‘학년 2부장제’를 도입했습니다. 담임교사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학급의 문제가 일어나면 학년 생활교육부장과 담임, 그리고 해당 학생의 수업을 하는 교사와 함께 학생의 상태를 파악하고, 만약 학부모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경우에는 담임, 학년2부장, 해당 사건 관련 교사,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사, 학생 등으로 협의체가 구성되어 해결한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교사들은 학년 공동체가 함께 협력하는 유기적인 생활지도의 중요성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학교 공동체가 함께 함으로서 학급 학생의 생활지도에서는 외롭게 홀로 고군분투하는 담임 교사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뿐 아니라 학급경영이나 과목 수업에 있어서도 각 교사들이 가진 역량을 함께 나누고 교류하며 협력해 나간다면 교사의 전문성이 개발되고 확장되어 추락한 교권도 다시 회복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장 12절)’  사진: Unsplash의Dav Doh 셋째, 교사만큼 중요한 학교의 인력풀이 갖춰져야 합니다.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는 선수는 한 명입니다. 하지만 그 한 명의 선수 뒤에는 그를 올림픽 무대에 세우기 위해 묵묵히 애써온 ‘팀’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가 교사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그를 위해 애써주는 '팀'이 필요합니다. 한국 학교에는 교사들을 서포트해주는 인력이 얼마나 있을까요? 한국의 교사들은 학생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잡다한 행정 업무와 학생 상담 그리고 교실 청소까지 과중한 업무를 맡고 있기에 정작 가르치는 교사의 임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영국 학교에는 교사들이 최대한 ‘가르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인력풀이 학교에 갖춰져 있습니다.  커버 교사: 교사들이 수업을 못할 시에 커버 수업만 전담, 학교에 상주, 현장학습이 많아 교사가 자주 자리를 비우기에 꼭 필요한 인력 학생 생활/행동 지도 담당자: 수업을 방해해서 교실에서 내보내진 학생들이 가는 silent room, quiet work room에 당번을 서는 상급 교사 또는 학교에 상주하는 전문 상담가 학교내 시설 보수 담당자 학교 식당 관계자 과학 실습 지원 인력 미술 수업 지원 인력 요리 수업 지원 인력  드라마/연극 수업 지원 인력 컴퓨터 ICT 풀타임 관리자  도서관 담당자 교장의 비서: 학교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교장, 웬만한 회사 사장보다 스케쥴이 빡빡하기에 반드시 필요한 인력 재무담당자: 재무과의 총책임자는 교감과 같은 위치 12, 13학년 행정 업무 담당자 복사, 인쇄 담당자 데이터 관리자: 데이터 분석을 매우 철저히 하는 영국 학교에 꼭 필요한 인력  기술학교 가는 학생들 담당자 Pastoral manager(부모처럼 학생들을 담당하는 주임교사)를 지원해 주는 인력  보조교사: 수업 시간에 자폐증, 소아 당뇨, 간질, ADHD, 아스퍼거스 장애 등을 가진 학생을 도와 주는 인력 특히 보조교사는 주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분들이  많은데, 월급이 많지 않아도 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는 엄마에게는 인기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폐증, 소아 당뇨, 간질, ADHD, 아스퍼거스 장애, 상담 기술 등 정기적인 교육을 받습니다. 담당한 아이들을 케어할뿐 아니라 수업이 원할하게 진행되도록 교사를 돕는 일을 합니다. 보조교사는 학기 초에 담당하고 있는 학생과 간단한 미팅을 하면서 지난 학기에 정한 목표를 잘 달성했는지, 다음 학기 목표는 무엇을 하면 좋을지, 전반적인 학교 생활은 어떤지 기록·관리합니다.  우리나라도 장애학생의 통합교육을 하고 있고, 게다가 요즘에는 느린 학습자 또는 경계선 지능 아동이 한 학급에 있을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기에 이러한 학생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보조교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느린학습자에 대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느린학습자는 새로운 지식과 기존 지식을 연계하는 전략 연습이 필요하고, 일반 아동에 비해 추가적인 반복과 충분한 연습 시간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하기에  정부가 '보조교사'라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교사들은 절대 제대로 된 수업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사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교사가 신바람나게 가르치는 교실을 꿈꾸며 교권이 무너져 가고 있는 이 시대, 우리의 교육 현장은 교사가 교실에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교사가 살아야 교육이 살 수 있습니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사들을 살려야 합니다. 교사의 질을 향상시키는 교육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바람 나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많아져야지 우리의 교육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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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선생님과 아이들을 부탁해
2023년 7월 18일 서울서이초등학교에서 교내 교보재 준비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만24세 선생님.  왜 이 죽음이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하고 분노를 느끼게 할까요? 무엇이 선생님을 죽음으로 몰았을까요? 왜 하필 학교에서일까요? 이제껏 선생님 자살 사건들이 심심찮게 있었음에도 공론화되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인 우울증 등의 이유로 은폐되었기 때문이죠. 이번 서이초 자살 사건은 달랐어요. 선생님이 목숨을 끊은 장소가 학교 교내였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학교”란 공간을 보여주고 그 속에 생활하고 일하는 선생님과 관리자, 아이들, 학부모들간의 복잡한 뭉치들을 던졌습니다. 우리가 파고들어 밝혀내야 할 뭉치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여기서 정치적으로 이 사건을 해석 이용하기보다, 학교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학교 안에서 선생님이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고, 학생들도 학생으로서 배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학교가 선생님에게나 학생에게나 안전한 장소가 될까요? 신규로 들어온 선생님이 초등학교 1학년 반 담임을 맡으며 한 해를 무사히 마치고 새로운 1학년을 또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 해에 비해 스트레스는 극심했습니다. 자살하기 전에 쓴 선생님의 일기장 속엔 “업무폭탄”과 학부모와의 상담 갈등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몬스터 페어런츠(Monster Parents)를 아시나요?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학부모가 아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권 이전에 사생활 침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부모의 불만사항은 교사로서의 업무와 수업 중에도 피말리는 스트레스가 될 수 있지요. 일본드라마 : 몬스터 페어런츠(2008.7-9 일본KTV 방영) 일본에서도 2006년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어요. 과도한 잔업 업무와 학부모의 불합리한 요구에 스트레스를 받은 23살 1년차 신규 선생님이 자살한 것이죠.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면서 2007년 일본교육계에서는 “몬스터 페어런츠” (괴물 부모)라는 말이 만들어지고 드라마화 되기도 했습니다.(시사저널 2023.07.30) 일본 교육계의 분석에 따르면, 2020년대 지금의 학부형 세대는 과거 80년대 학력 위주의 학창시절을 지나며 학교에 대한 불신을 키워왔습니다. 선생님들의 폭력과 인권 침해 및 촌지 등 불합리를 무수히 보고 겪은 세대로 교육계에 대한 신뢰가 얕지요. 한편으로는 ’학벌만능주의’의 시대 속에서 ‘전인간적 교육’보다는 공부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묻지마 고학력 세대’이기도 하죠.  이 세대가 학부모가 되고 자식을 한두 명만 키워 기르다 보니, 자식에 대한 애착도 크고, 앞선 세대의 교육관을 신뢰하지 못하는 문제점도 있습니다. 동시에 자식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투영하여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고 통제하고 소유하려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부모들 중 심한 경우에는 학교에 불합리한 요구를 당당히 할 뿐 아니라, 선생님에게 모든 잘못을 돌리고, 인권이란 이름으로 자기 아이 감싸기에 치중하는 몬스터 페어런츠가 되고 맙니다. 모든 아이들에게 좋은 것이 아닌, 자신의 아이에게만 유리하게 학교에 부당한 요구를 하는데, 그 예로, 특정 아이와 다른 반이 되게 해달라고 떼를 쓴다거나, 자신의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달받길 원한다거나, 심지어 우리 애만 소풍 때 도시락을 못 쌀 거 같으니 선생님이 대신 싸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몬스터페어런츠의실례들참조).  우리는 여기서 합리적인 요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인 것은 내 아이만이 아닌 모든 아이들을 위한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몬스터 페어런츠란, 다른 아이들의 학습권을 침해하면서까지 불합리한 권리 주장을 하는 부모를 말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하루에도 몇십통씩 악성 민원을 넣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민원을 상대하느라 업무나 수업에 집중할 수 없고, 부모의 부당한 행위 때문에, 정작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이들입니다.(초코샘 네이버 블로그 2023.07.23)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업무 폭탄” 부분입니다.  교재를 준비하고, 수업을 준비하고, 그밖에 잔업을 몽땅 처리해야 하는 업무 과잉이 교사에게 끼치는 정신적 압박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때로 우울증과 극단적인 선택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시사저널 2023.07.30)  “업무폭탄”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또다른 문제를 낳는데, 정작 선생님의 본업인 ‘가르치기’를 위해 수업준비할 시간이 없다는 점입니다. 수업 준비가 안 되면 수업이 질적으로 저하됩니다. 수업의 질적 저하로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선생님을 무시하거나 불신하게 되고, 다시 컴플레인이 생기고, 선생님은 또 수업에 집중할 수 없게 되어 악순환이 무한루프를 탑니다.  이 두 가지는 서이초 선생님의 일기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두 가지 원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좀더 사안을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을 믿어 주세요  서이초 신규 교사의 자살 사건을 접한 많은 선생님들이 고개를 갸우뚱한 부분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은 특히나 다루기 힘든 학년으로 경험 많은 선생님도 어려워하는데, 갓 선생님이 된 젊은 선생님에게 맡겼다는 부분에서였습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아직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다르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치원에서는 아이 하나 하나의 발달에 주목하고 학부모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우리 아이가 여러 아이들 중 하나라는 사회화 과정을 배웁니다. 사회의 규율을 처음으로 맞딱드리고 교육받는 장소입니다. 다른 한편, 학부모도 학부모가 처음이라서 유치원 때와 같이 자신의 아이에게 집중캐어가 있기를 기대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우리 아이도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학부모들은 조금 떨어져서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또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격이 맞지 않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도록 기다려주고 도와 주어야겠지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못할 일도 아닙니다. 괜한 부모 등쌀에 아이가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학생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미국의 경우, 카운슬러와 관리자 등의 협력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입학 시 수십페이지가 되는 학교 메뉴얼과 규율에 동의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자유나 권리는 그에 마땅한 의무가 함께할 때만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학생의 사생활 보호로 핸드폰을 보는 게 허여된다면, 그것이 적어도 다른 학생들의 교육권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가능합니다.  학생 인권을 말하는 것은 단지 “내 아이가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학생으로서 자신의 의무와 그에 따른 자유를 누리도록 하고 인격체로서 대우받기 위함이지, 아무때나 누구나를(심지어 선생님마저) 자신의 방해자로 설정하고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이미 전제가 되어야 하지요. 사회는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시스템적인 노력 이번 사건의 핵심은 선생님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수업 외 과중한 업무, 학부모와의 상담 등 선생님이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거나, 관리자나 카운셀러가 함께 문제에 대해 대응하는 시스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선생님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현재 눈 앞의 문제를 봉합하기 위해 단순히 선생님 권한 강화로 가면, 일견 좋아 보이지만, 종국에는 선생님 혼자 짐지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일로 인한 스트레스, 병가는 산업재해에 들어갈 것입니다. 선생님 혼자 책임감에 밀려 벼랑끝으로 몰리는 현 제도는 선생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의 경우 학부모 대응 매뉴얼이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한국 역시 현실에 맞는 매뉴얼이 시급합니다.  미국의 경우 학교에 상주하는 카운셀러와 교장이 선생님과 반드시 함께 협력하여 학부모 민원을 처리합니다. 폭력 사건이 있거나 하면 일단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시킵니다. 분리는 인권 침해가 아니라, 피해자 보호이기도 합니다. 가해자나 벌을 받아야 하는 아이는 일단 교장실로 분리됩니다. 그리고 보조교사로 선생님 대신 각계 전문가가 와서 수업을 하기도 합니다. 한 달에 한번 수업 대신 업무만 하는 업무일(working day)이 있는 학교도 있습니다.  외국의 경우가 절대적으로 옳고 우리 실정에도 딱 맞는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참고할 수는 있을 겁니다.  사회문화적 노력  2020년대의 가장 큰 화두는 생명권일 겁니다. 보호받지 못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국가행정시스템에서 국민들은 말그대로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각자도생”이 당연시되고 있는 씁쓸한 상황입니다. 이것은 진실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국가 시스템이 개인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개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개인이 아닙니다. 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여야가 정치적 도구로 이 문제를 볼 게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선생님과 아이, 학교가 함께 웃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학부모나 폭력사건 등에 대해 카운셀러가 교장과 교사와 함께 협력하여 대응할 수 있게 해 주고, 선생님들 간에도 남의 문제라고 생각지 않고 같이 도움을 요청하고 받아야 할 때입니다.  여기에 학부모는 조금 떨어져서 아이와 선생님들을 기다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야 선생님 한 명이지만, 선생님은 아이들과 연결된 대가족 전체를 대응해야 하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고충과 아이의 사회화를 좀더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맡길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법적인 부분이 현실과 닿아 있지 않다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적으로 선생님을 존중하지 않고, 선생님의 고충을 내 일이 아니라고 모른 척하면, 또 학교를 믿지 않으면, 학교는 누구에게나 그저 감옥일 뿐입니다.  학교를, 선생님과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그것은 우리 미래에 대한 부탁이고, 우리 현재에 대한 부탁입니다. 무엇보다 나 역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건 아닌가, 나 자신부터 돌아봐야겠습니다.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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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문제학생 지도 방법
미국 미국의 공립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학생의 문제 행위로 인해 수업에서 방해를 받은 적 있다고 응답한 교사는 32%였습니다(초등학교 33.5%, 중학교 36.5%, 고등학교 27.3% 여기에서 말하는 문제행위는 소음, 난폭한 놀이, 싸움 등). 학생의 지각이나 수업 방해 행위를 경함한 교사는 37.4%였습니다(초등학교 33.7%, 중학교 34.1%, 고등학교 45.4%). (NCES)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닌데 이런 학생들은 어떻게 지도할까요? 미국 공립학교의 경우 각 주마다 학교구(school district)가 있고 학교구 별로 학생 행동 강령(Code of Student Conduct, Code of Student Behavior)을 만듭니다. 각 학교는 이를 책자로 만들어 학사일정과 함께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이를 어기면 어떤 조치/처벌을 받게 되는지를 알려줍니다. 텍사스 주의 경우 학생이 문제 행위를 했을 경우, 학교구의 교구장이나 지명된 사람이 문제 행위를 조사하고 문제 행위를 일으킨 학생에게 사건을 설명할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학생에게 알맞은 처벌이나 지도를 부여하는데, 만약 학생이 처벌에 불응할 경우 교직원들과 학생 대표들을 모아서 청문회(hearing)를 실시합니다. 처벌의 종류는 경고, 권한 제한, 특수 과제 부여, 반환, 기숙사 계약 해지, 성적증명/학위 보류, 수강 취소 및 재입학 금지, 학생 보조금/대출 손실 혹은 자격 상실, 정학, 퇴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Texas state, Code of Student Conduct) 참고로 체벌의 경우 미국은 주마다 다른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2023년 현재, 학생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지 않는 주는 알라바마, 아칸소, 플로리다, 조지아, 인디아나, 캔서스, 켄터키, 미주리,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텍사스, 와이오밍 등 13개 주입니다. 루이지애나, 오클라호마, 미시시피, 테네시 등에서는 체벌이 가능한 경우를 따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남부입니다.) 학생에 대한 체벌을 가장 먼저 금지한 주는 메사추세스(1971)이고 가장 최근에 금지한 주는 아이다호(2023)입니다.  일본의 교육학자 카타야마 노리코(片山紀子)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학생 징계는 다음과 같은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첫째, 징계가 응보적인(retributive) 경향에서 피해 회복적인(restorative) 경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학이나 퇴학, 체벌 위주던 징계가 가해학생이 피해학생 사이에서 사과, 변상, 행동 변화 약속 등을 위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둘째, 따돌림이나 괴롭힘, 특히 그것이 성이나 인종, 종교, 계층, 장애여부와 관련이 있을 경우에는 그것이 비록 말이나 제스쳐 같이 물리적인 폭력이 없더라도 강하게 징계를 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셋째, 학생 징계를 한두 명이 결정하지 않고 학교나 교육 공무원 이외에 정신과 의사, 상담사, 사회복지사 등 점점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상 アメリカの生徒懲戒制度に見る近年の傾向 ―社会経済的に不利な立場にある子どもを視野に 에서 발췌) 일본 일본의 경우 1879년, 1890년, 1900년, 1941년, 1947년에 학교에서의 체벌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표했지만 1980년대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교내 체벌이 감소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이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지도사(指導死)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사의 체벌이나 훈계로 인해 학생이 자살하는 것을 말하는데 ‘지도사 부모 모임(『指導死』親の会)’도 있습니다. (東京新聞.2016.03.16. <반복되는 지도사 히로시마 중3 자살 공표로부터 1주일>) 일본 문부과학성(文部科学省)은 2007년에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학생에 대한 지도방법을 통지했습니다. 일본 문부과학성에서는 각 학교에게 왕따, 폭력 등에 관한 대응 기준을 명확히 하여 보호자나 지역 주민들에게 공적으로 알리도록 하고, 범죄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은 경우에는 바로 경찰에 통보하도록 했습니다. 이 통지에서는 체벌을 금지하고 퇴학, 정학, 경고 이외에 방과후에 교실에 남게 하거나 과제, 청소활동 부여, 수업 참여 제외 등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징계를 부여하도록 했습니다. (問題行動を起こす児童生徒に対する指導について) 3년 뒤에는 학교교육법(学校教育法)을 제정해 이를 법률화하였습니다. (学校教育法) 각 학교는 이를 바탕으로 학생 지도 규정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습니다. 후쿠야마 시립 시세이 중학교(福山市立至誠中学校)의 경우 세 단계로 나누어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1단계 - 잘못을 한 본인에 대한 훈계, 사실이나 반성, 선서와 관련된 문장 작성 및 보호자 연락 2단계 - 보호자와의 면담 3단계 - 징계 (개실 반성지도, 수업반성지도, 봉사활동 등) 징계 기간 중에는 등교는 하지만 원래 있던 교실이 아니라 따로 마련된 별실에서 주어진 징계를 행합니다. 그리고 학생의 행동에 대한 일기를 써서 학교와 보호자가 함께 볼 수 있게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福山市立至誠中学校ー生徒指導規定) 중국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교육법(中华人民共和国教育法)> 28조에서 학교와 교사는 학생을 관리하고 처분을 실시할 수 있다는 권리가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2020년에 만들어진 <초중등교육 징계규칙(中小学教育惩戒规则)>에 따르면 비교적 경미한 사항에 대해서는 ‘지목하여 비판’, ‘사과, 구두 혹은 서면 검증’, ‘추가교육 혹은 봉사활동 부여’, ‘1시간 동안 교실에 서있기’, ‘방과후 지도’를 시행할 수 있고(8조), 이보다 무거운 사항에 대해서는 ‘학교 도덕 교육 업무 담당자의 지도’, ‘학교 내 봉사활동 수행’, ‘특별 학칙/교육 수여’, ‘소풍이나 견학 같은 단체활동 제한’ 등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9조). 학교 규정, 규율을 심각하게 위반하거나 여러 번의 교육이나 처벌로도 개선되지 않는 경우에는 ‘휴교’, ‘법치부교장(法治副校长), 법치지도원(法治辅导员)의 훈계’, ‘사회복지사나 전문가의 심리 상담, 행동 개입’을 시행할 수 있고 고등학생인 경우에는 제적을 시킬 수 있으며 부모나 관련 부서와 협력해 특별학교교육으로 전환시키기도 합니다. 중국의 경우 1949년과 1986년에 교내 체벌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었지만 아직 완전히 근절되진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학교와 교사가 내릴 수 있는 징계의 기준과 내용을 명확히 설정하고 있는 편이고, 일본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할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징계의 내용에 대해서 중국은 가벼운 징계건 무거운 징계건 공개적으로 시행되는 경우가 많다는 게 특징입니다. 또 중국의 경우에는 징계 내용을 모두 기록으로 남기는 한편, 일본의 경우에는 범법이 아니라면 기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권(敎權)? 한국에서는 교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권을 영어로는 뭐라고 번역해야 할까요? 티쳐스 라이트(teacher’s right)라고 해야 할까요? 티쳐스 어더리티(teacher’s authority)라고 해야 할까요? 일단 같은 한자 문화권의 경우를 보자면, 일본어로 교권(쿄-켄)은 ‘교사의 권력’을 뜻하고, 중국어로 교권(쟈오취엔)은 ‘교육 받을 권리’를 뜻합니다. 한국어 ‘교권’에 해당하는 말을 다른 나라에서 찾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보통 한국에서 교권이라고 말할 때엔 ‘징계’나 ‘체벌’에 대한 권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특히 학생의 보호자들)의 경우에는 ‘징계=체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또 징계의 권리를 교사 개인에게 줄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도 상당히 많은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그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 안에서 교사의 폭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기합을 받다가 죽거나 체벌로 인해 중상을 입는 학생들 이야기도 간간히 뉴스에 나왔었지요. 거기에 계속해서 오가는 촌지와 그로 인한 편애에 관한 뉴스. 꼭 뉴스가 아니어도 학창 시절에 직간접적으로 이런 경험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차원에서 교사의 징계권 부여에 많은 사람들이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학생인권조례의 제정도 이런 차원에서 생긴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모욕이나 폭력을 당하는 교사 이야기도 뉴스에 많이 나옵니다. 최근에도 연이어 비극적인 뉴스들이 나왔지요. 기본적으로 학교/수업이라는 공간은 1차적으로 학생과 교사의 공간입니다. 교사가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마치 교실이 교사와 학생의 헤게모니 싸움 공간인 것처럼 묘사하면서 학생의 권리가 너무 늘어나서 교사가 차별을 받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하지만 학생이나 학부모가 교사에게 행하는 부당한 대우도, 교사가 학생에게 행하는 부당한 대우도 사실은 ‘교사 vs 학생’이라서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늙어 죽는 그 날까지 똑같은 논쟁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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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문항 배제? 무엇이 중한디..???
대통령의 한마디에 들썩이는 한국교육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공교육 교육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문제는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라는 한 마디에 온 나라가 들썩 들썩…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교과과정에 없는 초고난도 ‘킬러문항’을 수능에서 없앤다는 것이었는데요. 수능을 5개월 앞두고 이러한 수능 출제 사항의 변경은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나 교사 그리고 학부모들에게 혼란을 야기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이런 문제로 이규민 교육과정평가원장이 6월 모의 평가에 출제된 킬러 문항에 책임을 지고 전격 사임하게 되었고요.   교육은 한 인간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백년지대계’라고 해서 먼 장래까지 내다보고 세우는 큰 계획이어야 하는데, 이렇게 대통령 한 사람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교육시스템 전체가 휘청거리는 한국 교육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권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백년지대계의 교육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2022년 7월에 설치된 교육정책 합의체인 국가교육위원회는 아직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교육 문제의 핵심되는 대입문제는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바뀌면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입 시험의 근본적인 문제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인 대입문제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결코 사교육비 경감이나 교육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킬러문항만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대입제도의 근본적인 개혁 아니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몇년 전, 유튜브를 뜨겁게 달구었던 영상이 있습니다. 현재 구독자 571만명의 ‘영국남자’라는 유튜브 채널인데요. 이 채널에서 영어가 모국어인 영국학생 13학년(고3) 학생들 12명에게 수능 영어 문제를 10분동안 풀어 보게 했습니다. 우리의 수능 시험문제를 풀어 본 영국 학생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어요.  “지문이 말이 안된다.”  “이 시험을 누가 쓴 거에요? 얘기 좀 하고 싶네요.” “제가 영어를 진짜 아는지 혼란스럽게 만드네요.” “진짜 어렵다.” “저는 그냥 펜이 가는데로 찍을게요.” “이게 어떻게 외국어 시험이지?” “다시는 안하고 싶어요.” “정신적 충격이 상당해요. 스트레스를 왜 받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진짜 영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절대 안 만나고 싶어요.” “구글 번역기에 돌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에요.” “이런 시험은 어떻게 공부해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보기들 차이가 너무 적어서 모두가 정답일 것 같아서 더 어려워요.” “영어를 매일 쓰는 저희도 쩔쩔매고 있는데…” “지금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냥 읽는 거에요.” 그리고 그 채널의 다른 콘텐츠에서는 수능 영어 문제 다섯개를 뽑아 영국학교의 영어 선생님 4명에게 풀어 보게 했습니다. 한 문제당 50초의 시간을 주고요. 한국 학생들이 수능 시험 문항을 다 풀기 위해서는 약 1분 안에 한 문항을 풀어야 하니까요. 대부분 선생님들이 거의 모든 문항에서 정답을 맞추지 못했었어요.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합니다.    “헐 대박! 너무 어렵네요.” “이걸 어떻게 읽는 거야? 50초 안에? 장난해?” “여기 나오는 말 표현이랑, 어휘 자체가 터무니없네요.” “이런 단어를 누가 사용해? 심지어 단어를 읽지도 못하겠다구요!” “근데 이걸 뭐라고 발음해요?” “심지어 제가 모르는 단어들도 있어요.” “이런 건 누가 쓰는 거죠?” “이런 지문은 어디서 구하는 거죠?”  “아무도 일상 대화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잖아요.”  “1950년대 이후론 아무도 ‘상정’이란 걸 하지 않는다구요.” “이거 하는 학생분들 진짜 영어가 싫어지겠다. 너무 지루해” “이거 진짜 진짜 어려워요.”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말이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시험을 영국 학생들한테 제2외국어 시험으로 준다는 건 아예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이건 아무래도 아주 특정한 영어 능력을 테스트하는 거라고 봐요. 엄청 빠르게 지문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요.” “이런 시험이 도움이 될 몇 가지 상황이 생각나긴 해요. 그치만 많지는 않아요. 이 정도의 시간적 압박 속에서 읽고 이해해야 하는 상황이요. 동시통역사 정도?”  “정말 빨리 훑어 읽는 걸 잘한다고 하면, 아마 쓱 훑어 읽고는 바로, 그래 맞아. 이게 답이다. 할 수 있겠지요. 근데 사실 그런게 어떤 능력을 증명하냐는 거죠. “ “암기학습이라면, 그게 과연 아이들에게 필요한 걸까요? 시험 문제는 풀수 있겠죠. 그런데 5시간 뒤나 혹은 1년 뒤에 다시 그 질문을 받는다면, 아이들이 그 때도 알고 있을까요? 아님 단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배운 걸까요?”  “내 머리 속에 계속 맴도는 질문은 도대체 왜냐는 거에요. 이게 왜 필요하냐는 거지. 시간 제한은 전혀 도움이 안돼요.” “제가 한국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다니지 않지만, 저도 지금 그 압박감이 느껴져요! 정말이지 진짜 놀랍네요.”  “모두가 자신의 잠재능력을 실현하기 위해선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건 알잖아요. 근데 학생분들이 안쓰럽네요. 진심으로요.”  “이거 진짜 그냥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던지고 싶어요. 여러분들 정말 고생하시네요. 한국에 있는 학생분들, 여러분들은 정말 열심히 해오셨어요. 그리고 어디로 가게 되든 축하드려요. 왜냐하면 전 이거 못하거든요. 진짜 못하겠어요.” 수능 시험이 대학에서 편리하고 합리적으로 입학생을 뽑기 위한 테스트로 전락해서 진짜 우리 학생들에게 주어야 할 배움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영어권의 학생들이나 교사들도 풀기 힘든 시험을 치기 위해서 비싼 사교육비를 쏟아 붓고, 밤낮으로 머리를 싸매고 자신과의 싸움과 시험의 압박감을 견디고 참으며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는 우리의 불쌍하고 안쓰러운 학생들이 생각나 참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습니다. 우리의 교육이 정말 우리 학생들을 위한 교육인지, 시험을 위한 교육인지 다시 되짚어 봐야 합니다.  왜 우리는 수능을 포기하지 못하나? 그런데 왜 이런 비합리적이고 반윤리적인 시험을 우리 사회는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그것은 수능이 허울 좋은 공정한 테스트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미국에는 우리 나라의 수능과도 비슷한 SAT(미국 대학입학 자격시험)라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미국에서는 대학 입시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문제의식이 있고, SAT 의무화를 폐지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왜냐하면 SAT가 줄곧 ‘부유한 백인’이 유리하다는 결과를 일관되게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비판교육학 분야의 연구자로, 교육과 불평등에 관한 연구·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워싱턴대학교의 웨인 아우 교수는 “SAT는 자본의 차이를 측정하는 시험”이라며 “높은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 가정의 자녀가 표준화된 시험을 더 잘 준비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특권층을 위한 시험은 공정한 시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최근 대부분의 미국 대학들은 신입생 선발에 SAT 점수를 더 이상 보지 않기로 결정했고, 학생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위하여 SAT 점수 제출 의무화를 폐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SAT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수능이 공정하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그것은 미국에서 생각하는 ‘공정함’과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공정함’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생각하는 ‘공정함’은 학생의 소득·인종·부모 학력에 영향받지 않고, 학생 자체의 능력과 가능성 등으로 평가받는 것을 ‘공정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공정한 것으로 보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고등학교 2년 간의 학교 성적, 활동내역, 에세이 등의 포트폴리오로 학생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사회· 경제적 배경이 좋지 않은 학생들도 소득·인종·부모 학력에 관계없이 그들의 남다른 잠재력이나 가능성이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공정함’은 그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발생되는 차별에 눈감아 버립니다.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아이의 능력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개인의 성공을 만들어 내는 사회나 시험은 결코 공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점수로 줄세우기를 하는 수능은 공평(equality)한 것이지, 공정(equity)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공평하다는 시험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가 되어 가고 있고, 그리하여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극도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가 행복한 사회일까요? 나만 잘산다고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습니다. 옆에서 굶주린 자들이 있고, 죽어나가는 사람이 있는데 나만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미래세대를 위한 공정한 교육으로 한 사람의 경험, 생각, 성실도는 저마다 그 분량이 다릅니다. 그들이 태어나기를 열등하게 태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개인에게만 지게 만드는 사회가 정말 공정한 사회일까요?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에서  ‘...하지만 정말로 오직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이 스스로 해내도록 도와 준 부모와 교사의 노력은 뭔가? 타고난 재능과 자질은 그들이 오직 노력으로만 성공하도록 했을까? 우연히 얻은 재능을 개발하고 보상해 줄 수 있는 사회에 태어난 행운은?’ 이라고 말하면서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공동선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킬러 문항’ 사태를 통해 교육의 본질적 문제를 다시 한번 짚고 나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앞으로의 미래 세대를 위해서 반드시 교육 안에서의 참다운 ‘공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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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 침해가 아닌 노동권의 보호: 서이초 교사를 추모하며
‘교권’이라는 단어에 담긴 맥락과 계보가 아주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것이라, 교권이라는 단어를 강조할 때마다 알러지가 돋는 느낌이다. 특히나 2010년대 학생인권조례 성립 과정에서 교권이라는 단어는 학생인권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교사의 권위와 체벌을 정당화하는 맥락에서 사용되어 왔다. 그렇기에 교권을 말하면 자연스레 학생인권의 축소(?)를 연상시키는 프레임이 작동한다.  나는 유년기에 교사에 대한 불신을 뼛속깊이 체화한 인간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다수의 교사들이 작금의 사건의 원인을 학생인권이 증대되고 교사의 권위가 하락했던 데에서 찾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아니, 믿고 싶다). 하지만 문제를 진단할 언어로 계속 ’교권‘이 소환된다면, 그 언어에 각인된 역사성과 맥락에 따라 계속 학생과 교사를 대립시키는 프레임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 아마 칼럼에 쓰겠지만, 이건 약자를 대립시키면서 책임을 전가하는 전형적인 통치술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가 중요한데, 교권이 아니라 ‘노동권‘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작년에 참여한 연구 프로젝트에서 공무원과 사회복지사들을 인타뷰하면서 그들이 겪는 ’악성민원‘에 대해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문제는 민원의 일선 현장에서 그들이 그 모든 스트레스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언가 문제가 됐을 때 조직이 그를 보호하기보다는 문책하는 태도를 취하기 쉽다는 것이다. 민원이라는 업무를 담당하는 노동자는 결국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한 채 적대적인 민원인으로부터 자력구제를 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공무원들이 그토록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다.)  이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일종의 ’산업재해‘이다. 그리규 산업재해로부터 노동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노동권’의 문제로 사건을 봐야만 공무원이나 교사들이 제대로 제도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직 좀 더 조사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번에 돌아가신 교사 역시 그런 민원으로부터 시달렸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그리고 얼마전 학생으로부터 폭행당했다는 교사의 사례와 더불어, ’교권추락‘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 프레임에는 자살한 교사, 폭행당한 교사를 왜 학교 당국이 지켜주지 못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빠져있다.  교실은 정치적이고 갈등적인 공간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동거하고 같이 살아도 온갖 갈등이 생겨나는데 교실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문제는 그런 갈등을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해결해내는 경험이 부재한 한국사회에 있지, 갈등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갈등을 문제시하는 태도는 갈등을 억압하고, 억압된 갈등은 더욱더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될 것이다.  다만 필요한 것은 그런 갈등을 교사 혼자 감당하게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사도 실수할 수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런 모든 시행착오의 과정들을 보장하면서, 학부모나 학생들의 부당한 민원이나 공격에 대해서 교사가 그것을 홀로 책임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과 문화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는 교사가 수업과 교실을 꾸려나갈 자율적 재량권을 인정하는 일과 배치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교사에게 보장되어야 할 ‘노동권’의 문제로 다뤄질 수 있다.  국가나 조직이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 개개인들은 자력구제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책임은 더 약한 이들에게 전가되고, 악성 민원인처럼 어떻게든 자력구제하려는 이들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사회의 문제다. 그렇기에 교육현장의 문제를 넘어서서 사회적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 속에서 오히려 지금의 사건들의 해결책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사회가 문제를 해결하는 기존의 방식(갈등의 억압, 책임의 전가 등)을 넘어서 다른 길을 마련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 글은 제 페이스북에도 동시에 업로드 되었습니다.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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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교육제도에서 배우는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문제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최근 oecd 교육 2030에서 제시한 미래 교육의 방향 첫 번째는 변혁적 역량(미래사회를 바람직하게 바꾸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 책임교육’을 추진하는 것이다. 우선 미래사회를 바꿀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기 위한 첫 출발점은 질문하는 것에서 시작 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태가 생겨난 것은 현제 우리 나라의 입시제도인 수능 때문이다. 수능은 당연하게도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순히 문제푸는 법과 , 문제를 빨리 푸는 요령만 익힌다면 이 시험을 잘 치러낼 수 있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은 질문하지 않는다.변혁적 역량을 길러주는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질문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을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결과중심형 평가로는 이러한 교육이 이뤄질 수가 없다.이러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아이들의 다양한 가능성과 성장가능성도 고려해주지 않는다.사람들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꿈이 있고 하고 싶은 공부가 있을 것이며, 지금 당장 꿈이 없더라도 학교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꿈을 찾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평가체제는 당장 지금의 성적을 요구하여 이러한 점을 모두 무시한 채 공부만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다보니 수업에 뒤떨어지는 아이, 학교에서 하는 공부와 자신의 진로와 맞지 않아서 수업을 포기하는 아이가 생겨나게 된다. 이러다 보니 학교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교사 입장에서도 수능과 시험에 맞추어 진도 나가기에만 급급하게 되어 수업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챙겨주지 않는다. 즉 현재의 평가제도가 ‘한명도 포기하지 않는 책임교육’을 이뤄내는데 방해가 되는 셈이다.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현재의 평가로는 미래 교육으로 나아 갈 수 없으니 평가 혁신을 통해 수업 혁신을 촉진하여  미래 교육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이러한 평가의  혁신을 위해서는 핀란드의 평가 체계에서 그 교훈을 얻을 필요성이 있다.   핀라드의 교육 체계의 핵심은 과정중심평가이다. 핀란드는 이러한 평가의 시행의 필요성을 국가 교육관련 법에 명시가 되어 있기 때문에 과정중심평가의 진행자체가 핀란드의 교육 체계내에서 관습적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 평가는  학교 내에서 교사가 평가를 진행할 때  학생의 성적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전반적인 학습과 발전을 평가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이러한 평가의 특징 첫번째는 협력과 개별평가가 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학생들이 협력을 통해 과제를 수행하고 평가받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은 개별적인 평가보다는 팀 프로젝트, 그룹 활동, 발표 등 협력과 관련된 평가를  진행하고 이를 통해 문제해결능력, 창의적 사고능력, 협업능력의 성장을  유도할 수 있도록 교사가 수업을 설계한다 . 이러한 핀란드 교육 선진국의 방식을 토대로 우리는 교육 혁신 평가의 혁신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평가의 반영을 위해서는 현재의  지필고사형 시험에서 논술형 평가를 통해 자신이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현재의 지필고사형 평가는 암기만 잘하면 시험을 잘 치를 수 있다보니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논술형으로 시험을 치르되 다양한 논쟁거리를 던져줄 수 있는 문제를 통해 아이들의 다양한 생각을 종합하고 평가하고 적절한 피드백을 통해 아이들이 생각을 더 넓게 할 수 있도록 현재의 수능식 시험에서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와 같은 시험처럼 확산적 질문을 통해 다양한 생각의 나래를 펼쳐나 갈 수 있는 질문이 필요하다. 또 현재의 결과 중심평가에서 성장중심평가의 전환으로 평가 혁신을 추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자기 주도성을 살린 학생 참여형, 협력형 수업을 진행하여 아이들의 변화를 관찰 할 예정이다. 예를 들면 역사에서 프로젝트 학습을 통해 역사에서 문제를 제시하고 그 주제에 대한 답을 찾게 함으로서 자신보다 유능한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지발달을 시켜줌으로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것이 수업에서 큰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  또 협력형 수업은 1명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의 참여를 유도하는 수업이므로 생각하는 능력 뿐 아니라 한 명도 소외받지 않는 책임교육을 실천하는 과정중심평가로의 변화가 우리 교육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포인트가 되지 않을 까 생각해본다. 앞으로 우리 교육은 달라져야 하고 지금도 달라지고 있다. 현재의 입시제도가 이르면 2024년부터 지금의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달라지게 되고 고교학점제 시행을 통해 학생들이 무조건적으로 학교에서 정해준 수업을 들어야 했던 과거의 입시제도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수업을 선택할 수 있는 큰 변화도 앞두고 있다. 현재 교육부장관인 이주호장관은 장기적으로 수능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는 의중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앞으로 입시에시의 수능 비중도 줄어들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는 oecd에서 제시한 2030미래교육인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 변혁적 역량을 길러주게 하기 위해서는 평가혁신을 통한 수업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며  우리 사회내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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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향상될까?
언제부터인가 ‘수학을 포기한 자’라는 의미의 ‘수포자’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 영어를 포기한 자라는 ‘영포자’ 등의 단어가 공공연히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수학이나 영어 등을 포기한 학생들이 수업을 포기하고 의욕없이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이 우리 학교의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학생들을 수포자, 영포자로 만든 것이 다만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량 부족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모두가 다 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의 정형화된 틀에 따라 운영되는 경쟁이라는 레이스를 달리게 해서 거기서 1등만을 칭찬하고 나머지는 열등자로 전락하게 만드는 우리나라의 잘못된 시험 위주의 경쟁교육에서 비롯된 참담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 Unsplash의Florian Schmetz 경쟁교육으로 인한 우리 교육의 폐해 ‘경쟁교육’을 어학사전에서 찾아보면 그 뜻은 ‘명문대 입학과 시험 성적을 우선시하여 학생들 간의 경쟁을 유발하는 교육’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수십년간 이러한 경쟁교육을 해오고 있고, 이로 인한 폐해가 심각한데도 여전히 지금도 변함없이 경쟁교육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폐해에 대해서 정용교·백승대 영남대 교수는 2011년에 쓴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경쟁교육은 학생들에게 위선적, 가식적 태도를 심어주며 그에 따라 학생들의 호전성도 증대된다. 나아가 폐쇄적,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심어준다. ··· 지구촌화와 세계화에 걸맞는 지식 구성력을 키우는데 실패하며, 대신 지식의 답습 수준에 머물게 하며 전국적 (혹은 세계적) 네트워킹에 따른 집단지성의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외톨이형을 키운다. 친구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고립적으로 살아가며 그런 과정에서 각종 게임에 빠지게 되고 또 거기에 과도하게 몰두한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는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이 맞다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야만적인 국가다. 우리 교육은 우월자가 열등한 자를 지배하는 핵심원리인 경쟁교육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야만적인 국가이다. 자살률 세계1위, 아동우울증 세계1위의 한국 청소년은 너무나 불행하게 산다. 근본적인 교육개혁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교육희망 2022.07.15)   이렇게 경쟁교육으로 인한 폐해들이 심각하게 도출되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 경쟁교육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시험위주의 경쟁교육으로 1등이 되지 못해서 모두가 불행한 교육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경쟁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행복 시민을 만들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이에 시사점을 줄 수 있는 사례를 영국 학생들의 향상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 평가 시스템에서 찾아 보고자 합니다.  사진: Pixabay의 Hebi B. 학생들의 향상에 주목한 영국 교육 2019년 여름, 저는 영국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계신 김은영 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서울시립대 수학과를 나오시고 학원에서도 수학을 가르쳤던 경험이 있던 선생님은 영국 분과 결혼을 하셔서 영국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받은 수학 학위가 있었기에 처음에는 보조교사로 영국 학교를 1년간 경험하셨고, 그 이후 영국 교사 양성 코스 대학원에 들어가 수학교사가 되어 영국의 공립과 사립학교에서 12년째 수학교사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김은영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바로 영국의 평가 시스템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내용은 이 분의 책 ‘영국 교육은 무너지지 않았다’에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선 영국은 대학입시를 위한 내신성적을 매기지 않습니다. 대학입시를 위한 준비는 1~11학년까지의  초·중등 교육과정 그 이후에 대학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을 위한 12~13학년의 대학준비학교인 Sixth Form College 과정에서 하게 되기에 1~11학년까지의  초·중등 교육과정에서는 대학 입시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교육과정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 더 알고 싶다면 ‘중등교육과정에서 대학준비학교의 분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참조). 시험을 위한 경쟁교육을 할 필요가 없는 교육과정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통지표에는 등수나 순위가 매겨지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거지요. 영국 학교의 통지표의 가장 큰 목적은 학생들이 얼마나 노력을 해서 얼마만큼 능력이 향상되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다 다릅니다. 모든 아이들이 국어, 영어, 수학, 과학을 모두 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 우리나라는 대학 입시를 위해 이 모든 과목을 다 잘 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비싼 과외비와 엄청난 사교육비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 교육은 모든 학생들이 모든 과목을 다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에 맞는 교육과정을 만들었습니다. 동일한 과목에서 각 학생의 개인의 차이를 인정한 것입니다.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만 칭찬받는 교육이 아니라 능력이 뛰어나지 않는 아이들도 열심히 노력해서 향상을 하게 되면 칭찬받는 교육 시스템입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의 향상 정도를 아주 체계적으로 관리합니다. 이것을 ‘Tracking(추적 관리)’이라고 합니다.  모든 학생들의 향상을 추적하는 교육 시스템 ‘Tracking(추적 관리)’에서는 각 학생들이 처음 가지고 있는 각 과목의 성적에서 학년별로 달성해야 하는 목표치인 평균적인 향상 점수, 즉 각 개인마다 다른 ‘타겟 점수(Target Grade)’를 부여합니다. 이 타겟 점수는 빅데이터로 만든 본인의 능력에 맞는 목표치로, 통계에 의해 주어집니다. 각 학생들이 노력을 하면 이 정도는 나와야 한다는 기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통지표에는 각 과목의 타겟 점수가 나오는데 그 향상 정도를 직관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아래와 같은 색깔로 표시를 합니다. 점수가 낮더라도 향상되어 녹색과 파란색이 되면 칭찬을 받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능력에 맞게 배우면서 칭찬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영국 학교는 수준별 수업을 진행합니다. 학생마다의 각각 다른 능력을 따라 각자의 수준에 맞는 학습이 교실에서 이루어집니다.  *Progress(향상) 1-Exceeding Teacher Expectations(파란색) 2-Meeting Teacher Expectations(녹색) 3-Potentially underachieving(오렌지색) 4-Seriously underachieving(빨강색) 학생들의 향상을 위한 보다 정확한 추적 관리를 위해서 영국은 2001년 비영리 교육재단 FFT(Fischer Family Trust)를 설립합니다. FFT에서는 학생들이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학교가 향상 될 수 있도록 학교에 정확하고 통찰력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데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교육부의 전국 학생 데이터베이스(National Pupil Database)를 처리하고,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모든 학교에 데이터와 분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FFT에서 FFT Aspire이라는 학생 성취도 추적 및 평가 시스템을 개발합니다. Aspire는 "Assessment System for Pupil Progress, Individualized Review and Evaluation"의 약자로, 학생들의 학업 성과를 추적하고 평가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이 시스템은 영국 학교에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의 학업 성과를 측정하고 모니터링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즉슨, 모여진 데이터를 분석하여 학생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맞는 목표치(타겟 점수)를 제공합니다.  학교와 교사의 향상 정도를 평가하는 Value Added 앞서는 학생의 향상 정도를 평가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학교와 교사의 향상 정도를 평가하는 주목할 만한 시스템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영국의 교육 시스템에는 ‘Value Added(상대적인 향상도)’ 라는 학교의 성과를 측정하는 하나의 지표가  있습니다. Value Added는 학생들이 학교에 입학 전과 후의 학업 성취도 변화를 평가함으로써 학교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발전하고 성취하는지를 측정하여 학교의 효율성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의 성적을 여러 단계에서 평가하고 비교하여 향상 정도를 파악하는데, 기초학력수준, 사회·경제적 배경 및 학생의 개인적인 요인 등을 고려하여 계산합니다. 예를 들면, 무료 급식을 받는 가정환경이 열악한 아이가 보통의 아이들보다 더 많은 향상을 보이면 그건 특별히 교사가 더 잘 가르쳤다는 의미가 되므로 Value added가 높아집니다.  한마디만 해도 척 알아듣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런 학생들이 많은 학교가 입시 성적이 좋은 것은 사실 학교가 잘했다기보다는 원래 아이들이 우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교사, 학교가 더 우수하다고 평가 받아야 합니다. 또한 이런 지표를 가지고 교육부에서 평가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도 그냥 버리고 가지 않고 모든 아이들의 학업을 향상시키는 것이 영국 학교의 목표가 됩니다. 이로 인해 아이들의 숨은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는 교육 현장 분위기를 만들어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존중받는 교육으로 우리 아이들 모두는 존중받기에 마땅한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들을 평가절하시키는 교육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교육 현장에서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교육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수십년을 답습하고 있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철저히 반성하고 변화시켜 지금 우리 아이들을 위한 최고의 교육을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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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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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학생인권조례는 폐지되어야 할까요?
캠페인즈 여러분, 처음 뵙겠습니다 ;) 저는 교육정책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는 에디입니다.  오늘은 '교육과 민주주의'의 차원에서 다룰 토론 주제로 "과연 학생인권조례는 폐지되어야 하는가?"를 들고 왔습니다. 2010년대의 교육계에서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인가를 꼽는다면 그중 하나로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을 뽑을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의 교육 방식의 패러다임이 학생인권조례의 제정 전후로 나뉜다고 할 만큼 그 파장은 매우 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생인권조례의 폐지냐, 보완이냐는 교육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토론 주제인데요. 오늘은 이 학생인권조례의 제정 배경 등과 관련 정책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1. 학생인권조례는 왜 제정된 것일까?   학생인권조례의 제정 이전, 교사의 체벌 권한은 교사의 권위와 함께 당연히 부여되는 것이었습니다. 교사는 학생을 훈육하는 과정에서 벌의 일종으로 체벌을 활용했는데, 강력한 체벌에 대한 두려움은 학생의 일탈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무제한적인’ 체벌권한은 그 본질을 잊고 점점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체벌은 그 강도가 점차 강해지면서 학생들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교사 자신의 권위를 뽐내고 공고히 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그 결과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되는 흉기들로 학생들을 과도하게 때리는 사례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학생이 사망이나 중태에 빠지는 사고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이 때문에 항상 제기되던 논쟁 중 하나가 ‘과연 체벌은 교화에 효과적인가’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여론은 대체로 효과성에 부정적인 반응이었죠. 많은 교육이론 또한 체벌의 교화 효과성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일시적인 변화만을 유도할 뿐이라고 말하고, 다른 학자는 체벌은 결국 특정 행위를 못하게 하는 것뿐이지, 바람직한 행위를 유도하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느끼는 체벌은 학생들의 교화에 최소한 일정부분은 기여하는 바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교화 및 훈육 효과에 비해 발생하는 논란이 너무나도 심각했기 때문에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이 지속적으로 시도되어왔고, 결과적으로는 2011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이 됐습니다. 2. 학생인권조례, 그 이후 그렇게 경기도에서 최초의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지 어언 12년, 교육현장에는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먼저 제정됐던 당시의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① 제6조 제2항 “학교에서 체벌은 금지된다.” ② 제9조 제1항 및 제2항 “학생은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등 정규교과 이외의 교육활동과 관련하여 자유롭게 선택하여 학습할 권리를 가지며, 학교는 학생에게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등을 강요하여서는 아니 된다.” ③ 제11조 제1항 및 제2항 “학생은 복장, 두발 등 용모에 있어서 자신의 개성을 실현할 권리를 가지며 두발의 길이를 규제해서는 안된다.” ...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한 타 지역에서도 이 내용을 바탕으로 검토하고 지역 실정에 맞게 개정했습니다. 여기 적힌 조항들 외에도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는 다른 내용들이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은 아무래도 ‘체벌 금지’, ‘야간자율학습 사실상 폐지’, 그리고 ‘두발 및 복장 자유화’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으로 학생에게는 많은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를 누리기 위한 책임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에게 부여된 이런 형태의 자유는 즉각적이고도 부정적인 결과를 내지는 않았지만, 점차 학생인권조례가 하나의 문화가 되던 시기(2018년 이후)부터는 부정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교육플러스의 한 기사에 따르면, 2022년, 강득구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교권보호위원회 접수 및 조치결과 현황’에서 2020년 1,089건이었던 학생에 의한 교권침해 건수는 2021년 2,109건으로 1.94배 증가했다고 보고했으며, 이마저도 2022년에는 더욱 증가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교육활동 침해 예방 및 대응 강화 방안 시안 (링크를 클릭하면 자료를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교육부 교원정책과에서 작성한 ‘교육활동 침해 예방 및 대응 강화 방안 시안’(2022.09)이라는 자료를 보면 2022년 1학기에만 교육활동 침해 심의 건수가 무려 1,596건에 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코로나 시대였기 때문에 비대면 수업이 주로 이루어졌던 2020년, 2021년에도 매해 1,000건 이상 교권 침해 행위가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동일한 자료의 최하단을 보면 학생들이 교사를 상대로 일으키는 강력한 수준의 교권 침해 행위가 점점 늘어나고, 그 종류 또한 다양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고 그것이 학생들에게 널리 퍼진 후, 그 내용이 하나의 문화로 잡은 현재, 교권침해 행위는 매우 빈번하고 강도 높게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교사들은 어떻게 자신을 지켜야 했을까? 그럼 이에 대해 교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었을까요? 안타깝게도 ‘거의’ 없었습니다. 교사가 체벌이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가할 수 있는 통제수단은 학생생활기록부(이하 ‘생기부’)의 기재뿐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수시의 강화와 학생인권조례의 정착이 거의 비슷한 순간에 이루어지게 되면서 이런 생기부 작성권한이 일종의 권력처럼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성권한이 모든 교사들에게 있어서 방패처럼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생기부를 작성하는 교사는 크게 학급담임교사, 동아리활동 지도교사, 그리고 교과담당교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3가지 중 하나에 속하지 못하는 교사는 생기부 작성권한이 없으므로 학생들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이 사실상 없는 것입니다. 또한, 교과담당교사라고 하여도 학생의 진학 사항과 관련이 없는 과목을 맡고 있는 교사라면 학생이 그 기재사항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기재사항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과목에 비해 학습 태도의 개선도 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생기부의 중요성이 올라갔다고는 하지만, 생기부를 통한 입시를 진행하지 않는 전형을 준비하는 학생이거나, 아니면 초등, 중학생처럼 생기부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시기의 학생들이라면 생기부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벌어지게 된 사건, 사고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만, 대표적인 예시를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기간제 교사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제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서 일어났던 사건이 2015년의 ‘이천제일고등학교 교사 폭행사건’이었고, 최근의 사례로 본다면 2022년 6월에 수원시 초등학교 학생이 학교 복도에서 동급생과 몸싸움을 벌였고, 이를 발견한 교사가 학생 지도를 위해 학년연구실에 데려가자 교사 3명에게 욕설을 하고 실습용 톱을 던지면서 위협한 사례가 있습니다. 하나만 더 이야기하자면, 충남 중학교 학생이 교사의 지도를 무시하고 교단 위에서 수업 중인 선생님 옆에 누운 채 휴대전화를 충전하면서 조작하는 영상이 촬영되었고, 해당 영상이 무단으로 온라인에 유포된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4.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한 사람들은 이를 예상했을까요? 안타깝게도 초기의 정책입안자들은 이러한 현장 상황에는 무지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위에 올려드린 교육부 자료를 보면 2012년에 교권보호를 위한 수단으로써 ‘교권 침해 활동을 한 학생에 대한 선도 및 교육’을 교권침해 예방수단으로 적어놓았거든요. 2013년에는 ‘교권보호위원회’를 마련했고, 2016년에는 교육활동 침해 행위에 대한 보고를 의무화했으며, 2019년에야 학교교권보호위원회 심의를 거쳐 침해학생 조치, 특별교육 미참여 보호자 과태료 부과, 피해교원 특별휴가, 연1회 예방교육, 교육청이 수사기관에 고발조치 근거 마련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교권침해 상황은 더욱 더 활발히 일어나고 있죠. 물론 교육부가 교권의 강화를 위해서 일련의 조치를 시행한다고 하지만, 시행효과가 있을지는 아직 의문입니다. 교사의 생활지도 권한이 강화되고, 교사의 정당한 생활지도에 불응하여 교육활동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행위 또한 교육활동 침해 유형 중 하나로 간주하여 교권을 강화하고, 가해 학생에게는 특별교육 이수 의무화 등의 수단으로 엄격한 제재를 가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핵심 내용인 ‘교권 침해 활동 사실 생기부 기재’의 경우에는 도입을 보류하고 검토한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지요. 5. 당시와 상황이 많이 바뀐 현재, 학생인권조례는 과연 유지되어야 하는가? 여기까지가 학생인권조례의 제정 이후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이에 관련된 정책이 어떻게 제정되고 유지되어 오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야기가 길지만, 교원지위법과 같은 지루하고 긴 여러 가지 말 못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토론을 하는 여러분들의 즐거움을 위해 남겨놓도록 하겠습니다. 학생인권조례는 분명 좋은 취지로 만들어진 제도고 실제로 그 제도의 시행으로 학교의 악습 중 하나인 과도한 학생 폭행 및 체벌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만큼의 반대 급부도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생인권조례와 공존할 수 있는 여러 제도의 도입을 시도해봤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죠. 그러면 앞으로 우리나라 교육 정책 입안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고 다른 방안을 마련해봐야 할까요? 아니면 학생인권조례를 유지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찾아보는 게 좋을까요? 여러분들의 의견을 편하게 들려주세요 :)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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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u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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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참여와 투표의 중요성
민주주의는 소수의 몇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통치가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참여하여 스스로를 통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는 다양한 참여 방식을 제공하며,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고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그럼 학교에서는 어떨까요?   학교에서 민주주의 중심 조직은 학생회입니다. 학생회란 학생이 주체가 되어 어떤 일을 의논하여 결정하고 실행하는 조직이나 모임을 이야기합니다. 학생들과 학교가 소통하고 협의할 수 있도록 이어주고 학교생활을 위한 결정을 더 민주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직인 셈이지요.학생회는 학생들을 대표하는 조직으로써, 학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고 반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학생회는 학생들과 소통하며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이를 기반으로 학생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학교를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학생회가 학교 내에서 학생들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하며, 학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여 학교생활의 질을 높여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학생회 투표 사례와 투표의 중요성 학생회에서 대표적으로 실시하는 투표 사례 중 하나인 학생회 임원 선거, 학생회가 예산을 분배할 때 어떻게 예산을 사용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예산 배정 투표, 학교 내부 시설의 개선을 위해 예산을 사용할 때 어떤 시설부터 개선하면 좋을지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우선순위 투표 등 학생회 투표 사례는 매우 다양합니다. 이러한 투표가 진행되면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학생회를 선출하는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투표를 통해 학생회를 선출함으로써 학생들이 원하는 대표를 선출할 수 있게 되며, 투표를 통해 학생들은 학교생활에 대한 의견을 직접 제시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학교 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대처 방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학교생활의 질을 높이고 학생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할 수도 있습니다.학생회가 계획한 투표와 투표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경험이 될 수 있도록 학교 측에서도 학생회와 투표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합니다. 학교는 학생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학생들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학교 내 정책 수립에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소통을 위한 도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많은 참여와 소통을 위해서는 방식의 전환도 있어야 하는데요. 오프라인으로는 활동의 지식이나 논의 결과가 축적되지 않고, 공유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에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참여할 수 있으며, 결과도 쉽게 정리하고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총학생회 회의 시 온라인 툴을 사용해 본 학생회 담당자는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참여자'가 되었으며, 딱딱했던 총학생회 회의가 생동감있는 회의로 변했다’고 하며, ‘온라인을 통해 손쉽게 휴대폰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점, 이후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양한 학내/외 학생 투표 사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되는 투표는 학생회 안에서 진행되는 자치활동에 대한 선거 및 투표에서 그치지 않고, 학교의 의사결정은 물론, 나아가 국가와 사회의 주요 사안에 대해서도 투표로 의견을 모아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주도하여 의견을 나누고 의사결정을 하면서 많은 활동들이 이어나가고 있어요.  1.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 후보 선거 한국외대는 2021년부터 총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학생과 직원도 투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투표 반영비율을 보면, 교수가 90%를 차지하고 학생과 직원은 각각 5%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전히 불공정하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지만, 교수만의 밀실 선거로 진행되었던 과거에 비하면 진일보한 성과라고 합니다.학생 교수 직원 3주체가 함께 총장 선거를 치르게 되면서 학생과 직원을 위한 공약이 훨씬 더 많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학교 정책에 대한 토론도 훨씬 공개적이고 다양한 내용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3번의 투표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온/오프라인 투표를 진행해 매번 50%가 넘는 투표율을 보이며 총장 선거에 대한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결과로 보여주었습니다.이러한 변화는 한국외대뿐만 아니라 많은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각 대학 학생들이 지난 수십 년간 민주적인 총장 선거제도에 대한 목소리를 낸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국정 농단에 대한 학생들의 움직임 or 학교에서 벌어진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4.19혁명, 5.18운동, 6월 민주 항쟁 등 국가에 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지난 2016년, 박근혜 정권의 민간인 국정 농단에 대한 보도가 연일 이어지며 문제의 심각성이 높아지자, 각 대학 학생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권 퇴진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시국선언을 시작으로 서울대학교와 서울시립대학교를 비롯한 일부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서명운동 및 투표를 통해 동맹휴업을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은 캠퍼스 안팎의 광장에 모여 정권 퇴진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다양한 방식의 행동을 총투표로 결의하고 실행에 옮기며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학생총회, 촛불집회, 거리행진 등을 통해 꺼지지 않고 더욱 퍼져나간 촛불은 결국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결과를 이루었습니다. 3. 환경 보호 운동 세계적으로도 학생들은 환경 보호에 대한 운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전 세계에서 '지구촌 기후 총파업'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환경 보호 운동이 진행되었으며, 세계 각지에서 학생들이 집회와 시위를 통해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정부와 기업들에게 환경 보호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목소리를 내었지요. 한국에서도 기후 위기의 당사자인 청소년, 청년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기후 문제 해결을 위해 유의미한 변화를 만드는 단체인 ‘청소년기후행동’은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면서 실질적인 정책과 정치 변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4. 미국 학생들의 총기 규제를 위한 투표 2018년 2월, 미국 플로리다 주 파크랜드에서 총기 규제를 위한 시위가 일어난 후, 많은 학생들이 투표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18년 미국 중, 고등학생들의 투표 참여율이 23%에서 42%까지 상승하였으며, 이들의 투표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총기 규제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학생들의 노력과 참여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어 자신들의 학교생활과 미래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참여하면, 그들의 의견이 정책과 정치적 결정에 반영되는 기회가 생기며, 이는 민주주의의 원칙과도 일치하지 않을까요?더 나은 학교생활을 위해, 문제 해결과 소통을 위해, 더 민주적인 생활을 위해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투표에 참여해야하며, 사회와 학교는 학생들의 활동에 대한 지원과 의견을 수렴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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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민 광장에서 교육을 외치다
수능시험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나라 한국은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나라입니다. 수능시험 당일 영어듣기 시간대에는 국토교통부에서 비상·긴급 항공기 등을 제외한 국내 모든 공항에서의 항공기 이착륙을 전면 통제합니다. 비행 중인 항공기는 관제기관의 통제를 받으며 지상으로부터 3km 이상의 상공에서 대기해야 하는데요. 이처럼 교육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양해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2022년 기준 초등학교 진학률은 98.5%, 중학교는 98.2%, 고등학교는 94.5% 그리고 대학 같은 고등교육기관 진학률은 71.9%에 이릅니다. (교육누리. 취학률 통계) 학생 사교육 참여율은 78.3%에 달하고, 사교육비 지출은 올해 26조 원에 이르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2023.03.07 정책브리핑)  즉, 웬만하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고등교육까지는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 국민이 같은 경험을 하는 교육이라는 이슈에 목소리를 내본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요?   교육 거버넌스의 부재 중앙대학교 김누리 교수는 “한국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는 사회가 민주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황 때문이다. 과연 다수가 그들의 의사 결정에 의해서 지배하는 거버넌스를 갖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또한 한국 사회의 경제민주화, 정치민주화, 문화민주화의 기형적인 구조를 언급하며, 그 원인은 교육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김누리. 민주주의와 시민의 힘, 민주주의자는 어떻게 길러지는가)  또한 한국은 흔히 말하는 대통령 중심제 국가입니다. 행정부의 정책 기조에 국가의 중요한 정책 방향도 따라가는데요. 대통령 선거 시기가 되면 교육개혁이라는 골자로 다양한 정책, 공약이 나오고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이에 따른 국정과제가 발표됩니다. 하지만 이런 대통령의 통치행위가 교육에 미치는 영향이 마냥 긍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연세대 김혜숙 명예특임교수는 “보수/진보 대통령의 정치 성향에 따라 정책 방향이 바뀌게 되니 안정성은 떨어지고, 선거와 인수위원회 시기를 다 합친다고 하더라도 교육 공약이나 국정과제를 마련하는 시간은 실질적으로 짧다”는 문제를 제기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효과가 수십 년에 걸쳐서 나타나는 교육의 속성을 대통령은 물론 교육감, 정당의 지도자와 정치가, 교육전문가, 언론, 교원단체, 학부모단체, 다양한 이익집단과 시민사회, 그리고 모든 국민 사이에 자리를 잡는 일이 중요하다”라고 주장합니다. (2022.04.07 한국교육신문) 그렇다면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성숙하게 교육 이슈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구성원들의 대화와 토론을 통한 의사결정이 보장된다면 그것은 민주적인 사회이자 민주적인 의사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터 레빈, 알천 청, 존 개스틸은 ‘시민의 이야기에 답이 있다’를 통해 우리 사회의 숙의와 대화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합니다. “숙의 민주주의의 미래를 전망하며 숙의는 정책 선택에 중점을 두는 반면 대화는 수용, 화해, 상호 이해 또는 적어도 관용을 추구한다.”, “대화 단계는 도덕적 논쟁을 해결하거나 정책 목표를 진보시키지는 못한다. 그보다는 그룹 구성원들 간에 깊이의 차이가 존재하는데도 공동 결정에 도전하는 힘든 과정을 준비할 수 있게 해준다.”  대다수의 국민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이슈이기에 모두 목소리를 내면 좋겠지만, 교육이라는 거대한 이슈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에 모든 국민이 참여할 수 있을까요? 실질적으로 어렵다면, 결정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그 이슈에 대해 대화와 토론을 활발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디지털 공론장에서 교육 이슈를 논의하는 방법 매년 교육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일지만 누구 하나 만족스럽다는 말은 없는 한국의 교육입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토론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교육부, 국회를 가리지 않고 교육 이슈에 대한 토론회가 수시로 열리고 있는데요. 이런 토론회는 제도 구성과 개편에 대해 전문가의 발언과 연구 위주로 구성됩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전문가가 아닌 시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요?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슈와 관련된 토론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과 함께 이 공간에서 이뤄진 토론도 소개합니다. 먼저, 캠페인즈에서는  ‘대학 입시’와 ‘교육부의 교육개혁안’에 대한 투표와 토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 교육 속 대학 입시 문제’, 어떤 것부터 논의해야 할까요? 에서는 한국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입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대학서열화, 사교육비, 수능의 적합성, 입시 방법의 다양화, 입시의 신뢰성/공정성, 입시의 상업화, 학교폭력과 입시라는 선택지 중 대학 서열화가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 문제의 시작이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이후 진행된 대학 서열화, 어떤 악순환부터 끊어야 할까요? 에서는 앞서 언급된 대학서열화를 지속시키는 악순환에 대한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학벌주의, 수도권 과밀화, 장기간 학습과 입시경쟁, 사교육 의존과 교육 격차, 청소년의 학업 스트레스와 성적 비관 자살이 선택지로 제시되었고, 전체 200여 표 가운데 100여 표를 학벌주의가 차지했습니다. 이어서 진행된 대학 서열화, 어떤 해결방안이 있을까요? 에서는 대학 서열화에 대한 해결 방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 구축, 거점국립대를 서울대 수준으로 육성, 국공립대/사립대 공동 입학제 실시, 대학 간 학술교류/자원공유 협약 체결이 선택지로 제시되었습니다.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 구축이 가장 많은 표를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댓글이 많았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교육개혁안, 어떤게 가장 중요한가요? 는 교육부에서 제시한 교육개혁안에 대한 투표입니다. 학생맞춤 교육개혁, 가정맞춤 교육개혁, 지역맞춤 교육개혁, 산업/사회맞춤 교육개혁, 교육개혁 입법 추진이 선택지로 제시되었지만,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습니다.  또한 토픽에서는 ‘미국식 교육 모델 도입? 혁신 혹은 되풀이’라는 제목으로 토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육부가 미국의 ‘차터스쿨’을 본딴 한국판 ‘차터스쿨’을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이에 대해 ‘새로운 교육 모델’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제2의 자사고’라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는 여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에 좋은 제도이지만, 입시와 교육 문제의 본질은 이걸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의견 등이 제시되었습니다. 외국어고 폐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라는 토론에는 거시적으로 접근해야한다는 의견과 폐지와 전환 보다는 고등학생들이 교육 불평과 고교 서열화가 생기지 않도록 개편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뉴닉에서는 피자스테이션을 통해 학폭 생기부 기재 강화, 어떻게 생각해?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93.4%에 달하는 참여자들이 강화해야한다는 의견을 냈는데요. “피해자에게 평생 상처가 남는 만큼, 마땅하고도 남는 조치”라는 의견과 “학교는 남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이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반면, “가해자에게도 실효성이 없다”는 의견과 “어떻게 벌줄까를 먼저 고민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또한 교권 강화, 어떻게 생각해? 라는 질문에는 제도로 강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77.8%에 달했습니다. “학생을 바른 길로 이끄려면 교사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과 “학생들의 인권이 소중한 만큼 교사의 인권도 소중하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더 많은 시민주도 공론장을 위하여! 이처럼 특정 직업과 전문성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시민이 참여하고 주도하는 공론장에서 어떤 것을 기대 할 수 있을까요? 다양한 배경과 전문성을 가진 시민들이 모이는 공론장에서 다양한 주제 제시와 관점의 공유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토론이 항상 완벽한 답이나 해결책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뉴스를 보며 화만 내어 휘발되던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에너지를 유의미한 토론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산발되어 흩어지던 아이디어는 더 나은 논의를 위한 공간에 모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공간을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또 내가 설득되는 설득의 공론장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득이 성사되지 않거나 답이 나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의 대화와 토론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경험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특정인들이 논의를 주도하고 결정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시민들이 의제를 던지고 주도적으로 논의에 참여하는 시민주도 공론장이 더 많아지고 활성화 되어야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고 나아가서는 제도화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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