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

대만 이야기(2) 대만의 지금과 이번 선거 이야기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狗去豬來)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 장개석의 국민당 군이 공산당을 피해 조금씩 대만으로 상륙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은 대만 사람들에 대한 약탈, 강간을 서슴치 않았다. 이 이전부터 대만에 살던 사람을 본성인(本省人), 국민당을 따라 대만에 건너온 사람을 외성인(外省人)이라고 부르는데, 본성인들은 국민당의 모습을 보고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狗去豬來)고 탄식했다. -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만 통치가 훌륭했다는 증거로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뻔뻔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 그러던 중, 1947년 본성인들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정치, 경제, 군사, 사법 등 중요한 요직을 외성인들끼리 차지하는 정치적 문제, 국민당군과 외성인에 의한 약탈, 강간 등의 범죄 문제 등으로 인해 본성인들의 불만 등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차별과 그에 대한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던 때의 일이다. 1947년 2월 27일, 남편 없이 혼자 자식 둘을 키우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성이 밀수 담배를 팔다가 적발되었다. 공무원들은 그녀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기 시작했고, 이를 구경하며 공무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공무원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 총격으로 스무 살 학생 천원씨(陳文溪)가 사망하면서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국민당은 3월부터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약 3만 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부천대(國府遷臺) 1949년, 국공내전에서 완전히 패배한 대만은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옮기고 강력한 계엄령을 실시했다. 장졔스(蔣介石)를 중심으로 하는 개발독재가 시작되었고, 10대 건설 등 다양한 경제 발전 정책을 통해 경공업에서 중공업 중심의 국가로 변화해 갔다. (이 모습도 한국과 똑같다) 이 와중에도 중국과 대만은 무력 충돌을 이어나갔다. 1981년까지 거의 한달에 한번 중국과 대만은 포격을 주고 받았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의 군수기지 역할로 대만이 경제 성장을 이룬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계엄령에 반대하며 민주화 운동이 있었던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 1975년 장졔스가 죽고 그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대만 총통 자리를 물려받자 민주화 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1979년 2월에는 『메이리따오(美麗島)』라는 잡지에서 주최하는 시위가 있었는데 경찰이 시위 주최자들을 잡아가면서 대만의 언론 탄압이 크게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이를 메이리따오 사건이라고 부르고 이 때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은 사람이 바로 훗날 총통이 되는 천수이비옌(陳水扁, 1950~)이다. 이 시기 민주화 세력을 비롯해 국민당 비판 세력 등을 모두 묶어 국민당 1당 독재에 바깥이라는 의미에서 당외세력이라 불렀다. 1987년, 장징궈는 민주화 여론을 받아들여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외세력들도 정당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대표가 바로 민주진보당, 줄여서 민진당이라 불리는 세력이다. 대만의 정치 지형 대만의 정치는 양안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범람연맹과 범록연맹으로 나눈다. 범람연맹은 국민당 로고가 남색인 데에서 유래하는 보수파 연합이다. 이들은 중화민국을 중심으로 중국을 재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안에서 중화민국 단독 통일을 주장하는가, 일국양제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중국 대륙의 민주화가 가능한가 등의 이견은 있지만 하여튼 이들은 반-공산주의 색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중국과의 교류 확대를 추진하기 때문에 친중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 미국의 원조 아래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친미성향을 띄고 있기도 하다. 범람연맹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복지, 분배를 강조하는 보수파인 친민당, 민국당 등은 로고 색깔이 오렌지색인 데에서 유래해 범귤연맹이라 불리기도 한다. 범록연맹은 민진당 로고가 녹색인 데에서 유래하는 반중-진보파 연합이다. 이들은 대만 정부가 중국을 점령한다거나, 일국양제로 중국과 통일을 한다거나 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 중 일부는 중화민국이라는 여권에 대만국이라는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중화라고 엮이고 싶지도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꺼려 양안관계에 있어서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러한 역사적 연장 으로 중국과의 통일을 추구하거나 중국과의 교류 확대를 추진하는 국민당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대체로 민진당을 지지하고, 과거 계엄령 하에 있었던 독재정치에 대해서도 반감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이들은 양안의 교류 확대는 중국의 경제 체제에 대만이 잠식되는 것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잘 드러내는 것이 2014년 해바라기 운동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봉열전을 참조) 대만 정치는 중국과의 관계라는 큰 틀에서 둘로 나눠지지만 그 안에서도 과거 독재정치에 대한 입장 차이, 경제 정책 문제, 대만 내 소수민족 문제, 세대/성별/성적지향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슈가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칭더(賴淸德)의 당선과 그 이후 라이칭더는 1959년 신뻬이시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3개월이 되던 해에 부친이 탄광 사고로 죽고 모친이 석탄을 주워 팔며 자식들을 길렀다고 한다(天下雜誌.2017.09.04.). 내과의사가 되었다가 1994년 정치 무대에 뛰어든 그는 여러 자리를 거쳐 2020년에 부총통이 되었거, 2022년에는 민진당 주석이 되었다.  2019년, 그는 민진당의 정책은 반공불반중反共不反中이라고 표현했다(ETtoday.2019.12.23.). 공산당에 반대하는 것이지 중국이 싫은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트와이스 쯔위의 깃발을 놓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 - 대만에서는 쩌우쯔위 국기사건이라 부른다 - 이후에는 대만을 주권국가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이야기를 강하게, 자주 하고 있으며 상당히 강성한 대만 독립 주의자로 보인다. 台獨份子有自己的國旗,拿青天白日滿地紅的旗子,不是台獨份子。 대독분자(대만독립분자)에겐 자기의 국기가 있다.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든 자는 대독분자가 아니다. (ETtoday.2016.01.16.) 我們已是主權獨立國家,不需另行宣布獨立。 우리는 이미 주권독립국가이고, 따로 독립을 선포할 필요가 없다. (自由時報.2017.09.26.) 希望任何國家都應該要正視中華民國存在的事實。 어떤 국가든 모두 중화민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길 바란다. (Newtalk新聞.2017.09.27.) 台灣不屬於中華人民共和國的一部分。台灣斬釘截鐵地就不是中華人民共和國一部分。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에 속하지 않는다. 대만은 명백히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가 아니다. (中央通迅社.2023.08.07.) 台灣是一個民主國家。中華民國國名不必改。 대만은 민주국가다. 중화민국의 국명은 바꿀 필요가 없다. (上報.2023.08.15.) 대만에게 있어서 중국과의 관계는 단순히 안보 문제가 아니다. 2023년 대만의 전체 수출 수지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35.4%이고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18조 3천 억 원 가량인데 이것이 21년만의 최저치다. (한국무역협회.2023.12.16.) 최저치가 35%라는 것은 대만과 중국 사이의 경제 교류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로 한국의 대중국 수출 비중은 2023년에 19.7%, 대미국 수출 비중은 18.3%였다. (지표누리) 이런 상황에서 마치 대만이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할 것 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상황을 진짜 모르는 것이다. 물론 선거를 앞두고 중국이 대만에 무역 제재를 행하는 썩 좋지 못한 수를 두었고 이 때문에 대만에서도 새로운 수출길을 모색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중국 경제가 코로나 이후 상당히 심각한 상황을 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난 2014년, 대만 젊은이들의 시위인 해바라기 운동이 일어난 이유는 중국과 대만이 서로 노동시장을 개방하는 협의를 진행하려 한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대만 안에도 취업, 결혼 등의 이유로 대륙 중국인들이 꽤 많이 들어와 살고 있고, 대만 연예인들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꽤 많다.  대만인들에게 중국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너무 멀어져도 안 되지만 가까워져도 안 된다. 이미 홍콩을 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홍콩의 우산혁명만을 기억하지만 홍콩에도 계급이 있고 정치 지형이 있다. 홍콩의 집값은 살인적이다. 그래서 홍콩 부자들 중에는 아무리 좋다고 해도 홍콩에서 다닥다닥 붙어 사느니 대륙으로 가서 넓은 집에서 살겠다고 홍콩을 떠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도 굳이 사람들과 싸우는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주느니 홍콩 사람들을 대륙으로 가게 하고 대륙 사람들을 홍콩으로 가게 해서 서로 섞이게 하면 그만이다. (물론 지금 시진핑의 중국 정부가 이 정도로 세련되지 않아서 문제다.) 대만에도 한국 농촌에서 외국인 신부를 맞이하는 것과 마찬가지 모습으로 대만 농촌의 노총각에게 시집 간 중국 여성들이 꽤 있다. 냉전 이후 양안관계는 정치적 현안에 따라 부침은 있으나 남북한에 비하면 서로 분리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가능성도 낮다. 대만의 군사력이 중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결코 약하지도 않기 때문에 중국도 엄청난 피해를 봐야함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중국과 대만의 전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물론 최근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사태가 불러온 전쟁 공포도 있지만 미국의 태도와 중국의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보통의 국가는 매년 연초나 새해가 되기 전에 새해의 경제 성장률을 추정하고, 중간에 수정을 하기도 하며 연말에는 그 추정이 어느 정도 맞았는지 발표를 한다. 하지만 중국은 연초에 발표한 경제성장률을 수정하지 않고 무조건 연말에 맞춰놓는다. 이래저래 해봤는데 경제 성장률이 예상에 못 미치면 부동산에 거액을 풀어서 경기를 끌어올리는 식으로. 하지만 23년부터는 이게 안 먹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동산 살 돈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코로나 기간 동안 돈을 풀지 않았다. 그래서 코로나가 끝나도 도무지 경기가 좋아지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시진핑은 거의 매년 국가의 부패를 잡겠다면서 우리로 치면 장관급부터 거의 모든 공무원을 숙청하고 있다. 하지만 부패는 이런 식으로 잡히지도 않거니와 결국 다음 세대의 정치인이 나오지 않는 결과만 초래되었다. 시진핑 다음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오는 이유는 시진핑의 장기 집권 때문도 있지만 이런 이유가 크다. 그래서 이런 방식 저런 방식을 다 썼는 데에도 경제가 안 살거나 정치적인 인기를 얻기 어렵다고 여겨지면 독재자들은 결국 극단적인 수를 쓰게 되지 않겠냐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진핑과 중국이 자원의 부족, 특히 식량의 부족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 힘들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다. 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다 대비해야 겠지만 전문가들의 중국 예측에는 객관적인 예측 이전에 사적인 감정이 많이 담겨있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대만 입장에서도 미국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도, 이스라엘에도 직접 파병을 하지 않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전쟁을 바라는 대만인이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우세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만 믿고 중국과 각을 세울 수 만도 없다. 입법원(국회)에서 민진당보다 국민당이 우세한 결과를 얻은 것도 어쩌면 혹시 모를 민진당의 급발진에 대해 브레이크 역할을 하기 바라는 대만 국민들의 민심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추신: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전쟁 시나리오를 예측하자면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남한과 북한은 파병을 하기보다는 서로를 노리며 힘의 균형을 도모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병력이 아니더라도 돈이나 무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미 미국 정치권에서는 한국을 향해 본인들이 강대국인 것을 좀 인정하라는 이야기가 나온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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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이야기(1) 대만의 옛날
2024년은 선거의 해이고, 그 포문을 연 첫 선거가 바로 대만 총통 선거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대만의 역사 대만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빙하기 이후라고 한다. 『삼국지(三國志)』「오지(吳志) 오주전(吳主傳)」에 보면 오나라 왕 손권이 황룡 2년(230) 정월에 장군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을 시켜 바다 건너의 섬 이주(夷洲)와 단주(亶洲)에 가게 했는데 이 두 사람이 이주에 살던 사람 수천 명을 강제로 끌고 왔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온 이주와 단주가 대만이라고 하기도 한다. 대만이 본격적으로 중국 역사 안에 서술되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 때다. 이때는 지금의 펑후제도(澎湖諸島)와 대만 일대를 복건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에 속하는 하나의 영역으로 보았다. 본격적으로 대만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명나라 때의 일이다. 왜구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대만이 왜구의 근거지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고, 먹고 살기 힘들어진 중국인들이 바다를 건너 대만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또 이 즈음은 유럽의 대항해시대에 해당한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인도양을 거쳐 동남아시아까지 들어왔다가 대만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포르투갈 사람들이 대만에 붙인 별명이 바로 아름다운 섬, 포르모사(Formosa)다. 아름다운 섬 16세기 말, 17세기 초가 되면 일본은 전국시대를 마무리짓는 시기였고 중국도 대제국 명나라가 쇠약해지는 시기였다. 그 사이에서 조선은 소위 양란이라 불리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겪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역시 이 틈을 타 명나라가 갖고 있던 펑후제도를 점령하고 1624년부터는 대만 따위엔(大員)에 요새를 쌓기 시작했고, 2년뒤에는 스페인도 지롱(基隆)에 요새를 쌓기 시작했다. 두 세력이 대만에서 각축을 벌이다가 1642년이 되면 네덜란드가 스페인 세력을 대만에서 완전히 추방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중국 복건성, 광동성 연안의 중국인들을 모집해 대만으로 데리고 가 농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시기 대만 원주민들이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는 뜻에서 타요우안(Tayouan)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지금 타이완의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정성공(鄭成功) 네덜란드가 대만에 요새를 쌓기 시작한 1624년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 하나 태어났다. 중국인 무역상이자 무장집단의 수장이었던 정지룡(鄭芝龍)이 지금의 나가사키 근처인 히라도(平戸)번의 무사 타가와 시치자에몽(田川七左衛門)의 딸 마츠(まつ)와 하룻밤 정을 쌓고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이가 바로 정성공(鄭成功)이다. (중국역사박물관 소장 정성공화상) 타가와 마츠는 정성공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중국 복건성으로 길을 떠났다. 머리가 좋았던 정성공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해 생원이 되었고, 당시 이름난 유학자였던 전겸익(錢謙益)의 제자가 되었다. 전겸익은 동림당(東林黨) 소속이었다. 당시 명나라 황실과 정치를 비판하던 재야인사들이 동림서원에 모여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며 하나의 학파이자 정파인 동림학파/동림당을 결성하게 된다. 이들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양명학을 비판했다.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주자학이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기 쉽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행을 하여 사사로운 욕망을 줄여나가야 하고(존천리거인욕) 이를 통해 개인의 도덕적 수양이 천하라는 공적인 영역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해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양명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인간의 마음 그 자체가 곧 하늘의 이치라고 주장하면서(심즉리) 인간의 자유의지는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림당을 중심으로 한 주자학 그룹은 양명학의 ‘자유에 대한 강조’가 천하를 그르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림당은 주자학 중에서도 살짝 특이한 그룹이었는데, 그들은 학문적 목적이 사회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사회적 욕망과 도덕적 수양, 정치적 활동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 속에서 천하의 이치(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유럽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고 농업, 공업 기술의 발전과 경영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천하의 이익을 위해서는 군주제가 아니라 지방 분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성공은 이 그룹에서 지식인/개인의 강렬한 사회적 의무에 대한 마음가짐을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1644년, 농민봉기군의 수장인 이자성(李自成)이 궁궐에 난입해 명나라가 멸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리장성을 지키던 장수 오삼계(吳三桂)는 이 소식을 듣고 성문을 그냥 열어버렸고 이로 인해 만주족이 장성을 타고 내려와 청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때 명나라 지식인들 중 일부는 청나라에 대항하는 군대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정지룡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황족인 주율건(朱聿鍵)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주율건은 정성공의 외모가 수려한 것을 보고 매우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딸과 결혼하게 하겠다, 명나라 황실의 성인 주씨를 하사하겠다 운운했는데 정성공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이 널리 알려지면서 정성공에게는 ‘나라의 성씨를 받은 나으리’라는 뜻의 국성야(國姓爺)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것이 바로 정성공의 영어 별명 중 하나인 콕싱야의 어원이다. 청나라와의 싸움 와중에 아버지 정지룡이 청나라에 항복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더이상의 저항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정성공은 자신의 부친과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군대를 이끌며 청나라와 싸웠다. 각각의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청나라의 강력함을 이길 수는 없었던 정성공은 결국 대만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것이 1661년의 일이다. 1661년, 펑후제도를 점령한 정성공은 같은해 3월에 네덜란드가 쌓았던 강력한 요새 질란디아(Zeelandia)를 포위, 1년 남짓 공격한 끝에 네덜란드 세력을 대만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게 되었다.  정씨왕조 네덜란드 세력을 타이완에서 완전히 몰아낸 정성공은 대만을 동도(東都)로 개명하고 정씨 왕국을 세웠다. 정성공은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낸 1662년에 병으로 사망했고, 아들 정경(鄭經)이 뒤를 이었다. 정경은 1681년에 사망했고, 그 다음은 정경의 아들 정극상(鄭克塽)이 뒤를 이었는데 정극상은 1683년에 청나라에 항복해버린다. 이를 통해 정씨왕조의 대만통치도 끝이 난다. 정성공 일족의 대만 통치는 20년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대만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고 대만 개발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대만의 시조이자 개국 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화외지지(化外之地) 정씨왕조의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는 대만에 대만부, 대남현(타이난), 고웅현(까오슝), 가의현(쟈이)를 설치하고 복건성 아래에 편입했다. 하지만 대만은 어디까지나 변방이었다. 청나라 황실에게 있어서 대만은 황제의 교화 바깥의 땅(화외지지化外之地)였고, 대만에 정착한 중국인과 대만 원주민도 교화 바깥의 백성(화외지민化外之民)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중국인들은 끊임없이 대만으로 건너갔고, 19세기가 되면 그 이전에는 사실상 대만섬 전역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 (이전에는 대만섬 남쪽에 주로 살았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과 대만 원주민들의 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만인이라 불리는 한족 그룹이 만들어졌다. 원주민들도 이렇게 한화된 대만 원주민을 평보족(平埔族), 평지에 사는 사람들이라 불렀다. 1839년, 아편전쟁이 시작되면서 청나라 내부의 갈등과 모순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이후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여러 열강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대만에도 드나들게 되었다. 청나라 측에서도 대만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뒤늦게 인식하고 1885년, 대만을 복건성에서 분리해 대만성을 만들고 대만을 적극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진다. 여러 신료들은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하건 협상을 벌이건 우리끼리 알아서 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고종이 강력하게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톈진조약의 조선에 청나라가 출병할 경우 일본도 자동출병해야 한다는 조항에 따라 일본군도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청일전쟁의 시작인 것이다. 결과 역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배하게 되었다. 결국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이 대만 통치를 시작한다. 대만총독부 1895년, 대만에 살던 사람들은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대만민주국을 건립했다. 이때 일본군과 벌인 일련의 전쟁을 을미전쟁(乙未戰爭)이라 부른다. 하지만 대만민주국은 우리가 예상하듯이 패배하고 말았고, 1896년이 되면 일본이 완전히 대만을 장악하고 통치하기 시작한다. 일본에 대한 대만 내부의 여러 활동은 조선과 꼭 닮아 있다. 친일파도 있고 독립세력도 있으며 이들이 좌우로 나뉘어 싸움을 벌인 것도 똑 닮았고, 식민지 후기에 황국신민화 정책이 벌어진 것도 똑같다. 한가지 다른 점은 일본이 싫으면 언제든지 대륙으로 넘어가 생활을 하거나 일본과 싸울 준비를 하는 한족의 입장과 일본이 싫어도 이 땅을 떠날 수 없는 원주민의 입장, 이 두 가지 입장이 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기억했으면 하는 두 가지 무장 투쟁 사건이 있다. 하나는 1915년에 벌어진 시라이안(西来庵事件)이다. 이 사건에서 대만인 14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하나는 1930년 원주민 세디크족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인 우서 사건(霧社事件)이다. 한국에는 막연하게 대만이 친일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마치 독립 운동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인터넷 검색만 좀 해봐도 다 알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소위 전문가 딱지를 붙이고 나온 사람들이 너무 성의 없이 떠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시라이얀 사건을 주도한 위칭팡余淸芳의 사진. 일본인들과의 경제적 차별로 인해 벌어진 무장봉기였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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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이목이 쏠린 2024 대만 선거
2024년 첫 선거이자 대만을 너머 중미전으로도 다뤄지던, 대만 제16대 총통 선거가 1월 13일 치뤄졌다. 중앙선거위원회에 따르면 각 후보 득표수(득표율)는 다음과 같다. 라이칭더(頼清徳): 558만 6019표(40.05%), 허요우이(侯友宜) : 467만 1021표(33.49%), 커원저(柯文哲)  : 367만 466표(26.46%).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 라이칭더(頼清徳, 64)가 총통으로 당선되면서 중국, 미국, 한국 등 주변 나라가 오히려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한국 역시 대만 선거결과가  한국에 끼칠 경제적 정치적 영향 등을 분석하는 글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대만에게 이번 선거는 어떤 의미였을까  대만에서 직접선거가 치뤄진 역사는 30년 정도밖에 안 된 최근의 일이다.  4년 중임제에 8년 주기로, 민진당의 차이잉원이 8년간 대만 첫 여성 총통으로 활동한 뒤, 또 다시 민진당의 라이칭더가 16대 총통으로 당선되면서 8년 주기로 번갈아 집권하던 당교체는 희석되었다.  1. '친중이냐 친미냐’,라기 보다 ‘민주주의를 지킬 것인가 잃을 것인가’의 문제  대부분 친중의 국민당, 친미의 민진당의 대결 구도에, 새로 등장한 중도 성향의 대만민중당, 세 당의 승부로 보았다.  국민당은 중국과 협력하여 평화를 지킬 것을 표방했고, 민진당은 독립국가로서의 중국과의 분리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또 대만민중당은 현재 체제(양안)를 유지하는 것을 주장했다. 핵심이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모아져 있었다. 그러나 좀더 주의깊게 살펴보면 대만인들에게 더 중요한 사안은 ‘민주주의를 지켜갈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대만에서 중국에 대한 반감이 거세진 것은, 중국 정부의 경제적 정치적 압박 탓이 크다. 우선 홍콩 사태와 관련해서 중국 정부의 폭력적 대응을 본 대만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생겨났다. 중국 정부의 한층 강화된 통제 검열과 시진핑 주석의 일당 독재체제는 과거 역사로 회기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것은 곧 대만 민중들이 힘들게 얻어낸 자유민주주의를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을 낳았다.    2. 민중당 커원저 후보로 간 제 3의 표심, 선거를 판가름하다  대만인들은 왜 민진당의 라이칭더 총통 당선을 선택했을까. 앞선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이 타이완 정체성을 주장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이루었고, 경제적으로도 발전한 점, 또 코로나19에 대한 적절한 대응 등도 대만인들이 언급하는 주요한 요인들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이번 선거의 결과를 좌우한 것으로 꼽히는 부분이, 대만민중당(이하 민중당)으로 분산된 표심이란 사실이다. 국민당과 민중당의 야권 단일화가 실패하면서 국민당을 지지하거나 민진당을 지지하던 표심 중 적잖은 수가 민중당으로 향했다. 이들은 대부분 젊은 층으로, TV나 현수막, 집회연설 등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국민당과 민진당보다, 인터넷 SNS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내세운 커원저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또한 크게 변화하지 않는 현상 유지에 좀더 매력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젊은층은 커원저 후보가 총통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민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데에 의의를 뒀다고 말한다.  특히 선거 막판에 중국 정부의 전쟁 도발 위협과 국민당 총통이었던 마잉지오우(馬英九)의 “나는 시진핑 주석을 믿는다.”는 발언은 민중의 표심이 민진당으로 향하게 역효과를 냈다.  3. 입법의원 의석수로 드러난 표심 - 여러 당이 공존하는 민주주의를 원하다    대만 선거는 총통 부총통 선거 뿐 아니라 입법의원 선거도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민진당이 과반수 이상의 의석수를 점하지 못했다는 것, 근소한 차이로 국민당이 앞서고 소수 정당들이 늘어나, 여소야대의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민진당 지지자들로서는 아쉬움을 표하긴 하지만, 국민당이나 민중당 지지자들은 국가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데에 안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입법의원 선거 결과 역시 대만 민중들이 바란 것은, 급진적인 독립이나 중국으로의 치우침이 아닌 현상 유지와 다양한 의견이 공존할 수 있는 민주주의 자체였다.  한국에게 대만 선거는 왜 중요했나 경제적인 부분에서 대만 선거가 중요했던 것은.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과 경쟁하고 있는 TSMC가 대만 주력 반도체 사업이기 때문이다. 생성형 인공지능 시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반도체 경쟁은, 4차 산업의 주요 격전지다. 한국에서는 삼성의 반사이익을 계산하기도 했지만, 민진당의 라이칭더 후보의 당선과 여소야대 국면은 대만을 둘러싼 반도체 경쟁에 큰 변화를 끌어당길지는 의문이다. 다만 대만의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은 확실히 더 부각되었고, TSMC 등 대만 경제와 AI시장과의 관계가 전 세계 AI 시장과 연관되어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의 특이점이 있다.  정치적 부분에서는 역시나 중국과 미국간의 갈등이 대만 선거에, 또한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염려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라이칭더의 당선으로 한국, 미국, 대만, 일본이 협력구도를 유지하는 현재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앞으로 중국정부가 대만을 상대로 어떤 정치적 경제적 제재나 압박을 가할지가 주목된다. 이미 중국정부는 이번 선거로 대만 민심이 중국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으로 파악하고 내부 진단에 나섰다.  그럼에도 대만인들은 의연하다. 대만이 민주주의를 잘 구현하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이번 선거를 통해 더 확고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가 폭력을 내세운 방식으로는 대만 민심을 되돌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대만이 급진적으로 중국과 척을 지고 독립국가로 가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두 나라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긴장과 묘한 협력관계와 더불어, 국제 사회 역시 대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중국 정부에 대한 눈치 보기로 적당한 거리두기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한국의 총선이다. 한국 총선에서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지가 2024년 새로운 국제적 이슈로 부상할 것이고,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시험대가 될 것이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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