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개혁·군인권

눈 치우는 노동 속에서 군무새가 태어난다
강원도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내가 있던 부대는 산 위에 있는 작은 포대라, 온통 하얗게 눈 덮힌 산을 7-800m 고지에서 내려다보면 제법 멋지긴하다. 내가 그것들을 치워야 하는 병사라는 제약에 매여 있지 않았다면, 더욱 맘편히 그 경치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북극에 사는 이누이트 족은 눈을 표현하는 낱말을 수백 개나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혹시나 해서, 진위를 찾아보니 날조된 사실이라고 하더라. 다만, ‘눈’ 이라는 낱말 자체로는 무언가 다 담기지 않는 느낌이 들긴한다. 그때 내린 눈은 처음엔 비가 오다가, 진눈깨비로 변했다가, 결국 눈이 되었다. 적은 양이라면, 바닥을 적신 비와 함께 녹아 흘러갔겠지만, 이번엔 젖은 바닥을 다 덮고도 쌓일만큼이나 눈이 내렸다. 물에 젖어있던 바닥위로 내린 눈은 녹고 얼고를 반복했는지, 이미 딱딱히 굳어져 거의 빙판이되었고, 그 빙판위를 20cm 가량 되는 눈이 수북이 덮었다. 그 눈이 품고있는 무게감은 이전에 쌓인 눈과 차원이 달라서 이것도 같은 ‘눈’이라는 단어로 부를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평소의 제설 작업은 제설용 넉가래로 밀면 쉽게 밀려서 그나마 금방 치울 수 있었지만, 이번에 치운 눈은 넉가래로는 도저히 밀리지가 않았다. 기운 센 병사가 무리해서 힘을 주면 도리어 나무로 된 허리가 부러져나갔다. 결국 플라스틱 눈삽으로 크게 한 삽씩 퍼다가 열걸음쯤 걸어서 배수로 너머로 넘겨야 했는데, 그마저도 눈이 무거워 쉽지 않았다. 삽질을 하다보면 허리가 부러지거나, 플라스틱 부분에 구멍이 뻥뻥 뚫렸다. 간신히 위에 쌓인 눈들을 거둬내면, 그 뒤엔 깡깡 얼어버린 바닥을 철삽으로 깨부숴, 그 파편을 또 옮겨야했다. 믿고 있던 제설차조차 올라오지 못했다. 눈의 무게감과 얼음의 미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체인이 부러져 버렸단다. 평소에 제설차로 밀어버리던 구역 대부분을 병사들의 노동에만 의존해 해결해야 했다. 이런 육중한 무게감을 눈이나 제설이란 단어로는 다 담아내기가 어려웠다. 병사들은 그래서 눈을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 부르게 되나보다. 쓰레기는 치워야 하니까. 눈이 내리면 애꿎은 하늘을 원망하게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강제적인 노동을 부여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것을 즐길 수 있을까? 사실 엄밀히 말해, 눈 자체가 우리를 노동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수백미터 높이의 산 위에다 대공포대를 세우고, 영공을 지켜야한다는 ‘국가적 의무’가 우리를 강제 노동하게 한다. 실은 군대에서 수행해야 하는 모든 일이 다 그렇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병사들은 알게 모르게,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에 저항한다. 병사들의 행위를 일종의 사보타쥬(sabotage) 또는 태업(slowdown)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제설 삽을 집어 던지거나, 느릿느릿 체력을 유지하며 움직이거나, 담배를 태우거나, 물을 마시러 가거나, 화장실에 가는 둥 말그대로 몸을 비틀며 강제노동을 한다. 이때 병사들의 계급은 그 자체로 어떤 분할의 장치로 편리하게 기능하는 것 같다. 이병은 아직 적응도 못했다치고, 일병은 서툴러도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 하고, 상병은 어느정도의 숙련으로 모범을 보여야하고, 병장쯤 되면 작업 자체에 신경쓰기보다, 슬금슬금 관리자의 눈치를 본다. 군대에서 말하길 계급과 위계는 숙련도와 효율성을 고려하고 책임을 부여하는 장치라지만, 실제로 계급은 징병제와 맞물려서 그와는 정 반대의 경향을 만들어낸다. 기간제 강제 노동에 복역하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노동 기간이 많은 병사일수록 계급이  높고, 이전에 열심히 했다는 핑계로 부과된 노동에서 이탈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병사들에게 군 복무는 결국 끝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되고, 해야하는 노동은 부과된 것일 뿐 그에 따른 성과를 보상 받을수도 없으며, 성취감을 느끼기도 어렵다. 이런 노동에 자발적으로 열심히 나서는 이는 대부분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동료 병사들이 감당해야 할 고됨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병사들의 선의와 명령, 감시, 처벌 등의 강제에만 기대는 시스템은 취약하다. 때문에 감시가 느슨한 곳에서는 소위 ‘짬질(계급이 높은 사람이, 계급이 낮은 사람에게 일을 미루는 등의 행위)’이 구조적으로 발생한다. 직접적으로 부당한 지시를 하거나, 언어적 •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줄어들었겠지만, 은근히 작동하는 이 ‘짬질’은 시스템 자체가 부추기는 것이다. 병사들은 집단적 의사표현이 금지되어 있고, 항의나 저항, 파업은 군법에 의거해 처벌된다. 때문이 병사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부과된 노동을 다른 병사들에게 은근히 미루거나, 게을리 하거나, 강제로 떠넘기거나, 선의를 발휘해 열심히 하는 것 뿐이다. 결국 징병제와 계급제도라는 한국 군대의 핵심적인 두 장치가 개혁되지 않는다면, 군 복무는 병사들에게 자유의 박탈, 강제노동, 잠재된 갈등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를 병사가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착하고 책임감 있는’ 이가 되려 노력하거나, 시스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원래 군대는 이래’,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는 이가 되는 것이다. 계급과 무관하게 노동을 평등하고 균등하게 수행하려 하더라도, 편하게 지내고 싶은 동계급의 눈총을 받게된다. 또 그 일관성을 끝까지 고수하지 못하면 결국 어느 순간 애매해져 버린다. 시스템 자체에 문제를 느끼던 이는 그것을 바꿀 실질적 행위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강제된 노동과 규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 애매하게 주체화되어 시스템에 동조하면서도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끼는 이들(많은 이들은 이렇게 애매한 군인이 되지 않을까?) , 마지막으로 군대의 시스템과 질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한 주체들이 생산된다. 군대의 시스템과 질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한 이들, 소위 ‘군무새’는 이렇게 ‘생산’된다. 결국 내게 눈의 무게감은 눈 자체의 무게 외에도, 부과된 강제 노동과 징병제, 계급제도의 무게가 가산된 무거움이다. 그래도 오늘 제설을 마무리할 즈음엔 다른 병사들과 제법 커다랗고(무려 4명이 달라 붙어서, 머리를 얹을 수 있었다.) 조금은 삐뚤빼뚤한 눈사람을 하나 만들어 기다란 고드름을 양팔대신 꽂아주고, 웃을 수 있었다. 병사들이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 노동의 성취감과 즐거움, 그리고 동료애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아마 징병제와 계급제도는 좋은 방식이 아닐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 높은 산 위에,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에 막대한 자원과 에너지 그리고 노동력을 쏟아 부으며, 비상 상황에 대비해야하는 이 분단 체제와 국민국가 체제 자체를 넘어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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