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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전세사기 대란 1년, 정치권은 응답하라!

2022년부터 본격화된 전세사기 대란이 평범한 사람들의 주거권을 위협하고 있다. 월 주거비를 줄이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위해 잠깐 머물러 있을 집을 구하고자 전세계약을 체결했지만,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경매·공매가 진행되어 집에서 내쫓기고, 전세대출을 갚지 못해 신용도 빼앗기는 등 생존의 위협을 겪는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2023년 6월 1일, 「...

이철빈
토론
선거 때만 찾아오는 쪽방촌... 우리를 병풍 삼지 마십시오

[22대 총선] 여기, 주거 정책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있어요! 2024 총선주거권연대 연속기고 첫 번째, 동자동 쪽방 주민의 이야기 노동, 빈곤, 종교, 청년, 주거시민단체 등은 부동산 정책만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무분별한 부동산 규제 완화를 저지하고 주거불평등 심판, 온전한 주거권 실현을 위해 ‘2024 총선주거권연대’를 출범하였습니다. ‘2024 총선주거권연대’는 주거권...

2024 총선주거권연대
토론
🗳️ 22대 총선 결과 정리

22대 총선이 끝났습니다. 결과는 더불어민주당의 압승, 국민의힘의 참패인데요. 이로써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내내 국회에서 여당보다 야당이 큰 첫 대통령이 됐습니다.총선은 끝났지만 유권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많습니다. 당선자들이 제대로 일하는지 감시하고, 원하는 것을 요구해야겠죠. 나의 선택이 선거 이후에도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요.앞으로 3년이 어떻게...

애증의 정치클럽
토론
2년 만에 10년 후퇴한 윤석열 정권의 자유민주주의

윤석열 정권 3년차, 민주주의 평가하기①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선행 게재되었으며, 이후 얼룩소에 동시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 Dall E 3로 필자가 직접 생성. 썸네일용. 우리가 특정 정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여러 가지다. 경제 성장이 얼마나 됐는지 평가할 수도 있고, 외교 문제를 얼마나 잘 헤쳐 나갔는가, 복지를 기준으로 얼마나 잘 분배했는가, 과학 기술을 얼마나 발전시...

김재경
토론
[김용균 5주기] 산업재해 피해자로 마주한 삶

면접을 위해 마련한 정장을 입은 김용균씨 우리 부부는 자식이 태어나며 더욱 행복이 충만한 가정이 되었다. 모든 중심은 용균이었고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별 탈 없이 잘 자라는 것을 보며 너무나 행복했었다. 특별히 공부하라고 다그친 적도 없이 알아서 노력하는 편이라 내신성적만으로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덧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1년 동안...

김용균재단
토론
중대재해처벌법 첫 실형 확정, 어떻게 보시나요?🤔

(출처:unsplash) 이제 원청 대표가 처벌 받는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적용 범위와 처벌 수준 등에 이견이 많았죠. 결국 이 법은 50인 미만 사업장을 제외하고, 3년의 유예기간을 거치며 준비 단계를 밟아 작년부터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2023년 4월에 노동자 사망사고에 대해 업체 대표에게 징역이 선고되면서 중대재해법 첫 실형 선고 케이스로 이슈가 되기도 했는데요. 성 대표는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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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교육보다 안전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4.16 세월호 참사로 인해 강화된 안전교육의 의미 4.16 세월호 참사 가족 협의회는 “철저한 진상규명, 강력한 책임자 처벌,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참사 재발방지대책 수립,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는 대한민국의 건설”만이 304명의 죽음을 거룩한 희생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말을 근거하여 생각해 보면, 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안전교육‘은 안전사회로 가는 길목의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이 사회가 안전한 사회로 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이 밖에도 너무 많다고 생각됩니다. 왜 아이들이 안전교육을 받아야 하는 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 막연한 사회적 공포감을 근거로 한 이런 교육만으로는 한계가 너무 분명해 보입니다. 반복되는 안전 교육에는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참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또 이와 관련하여 하위 공무원 몇 명이 처벌을 받는 것으로 거의 대부분이 마무리되는 것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야말로 피해자였고, 앞으로도 그런 위험에 놓여질 아이들을 대상한 ‘안전교육’도 꾸준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현재, 유치원과 초중고 학생은 학기당 51시간 이상, 교사는 연간 15시간 이상 안전교 육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규정했습니다. 모든 초등학생은 의무적으로 생존 수영도 배우고 있습니다...김병욱 국민의미래 의원이 2022년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국에 수영장을 보유한 초등학교는 81곳으로 전체 학교(6157개) 대비 1.3%에 불과합니다. 생존 수영 이론 및 실습교육에 참가한 초등학생은 전체의 57%에 불과했고 물에서 실기교육을 이수한 학생은 전체의 2%뿐이었습니다. (경향신문 2024.4.1. 보도 자료) 이와같이 안전교육이 이론 위주의 반복적인 교육형태만으로 남아지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정말 보호해야 할 이들은 피해자인데, 누군가를 보호하려고, 은밀히 그리고 넌지시 ‘너희들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점이 제일 큰 잘못이야’라고 반복하여 주문을 거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반복 주문 행위는 앞으로도 쭉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세월호 사건 당시, 충분한 탈출 가능시간이 있었음에도(약 2시간) 승객들은 "움직이면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는 무책임한 방송을 듣고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이와같이 정작 중요한 안전법칙을 무시한 체, 각자도생의 방법만을 가르치는 안전교육은 우리에게 여전히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다. 그것만을 기억해라, 오로지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다. 누구도 책임질 사람은 없다’는 주문을 외우게 하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문제가 리더들의 판단착오와 책임감 부재로 만들어진 분명한 인재(人災)입니다. 사고 당시 해경에 구조요청을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시기적절한 유효 조치가 없었다는 점, 선장 이준석 등 선박직 승무원들이 승객들을 뒤로 하고 1차 탈출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현재와 같은 반복적인 안전교육만으로는 세월호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점을 놓치게 된다고 봅니다. 심지어, 세월호 선원들이 침몰사고 직전 자신들만 아는 통로를 이용해 배에서 탈출했다는 정황이 드러났고, 당시 청와대에서는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의 명시적 규정에 따라 국가위기상황에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했어야 했다는 점도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안전교육’은 각자 도생을 근본으로 하는 재난 탈출 방법을 배우게 하는 것인데,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까? 크게 2가지 의문이 듭니다. 하나는 정작 배워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점, 또, 아이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배워야 할 게 이것 말고 또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사회구조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이들이 몰래 도망하는 형국에서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 항의하는 일이 진정한 용기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이런 불의한 일을 대면할 때에 그렇게 많은 용기를 갖지 않은 채로도 당당히 담담히 ‘아니다’,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라는 말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격려하는 일이 더 우선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안전교육”보다 더 중요한 “안전사회를 만드는 일”에 진심인 분들의 소리에 답이 있습니다. (사) 4.16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의 정식 명칭은 “(사) 4.16 세월호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입니다. 그분들의 목표는 이런 겁니다. “다시는 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포기하는 일이 없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만 내 아이에게 덜 부끄럽고 덜 미안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반복하여 안전교육을 실시함과 동시에, 진정으로 이 땅에 안전사회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이 분들의 소리를 정확히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정기적으로 꼭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그래야만 안전교육이 반복 구호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생한 소리를 전달받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안전교육을 받는 아이들에게 이 사회가 아직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함께 일깨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의 이야기 속 어디에도 “우리 아이가 미처 안전교육을 잘 받았더라면...”, 혹은 “우리 아이가 인공호흡법을 미리 잘 알았더라면...”이런 말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꿈같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주 잠시만이라도 그 우리가 늘상 해 오고 있는 안전교육 시작 전에 “진상규명은 어디까지 되었으며, 책임자는 어느 정도 처벌을 받았고, 참사 이후로 국가는 근본적이고 지속적으로 어떤 대책을 수립하여 시행하고 있는지” 에 대한 설명이 꼭 주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미완이면, 미완인 채로 말입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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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깨 기억] 개인의 아픔에서 공동체의 기억으로, -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한 시민의 상황에서
안녕하십니까, 이 글을 적으면서 10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그때 저는 대학교 학생으로서 대학 생활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학과 공부를 마치고 레포트를 준비하며 여러 시험과 토론, 논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대학 생활을 하는 시점에 수업을 듣고 나오는데 저의 스마트폰에서 지속적인 재난 문자 알림이 오더라고요. 지금은 관련 지역만 뜨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떴으니까요. 그 당일에는 저도 잘 몰랐고, 수업 끝나고 쉬는 시간이라 뉴스 속보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확인을 하려는데 굉장히 슬픈 소식들이 연이어 올라오더라고요. 그 시점쯤 됐을 때 저 역시 상황을 인지하고 제 몸과 마음이 반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저시력 시각장애인이었고, 진행성으로 인해 그때 당시에 막 중증 장애로 진행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이 사건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회는 중증장애인의 재난대피에 대해 무관심한 상황입니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가 얼마나 재난에 취약한지 더 많이 느끼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수학여행을 아이들과 함께 가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이동하여 참사를 피했다는 그 학교 장애 학생분들의 이야기를 어느 경로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장애 학생들의 그 마음은 어떨까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자신들이 이 상황에서 자신들이 배제됨으로 인하여 안전을 확보했다는 것으로 인해 희생자들을 포함해 그곳에 갔던 수많은 사람에게 대한 부채감과 죄책감으로 시달리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저는 중증의 시각장애인 당사자로서 그 학생들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재난 시기 거주 시설에서 집단생활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사망하는 일이 여러 지역에서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대한민국 사회는 매우 위험하고 장애 당사자가 스스로 이야기하고 해야만 그나마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지는 상황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면서 모든 이의 인권이 보편적으로 지켜지면서 안전하여지는 사회, 그리고 가장 약하고 소수인 사람들이 존중받는 사회를 말하며 중증의 최중증 복합 장애인에게 여러 이유로 이 한국 사회 자체가 여러 차례 침몰해 가는 선박과 같은 재난사회였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안전을 공감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세월호와 관련된 주변인들의 아픔들이 그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정신적, 신체적 고통이 잘 보듬어지기를 바라며 이 글을 보냅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이야기하겠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이 구호를 다시 한번 모든 사회문제에 대입해 봅니다.  (사진출처: 연합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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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일본에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려면
일본에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려면 (2024-04-15) 이동석 | 재일동포 지난해 10월29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필자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과 함께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 고교무상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김창섭 제공 나는 1952년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다. 일본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8살에 조선 사람임을 자각하게 됐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조선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재일동포 동급생과 일본학교 내에 ‘조선문화연구회’를 만들고 그때까지 썼던 일본 이름을 버리고 조선 사람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조선문화연구회에서 조선 고등학교 학생하고 교류하며 일본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포 학생들의 모임에도 참가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 사람으로 살려면 우리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한국 유학을 결심했다. 1971년 처음으로 서울에 왔고, 1973년 한국외국어대학 프랑스어과에 입학했다. 1975년 11월 보안사 요원이 하숙집에 와서 영장 없이 나를 연행했다. 40일간 보안사에 감금된 채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당하고 나는 ‘간첩’이 됐다.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배우고 싶어서 가입했던 조선문화연구회에서 총련계 사람을 만나 이야기했다는 게 ‘간첩’이 된 주요 혐의였다. 재일동포 17명이 구속된 이른바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이다. 나는 5년형을 받아 대전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됐다. 그러한 나를 지원해주고 격려해준 건 일본 사람들이 조직한 ‘구원회’였다. 구원회 사람은 재판을 방청하고 격려하기 위해 서울에 몇번이나 왔고 대전에도 여러 차례 면회를 왔다. 광고 나는 구원회가 없었더라면 건강한 정신으로 못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석방되어 1981년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전두환 독재정권하에서 재일동포 간첩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구속된 재일동포의 가족을 만나서 격려하고 구원회와 함께 지원 운동을 했다. 내가 많은 사람의 지원을 받았으니 이번에는 내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던 나는 한국의 양심수가 거의 석방된 1990년대 후반에 ‘재일고려노동자연맹’(고려노련)에 가입했다. 고려노련은 우리나라에 뿌리가 있는 재일동포라면 남북 관계없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이었다. 그 조합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노동차별 개선, 한국 노동자 지원과 교류를 위해 활동했다. 비록 감시를 받긴 했지만 2000년대 들어 한국에 올 수 있게 됐고, 일본과 한국 노동자의 교류 과정에서 통역을 맡아 여러 번 한국에 왔다. 광고 광고 2005년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생겼으나 일본에 사는 우리가 그 존재를 알게 된 건 한참 후였다. 국가권력으로부터 고문을 받고 교도소 생활을 오래 한 재일한국인 양심수는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를 믿지 못했고 처음에는 진상규명 신청을 망설이는 분위기였다. 나도 그랬으나 진실화해위는 한국의 민주화 투쟁의 성과라고 생각해서 2011년에 진상규명을 신청했다. 그 뒤 법원이 재심에서 ‘고문으로 강요한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2015년 무죄가 확정되었고 배상금도 받았다. 배상금은 국가 잘못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돈을 줄 테니 더는 국가 책임을 묻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대학에 재입학하기로 했다. 2017년 외국어대학에 들어가 나보다 젊은 교수님한테서 배우면서 2020년 2월에 졸업했다. 대학 생활 동안 좋은 한국 사람을 많이 알게 되어 졸업 후에도 한국에서 살고 싶어졌다. 4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에서 살면서 재일한국인 양심수의 재심을 지원하고, 한국 내 난민 문제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등에 관심이 있어 모임이나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 식민지하의 아픔을 경험했고, 해방 후 4·3 사건으로 많은 난민이 생겨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한국인도 노동자로 외국에 일하러 간 역사가 있다. 한국에 있는 외국인이나 난민을 대하는 한국 정부나 국민의 태도를 보면 너무 안타깝다. 한국이 국가의 잘못을 인정해 수정하고, 외국인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을 보장해야만 ‘위안부’나 ‘징용공(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또 재일동포 차별을 없애라고 외칠 수 있다.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 활동을 하는 이유는 잘못한 역사는 고쳐야 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 책임이 한국인으로 사는 내게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나는 언제나 약자의 입장에 서서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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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정] 커먼즈는 어떻게 좌절되는가?
커먼즈는 어떻게 좌절되는가? 커먼즈의 정의 – 자원을 장기간 돌보기 위한 사회 체계로서, 공유된 가치들과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보존한다.– 자기조직된 체계로서, 이 체계에 의해서 공동체들이 자원을 (고갈될 수 있는 자원과 고갈되지 않는 자원 공히) 시장이나 국가에 의존하지 않거나 최소로 의존하며 관리한다.– 우리가 함께 물려받거나 창출한 부를 가리키는데, 이 부를 우리는 감소되지 않은 채로 혹은 더 증가된 채로 우리의 자식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우리의 집단적 부에는 자연의 선물들, 사회 기반시설들, 문화 생산물들, 전통들, 지식이 포함된다.– 경제(그리고 삶!)의 부문으로서, 대체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방식으로 가치를 창출한다. 이 방식은 종종 시장/국가에 의해서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커먼즈의 총목록이란 없다. 어떤 공동체가 자원을 집단적인 방식으로, 균등한 접근 및 사용 그리고 지속 가능성에 특별히 초점을 두어 관리하고 싶다고 결정할 때마다 커먼즈가 생기기 때문이다.- 커먼즈는 자원이 아니다. 자원 + 윤곽이 뚜렷한 공동체 + 필요한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 그 공동체가 고안해내는 프로토콜들, 가치들, 규범들이다. 대기, 대양, 유전자 지식, 생물다양성과 같은 많은 자원이 커먼즈로서 관리될 절실한 필요가 있다. 출처 : 커먼즈란 무엇인가, 커먼즈 번역 네트워크 http://commonstrans.net/?p=24 먼저 나의 연구는 문학 / 다큐멘터리 분야 창작을 위한 것임을 밝힌다. 일반적인 학계 연구에 포함되지 않을 내용이 다수 있지만나라는 개인에게 중요한 논의들을 포함시키고자 한다. 민족지학 분석을 통해 분석한 나라는 유령 존재 부모님과 어린 시절의 나는 1993년까지 서울 금호동에 살았다. 당시 금호동은 재개발 열풍으로 자신의 삶과 공동체가 파괴된 철거민들의 투쟁이 한창이었다. 우리 가족은 철거민이었는가. 나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었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10여곳의 집을 돌아다녔고, 나 또한 6년간 세 곳의 집에 살았으나 마지막 집은 무너지지 않았고, 부모님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용역이 직접 집을 부수지 않았어도 내가 태어난 곳이 세상에서 사라졌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의 성장과정은 부모님의 빈곤과 거기서 느껴지는 수치심으로 억눌려 있었다.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가족을 해석하지 못했고, 공부를 통해 부산을 벗어나는 것을 희망으로 삼았다. 가족과 상관없는 단독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건 고등학교 때였는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직업에 대한 책을 보며 그들이 세상을 유랑하는 자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집과 가족을 떠나 어딘가에 발을 딛지 않고 유령처럼 떠돌기를 바랐던 것 같다. 공동체에 대한 관심 스무살에 나는 서울로 돌아왔고 공동체를 꿈꿨다. 아직 유령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낭만적인 공동체로 생각했던 것들은 ‘내가 나 본연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장소’를 의미했다. 배제되지 않음을 찾아다녔고, 우연히 그런 곳을 만났을 때의 편안함과 기쁨이 컸다. 그러나 모든 현실의 공동체가 그렇듯 그것들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무너지고 변화하였다. 공동체는 공간 위에서 세워졌고, 공간은 늘 영원하지 않다. 이러한 경험에서 느꼈던 것은 첫번째, 자본주의의 논리는 반드시 공간과 공동체의 배제를 만들고 소멸을 이끈다는 것, 두번째, 낭시가 말했듯 공동체를 위한 인위적인 노력도 독재와 공동체의 파괴로 흐른다는 것, 세번째,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공동체인 것과 현실의 공동체를 만드는 문제는 분리되어 있다는 것 등이 있겠다. 즉,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 혹은 만들고 싶은 내 노력은 반드시 실패할 일인데 그럼에도 나는 그걸 늘 지금도 마음 속 깊이 원하고 있다. 이 모순이 내 안에 굴러다닌다. 내가 연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민족지학적 반성을 통해서였고, 그러한 생각과 내가 처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분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창작자/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연구는 이것들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 파악했다. 내가 아직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이러한 연구와 학습 과정이 어떻게 창작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다. 공간과 공동체, 커먼즈 지난 3년간 주거관련 사회적 기업에 다니며 공적 재원을 통한 주거개발, 기획 업무를 하였다. 주거복지가 필요한 계층을 위해 제안서를 작성하고 공유공간을 설계했다. 별개로 공유부엌이나 서점을 직접 운영했으며, 스쾃과 커먼즈 활동을 여러 경로로 접했다. 집 앞 산책로에서 빈 땅을 발견했고 (청량리동 950) 불온하고 무용한 이 땅이 왜 나의 마음에 들어왔을까 고민했다. 그건 빈 땅이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으나 아직 발현되지 않은 - 자본주의적인 의미에서도 아니면 공동체적으로도 - 곳이었으며 그 덕분에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상상하게 만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곳을 지배하는 어떠한 종류의 관습과 규칙이 존재하지 않아 아무것도 배제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존 버거의 말에 의하면 그 땅은 ‘부재의 땅’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도래하는 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과거 자료에서 제기동의 재개발 이주민을 이 공간에 일종의 수납하려던 시도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 땅을 관찰하며 아무런 용도로도 사용되지 않는 이 빈 땅을 시민의 공유지/커먼즈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학습을 통해 커먼즈가 단순히 자원이 아니라 공동의 것을 만드는 활동과 과정인 커머닝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내게 그나마 숨통을 틔게 해준 것 같다. 자원으로 접근했을 때 어떤 땅은 소유권이 명확하고 소유자의 자본 혹은 공적인 목표를 충족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적합하다. 그러나 어떤 땅이 커머닝의 과정, 공유화의 과정을 거친다면 시민의 의견이 반영되고 공적인 목표에도 시민의 필요가 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대한민국에서 그러한 시도가 잘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경의선, 배다리, 송현동 땅, 빈집 등 커먼즈 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다. 나는 이러한 커먼즈/커머닝이 현재 우리에게 쉽지 않은 문제일 때 그 이유가 무엇일지, 장애물이 무엇일지를 연구과정을 통해 알아보고 싶었다. 질문들 이러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나에게 남은 질문들을 되새겨보자. 그동안 시도되었던 수많은 공동체들, 그들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소멸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스쾃과 커먼즈는 임시적인 공동체를 생성했지만 소멸이 예정된 그것들이 결국 남긴 건 무엇일까. 커먼즈 과정을 어렵게 만드는 난제들은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자원이 필요하고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 의사결정 과정, 정보의 부족, 자본주의적 압력 등 여러 과정을 고민해보자. 특히 나에게는 해외와 비교하여 우리나라의 재산권에 대한 보호가 과도하고 커먼즈에 필요한 시민적 합의를 만드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나라는 가설을 세워본다. 이를 위해 필요한 학습지도를 만들어보았다. 연구를 위한 유력한 학문 계열로 인문지리학 / 공간 철학 / 도시사회학 / 도시정책학 등을 탐구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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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사회에 관심이 많은 프리랜서

관련해서 저도 총선 전에 이상민님 글을 여기에 공유하기도 했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대안을 배달해 드립니다.

진보당 지역구 당선이 돋보입니다! 노정현 진보당 후보도 열심히 했는데 아쉽네요 ㅠㅠ

덜 폭력적이고 더 평화로운 사회를 바라고 그립니다.

비건 시장의 확대 및 관심은 고무적이지만 “비건족“이라는 표현은 실제 비건 지향 커뮤니티에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언론에서 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를 넘어 깊이있는 후속 취재가 이어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저도 사과가죽 가방을 사용하고 집에서 비건만두, 비건너겟, 비건스팸을 먹어요. 비거니즘에 공감하고 동의하기 때문인데요. 공감만 할 때보다 일상과 저를 이루는 것들을 실제로 바꿔나가는 실천을 하면 더 문제의식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고 확실해지는 느낌도 경험했습니다.

“이 옷이 실제로 기능적으로 좋다면 남성들도 입어야 할 것”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매번 여성만 벗겨놓으려고 하는 저의가 아주 불쾌합니다.

공부하고 배우고자 합니다.

저도 조호 님께 동감합니다. 성별에 따라 노출이 다른 유니폼이 지급되는 지금이 정녕 2024년이 맞는지 의문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