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의 칼국수와 카리나의 열애설
1   최근 한국의 아이돌 팬덤을 보면 결국 모든 게 ‘본전 뽑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팬미팅에 가기 위해, 포토카드를 모으기 위해 앨범에 쓰는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이거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야 없겠으나 금전적인 부분이 한국 아이돌 팬덤 문화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2   내가 초등학생일 때엔 H.O.T와 젝스키스 팬덤이 어마어마했다. 에쵸티라는 이름의 음료수도 나왔고 이들의 사진으로 필통이나 교과서 커버를 만드는 여학생들도 많았다. 엄청난 팬까진 아니었지만 나름 관심이 있었던 나는 남자가 남자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걸 혹시라도 주변에 티 내게 될까봐 살짝 조심했던 기억도 난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엔 동방신기가 데뷔를 했다. 특이한 패션도 화제였지만 사실 가장 화제가 된 건 이름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곤 하는데, 사춘기이거나 20대 초반인 나한테 누가 ‘앞으로 네 이름은 서누선우다’라고 하면 난 울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이 즈음부터 인터넷을 통해 화제가 된 것은 바로 사생이다. 어떻게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돌 멤버 개인의 전화번호, 가족의 전화번호, 집주소 같은 것을 알아내 끊임없이 연락을 하거나 잠복하면서 숙소 내부에 잠입, 도촬을 하는 등등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내가 제대하고 나왔을 때엔 엑소가 인기를 얻었는데, 일단 이들은 자기들만의 초능력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하지만 누가 사춘기 혹은 20대 초반인 나한테 ‘이제 네 능력은 불이다’라고 하면 바로 소주 사러 달려 가지 않을까 싶다.   포토카드를 이용한 상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이 즈음부터인 것으로 기억한다. 12인의 포토카드가 앨범마다 두 장씩 들어 있으니 이걸 다 모으려면 최소 6장을 사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랜덤이니 그 수는 무한정 늘어나는 것이고, 12인의 카드가 두 가지 버전이라 총 스물 네 장의 포토카드가 있다고 한다면 최소 12장 이상의 앨범을 사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앨범을 박스로 사서 종일 카드만 깐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팬미팅을 이용한 상술도 이 때부터로 기억한다.   사생이 심해진 것도 엑소 때부터인데, 여성팬이 머리를 박박 밀고 남자화장실에 숨어있거나 소변기에 소변 보는 척 서있으면서 엑소를 기다리다가 걸렸다는 둥, 엑소가 탈 비행기에 같이 예약했다가 엑소가 타면 사진만 찍고 우르르 내려 버린다는 이야기가 시중에 돌았다. 아이돌들의 세계관, 포지션, 포토카드나 팬미팅을 이용한 상술이 이 즈음부터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내가 일본에 유학을 하고 있을 즈음에는 프로듀스101 남자버전(이하 프듀)이 대히트를 쳤다. 내 아이돌은 내가 만든다는 생각 하에 팬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아이돌을 ‘내 애’라고 불렀고 자신들 스스로를 ‘~~맘’이라고 불렀다. 요 사이 사회적으로 화제가 된 극성 학부모들처럼 몇몇 극성 팬들은 내 애는 내가 지킨다는 마음으로 전략 투표를 하거나 인터넷 상에서의 괴롭힘, 악플 등을 시전하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한국의 아이돌 팬 문화는 단순히 음악과 춤, 비주얼을 향유하는 게 아니라 연예인과 팬 사이의 강력한 감정적 연결을 가지고 유지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고, 시간이 흐를 수록 (명확한 통계는 없지만) 팬 개개인이 아이돌에게 바치는 시간과 돈이 점점 늘어나면서 아이돌의 존재와 활동은 내 시간과 돈에 대한 보상이라는 측면이 점점 더 커졌다.   물론 모든 팬이 이런 식의 보상심리로 아이돌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돈과 시간을 쓰겠다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연예기획사들의 상술이 점점 심해지면서 내가 돈과 시간을 썼으니 뽕을 뽑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류의 상술과 상술로 인해 점점 강해지는 보상심리, 인터넷의 발달로 소통이 쉬워지면서 일부 팬들에게서 드러나는 유사연애 혹은 유사육아적 심리와 행동, 팬덤이 점점 커지면서 생기는 군중심리와 그에 의한 잘못된 행동 등 여러가지 모습이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한국 아이돌 팬덤의 모습이라면, 이 이면에 깔려 있는, 즉 자세히 보아야만 보이는 측면도 존재한다. 바로 계급, 연령, 국적, 젠더라는 네 가지 측면이다. 3   계급(소득과 재산), 연령, 국적, 젠더는 팬덤 내부로 어느 정도는 들어가야만 확인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어느 정도 들어야가야 한다는 것은 꼭 그 팬덤 조직에 들어가야한다기 보다는 그들이 남기는 댓글, 게시물, 사진 등을 어느 정도 모아놓고 자세히 봐야한다는 점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인터넷 공간을 통해 쉽게 확인이 가능한 것은 국적과 젠더다. 한국팬과 외국팬 사이의 문화차이와 갈등, 연예인과 팬의 성별/성적지향에 의한 차이에서 생기는 미묘한 혹은 격렬한 갈등은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나는 문화를 지역별로 구분한다면, 대중문화는 언어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 지역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고 방식이 발현되는 수단이면서, 표현을 통해 새로운 고민과 창조, 반성 같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 대중문화, 그 중에서도 아이돌 문화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가벼움에 주목하고 싶다.   심각한 문제, 밀도 깊은 주제는 피하고 예뻐 보이는 것만 한 군데에 모아두는 가벼움 말이다. 물론 미국이건 일본이건 대중문화에는 다 이런 측면이 있지만 다른 나라는 다른 나라대로 잠시 접어두고 한국의 이야기를 하자면, 인종이나 성, 계급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 즉 계급적 열망이나 성차별, 인종 차별 같은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고, 이런 문제에 대해 찬반은 커녕 언급을 피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런 불언급不言及은 사실 상당히 보수적인 것이다. 한국 대중문화의 내면에는 이와 같은 한국 사회의 자기중심성, 보수성이 깔려 있다. 문제는 아이돌로 대표되는 케이팝 산업이 이런 보수성과 자기중심성은 유지하면서 예뻐보인다,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다양한 소수문화, 신문화를 마음대로 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년 초에 있었던 아이유의 Lovewins 사건도 이런 맥락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운이 좋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2015년 트와이스 쯔위의 대만 국기 사건 때 쯔위가 결국 공개사과를 했던 일을 우리는 기억한다. 일본 멤버, 중국 멤버 넣어서 다국적 그룹이라고 말하며 케이팝 아이돌이 다양성을 확보한 것처럼 말하지만, 쯔위의 사과는 케이팝이 말하는 다양성이 얼마나 알량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4   젠더적인 부분도 그러하다. 여성 아이돌들이 보여주는 주체성이나 탈-연애적 모습, 전형적인 남성상에서 벗어난 남성 아이돌들의 모습은 해외에서 상당히 유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그런 차원에서 케이팝을 일종의 소수자 문화, 퀴어 문화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까지 존재한다. 이런 것 때문에 최근의 아이돌 문화를 사회의 변화와 진보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업자들이나 연예인 당사자의 성적 감수성이 높아진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지만, 페미니즘 감수성이나 퀴어 감수성의 향상보다는 ‘그게 돈이 되니까’라고 보는 게 더 합당해 보인다. 알페스나 비게퍼(비지니스 게이 퍼포먼스)가 퀴어에 관심이 있어서 나온 게 아니라 화제가 되니까, 잘생기고 예쁜 남자들이 가까이 붙어 미묘한 느낌을 주는 게 ‘예뻐’ 보이니까 계속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동안 보여준 퀴어함, 새로운 혹은 다양한 여성상은 돈 앞에서는 다 알량한 것이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아이돌의 음악이나 무대, 외양에 대한 찬사는 인정하지만 아이돌 산업이 그 이상의 문화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듯한 설명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2024년 1월, 뉴진스의 민지가 사과문을 쓴 일이 있었다. 시작은 칼국수였다. 23년 초에 그녀가 침착맨 유튜브에 나와 혼잣말로 “칼국수가 뭐지?”라고 말했던 것을 일부 악플러들이 물고 늘어지자, 24년 1월, 방송에서 ‘본인이 정말 칼국수가 뭔지 몰라서 그런 말을 했겠냐’고 푸념을 한 일이 있는데, 이를 두고 ‘컨셉질’을 한다거나 ‘가르치려 드냐’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결국은 이에 대해 사과문을 쓴 것이다.   2024년 2월, 제로베이스원 김지웅의 욕설 논란이 있었다. 김지웅과 팬의 영상통화 이벤트 중에 이벤트가 마무리되는 상황에서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설을 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린 게 발단이었다. 해당 팬은 많은 돈을 내고 참여한 이벤트에서 왜 욕을 들어야 하냐며 이 영상을 X(구 트위터)에 올렸고 소속사에서는 이 욕설은 김지웅이 한 게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이래 저래 두루뭉술한 해명이라서 논란을 더 키우고 말았다. 결국 한터뮤직어워즈라는 시상식에서는 한 팬이 ‘김지웅 탈퇴해’라고 소리를 지르는 게 모두에게 들렸고 이 때문에 몸싸움이 벌어졌다는 말이 나왔다. 일부는 이 영상을 찍어 올린 사람이 외모가 못 생겼거나 사생이라서 욕을 먹은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고, 김지웅이 과거 두 편의 웹드라마에서 동성애자 역할을 했던 것을 두고 게이드라마 다시 찍고 싶냐는 조롱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남성 연예인과 여성팬의 관계, 퀴어 혐오 등이 뒤섞여 있다고 본다.   2024년에는 에스파의 멤버 카리나가 사과문을 썼다. 배우 이재욱과의 열애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어떤 팬들은 소속사 사옥 앞에서 전광판 차량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와 대비되게 배우 이재욱측은 악성 게시물에 대한 법적 대응만을 이야기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2018년에는 현아의 열애설 발표 이후 소속사의 주가가 하락하고 현아의 전속계약도 해지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연예인 류 모씨의 환승연애를 두고 누가 무슨 말을 했다, 이게 사실 그 증거였다는 둥 불필요한 세밀한 정보를 보도하고 있고 각종 커뮤니티나 SNS에서는 이를 두고 설왕설래하면서 못생긴 남자를 왜 만나냐 같은 말을 주고 받고 있다. 남의 사생활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요즘 전기세도 비싼데 이렇게 전기를 낭비해야 하는 걸까?   한 남성을 사이에 두고 두 여성이 얽혀 있는 사건인데 모든 발언은 두 여성만 하고 있고, 중요한 축인 남성 연예인은 아무 발언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남성을 사이에 두고 두 여성이 다투는 듯한 모양새가 은글슬쩍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성과 여성이 싸우는 구도를 만들어 놓고 사건의 당시자인 남성은 아무 언급이 없고 대중은 이를 게임처럼 관람하고 있다. 어쩌면 이게 한국 사회의 한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이유에는 알려진 사람이라 ‘씹기 좋아서’라는 이유도 분명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최근 연예인들이 가져가는 돈 때문에 제작비 부담이 심해진다거나, 이와 대비되는 다른 제작진들의 수입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까발려지고 기분 나쁜 게시글을 보더라도 그 정도 돈을 받으면 이 정도는 감수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故 설리의 사망 당시 악플러들의 언급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것이 알고싶다 1191회. 2019년 11월 17일 방송) 이런 언급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과 타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고 작건 크건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하는 문화적 특성, 한국의 성차별 등이 뒤섞여 케이팝 팬 문화의 어두운 부분을 만들고 있다. 케이팝의 영향력이 넓어지는 지금, 이런 어두운 부분을 케이팝 문화, 혹은 한국 문화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아무 문제 없고 전 세계에 케이팝을 즐기려면 이런 것도 이해하라는 듯이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이전부터 한류의 몰락은 컨텐츠의 질 문제 보다 한국 사회의 보수성과 차별성 때문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 24년이 시작되고 불과 1사분기만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한류 몰락의 경고등이 될지 시작점이 될지는 케이팝 팬덤 뿐 아니라 앞으로 우리 사회 모두가 지켜보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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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이야기(2) 대만의 지금과 이번 선거 이야기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狗去豬來)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 장개석의 국민당 군이 공산당을 피해 조금씩 대만으로 상륙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은 대만 사람들에 대한 약탈, 강간을 서슴치 않았다. 이 이전부터 대만에 살던 사람을 본성인(本省人), 국민당을 따라 대만에 건너온 사람을 외성인(外省人)이라고 부르는데, 본성인들은 국민당의 모습을 보고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狗去豬來)고 탄식했다. -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만 통치가 훌륭했다는 증거로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뻔뻔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 그러던 중, 1947년 본성인들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정치, 경제, 군사, 사법 등 중요한 요직을 외성인들끼리 차지하는 정치적 문제, 국민당군과 외성인에 의한 약탈, 강간 등의 범죄 문제 등으로 인해 본성인들의 불만 등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차별과 그에 대한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던 때의 일이다. 1947년 2월 27일, 남편 없이 혼자 자식 둘을 키우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성이 밀수 담배를 팔다가 적발되었다. 공무원들은 그녀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기 시작했고, 이를 구경하며 공무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공무원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 총격으로 스무 살 학생 천원씨(陳文溪)가 사망하면서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국민당은 3월부터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약 3만 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부천대(國府遷臺) 1949년, 국공내전에서 완전히 패배한 대만은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옮기고 강력한 계엄령을 실시했다. 장졔스(蔣介石)를 중심으로 하는 개발독재가 시작되었고, 10대 건설 등 다양한 경제 발전 정책을 통해 경공업에서 중공업 중심의 국가로 변화해 갔다. (이 모습도 한국과 똑같다) 이 와중에도 중국과 대만은 무력 충돌을 이어나갔다. 1981년까지 거의 한달에 한번 중국과 대만은 포격을 주고 받았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의 군수기지 역할로 대만이 경제 성장을 이룬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계엄령에 반대하며 민주화 운동이 있었던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 1975년 장졔스가 죽고 그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대만 총통 자리를 물려받자 민주화 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1979년 2월에는 『메이리따오(美麗島)』라는 잡지에서 주최하는 시위가 있었는데 경찰이 시위 주최자들을 잡아가면서 대만의 언론 탄압이 크게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이를 메이리따오 사건이라고 부르고 이 때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은 사람이 바로 훗날 총통이 되는 천수이비옌(陳水扁, 1950~)이다. 이 시기 민주화 세력을 비롯해 국민당 비판 세력 등을 모두 묶어 국민당 1당 독재에 바깥이라는 의미에서 당외세력이라 불렀다. 1987년, 장징궈는 민주화 여론을 받아들여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외세력들도 정당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대표가 바로 민주진보당, 줄여서 민진당이라 불리는 세력이다. 대만의 정치 지형 대만의 정치는 양안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범람연맹과 범록연맹으로 나눈다. 범람연맹은 국민당 로고가 남색인 데에서 유래하는 보수파 연합이다. 이들은 중화민국을 중심으로 중국을 재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안에서 중화민국 단독 통일을 주장하는가, 일국양제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중국 대륙의 민주화가 가능한가 등의 이견은 있지만 하여튼 이들은 반-공산주의 색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중국과의 교류 확대를 추진하기 때문에 친중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 미국의 원조 아래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친미성향을 띄고 있기도 하다. 범람연맹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복지, 분배를 강조하는 보수파인 친민당, 민국당 등은 로고 색깔이 오렌지색인 데에서 유래해 범귤연맹이라 불리기도 한다. 범록연맹은 민진당 로고가 녹색인 데에서 유래하는 반중-진보파 연합이다. 이들은 대만 정부가 중국을 점령한다거나, 일국양제로 중국과 통일을 한다거나 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 중 일부는 중화민국이라는 여권에 대만국이라는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중화라고 엮이고 싶지도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꺼려 양안관계에 있어서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러한 역사적 연장 으로 중국과의 통일을 추구하거나 중국과의 교류 확대를 추진하는 국민당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대체로 민진당을 지지하고, 과거 계엄령 하에 있었던 독재정치에 대해서도 반감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이들은 양안의 교류 확대는 중국의 경제 체제에 대만이 잠식되는 것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잘 드러내는 것이 2014년 해바라기 운동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봉열전을 참조) 대만 정치는 중국과의 관계라는 큰 틀에서 둘로 나눠지지만 그 안에서도 과거 독재정치에 대한 입장 차이, 경제 정책 문제, 대만 내 소수민족 문제, 세대/성별/성적지향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슈가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칭더(賴淸德)의 당선과 그 이후 라이칭더는 1959년 신뻬이시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3개월이 되던 해에 부친이 탄광 사고로 죽고 모친이 석탄을 주워 팔며 자식들을 길렀다고 한다(天下雜誌.2017.09.04.). 내과의사가 되었다가 1994년 정치 무대에 뛰어든 그는 여러 자리를 거쳐 2020년에 부총통이 되었거, 2022년에는 민진당 주석이 되었다.  2019년, 그는 민진당의 정책은 반공불반중反共不反中이라고 표현했다(ETtoday.2019.12.23.). 공산당에 반대하는 것이지 중국이 싫은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트와이스 쯔위의 깃발을 놓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 - 대만에서는 쩌우쯔위 국기사건이라 부른다 - 이후에는 대만을 주권국가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이야기를 강하게, 자주 하고 있으며 상당히 강성한 대만 독립 주의자로 보인다. 台獨份子有自己的國旗,拿青天白日滿地紅的旗子,不是台獨份子。 대독분자(대만독립분자)에겐 자기의 국기가 있다.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든 자는 대독분자가 아니다. (ETtoday.2016.01.16.) 我們已是主權獨立國家,不需另行宣布獨立。 우리는 이미 주권독립국가이고, 따로 독립을 선포할 필요가 없다. (自由時報.2017.09.26.) 希望任何國家都應該要正視中華民國存在的事實。 어떤 국가든 모두 중화민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길 바란다. (Newtalk新聞.2017.09.27.) 台灣不屬於中華人民共和國的一部分。台灣斬釘截鐵地就不是中華人民共和國一部分。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에 속하지 않는다. 대만은 명백히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가 아니다. (中央通迅社.2023.08.07.) 台灣是一個民主國家。中華民國國名不必改。 대만은 민주국가다. 중화민국의 국명은 바꿀 필요가 없다. (上報.2023.08.15.) 대만에게 있어서 중국과의 관계는 단순히 안보 문제가 아니다. 2023년 대만의 전체 수출 수지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35.4%이고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18조 3천 억 원 가량인데 이것이 21년만의 최저치다. (한국무역협회.2023.12.16.) 최저치가 35%라는 것은 대만과 중국 사이의 경제 교류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로 한국의 대중국 수출 비중은 2023년에 19.7%, 대미국 수출 비중은 18.3%였다. (지표누리) 이런 상황에서 마치 대만이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할 것 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상황을 진짜 모르는 것이다. 물론 선거를 앞두고 중국이 대만에 무역 제재를 행하는 썩 좋지 못한 수를 두었고 이 때문에 대만에서도 새로운 수출길을 모색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중국 경제가 코로나 이후 상당히 심각한 상황을 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난 2014년, 대만 젊은이들의 시위인 해바라기 운동이 일어난 이유는 중국과 대만이 서로 노동시장을 개방하는 협의를 진행하려 한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대만 안에도 취업, 결혼 등의 이유로 대륙 중국인들이 꽤 많이 들어와 살고 있고, 대만 연예인들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꽤 많다.  대만인들에게 중국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너무 멀어져도 안 되지만 가까워져도 안 된다. 이미 홍콩을 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홍콩의 우산혁명만을 기억하지만 홍콩에도 계급이 있고 정치 지형이 있다. 홍콩의 집값은 살인적이다. 그래서 홍콩 부자들 중에는 아무리 좋다고 해도 홍콩에서 다닥다닥 붙어 사느니 대륙으로 가서 넓은 집에서 살겠다고 홍콩을 떠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도 굳이 사람들과 싸우는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주느니 홍콩 사람들을 대륙으로 가게 하고 대륙 사람들을 홍콩으로 가게 해서 서로 섞이게 하면 그만이다. (물론 지금 시진핑의 중국 정부가 이 정도로 세련되지 않아서 문제다.) 대만에도 한국 농촌에서 외국인 신부를 맞이하는 것과 마찬가지 모습으로 대만 농촌의 노총각에게 시집 간 중국 여성들이 꽤 있다. 냉전 이후 양안관계는 정치적 현안에 따라 부침은 있으나 남북한에 비하면 서로 분리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가능성도 낮다. 대만의 군사력이 중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결코 약하지도 않기 때문에 중국도 엄청난 피해를 봐야함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중국과 대만의 전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물론 최근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사태가 불러온 전쟁 공포도 있지만 미국의 태도와 중국의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보통의 국가는 매년 연초나 새해가 되기 전에 새해의 경제 성장률을 추정하고, 중간에 수정을 하기도 하며 연말에는 그 추정이 어느 정도 맞았는지 발표를 한다. 하지만 중국은 연초에 발표한 경제성장률을 수정하지 않고 무조건 연말에 맞춰놓는다. 이래저래 해봤는데 경제 성장률이 예상에 못 미치면 부동산에 거액을 풀어서 경기를 끌어올리는 식으로. 하지만 23년부터는 이게 안 먹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동산 살 돈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코로나 기간 동안 돈을 풀지 않았다. 그래서 코로나가 끝나도 도무지 경기가 좋아지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시진핑은 거의 매년 국가의 부패를 잡겠다면서 우리로 치면 장관급부터 거의 모든 공무원을 숙청하고 있다. 하지만 부패는 이런 식으로 잡히지도 않거니와 결국 다음 세대의 정치인이 나오지 않는 결과만 초래되었다. 시진핑 다음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오는 이유는 시진핑의 장기 집권 때문도 있지만 이런 이유가 크다. 그래서 이런 방식 저런 방식을 다 썼는 데에도 경제가 안 살거나 정치적인 인기를 얻기 어렵다고 여겨지면 독재자들은 결국 극단적인 수를 쓰게 되지 않겠냐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진핑과 중국이 자원의 부족, 특히 식량의 부족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 힘들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다. 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다 대비해야 겠지만 전문가들의 중국 예측에는 객관적인 예측 이전에 사적인 감정이 많이 담겨있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대만 입장에서도 미국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도, 이스라엘에도 직접 파병을 하지 않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전쟁을 바라는 대만인이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우세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만 믿고 중국과 각을 세울 수 만도 없다. 입법원(국회)에서 민진당보다 국민당이 우세한 결과를 얻은 것도 어쩌면 혹시 모를 민진당의 급발진에 대해 브레이크 역할을 하기 바라는 대만 국민들의 민심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추신: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전쟁 시나리오를 예측하자면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남한과 북한은 파병을 하기보다는 서로를 노리며 힘의 균형을 도모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병력이 아니더라도 돈이나 무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미 미국 정치권에서는 한국을 향해 본인들이 강대국인 것을 좀 인정하라는 이야기가 나온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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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이야기(1) 대만의 옛날
2024년은 선거의 해이고, 그 포문을 연 첫 선거가 바로 대만 총통 선거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대만의 역사 대만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빙하기 이후라고 한다. 『삼국지(三國志)』「오지(吳志) 오주전(吳主傳)」에 보면 오나라 왕 손권이 황룡 2년(230) 정월에 장군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을 시켜 바다 건너의 섬 이주(夷洲)와 단주(亶洲)에 가게 했는데 이 두 사람이 이주에 살던 사람 수천 명을 강제로 끌고 왔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온 이주와 단주가 대만이라고 하기도 한다. 대만이 본격적으로 중국 역사 안에 서술되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 때다. 이때는 지금의 펑후제도(澎湖諸島)와 대만 일대를 복건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에 속하는 하나의 영역으로 보았다. 본격적으로 대만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명나라 때의 일이다. 왜구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대만이 왜구의 근거지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고, 먹고 살기 힘들어진 중국인들이 바다를 건너 대만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또 이 즈음은 유럽의 대항해시대에 해당한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인도양을 거쳐 동남아시아까지 들어왔다가 대만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포르투갈 사람들이 대만에 붙인 별명이 바로 아름다운 섬, 포르모사(Formosa)다. 아름다운 섬 16세기 말, 17세기 초가 되면 일본은 전국시대를 마무리짓는 시기였고 중국도 대제국 명나라가 쇠약해지는 시기였다. 그 사이에서 조선은 소위 양란이라 불리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겪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역시 이 틈을 타 명나라가 갖고 있던 펑후제도를 점령하고 1624년부터는 대만 따위엔(大員)에 요새를 쌓기 시작했고, 2년뒤에는 스페인도 지롱(基隆)에 요새를 쌓기 시작했다. 두 세력이 대만에서 각축을 벌이다가 1642년이 되면 네덜란드가 스페인 세력을 대만에서 완전히 추방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중국 복건성, 광동성 연안의 중국인들을 모집해 대만으로 데리고 가 농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시기 대만 원주민들이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는 뜻에서 타요우안(Tayouan)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지금 타이완의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정성공(鄭成功) 네덜란드가 대만에 요새를 쌓기 시작한 1624년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 하나 태어났다. 중국인 무역상이자 무장집단의 수장이었던 정지룡(鄭芝龍)이 지금의 나가사키 근처인 히라도(平戸)번의 무사 타가와 시치자에몽(田川七左衛門)의 딸 마츠(まつ)와 하룻밤 정을 쌓고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이가 바로 정성공(鄭成功)이다. (중국역사박물관 소장 정성공화상) 타가와 마츠는 정성공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중국 복건성으로 길을 떠났다. 머리가 좋았던 정성공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해 생원이 되었고, 당시 이름난 유학자였던 전겸익(錢謙益)의 제자가 되었다. 전겸익은 동림당(東林黨) 소속이었다. 당시 명나라 황실과 정치를 비판하던 재야인사들이 동림서원에 모여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며 하나의 학파이자 정파인 동림학파/동림당을 결성하게 된다. 이들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양명학을 비판했다.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주자학이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기 쉽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행을 하여 사사로운 욕망을 줄여나가야 하고(존천리거인욕) 이를 통해 개인의 도덕적 수양이 천하라는 공적인 영역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해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양명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인간의 마음 그 자체가 곧 하늘의 이치라고 주장하면서(심즉리) 인간의 자유의지는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림당을 중심으로 한 주자학 그룹은 양명학의 ‘자유에 대한 강조’가 천하를 그르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림당은 주자학 중에서도 살짝 특이한 그룹이었는데, 그들은 학문적 목적이 사회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사회적 욕망과 도덕적 수양, 정치적 활동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 속에서 천하의 이치(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유럽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고 농업, 공업 기술의 발전과 경영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천하의 이익을 위해서는 군주제가 아니라 지방 분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성공은 이 그룹에서 지식인/개인의 강렬한 사회적 의무에 대한 마음가짐을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1644년, 농민봉기군의 수장인 이자성(李自成)이 궁궐에 난입해 명나라가 멸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리장성을 지키던 장수 오삼계(吳三桂)는 이 소식을 듣고 성문을 그냥 열어버렸고 이로 인해 만주족이 장성을 타고 내려와 청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때 명나라 지식인들 중 일부는 청나라에 대항하는 군대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정지룡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황족인 주율건(朱聿鍵)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주율건은 정성공의 외모가 수려한 것을 보고 매우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딸과 결혼하게 하겠다, 명나라 황실의 성인 주씨를 하사하겠다 운운했는데 정성공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이 널리 알려지면서 정성공에게는 ‘나라의 성씨를 받은 나으리’라는 뜻의 국성야(國姓爺)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것이 바로 정성공의 영어 별명 중 하나인 콕싱야의 어원이다. 청나라와의 싸움 와중에 아버지 정지룡이 청나라에 항복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더이상의 저항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정성공은 자신의 부친과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군대를 이끌며 청나라와 싸웠다. 각각의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청나라의 강력함을 이길 수는 없었던 정성공은 결국 대만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것이 1661년의 일이다. 1661년, 펑후제도를 점령한 정성공은 같은해 3월에 네덜란드가 쌓았던 강력한 요새 질란디아(Zeelandia)를 포위, 1년 남짓 공격한 끝에 네덜란드 세력을 대만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게 되었다.  정씨왕조 네덜란드 세력을 타이완에서 완전히 몰아낸 정성공은 대만을 동도(東都)로 개명하고 정씨 왕국을 세웠다. 정성공은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낸 1662년에 병으로 사망했고, 아들 정경(鄭經)이 뒤를 이었다. 정경은 1681년에 사망했고, 그 다음은 정경의 아들 정극상(鄭克塽)이 뒤를 이었는데 정극상은 1683년에 청나라에 항복해버린다. 이를 통해 정씨왕조의 대만통치도 끝이 난다. 정성공 일족의 대만 통치는 20년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대만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고 대만 개발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대만의 시조이자 개국 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화외지지(化外之地) 정씨왕조의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는 대만에 대만부, 대남현(타이난), 고웅현(까오슝), 가의현(쟈이)를 설치하고 복건성 아래에 편입했다. 하지만 대만은 어디까지나 변방이었다. 청나라 황실에게 있어서 대만은 황제의 교화 바깥의 땅(화외지지化外之地)였고, 대만에 정착한 중국인과 대만 원주민도 교화 바깥의 백성(화외지민化外之民)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중국인들은 끊임없이 대만으로 건너갔고, 19세기가 되면 그 이전에는 사실상 대만섬 전역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 (이전에는 대만섬 남쪽에 주로 살았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과 대만 원주민들의 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만인이라 불리는 한족 그룹이 만들어졌다. 원주민들도 이렇게 한화된 대만 원주민을 평보족(平埔族), 평지에 사는 사람들이라 불렀다. 1839년, 아편전쟁이 시작되면서 청나라 내부의 갈등과 모순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이후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여러 열강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대만에도 드나들게 되었다. 청나라 측에서도 대만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뒤늦게 인식하고 1885년, 대만을 복건성에서 분리해 대만성을 만들고 대만을 적극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진다. 여러 신료들은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하건 협상을 벌이건 우리끼리 알아서 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고종이 강력하게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톈진조약의 조선에 청나라가 출병할 경우 일본도 자동출병해야 한다는 조항에 따라 일본군도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청일전쟁의 시작인 것이다. 결과 역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배하게 되었다. 결국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이 대만 통치를 시작한다. 대만총독부 1895년, 대만에 살던 사람들은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대만민주국을 건립했다. 이때 일본군과 벌인 일련의 전쟁을 을미전쟁(乙未戰爭)이라 부른다. 하지만 대만민주국은 우리가 예상하듯이 패배하고 말았고, 1896년이 되면 일본이 완전히 대만을 장악하고 통치하기 시작한다. 일본에 대한 대만 내부의 여러 활동은 조선과 꼭 닮아 있다. 친일파도 있고 독립세력도 있으며 이들이 좌우로 나뉘어 싸움을 벌인 것도 똑 닮았고, 식민지 후기에 황국신민화 정책이 벌어진 것도 똑같다. 한가지 다른 점은 일본이 싫으면 언제든지 대륙으로 넘어가 생활을 하거나 일본과 싸울 준비를 하는 한족의 입장과 일본이 싫어도 이 땅을 떠날 수 없는 원주민의 입장, 이 두 가지 입장이 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기억했으면 하는 두 가지 무장 투쟁 사건이 있다. 하나는 1915년에 벌어진 시라이안(西来庵事件)이다. 이 사건에서 대만인 14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하나는 1930년 원주민 세디크족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인 우서 사건(霧社事件)이다. 한국에는 막연하게 대만이 친일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마치 독립 운동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인터넷 검색만 좀 해봐도 다 알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소위 전문가 딱지를 붙이고 나온 사람들이 너무 성의 없이 떠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시라이얀 사건을 주도한 위칭팡余淸芳의 사진. 일본인들과의 경제적 차별로 인해 벌어진 무장봉기였다.) (다음 화에 계속)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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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U의 Love Wins: 사소한 배려가 필요한 거죠
1 “Love Wins(사랑이 이긴다)”라는 구호는 2015년 미국에서 시작된 구호다. 2015년 미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후 각종 SNS에서 해시태그 형태로 사용된 말이다. 이 후 각종 성소수자 관련 행사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이 말이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유명한 것은 2016년 올랜도 게이클럽 총격 사건.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역사적인 순간에도, 혐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비극적인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 퀴어 퍼레이드, 퀴어 운동에서도 이 구호는 힘있게 외쳐지고 있다. 2 최근 가수 아이유가 이 구호를 노래 제목으로 삼아 화제가 되고 있다. 아이유는 자신의 팬들에게 이 노래를 바치며 지금까지 보내준 사랑에 대한 감사 표시라고 설명하고 있다(전문).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이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진솔하게 털어놓고 싶다면서 노래 제목을 <본인은>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우리 모두는 다 같은 시민이라는 뜻에서 <보통사람입니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이념과 자본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사람이 먼저다>라고 한다면? 남자 가수가 자신의 팬들을 위해 나도 당신들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미투>라는 제목의 노래를 짓는다면? 운동의 구호란 이런 것이다. 언젠가는 원래의 의미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먼 시간이 오기 전까진 상처 받는 사람이, 말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3 나는 아이유가 이 말을 정말 몰랐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알면서도 이러는 거라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만약 몰랐다면, 혹은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을 줄 몰랐다면, 그냥 취소하고 “쏘리”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아이유의 팬들 덕분에 몇 시간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사람들 입에 회자 되고 있다. 아이유의 팬들은 그 구호가 니들 거냐며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멈추지 않고 있다. 아이유는 지금 한국이 대혐오의 시대이며 분명 사랑이 만연한 때가 아님을 자신과 자신의 팬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일종의 현대미술인 걸까? 어떤 이는 언어의 전유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저 예쁘고 멋있어 보이는 말이니 가져다 쓰겠다는 태도도 분명한 잘못이지만 나는 이 일에서 한국 사회의 다수자들이 소수자들에게 보이는 배려 없음을 느낀다. 나는 이 일에서, 오랜 세월 장애인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진 지하철 엘리베이터에서 장애인들이 배제되고, 장애인이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것을 막는 경찰들의 모습, 장애인이 엘리베이터에 타려고 하면 눈을 흘기며 먼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버리는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성소수자들을 가장 악질적으로 괴롭히는 개신교인들이 성소수자들의 용어인 ‘커밍아웃’을 가져다가 크밍아웃 운운해가며 낄낄거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구조도 좋고 언어의 전유도 좋고 제도도 좋고 다 좋은데, 당장 내 언행을 누군가가 민감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정도의 생각도 못하는 사람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함께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다. 대혐오의 시대를 운운하기 전에 이런 사소한 배려를 한 번쯤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성소수자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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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건설 워크아웃: 레고랜드의 날갯짓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워크아웃은 구조조정을 말한다. 구조조정은 기업을 축소시키는 작업을 말하는데, 기업과 금융기관이 함께 협의해서 하는 구조조정은 워크아웃, 법원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조조정은 법정관리라고 보통 부른다. 보통 회사가 어려워져서 부도 일보 직전이 되면 우선 금융기관들과 협의해서 금융기관의 말을 다 들어줄테니 부채나 이자를 좀 줄여달라고 하는 게 워크아웃이고, 워크아웃이 결렬되어서 송사로 서로 한번 얼룩져보자고 하면 법정관리가 된다. 어디까지나 부도는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더더욱. 태영건설은 국내 30위 안에 드는 건설사로 SBS의 관계사로도 유명한데 태영건설의 위기설은 이미 2022년 말부터 솔솔 나오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2022년 레고랜드 사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레고랜드 레고랜드가 지어질 때 선사시대 유적을 밀어내고 짓는 게 맞냐는 논란이 상당히 컸지만 그 이외에도 강원도와 레고랜드의 운영사인 멀린과의 계약이 지나치게 불공정하다는 논란도 나왔다. 강원도가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공사비도 부담하는데 운영 이익은 멀린과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운영이익의 30%만 강원도가 가진다고 하다가 3%로 줄어들기까지했다. 반대의 목소리가 강했지만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치적을 위해 강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사를 맡은 강원중도개발공사는 STX 건설을 시공사로 정하고 1년 가까이 공사를 진행했는데 멀린에서 갑자기 시공사를 현대건설로 교체해 버렸다. STX가 대규모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자(한겨레.2019.06.17.) 강원도는 STX에 다른 공사를 몰아주겠다는 식으로 일을 무마했다. 이것은 이것 대로 특혜 논란이 일었다. 레고랜드와 관련된 문제는 이것 말고도 엄청 많은데 일단 생략하기로 하고, 2020년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강원중도개발공사는 건설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2050억 원 가량의 어음을 발행한 후 강원도가 지급 보증을 서는 것으로 했다. 그런데 대출 만기일이 거의 다 되어갈 시점인 2022년 9월 28일,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도의 부담을 줄이겠다면서 강원중도개발공사의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이다. 즉, 강원도는 빚 갚을 수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결국 관련 회사들은 부도처리되었고 사태는 계속 커져서 사람들이 공기업 채권을 신뢰하지 않아 채권을 가지지 않으려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어차피 저런 식으로 안 갚아버릴 거면 채권을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한전이나 한국도로공사 같이 잘 운영되고 있던 회사들까지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고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같은 경우에는 자금 조달에 실패해 시공사들이 빚을 떠앉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해외로도 소식이 퍼져서 한국의 정부와 지방정부를 믿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이미지를 남기고 말았다. 10월 27일, 김진태 지사는 채무 전액을 갚겠다고 선언했지만 건설사들의 줄도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공기업은 물론 일반 회사채에 대한 신용도가 다 하락을 했기 때문에 회사들, 특히 건설회사들의 자금 운용이 심각한 수준으로 어려워진 것이었다. 전국 200위권인 우석건설의 부도를 시작으로 동원건설, 대우산업개발(이안 아파트), 대우조선해양건설, 삼호건설, 굿모닝토건 등 수십개의 대형 건설사들이 줄줄이 무너져내렸고, 이는 건설사 아래의 시공사, 자제납품업체, 인력업체 등의 도산으로도 이어졌다. 태영건설의 위기는 레고랜드의 날갯짓이 불러온 것이었다. 애초에 레고랜드를 무리해서 짓지 않았다면, 끝까지 성실하게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졌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정치인들의 무책임함 때문에 기업과 국민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PF 피에프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roject Financing)이라는 뜻이다. 기존의 대출이 기업의 신용도, 재정건정성 등으로 이루어진다면, 피에프는 특정 사업의 예상 수익을 보고 이루어지는 대출을 말한다. 피에프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수익에 대한 대출이므로 상당히 어렵고 까다로운 대출이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사실상 이름만 피에프일 뿐, 프로젝트의 사업성이나 이 사업에 현금이 얼마나 오고 갈 수 있는 지 등을 보기 보다 기업의 신용도를 보고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기존의 기업금융과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기존 기업이 안 망하고 운영되고 있으니 이 사업에 대출을 해준다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사업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 사업에 현금이 유동적으로 오갈 수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지나치게 부실하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태영건설은 건설사들 중에서도 피에프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 소문이 있었다. 태영건설은 자기 회사는 건강하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2023년 12월, 태영건설이 하청업체에 현찰 대신 어음을 주면서 태영건설이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2023년 3분기 기준으로 현금이 돌지 않아 대출금 이자도 못 갚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며 태영건설의 주가가 하락하였고, 결국 12월 28일에 워크아웃을 신청하게 되었다. 워크아웃이니까 부도는 아니지만 회사가 상당히 부실한 상태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워크아웃으로 가게 된 것은 태영건설 측이 SBS 지분 매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태영건설 워크아웃, 그 여파는 태영건설이 얼마나 성실하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태영건설이 이 문제를 열심히 노력해서 해결한다고 해도, 건설사들과의 금융거래에 대해 더더욱 신용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갈 것임은 자명하다. 결국 또다른 건설사의 위기는 계속 발생할 것이다. 건설사들의 금융 위기는 건설분야 뿐 아니라 금융 분야로도 이어질 것이며 자칫 잘못하면 한국 경제 전체의 위기로 퍼질 수도 있다. 태영건설의 워크아웃은 옛날 한보그룹 사태와 마친가지로 이후의 경제난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태가 될 것이다.  (참고로 워크아웃은 몇달 안에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짧아도 3, 4년, 길면 8년 이상 워크아웃 과정이 진행될 것이며, 그 와중에 금융기관에서 도저히 그냥 넘기기 힘든 문제나 부실이 발견된다면 금융기관에서 워크아웃을 취소할 수도 있다. 법정관리에 들어가거나 최종 부도처리 될 수도 있고, 태영건설이 버티며 구조조정을 하는 도중에 다른 건설사와 하청업체, 금융분야에서 입을 피해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또 세금을 투입해 사태를 막는다면 기업의 잘못을 세금을 통해 국민 전체가 책임지는 그림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이 사태는 강원도 정치인들의 대책없는 레고랜드 유치와 김진태 지사의 대책없는 회생신청에 의해 벌어진 일이기도 하지만 태영건설 경영진의 대책없는 경영에 의해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건설사와 연관이 있는 노동자와 하청업체를 생각하면 마냥 외면할 수도 없는 문제지만, 언제까지 경영에 의한 피해를 우리 사회가 다 함께 책임져야 하는 것인지 이제는 좀 다같이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국의 정치인과 기업인들, 자칭 소위 한국의 사회적 리더라고 하는 사람들의 의사 결정 방식이 지나치게 비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나라는 반성도 이제는 좀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홍콩 ELS 문제도 마찬가지다. ELS는 일종의 선물투자다. 만기와 기대수익률, 하한선을 정해놓은 다음, 주가지수나 주가가 하한선을 내려가지 않으면 수익을 내는 구조다. 선물투자는 사실상 도박이다. 홍콩ELS는 홍콩 H지수의 등락에 따라 돈을 걸고 돈을 먹는 구조인데 이 상품의 만기(3년)가 서서히 다가오고 손해가 확실시 되자 총 천 억이 넘는 손해가 예상되고 있다. 은행 직원들이 이 상품을 포함한 선물 투자에 대해 잘 모르면서 막연하게 손해볼 일이 없다는 식으로 판매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몇년 전부터 나왔는데 홍콩 ELS 피해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한국 경제의 위기는 이익만 보면 된다는 한국 사회 전반, 특히 의사결정권자들의 도덕적 해이에서 시작되고 있다. 선물이란? 특정 시점(주로 현재)의 가격으로 합의하여 미래 시점에 상품을 거래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보자. A는 배추 농사를 짓고 있고 B는 김치 공장 사장이다. 배추를 수확하는 가을에 배추가격이 얼마가 될지는 모른다. 그래서 A와 B는 농사를 시작하는 시점에 계약을 한다. 배추를 수확하는 시기에 배추 가격이 얼마가 되건 지금 가격으로 거래를 하자고. 이게 선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체로 A가 경제적으로 궁핍하거나 농사에 들어갈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거래에 응하는 경우가 많다.) 이걸 주식 시장에 도입하면 된다. 미래 시점에 특정 주식을 사거나 팔기로 하고, 특정시점(주로 현재)의 가격으로 거래를 한다. 지금 천 원 하는 주식을 반 년 뒤에 사기로 결정하고 선물 거래를 하면, 반 년 뒤에 주식값의 등락에 따라 내 득실이 정해진다. 어떤 이들은 주식이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내 눈에는 국가가 인정한 유일한 도박이다. 선물거래는 주의하도록 하자.
경제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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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동성애 ~ 이동환 목사 출교 사건을 보고
(사진출처 서울신문.2022.07.16.) 1 동성애에 대한 성경 속 이야기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보는 성경적 근거는 이러하다. 우선 첫째로 『창세기』에서 신이 인간을 처음 창조할 적에 아담(남성)을 만들고 그 짝으로 하와(여성)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내용에 근거하여 이성애적 성 결합이 성경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이성애적 결합은 모두 일부일처제여야 마땅하다. 신이 아담에게 여러 여성을 취하라거나, 그의 배필로 여성을 여러 명 만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 안에서도 일부다처제나 축첩을 하는 남성 인물들이 여럿 나온다. 당장 유대 민족과 아랍 민족의 기원으로 언급되는 아브라함도 두 명의 여인에게서 각각 자식을 낳았다. 이에 대해 지금 우리의 기독교는 신약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구약은 이미 지켜진 옛 약속이기 때문에 구약을 반드시 근거로 들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둘째는 『레위기』 18장과 20장의 서술이다. 『레위기』 18장에는 가증한 풍속-신이 미워하실 풍속-으로 이성애적 결혼 관계를 기반으로 한 성관계 이외의 모든 성관계를 가증한 풍속이요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근친상간, 불륜, 태어난 아기에게 다른 신인 몰렉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 수간, 생리 중인 여성과의 성행위, 그리고 남성 간의 동성애가 가증한 성행위로 거론되고 있다.  『레위기』 20장에서는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다른 신을 섬기는 자, 부모를 저주하는 자, 불륜을 저지르는 자, 근친상간을 하는 자, 수간을 하는 자, 남성끼리 동성 성행위를 하는 자들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남성 사이의 동성 성행위는 성폭력이나 성매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행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다소 논란은 있으나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저주 이야기가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문란한 성생활이고, 그 문란한 성생활 중 하나로 동성애가 언급되고 있다. 저녁때에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다. 롯이 소돔 성 어귀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서 맞으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하였다. "두 분께서는 가시는 길을 멈추시고 이 종의 집으로 오셔서 발을 씻고 하룻밤 머무르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길에서 하룻밤을 묵을 생각입니다." 그러나 롯이 간절히 권하므로 마침내 그들이 롯을 따라서 집으로 들어갔다. 롯이 그들에게 누룩 안 든 빵을 구워서 상을 차려 주니 그들은 롯이 차려 준 것을 먹었다.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성의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너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느냐?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너라.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相關-서로 관계함) 좀 해야 하겠다." 롯은 그 남자들을 만나려고 바깥으로 나가서는 뒤로 문을 걸어 잠그고 그들을 타일렀다. "여보게, 제발 이러지들 말게. 이건 악한 짓일세. 이것 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네. 그 아이들을 자네들에게 줄 터이니, 그 아이들을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이 남자들은 나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게." 그러자 소돔의 남자들이 롯에게 비켜서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서 "이 놈이 저도 나그네살이를 하는 주제에 우리에게 재판관 행세를 하려고 하는구나. 어디, 그들보다 네가 먼저 혼 좀 나 보아라" 하면서 롯에게 달려들어 밀치고 대문을 부수려고 하였다. (표준새번역『창세기』19장 1~9절) 이상이 구약에서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다. 넷째는 『로마서』를 비롯한 신약성서 안에서의 동성애 관련 서술이다. 『로마서』는 사실상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도 바울이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중 하나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원래 예수 승천 이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을 박해하다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이 시기에는 아직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로 성립되기 이전이었다. 원래 사도(아포스톨로스 απόστολος)는 예수를 직접 만난 자여야만 했는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살아 생전에 그를 만난 적은 없지만 예수의 계시를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바울의 사촌인 바나바의 중재로 결국 사도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기존 유대교 가르침의 발전 정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베드로, 야고보 등)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와 단절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후자에 속했다. 『사도행전』에는 여러 사도들이 열심히 여기 저기 전도하다가 어쩌다 한번 모이기만 하면 이 문제로 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이런 갈등의 주된 주제 중 하나는 유대교적 전통을 새로운 모임 안에서 시행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이 중 가장 크게 문제가 된 것은 할례였다. 이 시기의 할례는 이런 식이었다. 어떤 성인 남성이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로 선언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기를 꺼내어 테이블 같은 곳 위에 얹어 놓고 음경의 포피를 흑요석으로 잘라내는 것이었다. 일단 다 큰 성인이 다른 사람 앞에서 성기를 내놓는 것도 꺼림찍한데,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기 피부 일부를 잘라내고 피를 보는 일은 할례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도 썩 보기 좋은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가르침에 매력을 느끼고 모임에 참여하길 바라던 자들이 할례 이야기를 듣고는 모임에 참여하길 거부하고 떠나는 일도 있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에 할례를 포함한 유대교적 율법 전통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유대교와의 단절을 주장했다(『로마서』 2장 25절~29절, 『사도행전』 15장) 초기 기독교에 있어서 유대교와의 단절을 주장한 사람들에게 유대교와 유대인은 단절의 대상이었고 속된 말로 ‘너무 설치는’ 사람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예수의 가르침과 유대교의 단절을 선언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기독교라는 종교로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 속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표준새번역『로마서』1장 24절~27절) 『로마서』 이외에도 신약 안의 여러 곳에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창노릇을 하는 자나 동성연애를 하는 남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중상하는 자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10절) -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다. 당시 코린토스 교회 사람들은 베드로파와 아볼로파로 나뉘어 파벌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매우 가슴 아파 하면서 두 번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 먼저 보낸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다. 『로마서』가 비교적 이성적인 느낌이라서 “바울의 복음”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것과 대비되어 『고린도전서』는 교회의 분열에 대한 가슴 절절함과 비통함이 강하게 느껴지는 게 특징이다. 우리가 알기로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사용하면 선한 것입니다. 율법이 제정된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않은 자와, 속된 자와, 아버지를 죽인 자와, 어머니를 죽인 자와, 남을 죽이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사람을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그 밖에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건전한 교훈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이 복음을 선포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8절~11절) - 『디모데전서』의 “디모데”는 사람 이름이다. 디모테우스(Τιμόθεος)라는 인물로 사도 바울의 제자뻘 되는 젊은 교역자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젊은 교역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조언의 편지다. 다만 최근에는 이 편지가 진짜 바울의 편지가 아닐 것이라고 추측하는 쪽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일부 진보적인 성직자나 신학자들이 “성경이 고의로 왜곡되었다”거나 “해석이 잘못 되었다 - 남색이 아니라 남창이다”라고 이야기하긴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아무리 이야기해도 성경적으로 동성애는 죄가 맞을 것이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성경 속에 거론된 여러 죄 중에서 왜 유독 “동성애”만 걸고 넘어지냐고 비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레위기』에 나오는 “새우를 먹지 말라”라던가 “두 종류의 원단이 혼합된 것을 입지 말라”고 하는 구절들을 그대로 다 지키지도 않으면서 왜 동성애만 걸고 넘어지냐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창세기』 38장 9절에서는 남성의 자위행위를 죄로 규정하고 있고, 『디모데전서』 3장과 『디모데후서』 1장에서는 이혼과 재혼을 죄로 규정하고 있는데 몇몇 대형교회에 청년부, 아동부 등과 함께 돌싱부도 있는 것을 내가 여러 곳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더 거론하지는 않겠다. 또, 동성애를 포함해 성경 속에 거론된 여러 성적인 죄/일탈들은 거의 대부분 주체가 남성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근친상간의 경우에도 남성이 가족/친족 내의 여성(모친, 자매, 딸, 여자 조카, 장모, 처제, 며느리 등)을 대상으로 정욕을 품거나 성행위를 하는 경우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에게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을 오로지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약에서는 여자가 교회에서 말을 하지 않아야 하며 남자를 통하지 않고 말하면 머리를 밀어버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단에 따라서는 여성 목사도 존재하는 시대에 왜 동성애는 안 되는 것인지, 이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시원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고린도전서』 11장 4절. 개역개정판) 2 동성애에 대한 현대 기독교 교단들의 입장 기독교와 동성애에 대한 견해는, 교파는 물론이고 성직자, 신앙인 개개인에 따라 크게 다른데 완전히 죄라고 보는 입장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입장, 두 가지의 극단적인 축이 있고 나머지는 이 사이의 어딘가 점으로 존재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죄로 보는 입장에 가깝다) 실제로 미국 성공회 같은 경우는 동성애에 대한 입장 때문에 둘로 갈라져 있기도 하다. 동성애를 여전히 죄로 들고 있는 교단에서는 구약과 신약에 일관되게 동성애를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일관성이 있고, 또 성서무오설이라고 하는, 성경이 보여주는 구원에 대한 지침은 완벽한 것이며 일부 오류가 있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으나 대체로 큰 오류는 없다고 보는 생각에 그 근거를 두기도 한다. 이와 비슷하게 성경의 글씨 하나하나는 모두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축자영감설도 존재한다. 흔히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를 인정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하는 성서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적/시대적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부터 벌써 성서무오설은 그 논리가 깨진다. 성서에 오류가 없다면 역사적/시대적 변화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또 시대적/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성서의 모든 문자에 동일한 가치가 있어서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의미가 서로 배치되는 여러 문장들에 대해 배경 설명 없이 오로지 문자/문장의 논리만을 이용해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신약 안에서도 어딘가에선 선행이 최선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또 어딘가에서는 선행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배치되는 문장이 존재하는 것은 대화에 상황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시대적/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성경적 가치를 사회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으로도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 지 알 수 있다. 동성애에 대해 포용적/수용적인 기독교 교단에서는 예수가 동성애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그 근거로 든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현대 기독교는 예수교가 아니라 기독교다. 예수가 그냥 예수가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온 구원자이며 우리를 대신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희생한 희생자라는 사실 뿐 아니라, 신과 신의 아들(예수), 신의 말씀(성령)이 사실은 같은 것이라고 하는 삼위일체론, 언젠가 심판의 날이 오고 예수가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재림)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종말론까지를 전부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3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교로 예수운동(Jesus Movement)이라는 말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1960년대 이후 히피들 사이에서 유행한 예수 운동이 가장 유명하지만, 원래는 예수의 공생애부터 기독교 성립 이전까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행동, 지향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청년 예수가 진짜 자기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고 지칭했을지는 알 수 없다. 유대교의 개혁을 원했는지, 새로운 사상을 창조하려 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파격적인 행보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흔히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말하고 있고 네 복음서는 모두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유대인 중의 보수파, 극우집단들이 청년 예수를 나무에 매달아 놓고 때려죽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사복음서 성립 이전에 쓰여진 사도 바울의 편지들이나 사도들의 말에 보면 예수가 ‘나무에 매달려’ ‘매를 맞아’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너희(유대인들)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사도행전』 5장 30절. 개역개정판)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사도행전』 13장 29절. 개역개정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전서』 2장 24절. 개역개정판) 하지만 사도 바울 이후부터 지금까지 기독교의 역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 무관심했다. 역사적인 예수가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삶을 살다 갔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자 또 하나의 신이요, 그 자체로 곧 신의 말씀이며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 이 세상의 나쁜 것들을 다 쓸어버리고 예수가 구원자요 희생자임을 믿는 자들만 살려주어 그들의 왕국 속에서 살게 하실 분이라는 것, 그것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 모든 종교가 다 그런 측면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면 말만 할 줄 아는 이들만 많아져 집단 자체가 타락해 버린다. 어쩌면 고대부터 근대까지 (더 나아가 현재까지도) 유럽의 사상사라는 것이 기독교를 타락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역사일지도 모른다. 예수는 어차피 처음부터 베일에 쌓여진 채 알려진 인물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부정하지만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 무슨 이유인지 되게 기분 나빠하지만), 예수는 끊임없이 사도 바울에 의해서, 교부(처치스 파더)들에 의해서, 성직자들과 신앙인들에 의해서 새로 해석되고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지금 여기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맞는 예수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복음서 이전의 예수, 사도 바울 이전의 예수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시간을 두고 기다린 들, 지금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심판과 재림이 이 세상에 당도할 리가 없다. 식민지 상황 속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보수화되고 배타성을 강하게 품게 된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라는 존재는 그 자체가 반역이었고, 그 시대, 그 민족과의 불화였다. 하지만 예수는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했다. 예수의 등장은 그 자체로 재림이고 심판이었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신구교를 막론하고 증오와 배타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식의 배타성을 드러내지 않고는 짧막한 설교 하나도 못하는 불쌍한 종교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에서 심판과 재림,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이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땡인 덧없는 공간, 거기서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죽고 썩어 없어질 우리네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만이 우리 삶의 의미인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이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의 심판과 재림이 언제가 나타날 이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한국 기독교 안에서 사이비니 이단이니 정통이니 해가며 싸우는 것은 다 덧없는 일이다. 언젠가 불벼락으로 불의한 것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못 버리는 한, 내 눈에는 정통교회나 <나는 신이다>에 나오는 사이비 교회들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 교회와 성직자, 신앙인들이 다시 예수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이 세상 만물은 자극이 없으면 가만히 있는다. 그게 물리적 법칙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 자체로 반역이고 불화인 사람들이 있다. 나는 성소수자의 존재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최근 감리교단(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성소수자에게 축복 기도를 했고, 성소수자 인권단체를 개설했다는 이유로 이동환 목사를 절차적 정당성도 무시하고 출교 처분을 내렸다. (한겨레.2023.12.08.) 나는 이동환 목사의 존재가 심판이요 재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네가 감히 그 사람과 예수님을 동일하게 보느냐고 호통을 칠지도 모른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 같은 것을 굳이 거론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출교를 명한 그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마음 속으로 정말 진실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리도 빈약하고, 사회의 이득도 되지 않는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 진정한 진실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을 거부하는 그들에게 안타까움의 기도를 보낸다.
성소수자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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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 2023년 11월 29일, 헨리 키신저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세. 2 헨리 알프레드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는 1923년 5월 27일에 독일에서 태어나 1938년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3년에 완전히 미국으로 귀화한 그는 군인이 되어 독일어 통역 업무를 맡기도 했다. 뉴욕시립대학 시티 칼리지 경영-행정관리학부에 입학했다가 2차대전을 맞아 군대에 간 키신저는 1946년에 다시 하버드에 입학, 1950년에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의 지도교수는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얜델 엘리엇(William Yandell Elliott, 1896~1979)이었고, 윌리엄 교수의 지도 하에 1952년에 19세기 유럽 외교사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54년에는 빈 체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빈 체제란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었다가 완전히 패배한 후, 메테르니히 등을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이 국경, 국제질서 등을 전부 나폴레옹 이전으로 되돌리기로 한 것을 말한다. 그는 박사 논문에서 나폴레옹 이후 백년 동안 유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나폴레옹과 프랑스에 대해 다른 유럽 국가들이 징벌을 내리지 않고, 힘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에 중점을 주었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한국의 많은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빈 체제에 대해 서술할 때 나폴레옹이 퍼트린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저버리고 메트리니히 등이 중심이 되어 나폴레옹 이전의 군주제로 돌아가려고 했다고 서술하며 그 보수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키신저를 빈 체제를 균형의 회복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박사 과정을 졸업한 후에는 하버드 대학 정치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외교 정책에 대해 다양한 발언을 쏟아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핵’에 대한 이야기다. 키신저는 아이젠하워 정권의 핵전략은 ‘대량 보복 전략’을 비판하면서 핵무기와 기존의 무기를 단계적으로 운용하면서 무슨 전쟁이든 일단 최대한 안 일어나게 하되,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는 제한전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케네디 정권의 고문이 되어 외교 정책에 잠시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확실히 정치인이 된 것은 닉슨 대통령 시절이다. 3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 대통령후보 예비선거에 입후보한 넬슨 록펠러(Nelson Aldrich Rockefeller, 1908~1979)의 외교정책 고문이 되었다. 1964년, 1968년 대선에서도 그를 지원하면서 록펠러 가문과 연을 맺게 되었다. 록펠러가 선거에서 완전히 패한 후에는 1968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리차드 닉슨에게 직접 스카우트되어 국가안보문제 담당 보좌관이 되어 정권의 핵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전까지 미국의 외교정책은 국무장관이 결정권을 쥐고 있었으나, 닉슨 정권 때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외교정책의 결정권을 쥐게 되었다. 키신저는 이에 앞서 「관료와 정책입안」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데, 미국 외교의 기능 강화를 위해서는 유명무실한 존재인 NSC가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키신저는 젊은 외교관, 장교, 국제정치학자들을 스카웃해 NSC 특별 보좌관에 임명해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국무성 등과 권력투쟁을 벌여 닉슨 정권 하에서 외교정책의 결정권을 완전히 독점하게 되었는데, 국무장관을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배제시킬 정도였다. 이 시기 미국의 대사, 주재 군인, CIA 지국장 등은 NSC, 어떻게 보면 키신저의 수족들이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훗날 그가 이룬 최대 업적인 미중교류 개시 역시도 키신저가 동남아시아와 유럽의 주재군인, CIA 지국장들을 활용해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을 했으며 그 모든 과정에서 국무장관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고 한다. 4 1971년,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의 밀사 자격으로 중국에 극비 방문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도 회담을 진행하며 중국과의 화해와 외교 관계 수립을 도모했고, 이와 동시에 중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교섭 카드로 삼아 북베트남을 만나 베트남 전쟁 종전 교섭을 하고, 소련과도 제1차 전략무기제한조약(SALT1)을 체결했다. 이런 일련의 정책을 데탕트라고도 부른다. 이 시기,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을 하고 있었다(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키신저는 소련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중국과 함께 파키스탄을 지원하였다. 파키스탄은 중국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를 중개하는 역할을 맡았고, 키신저는 이에 대한 대가로 동 파키스탄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과 강간을 외교적으로 엄호해 주었다. 동 파키스탄은 훗날 독립해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1973년에는 마오쩌똥(毛澤東) 주석을 만나 미국, 일본, 중국, 파키스탄, 이란, 튀르키예, 서유럽이 함께 소련을 포위하는 포위망을 구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키신저가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중국, 소련과 관계를 맺으며 또 해결한 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 종전이다. 키신저는 중국,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북베트남이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고 압박을 했고, 동시에 대규모 폭격과 봉쇄라는 군사적 압박을 진행해 결국 베트남과 평화적인(?) 종전을 타협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키신저는 북베트남의 보급선 역할을 하던 라오스, 캄보디아에도 비밀리에 폭격을 지시해 최대 수십 만명으로 추산되는 사상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제4처 중동전쟁 후에는 중동지역을 돌아다니며 이슬람권 국가들과 이스라엘을 조정하기 위한 셔틀 외교를했다. 1974년에는 아랍의 맹주였던 이집트의 사다트 정권을 소련과 분리시키고 미국편으로 만들기 위해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했고, 사우디 아라비아와는 원유를 달러로 결제하기로 약속해 미국의 자원 공급을 원활히 하면서 사우디 아라비아에는 안전 보장을 제공했다(워싱턴-리야드 밀약). 1973년. 키신저는 국무장관이 되어 포드 정권이 퇴진할 때까지 미국의 외교를 장악했다. 이 시기, 키신저의 지휘 하에 있던 NSC에서는 [국가안전보장과제각서 200(National Security Study Memorandum 200)]이라는 것을 작성했는데 이를 흔히 키신저 리포트라고도 부른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이렇다.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는 인구가 증가하는 나라의 정권의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이는 미국의 불안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개발도상국에 대해 인구를 억제하는 의학적, 정치적 개발원조를 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보고서는 1989년에 기밀이 해제되었다. 5 1977년,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콜롬비아 대학 교수 자리를 제의 받았지만 학생들의 격한 반대로 취임하지 못했다.  그 후에는 조지타운대학 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 가서 자신이 공직에 있었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1982년, 키신저 어소시에이트라는 국제 컨설팅 회사를 설립해 주로 중국 대상 비즈니스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자문을 해주는 일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큰 부를 얻었다. 그 이후로도 그는 수많은 기업은 물론 트럼프 정권에 이르기까지 외교/무역 관련 자문을 계속했다. 2007년에는 「핵무기 없는 세계(A World Free of Nuclear Weapons)」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의 내용은 핵무기는 더 이상 전쟁 억제가 불가능하니 미국 정부는 핵무기를 없애는 게 낫다는 이야기였다. 이란, 북한의 핵실험이 화제가 되던 당시, 이 논문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19년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의식을 초월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며, 전쟁이나 분쟁에서 인공지능을 이용해 전쟁을 하는 게임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코로나로 인한 건강 문제는 금방 해결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국제 장벽이 생겨날 우려가 있으며 이런 장벽이 세워지면 앞으로 몇 세대 동안 이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6 그의 외교정책을 흔히 현실주의라 평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로지 미국의 이익과 미국이 맹주가 된 상태에서의 국제 안정을 꾀했기 때문이다. 그가 박사논문에서 빈 체제를 높이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의 현실주의는 강대국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뿐이었다. 말로는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실상을 잔혹한 독재자들을 지원해주고 있었던 미국 외교의 한 측면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최근에는 결정은 닉슨이 한 것이고 키신저는 ‘사신’에 불과했다는 연구도 있다.) 그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공산국가인 중국을 제3세계라 부르며 마치 미-소-중 삼국이 강대국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적중했다. 중화민국의 UN 탈퇴와 중화인민공화국이 UN 상임이사국이 되는 데에도 그의 활약이 있었다. 현재 중국을 만드는데에 어느 정도 키신저의 공이 있다고도 하겠다. 그는 미국을 위해 캄보디아 폭격을 감행해 수십 만을 죽였고, 1973년에는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인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리기 위해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지원해 대통령궁을 폭격하게 만들었다. 칠레 사람들은 피노체트 정권의 폭력적 정치 하에서 고통을 받았는데 1989년에 미국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피노체트를 바로 버렸다. 1975년에는 동티모르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얻어냈는데 동티모르 해방전선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점령하는 걸 묵인했다. 인도네시아에 의한 동티모르인 학살을 묵인한 것도 그였다. 7 키신저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고, 그의 현실주의적 정책을 배워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 그의 전쟁범죄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강약약강처럼 보이는 것은 나 뿐일까? 이렇게 또 한 시대가 갔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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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를 가르칩시다: 한국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를 다루는 방식
(MBC 에브리원 성지순례. 이미지 출처 MBC) 1 조선 중기의 일이다. 안동 사람 퇴계 이황이 한참 어린 학자 고봉 기대승과 인간의 감정과 윤리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편지를 주고 받을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우선 두 사람의 학문적 깊이에 감탄하였고 자기보다 서른 살 어린 젊은 학자 기대승의 반론에 예의를 갖추어 성실하게 대답하는 퇴계의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그 때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퇴계와 동년배이고 퇴계와 함께 경상도를 대표하는 천재로 불리던 합천 사람 남명 조식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고향인 경상도에서만 거처를 옮겨가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윤원형의 세도정치에 대해서도 서슬퍼런 비난을 퍼붓기도 했고,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곽재우, 정인홍, 김면이나 재상을 지낸 이산해 같은 인물이 모두 조식의 제자였다. 조식은 퇴계와 기대승 사이의 논변에 감탄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近見學者。手不知洒掃之節。而口談天理。計欲盗名。而用以欺人。反爲人所中傷。害及他人。豈先生長老無有以呵止之故耶。如僕則所存荒廢。罕有來見者。若先生則身到上面。固多瞻仰。十分抑䂓之如何。伏惟量察。 지금 공부하는 자들을 보면 손으로 마당에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하늘의 이치를 입에 담으니 명성을 도둑질하여 사람을 속이려 하는 것이라, 도리어 사람에게 중상을 입을 것이고 그 해는 타인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선생은 큰 어른이 되어서 어찌 그런 것을 꾸짖어 그만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저 같은 사람이야 성격이 거칠고 독선적이라 찾아오는 이가 드물지만 선생은 몸이 남들보다 높은 경지에 있어 많이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이들을 이제 그만 진정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남명의 말이 다소 과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지만 또 한편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 주변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간단한 예의도 차리지 못하는데 하늘의 이치며 인간의 도덕이며 올바른 정치 같은 고상한 이야기를 입에 담으면 도리어 본인도 해를 입고 남에게까지 해를 입힌다는 말이 요즘 사람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주변은 커녕 자기 몸 하나, 자기의 본능 하나 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이미 보지 않았는가? 나는 그러면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떠올렸는가? 얼마전 우연히 접한 한 TV 프로그램 내용 때문이다. 2 MBC 에브리원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에 방송되는 <성지순례>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김제동, 김이나, 풍자, 송해나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고 불교 승려, 개신교 목사, 천주교 신부가 속세를 체험하는 것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관찰 예능이라고 한다. 지난 11월 14일에 방송된 3화에서 송산 스님, 유경선 신부, 차성진 목사가 출연했다. 세 사람이 이태원을 지날 때 차 목사가 LGBT에 대한 각 교단의 입장을 물었다. (방송 중 해당 내용)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흘러갔다. 주제를 먼저 꺼낸 차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성경을 따르는 사람이고 어쨌든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거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을 하거든요. 예를들면 이성애는 항상 올바른 형태로만 존재하나? 그렇진 않단 말이죠. 결국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존재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그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아예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해 버린다던가 아니면 그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권 조차 부정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저는 동의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누군가는 이 말을 들으며 ‘목사가 할만한 말이네’, ‘목사치곤 진보적이네’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도 말 자체도 예의가 없거니와 당사자 앞에서 한다니 더 예의가 없는 말이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보자. “저는 기독교 믿는 분들이 제정신 같지가 않아요. 그치만 그분들의 인권을 부정하고 싶진 않아요.” 진보적인 듯이 말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성소수자에 대해 하는 말이라는게 늘 이런 식이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를 믿을 자유, 종교와 신앙을 강제로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이지 자기 종교의 교리랍시고 세상에 대해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를 두고 굳이 레위기나 로마서의 구절을 들고 와 논쟁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는 교리나 사상의 문제 이전에 예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당사자 앞에서 죄가 어쩌고 인권이 어쩌고 하면 당사자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말을 피하거나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아 보자.’ 내게는 이 정도 생각도 못하는 사람들과 헌법이 어떻고 교리가 어떻고 해가며 논쟁을 할 만큼의 체력도 시간도 없다. 그런데 가장 웃긴 건 이거였다. 유경선 신부의 말이다. “저는 종교인들한테는 이런 질문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왜냐하면 종교한테 물어 보는 사람들도 계속 돼요 안 돼요를 물어 봐요. 그런데 좀 자연스러웠으면 좋겠어요. 말씀하시는 것처럼 다 자연스럽게 살고 싶지 않아요. 저기 나가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반대해서 나간거예요. 종교 안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긍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언론에서도 종교인들에게는 항상 답을 바라는, 종교인들 한테는 너무 폭력적인 질문이에요. 종교는 항상 윤리적인 답을 내려 줘야 하는 그런 게 싫다고 여러분이 말하면서도 자꾸 저희한테 그런 답을 요구 하는, 그런 사회적 통념이 저는 불편하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저희 사랑하는데 어떻게 하면 잘 사랑할 수 있어요? 이런 방법을 물어 봤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들은 작사가 김이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거는 진짜 생각지도 못한. 성직자들에게 그런 걸 굳이 물어 보는 게 폭력적인 거라는, 성직자 입장에서는 우리한테 어쩌라는 거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뻔히 알면서 물어보는 거니까.” 내가 이 말을 듣고 정말 기가 찼다. 유 신부는 본인이 신부이고, 신부라는 이름으로 방송에 나온 이상 좁게는 가톨릭, 넓게는 기독교를 대표해 방송에 나온 사람이다. 애초에 그 종교에서 죄를 운운하지 않았으면 성소수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을 일도 없다. 자기들이 원인을 제공해 놓고 이제와서 자기들한테 묻는 게 폭력적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그리고 성직자가 이런 말에 답을 안 한다면 그들이 이 사회에 존재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성소수자 반대 시위에 나간 것도 ‘자연스럽게’ 나간 거라니, 이 말도 정말 웃기다. 성소수자를 치료한답시고 (가톨릭 개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안에서 행해지는 언어적/물리적 폭력과 감금, ‘교정’이라는 의미에서 행해지는 성폭행들을 생각하면 저런 일을 자연스럽다고 평하는 유 신부의 말과 저런 말에 공감해주는 김이나 씨의 말에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누군가는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도 한다지만, 나는 그 말도 아니라고 하고 싶다. 무식도 때로는 죄가 된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세상을 나쁜 길로 끌고 가는 무식은 죄다. (기독교 교리 내에서의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기회를 두고 다시 논하고 싶다. 한국에서 종교나 신학을 전공했다는 사람들도, 성직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성경과 교리를 제대로 공부한 이가 드물다. 그들과의 논쟁은 내 체력 낭비일 뿐이고, 조만간 종교적 측면에서의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다시 논하고자 한다.) 3 우리의 근대화는 서구화이고 기독화였다. 근대화가 반드시 서구화이거나 기독화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한국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창궐을 겪으면서 근대화는 곧 서구화며 기독화라는 등식을 가지고 살았다. 이런 가치관에 동의하건 말건 한국, 특히 한국에서 조금이라도 공부를 했다는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 자체를 서유럽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고 인류의 역사가 오로지 그런 유럽적 체계가 지향하는 지향점을 향하고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생각을 드러내는 것에 그다지 거부감을 가지지 않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의 근본은 우선 무지(無知)다. 이건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거부하고 배우지 않아 생기는 무지가 아니라 다양한 정보와 가치, 지식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아 생기는 비의도적인 무지다. 이런 비의도적인 무지는 한 문화권 안에서 상식이 되고, 이런 상식은 아무 막힘 없이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 버린다. 지금까지 우리는 짧게는 70년, 길게는 백여 년 정도 동안 유럽 중심의 사고 방식과 그 우월성이라는 가치를 유무형의 형태로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늘 이집트 이야기를 하고 서유럽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근대 이전의 우리 삶은 전부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어도 서술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 스스로를 변방으로 만들고 있고, 이런 사고 방식은 K-POP이 유행하고 한국 정부와 한국 문화의 일거수일투족에 전세계가 관심을 가지는 지금까지도 한국을 무슨 약소국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각설하고, 나는 성소수자 이야기를 하다가 왜 또 근대 이야기를 하는가? 성소수자에 대한 시각도 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없다고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없었을까 하면 그건 아니다. 음양으로 세계를 설명하던 가치관에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해설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기 때문에 음양이 결합하는 게 법칙이며 그러므로 음양의 결합이 아닌 동성애나 음양을 뒤바꾸는 혹은 음양이 뒤바뀌었다고 하는 트랜스젠더는 잘못된 것이라고 설하기도 한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모든 인간은 음양 이전의 태극이며 음양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는 각자의 행동에 달려 있으므로 음양으로 성性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세계에 기독교처럼 성소수자에 대해 혐오적 시선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종교는 없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슬람권의 성소수자 혐오도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유럽 근대 문명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명도 많다. 전근대 일본 역시도 남성간의 동성애와 동성 성관계가 매우 성행했으며 그것이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근대 이후 일본의 민속을 근대적 학문으로 정립한 민속학자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国男, 1875~1962)는 동성애를 비롯해 비-이성애, 비-일부일처제 적인 성풍속에 대한 서술을 의도적으로 제외했다는 비판이 있다. 근대 이후 한국(조선)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비-이성애적 성행위는 점점 음지로 향해갔다. 특히나 1920~3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에로/구로/난센스(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의 준말)’라는 흐름은 ‘엽기’라는 말을 유행시킴과 동시에 비정상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을 구분하며 자신이 사회적으로 비정상에 속해 있지 않음을 안심시키고 비정상과 접촉했음을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로 여기는 문화를 만들어냈고 이는 조선에도 퍼지게 되었다. 이 당시 일본에서 ‘에로/구로/난센스’의 대상이 된 것은 주로 (특히 여성 사이의) 동성애, 비정상적 성행위, 정신질환, 성적 암시 혹은 노골적인 성묘사가 들어간 글이나 그림, 사이비 종교, 매우 특이한 범죄 등이었고, 이것이 사실상 지금까지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를 다루는 방향을 결정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조선에 퍼지고 조선 내에서는 어떤 풍조가 유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2018년에 나온 박차민정 선생의 『조선의 퀴어』라는 책을 추천한다.) 4 배우 홍석천 씨가 커밍아웃을 한 게 2000년 9월이다. 그 이전에는 훈련소에 간 여장남자 이야기나 동성 성매매/원조교제, 여학생들 사이의 로맨틱/섹슈얼한 분위기 같은 것을 자극적인 흥미 소재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소위 밀레니엄 이후, 한국 언론에서는 나름대로 차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성소수자들의 삶에 대해 다룬 적도 있고, 영화 <왕의 남자> 이후 일어난 드라마, 영화 작품에서의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동성애 붐은 수많은 작품 속에 동성애자(주로 게이) 캐릭터를 존재하게 했다. 하지만 수많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게이 혹은 남성답지 않은 남성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그 와중에 여성 성소수자들은 아예 다루어지지도 않았다. 퀴어 퍼레이드를 둘러싼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그 이후부터는 퀴어축제는 물론이고 동성결혼/시민결합 합법화, 더 나아가서는 동성애에 대한 찬반을 다루는 방송도 많아졌다. 하지만 다루는 방식은 늘 비슷하다. 동성애는 변태성욕이며 죄악이고 불법화/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와 기독교 계열 운동가가 등장하고 성소수자에 친화적인 비-성소수자가 등장하고 이름이 비교적 널리 알려진 성소수자(홍석천, 김조광수 등) 한 명을 등장시킨다. 그 자리에 참석한 단 한 명의 성소수자는 어떤 기분일지 내가 겪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고 누군가는 이렇게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류의 방송을 보게 될 때마다 ‘저 한 명’, ‘저 한 명만’을 섭외한 이유가 무엇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 한 명은 방송 앞에서 너무 과격한 이야기를 자제하게 될 것이고, 자신들이 겪었던 피해 이야기 중에서 방송에서 언급해도 될 것과 언급해선 안 될 것, 도저히 언급하기 싫은 것을 계속 상기하며 구분해 말하려고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섭외도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5 종교의 자유는 믿을 권리와 믿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이지 종교 교리랍시고 아무 언행이나 일삼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차별금지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한다. 이와 동시에 말하는 사람, 특히 성소수자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종교인들에게도 교리가 어떻고 종교가 어떻고 하기 이전에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어 줬으면 좋겠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도 성소수자를 방패막이로 내세워 특정 종교의 거친 언행을 여과없이 내보내는 일을 삼가줬으면 좋겠다. 내 말과 행동으로 인해 주변의 사람들이 혹시 상처 받지 않을까,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상처 받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 우리는 그것을 예의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매너라고 하고 비속어로는 싸가지라고 한다.
성소수자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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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갈등, 투쟁의 역사
피라미드 같은 고대의 거대 건축물이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고대 도시나 유물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혹시 외계인이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고대인을,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힘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지만 재미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 신전이나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걸 보면서 그런 음모론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음모론에는 유럽인들이 세운 게 아닌데 대단해 보이면 그것을 외계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태도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서유럽 백인들의 기본 마인드이고 근대 이후 세계의 기본 마인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어떤 이들은 1945년 이후의 분쟁은 국가와 국가의 분쟁 보다는 비-국가적 분쟁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하며, 그런 의미에서 1945년 이후를 긴 평화(Long Peace)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기만적인 말이다. 1, 2차 대전의 당사자 강대국들이 자기네 땅에서 안 싸웠다고 이 세상을 평화롭다고 말하는 것도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그 싸움의 근본적인 원인이 강대국들 자신이라는 점을 쏙 빼놓고 말한다는 점에서도 참으로 책임감도 없고 반성도 없는 문제가 많은 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평화였는가? 베트남전쟁은 평화였는가? 자기들이 만들지 않았는데 좋아 보이는 것은 죄다 외계인이 세운 것이고 자기들이 한 나쁜 일은 자기들 탓이 아니라는 태도. 이것이 서유럽 백인들의 기본 마인드이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과학이 오랜 시간 가져왔던 태도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국제 분쟁을 두고 분쟁이 일어나는 지역은 자원이 많거나 전략적 요충지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자원이 많아서 어리석고 악한 독재정권이 이를 꽉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거나(이른바 자원의 저주),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어서 분쟁은 정말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는 식의 설명들 말이다. 하지만 궁금하다. 우리는 독도의 자원 때문에 독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독도에 별 자원이 없으면 우리는 독도를 일본인들에게 그냥 넘겨줄 수 있을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순전히 지정학적인 이유로 알박기를 하는 것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슨 지정학적인 이유로 죽어가면서도 그 땅을 나가지 않는 것일까? 가끔은 우리 세계와 우리 지구가 사실은 ‘세계들’, ‘지구들’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엄연히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지구는 당연히 단 하나지만, 그 지구를 바라보고 그것을 각자의 머릿속에서 재구성해 만들어낸 세계/지구는 수십억 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만들어진 세계/지구의 일정 부분, 특히나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개념은 미국이 만들어 놓은 줄 세우기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그 잘잘못에 대한 이야기 이전에, 길어야 백년인 우리네 인생에서 그렇게 남이 만들어둔 안경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다소 억울한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앎을 얻는 과정을 배움이라고 표현한다. 배움은 나의 앎이 어떤 위치에서 이루어져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고, 그 깨달음을 통해 나의 앎이 수많은 인과관계 중 일부에 해당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앎이란 우리의 사회, 세계, 우주의 일부에 불과하며 나의 앎, 타인의 앎이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인지를 파악해야 하며,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어떠한 구조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끝없이 돌아보며 고민해야 한다. 그게 바로 공부다. 우리의 앎에 그런 조건, 인과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작게는 잘못된 앎을 가지는 것이고 태도가 오만한 것이지만 크게는 윤리와 정의에 어긋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최근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국제 분쟁들에 대해서 대강의 원인과 결과를 정리해두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이 참고로 삼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분쟁/학살의 원인과 형태에 의한 분류 #영토 영토의 통치권, 개발권, 점유 등을 두고 싸우는 경우 #민족 민족, 부족 단위의 갈등, 학살 #종교 종교 혹은 종교관의 차이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 학살 #이념 이념 갈등으로 인해 벌어진 갈등, 학살 #자원 석유, 천연가스, 광물, 토지, 수자원 등을 두고 벌어진 갈등, 학살 #식민지와분할통치 갈등, 학살의 원인이 강대국의 식민통치, 분할통치 등과 관련이 있는 경우 #역사적갈등 1900년 이전, 즉 전근대 이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갈등 #전쟁범죄 전쟁의 와중에 벌어진 집단 학살, 약탈, 방화, 강간 등 #재난 갈등, 학살의 원인 중에 자연재해가 있는 경우 #기후위기 지구온난화, 사막화 등의 기후변화로 인해 생겨난 갈등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일본-러시아, 쿠릴열도) #영토 #역사적갈등 러시아와 일본이 조약을 맺어 아이누족이 살던 땅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지기로 했다. 일본은 쿠릴 열도(일본 이름 치시마)를, 러시아가 사할린 전역을 가지자는 내용이었다. 일본이 세력이 강해지면서 1904~1905년에 러일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2차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소련이 사할린을 수복하고 쿠릴 열도까지 점령했다. 당시 소련의 수장 스탈린은 홋카이도 북부까지 러시아 땅으로 삼고 싶었지만 미국의 반대로 쿠릴 열도를 가지는 정도로 만족하게 되었다. 이후 벌어진 도쿄재판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은 쿠릴열도의 영유권을 포기한다는 조약을 새로 맺게 되었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문제를 다루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한국, 중국 등 실제로 일본에게 피해를 입었던 국가들이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독도 문제도 이와 걸려 있다.) 1950년대 이후 일본이 다시 국세를 회복하자 일본은 시코탄 섬, 하보마이 군도, 쿠나시르 섬, 이투루프 섬이 쿠릴열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러시아에게 다시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쿠릴열도 분쟁, 일본에서 말하는 북방영토 분쟁이다. 일본의 우익들은 이 네 개 섬을 모두 돌려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 공산당 등 좌익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만이 유효하고 그 이후의 조약은 모두 문제가 있는, 무효에 가까운 조약이라고 주장하면서 쿠릴열도 전체를 돌려받아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홋카이도가 비교적 비-자민당 세력이 강세인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는 아이누족과 일본인, 러시아인들이 널리 걸쳐살고 있고, 징용, 징병으로 끌려간 조선인들도 살고 있다. 이 문제까지 겹치면서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다. 1894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영토 #민족 #종교 1894년부터 1917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을 원하던 여러 민족과 종교를 탄압한 사건들을 총칭해 부르는 말이다. 아르메니아 인이 기독교인으로 가장 많은 학살을 당했지만 그 이외에 그리스정교회나 가톨릭, 튀르크 족 이외의 다른 이슬람교 부족들도 대규모 학살을 당해 근대 최초의 제노사이드라 불리기도 한다. 적게는 60만 명에서 많게는 150만 명 정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튀르키예와 다른 이슬람국가, 동유럽 국가들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아직도 가해의 주체가 누구인가(국가인가 민간단체인가 둘 다인가), 피해의 규모가 얼마인가 등을 두고 다투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과 튀르키예 사이에 우호 분위기가 일자 일부 기독교 단체에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이슬람 국가들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일본-중국/대만, 센카쿠열도혹은조어도) #영토 #자원 센카쿠 열도, 댜오위다오(조어도)는 무인도다. 명나라 영락제 때 만들어진 지도에 중국 땅으로 표시되어 있긴 하지만 그 이후의 중국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류큐 왕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결국 오키나와 현이라는 이름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894년~1895년에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중국의 북양함대가 일본에게 패배했다. 중국의 직예총독 이홍장이 시모노세키로 가 이토 히로부미와 조약을 체결하며 대만과 요동의 통치권을 일본에 할양하게 되었다. 이때 조어도는 언급이 되지 않았다. 바로 직전인 1895년 1월, 후쿠오카 출신의 오키나와 상인 코가 타쯔시로(古賀辰四郞)가 조어도가 주인 없는 섬임을 확인하고 일본 정부의 땅으로 편입시켰다. 문제는 1960년대 이후 이 땅에 상당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후다. 중국과 대만에서는 이 땅이 고대 중국 지도에도 표시된 중국 땅인데 청일전쟁 중에 일본이 불법으로 편입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애초부터 이 땅이 류큐 열도의 일부인 암초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1904년 독도(한국-일본) #영토 #식민지와분할통치 러일전쟁 당시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은근슬쩍 편입한 일본은 지금도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원래 무인도였으니 먼저 선점하는 사람이 임자 아니냐는 주장(무주지 선점론),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국이 독도를 일본 땅의 일부인 것처럼 이야기했다는 것 등을 들고 있다. 1904년~1098년 독일의 나미비아 학살 #민족 #식민지와분할통치 나미비아에는 원래 코이코이족, 반투족, 산족, 헤레로족, 나마족 등이 살고 있었는데 1884년에 독일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독일인들은 이곳에 광산을 건설하고 헤레로족과 나마족의 가축, 토지를 빼앗았다. 독일의 폭력으로 삶의 기반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린 이 지역 원주민들은 결국 독일인들의 광산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남성들은 폭행, 여성들은 성폭행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이를 견디지 못한 헤레로족의 사무엘 마하레로가 사람들을 이끌고 독일인들을 공격해 폭력/성폭력의 가해자 140여 명을 처형하고 그 이외의 독일 남성과 여성, 어린이 등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군대를 보내 나미지아 원주민들을 토벌하게 했다. 독일군은 무차별적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했는데 1904년 8만 5천 명 가량이던 헤레로족이 1908년에는 만 오천 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독일인들은 무기를 이용한 살해는 물론 사막이나 바다에서 아사를 시키거나 맹수에게 사람을 산 채로 던져주기, 생체실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 지역 원주민들을 살해했다. 나미비아에서는 독일에게 이 문제에 대한 인정과 사과, 배상을 요구했지만 독일은 이 일이 히틀러 이전의 일이므로 사과나 배상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고 지금도 정치인 개개인이 사과 발언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아직 정식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기록되어 있다.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아일랜드-영국, 북아일랜드) #영토 #민족 #종교 #이념 #식민지와 분할통치 #역사적 갈등(1900년 이전부터의 갈등) 오랜시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를 둘로 나누어 개신교 신자가 많이 사는 북아일랜드를 영국 땅으로 남기고 가톨릭 신자가 많이 사는 나머지 땅을 독립시키게 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아일랜드 문제를 오랜 기간 동안의 식민과 비식민, 착취와 피착취 문제라고 이야기하는데 영국인들은 이를 종교 갈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민족과 종교, 역사 문제, 식민지 문제에 더해 왕정을 지지하는 사람과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도 존재하고 아일랜드에 주재하는 영국인들이 대체로 보수적인 편에 속하는 한편 오랜 기간 착취에 시달렸던 아일랜드인들은 진보, 개혁, 더 나아가서는 맑시즘(IRA)을 지지한다고 하는 이념 문제도 존재한다. 1972년에는 영국에서 비폭력 아일랜드인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실시해 14명을 죽인 일이 있었고(피의 일요일) 1982년에는 IRA 활동혐의로 체포된 정치범들이 자신들을 일반범죄자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대우해달라는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아일랜드 단식투쟁). 과거 식민시절부터 현대의 폭력적 시위 진압에 대해 영국 정부가 사과를 하긴 했지만 영국의 초중고 교과서에서는 이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재난 #민족 #이념 1923년 9월 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관동지역 전역에 진도 6의 강진이 발생해 대규모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 지진 이후 사람들이 혼란한 와중에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조선인, 중국인과 함께 일본인들을 죽이고 정치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정부는 이를 방관하며 조장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소문은 언론을 타고 계속 확대 재생산 되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거나 지진의 원인이 조선인이라는 말까지 돌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3~4주 동안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를 관동대학살이라 한다. 같은 해 12월 5일 <독립신문>에서는 학살에 의한 사망자 수를 6,661명이라고 했고 일본의 기독교 사회주의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1933)는 2,500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매년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고 1945년 이후로는 도쿄도지사도 이곳에 참석하거나 사과 문구를 보냈지만 2017년부터는 코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지사에 의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의 난징 함락 #영토 #민족 #전쟁범죄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중국이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분열되어 있고 군대의 질과 양 모두 수준이 낮다고 판단해 중국을 순식간에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많은 시간과 자원, 인명피해를 발생시켜야 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 내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강해지게 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난징을 지키겠다는 열의를 보였지만 능력이 부족했던 난징 수비 사령관 탕성즈(唐生智당생지, 1889~1970)는 결국 12월 12일 오후 다섯 시에 10만 명의 군인들과 25만 인민들을 그대로 두고 핵심 참모들만 대동한 채 난징을 빠져나갔다. 12월 13일 오전 네 시, 일본군이 난징성에 입성해 정부청사를 점령하면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난징대학살이다. 일본인들은 총알을 아끼기 위해 칼이나 몽둥이로 사람을 죽였고 학살 대상은 군인에서 민간인, 성인 남성에서 여성과 아동, 노인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에서의 약탈과 방화를 교범에도 명시하고 있었다. 이런 교육 방식에 더해 일본군 내에 만연해있던 가혹한 군기 문화, 중국인에 대한 우월감, 전쟁 과정에서 생겨난 강한 적개심 등이 학살을 더욱 잔인하게 만들었다. 6주 동안 벌어진 대학살에 대해 일본에서는 지금도 중국이 학살자 수를 부풀린다거나 학살은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1990년대에 이후 사회가 우경화되면서 직접적으로 이를 조롱하는 일본인들까지 존재한다. 1941년~1945년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영토 #민족 #종교 #이념 #전쟁범죄 1932년, 나치당은 총선을 통해 독일의 제1 정당이 되었고, 1933년 1월에는 히틀러가 정권을 받아 독일을 통치하게 되었다.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홀로카우스토스(ὁλόκαυστος)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희생양을 불태우며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뜻한다. 나치독일에서는 이를 엔틀뢰중(Endlösung; 최종해결책)이라 불렀다. 가장 많이 수용되고 사망한 것은 역시 유대인이다. 유대인 이외에도 집시, 소련의 군인과 민간인, 정치범, 여호와의 증인 신도, 남성 동성애자, 장애인, 폴란드인 등이 강제수용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1944년 5월 타타르 족 이주 정책 실시 #민족 #영토 타타르 족은 몽골고원에서부터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에 걸쳐 살던 유목민이고 이 중에서 크림 반도에 사는 이들을 크림 타타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이 망하고 이들은 크림 인민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세속주의 이슬람 공화국을 세워 잠시 독립을 했지만 곧 볼셰비키의 침공을 받아 무너지게 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들을 3일만에 전부 화물칸에 싣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버렸다. 이 과정에서만 8천 명이 사망했고 그 전후 사망한 사람까지 합치면 최소 3만 명 이상의 피해자가 생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도 크림 타타르족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주로 살고 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선언(팔레스타인-이스라엘 등, 가나안, 시나이반도) #민족 #종교 #영토 #식민지와분할통치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열강들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분쟁이 시작되었다. 가나안 영토, 시나이 반도에 대한 분쟁은 물론 여러 종교의 성지이기도 한 예루살렘 문제, 골란 고원의 실효지배를 둘러싼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사이의 갈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 정부 수립, 9월 9일 북한 정부 수립 #이념 #영토 #식민지와분할통치 #전쟁범죄 1949년 12월 7일 국부천대(國府遷臺) #영토 #이념  중국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장졔스가 이끌던 국민당이 정부를 대만으로 옮긴 사건. 이를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대만(중화민국)이 성립하였고 지금까지 두 나라의 문제를 양안(兩岸) 문제라 부른다. 1951년 5월 23일 티베트 17조 협의 #영토 #이념 #민족 #자원 #종교 티베트는 고대부터 독립적인 국가를 유지하며 살았다. 고대에는 선비족이 이곳에 살았고 기원후 633년이 되어 지금의 티베트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티베트 왕국을 송첸캄포가 건국했다. 당시의 최강국이라 할 수 있는 당나라를 상대로도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했던 티베트 왕국은 1750년 청나라 건륭제에 의해 청나라의 보호령이 되었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티베트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열강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향해 진격하자 티베트와 중국은 17개 협의를 맺어 티베트는 자신들이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고 중국은 티베트의 자율통치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마오쩌똥의 정책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되고 공산당 내에서도 마오의 정책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일자 마오는 어린 학생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선동을 시작해 과거의 구습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자는 명목을 내세우며 문화대혁명을 벌이게 되었다. 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한 환경파괴는 물론, 종교 탄압을 위해 사원 파괴, 종교인 학살, 공개된 장소에서의 강제 성관계 지시 등을 벌였다. 이 과정을 다룬 영화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쿤둔(1997)>이다. 티베트에 대한 비인도적 행위와 정치적 탄압은 지금도 진행중이며 핵개발이나 원자력 발전으로 생겨난 방사능 물질을 이 지역에 버리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대만 정부도 티베트는 중국 영토이며 티베트인은 중국인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1954년 11월 1일 알제리 전쟁 발발 #민족 #식민지 #역사적갈등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것은 1830년대의 일이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후, 1945년 5월 8일에 나치가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하자 알제리 인들이 모두 거리에 나와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때 벌어진 프랑스인들의 알제리인 학살을 세티프 구엘마 학살이라고 한다.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알제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지속적인 학살과 테러를 자행했다. 그러던 중 호치민이 중심이 된 베트남 독립은 알제리인들에게 매우 큰 자극이 되었다. 1954년 11월 1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을 선언하고 1962년 3월 19일까지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인들은 알제리에서는 물론 프랑스 본토의 알제리인에 대해서도 학살과 강제수용을 자행했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도 프랑스인과 온건파 알제리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1959년 르완다 내전 시작 #민족 #식민지 #전쟁범죄 1959년 르완다 내전이 시작되었다.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에는 후투족과 투치족 등이 자유롭게 각자의 영역을 지켜주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문제는 벨기에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벌어졌다. 벨기에 사람들은 키와 콧대의 길이 등을 이유로 투치족을 더 우월한 부족이라고 평가하고 이들에게 권력을 주며 이 일대를 통치하게 했다. 벨기에는 소수의 투치족에게 권력을 몰아주고 다수의 후투족들의 권력을 빼앗고 후투족 족장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재편했다. 부룬디에서도 이와 관련해 내전이 벌어졌지만 두 민족의 사람수나 재산에 큰 차이가 없었으므로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르완다는 달랐다. 권력은 투치족이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수는 후투족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권력을 쥔 투치족과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계속되는 내전 끝에 1994년 4월 7일, 르완다 학살이 벌어졌다. 후투족 민병대가 약 3개월 동안 투치족을 최소 50만 명 이상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제의 양극화 속에서 대체로 직업이 없었던 후투족 젊은이들이 이곳에 대거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이 시기에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가 최소 천 명 이상이라는 통계도 있다. 1960년 11월 13일 과테말라 내전 발발 #민족 #정치 #자원 #식민지 과테말라는 1954년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 군부가 통치했다. 이 과정에서 크리오요라 불리는 유럽 이주민들의 후손과 친-군부 인사들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대다수의 과테말라 국민들은 소작농이나 빈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 11월 13일 젊은 좌익 장교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쿠데타는 금방 진압되고 실패했지만 이 일이 기폭제가 되어 수많은 좌익 단체들이 결성되어 과테말라 정부와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은 1996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는데 이 사이에 과테말라 정부는 미국, 이스라엘, 대만 등의 지원을 받아 좌파 지식인, 노동조합에 가입된 사람, 종교인, 언론인, 학생, 기타 반정부적으로 보이는 사람 약 20만 명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1962년 3월 2일 버마 군사반란과 네윈의 집권 #민족 #종교 #식민지 버마(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인들은 이 지역을 쉽게 다스리기 위해 그 지역 부족에게 토지의 경영을 맡겼는데 그렇게 선택된 사람들이 바로 로힝야족이었다. 버마족을 비롯해 미얀마에 살고 있는 수많은 민족들이 로힝야족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또 대체로 불교를 믿는 다른 민족과 달리 로힝야족이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점도 있다. 영국이 미얀마를 떠나고, 네윈이 무혈 쿠데타로 집권을 하면서 정치, 경제 분야에서 나름대로 힘을 발휘하던 로힝야족이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네윈의 집권 이후 버마족의 힘이 강대해지자 다른 민족들은 버마족에 대한 경계를 하는 편인데 로힝야족의 탄압에 대해서만은 동일하게 같은 찬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2012년 로힝야족 남성이 라카인족 여성을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과 추방의 정도가 더욱 심해지기도 했다. 1962년 10월 20일 중인전쟁 발발 #영토 #민족 #식민지와분할통치 #역사적갈등 인도와 중국의 국경분쟁은 사실상 티베트 땅을 둘러싼 두 나라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가 히말라야 주변에 있던 작은 부족국가들을 정복하고 달라이라마가 중국을 피해 인도로 망명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은 티베트의 종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인도는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가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티베트 근처에서 군사행동을 벌이려 했다. 영국의 지원을 받아 자신만만해 하던 인도는 설마 중국이 전쟁을 일으키겠느냐고 생각했지만 중국군은 오랜기간 국민당, 일본과 싸웠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결국 1962년 10월 20일 중국이 공격을 시작했고 중국은 뛰어난 화력을 갖춘 인도군을 재래식 보병으로 정밀타격하고 보급로를 끊으며 계속 승리를 거뒀다. 중국은 인도 국경까지 밀고 들어갔고 세계 열강들은 한국전쟁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냐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계속 밀리던 인도는 결국 비동맹 원칙을 깨고 미국에게 중국에 폭격을 가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소련도 이를 승인했다. 결국 중국은 11월 21일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제3세계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인도는 이 일로 완전히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인도는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인정하고, 중국도 인도가 네팔과 부탄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이 전쟁은 끝이 나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는 이 이후에도 티베트, 히말라야 지역을 두고 계속 국경 분쟁을 벌이고 있다. 1967년에는 시킴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중국이 군사행동을 벌였다가 인도에게 패했고 2017년에는 부탄을 두고 중국과 인도가 서로 심리전을 벌이다가 투석전을 벌이는 일이 벌어졌고  2020년에는 카슈미르에서 주먹과 돌, 몽둥이 등을 이용해 백병전을 벌였고 2022년에도 인도 타왕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이들의 싸움에 대해 부탄과 네팔, 티베트 사람들의 입장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66년 5월 26일 가이아나 독립 #식민지와분할통치 #영토 #자원 1966년 영국령 기이나라 불리던 지역이 독립하면서 과야나에세키바(Guayana Esequiba) 지역의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다. 과거 베네수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스페인과 영국은 과야나에세키바를 두고 싸움을 거듭하며 뺏고 빼앗기기를 거듭했는데 가이아나가 독립하면서 이 땅을 두고 가이아나와 베네수엘라 사이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가이아나가 이 영토를 개발하려고 하면 베네수엘라에서 경제적, 군사적 제재를 시행해 방해를 하는 방식으로 분쟁이 진행되었다. 과야나에세키바는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석유가 매장되어 있기도 하며 가이아나 영토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 집권 #이념 #식민지와분할통치 캄보디아의 극좌 무장단체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했다. 과격한 방식으로 집권을 하고도 국가의 발전이나 민생의 안정을 이루지 못했고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괴상한 정책들을 쏟아내자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져갔다. 이에 크메르루주와 지도자 폴 포트는 캄보디아 민족주의와 자신만들만의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도시에 살던 사람들을 지방으로 추방해 강제노동을 시켰고, 스포츠 선수, 연예인, 학자, 학생, 공무원, 의료인, 종교인, 외국인 등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바로 킬링필드다. 심지어는 안경을 쓰거나 손이 부드러운 사람, 배가 나온 사람,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책을 똑바로 드는 사람 등을 지식분자로 몰아 그 가족들까지 고문하고 살해했다. 또 10세 미만의 아동들을 부모와 떼어놓고 고문기술, 사격 등을 가르쳐 사람들을 죽이게 했고, 지방 간부들은 모든 여성을 성폭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대학살극은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공격하면서 끝이 나게 되었지만, 미국은 베트남을 견제한다는 이유로 크메르루주 정권을 지원했다. 시간이 흘러 2006년부터 2022년까지 크메르루주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주동자인 폴 포트는 이미 죽은 뒤였다. 매년 5월 20일은 킬링필드 희생자 추모의 날이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통일 #이념 #식민지와분할통치 1975년 12월 7일 동티모르 사태 #영토 #민족 #자원 #전쟁범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해 강제 병합했다. 이 당시 동티모르인 18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이를 취재하던 호주인 기자와 뉴질랜드 기자들도 인도네시아군인들에게 처형당했다. 이 이후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은 이 지역에서 최소 10만 명 이상의 동티모르인을 죽였다. 1999년, 인도네시아의 학살 계획을 사전에 입수한 김대중 한국 대통령이 이를 APEC에 긴급 안건으로 제기해 인도네시아에 대한 선진국들의 경제적 원조를 하면서 동티모르의 학살을 막고 독립을 지원한 일이 있다. 이로 인해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동티모르는 2002년에 완전히 독립했다. 1976년 2월 27일 서사하라 독립 선언 #식민지와분할통치 #영토 #민족 서사하라 지역은 고대부터 베르베르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다. 대항해시대 이후 여러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분할점령했는데 잠시 모로코 왕국이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가 스페인이 다시 빼앗아 식민지로 삼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한때 스페인령 사하라라고 했다. 서사하라 원주민들은 계속 독립을 요구했고, 모코로에서는 스페인이 자신들에게 이 땅을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UN에 스페인을 제소하기까지 했다. 1974년, 스페인이 민주화 운동으로 어지러워지면서 식민지들을 포기하게 되었는데 이 틈을 타 모로코가 이 지역을 군사점령했다. 이에 앞서 1973년 서사하라인들이 중심이 되어 폴리사리오 전선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진행했는데 모로코가 군사적 개입을 시작하자 1976년 폴리사리오 전선은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다. 지금도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은 독립운동을 진행중이다. 1982년 4월 2일 포클랜드 전쟁 발발 #식민지와분할통치 #영토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 근처, 남극 바로 위에 있는 영국령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이 섬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 전에는 누가 여기에 살았는지, 정확히 언제 누가 발견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1810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이 땅은 자연스럽게 아르헨티나 영토가 되는가 했는데 영국이 실효지배를 했고 1833년에는 군대를 보내 아르헨티나 주민들을 추방하면서 완전한 영국 땅이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악화되고 민심이 악화되자 아르헨티나에서는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자 군대를 일으켜 포클랜드 제도를 공격했다. 당시 포클랜드에는 소수의 영국군이 주둔중이었는데 아르헨티나에서 이 섬을 점령하고 포로로 잡은 영국군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영국의 여론이 들끓게 되었다. 마가릿 대처 영국 수상은 즉시 군대에 명령을 내려 포클랜드 탈환을 지시했다. 영국이 승리한 후, 아르헨티나의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자국 국민들에게 아르헨티나가 승리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 패전 소식이 아르헨티나 내부로 빠르게 전해졌다. 결국 이후 아르헨티나 정치는 악화되어 거의 2년 동안 네 명의 대통령이 바뀔 정도로 불안정해졌고, 인기가 떨어지고 있던 대처는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일조하게 되었다. 1983년 11월 15일 북 키프로스 독립 선언 #영토 #민족 #종교 1960년 키프로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키프로스는 8할 정도가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 인이었다. 이를 이유로 1974년,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통합을 추진하는 그리스인 중심을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 군은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키예 인들이 모여 사는 키프로스 섬 북부를 ‘보호’라는 명목으로 점령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키프로스 전체에서 튀르키예 인들은 키프로스 섬 북부로, 그리스 인들은 그 이외의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키프로스 섬 북부 사람들이 키프로스 연방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UN에서 중재를 시작했지만 남 키프로스 사람들은 쿠데타 이전으로 돌아갈 것을, 북 키프로스 사람들은 공화국의 승인을 요구하며 타협점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1983년 11월 15일, 북 키프로스가 완전히 독립을 선언하면서 중재는 결렬되었다. 지금까지도 연방제 방식의 통합 논의가 나오고 있지만 남북 각각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논의는 진전되지 않고 있다. 1990년 11월 2일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 발발 #영토 #이념 소련 몰도바 공화국의 일부였던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독립을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의 중재를 통해 1992년 몰도바와 트란스니스트리아는 화해를 했지만 지금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사람들은 독립을 원하고 있다. 원래 같은 지역이었던 두 나라는 소련의 성립 이후 친소련 성향의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루마니아 왕국에 속해 있었던 몰도바로 나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1991년 11월 27일 소말리아 내전 발발 #역사적갈등 #영토 #민족 #이념 #식민지와분할통치 원래 소말리아 땅은 에티오피아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지금의 소말릴란드 땅에는 아달 술탄국이 있었다. 1880년대 들어서 소말릴란드 해안가는 영국이 점령하고 내륙은 에티오피아가 점령하게 되었다. 1936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점령했다. 이 시기 이 지역을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라 불렀다. 1945년 이탈리아가 패전을 하고 무솔리니 부부와 그 일당들의 시체가 거리에 매달릴 무렵에는 영국이 잠시 이 지역을 지배했다가 1950년부터 다시 이탈리아가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소말리아 지역이 독립한 것은 1960년의 일이다. 소말리아가 독립한 직후 소말리아에는 대-소말리아 주의가 퍼지면서 에티오피아와 국경분쟁을 벌이게 되었다. 전쟁이 계속되자 1969년 시아드 바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셰르마르케 대통령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시아드 바레는 마레한 족 출신 아버지와 오가딘 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제 발전과 영토확장을 국시로 삼고 국내의 불만을 억누르며 독재를 하던 시아드 바레는 소말리아가 군사적 요충지임을 이용해 소련과 미국 사이를 오가는 외교를 행했는데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에티오피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발생했다. 에티오피아는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아 소말리아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했고 라틴 아메리카와 동아프리카를 휩쓴 금융위기와 시아드 바레의 자기 부족 중심의 정치에 대한 불만이 겹치면서 결국 소말리아는 시아드 바레와 반 시아드 바레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1987년에는 작은 규모의 내전에 불과했지만 1991년, 반 시아드 바레 파인 통일 소말리아 회의(USC)가 모가디슈를 점령하면서 바레 정권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시기를 다룬 영화가 조인성, 김윤석 등이 출연한 <모가디슈(2021)>이고 이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소말리아 내부의 갈등을 소말리아 내전이라고 부른다. 소말리아 정부군과 각 부족, 씨족 사이의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1993년에 벌어진 모가디슈 전투를 다룬 영화가 바로 <블랙 호크 다운(2001)>이다. 내전으로 인해 살기 어려워진 소말리아 청년들은 해적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이는 주변 아프리카 국가들까지 이 내전에 참전하게 만들었고 한국의 청해부대도 피랍된 한국 선박을 구조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작전을 펼친 바 있다. 그 와중에 소말릴란드 지역은 1993년에 부족간의 화해를 이루며 독립하고 자신들끼리 평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소말리아 측에서는 소말릴란드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지금은 내전으로 인해 소말릴란드에 대한 행동은 없는 상태다. 1992년 8월 14일 압하지야(Аԥсны) 전쟁 발발 #영토 #민족 #역사적갈등 압하지야는 압하지야인들이 사는 땅이다. 이들은 이전부터 조지아(그루지아)로부터의 독립을 원했지만 조지아가 이를 묵살해왔다. 결국 압하지야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조지아로부터 독립전쟁을 벌였고 사실상의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 전쟁 과정에서 압하지야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조지아인들에 대한 인종청소가 벌어졌는데 1989년 525,000명이었던 압하지야 인구가 216,000명으로 줄어들 정도였다. 전쟁 자체는 1993년에 끝났지만 인종청소는 1998년까지 계속되었고 조지아는 이에 대한 복수와 영토 수복을 위해 지금까지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는 미국과 서유럽세계에서는 압하지야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93년 10월 21일 부룬디 내전 #영토 #민족 #자원 #정치 #식민지 #역사적갈등 부룬디에는 트와족, 투치족, 후투족 등이 살던 왕국이었다. 독일과 벨기에가 차례로 브룬디 왕국을 점령했는데 벨기에는 항상 부족들을 이간질 시미켜 식민지를 다스렸다. 1962년 부룬디가 독립하고 투치족 중심의 독재정권이 서면서 후투족을 탄압해 왔다. 1972년 이후로는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해 왔는데 1993년 드디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후투계 민주정당인 부룬디 민주전선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쿠데타 시도는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런데 부룬디 대통령이 비행기 요격사건으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이를 계기로 후투족과 투치족 극단주의자들이 무장봉기를 하게 되었고 서로 학살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2005년 5월에 종료되었는데 이때까지 최소 2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2월 28일 코소보 전쟁 발발 #영토 #민족 #역사적갈등 코소보는 원래 세르비아의 발상지였지만 후에는 오스만 제국 휘하로 편입되었다. 이 이후로는 세르비아인이 아니라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에 살게 되었다. 1815년, 세르비아가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한 후 발칸전쟁(1912)을 거쳐 코소보를 차지하였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코소보를 세르비아화 시키고자 하였는데 이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서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티토는 코소보 내의 세르비아화를 중지하고 모든 민족의 생존권과 거주권을 자유롭게 보장하려 하였다. 티토라는 지도자 하에서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듯 했지만 티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분리되었고 과격파 세르비아인인 밀로셰비치가 유고의 대통령이 되면서 코소보를 세르비아의 역사적 성지라는 이유로 자치권을 박탈하고 다시 세르비아화를 추진했다. 결국 코소보는 알바니아인들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했고 급진파를 중심으로 코소보 군대가 결성되면서 상황이 험악해졌다. 문제는 코소보 독립군이 인신매매, 마약밀매, 장기매매 등으로 자금을 마련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코소보와 알바니아인의 자유를 외치는 코소보와 코소보를 범죄집단으로 보는 유고 군대가 충돌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코소보 전쟁(혹은 코소보 사태)이다. 코소보, 세르비아, 그리고 인접국인 몬테네그로는 물론 NATO가 개입하면서 이 전쟁은 대규모 국제전이 되었고 밀로셰비치는 이 기회를 빌려 알바니아에 대한 인종청소를 시행했다. 이 전쟁은 살짝 특이하게도 서구 학계에 화제가 되었는데 전쟁범죄를 일으킨 밀로셰비치에 대한 NATO의 공격에 대해 위르겐 하버마스, 수전 손택 등이 지지를 표시했고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을 벌인 NATO에 대해서 노엄 촘스키가 비판적인 입장을 표시하여 학자 개개인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2003년 2월 다르푸르 학살 시작 #영토 #민족 #자원 #기후위기 #전쟁범죄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수단 다르푸르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 이 지역에는 이전부터 아프리카 흑인과 아랍계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갈등이 있어 왔다. 또 유목민인 바가라족과 농경민족은 푸르족, 자가와족, 마살라이트족이 있었다. 문제는 기후위기였다. 인구의 증가와 토지의 사막화로 인해 유목민들이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목초지를 만들려는 유목민들과 경작지를 유지, 확대하려는 농경민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랍계 유목 민병대들은 정부와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의 비호하에 약탈, 방화, 강간 등을 벌였고 2003년 2월에 이에 대항해 흑인 반군이 조직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를 핑계 삼아 흑인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이 내전/학살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지금까지 최소 3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2008년 8월 26일 남 오세티야(South Ossetia, Хуссар Ирысто) 독립 #민족 #역사적갈등(1900년 이전부터의 갈등) 오세티야는 오세트 인들이 사는 땅이다. 러시아 제국이 오세티야를 러시아 땅의 일부로 병합했고, 소련 혁명 직후에는 오세티야를 둘로 나눠 북 오세티야는 소련의 일부로, 남 오세티야는 그루지야(조지아) 공화국의 일부로 삼았다. 소련이 해체된 후 남 오세티야는 조지아의 일부가 되었지만 오세트 인들이 반발하면서 결국 전쟁이 일어났고, 남 오세티야는 조지아 통치령과 오세트 자치령으로 나뉘게 되었다(1991~1992 오세티야 전쟁). 이후 남 오세티야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부를 성립하고 독립을 선포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2008년 러시아와 손을 잡은 남 오세티야는 군대를 일으켜 조지아가 통제하던 지역을 전부 탈환했지만 지금도 러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남 오세티야를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2011년 그랜드 에티오피아 르네상스 댐 건설 #기후위기 #자원 에티오피아는 2011년부터 청나일강 부근에 수자원 확보를 위한 댐을 짓고 있다. 하지만 사막화로 인해 나일강 하류의 수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이 댐이 건설되면 청나일강에 수자원을 의존하고 있는 이집트는 수자원이 급감하고 오염된 물을 마실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이 댐을 두고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수단이 계속 협상을 진행했지만 지속적으로 협상재개와 결렬을 반복 중이다.  2014년 야지디족 학살 #민족 #종교 #전쟁범죄 이라크, 시리아 지역을 점령한 ISIL은 야지디족에 대한 학살을 시행했다. 야지디족은 야지드교를 믿는 사람들이다. 야지드교는 야지단이라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아브라함 계열 종교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인 ISIL은 이들에 대한 학살을 벌였다. ISIL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나디아 무라드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14년 2월 28일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영토 #민족 #이념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땅이지만 러시아계 주민이 60%,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러시아계 주민들은 군사력도 강하고 경제력도 높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차지하길 원했고, 15% 정도를 차지하던 타타르인들은 과거에 자신들을 크림반도에서 추방했던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인 불안정이 늘 존재하는 곳이었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는 독재 친러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를 지지하는 친서방 과도정부가 들어섰다(유로마이단 혁명). 러시아에서는 이것이 쿠데타에 의한 불법적인 정권탈취라고 비난했는데 그 해 2월 25일, 친러시아계 주민들이 크림반도에서 러시아 국기를 들고나와 우크라이나 과도정부 해산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틀 뒤, 세르게이 익쇼노프라는 범죄단체 수장 출신의 정치인이 갑자기 등장해 20여 명의 무장병력으로 크림반도의 관공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크림반도 총리가 된 세르게이 익쇼노프는 푸틴에게 크림반도의 치안과 안보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고 푸틴은 2월 28일에 러시아 군대를 크림반도로 보내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결국 3월 17일 크림반도에서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독립투표가 벌어졌고 크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2014년 4월 6일 돈바스 전쟁 #영토 #민족 #이념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으로 인해 친러 성향이 강하던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돈바스 지역은 원래 소련으로부터의 독립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가 강한 곳이었지만 우크라이나의 계속되는 부정부패와 정책 실패는 돈바스의 상황을 계속 악화시켰다. 돈바스 지역의 평균임금은 1993년에는 소련 독립 시기(1991년)에 비해 80%나 하락할 정도였고 헐리우드에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리고 싶으면 이곳을 촬영해간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이 이후로 돈바스는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도 원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유로마이단 혁명이 벌어졌고 이 기회를 틈타 우크라이나 안에서 자치를 원하던 지역들이 모두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시위나 군사행동을 벌였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군사행동을 벌인 곳이 바로 돈바스였다. 이 전쟁은 결국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이것이 확대된 것이 바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2014년 4월 30일 우루무치 역 테러 사건 #영토 #민족 #식민지 시진핑 주석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시찰한 직후 벌어진 위구르족의 자살 폭탄 테러다. 총 79명 사망. 원래 위구르 땅에는 몽골계 유목민인 준가르라는 사람들이 살았다. 이들은 끝까지 청나라에 저항하면서 청나라를 괴롭혔고, 건륭제는 준가르 사람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단행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메운 것이 준가르 이전에 원래 살던 위구르족과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등이다. 근대에 들어서 청나라의 힘이 약화된 후에는 독립과 병합을 반복하다가 1955년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청나라 때부터 독립 혹은 이슬람 문화권과의 병합을 원하던 이 지역 사람들이 다시 중국 정부에 불만을 품게 된 것은 19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의 일이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외곽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이렇게 밀려난 빈민, 농민공들이 신장 지역까지 오게 되면서 선주민들과 한족 빈민/농민공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된 것이다. 2014년의 테러를 기점으로 시진핑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였고 이것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신장 위구르 재교육 수용소로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서 위구르인들은 강제 노동은 물론 폭행, 성폭행, 강제 개종, 강제 결혼 등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23년 9월 19일 아르차흐 분쟁 #영토 #민족 아제르바이잔과 아르차흐 공화국 사이에서 일어난 20시간 동안의 군사충돌. 이 일로 아르차흐 공화국은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Наго́рный Караба́х)라 불리는 이 지역은 원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스탈린 시절에 소련의 침공을 받고 소련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취임하면서 이 지역이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소련이 해체된 후에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가 되었는데 그곳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전쟁이 벌어졌다. 1988년부터 1994년까지의 1차 전쟁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승리해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했지만 202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을 벌일 때에는 아제르바이잔이 승리하면서 이 지역의 일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결국 2023년 아제르바이잔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고 아르차흐 공화국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완전히 아제르바이잔 땅이 되었다.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강 댐 건설 #영토 #자원 중국이 이 지역에 향후 댐을 건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티베트 지역에서 시작해 인도와 방글라데시로 흘러가는 이 강의 수로가 댐 건설에 의해 바뀔 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고 물을 무기로 삼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와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은 인도와 중국이 이 문제로 다시 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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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2 - 이스라엘 수립 이후와 지금
캠페인즈팀 영상을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1 -분쟁의 역사와 기원’에서 이어집니다. 전쟁의 시작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과 국가 승인이 이루어지고 영국이 아랍 땅에서 물러나자 아랍 국가들은 바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48년 5월 16일,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5개국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1차 중동전쟁이다. 초반에는 이스라엘이 전력면에서 밀렸지만 이스라엘이 20일 동안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지켜내자 그 다음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막강한 화력으로 중동국가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1949년까지 이어진 전쟁이 바로 1차 중동전쟁이다. 1차 중동전쟁을 이스라엘 독립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56년에는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는 이유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1957년까지 이집트에 폭격을 가했다. 이것이 수에즈 전쟁, 또는 2차 중동전쟁이라고 한다. 아랍권에서는 이를 삼국침략이라 부른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민간 지역에 대한 폭격, 팔레스타인 내의 스파이를 색출하겠다는 명목으로 벌어진 이스라엘의 학살은 아랍 사람들 사이에서 국수주의, 민족주의, 이슬람 극단주의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 때 미국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핵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영원히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서로 바다와 공중을 서로 봉쇄하면서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던 와중에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시작으로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 쿠웨이트 등에 기습 폭격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6월 10일까지 6일 동안 아랍인 2만 명을 죽였다. 이를 3차 중동전쟁이라고도 하고 6일 전쟁이라고도 한다. 3차 중동전쟁과 그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 영토를 빼앗았는데 이집트에서도 이를 벼르고 있다가 1973년 10월, 유대교 명절 욤키푸르에 맞춰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를 4차 중동전쟁이라고 하고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한다.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짧은 기간에 소련은 이집트,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 대리전 양상까지 만들어졌다. 결국 UN이 중재를 하면서 전쟁이 마무리되었는데 이스라엘도 이집트도 너무나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러면 이 전쟁이 일어날 동안 팔레스타인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스라엘 국가 수립이 있기 전까지 팔레스타인 영토 안의 유대인 이주민과 비유대인 선주민 사이의 갈등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원래 팔레스타인 영토 안에서 유대인들이 살던 땅은 20% 미만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승인하면서 UN은 팔레스타인 땅의 반을 유대인에게 분할하는 결정을 내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던 곳에서 추방을 당하면서 불만과 품게 되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때 예루살렘을 공동구역으로 관리하기로 결정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었다. 유대인들은 UN의 결정을 무시하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만들어 나갔다. 이런 와중에 중동전쟁이 벌어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외국과의 전쟁을 빌미로 삼아 팔레스타인 땅을 조금씩 잠식해 나갔다. 이스라엘 국가 수립부터 1차 중동 전쟁 시기에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난민이 되었는데 이를 나크바(대재앙)라 한다. 2023년 UN에서 처음으로 나크바의 날 행사를 진행했는데 이 때 미국은 UN 안에 반유대주의가 팽배하다며 참가를 거부했다.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이 점점 자신들의 거주지를 빼앗기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을 난민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며 이스라엘과 협상 혹은 투쟁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은 없음을 옛날부터 강경하게 밝혀왔고 강경함의 수위도 점점 심해졌다. 이스라엘의 강경함이 더욱 심해지자 팔레스타인 안에서도 온건한 방식이나 협상을 지지하는 입장은 점점 힘을 잃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가끔은 같은 아랍인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을 정도의- 폭력적인 방식의 독립 운동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더 강경하고 폭력적인 방식을 택하는 악순환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해의식을 점점 더 키우면서 아직도 자신들이 피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지금의 사태 1 가뜩이나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이 코너에 몰려있는 가운데, 이스라엘에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더 심해졌다. 조금 쉽게 그리고 거칠게 말하면 네타냐후는 반-노동 성향에 극단적인 종교/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예루살렘의 이슬람 사원에 폭도를 진압한다는 이유로 뜬금없이 무장경찰을 출동시킨다거나 팔레스타인이 홀로코스트에 관여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등의 행동으로 국내외에소 비난과 조롱을 받은 일도 많았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그의 반-노동 성향이나 반-민주주의적 태도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또 뻑하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를 잡겠다는 이유로 민간인 거주지역이나 병원, 학교 같은 곳에 폭격을 가하는 것도 문제다. 그가 보여주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이슬람 문화권 전체를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부패와 반-민주주의적 태도로 내부에도 적이 많은데 아랍 국가에 둘러쌓인 이스라엘에서 너무 주변국들을 신경쓰지 않는 태도도 이래저래 문제가 많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네타냐후는 반-팔레스타인과 ‘안보는 보수’ 이미지로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2023년 10월 7일 아침,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기습 공격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원래 모든 로켓 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아이언 돔을 늘 자랑해 왔는데 이번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최소 2천 발 이상의 로켓이 발사되었다고 하는데 로켓 공격과 동시에 하마스는 트럭과 불도저, 패러글라이드까지 동원해서 가자지구 밖의 유대인 거주지로 밀고 들어왔다. 지금 현재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빼앗겼던 지역을 거의 다 탈환했다고 발표했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중에서도 과격파에 속한다. 지금 이스라엘의 화력으로 하마스를 몰살시키지 못할 리는 없다. 그러나 전쟁이 전면전으로 가고 상황이 악화되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희생되면 이스라엘의 이미지가 악화될 것이다. 서방세계에 러브콜을 계속 보내는 네타냐후 입장에서는 이런 이미지가 생기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포로로 잡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문제다. 팔레스타인에서는 150명 정도의 포로를 잡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유 없이 구속, 구금된 팔레스타인 사람 5천 명과 포로 교환을 요구하고 있다. 네타냐후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니. 생각보다 하마스가 계획적으로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는 점에서 전면적으로 붙었을 때 이스라엘이 생각만큼 빨리 끝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예측도이야기되고 있다. 또 하마스가 보여주는 태도를 보면 예전에 비해 팔레스타인 사람의 희생을 딱히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느낌도 든다. 이스라엘이 막상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다 죽이거나 하마스를 몰살시킨다고 해도 통신이나 전기, 가스는 커녕 수도조차 없어서 오염된 물로 생활을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을 재건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오랜기간 전쟁을 통해 가지게 된 군사강국, 정보강국의 이미지가 깨졌다는 것도 한 가지 기록할 만한 것이다. 아이언 돔과 모사드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군사강국 이미지와 네타냐후의 ‘안보는 보수’ 이미지가 재래식 로켓과 트럭에 의해 깨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만약 이스라엘이 이 문제를 진압하고 사태를 진정시킨다고 해도 이전의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래저래 이스라엘 그리고 네타냐후에게는 안 좋은 결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예상 외로 이번 전쟁을 통해 첨단무기나 정보에만 의존해온 최근의 군사적 경향에 대한 반성이 각국에서 나오고 있다. 한국도 이 이야기가 나올까 두렵다.) 다른 나라들의 태도 1 미국에서는 유대인 셀럽들을 중심으로 해서 팔레스타인을 비난하는 말을 쏟아내는 분위기인데 미국 외의 지역에서는 이런 미국 셀럽들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강한 것 같다. 미국 정부에서는 일단 무기는 지원하지만 군대를 파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 부분은 조금 더 지켜봐야 될 것 같다. 미국 국내의 정치, 경제 사정이 지금 썩 좋지도 않거니와 미국과 이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걸 생각하면 미국도 지금의 사태가 썩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 참전을 할 경우, 혹은 미국의 무기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학살할 경우, 아랍 여러 국가들이 대놓고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해 반대 행동 같은 것은 안 하겠지만 미국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은 분명하다. 전쟁이 확대되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결코 좋은 일도 아니고 미국도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이래저래 실리적으로 그리 좋은 결정이 아닐 게 분명하지만 사람일은 또 모르는 것이니.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 여러 국가들의 경우, 팔레스타인 편을 든다고는 예전부터 말해왔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에는 별로 참견을 안 하는 분위기다. 만약 같은 이슬람 문화권이니 팔레스타인을 돕겠다고 했다면 애초에 문제가 이렇게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석유를 비롯한 자원의 가격이 계속 불안정했기 때문에 중동의 여러 나라들은 각자 자기 나라의 경제 살리기, 미래 경제 계획에 집중하는 분위기이고, 딱히 다른 나라 문제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분위기가 강하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니 갑자기 제5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고 한들 이상할 게 있겠냐 싶을 수도 있고, 수니파니 시아파니 이야기하며 옛 이슬람 이야기까지 꺼내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랍 여러 국가들은 각자 자기 나라의 경제 살리기, 미래 계획 세우기에 몰두하고 있고, 숙적이라고 하는 이집토도 오랜 시간을 두고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를 하고 있는 지금, 하마스의 군사행동을 아랍 국가들이 과연 반길까 싶은 느낌이 든다. 미국도, 사우디 아라비아도, 이집트도, 이란도, 지금의 사태를 썩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한국 입장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이 문제가 미국-이스라엘을 두고 전세계가 찬반으로 갈려 진영이 만들어지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다. 차라리 이럴 때는 인도주의라는 원칙을 천명하고, 비록 하마스가 먼저 공격해서 벌어진 사태이긴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동안 겪어온 차별과 억압을 이야기한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외교관계가 비정하다고는 하지만 의외로 원칙을 명확히 세우고 그것을 계속 고수하면 그것이 통하는 곳이기도 하다. 끊임없는 정세 파악과 기민한 대처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외교는 원칙이나 중요하게 지키는 가치가 없다는 게 제일 큰 문제다. 이제 와서 가치를 따지기가 뭣하다면 전쟁에 대한 입장표명이라도 좀 천천히 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한국 외교부는 이미 팔레스타인에 대한 규탄 입장을 밝혔다(민중의소리.2023.10.08.). 2 최근 한국에서 새로 국방부 장관이 된 신원식은 힘에 의한 평화를 운운하고 있다. 압도적인 힘을 가져야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초강대국 미국도 온전한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데 한국이 어떻게 압도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애초에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라는 게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이번 이스라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평화는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한국의 중년 남자들은 삼국지 같은 걸 좀 끊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인가 합법적인 시위, 비폭력 투쟁 같은 것들이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온실 속의 화초 같이 자란 도련님들이나 할 생각이다. 협상 기회조차 박탈당한 약자에게 평화적인 비폭력 투쟁은 사치일 수 있다. 너무 과격하고 잔인한 방식이라는 말은 할 수 있어도 하마스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친 이스라엘 세력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 유아들을 참수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트릴 동안 우리가 외면해온 팔레스타인의 어린이들, 지난 10년 동안 사망한 2천 명 넘는 팔레스타인의 유아들은 무엇이 되는가? 2천 년 전에 자기 조상들이 살았다는 이유로 원래 살던 사람을 추방하고 죽이는 것을 외면해온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을까? 처절한 슬픔을 뒷전에 두고 방식이 잔인하고 과격하니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얼마나 알량한가! 협상을 거부당한 후 모든 것을 차단당하고 포위당해 생존 조차 겨우 하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평화적인 방식을 운운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가!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온다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그 동안 왜 이스라엘에는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는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미국과 유럽 백인들이 중재해줘야만 평화로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의 투쟁 자체를 비난하거나 섣부른 양비론을 들이미는 태도는 배격해야 한다. (버니 샌더스의 트위터. 나는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의 이스라엘에 대한 끔찍한 공격을 절대적으로 비난합니다. 이러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양측의 무고한 사람들이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끝나야 합니다. -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참 속 편한 소리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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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1 -분쟁의 역사와 기원
캠페인즈팀 영상을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사진출처 BBC코리아.2023.10.08.) 고대 역사 1 한국에서 고대는 늘 숭배의 대상이거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한다. 중간이 없고 극단적인 평가를 계속 오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데 구약성서 또한 그러하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성서의 내용을 극단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고, 그에 대한 반감으로 구약성서 자체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 많다. 구약성서에 나온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하여 그 후손인 요셉 시절부터 이집트에 가서 살다가 노예가 되고 또 탈출을 하고 광야에서 떠돌다가 정착해서 살았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다는 이야기에 대해 고고학적인 근거는 없으므로 이를 덮어놓고 믿는 것도 문제겠으나, 고고학적인 근거가 없거나 희박하다고 해서 고대의 문헌을 조롱거리로 삼는 태도도 사실 썩 좋은 태도는 아니다. 어차피 고대에 대한 자료는 한정적이고 우리는 그 부족함 안에서 이 자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신화는 일종의 상징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탈과 이집트에서의 탈출에 대해 지금 그것을 진짜라고 믿는 학자는 아무도 없고, 이집트 문명과의 큰 충돌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도로 발전한 이집트 문명이 서아시아 땅,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때의 충격이 그만큼 강렬했다고 해석하는 게 옳을 것이다. 12사사가 다스리던 시대를 지나(사사기) 사울 왕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연맹 정치 시대를 지나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왕조가 있고, 이후에 이스라엘 왕조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왕국으로 분열된다. 일종의 남북국 시대인데 고고학적으로 실존이 확인되는 것은 이때부터다. 이후에 바빌론 제국이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해 ‘예후드’라는 이름으로 편입했고(예레미야, 에스겔), 그 다음은 페르시아 왕국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그 다음에는 알렉산더 대왕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문화가 이 지역을 오래 지배했는데 그 동안 이 지역은 코엘레 시리아라 불렸다.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후계자를 명확히 지목하지 않고 ‘가장 강한 자’라고 말하는 바람에 알렉산더 대왕의 영토는 셋으로 분열된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메소포타미아의 셀레우코스,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가 제국을 나눠가졌는데 이 중 이스라엘 지역을 다스린 것은 셀레우코스 제국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이 약화, 분열되자 유대인들도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그 대표가 하슈모나이 왕국이다. 마카베오 가문이 주도한 독립운동이라서 마카베오 왕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시대의 기록인 <마카베오서>는 개신교에서는 성서에 포함을 시키지 않고, 가톨릭에서는 성서에 포함을 시킨다. 그 다음은 로마가 이곳을 점령한다. 이 때의 나라 이름을 헤로데 왕국, 왕을 헤롯 왕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이름만 왕이지 식민지의 현지인 총독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신약성서의 배경 -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승천 - 이 바로 이 시대다. 유대인들은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에게 통치받는 것을 매우 기분 나쁜 일로 받아들였고 크고 작은 독립 운동을 벌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유대인들은 마지막에 신이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믿었다. 예루살렘의 성소에 로마 군인들이 들어갔을 때 유대인들은 산이나 나무, 성벽에 올라가 이제 저들이 신의 벼락을 맞고 죽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로마 군인들이 성소 안의 유물을 싹싹 긁어서 여유롭게 나오자 유대인들은 신이 자신들을 버렸다며 통곡을 했다. 이 이후 유대인들은 흩어져 살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원후 100년 정도까지 유대인들의 역사다. 2 유대인들은 가깝게는 유럽에서부터 멀게는 중국까지 진출해서 살았는데 송나라의 수도 개봉부에도 유대인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청나라 때에도 외모는 중국인의 외모가 되었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1907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린 개봉부 유대인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유대인은 혈통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종교적인 개념이기도 해서 유대교를 믿으면 유대인으로 친다. 이를 두고 유대인들이 특이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런 생각은 유라시아 중앙부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사고방식이다. 유라시아의 양 끝에 사는 동북아인들과 서유럽인들이 유독 고대부터 혈통을 강조해왔다고 생각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다. 유대인을 살던 지역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동부~중부 유럽에 걸쳐 살던 유대인을 아슈케나짐,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포르투갈)에 살던 유대인을 스파라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걸쳐 살던 유대인을 미즈라힘이라고 하는데, 전통과 예법이 거의 똑같기 때문에 스파라딤과 미즈라힘을 합쳐서 스파라딤이라고 퉁쳐서 부르기도 한다. 현대 유대인의 대부분은 아슈케나짐이다. 생물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아슈케나짐은 유대인 부계혈통에 동부, 중부 유럽에 살던 여러 민족의 모계가 합쳐져서 이어져오는 유대인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유명한 유대인들-알버트 아인슈타인, 프란츠 카프카,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등-이 아슈케나짐이다. 3 로마 시대 이후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탄압을 받으며 살았다는 이야기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보이듯이 유대인은 고리대금업과 탐욕으로 상징되는 존재들이었지만 사실 이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이들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가 강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중세 시대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가 근대로 넘어와 국가주의, 민족주의 성격의 혐오로 바뀌면서 1800년대 이후 동유럽, 중부 유럽 각지에서는 유대인을 추방하거나 박해하는 여러 사회적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헤프헤프 폭동(Hep-Hep-Krawalle)이라 부른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자유주의 열풍이 반격을 당하며 유럽 전역의 내셔널리즘과 권위주의가 고조되었는데 그 여파로 피해를 본 집단 중 하나가 바로 유대인인 것이다. 독일부터 지금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지방 전역에서 이 헤프헤프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 중에는 국가나 공공기관이 주도한 것도 많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도 많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유대인들은 자기가 사는 지역을 떠나 언제는 독일로, 또 언제는 헝가리로, 또 언제는 우크라이나로 계속 옮겨다니며 살게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에 대해 어떤 평론가들은 마조히즘적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카프카의 소설 전반에 깔려 있는 이유 모를 불안과 공포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카프카의 극성스럽고 변덕스러운 부친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헤프헤프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카프카가 어렸을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누군가가 두들겨맞거나 집이나 점포가 방화범죄를 당하는 모습을 자주 보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대인 박해의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드레퓌스 사건이다. 프랑스의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의 필체가 간첩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사건으로 프랑스 전체가 반으로 갈려 싸우게 되었는데, 이 일은 유대인들에게도 자신들의 억압을 폭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갈등의 기원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자신들만의 정치적 결사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이 먼 옛날 살았다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 우리만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유대민족주의를 시온주의, 시오니즘이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Mt.Zion)에서 유래했는데 예루살렘의 상징 같은 것이다. 많은 경우 시나 노래에서 시온산은 핍박받는 이들이 돌아갈 곳을 상징한다. 1970~80년대를 풍미한 흑인 댄스 음악 그룹으로 우리에겐 <징기스칸>이나 <원웨이티켓>으로 유명한 보니엠(BoneyM)의 노래 중에 <바빌론 강(Rivers of Babylon)>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복음성가로 불려온 시온산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노래다. By the rivers of Babylon, 바빌론 강가에 there we sat down 우린 앉아 있었어 Yeah, we wept, 우린 울었어 when we remembered Zion 시온산을 떠올릴 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사회주의자 중에 모세 헤스(Moshe Hess, 1812~1875)라는 사람이 있었다. 모세 헤스의 사상을 노동시온주의라고 한다. 모세 헤스는 사회적 평등이 필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도덕적인 전제 위에서 사회주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칼 맑스나 맑시스트들은 그를 추상적이라고 비판했다.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도 헤스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그는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이 유럽인과 동화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유대인은 자신의 민족성을 부정함으로써 다른 민족의 경멸을 불러왔다고 생각했다. 역사는 인종과 민족간의 투쟁의 역사이고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860). 모세 헤스는 유대교는 위대한 신앙 재흥운동을 통해 부활해야 하며 그 어떤 유럽 철학/사상의 결합, 영합은 있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를 시온주의의 시작이라고 평가한다. 시온주의는 드레퓌스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기자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가 처음으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외국에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1897년 제1차 시오니즘 회의를 열고 이 회의를 헤르츨이 주재했기 때문에 지금도 헤르츨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1917년, 밸푸어 선언이 나왔다.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영국의 유대인 대표인 월터 로스차일드(Walter Rothschild, 1868~1937)에게 보낸 짧은 편지로 사실은 선언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처음으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한 공인의 약속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겠다. 1917년 11월 2일 로츠차일드 경, 폐하의 정부를 대표하여 내각에 제출되고 승인된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의 열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선언을 전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폐하께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위한 국민의 집을 설립하는 것을 지지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팔레스타인 내 기존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 또는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약속이 있기 전인 1915~1916년, 영국의 이집트 주재 고등판무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 1862~1949)이 아랍의 지방 호족 중 한 명인 후세인 빈 알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오스만제국이 붕괴되어도 그 지역 영토들의 자치독립을 약속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영국은 유대인들과도 아랍인들과도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밸푸어 선언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팔레스타인 이주를 시작했다. 갑자기 유대인들이 밀고 들어와서 땅을 사들이고 선주민들을 추방하기 시작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물론 아랍인들까지 이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스리슬쩍 이 문제에 발을 빼면서 알아서들 하시라는 식으로 모르쇠로 일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랍 땅에서 긴장감이 고조되다가 무력충돌까지 벌어졌을 때,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다.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대혼란이 끝난 후, 미국과 서유럽 각국은 유대인들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하게 된다. 1948년 5월 14일의 일이다.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2 - 이스라엘 수립 이후와 지금‘으로 이어집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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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공성이란?
1 교육 공공성이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에서는 최근의 용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공공성”이라는 말을 할 때엔 늘 평등이나 공정함이 침해받는 상황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말하기 때문이다. 주택, 의료, 금융, 기업, 정보 등 여러 단어 뒤에 ‘공공성’을 붙여 사용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공공성이 대체 뭘까? 교육 공공성은 사교육이 줄어들고 공교육에 의존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달성되는 것일까? 공공성, 공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적인 것, 개인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공과 사의 경계선이 어디인가에 대한 논의는 매우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유럽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사회를 공, 가정을 사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자국인 성인 남성만이 공의 주체이고 구성원이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공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유럽의 정치사는 공의 구성원을 넓혀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공은 공개적인 것, 사는 은밀한 것, 공개적이지 않은 것 - 주로 감정, 욕망 - 을 의미했다. 그래서 국가는 물론 가정 안에서도 공과 사가 공존하였는데, 대체로 사를 나쁜 것으로 여겼다. ‘공평무사’라던가 ‘멸사봉공’ 같은 단어가 그 어감을 잘 보여준다. ‘사’, 즉 개인적인 감정과 욕망이 그 상황에 적절하면 그 사는 옳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사는 틀린 것이다. 그 상황에 적절한 감정, 슬퍼할 일을 슬퍼하고 기뻐할 일을 기뻐하는 것, 이것은 사의 영역이지만 동시에 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유교에서 공과 사가 완전히 구분되는 공간이라는 건 없다. 인간은 매 시간, 매 공간에서 늘 공과 사의 영역을 함께 가져가며 사는 존재고, 모든 순간 속에서 각자의 몸을 통해 내가 어떤 감정과 욕망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그 감정과 욕망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이 문제의식은 개인의 윤리적 고민에서부터 시작해 사회적인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문제는 곧 사회의 문제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종종 들은 바 있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다. 나와 가정의 욕망, 감정, 기호가 내가 속한 사회를 넘어 이 우주의 문제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한국 지폐에 실린 두 인물도 이 문제와 관련이 깊다. 퇴계 이황은 사단칠정론을 통해 인간의 감정이 충분히 공적으로 윤리적일 수 있음을 논증한 사람이고 율곡 이이는 인심도심설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 충분히 공적으로 윤리적일 수 있음을 논증한 사람이다.) 2 자, 내가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공’과 ‘사’라는 개념이 그만큼 모호하고 정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개념을 명확히 설명/상상하는 게 어려울 때엔 일단 국어사전을 펴보는 게 좋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젼』에선 공공성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 아, 너무 소략하다! 옥스포드 사전에선 공(public)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1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보통사람과 관련이 있는 것 2 대중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일반적으로 정부에 의해 제공되는 것 3 정부와 관련이 있는 것.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 4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5 대체로 열려있는 것. 대중이 보거나 들을 수 있게 제공되는 것 6 많은 사람들이 보거나 존재할 수 있는 곳 이렇게 생각해보면 공공성이라는 것은 ‘국가/사회가 하는 일‘이나 ’국가/사회에서 하는 일‘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그 사회에서 보편적인 것’, ‘공익적인 것’,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공공성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주목을 하는 이유는 어떤 대상이 공공성의 속성을 훼손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 공공성에 대해서도 쉽게 이야기가 가능해졌다. 1 교육공공성에 관심을 갖는 첫번째 이유는 국가나 사회가 주축이 되는 교육, 즉 공교육 자체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을 다수가 공유할 수 없게 되었다, 즉 교육이라는 것 자체를 소수가 독점하게 되는 불공정한 상황이 되었다고 느낀다고 볼 수도 있다. 2 교육에 참여하는 과정, 입시나 성적으로 대표되는 교육의 결과, 그리고 교육 안에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과의 관계,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불공정하다고 느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교육의 공익, 보편, 균형, 공정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즉 교육의 공공성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3 20 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정치 철학자 중 한 명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에서 공(public)과 사(private)를 근대와 엮어서 설명하였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 하는 일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노동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과 관련이 있는 행동이다. 작업은 인간이 하는 일들 중에서 생명과는 관계가 없는 행동들을 말한다. 행위는 인간이 하는 일들 중에서 인간 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들을 말한다. 노동은 신체와 생명, 작업은 세속성(worldliness), 행위은 사람들(men)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고대 유럽에서는 국가가 곧 공이었고 공공영역이었고, 개인과 가정은 사적인 영역이었다. 정치는 공, 경제는 사로 쉽게 구분이 가능했다. 그런데 근데 이후에는 공과 사 사이에 사회(society)라는 것이 등장했다. 사회는 시장(market)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노동과 작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친다. 시장 안에서의 노동과 작업은 지시하는 사람, 혹은 정해진 규율에 순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시장 안에서 순응에 의해 행하는 노동과 작업을 행동(behavior)이라고 하는데, 근대에는 사람들과의 행위를 순응에 의한 행동이 대체했다고 설명한다. 시장에 의한 사회가 중시되면서 국가도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으로 변모해갔는데 사회의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악이 되어버린 국가는 자신의 살 길을 새롭게 찾아냈으니 그것이 바로 민족국가(nation-state)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학문도 이에 맞춰 변화했다. 정치학이 누렸던 지위를 경제학이 가져갔는데 경제학의 중요한 특징은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설명에 따르면 과학이란 인과관계를 추구하는 지적 활동이다. 사회 영역 전반에서 인과관계를 찾는 것이 근대의 사회과학이고, 보편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것들을 비정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근대 사회과학의 특징이라고 한나 아렌트는 설명한다. 즉 사회과학은 사람들의 순응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근대는 사회의 탄생으로 인해 공공영역이 쇠퇴한 시대다. 비록 소수의 인정받은 사람(자국인 자유민 성인 남성)만이 참여하긴 했지만 토론과 숙의가 가능했던 정치가 비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었던 시대다. 또 공리주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이 추구하는 욕망의 총합이 공익으로 불리게 된 시대다. 개개인의 정치적, 윤리적 행동을 효율 극대화, 이익 극대화로 보게 된 시대다. 이것이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근대이고, 『인간의 조건』 전반부의 내용이다. (참고로 한나 아렌트는 수학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통계학으로 대표되는 사회학, 경제학에 대한 반감이 아렌트의 저작 여기저기에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리고 이런 아렌트의 생각을 발전시킨 사람이 위르겐 하버마스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과 정치에 주목했다면, 하버마스는 아렌트의 생각을 일부 수정하면서 공론과 소통에 주목하였다.) 물론 아렌트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공공성에 대한 정의와 그 실현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교육 공공성의 실현에 대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첫째, 교육의 공공성이란 교육의 주체를 민간에만 맡겨 놓지 않는 것, 교육의 공익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 교육 참여의 기회와 그 방식에 대해 고민 하는 것, 교육 그리고 교육 참여, 교육의 결과에 있어서 누군가가 배제되고 있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다. 둘째, 교육과 시장 경제 논리를 일정 정도 분리해야 한다. 교육을 시장 혹은 효율성에서 분리시키고 확장성과 공정성, 공익성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공교육-사교육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셋째, 교육의 공익성을 단순히 다수가 혜택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육의 공익성은 각자가 교육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 참여한다면 또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넷째, 교육에 있어서 순응을 강조해오지 않았는지에 대해 반성하고 교육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임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 다섯째, 인간은 이익이나 효율만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여섯째, 우리 모두가 잠시 효율이나 이익을 내려놓고, 짧건 길건 각자의 의견을 표현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오은영 박사는 종종 양육의 목표란 자녀의 독립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교육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목표는 훌륭한 학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훌륭한 선생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을 받은 모두가 그리고 교육에 참여하는 모두가 다음 세대를 위한 훌륭한 선생이 되는 것 그것이 교육에 목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교육 문제에 대한 토론은 물론 교육에 참여 하는 것 교육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그리고 교육 그 자체 있어서 깊은 고민을 가지고 참여하는 공론의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에 대해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길고 지루하면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것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참고문헌 한나 아렌트, 이진우 번역,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19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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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자정自淨이 가능한가
1 개인적인 경험을 생각해보면 군대에서의 경험이 괴롭고 힘든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의미를 찾으려는 것도 있다.) 좋든 싫든 그것도 내 과거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니 마냥 헛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거기서 배운 게 있긴 있네’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냥 신체 일부를 자르고서라도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아직도 있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군대 가야 사람 된다는 말의 의미를 몰랐다. 군대를 갔다와도 철없는 사람은 계속 철없고 사고치는 사람은 계속 사고를 치며 멀쩡하던 사람들도 살짝 이상해져서 나오고 심지어는 건강하던 사람들이 병을 얻어 나오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냥 군대에 가는 사람에게 해줄 말이 없으니 작게나마 위로가 되라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 군대에 가서 자대배치를 받은 이후에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전역하고 예비군이 끝난 지금도 가끔 이 말을 떠올리곤 한다.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이런 것이었구나! (병역을 거친 사람들에게 군대에 대한 기억, 군대가 주는 영향은 군대 안에서의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입대 전의 긴장감과 불안감, 훈련소에서의 당혹감, 자대에서의 억압, 전역 이후 군대에 대해 떠올리는 시간, 모든 게 군대라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다.) 전역을 하고 조금씩 사회생활을 하면서, 군부독재가 끝났다고 해도 한국 사회 자체가 커다란 병영이고 군대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몸도 마음도 갈리고 갈려서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어져서 자신의 불편함에도 입을 다물고, 자신이 듣고 본 불의와 불합리를 작고 사소한 일처럼 넘어가게 되는 것, 그게 군대에서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거기에 젠더와 서열까지 들어가니 이 세상이 이 모양이다. 내가 나서서 세상이 바뀌냐 안 바뀌냐 같은 이야기 이전에, 그냥 기운이 없어서 남의 일을 무신경하게 무관심하게 떠나보낼 때, 누군가의 말이 길어지면 말을 자르고 결론이 뭐냐고 물어볼 때, 길에서 앞사람이 밍기적거리고 느리게 걸어서 확 짜증이 날 때, 이것이 군대가 내게 남긴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군대에서 말하는 사람이다. 부끄러움을 모른척하는 것, 내 생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 뻔뻔해지는 것, 이게 군대에서 만드는 사람일 것이고,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일지도 모른다. 군대를 갔다오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은데 군대는 오죽할까. 이런 상황 속에서 애초에 인간의 집합체가 자정이 가능할까 싶은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군대가 스스로 자정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0%라 생각한다. 2 백번 양보해서 군부독재 시절이야 어쩔 수 없었다 쳐도, 문민정부 이후에도 군대를 개혁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고, 한국 사회도 군대에 많은 기회를 주었다.  괴롭힘, 구타, 폭행 1962년 7월 8일 학도병 연서 사건 제15보병사단(강원도 철원, 화천)에서 서울대 천문기상학과 4학년 최영오 일병이 선임 정방신 병장과 고한규 상병을 사살. 정 병장과 고 상병이 최영오 일병의 여자친구가 보낸 편지를 계속 먼저 뜯어보자 최 일병이 이를 따졌는데, 두 선임이 도리어 최 일병을 구타하자 이에 격분한 최 일병이 두 선임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 당시 판결 기록에는 웃고 넘겼으면 좋았을 것을 비사교적인 성격의 최 일병이 선임병에게 대들다가 결국 이런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일보.1962.08.04.) 1968년 6월 15일 예비군 훈련 사망 사건 예비군 훈련에 참석한 25세 최 모 씨가 복통을 호소하다 사망. 훈련 중 폭행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으나 군대는 이를 무시하고 유족들에게 복막염으로 죽었다고 알린 후 시신을 화장했다. 이 사건은 2013년 유족이 재판을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유족이 일부 승소하였다. (뉴스토마토.2013.10.17.) 1982년 2월 5일 제주 C-123 추락사고 육군 제707특수임무대대 소속 육군 장병 47명, 공군 장병 6명이 탄 수송기가 한라산 개미등계곡에 추락해 전원 사망. 2월 6일 당시 대통령 전두환이 제주국제공항 신활주로 준공식에 참석하기로 결정되자 대통령 경호를 위해 악천후 속에서도 강제로 수송되던 중 수송기가 추락해 벌어진 사고. 군대는 사고 잔해물과 시신을 그 자리에서 전부 불태우고 외부에는 대간첩훈련 중 사망했다고 보도하게 했다. (오마이뉴스.2007.03.13. SBS 2023년 3월 9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로도 방영) 1984년 4월 7일 최승균 소위 사망 사건 육군보병학교 최승균 소위가 교관들의 가혹행위로 사망한 사건. 훈련 도중 발목을 다쳐 행군에서 낙오되자 음식물 잔반통에서 얼차려와 구타를 당했고 밤새 구타를 당해 다음날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자 발에 밧줄을 묶어 거꾸로 매달고 다시 구타, 결국 사망한 사건. 관련자들 중 처벌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JTBC.2021.10.15. MBC 2022년 7월 15일 <PD수첩>으로도 방영) 1985년 2월 24일 제28보병사단 총기난사 28사단(동두천) 화학지원대 박 모 이병이 선임들의 가혹행위 끝에 총기를 난사, 8명이 죽고 4명이 부상. 당시 군대에서는 부대 장병들의 휴가와 외출을 막고 유가족에게 사건 현장을 보여주지 않았으며 유가족들끼리 연락를 하지 못하게 했다. 이 사건은 2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드러났다. (오마이뉴스.2005.06.22.) 1987년 12월 4일 정연관 상병 사망 사건 제3군수지원사령부(경기도 고양시) 11보급대대 정연관 상병이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를 찍었다는 이유로 구타당해 사망. 단순구타로 사건을 종결했다가 200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동아일보.2009.10.09.) 2005년 1월 10일 육군 논산훈련소 인분 사건 육군 논산훈련소 이경진 대위가 화장실 청소가 깨끗하지 않다는 이유로 훈련병 192명에게 인분을 먹임. (MBC.2005.01.20.) 2005년 6월 19일 김일병 사건 530GP에서 김동민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 8명 사망, 2명 부상. 육군 군내 부조리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 사건. (MBC.2005.06.19. ) 지금도 극우 유튜브에서는 이를 북한의 공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2012년 4월 제1공수특전여단 전기고문 사건 제1공수특전여단 이 모 중사가 업무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후임 하사의 입과 혀에 전선을 연결해 고문한 사건. 2014년에 밝혀졌다. (연합뉴스.2014.09.15.) 2011년 7월 4일 강화도 총격 사건 강화도 해병대 제2사단 김민찬 상병이 부대 안에서총을 쏴, 4명 사망, 2명 부상. 이유는 기수열외, 구타, 성추행. 이때 김 상병의 총을 빼앗고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한 것은 권혁 이병 한 명 뿐이었고 나머지 선임병들과 간부들은 모두 숨거나 부대 밖으로 도망을 쳤다는 것이 알려졌다. (민중의소리.2011.07.07. 한국일보.2023.06.05)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이 문제의 원인은 체벌이 아니라 부적응에 있다고 이야기했다. (노컷뉴스.2011.07.12.) 2013년 7월 1일 김지훈 일병 자살 공군 제15특수임무비행단(성남)에서 한지훈 중위의 지속적인 폭력과 괴롭힘으로 김지훈 일병이 자살한 사건. 이 사건이 보도되자 15비행단에서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김 일병이 정신질환 탓이라고 표현. (노컷뉴스.2015.05.23.) 2014년 4월 6일 28사단 의무병 사망(윤일병 사건) 이찬희 병장, 유경수 하사, 하선우 병장, 지정현 상병, 이상문 상병 등이 후임 윤승주 일병을 괴롭히고 구타한 끝에 사망케 한 사건. 2014년 6월 21일 22사단 총기난사 사건(임병장 사건) 임도빈 병장이 부대 내에서 총기를 난사, 5명 사망, 9명 부상. 2014년 6월 해병대 1사단 가혹행위 포항에 있는 해병대 1사단에서 전 모 일병이 화장실 청소가 제대로 안 되었다는 이유로 후임에게 소변기를 핥게 함. (연합뉴스.2014.08.07.) 2014년 7월 10일 이 모 씨 자살사건 경북 제2탄약창 경비2중대에서 근무하던 이 모 씨가 오랜 가혹행위 끝에 정신질환이 발병, 결국 전역 당일 자살한 사건. (동아일보.2014.08.04.) 2016년 2월 7일 철원GP 일병 자살 사건 선임병 네 명의 구타와 괴롭힘에 시달리던 일병이 총기로 자살. 1심에서 가해자 중 한 명만 벌금 300만원을, 나머지 셋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한겨레.2016.11.24. 연합뉴스.2016.12.25.) 2016년 9월 해군 헌병대 러시안룰렛 사건해군 헌병대의 한 상병이 총알 다섯 발이 들어가는 회전식 탄창에 총알 하나를 넣어 놓고 후임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장난을 지속적으로 해온 것이 발각. (YTN.2016.12.29.) 2017년 7월 19일 22사단 고필주 일병 자살 사건 부대 내에서 지속적으로 괴롭힘과 구타를 당하던 고필주 일병이 국군수도병원에 진료하러 가 자살. (경향신문.2017.07.20. 한겨레.2017.10.27.) 책임 회피, 책임 전가 1993년 6월 10일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건 경기도 연천 예비군 훈련장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화약에 불이 붙어 포탄이 폭발, 현영 장병 3명, 예비군 17명 사망. 이후 지금까지도 몇몇 정훈장교들이나 안보강사들이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예비군들이 오함마로 포탄을 내려치는 장난을 치다 일어난 사고라고 이야기하고 다닌다는 말이 있다. (KBS.1993.06.10. 동아일보.1993.06.11.) 1998년 4월 1일 제5공수특전여단 동사 사건 제5공수특전여단에서 행군 훈련을 하던 중 충북 영동군 민주지산에서 여섯 명이 저체온증으로 사망. (매일경제.1998.04.03.) 2005년 10월 27일 노충국 사망 사건 육군병원에서 위궤양으로 진단 받았던 노충국 병장이 전역 후 사망, 알고보니 위암이었던 사건. (2005.11.8.MBC PD수첩) 군의관의 진료 기록 조작도 발각되었다. (KBS.2005.11.05.) 2014년 9월 2일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 사망 사건 충북 증평에 있는 제13공수특전여단에서 포로체험 훈련 중 2명 사망, 1명 중상. (연합뉴스.2014.09.03.) 새로 도입된 훈련인데 충분한 사전 준비나 안전장치 없이 사람을 결박하고 얼굴에 복면을 씌운 채 방치하다가 질식사. 2015년 8월 4일 DMZ 지뢰 사건 북한이 매설한 목함지뢰에 하재헌, 김정원 두 하사가 발목을 절단한 사건. 군대에서는 각각 1억 원도 안 되는 두 사람의 치료비를 책임지지 않고 개인이 알아서 하게 두고서 희생을 기린다며 2억 원짜리 발목동상을 만들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한겨레.2015.08.10. 중앙일보.2015.09.06.) 2015년 육군 형제 복합부위통증증후군 발병 사건 군에 입대한 두 형제가 각각 부상을 입었는데 제때 치료하지 않고 꾀병이라며 방치했다가 복합부위통증증후군으로 발전한 사건. (프레시안.2015.12.08.) 2016년 에탄올 주사 사건 목 디스크를 앓고 있던 육군 병장에게 육군 청평병원 군의관과 간호장교가 에탄올을 주사해 왼쪽팔이 마비되고 호르너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을 갖게 됨. 국방부는 보상금 천만 원과 6개월 치료비 지원만을 제공랬고, 군 관계자들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에게 언론에 제보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YTN.2016.09.23. 중앙일보.2016.08.16.) 2017년 8월 18일 제5포병여단 자주포 폭발 사고 강원도 철원 제5포병여단에서 훈련 도중 원인불명의 폭발이 발생, 3명 사망, 4명 부상.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두고 곡사포 제작사와 군대가 아직도 소송으로 다투고 있다. (오마이뉴스.2022.08.22.) 2017년 9월 26일 제6보병사단 사망 사고 진지공사 후 하산하던 이 모 상병이 훈련장에서 날아온 총알을 맞고 사망한 사건. (연합뉴스.2017.09.27. SBS.2017.10.09.) 책임자와 관리자는 모두 처벌되지 않았다.  2019년 7월 4일 해군2함대 허위자백 사건 2019년 7월 4일 신원불상의 거동수상자가 탄약창에 다가오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소령이 사건을 덮기 위해 부하 병사(병장)에게 ‘그 수상자가 본인(병장)이다’라고 허위자백하게 하였다. (news1.2019.07.12.) 2023년 7월 19일 해병대 제1사단 채수근 일병 사망 사건  의문사 1984년 4월 2일 허원근 일병 의문사 학생운동을 하다 강제징집된 허원근 일병이 총상을 입고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것이알고싶다 913회(2013.10.12. 방영) 요약본) 1998년 2월 24일 김훈 중위 사건 판문점 벙커 안에서 김훈 중위가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 군대 내 의문사 중 대표적인 사건. (그것이 알고싶다 934회(2014.04.05 방영) 요약본) 성범죄 2010년 7월 해병대 사령관 성폭력 사건 해병대 2사단 사단장 오 모 대령이 운전병 이 모 상병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사건. (경향신문.2010.07.23.) 2012년 10월 제15보병사단 성추행 자살 사건 15사단 노승원 소령이 여군 오혜란 대위에게 지속적으로 성희롱, 성추행을 가해 오 대위가 자살한 사건. (오마이뉴스.2014.03.24.) 2014년 10월 송유진 소장 성추행 사건 제17사단 사단장 송유진 소장이 여군들을 지속적으로 성추행했음이 밝혀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성범죄로 구속된 최초의 장성. (SBS.2015.03.31.) 2017년 5월 24일 성폭력 피해 해군 대위 자살 사건 해군 대령이 후임 여군 대위를 석 달간 지속적으로 성폭행, 결국 해군 대위가 충남 계룡시에서 자살한 사건. (한국일보.2017.05.25.) 2018년 3월 14일 72사단 성폭력 사건 육군 72사단 사단장(준장)이 여군을 자신의 차에서 성추행하였음이 군인권센터를 통해 밝혀졌다. (미디어오늘.2018.07.08.) 2021년 5월 21일 이예람 중사 자살 2021년 7월 12일 해군2함대 여군 중사 자살 상관(상사)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해온 여군 중사가 자살. (연합뉴스.2021.08.14.) 2021년 11월 공군 병사들의 성추행 문서 사건 공군 제8 전투비행단 소속 병사들이 ‘계집파일’이라는 이름으로 여군들의 신상을 모으고 성희롱 발언을 작성하고 공유 한 것이 2023년에 밝혀졌다. (한겨레.2023.05.22.) 갑질 2017년 박찬주 대장 갑질 사건 육군 대장 박찬주와 그 부인 전성숙이 오랜 기간 공관병들에게 갑질과 가혹행위를 해왔음이 2017년 7월 31일 군인권센터를 통해 폭로되었다. 법원은 박찬주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 전성숙에 대해서는 벌금형을 선고했다. 박찬주는 군인권센터를 두고 삼청교육대에 보내야 한다고 말해 또논란을일으켰다. (모바일한경.2019.11.04.) 군기문란, 하극상 1984년 6월 26일 조준희 일병 월북 22사단 조준희 일병이 부대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총기를 난사한 후 월북하였다. (연합뉴스.2005.06.23.) 2012년 10월 2일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 북한군 육군 중급병사 한 명이 22사단 철책을 넘어 귀순한 사건. 2017년 12월 22사단 음주 논란 22사단 병사 일곱 명이 초소 등지에서 경계근무 중 종종 음주를 하고 이를 촬영(인증샷)한 것이 밝혀졌다. (MBN.2018.03.12.) 2020년 4월 1일 중대장 야전삽 폭행 사건 경기도 모 부대의 상병이 일이 힘들다는 이유로 중대장(여성 대위)을 야전삽으로 폭행한 사건. (한겨레.2020.04.20.) 비인권적인 행위 2017년 4월 13일 장준규 육군참모총장의 동성애자 군인 색출 지시 한국 기독군인연합회 회장 장준규 육군참모총장이 동성애자 군인을 색출에 처벌 하라고 지시 하고 이 과정에서 비 인격적이고 반인권적인 수사가 이루어졌으니 군인권센터를 통해 폭로되었다. (한겨레.2017.04.13.) 2021년 3월 3일 변희수 하사 자살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 그리고 군대 문화의 개혁을 실패한 것이 군대만의 문제인지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 군대는 스스로를 돌아 보고 자정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군대라는 것 자체가 무력을 다루는 집단이고 규율과 통제가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곳인 만큼 어느 정도의 부작용은 예상하고 그때그때 처벌을 제대로 하면 된다고.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처벌은 처벌 대로 중요한 것이고 애초에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끔 문화와 제도를 정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가 비단 한국 군대 많이 문제는 아니다. 전세계 어느 군대를 다 살펴 봐도 이와 비슷한 문제들은 많건 적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문제들을 개인의 윤리적, 법적 책임만으로 한정 해서는 안 되며, 군대라는 조직에 대해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최근 해병대 고 채수근 일병의 사망과 관련하여 국방부 장관과 사단장의 수사 외압 의혹 그리고 이에 대한 폭로가 연일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다. 무리한 지시를 한 간부들을 일벌백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2의 채상병 제3의 채상병이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해병대 간부들과 사단장, 국방부 장관에 대한 강력한 처벌은 당연한 것이고 이와 더불어 새로운 군대 문화 새로운 군대에 대한 우리 모두의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전된 논의가 없다면 우리가 징병제를 하건 모병제를 하건 안타까운 죽음은 계속 될 것이다. 군대와 무기가 필요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면 너무나 좋겠지만 그런 세상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다. 한국은 물론 전세계가 다 같이 군대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찰을 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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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관에 대한 우려
(사진출처 이동관 구트위터 현엑스) 1 고대 중국의 노래 가사집인 『시경(詩經)』에서는 민요를 풍(風)이라고 한다. 민요를 풍이라고 하는 이유는 첫째, 바람이 불면 물건이 움직이듯이 노래를 통해 사람들이 변화하기 때문이고, 둘째, 아래에서 위를 찌르는데(자刺) 방향은 알지만 시작점을 모르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 풍자라는 말이다. 후에는 풍(風)에 말씀 언변을 붙여서 풍(諷)이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은 사람들의 입을 막고 싶어한다. 그래서 바람을 막으려 한다. 정치나 풍속을 비꼬거나 무언가를 예언하는 노래가 유행해서 그 노래를 금지시키려고 이런 저런 행동을 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통치자에 대한 이야기는 전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신라 경문왕(景文王)은 원래 화랑인데 얼굴이 잘생기고 똑똑해서 공주의 사위가 되었고 스무 살에 왕위에 올랐다.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갑자기 귀가 길어지더니 당나귀의 귀가 되었다. 임금의 귀에 대해 왕비와 후궁은 물론, 궁녀와 내관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는데 임금의 왕관이나 두건을 만드는 복두장(幞頭匠) 한 사람만이 이 일을 알고 있었다. 복두장은 이 일을 계속 속에 담아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죽을 때가 다가오자 결국 도림사(道林寺)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를 쳤다. - 도림사는 지금의 경북  월성군 내동면 구황리에 있던 절이다. 지금의 경주인 서라벌 성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해당하는 절이었다고 한다. - 그 이후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다. 왕이 이 소리를 너무 싫어해서 결국 대나무를 싹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산수유나무를 심었다. 그 다음부터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임금님 귀는 길다!”라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삼국유사』권2「기이」) 2 한국 언론 탄압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전두환 정권 시절의 언론통폐합일 것이다. 쓰리허(three許), 혹은 삼허(三許)라 불린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그 중에서도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허문도(許文道, 1940~2010)의 아이디어로 실시된 정책이다. 방송사와 신문사, 통신사를 통합하고 언론인들 대다수를 언론계에서 축출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TBC와 KBS의 사례다. 지금 JTBC의 전신인 TBC가 KBS와 통폐합되면서 KBS가 1과 2 두 개의 채널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축하하는 특집 방송 KBS <새가족>이 방영되었는데 이 때 하나같이 표정이 굳어있는 구 TBC 전속 탤런트들의 표정이 그 당시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1980년 11월 30일 TBC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이날 노래를 부른 가수는 이은하, 박경애, 혜은이인데 이 중 이은하는 특히 많이 울먹였다는 이유로 3개월동안 방송출연정지를 당했다. TBC의 간판 스타 중 한 사람이었던 강부자도 이 날 울었다는 이유로 한동안 라디오에만 출연해야 했다.) 당시 대중들의 기억에 강하게 남은 것은 이 두 방송이지만 한국 언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연합뉴스의 탄생이다. 언론통폐합을 기점으로 신문사는 방송사를 가질 수 없게 되었고 방송사는 물론 신문사들도 상당수가 폐지 혹은 통합되었는데 피해를 보지 않은 것은 사실상 조선일보 하나가 유일하다 하겠다. 또 지방에 기자를 주재할 수 없게 되면서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오로지 연합뉴스가 전해주는 소식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언론통폐합은 언론과 언론인을 정부에 굴종하는 태도를 갖게 했고 특정 언론사들이 거대화되면서 언론보도의 질을 저하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영향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말일까? 또 각 언론사에는 보도지침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에서 보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고, 각 소식에 대해 정부가 직접 가/불가를 알렸다. (보도지침의 존재는 1986년에  민주언론운동협의회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리고 저녁 뉴스의 첫머리는 늘 전두환과 이순자에 대한 뉴스여야 했다. 이른바 땡전뉴스라고 하는 것이다. 아홉 시를 알리는 알림 소리 땡땡땡이 울리면 바로 ‘오늘 전두환 대통령께서는’이라는 말로 뉴스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땡전뉴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두환에 대한 보도가 끝나면 ‘또한 이순자 여사께서는’으로 시작되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에 전두환의 호는 오늘이고 이순자의 호는 또한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지금도 정권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뉴스를 두고 땡전뉴스라고 비유적으로 부르는 것은 바로 이떄 시작되었다. 3 언론 통제에 대한 불안감이 다시 한국 사회에 퍼지게 된 것은 이명박 정권 때였다. 각 방송사 노조가 파업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꼈던 그 시간 동안,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고 방송국 간부들에 대해 청와대가 퇴출과 사찰을 지시했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이 바로 이동관이다. ‘MB의 허문도’ 이동관은 청와대 대변인과 홍보수석을 역임했다. 2008년, KBS 정연주 사장을 해임한 후 새 사장을 뽑는 이사회 회의가 열렸을 때, 이 회의의 시작부터 끝까지 분 단위로 기록한 문건이 청와대로 전달되었다는 것, 그리고 정연주 사장 해임에 공을 세운 네 명을 승진시키는 데에도 청와대가 관여했음이 밝혀졌다. 이동관이 청와대 대변인으로 있던 시절, 대변인실에서 만든 문건에는 그 네 명이 '정연주 사장 배임 혐의 고발을 유도'하고, 특정 직군의 협회장 선거에서 '정연주 사장 반대파 인물인' '후보 당선에 기여'했다고 적혀 있고, 사장 교체를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을 때 '채증장비를 활용, 직원들의 집회 참가를 저지'하고, 노조 간부를 지내면서 '사내 내부 동향 및 좌파들의 대정부 투쟁 동향을 제보'해주었다는 직원의 이름도 등장했다. (KBS.2023.08.16.) 2008년 3월 18일에는 이동관이 MBC와 YTN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보도를 했음을 문서로 지적한 바 있는데, 같은 해 8월에는 언론계 쇄신이 가시권에 들어왔지만 막판 저항이 있다는 식의 기록을 남겨두었다. 그래서 MBC 파업은 8월 중에 마무리할 것이며,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정적인 보도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니 이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활동을 강화하겠다고도 기록해 두었다. 보수단체와의 협력을 통한 공중파 견제를 통해 좌편향 언론을 견제하겠다고도 했다. (이동권 언론장악 개입 입증 공공기록물) 이 씨가 홍보수석이던 당시, 청와대 행정관 하나가 택시기사를 폭행하고 또 다른 직원은 20대 여성을 폭행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MBN과 YTN이 보도하자 문제내용이라며 보도를 자제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KBS.2023.08.16.)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걸까? 또 청와대와 이명박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쓴 언론인에게는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격려를 하고 이들에게 특혜를 주는 방법까지 존재했다. 이 또한 이동관이 한 일이다. 예를 들어 이병규 문화일보 사장은 <“망루농성 사전 연습했다”>(1.21, 1면), <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 여성 “조직적 은폐 수사해야”>(2.6, 1면), <“MBC 盧 추모기사, SBS의 7배”>(6.26, 8면) 등의 기사를 실었는데 이동관은 이 기사들을 직접 인용하며 “보수·우파의 목소리를 충실히 대변한다”, “VIP의 국정운영 및 정부 정책에 비판적 지지 입장”, “VIP 동정·정부 시책에 대한 기사를 부각시키거나 기획기사 및 사설 보도 협조 요청에 대해 적극적으로 호응”한다고 말하고 대통령의 격려 전화를 요청했다. 이병규 사장은 훗날 한국신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또 다른 격려 대상자인 박보균 당시 중앙일보 편집장은 “편집국장 시절, 친박 성향으로 분류되었으나 대기자를 거치며 VIP 국정운영에 동조·지지로 성향 변화”, “중앙일보의 균형 잡힌 보도 논조를 이끌고 있는 박 편집인은 칼럼을 통해 VIP 국정운영과 정부 정책에 대해 지지와 고언을 해왔음”이라는 평이 달려있다. 그는 지금 윤석열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하고 있다. 이동화 서울신문 사장은 “10년간 경영·편집 전반에 뿌리내린 구 좌파 정권의 잔재 청산 주력”, “좌파 세력들의 반발에도 꿋꿋하게 논조 시정을 위해 노력”해서, 배인준 동아일보 논설주간은 <의회민주주의 짓밟은 언론노조의 국회 난입>(7.24)이라는 사설을 쓴 공으로 격려 전화를 받았다. (미디어오늘.2023.08.15.) 이동관은 그런 기억 없다고 일관 중이다. 이것 말고도 그의 공로(?)는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는 당시 대통령에게 MBC 경영진을 교체해야 한다고 직접 보고하기도 했고(MBC.2023.08.14.) 아침 라디오 방송들이 대통령이나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진행자 퇴출/교체, 프로그램 폐지 등을 권고했고(한겨레.2017.09.21.)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정원에 언론을 통제하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미디어스.2023.06.14.).  4 그는 언론 통제를 정권의 유지에만 사용하지 않았다. 2004년, 그는 부인, 지인과 함께 절대농지를 공동 구입한 뒤 직접 경작을 하지 않아 농지법을 위반한 바 있다. 농지 취득 과정에서 허위로 위임장을 작성하기도 했는데 국민일보에서 이를 보도하려고 하자 국민일보에 수십차례 전화를 걸어 보도를 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경향신문.2008.05.01.) 또 이동관의 아들이 하나고등학교 재학 중 학교 폭력을 저질렀으나 째려만 봐도 열리던 학폭위는(MBC.2023. 6. 16.) 이동관 아들의 사건엔 열리지 않고 유야무야 무마된 바가 있었다. MBC가 이를 보도하자 MBC를 두고 특정 진영 나팔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연합뉴스.2023.08.16.) 이동관은 조국과 조민을 두고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며 “그 자식을 보면 부모로부터 어떻게 교육받은지를 알 수 있다”라 말하기도 했다. (JTBC.2019. 10. 4.) 조국 씨의 딸 조민 씨의 ‘동양대 표창장’ 의혹이 나왔을 때 김두관, 유시민 씨가 최성해 동양대 총장에게 전화를 한 바 있다. (중앙일보.2020.12.27.) 통화 내용이 알려지진 않았으나 증거 인멸과 관여가 있지 않냐는 의혹이 나오자 이동관은 김두관, 유시민을 언급하며 “존재 자체가 압력인데 전화를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2023.06.14.) 만약 자신의 과거 행실을 알면서 이런 말을 했다면 뻔뻔하기 그지 없는 것이고 자신의 과거 행실이 기억이 안 났다면 공직을 맡기에는 기억력이 부족한 것이다. 자신이 공인으로서 책임과 임무를 지키지 않은 죄를 가리기 위해 언론에 보도하지 말 것을 직접 요구를 하는 청와대 대변인. 보통 사람 같으면 부끄러워서라도 공직, 그것도 언론과 관련이 있는 공직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다. 5 이동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고상한 이론이나 논리를 가져올 필요가 없다. 그 동안의 행적을 보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는 부도덕하고 무책임하며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행실의 원인은 개인의 악함이나 야비함도 있겠지만 공사구분이 안 된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물론 소위 한국의 자칭타칭 지도층이나 사회 엘리트라 부르는 이들이 공사구분 못 하고 사고를 친 게 한 두 번이겠으며 인맥 장사를 열심히 하는 게 한 두 사람의 문제겠냐마는,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람이 공직에 나아가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이런 사람은 언론 계통 공직은 물론 그 어떤 공직에도 진출해선 안 된다. 이런 뉴스는 좀 그만 보고 싶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을 못하게 하면 사람들은 입을 다무는 게 아니라 임금님 귀는 길다고 말할 것이다. 옛날 임금들은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가 닥쳐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사과를 했다. 지금 와서 그런 것을 바랄 수야 없겠지만서도 윤석열도 이동관도 명백한 자기 잘못 앞에서도 남의 탓을 하고 모른다고 발뺌하는 것을 보면 참 얼굴이 두껍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관리들보다 못한 것이다. 지금은 2023년이다. 2023년에 우리가 땡윤뉴스 같은 것을 봐야하는 것일까? 4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또 ‘오늘 윤석열’이나 ‘또한 김건희’ 같은 조롱과 농담을 주고 받아야 한다면 한국 국민으로서 나는 너무나 비참하고 참담한 마음만 들 것 같다.
공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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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빨갱이?
1 1950년대를 이야기할 때 빼놓으면 안 되는 인물이 하나 있다.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金昌龍, 1920~1956). 호는 옥도(玉島), 창씨개명 당시의 이름은 타마시마 소오류우(玉島昌龍).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1940년 일본 관동군 헌병 보조원이 되었다. 이후 일본의 첩보원이 된 그는 1943년부터 2년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던 중국, 조선의 비밀 항일 단체 50여 개를 적발해 검거했다. 일본이 패전한 후 고향으로 도망쳤다 체포된 그는 당시 이북에 진주하던 북한군과 소련군에게 두 차례나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모두 탈출했고, 1946년에 결국 월남했다. 이남에서 국군 정보요원으로 활약한 그는 소련군 장교를 찾아내 추방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 이후 남로당 색출, 여순사건 진압에도 엄청난 활약을 했는데 남로당 출신의 소령 박정희(朴正熙)를 검거해 심문한 것도 바로 김창룡이다. (박정희는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에 의해 곧 풀려난다.) 1949년 인민해방군 사건, 1950년 김수임 사건에서도 늘 그는 큰 활약을 했다. 한국전쟁에서 서울이 수복된 후에는 이승만의 반대파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숙청하는 공을 세워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는데, 군과 정부의 조직을 무시하고 이승만에게 직통 보고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을 정도였다. 이승만의 총애를 등에 업고 거만하게 행동하던 그는 결국 1956년 1월 30일, 대령 허태영, 대령 이진영, 소령 안정수, 중위 허병익 등에 의해 암살을 당해 사망했다. 김창룡이 사망하자 이승만은 직접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갈 정도였고,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치러졌다. 이승만은 그를 중장으로 추서했고, 그의 장례식이 있던 2월 3일, 이승만은 그 날 하루동안 전군에 조기를 게양하게 하고 모든 군인들의 음주와 가무를 금지했다. 김창룡은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묘주명(묘비 앞면에 쓰는 글)은 이승만이 직접 썼고, 그의 송덕비에 세겨진 묘갈명은 서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병도(李丙燾, 1896~1989)가 썼다.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 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슬퍼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까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함이 이구동성의 외침이었다.  그는 본시 영흥 출생으로 80년(단기 4280년. 1947년)에 육사를 마치고 그 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 과장에 취임하여 이래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동란 중에는 군검 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 오열(五列),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 5천 명, 전시 방첩의 특수임무를 달성하였다. 84년 육군특무부대장에 부임하여서는 더욱 헌신적 노력과 탁월한 지휘로써 국가 및 군사 안전보장에 기여하였다. 그 중요한 적발만으로도 85년 대통령 암살음모의 김시현 사건, 87년 남도부 등의 대남유격대사건, 88년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한 그것이다. 그는 이렇듯 나라에 유공하였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길이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의 생년은 단기 4253년 11월 23일 향년은 37세로서 순직과 동시에 육군 중장에 승진되었다. 단기 4289년 2월 3일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 (민족문제연구소.<심판받을 김창룡 중장의 송공비>, 신현복) 김창룡과 함께 숙군 작업을 했던 김안일(金安一, 1917~2014)은 김창룡에 대해 반공 이념보다 개인적인 복수심을 위해 일했다고 평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김창룡이 이승만에게 내민 공산주의 활동의 증거는 그저 ‘내가 안다’, ‘내 친구라서 안다’ 수준이었고 이승만은 그런 그를 늘 믿었다고 한다. 김해진의 증언에 따르면 공산당과 관련이 있으면 부모형제랑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도 일단 체포하였고 죽기 직전 무렵에는 ‘고추가 빨갛다’, ‘여자들의 치마가 빨간 색이다’ 같은 것에 집착하면서 이런 것을 공산당과 엮으려고 해 웃지못할 해프닝이 많이 벌어졌다고 증언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3권』, 인물과사상사, 2004) 2 사실 소위 ‘자유주의 진영’이라 불렸던 나라들에서 이런 식의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1950년대 초중반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McCarthyism)이 미국 공화당 상원 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1957)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아는 미키마우스의 아버지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도 조지프 매카시의 공산당 색출에 적극 동조했고,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일개 무명배우에 지나지 않았던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11~2004)도 미국 배우 조합을 만들어 영화계의 공산당 색출에 핏대를 올렸다. 매카시는 공산주의자 느낌이 나는 인물이 있으면 그를 청문회에 세우고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며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면 그 다음날 언론은 청문회에 선 사람을 공산주의자라고 확정해 보도하는 식이었다. 여기에는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치엔쒸에썬(錢學森전학삼, 1911~2009) 박사도 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JPL연구소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당시 우주공학, 로켓엔진기술의 최우수 인재 중 하나라 불리던 사람이었다. 2차 대전 중에는 직접 독일로 가서 독일의 우수한 과학자들을 포섭해 미국으로 데려오는 공을 세우기도 했고, 우주비행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 1950년, 중국에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공산당으로 몰려 FBI의 감시를 받았던 그를 구명하기 위해 동료 과학자들이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당시 정치권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결국 그는 1955년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으로 간 치엔은 5년 동안 공교육을 정비해 기초학문을 탄탄히 하고, 그 다음 5년 동안은 대학생,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응용학문을 가르치고, 그 다음 5년 동안 실무적인 준비를 마치면 중국도 인공위성을 쏠 수 있다는 계획을 마오쩌둥에게 제시했고 마오는 그를 전폭 지원했다. 지금 중국이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핵폭탄을 소유하게 된 것은 모두 치엔의 공로인데 어쩌면 매카시의 공로라고 할 수도 있겠다. 훗날 미중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하고 미중간 교류가 시작되었을 때 미국에서 치엔을 초청해 우주공학기술에 대한 연구교류를 하려고 했다. 그 때 치엔은 사과부터 하라고 일갈하고 단 한번도 미국에 가지도, 미국 연구자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3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그를 낳고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났고 부친도 그가 아홉 살일 때 세상을 떠났다. 머슴살이를 하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했다. 홍범도는 신계사 상좌 지담(止潭) 밑에서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구니였던 부인 이옥구(이옥녀라고도 함)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환속하여 이옥구의 친정이 있는 함경남도 북청으로 가 살림을 차렸다. 사냥꾼 생활을 하며 명포수로 그 고장에서 이름을 날리던 홍범도의 인생이 바뀐 것은 1895년 을미사변 직후다.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왕비를 처참하게 살해하고 조선의 정치를 장악해 단발령 등을 시행해 조선 사람 개개인의 삶을 장악하려 했을 때 홍범도도 포수 열 네 명과 의병을 조직했다. 을미의병이 흐지부지된 후에는 홍범도와 14인의 포수들도 흐지부지 해산을 한 것 같다. 그러다가 1907년 정미조약을 계기로 정미의병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자 그도 수 백 명의 사람들을 모아 다시 거병했다. 어린 시절부터 머슴 생활을 했고 커서는 포수로 사냥을 해 먹고 살았던 홍범도는 기골이 크고 근육질이면서 몸이 매우 민첩했다고 한다. 이때 일본군은 홍범도의 부인 이옥구를 붙잡아 홍범도를 회유하려 했다. 조선군 제3순사대 대장 임재덕(林在德)은 일진회 회원이었는데 이옥구를 붙잡아 간 게 바로 그였다. 이옥구가 말을 듣지 않자 일본군은 이옥구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고 이옥구는 직접 혀를 자르며 회유를 거부했다. 결국 말을 못 하게 된 이옥구는 ‘삼수갑산’이라 하는 갑산의 감옥에 이송되었다가 얼마 못가 세상을 떠났다. 1908년 4월의 일이다. 같은 해 6월에는 17세였던 장남 홍양순도 함남 정평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홍범도는 차남 홍용환을 데리고 연해주로 건너갔는데 이곳에서 홍용환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홍범도는 한동안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다가 1922년에 이인복과 재혼하였다. 이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우리가 비교적 많이 알고 있다.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고 일본의 토벌군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간 이야기나 자유시 참변(1921) 같은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홍범도는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난 (아마도) 유일한 독립군이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강제 이주 때 지금의 카자흐스탄으로 가 크즐오르다 고려 극장에서 수위장으로 일하다가 1942년 즈음에 사망했다. 명확한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1943년설과 1942년설이 있다. 옛날에 공자(孔子)를 두고 ‘안 되는 줄 알면서 하는 놈(是知其不可而爲之者)‘이라 비웃은 이가 있었으나 본시 사람의 길이란 천하를 바라보며 설사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아도 옳은 길이면 그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맹자(孟子) 또한 이르기를 넓은 곳에 거하며 바른 자리에 서서 세상을 위한 큰 도를 행함에(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뜻을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 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서라도 그 길을 가는데(得志與民由之 不得之獨行大道) 부유함과 귀한 자리도 그를 방탕하게 만들지 못하고, 가난과 천함도 그를 흔들지 못하고, 위세와 무력도 그를 굽히게 만들 수 없다 하였으니(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이 말은 곧 홍 장군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세상에 그 누가 조선의 몇 사람이 제국 일본을 상대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는가? 비록 자신이 소 아홉 마리 중에 털 하나에 불과한 작은 존재라 생각할지라도 옳은 길이기에 그 길을 갔을 뿐이다. 일본이 패망하고 일본의 식민지들이 하나하나 독립을 할 때, 홍 장군 같은 이가 없었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나 조선의 후손들이 이 시대 조선을 바라보며 조선인들은 독립을 원치 않았구나, 독립할 마음이 전혀 없었구나 했을 것이다. 그게 지금 한반도의 두 국가가 독립운동을 한 열사, 지사들에게 진 빚이다. 4 국민의힘 신원식 의원(1958~, 육사 37기. 비례대표)이 작년 정기국회 국정감사 중에 뜬금없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85년 대위로 경기도 북부에 있는 8사단에서 재직할 때, 훈련 중 발사된 박격포에 맞아 숨진 이등병을 두고 불발탄을 밟고 죽었다고 보고해 사건을 조작하고 책임을 회피한 사람이다. 2022년 대통령 소속 진상규명위원회가 유가족의 신청을 받고 이 사실을 밝혔는데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차마 진상규명위에는 이의를 제기하지도 못하고 이를 보도한 오마이뉴스 측에 대고 명예훼손이니 손해배상이니 운운하며 화풀이를 한 바 있는 비겁한 사람이며 (중앙일보.2023.08.28.) 천안함전우회 안종민 회장이 SNS에서 이를 지적하자 계정을 차단하고 마치 온 세상이 국회 국방위 간사인 자신을 음해한다는 식으로 말하며 모략이라 말한 바 있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그는 조선일보 칼럼을 통해 안보낙관론과 지도층의 무능이 얼마나 안보에 위협이 되는지 이야기한 바 있다. 안보에 철저한 사람인 양 행동하지만 정작 실상은 강약약강 그 자체인 신 아무개는 중요한 책임은 회피하는 비겁한 태도를 지닌 사람으로 안보를 운운할 자격이 없는 자인데 그것도 모자라 북진통일을 운운하니 참으로 우습기만 하다. (모두가 평화를 노래할 때 '북진통일' 준비하라. 인사이트.2020.06.21.) 자기 휘하의 병사 하나도 제대로 책임을 못 지고 권력에 아부하는 비겁자 주제에 나랏일을 입에 담는 것도 가소로운 일인데, 목숨 바쳐 제국주의와 싸운 투사, 열사를 감히 모욕하는 것은 무슨 주제도 모르는 짓이란 말인가! 이런 이들이 북진통일을 외치는 까닭을 나는 안다. 자신들은 절대 전장에서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총알받이로 앞장서서 싸울 것이 아니면 비겁한 소인배 주제에 젊은이들 목숨을 자기 손 안의 바둑돌인양 떠들지 말자. 그는 성범죄 피해를 호소하며 잼버리 퇴영을 진행한 한국 스카우트 전북 연맹 단원들을 두고 반 대한민국 카르텔을 운운한 바 있는데(신원식 페이스북) 참으로 가소로운 망동망언이라 할 것이다. 5 그러면 왜 신원식 같은 인물이 망언을 펼치고 현재의 한국 정부와 여당은 이런 인물에게 동조하여 유난을 떨고 흉상을 옮기냐 마냐 하는가? 이들에겐 사실 역사도 전통도 없다. 이들이 숭상하는 것은 오로지 힘, 그것 뿐이다. 그 힘을 가지고 싶어하고 그 힘을 가진 사람을 너무나 사랑한다. 목적도 이유도 없는 맹목적인 사랑은 현실감각을 잃게 만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실 정치에 있어서 보수란 힘에 대한 숭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권력이든 재력이든 무력이든 완력이든, 현실 정치에서 보수를 칭하는 이들은 힘을 숭상하고 자신들 스스로를 권력 예비 보유자 쯤으로 생각한다. 미국이나 일본, 중국 같은 강대국이 아니면 대부분의 사회에 존재하는 (현실 정치 상의) 보수가 강대국을 숭모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특히나 식민지나 침략을 경험한 사회의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자신들을 침략하고 점령한 집단에 대한 숭상을 보인다. 왜 한국 보수가 성조기를 흔들고 다니는가? 사실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층이 강대국 미국/일본/중국을 찬양하는 경우는 너무나 많지만 한국 보수 처럼 성조기를 들고 나타나는 집단은 정말 드물긴 하다.) 자신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사랑해 마지 않던 일본, 자신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배워야 한다고 외치던 일본! 미국이 사랑해 마지 않는 일본! 대통령이 좋아하는 모리소바, 우동, 장어덮밥의 나라 일본! 오무라이스가 맛있는 나라 일본! 그런 일본에 감히 덤빈 독립군이 그들의 눈에 얼마나 거슬렸을까! 게다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목하는 전정권(前政權) 씨가 유해를 모셔온 홍범도 장군이니 얼마나 지우고 싶었을까!  6 앞에 이야기한 것이 다소 극단적인 예시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과거의 이른바 반공이라는 것은 다 이런 식이었다. ‘공산당 같다’, ‘~~에서 태어났다’, ‘정부 정책에 자꾸 의심을 품는다’ 등등.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도 구분 못 하는 사람들이니 자기들 입맛에 안 맞으면 뻑하면 공산당을 찾는다. 과거 몇 십 년 동안, 그들이 자기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개인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가짜 간첩을 얼마나 만들어 냈는지는 굳이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김기춘이 날조하여 고문하고 살해한 재일교포 간첩단, 김아람 양 돌잔치에 모인 일가 친지와 이웃, 친구들을 아람회라는 반정부 간첩단으로 만들어 체포하고 고문했던 전두환 정권 등등등. 인터넷에 김창룡을 검색하면 조갑제(趙甲濟) 등등이 쓴 김창룡 찬양이 넘실거리고, 김창룡의 두 딸(김미경, 김미영)은 부친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면서 자기 부친이 일본군에서 활약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출판하기도 했다. 그가 박정희를 살려주지 않았다면, 그가 간첩들을 잡아들이지 않았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겠냐면서! 이따위 글과 책이 세상에 나와도 아무 문제가 없는 대한민국! 7 역사는 해석의 문제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역사란 각자 자기 꼴리는 대로 지껄여도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근거, 즉 사실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해석은 그냥 믿음이다. 이것은 무당의 공수를 믿는 것보다 저열한 것이다. 무당이 하는 말은 그러려니 하고 넘기면 그만이지만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 조각을 모아서 이것이 참역사요 진실이라고 우기면 세상에 끼치는 해악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우리 모두 확인하고 있다. 언제까지 믿음을 지식이라고 우길 것인가? 또, 공산주의자면 조선 독립의 공이 사라지는가?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 박정희는 빨갱이인가? 소련과 수교하고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려고 처음 시도한 노태우는 빨갱이인가? 해군 잠수함에 장군의 이름을 붙인 박근혜 정권과 그 시절 해군은 빨갱이 정권 좌파 군대인가? 실리도 없고 이념도 없고 윤리도덕도 없는 홍범도 장군 모욕 주기는 지금이라도 멈춰야 한다. 김창룡의 후예들이 홍범도 장군을 모욕하는 것이 자유라면, 그런 자유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
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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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난 타임라인2 ~우리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이 기획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부터 한국의 재난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사망자가 10명 이상 발생한 사건사고를 중심으로 서술하되, 사망자가 10명 미만이어도 기록할 만한 것을 포함하여 정리하였습니다. 이 기획의 전편에서는 화재/폭발, 교통사고/도로사고, 철도사고, 항공사고, 해양사고, 붕괴사고, 과밀집사고를 다루었습니다. 태풍/집중호우/홍수 (날짜는 태풍 상륙일, 호우 시작일을 기준으로 정리하였다) 1959년 9월 17일 태풍 사라 사망 948명, 실종 206명, 부상 2,533명, 이재민 373,459명 (태풍 사라 영상(중앙일보) ) 1970년 8월 30일 태풍 빌리 사망/실종 30여 명 1972년 8월 18일 태풍 베티 사망/실종 550명, 부상 405명 (태풍 베티는 남한강 유역의 충북 제천, 단양에 특히 큰 피해를 불러왔다) 1979년 8월 17일 태풍 어빙 사망 17명 1984년 8월 31일 중부지방 폭우 9월 2일까지 서울, 경기, 강원에 시간당 50mm의 집중호우.  (이때 북한이 남한에 수해구호물자를 보냈다. 그 결과 다음해 9월 최초로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1987년 7월 15일 태풍 셀마 사망/실종 345명, 이재민 10만 명 이상 (한국 기상대의 오판과 태풍경로 조작으로 피해가 커짐 내한뉴스 제1654호) 1987년 7월 27일 수도권 폭우 사망 189명, 실종 150명, 재산피해 2,502억 원. 서울에 294.6mm, 인천에 302.5mm의 폭우가 내려, 중랑천, 안양천, 탄천 등이 터지고 강이 범람. 풍납동, 성내동, 망원동, 영등포역, 용산역이 잠기고 잠수교 수위는 13.7m까지 올라갔다.  (수도권 치수 체계의 소홀, 일기예보 오보가 피해를 더 키웠다.) 1989년 7월 25일 광주 집중호우 27일까지 광주직할시(현 광역시)에 335.6mm의 비가 내려 광주가 마비됨. 1989년 8월 17일 태풍 쥬디 사망 136명, 부상 72명, 이재민 3만 명 이상 1990년 9월 9일 중부지방 집중호우 이재민 5만 명 이상. 12일까지 한강 유역에 집중호우. 수원 529.5mm, 이천 581.2mm. 고양군 신평리의 제방이 붕괴되어 능곡, 일산이 물에 잠겼다. 경기도 서북 지역의 제방을 복구하면서 지은 도로가 자유로다. 1991년 7월 19일 춘천 집중호우 25일까지 폭우가 쏟아짐. 마지막날 하루에만 308.5mm의 비가 내려 춘천을 중심으로 한 교통망이 마비됨 1991년 8월 23일 태풍 글래디스 사망/실종 103명 (특히 경북 경주 지역에서 피해가 컸다) 1995년 7월 23일 태풍 페이 사망/실종 47명 (프린스호 좌초사고 발생) 1995년 8월 26일 태풍 재니스 사망 45명  (폭우로 인한 피해가 더 컸고, 특히 북한의 식량난을 가중시킨 태풍으로 기록됨) 1996년 7월 26일 중부지방 폭우 사망/실종자 60여 명. 28일까지 경기 북부와 강원 북부에 내린 집중호우.  (군부대에 피해가 많았는데 이는 당시 KBS2 드라마 <신고합니다>에도 나올 정도였다) 1997년 8월 4일 인천 집중호우 최대 260.8mm에 달하는 기습적인 폭우로 산사태와 홍수가 발생. 1998년 7월 31일 수도권 집중호우 7월 31일부터 8월 말까지 쉬지않고 비가 내려 침수, 산사태 피해가 계속 됨. 1998년 7월 31일 지리산 집중호우 사망 103명.  (기상청의 늑장 예보와 낙후된 기상 예측 장비, 피서객들의 안전불감증이 겹쳐져 만들어진 참사) 1998년 9월 30일 태풍 예니 사망 13명, 실종 30명 (특히 경북 포항 지역에서 피해가 컸다) 1999년 7월 21일 수도권 집중호우 8월 3일까지 경기 북부, 강원 영서 중북부 지역에 내린 폭우. 1999년 8월 3일 태풍 올가 사망/실종 67명  2000년 7월 22일 수원 폭우 강수량 333.2mm (99년부터 이 즈음에 계속된 기습 폭우로 게릴라성 집중호우라는 말이 탄생했다) 2000년 8월 31일 태풍 프라피룬 사망/실종 28명, 이재민 2천여 명  2000년 9월 15일 태풍 사오마이 사망 2명, 실종 5명 (일신호 유출사고) 2002년 7월 6일 태풍 람마순(라마순) 사망 97명 2002년 8월 3일 강원권 폭우 8월 8일까지 내린 폭우. 산사태가 연달아 발생해 교통이 마비. 2002년 8월 31일 태풍 루사 사망 213명, 실종 33명, 재산피해 5조 1,479억 원 (서울 수도권에서의 영향이 적다는 이유로 뉴스 속보를 편성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음) 2003년 6월 19일 태풍 소델로 사망 2명 2003년 9월 12일 태풍 매미 사망/실종 132명, 재산피해 4조 2천 억 원 2004년 8월 19일 태풍 메기 사망 69명, 이재민 2,674명, 재산피해 320억 원 2005년 9월 6일 태풍 나비 사망/실종 35명 2006년 7월 10일 태풍 에위니아 사망 6명, 실종 3명, 재산피해 1조 8천억 원 2010년 9월 2일 태풍 곤파스 사망 6명, 부상 11명, 재산피해 1,761억 원 (수도권을 강타한 태풍으로 유명) 2010년 9월 9일 한반도 폭우 9~11일에는 중부지방, 12일에는 남부지방에 폭우가 내렸다. 추석 연휴에 발생하였고, 도시 주거지 침수, 농경지 피해가 막대하여 충격을 주었다. 특히 서울 강남 지역이 침수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도시 하수도 시설에 대한 지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폭우였다. 2011년 7월 26일 중부지방 폭우 28일까지 수도권, 강원 지방에 내린 폭우. 사망 69명, 실종 8명, 이재민 4,566명. 이때의 비로 27일에는 우면산 산사태가 발생했고(사망 17명, 부상 50명), 서울 강남구, 관악구는 물에 잠기고 경기도 동두천시, 강원도 춘천시는 산사태가 발생. 특히 오세훈 서울시장에 대한 비판이 극에 달했다. 2012년 8월 27일 태풍 볼라벤, 8월 30일 태풍 덴빈 사망/실종 25명, 이재민 222명, 재산피해 800억 원 2012년 9월 17일 태풍 산바 사망 2명, 부상 2명, 이재민 200여 명, 재산피해 3,657억 원 2014년 8월 18일 동남지역 폭우 25일까지 부산, 창원, 고성, 울산, 김해, 양산 등에 내린 폭우. 동남지역 전역에 산사태가 일어났고 부산 온천천 일대와 동래역, 금사역 등 지하철 곳곳이 침수되었다. 울산에서는 시내버스가 좌초되어 탑승자 6명 전원이 사망하기도 했다. 2016년 10월 5일 태풍 차바 사망 7명, 실종 3명, 재산피해 200억 원 2017년 7월 16일 중부지방 폭우 23일까지 충청권과 수도권에 내린 폭우. 기상청의 오보와 충청도 도의원들의 외유성 해외연수, 이와 관련된 자유한국당 김학철 의원의 망언(국민들이 레밍 같다)이 논란이 되었다. 2018년 5월 16일 중부지방 폭우 18일까지 경기 북부, 강원 북부에 내린 폭우. 사망 3명, 실종 1명.  2018년 8월 5일 강원영동지방 폭우 6일까지 강릉, 속초를 포함한 강원 영동 지방에 시간당 최대 93mm의 폭우가 내림. 강릉 시내 대부분과 속초 일대가 물에 잠김. 2018년 8월 23일 태풍 솔릭 실종 1명, 부상 2명 2018년 8월 26일 한반도 폭우 9월 4일까지 한반도 전역에 내린 폭우. 사망 2명, 부상 3명, 이재민 184명. 2018년 10월 5일 태풍 콩레이 사망 2명, 실종 1명, 이재민 470여 명 2019년 9월 7일 태풍 링링 사망 3명 2019년 10월 2일 태풍 미탁 사망/실종 11명 2020년 6월 10일 한반도 폭우 9월 13일까지 한반도 전역에 내린 폭우. 사망 46명, 실종 12명, 부상 7명, 이재민 6,946명, 재산 피해 1조 2,585억 원. 기상청의 오보 논란과 더불어 수도권에 비가 그치면 호우특보를 멈추는 등 비수도권 지역에 대한 보도 실종 논란이 있었다. 2020년 9월 2일 태풍 마이삭 사망 2명, 이재민 2천여 명 2022년 8월 8일 수도권 폭우 사망 14명, 실종 2명, 부상 26명, 이재민 1,570명, 재산 피해 최소 658억 원. 갑작스러운 폭우가 가장 크고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행정 책임자들의 부재와 권성동, 김성원 의원, 박강수 마포구청장 등 정치권의 망언, 잘못된 행동도 매우 큰 비난을 받았다. 2022년 9월 6일 태풍 힌남노 사망 11명, 부상 3명, 재산피해 1조 7,300억 원, 이재민 2,700여 명 (경북 포항, 경주, 울산광역시 지역에 피해가 특히 컸다. 포항 아파트 지하주차장 침수, 포항제철 가동 중단 등) 2023년 6월~8월 한반도 집중호우 사망 48명, 실종 4명, 부상 35명. 특히 충청도의 피해가 컸다. 충북 괴산의 괴산댐이 넘치고 청주 미호강이 범람했으며 공주 공산성 만하루가 침수되었다. 김영환 충북도지사는 "(내가) 거기(사고 현장)에 (일찍) 갔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연합뉴스.2023.07.20.)" 고 말하는가 하면, 오송 지하차도 침수현장에 가지 않고 괴산댐 월류 현장에 간 이유를 설명하면서 "한두명 사상자가 발생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뉴스1.2023.07.20.)"라고 말하기도 했고 홍수 당시에 서울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 밝혀져(중앙일보.2023.07.31.) 비난을 받았다. 2023년 8월 9일~11일 태풍 카눈 사망 2명. 부상 109명.  지진 1978년 10월 7일 홍성 지진 강원도 홍성에서 발생한 지진. 규모 5.0.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내진 설계가 없었으므로 건물 피해가 상당했다. 2016년 7월 5일 울산 지진 울산광역시 해안가에서 발생한 지진. 규모 5.0. 큰 피해는 없었으나 지진과 정부의 재해 대처 속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2016년 9월 12일 경주 지진 규모 5.1, 5.8로 같은 날 두 차례 발생. 지진 관측 이래 한반도에서 발생한 가장 규모가 큰 지진. 전국적으로 진동을 느낀 사람이 많았으므로 인터넷, 전화가 잠시 먹통이 되는 일이 있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지진에 대한 불안감과 원전의 위험성을 강하게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당시 새누리당 정우택 의원은 북한의 핵실험 때문이라는 음모론을 퍼트려 비난을 받았다. 2017년 11월 15일 포항 지진 규모 5.4. 부상 92명, 이재민 1,797명, 재산피해 672억 원. 대학수학능력시험이 한 주 연기되기도 하였고, 필로티 건물의 위험성과 내진 설계의 필요성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2018년 2월 11일 포항 지진 규모 4.6. 부상 43명. 그 이후로도 여진이 계속되어 불안감을 안겼다. 노동사고/산업재해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분신 1979년 8월 9일~11일 YH 사건 가발 생산 공장인 YH무역이 방만한 경영으로 갑자기 문을 닫게 되자 여성 노동자 190여 명이 경영 정상화, 노동자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에 있던 신민당 당사에서 시위를 한 사건. 진압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김경숙(1958년생. 당시 21세)이 사망. 1980년 4월 사북사건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소속 탄광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 저임금, 무책임한 회사의 태도, 건달들로 구성된 어용노조 등에 불만을 품고 4월 21일 시위를 벌임. 진압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자 시위를 하던 노동자들이 24일까지 사북읍 중심지를 점거한 사건. 24일 노사정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시위는 종료되었지만, 시위가 진정되자 정부에서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고문. 1987년 원진레이온 사태 경기도 미금시 도농동, 지금동 일대에 있던 원진레이온에서 발생한 이황화탄소로 노동자와 인근 주민들이 언어장애, 신체장애, 정신장애 등을 겪은 것이 1987년에 와서야 알려짐. 이때까지 원진레이온은 무사고 작업장을 자랑하며 국가 표창까지 받았음. 1988년 7월 2일 문송면 군 사망사건 1987년 12월 5일부터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던 온도계 공장 협성계공(현 협성히스코)에서 일하던 17세 문송면 군이 1988년 2월 7일에 병으로 휴직. 3월 22일 서울대병원에서는 문송면 군이 수은중독이라고 밝힘. 건강이 계속해서 쇠약해지다가 같은 해 7월 2일에 사망. 2007년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직원들 수십 명이 백혈병에 걸리고 7명은 사망. 2007년 3월 6일 황유미 씨가 사망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노동자들에 대한 안전교육이나 안전검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망과 발병이 알려진 이후에도 삼성전자는 물론 노동부에서조차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긴 싸움이 되었다. 2018년 11월에 합의가 이루어지며 종료. 2020년 삼성 미래전략실 내부 문건에서 피해 유가족들을 조롱하는 문서가 발견됨(한겨레21.2020.07.03.백혈병 피해 유족에 ‘우수고객’ 조롱한 삼성). 2010년 9월 7일 당진 용광로 사고 충남 당진 환영철강공업에서 일하던 김 모씨(만 29세)가 작업 도중 5m 높이의 1600°C 전기로 위에서 실수로 발을 헛딛고 빠져 사망한 사고. (한겨레 특집기사. 2020.10.11) 2012년 9월 27일 구미 불산가스 누출사고 경북 구미시 산동면 봉산리 구미산단 4단지 내 휴브글로벌 불산 저장탱크에서 폭발이 일어나 5명이 유독가스로 인해 사망. 공장의 불산이 넓게 퍼지면서 같은 해 10월 8일 구미시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됨. 2014년 2월 10일 울산 현장실습 고교생 사망사고 울산시 북구 농소동 금영ETS 공장 지붕이 폭설로 무너져 야간작업을 하던 현대공업고등학교 실습생 김대환 군(19)이 사망. 현장실습 규정, 현장실습표준협약서를 어기며 야근 작업을 시킨 것, 사고 직후 노동부가 금영ETS에 작업중지명령을 내렸지만 2월 20일부터 이를 해제해 다시 작업이 진행되었음. 2014년 8월 31일 부산 열처리업체 직원 사망사고 부산시 강서구 송정동의 한 열처리 업체에서 직원 김 씨(28)가 기계에서 제품을 꺼내려다 기계에 빨려들어가 사망. 안전대책이나 책임자 처벌에 대해선 불명. 2014년 09월 27일 월성원전 잠수부 사망사고 월성 원자력 본부 3호기 계획 예방 정비 도중 냉각수 취수구의 슬러지를 제거하던 잠수부가 펌프에 빨려들어가 사망. 유가족 측에서 시신 수습을 요청하였으나 시신의 방사성 오염 문제 및 예방정비의 장기화를 이유로 거절. 월성원전 3호기는 사망사고가 일어난 3번 펌프 대신 4번 펌프로 운영중. 2015년 7월 29일 청주 지게차 사망사고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의 화장품 제조업체 에버코스에서 한 노동자가 지게차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 사건 직후 동료들이 2분만에 119를 불렀으나, 산재보험을 하지 않으려던 간부들이 119 구급차를 되돌려 보내고 환자를 방치해 사망하게 한 사건. 2016년 5월 28일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은성PSD 직원 김모씨가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어 사망한 사건. 최소한의 안전 장치도 없었고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을 해왔다는 것이 밝혀짐. 책임 떠넘기기, 시민들의 조의대를 함부로 철거한 것 등으로 서울메트로가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와 비슷한 사고가 2013년 2호선 성수역, 201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독산역, 2015년 2호선 강남역, 2018년 5호선 김포공항역에서도 일어났다. 2016년 6월 1일 진접역 공사현장 붕괴사고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역 공사현장이 붕괴하여 근로자 4명이 사망, 10명 부상. 사상자 14명은 모두 일용직. 2021년 6월 의정부지법 신정민 판사는 포스코 건설 등 6개 업체, 현장소장 등에게 무죄를 선고. 합동 안전, 보건 점검 미이행  2건에 대해서만 만 유죄로 인정하고 벌금 300만원을 선고함. 2016년 10월 19일 구미 스타케미칼 폭발사고 경북 칠곡군 석적읍 스타케미칼 공장에서 용접 작업 중 발생한 폭발 사고. 1명 사망, 4명 부상. 사망한 노동자 중 한 명은 2015년 남영전구 공장 철거과정에서 수은중독으로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이었음. 2017년 1월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  LG U+ 콜센터 LB휴넷 세이브팀(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계약 해지를 방어하는 곳)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 홍수연 양이 아중저수지에서 자살한 사건. 높은 업무 강도와 갑질로 우울증을 앓다 사망. 2017년 6월 25일 파주 LG디스플레이 직원 사망사고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LG 디스플레이에서 기계를 점검, 수리하던 37세 직원이 기계에 머리를 다쳐 사망. 이 사고를 계기로 그간 LG디스플레이가 산업재해 사망사고를 은폐해왔음이 밝혀짐. 2017년 11월 19일 제주 현장실습 고교생 사망 사고 제주 서귀포시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이민호 씨(17세)가 기계를 정비하다 컨테이너에 깔려 사망. 2018년 4월 26일 정선 한덕철광 발파사고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예미리의 철광산에서 작업 도중 갱도가 무너지면서 6명이 매몰, 그 중 3명 사망.  2018년 8월 6일 택배 물류센터 알바생 사망사고 대전시 대덕구 CJ대한통운 물류터미널에서 택배 상하차 일하던 알바생이 청소 도중 감전, 열흘 후인 8월 16일 사망. 2018년 9월 4일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이산화탄소 누출 사고 경기도 용인시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사업장 화재진화설비 이산화탄소 밀집시설에서 이산화탄소가 누출, 2명 사망. 삼성전자가 사고 이후 1시간 40분이나 지나 사고 사실을 신고한 것 드러남. 2018년 10월 20일 제주 삼다수공장 사망사고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삼다수 공장에서 35세 김모씨가 기계 정비 중 기계에 끼어 사망. 2018년 12월 11일 태안화력발전소 사고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한국발전기술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김용균 씨가 연료공급용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사망. 김 씨가 사망한 후 네 시간 동안 방치되었고 시신이 발견된 후에도 네 시간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현재 대법원에서 재판 중. 2020년 3월 17일 오리온 공장 직원 투신자살 사건 전북 익산시 영등동 오리온 공장에서 사내 따돌림으로 21세 직원이 투신자살. 2020년 5월 22일 광주 재활용업체 노동자 사망 사고 광주광역시 하남산단 (주)조선우드에서 일하던 김재순(94년생)씨가 파쇄기에 몸이 빨려들어가 사망. 2021년 5월 25일 네이버 직원 자살 사건 네이버 소속 40대 남성 직원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자살한 사건. 2021년 4월 22일 평택항 대학생 사망 사고 평택항 부두에서 컨테이너 바닥 청소작업을 하던 대학생 이선호 씨(23세)가 300㎏ 가량의 개방형 컨테이너 뒷부분 날개에 깔려 사망. 현장에는 안전관리자, 신호수가 없었고, 안전장비도 지급받지 못한 것이 확인됨. 2021년 10월 6일 여수 현장실습 고교생 사망 사고 전남 여수시 웅천동 요트선착장에서 18세 홍정운 군이 요트바닥에 붙은 조개와 해조류를 제거하다가 사망. 홍정운 군은 잠수 관련 자격증도 없었고 수영도 하지 못했으며, 18세 미만 미성년자에게 잠수 작업을 시키는 것은 근로기준법상 불법임. 업체대표 황씨는 대법원에서 잡행유예로 풀려남. 2022년 10월 15일 평택 SPL 제빵공장 직원 사망 사고 SPC 그룹의 계열사 SPL의 경기도 평택시 소재 제빵공장에서 직원 박모씨(23세 여성)이 근무 중 소스배합기에 몸이 끼여 사망. 2인 1조로 해야하는 작업을 혼자 하다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와 비슷한 사고가 이 공장에서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밝혀짐. 2022년 10월 23일 샤니 성남공장 직원 손가락 끼임사고 SPC그룹의 계열사인 샤니의 경기도 성남시 소재 제빵공장에서 직원(40대 남성)이 근무 중 우측 집게손가락이 끼어 절단된 사건. 2022년 11월 5일 의왕 코레일 직원 사망 사건 경기도 의왕시 오봉역에서 작업하던 한국철도공사 직원이 열차에 치여 사망. 2023년 6월 23일 서대문구 엘리베이터 수리기사 사망사건 서울 서대문구의 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수리하던 20대 수리기사가 추락사. 규정상 2인 1조로 작업을 해야하지만 구속력이 없어 지켜지지 않고 있었음이 논란이 됨. 2023년 6월 19일 코스트코 하남점 직원 사망사건 경기도 하남시 코스트코 하남점 주차장에서 일하던 31세 김동호 씨가 폭염으로 인해 사망. 코스트코 코리아 대표가 빈소에 방문해 "(입사전에) 병 있지? 병 숨기고 입사한 거지?"라고 장례식장에서 물어 비난을 삼. 코스트코 측은 사과나 보상 없이 바로 김앤장 변호사를 고용해 법정 다툼을 예고. 2023년 8월 8일 샤니 성남공장 직원 사망사고 경기도 성남시 샤니 제빵공장에서 일하던 직원이 기계에 끼여 사망. 왜 하나도 바뀌지 않을까 우리는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 또 비슷하게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입니다. 아마도 인간의 역사는, 우리의 사회는 점점 더 발전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겠지요. 이런 생각 없이 그저 역사가 반복된다고 말 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불과합니다. 어차피 세상사는 돌고 도니까 노력해봐야 소용없다는 식으로요. 제도와 구조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탐욕이나 무책임 뿐만 아니라 이런 류의 허무주의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허무주의는 과욕과 무책임을 부채질할 뿐 아무 유익함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전에 같은 글을 쓰면서 우리가 욕심을 조금만 줄였더라면, 탐욕을 조금만 줄였더라면 이런 사고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https://campaigns.do/discussions/346) 자연재해나 산업사고를 비롯한 각종 사고, 범죄 등을 완벽하게 예방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예방해나갈 것인지 고민하고 토론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한국사회가 말하는 발전, 진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갑니다. 둔한 말도 열흘 동안 가면 천리마만큼 갈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달리기만 하면 평생 뼈가 부서져라 근육이 끊어져라 달려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가야할 방향만 확실하다면 멀 수도 있고 가까울 수도 있고 앞서갈 수도 있고 뒤쳐질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곳에 도달할 것입니다. (순자荀子, 수신修身)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을 다시 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방향을 향해 가야하는지, 그것이 다소 요원하더라도 우리는 왜 그 방향을 향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열거한 수많은 재난과 참사의 반복을 막는 길은 이것 뿐일 것입니다. 
새 이슈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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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권과 관련 있는 다양한 이야기
1 갈색개 사건 영국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 재위 1837~1901)은 동물 생체실험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동물 생체실험에 반대하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법안이 왜 논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특히 생물학이나 의학을 가르치는 학자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합니다. 여왕이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00년, 스웨덴 여성 리찌 린드 아프 하게비(Lizzy Lind af Hageby, 1878~1963)와 라이자 카터리네 샤르타우(Leisa Katherine Schartau, 1876~1962)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파스퇴르 연구소를 방문해 상처 입고 병든 동물이 가득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스웨덴 반 생체실험협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생체실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기 위해 직접 의사가 되기로 하고 런던 여자 의예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1903년 2월, 런던대학 생리학 교수 어니스트 스털링(Ernest Henry Starling, 1866~1927)은 전기 자극을 통해 침샘 자극이 혈관 자극과는 별개로 움직인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몸무게 6kg 정도의 갈색 개가 실험대에 올랐습니다. 이 개는 의학도들을 위한 교보재로 이미 여러 번 개복이 된 바 있는 개였습니다. 그 개는 60명의 학생들 앞에서 생체실험을 당했고 마지막에는 학생 중 한 명인 헨리 핼릿 데일(Henry Hallett Dale, 1875~1968)이 췌장을 제거하고 개의 심장에 칼을 꽂아 사망케 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리찌와 샤르타우가 난입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갈색개 사건(Brown Dog affair)이라고 합니다. (헨리 핼릿 데일은 훗날 세포간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을 발견해 신경은 전기 자극이 아니라 화학 변화에 의해 전달됨을 밝혀 노벨상을 받았다.) 리찌와 샤르타우는 동물생체실험에 반대하는 변호사 스테판 콜리지(Stephen Coleridge, 1854~1936)를 찾아갔습니다. 스테판 콜리지는 두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런던대학 생리학 교실을 ‘동물 생체실험을 했다’라며 고소했고 이는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지요. 콜리지는 이들이 살아있는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것은 위법이며 의학, 생물학 연구자들이 이 법을 지키지 않고 있으며 그 동안 런던의 의학/생리학 교실에서 행해진 생체실험을 날짜별로 기록해둔 리찌와 샤르타우의 일기, 그리고 사건 당일의 증언은 매우 확실해 증거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니스트 스털링의 매형으로 역시 생리학을 가르쳤던 윌리엄 베일리스(William Bayliss, 1860~1924)는 살아있는 동물이 아니라 이미 죽은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으며 교실에 난입한 두 여성은 수업 전체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사건을 만들어 터뜨렸다고 주장했습니다. 1903년 11월 25일, 재판장 리처드 웹스터(Richard Webster, 1842~1915)의 주재 아래, 배심원들은 25분간의 회의를 통해 런던 생리학 교실에 대해 유죄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윌리엄 베일리스는 피해 배상금 2천 파운드, 법정 비용 3천 파운드를 지불하라고 선고했습니다. (이는 재판 다음날에 어니스트 스털링이 모두 지불했습니다.) 이후 이 판결을 기념하기 위해 생체실험 반대 운동가들은 갈색개 동상을 세웠는데 의대생들은 끊임없이 몰려가 동상을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의대생들의 계속되는 폭력행위 때문에 영국에서는 사회주의자, 여성주의자, 노동조합원, 자유주의자들이 연합을 해 동상을 사이에 두고 계속되는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는데 재판 이후 약 10년에 달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전부 묶어서 갈색개 사건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동물권과 관련된 (거의) 최초의 운동인 갈색개 사건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지금도 이런 식으로 동물을 학대해가며 교육을 하는 의대나 생물학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직도 동물 실험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2 생태사회주의(Eco-socialism)와 사이토 코헤이 환경 문제와 관련한 다양한 사상의 갈래를 담은 과거의 글입니다(https://campaigns.do/surveys/127). 시간 여유가 있으시면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생태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아무리 빨라도 68혁명, 보통은 1980년대 이후로 잡습니다만, 그 이전에도 사회주의와 생태계 사이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안 한 사람은 없습니다. 레닌(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1870~1924)이 그들을 싫어하고 숙청했기 때문에 조용히 사라졌을 뿐이지요. 아마 가장 최근에 활동하고 있는 이름이 알려진 생태사회주의자 중에서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하는 사람은 일본의 사이토 코헤이(斎藤幸平, 1987~)일 것입니다. 도쿄대학 이공계로 진학했다가 미국 웨슬리언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철학 석사,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철학 박사를 받고 지금은 도쿄대학에서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그가 이공계에 입학해 정치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꾼 데에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그는 동일본 대지진 때 종종 지적되었던 문제 ‘왜 도쿄 전력이 후쿠시마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주목하면서 도시의 전력 과잉 소비를 지탱하기위해 지방에 발전소를 떠안기는 현상에서 격차의 문제, 계급의 문제를 발견하고 전공을 바꿨다고 합니다. (好書好日.2023.02.09.) 사이토 코헤이는 맑스가 말년에 자연과학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맑스의 노트에서부터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사이토 코헤이는 지구를 희생시키며 더욱 부유해지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후 변화로 폭염과 폭한이 점점 심해지고 있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빵빵한 냉난방 속에서 기후 변화를 느끼지 않고 있지요. 모든 피해는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받고 있습니다. 사이토 코헤이는 이런 구조 속에서 자본주의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사이토 코헤이는 계급 문제와 환경 문제가 서로 부딪치지 않으며 이 둘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노예주와 노예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로 이르기까지. 사이토 코헤이는 이런 경제 구조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전반이 인간 문명 이외의 주변부, 경계지역을 수탈하며 이루어져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사이토 코헤이는 ‘녹색 성장’이라는 것도 이런 식의 착취, 외주화라고 보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탈성장’입니다. 일단 사이토 코헤이는 환경 문제 속에서 피해를 받는 모든 존재를 ‘환경 프롤레타리아’라고 합니다. 우리 환경 프롤레타리아들은 지루하고 어려운 싸움이 분명한 환경을 위한 탈성장 투쟁에서 단결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과정에서 친환경적인 생활을 하기 힘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주지 말 것, 여유 있는 자들이 생활 방식을 바꿀 것, 각자의 위치와 상황에 따라 ‘지나친 부담이 없는 최저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3 동물에게도 시민권을? 캐나다의 철학자 윌 킴리카(Will Kymlicka, 1962~)는 『주폴리스(Zoopolis, 2011)』라는 책을 통해 이전의 동물권 논의는 도덕적 영역에만 머물러 있음을 비판하고 동물 보호의 법적/정치적 성격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1) 인간이 기르는 가축의 경우: 인간에 의해 사육되는 동물들에게는 그들의 관심, 선호가 최대한으로 고려될 수 있는 공동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 인간과 똑같은 시민권은 아닐 지라도 동물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며 식재료, 의류 목적의 동물 사용을 금지할 것. 2) 야생동물의 경우: 야생동물에게는 그들이 사는 지역에 대한 주권을 부여해 번식과 생존을 보장해야 한다. 3) 1과 2의 중간인 경우 - 도시에 살지만 인간이 기르지는 않는 동물(비둘기, 쥐, 길고양이, 각종 곤충 등)은 그들이 인간 사회를 거부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그에 맞는 권리를 고민해야 한다. 동물의 시민권과 주권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도시에 사는 비가축 동물들의 권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4 후쿠시마와 동물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뉴스 중 하나가 바로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문제지요. 이와 관련해 어딘가에선 해산물을 못 먹게 된다, 어업 종사자들은 앞으로어떻게 살아야 되는 거냐고 이야기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물론 그분들도 일차적인 피해자이지요. 이건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일차적인 피해자가 있습니다 바로 피폭을 당하는 비인간 생물들입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폭파 사고 직후, 사람들은 차마 동물들을 챙길 여유도 없이 몸만 빠져 나와 피난을 갔습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은 물론 소 돼지 닭 같이 목적을 가지고 길러지는 가축들 모두가 후쿠시마에 방치되었습니다. 이런 동물들에 대해 일본 정부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전부 살처분이었습니다. 어차피 이 지역에서 길러진 동물로 고기를 가공해 판다고 해도 누군가가 사먹을리도 없거니와 이 지역의 농축산물을 다른 지역으로 판매 하는 것 자체가 이때는 금지 되어 있었습니다. 또 야생동물이나 농장에서 도망친 동물둘이 방사능 물질을 아주 소량이라고 해도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도 있구요 그래서 일본 정부는 이 지역에 동물 전부를 순차적으로 살처분 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일본의 사단법인 고향과 마음을 지키는 친구 모임(故郷と心を守る友の会) 회원으로 재난 지역의 버려진 동물들을 기르는 일을 하고 있는 타니 사츠키(谷さつき)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큰 피해를 입는 건 언제나 힘없는 약자잖아요. 사람은 피난이라도 갔지만 동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계속해서 피폭을 당한 거죠. 이 점에서 반려동물, 가축, 야생동물 모두 피해자입니다. (한국일보.2016.02.22.) 5 해월 최시형 동학의 두번째 교주 해월 최시형은 경주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종이 만드는 일을 하다가 철종 12년인 1861년에 최제우를 만나 동학에 들어가게 됩니다. 1863년에 최제우가 그를 동학의 다음 교주로 결정을 했는데 1864년에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최시형은 안동, 울진 등을 전전하며 숨어서 포교를 했는데 이 시기는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참으로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동학 교인 중에 충남 홍주 사람으로 동학에 들어간 뒤 경남 진주, 경북 영해 등을 전전하던 이필제(1825~1871)라는 사람이 최시형의 말을 듣지 않고 황제가 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며 충북 진천, 경남 진주, 경북 영해에서 농민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문경에서 최제우의 신원 복권을 요구하며 봉기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게 됩니다. 최시형은 이 일로 또 숨어 살아야했습니다. 1892년부터 93년 사이에는 전봉준 등이 흥선대원군과 내통하며 고종을 폐위하고 새 왕을 세울 계획을 꾸몄는데 최시형은 동학이 대원군에게 이용당할 것을 우려하며 이에 반대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최제우의 신원 복권 요구, 즉 교조신원운동은 계속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1894년 고부 접주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서도 최시형은 다소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만 후에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자 최시형은 모든 동학 교도들에게 외세와 싸울 것을 명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동학농민운동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학살을 당하며 끝이 나게 되었지요. 이 일로 최시형도 숨어 다니게 되었는데 1898년 강원도 원주에서 동학교도 송경인의 밀고로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최시형는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을 넓혀 각자 자기 안의 하느님을 기르라는 양천주 사상을 전개했는데 이 와중에 등장한 것이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 하늘을 먹는다’ 사상입니다. 최시형은 이 세상 모든 생명에는 하느님이 있다고 말하며 우리가 식물이나 동물을 섭취하는 것, 생태계의 먹이사슬은 ‘하늘로 하늘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해월신사법설』「이천식천」) 하늘로 하늘을 기른다는 것은 우리가 먹고 활용하는 자연의 모든 것들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지를 알고 그 하늘의 값을 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늘로 하늘을 기르는 것도 아니면서 자연의 너무 많은 것들을 희생시키고 있지는 않은지요. 읽어볼만한 책 1 사이토 코헤이(斎藤幸平), 『칼 맑스의 생태사회주의: 자본, 자연, 그리고 끝나지 않은 정치경제학(Karl Marx's Ecosocialism: Capital, Nature, and the Unfinished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Monthly Review Press, 2017.   - 한국에선 2020년에 『마르크의 생태사회주의: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름으로 번역되어 두번째테제에서 출간되었습니다(역자 추선영). 2 사이토 코헤이, 『인신세의 자본론(人新世の「資本論」)』, 集英社新書, 2020. 한국에서는 2021년에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다다서재에서 출간되었습니다(역자 김영현) 3 윌 킴리카(Will Kymlicka), 『주폴리스(Zoopolis)』,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아쉽게도 한국에는 번역이 없습니다. 대신 2023년에 책공장더불어에서 나온 『동물노동』이라는 책을 추천드립니다. 이 책은 2019년에 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나온 『Animal Labour: A New Frontier of Interspecies Justice?』의 번역입니다. 4 『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이천식천(以天食天)」. 한국에서는 천도교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천도교 홈페이지).
동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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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잼버리 대회에 대한 단상
1 한국의 인종주의를 옛날부터 GDP인종주의라고 부르곤 한다. 단순히 피부색만으로는 정의되지 않는 한국만의 인종/국가 서열이 대체로 1인당 GDP를 적용하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한겨레21.2020.05.02.) 이번 잼버리 대회와 관련한 한국 정부의 문제점은 내가 여기에서 굳이 또 지적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니 여기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이번 잼버리 대회와 관련된 보도를 쭉 보면서 어딘가 인종차별, 국적차별적인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고 구미권 국가들이 많이 참여하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었다는 느낌 말이다. 한국의 농촌과 건설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보는 건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노동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산업 재해를 당하는 것도 자주 접하게 되었다. 2023년 3월 4일,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의 한 돼지 농장에서 60대 태국인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는 돼지 축사 안에 설치된 시멘트 벽 안에서 생활했는데 바닥으로는 돼지 분뇨가 흘러나왔고 벽 바로 옆에는 비닐에 싸인 돼지 사체가 놓여있었다. 이곳에서 10년 간 생활하다 사망한 그의 사인은 황화수소 중독으로 추정되었다. 동물의 배설물에서 나온 유독가스로 인해 사망한 것이다. 농장주는 그의 사체를 트렉터에 싣고 근처 야산에 버렸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한겨레.2023.03.08.) 2023년 5월 1일, 경남 양산의 한 공장에서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20대 노동자가 열탕에 빠져 사망했다. 열탕은 쇠파이프를 건조시킬 때 쓰는 것인데 내부 온도는 67도에 달한다고 한다. 작업 중 발을 헛디뎌 열탕 안에 빠지게 되었는데 공장의 직원이 50명이 안 되어서 공장주는 중대재해처벌법 대상이 아니었다. (kbc.2023.05.10.) 2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외국인 사망 사고는 그 숫자도 비율도 매년 계속 늘고 있는데 우리 정치권이 잼버리 만큼의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잼버리 대원들 중에 잘사는 나라 사람들이 많아서 더 주목을 받는 건가 싶은 느낌 말이다. 잼버리랑 이건 별개 아니냐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이건 내 기분(ki-bun)이니까. (TheWorld.2015.06.17.) 스카우트 연맹에 가입한 사람이 가장 많은 국가는 인도네시아다(7.2%). 그 다음이 미국, 홍콩, 필리핀, 태국, 영국, 벨기에, 케냐 순서고 그 다음부터는 전체의 1%를 넘지 않는다. (한국은 0.5%) 그런데 이번 잼버리 대회에 참여한 학생들의 국적을 살펴보면 총 33,628명 중 일본이 가장 많은 6,651명을 차지했고 그 다음은 영국(3,939명), 스웨덴(1,873명), 미국(1,631명), 대만(1,217명), 네덜란드(1,021명), 독일(1,002명) 순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 잼버리 사태와 관련해 영국과 미국, 프랑스 말고 다른 나라 참가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언론을 얼마나 봤나 싶다. 이게 내가 이번 잼버리 대회에서 느낀 인종주의, 국적주의다. 3 새만금에서 철수한 일부 잼버리 단원들이 충청북도로 건너간 모양이다. 김영환 충북도시자는 충청북도로 넘어온 영국 잼버리 단원 250명을 위해 1인당 한끼 3만 원의 식사비용을 책정했다. 다른 비용까지 합산해 충청북도는 이들에게 하루에 3천 1백만 원의 예비비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충청남도는 이들을 위한 식사비용으로 1인당 한끼 만 원을 책정했다. 기준은 없다. 그냥 도지사가 그렇게 정하면 그렇게 가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충북 청주시에서 발생한 집중호우 이재민의 하루 식사비는 8천 원. 이마저도 도에서는 전혀 지원하지 않고 청주시가 혼자 책임지고 있다. 기자들이 충북도에 왜 한끼에 3만 원이냐고 물으니 외빈이라서 그렇다는 답이 왔다고 한다. (오마이뉴스.2023.08.09.) 4 잼버리 활동 지역의 화장실이 지저분하다는 문제가 지적되자 전라북도에서는 공무원들을 강제 동원해 화장실 청소를 하게 했다. 전북 공무원 노조 관계자가 쓴 것으로 보이는 공지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화장실은 최신 수세식이 아닌 일명 푸세식 화장실이었습니다. 11개국에서 온 외국 청소년들 눈에는 아프리카에서나 봄직한 풍경이었겠지요. (서울경제.2023.08.07.) 아프리카 남서부에 위치한 나미비아에서도 28명의 스카우트 대원이 새만금에 왔다. 태풍과 폭염, 비위생적인 날씨로 속속 탈출하는 국가들이 생길 때, 한국에는 대사관이 없는 나미비아 청소년들은 그들이 나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잼버리를 주관하는 대한민국 정부, 여성가족부, 행정안전부, 전북도청은 이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이들을 발견하고 신경쓴 것은 잼버리와 전혀 상관 없는 경기도 용인시와 숲을 유아교육에 활용하는 단체인 ‘숲 유치원’이었다. 이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나미비아 청소년들을 위한 부식을 마련하고 새만금에서 나와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계획했다. 나미비아 청소년들은 이들에게 받은 부식을 같은 처지에 있는 트리니다드트바고에서 온 청소년들과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중앙일보. 2023.08.11.) 4 세계화를 부르짖지만 권위주의, 위계질서의식은 더욱 강화되는 느낌이다. K-POP을 동원하는 방식도 그렇다. K-POP을 만능통치약처럼 생각하는 배경에는 K-POP을 시작으로 한 “한국 컨텐츠가 전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라는 문장에 대한 기억, 그 이상은 없다.  한국 컨텐트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면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어느 정도의 인기를 끌고 있으며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한국 정치권에서는 이런 분석을 하는 사람도, 이런 분석을 찾아보거나 받아들일 사람도 없어 보인다. 지금의 정부는 더더더더욱 그렇다. 왜 분석을 안 할까? 신자유주의적인 욕망에 미쳐서 돈만 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불나방 처럼 달려드는 풍조도 원인이겠으나 또 하나 중요한 원인은 사회와 국가를 보는 수준 때문이기도 하다. 한 사회 안에는 각 주제별로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이 주제의 스펙트럼은 서로 무심하게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두 개의 극점 사이의 어딘가이고, 이 점은 다른 사안의 점과 대체로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 이걸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 속에선 정권이 백날 바뀐들 유능과 무능, 책임과 무책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사회의 다양성을 상상할 수 없다. 5 책임자의 무능으로 문제가 생기면 한국의 책임자들은 군인을 동원하거나 연예인을 동원한다. 태풍 피해 현장 속에서 안전장비도 없이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한 해병대원의 죽음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K-POP 아티스트, 연예기획사가 자발적으로 출연을 결정한 것을 환영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정부는 군인, 연예인 말고 전정권도 동원한다.) 연예기획사 하이브는 마지막날 공연 참석자들에게 BTS 포토카드 8억 원 어치를 나누어주었다고도 한다. 한국 가수가 만들고 부른 노래라고 해서 그것이 한국 정부, 국가의 소유물이 될 수는 없다.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프랑스 언론에서는 한국 정부의 연예인 동원을 두고 ‘전체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France24.2023.08.11.) 이제 프랑스 언론도 좌파 카르텔이라고 할 것인가? 5 불교에서는 인연(因緣)이라는 말을 한다. 원래는 인-연-과가 한 세트다. 인(因)은 원인고 과(果)는 결과, 연(緣)은 인과를 발생시키는 환경적 요인이다. 보통 바람이 인이고 파도가 과, 그리고 이 인과를 가능하게 한 물의 존재를 연이라고 비유해 설명하기도 한다. 이 세상은 무수한 인연과가 맞물려 돌아가는 곳이기에 이 세상 그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게 불가의 가르침이다. 이 세상 무엇 하나라도 빠져버리면 이 세상은 모두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를 화엄(華嚴)이라 한다. 이번 잼버리 사태라는 과의 인은 책임자의 무책임과 무능, 소위 ‘부유층’이라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익 이외에는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는 졸부 근성, 이 두 가지일 것이다. 나는 이 인과를 가능케 한연은 공동체 속의 개인을 상상하지 못하는 다양성의 부재와 무분별한 사대주의 근성이라고 생각한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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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권이란?
1 一切畏刀杖 모든 것은 폭력을 두려워한다 一切皆懼死 모든 것은 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以自量比較 자신의 마음에 견주어 보아 勿殺教他殺 죽이지 마라, 죽이게 하지도 마라 Sabbe tasanti daṇaḍassa sabbe bhāyanti maccuno Attānaṃ upamaṃ katvā na haneyya na ghātaye 一切畏刀杖 모든 것은 폭력을 두려워한다 一切皆愛生 모든 것은 다 삶에 미련을 둔다 以自量比較 자신의 마음에 견주어 보아 勿殺教他殺 죽이지 마라, 죽이게 하지도 마라 Sabbe tasanti daṇaḍassa sabbesaṃ jīvitaṃ piyaṃ Attānaṃ upamaṃ katvā na haneyya na ghātaye. (『법구경法句經 Dhammapada』「도장품刀杖品 Daṇḍa-vaggo」) 2 동물권(動物權, Animal Right)이란 말 그대로 동물의 권리입니다. 그러면 무슨 권리인가? 감각을 가진 모든 동물이 인간에 있어서의 유용성과는 상관 없이 도덕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각각 개별 생명이 존중 받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지역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새삼 왜 또 하느냐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구 중심의 근대와 그 이전부터 내려온 기독교 사상은 자연과 문명, 인간과 자연을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묘사하면서 인간이 자연을, 문명이 자연을 정복해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해왔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28절) 창세기의 이 구절은 초대 교부 중 한 명으로 영지주의(그노시즘)에 맞서 싸웠고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 리옹의 이레네우스(Ειρηναίος Λουγδούνου)가 『사도적 선포의 논증(Demonstratio apostolicae preaedicationis)』에서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만든 것은 그리스도의 등장을 예견한 것이고 이는 인간이 신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며, 이것은 곧 인간이 신의 초월성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는 신의 모습과 닮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이 이후에 인간의 우월성이나 자연에 대한 정복 권리 같은 것을 비판한 신학자들도 계속 등장했지만 이들은 일단 세력을 얻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논리가 더 진전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도 텍스트이니까,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그런 차원에서 기독교가 자연과 인간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충분히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자연 파괴에 아무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가톨릭도 개신교도, 전근대 사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의 확산과 자연파괴의 정당화에 근거를 제시해주었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일부와 이에 반대하지 않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을 생각하면 기독교에는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동물권에 대한 논의는 이런 배경에 대한 반성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3 동물의 권리, 생명의 평등에 대해서는 시대마다 지역마다 구구한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지면상 그런 이야기는 각설하기로 하고, 이야기를 대폭 줄여서 현대에 있어서 동물권 논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그 시작은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 1946~)가 쓴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 1975)』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피터 싱어의 주장의 시작은 우리가 흔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로 잘 알고 있는 공리주의입니다. 공리주의는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모든 존재에게 평등한 이익이 갈 수 있도록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피터 싱어는 공리주의 원칙을 인간 이외의 동물에게도 확장한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차이가 고통을 덜 느낄 권리, 생명을 유지할 권리의 차이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감정이 어떠한 것인지, 동물의 지성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우리는 추측을 할 뿐이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물의 권리가 인간의 권리와 무조건 같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존 욕구와 고통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마음까지 다를까?’라는 점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피터 싱어는 이와 함께 종차별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어떤 존재가 특정한 종(種)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종에 따라 외양도 행동의 모습도 다 다릅니다. 하지만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면 평등한 배려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종 때문에 이런 평등에서 배제되는 것이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 무엇이 다른지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합니다. 피터 싱어의 생각에 따르면 동물의 권리는 그들의 지능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끼리 지능 지수를 가지고 차별하는 것을 나쁘게 여기지요. 동물도 마찬가지 입니다. 동물의 지능이 인간보다 낮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물이 고통을 덜 느끼거나 생명에 대한 욕구가 인간보다 적은 것은 아닙니다. 피터 싱어는 이런 차원에서 육식을 배제하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사용하는 행위(대표적으로 동물실험)를 비난합니다. 4 또 한명의 중요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톰 레건(Tom Regan, 1938~2017)과 그의 저서 『동물권 옹호(The case of Animal rights, 1983)』입니다. 톰 레건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생명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서 끝이 나는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삶의 주체성이나 이성의 유무는 생명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영유아나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 지적 장애를 지닌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화를 냅니다. 그 이유는 생명을 가진 자에게 행해지는 폭력 그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지 거기에 이성이나 지능, 주체성 같은 것은 고려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결과를 중시하는 사상입니다. 예를 들면 동물 실험 같은 것입니다. 동물 실험이 비록 잔인한 면이 있지만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경제나 과학 뿐 아니라 윤리적인 결과까지)는 매우 크기 때문에 동물 실험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지요. 톰 리건은 이런 시각을 비판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이런 예를 듭니다. 부자인 친척을 죽이고 그 재산을 챙겨서 사회에 기부를 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결과가 사회적으로 이롭다고 해도 우리가 그의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죠. 톰 리건은 이런 점에서 피터 싱어가 취하고 있는 공리주의적 동물관에 한계가 있다고 비판합니다. 톰 레건은 육식을 자제하고 동물실험이나 사냥을 금지해야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어떤 이로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 생명을 죽이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도덕적인 사실, 오로지 그것 때문입니다. 5 이런 논의의 연장선상에 게리 로렌스 프랑시옹(Gary Lawrence Francione, 1954~)이라는 법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 나와 있는 동물 복지와 관련된 법과 제도는 모두 동물 착취를 못 벗어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이런 제도 안에서는 동물에 대해서 이런 걸 하지 마라 저런 걸 하지 마라 아무리 말한들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 ‘아 그러면 그거 빼고 다 하면 되겠구만!’이라는 생각 밖에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사람으로서의 동물(Animals as Persons, 2008)』에서 동물권에 대한 철학에 기반하여 “소유물로써의 동물의 위치”, “동물의 권리와 동물 복지의 차이”, “동물의 특성이나 지성 유무에 의한 차이는 없을 것”을 법에 고려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6 보통 동물권의 철학적 기반이라고 하면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와 톰 레건의 권리론, 두 가지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공리주의적 입장은 최대행복이나 평등이라는 공리주의 원칙을 동물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통과 쾌락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는 것을 종차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동물도 인간과 같은 고통, 쾌락, 삶의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물에게도 이와 관련되어 인간과 같은 평등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동물을 괴롭지 않게 도살하는 것 같은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톰 레건의 입장은 윤리 교과서에서 ‘정언명령’이라고 나오기도 하는 칸트의 의무론의 연장이며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칸트가 말한 ‘인격 존중의 의무’를 ‘생명 존중의 의무’로 바꾼 것입니다. 우리가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에 대해서 비판할 때 거기에 대해서 구구한 논의와 그래서는 안되는 여러 이유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같은 ‘인간’이니까 하면 안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톰 레건의 입장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같은 ‘생명’이니까. 생명을 해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니까. 이런 저런 이유로 생명을 해쳐서는 안되고 동물을 존중해야 하고 어쩌구 하는 순간, 우리는 그 이유에만 집중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톰 레건의 입장은 명확하고 명쾌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일종의 이러한 선언에서 구체적인 방안이나 대책을 만들어 낼 수 있겠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 공리주의적 입장은 결과를 중시합니다.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 모든 생명에게 평등하게 이익이 돌아가는 게 명확하게 눈에 보여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톰 레건의 권리론은 결과 보다는 행위에 주목합니다. 결과가 다소 더디다고 해도 우리가 생명 존중이라는 지고한 가치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7 자잘하게 들어가면 동물권에 대해서는 해야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동물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가 같은 것이라면, 동물과 인간이 똑같이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는 정말로 동물을 구하고 인간을 포기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겠냐는 반문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또 스페인의 투우나 일본의 포경 처럼 동물의 권리를 위해 전통과 문화를 폐지하라는 것이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육식이나 가죽옷 같은 것에 반대하는 건 문제가 없지만 동물실험을 반대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동물실험을 통한 의학/의료기술의 발달보다 동물권이 더 중요하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8 읽어볼 책 1) 피터 싱어 저, 김성한 역, 『동물 해방』, 연암서가, 2012 2) 피터 싱어, 엘리자베스 드 퐁트네, 보리스 시륄닉, 카린 루 마티뇽 저, 유정민 역, 『동물의 권리』, 이숲, 2014  3) 임종식, 『동물권 논쟁 - 피터 싱어·탐 레건 그리고 제3의 해법』, 경진출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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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조건: 한국, 대만, 네덜란드, 덴마크의 공공임대주택
자가를 많이 보유한다고 해서 그게 곧 그 사회의 주거가 안정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집이든 세를 들어 살든 안정적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한국의 집값을 두고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의 원리에 따라 알아서 조절되는 것이지 그게 뭐 문제냐’, ‘돈 있으면 부동산을 얼마나 가지건 말건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재화나 무한한 것은 없습니다만 토지와 주택은 그 유한함이 비교적 눈에 잘 보이는 편입니다. 토지는 식물처럼 자라는 것도 아니고(증식하지 않음) 부동산(不動産: 움직일 수 없는 재산)이라는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다른 곳으로 가지고갈 수도 없습니다(이동할 수 없음). 또 같은 면적이라고 해도 주위 환경에 따라 그 가치가 확 달라지는데 이런 조건을 아주 약간은 바꿔볼 수도 있지만 음식에 양념 치듯이 완전히 인간 맘대로 할 수가 없다는 점도 있습니다(주위 환경을 바꾸는 데에 한계가 있음). 그리고 국토(國土)나 영토(領土)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토지는 국가라는 전제가 없이는 개인이 소유하기 힘듭니다(토지 자체에 공공성이 있음). 그런 점에서 토지는 다른 재산과는 다르게 취급되어야 하며 매우 확실한 유한함이라는 조건 하에서 모든 것을 개발해야 합니다. 남한의 면적은 100,210km²이고 인구는 5174만 명이니까 다른 조건 다 무시하고 단순하게만 계산하면 우리는 1인당 대략 1936m²(약 585평)의 땅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영토에서 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64,300km²(전국토의 64%) 정도라고 하니까(탁한명, 김성환, 손일, 「지형학적 산지의 분포와 공간적 특성에 관한 연구」, 『대한지리학회지』, 2013) 산을 빼고 계산하면 1인당 대략 694m²(약 210평)의 땅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네요. 우리는 이 정도의 땅을 가지고 있을까요? 소유는 차치하고 우리가 주거, 노동, 여가 등을 위해 활용하는 공간을 다 합쳐도 210평이 되기는 할까요? 정부가 공공임대주택을 개발하고 분배하는 방식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이규봉, 「한국과 일본의 공공임대주택정책연구」, 한국아시아학회, 2007) 대만 대만에서 공공임대주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지만, 정부에서는 이 사업에 대해 소극적이었다고 합니다. 대만 경제가 발전하면서 주택 가격이 급상승하자 1989년 민달팽이 운동(無殼蝸牛運動)이 일어났습니다. 이 당시에는 옥노(屋奴), ‘집의 노예’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1989년 8월 26일, 타이베이에서 약 5만 명의 시민들이 땅값이 제일 비싼 충효동로(忠孝東路)에 모여 부동산 가격 폭등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질 것을 요구했습니다. 대만에서는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 일어난 자발적인 도시사회 운동 중 가장 큰 운동이자 시위였습니다. (이 기록은 바로 다음 해인 1990년 민주주의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운동인 야백합학운野百合學運에 의해 깨졌습니다.) 이들은 20%의 민달팽이는 80%의 집 있는 달팽이에게 대항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민달팽이 운동을 계기로 주택 문제를 위한 사회단체인 중화민국 무주택자 단결조직(中華民國無住屋者團結組織), 학술단체 청셔(澄社, 영어 이름은 Taipei Sociaty), 대학생 무주택 문제 해결을 위한 학생주숙문제 전안소조(學生住宿問題專案小組) 등이 만들어졌고 이들은 계속해서 정부에 주택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이를 입법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대만의 주택가격 문제나 공공주택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정치대학 장진으어(張金鶚, 장금악) 교수는 ‘토지가 있어야 재물이 생긴다(有土斯有財)’라는 중화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치관과 주택 소유를 위해 금융 지원이나 세금 우대 등을 행하는 전통적인 정책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장 교수에 따르면 토지나 주택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관이 깨져야 그 다음을 진행할 수 있는데, 전통적인 가치관을 깨는 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장 교수는 정치인들이 ‘선거 전에는 머리를 세고, 선거 후에는 주먹을 센다’고 조롱했습니다. 선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의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당선이 되면 힘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계산하다는 것입니다.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서는 건설사, 중개업자 등 부동산 사업가들이 바로 그 주먹이라는 것입니다. 장 교수는 주택을 가진 자 80% 중 60%p에 해당하는 사람들 역시 주택가격상승의 피해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주택 가격이 폭등하면서 자신의 집을 팔아도 지금과 비슷한 환경의 다른 집으로 이사갈 수 없는 수준이 되었고 이로 인해 한 주택 소유자들의 거주 환경은 더욱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 교수는 20%의 무주택자들과 60%의 한 주택 소유자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안을 주장했습니다.  1) 주택시장 메커니즘을 개선하여 시장정보를 공개하고 투명하게 하고 실거래가 등록 제도를 개선할 것  2) 부동산 세제, 금융제도를 개혁해 주택상품화의 유인을 줄이고, 거주와 비거주소유를 엄격히 구분하고 비거주소유를 억제할 것  3) 다양한 주택보조금을 공적하고 효율적으로 제공할 것. 공영주택 건설 수만 강조하지 말고 취약가구에 대한 복지와 그 비율을 중시할 것  4) 주택의 안전, 환경을 중심으로 한 주택법을 시행해 임대주택의 주거 안전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품질을 개선할 것 (未來城市.2019.07.01.) 2016년, 총통 후보였던 차이잉원(蔡英文)은 2024년까지 공공주택 20만 호를 건설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당선된 후에는 <주택법>을 개정해 취약계층을 위한 공공주택 공급량을 30% 이상으로 늘리고, 지방정부의 공공주택 건설 지원을 실시했으며 실제로 각 지자체에서는 공공임대주택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대만의 공공임대주택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을까요?  2023년 기준, 전국에 기존 공공임대주택은 6,253호, 차이 총통 당선 이후 건설된 주택은 19,647호, 건설 중인 주택은 33,429호, 건설하기로 결정된 주택은 20,501호라고 합니다. 이를 다 합치면 79,830호이고, 여기에 아직 실행은 못하고 계획만 한 주택이 46,683호라고 하니까 이것까지 다 더해도 126,513호네요. (社會住宅興辦進度統計表) 일부 전문가들은 임대주택 건설이 수도인 타이베이시에만 집중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방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공공임대 주택 건설에 소극적이라고 합니다. 일단 토지 가격이 너무 상승해서 지자체가 이를 매입하기 너무 어려워서 경찰이나 군부대, 정부부처 건물 등 정부 시설에 대해 특혜를 줄테니 부지를 달라고 요구하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건설 원가 상승이 겹치면서 사업을 진행하기 더 어려운 실정이라고 합니다. (The News Lens 10. 2022.07.20.) 한국은 어떨까요? 토지와 주택을 거주를 위한 필수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투자가 가능한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누가 더 많을까요? 부동산에서 투기성을 제거하는 게 가능할까요? 이와 관련해서 함께 보면 좋을 사례가 있습니다. 네덜란드입니다. 네덜란드 네덜란드에는 사회주택(sociale woningbouw)이 있습니다. 그 시작은 1901년 <주택법(Woningwet)>의 제정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법에 근거해 네덜란드에서는 주택협회(Woningcorporaties)라는 민간 사회적 기업이 있고, 이들이 임대하는 주택이 바로 사회주택입니다. 현재 네덜란드에는 300 여 개의 주택협회가 있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자선사업에서 시작한 사회주택은 1901년에 관련 법이 제정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더욱 장려되었습니다. 2020년 기준, 네덜란드의 월 최대 주택 임대료는 740유로(약 98만 원)이라고 합니다. 사회주택의 경우에는 각 주택의 품질, 구성에 따라 점수가 매겨지고 그에 따라 최대 임대료가 책정됩니다. 보통의 임대사업자들은 가급적 법정 최대 임대료를 받으려고 하지만, 주택협회의 사회주택은 평균적으로 상한선의 72% 정도를 받는다고 합니다. 마리아 엘싱하(Marja Elsinga) 델프트 공대 교수는 네덜란드의 사회주택과 관련해 주택협회의 사회적 임무를 이야기합니다. (이로운넷.2020.12.07.)  1980년대 사회주택은 전체 주택의 42%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만, 2015년에는 34.1% 정도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 일단 저소득층, 취약계층이 사는 집이기 때문에 영리를 추구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임대료를 올리기는 어려운데 주택 공급은 계속 해야하기 때문에 재정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여파로 네덜란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복지 재정은 축소되었고 주택협회에도 높은 세금이 부과되면서(임대수익의 25%) 사회주택의 수가 줄어들고 있고, 재정이 안정적인 주택협회도 주택을 더 공급하기는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인구가 암스테르담에 몰리는 일이 가속화되면서 수도권에 사회주택은 물론 일반주택마저 부족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사회주택 공급은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사무실이나 사회복지시설, 산업시설 등을 개조해 사회주택을 늘리는 방법도 고민하고 있고 토지임대부주택을 통해 정부가 토지를 저렴하게 빌려주는 방법도 생각하고 있다고 하는데 (bizwatch.2019.08.07.)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덴마크 덴마크도 네덜란드와 같은 방식으로 주택협회와 사회주택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덴마크에는 500개가 넘는 주택조합이 있고, 주택조합 협회는 베엘(BL; Boligselskabernes Landsforening)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덴마크 공공주택(Danmarks Almene Boliger)으로 개명했습니다. 덴마크가 다른 나라의 사회주택과 다른 점은 우선 입주 자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매우 큰 규모의 사회주택만 아니라면 특별한 입주 자격 기준을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거주 기간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원한다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고 자식에게 우선거주권이 부여됩니다. 공공주택에 들어갈 때엔 장기담보대출에 가입을 합니다. 일종의 모기지 같은 것인데 30년 만기 변동금리라고 합니다. 원금을 다 갚으면 공공주택은 개인 소유가 되고, 굳이 주택을 소유하고 싶지 않으면 원금을 안 갚고 이자와 관리비를 월세처럼 내면 됩니다. 주택을 소유하게 되면 그 이후에도 주택을 보유한 사람의 책임으로써 임대료(세금)를 내는데 임대료의 3분의 2는 전국기금으로, 3분의 1은 지역기금으로 들어가 다시 사회주택을 위한 재정으로 사용됩니다. (한겨레.2017.11.08.) 2019년 기준으로 사회주택은 전체 주택의 21.2%에 달하고 전국민의 60%는 인생 중 한 번 이상 사회주택에 거주한다고 합니다. (이로운넷.2020.12.07.) 사회주택과 같은 공공임대주택의 물량은 정해져 있고 경제가 어려운 요즘 일수록 누구나 임대주택에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 공공임대주택 입주 자격을 정하는 것이지요. 입주 자격이 없다면 그 수요를 어떻게 충당할 수 있을까요? 덴마크의 경우 사회주택의 임대료 상한, 보조금 액수 등은 중앙정부에서 결정하지만 신규 건설, 공급, 위치 등은 지자체와 조합에 의해 정해집니다. 새로 사회주택을 건설할 때 건설 자금은 임차인 자본 2%, 지자체 보조금 10%, 주택조합의 모기지 대출 88%의 비율로 조달됩니다. 매년 GDP의 0.5% 정도를 사회주택 보조금으로 사용함과 동시에 사회주택에서 얻은 이익이나 이자, 모기지 원리금 상환 잔액은 전부 사회주택 기금으로 사용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주택 공급을 계속 늘려나가는 것입니다. (임병권, 강민정, 장한익, 김병국, 「유럽국가의 사회주택 현황과 지원 정책에 관한 사례연구」, 『주택금융리서치』, 2018) 결론 1. 일단 사회 전반적으로 주택, 토지 등 부동산을 재물(투자나 투기 수단)로 보지 않고 거주와 생활을 위한 공간이라는 인식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닭이냐 달걀이냐 같은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인식이 없으면 부동산 업자가 폭리를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2. 공공주택 사업은 민관 협동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부나 사회적 기업 둘 중 하나에서만 이런 일에 관심을 둔다거나 두 조직이 소통 없이 따로 논다면 공공임대주택 사업은 성공하기 힘듭니다. 3. 공공임대주택에서 나온 이익은 공공임대주택을 위해서 쓰여야 하고, 임대료는 건설 원가 수준에서 책정되어야 합니다. 재원을 안정적으로 조달하는 것과 임차인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 서로 상충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거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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