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하는 사람
학교에도 페미니즘이 필요합니다. 아래 글은 제가 4주 동안 겪었던 괴로움을 말하기 위해 쓴 것이기도 하지만, 황현산 선생이 썼듯 "고통의 시대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불행"을 듣기 위해 쓴 글이기도 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듣지 못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 "9중대 기상, 9중대 기상." 1. 스피커의 명령에 마지못해 눈을 뜬다. 지금 내 기분은 꽉 막힌 코와 가래 낀 목, 그리고 쩍 말라버린 입안과도 같다. 털어낼래야 털어낼 수 없는 이 지긋지긋함. 세면대 가득 팽팽 풀고 내뱉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온몸에 끈적하게 들러붙은 이 지옥(이하 죡)같음은 어디 가실 줄을 모른다. 훈련소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벼운 마음이었다. 입소날 아침까지 밤새 일하고 논산행 버스에 올라탔을 땐, 그야말로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리셋하고 오리라는 기대마저 있었다. 하지만, 25연대 9중대 41번 훈련병으로 존재하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훈련 자체가 힘들 건 없었다. 군대는 병든 공익과 나이든 전문연들을 어련히 봐줬다. 2년에 비하면 민망하기 그지없는 4주간의 훈련 동안, 춥지도 덥지도 않은 일년 중 최적의 시기에 (석가탄신일, 어린이날, 대통령 선거의 환상적인 위치 선정까지), 훈련병들을 편히 해주는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라인 아래 무얼 더 바랄 게 있으랴. 면제가 아닌 이상 이보다 더 쉬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참 죡 같았다. 2. 이 죡같음의 뿌리가 궁금해졌다. 이런저런 이유야 떠올랐지만 한마디로 콕 집어내기가 어려웠다. 훈련소 입소날을 돌이켜봤다. 입영심사대 건물 2층에서 군대 특유의 공기를 처음 맛보았다. 조교들의 명령에 따라 맨바닥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앞으로 별일 없으리란 걸 알면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문득,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떠올랐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독일어의 공포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야 했던 유대인들의 심정이, 그곳에 앉아 있으니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물론 육군 훈련소를 유대인 수용소에 비할 바는 아니다. 최소한 훈련소는 밥도 잘 주고,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올랐다. 동기들과 "왼발, 왼발" 발맞춰 걷고, 인류애를 잃게 만드는 군상들을 마주하며, 아침마다 연병장에 모여 (가래를 머금은 채) 복무신조를 제창할 때마다, 책에서 읽었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중에 그가 반복해서 꾸었던 꿈이 있다. 고향에 돌아와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자기들끼리 자꾸 딴 얘기를 하는 가족과 심지어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누이가 등장하는 악몽이다. 못다한 이야기를 품고 사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 라는 말이 그제야 확 와닿았다. 평소에 꿈을 꾸지 않는 나도, 군대에 있는 동안은 매일같이 꿈을 꿨다. 3. 난 이야기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면 이야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거나. 훈련 어땠냐는 질문에도, 좀 아팠다고 한두 마디 하고 말 뿐이었다. 현역도 아닌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런데 같은 시기에 훈련을 받고 온 직장 동료를 만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거기서 있었던 일들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흥분한 상태로 좔좔좔 입을 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다. 남자들도 말이 많다. 훈련병들은 한술, 아니 한솥은 더 뜬다. 생활관에서 시작되는 기초 수다부터, 이동과 휴식 중에 이어지는 틈틈 수다, 그리고 강당에서 정점을 찍는 연쇄 폭발 수다까지. 조교들이 아무리 "정숙!"을 외쳐도 3초만 있으면 누군가 슬그머니 쑥덕, 하고 만다. 그틈을 탄 전방 5미터 쑥덕, 후방 3미터 쑥덕, 모두가 쑥덕쑥덕... 이 쑥덕 파티가 쏟아내는 어마어마한 양의 데시벨과 이산화탄소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뭔 할 얘기가 그리도 많았는지. 우리는 그렇게라도 서로를 위무해야 했다. 갇힌 몸과 마음을 뻥 뚫린 입으로라도 달래줘야 했다. 전화기만 들었다 하면 (아들이 듣든 말든) 아버지 뒷말을 하던 어머니도, 그런 해방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렸을 땐 그게 참 보기 싫었는데 이젠 아픈 마음이 앞선다. 어떻게든 숨구멍을 틔워야 했던 한 인간에게 미안한 마음부터 든다. 난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억한 삶이 없을 뿐이었다. 4. 훈련소에서의 마지막 밤. 평소와 달리 불침번 대신 경계근무를 섰다. 원래 내 차례가 아니었지만 나보다 아픈 동기를 대신해 자리를 지켰다. 전우애란, 인생의 죡같은 순간을 함께할 때 생기는 서로에 대한 연민이란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를 외치는 이들이, 서로를 향해 느끼는 감정 또한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닐까. 그날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 당시 쏟아졌던 "한국 여자"들의 거대한 분노를 기억한다. 평생 보고, 듣고, 겪어야 했던 억압과 차별, 그리고 폭력의 세계를,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꾹꾹 눌러 담아두어야 했던 가슴 속 찌꺼기를, 모두가 같으면서도 제각기 다른 울분을 토하고 또 토해냈다. 나는 들었다. 악에 받친 외침을 들었다고 믿었다. 허나 온전히 듣질 못했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이를 담는 태도에 동의하지 못했다. 여성혐오를 혐오하는 태도로는 멀리 갈 수 없다고 믿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단결시키는 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울타리 바깥의 사람들을 쳐내는 접근 방식은 바꿨으면 했다. 조금만 더 전략적이길, 조금만 더 져주길 바랐다. 그땐 왜 몰랐을까. 이미 일상의 여성혐오에 질려버린 이들에게, 내 바람이 얼마나 무리한 요구였는지를. 이들에겐 아직 할 얘기가 넘치도록 남아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그저 들어줄 때라는 걸. 5. 퇴소를 앞두고 수료식 리허설을 했다. 수백명의 훈련병들이 군악 소리에 맞춰 강당을 한 바퀴 돈 뒤, 행사가 끝날 때까지 열중쉬어 자세로 자리를 지키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근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더운 날씨에, 감기 걸린 몸을 몇 시간씩 지탱하고 서 있기가 꽤나 힘들었다. 사방에서 뱉어대는 기침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심지어 어떤 간부는 군인이 기침 하나 못 참느냐고 화를 냈다. 아니 기침이 무슨 방귀도 아니고, 군대 때문에 생긴 기침을 어쩌라고. 페미니스트들의 외침도 기침 같은 건 아닐까. 몸 안의 병균을 쫓아내려는 내 몸의 필사적인 반응, 안에서 감당하지 못해 터져 나오는 그 무언가. 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했던 가래를, 목구멍까지 들어차도록 참고 또 참다가 더는 못 참고 뱉어내는 건 아닐까. 내 안에 삭혀두었던 미처 못다한 이야기부터, 사소하지만 사소할 수 없는 이야기까지 모두 다. 들어본다. 여자 이전에 한 사람을, 들어본다. 이제 겨우, 입을 뗀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다. 가시 돋친 말 뒤의 아픔을,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저 억한 심정을, 내 마음에도 담아본다. 저 살기 위한 몸부림에, 나도 힘껏 몸부림 쳐본다.
페미니즘
6
0
코멘트를 남겨주세요.

등록된 코멘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