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연' 시위를 청년들이 반대한다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 연대하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이하 전연서)’은 학내장애인권단체, ‘서울대학교 배리어프리 보장을 위한 공동행동(이하 서배공)’에서 처음 모인 학생들을 시작으로 구성된 서울대학교 내 학생 모임으로, 여러 학내 인권단위가 가맹했으며, 총 20여명이 실무진으로 참여했다. 지난 4~5월 두 달여간, 역 앞 피켓팅, 학내 서명운동, 세미나, 연대방문, 기자회견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전장연에 연대하는 시민들이 존재함을 알리고 다른 시민들을 더욱 설득하기 위해 힘써왔다. 특히 연대서명을 통해 지지의 뜻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총 1,127건의 마음이 모였다. 다만 학생단체의 성격상 지속적인 연대활동을 이어가지는 못했고, 지난 해 5월 말의 최종 기자회견을 끝으로 활동을 마무리한 상황이다. 전연서 활동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목표는 전장연 선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특히, 마치 모두가 전장연에 반대하는 것처럼 말하고 전장연에 반대하지 않는 사람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일부의 혐오선동과 달리, 전장연에 연대하고자 하는 서울대학교 학생들 그리고 시민들이 여기에 실존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도움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를 알림으로써, 예상되는 백래쉬 속에 용기내지 못했던 분들도 용기 내주시기를, 중간에서 고민하고 계셨던 분들도 전장연의 싸움을 함께 지지해주리라, 반대하시던 분들도 새로운 이야기들을 한 번 들어보고 대화와 토론의 장으로 나서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두가 전장연을 혐오하는 것처럼 묘사되는 담론 지형에서, 한 사람의 연대자가 나타남으로써 발생할 파급효과를 기대했다.   대표성: 가장 큰 고민거리 이러힌 활동의 방향 속에서 자연스레 몇 가지 고민이 촉발되었다. 가장 큰 것은 “청년/서울대학생들에 대한 대표성을 주장하는 것이 맞나” 하는 지점이었다. 과연 우리는 대표성을 가지는가? 대표성을 가진다고 해도,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옳았는가? 전자의 경우, 청년세대 – 특히 서울대 학생들의 대다수가, 전장연에 대한 비판에 동조하고 있는 것 자체는 사실이지 않나 하는 비판은,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집요하게 따라왔다 – “너희가 뭔데 서울대생을 참칭하냐?”는 비아냥부터 “그렇죠? 청년세대가 전장연을 다 반대하는 것은 아니죠?”라는 기대로 가득 찬 선배들의 질문까지. 나 역시 희망을 담아, 즉각적으로는 그에 대해 “그렇지 않은 청년/서울대학생들을 더 많이 봤다”고 답해왔지만(“더 많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내 안에서도 회의가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혹은 아니라면, 나는 그에 맞춰서 어떤 말을 해야 했을까? 결론적으로 활동을 끝낼 때까지 나는 확신을 얻어가지 못했다. 오히려 활동이 끝난 지금에야 찬찬히 기억을 돌아보면서 (그럴 기회를 주신 빠띠에 감사드린다) 나름의 답변을 찾아낸 것 같다. 왜 우리는 청년 세대의 반응에 그토록 민감할까? 이미 청년 세대가 공정이라는 아젠다를 (부당하게) 점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면 대부분 알다시피, 지금 청년 세대라고 호명되고 있는 이들 자체가 극히 협소하고 그들이 말하는 공정은 더더욱 왜곡되어 있다. 즉, 어디까지나 허상에 불과한 “청년 세대의 지지”라는 것이 공정함에 대한 시금석이 되어버렸고, 이미 왜곡되어버린 ‘공정’ 게임의 룰에서 이기기 위해 청년 세대의 지지를 소구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울어진 프레임에 갇혀버린 것이다, 우리마저도. 전연서의 활동은 그렇기에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충분히 전복적이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청년/서울대생이라는 주체가 판단권을 행사하는 게임의 룰에는 침묵하면서, 그 판단권을 가진 청년이 저들 혐오세력이 아니라 우리들 지지세력임을 강조하려고 노력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강조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 학생들”이라는 학력을 내걸고 선전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물론 그 역시 전략적 판단의 소산이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모습은 잘못이었는가? 나는 단지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작년 초,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이라는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대남이라는 납작한 기표 위에서 소거된 페미니스트 남성들의 목소리를 복원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활동이었다. 그때도 비슷한 고민을 했었다. 이대남이라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의 한계(우리의 말도 납작해져버리는)가 분명히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야 대중의 관심을 받고 담론 싸움을 벌일 수 있음이 뚜렷이 보였던 상황. 그때 결국 그럼에도 그 프레임 속으로 뛰어들어서 전복을 꾀한다는 판단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맞았다고 생각하고, 전연서의 활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프레임 안으로 걸어들어가 싸우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남은 것들: 연대의 희망 한편 전연서 활동은 서울대학교 학생공동체에도 큰 의미가 있었다. COVID-19로 모든 대면 공간이 사라지고 오로지 에브리타임이라는 익명 커뮤니티만이 남으면서, 오직 혐오만이 전체의 의견인 양 노출됐다. 이에 따라 많은 대학 공동체들은 험난한 시간을 거쳤다. 인권의 가치를 믿는 이들은 그를 드러낼 때마다 익명 뒤에 숨은 이들에게 심각한 수준의 공격을 당했고, 인권의 가치를 말하는 것에는 점점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해졌다. 다행히 COVID-19가 가라앉으며 대면 공간이 다시 복원됐지만, 오히려 그 사이 힘을 키운 혐오가 대면공간까지 지배하는 듯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이곳 서울대학교의 학생 공동체는 이 활동을 통해 몇 가지 희망을 회복했다. 각종 서명운동에서도 면박 대신 조우를 얻었고, 그러는 가운데 여전히 인권의 가치를 믿는 이들이 여전히 내 옆에 살아숨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했다. 그 조우 속에서, 대면공간에서 서로 만나 설득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으며,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혐오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얻었다. 이는 청년세대 전체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앞서도 밝힌 것처럼, 솔직히 객관적으로 “전장연을 지지하는 청년들이 더 많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전장연을 지지하는 청년들은 분명 존재하고, 그들은 연결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 전장연을 지금 지지하고 있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기다리며 설득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 역시 많다. 활동을 쉬고 있는 입장에서 뭐라 말을 얹기는 뭐하지만, 20년을 이어온 전장연 선배들의 투쟁이 분명히 그들에게 닿고 연결되는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장애인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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