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균 5주기] 산업재해 피해자로 마주한 삶
우리 부부는 자식이 태어나며 더욱 행복이 충만한 가정이 되었다. 모든 중심은 용균이었고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별 탈 없이 잘 자라는 것을 보며 너무나 행복했었다. 특별히 공부하라고 다그친 적도 없이 알아서 노력하는 편이라 내신성적만으로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덧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1년 동안 자격증도 여러 개 따놓았다. 이제 직장만 잘 얻으면 되는 일이었다. 전국을 다니며 잘 나가는 기업들 상대로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수십 번을 봤지만, 아들은 경쟁에서 밀려 매번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곁에서 괜찮다고 달래 주었지만, 아들은 점점 자존감이 낮아져 힘들어했다. 그러다 김천에서 최종 합격 연락을 받았다. 그렇지만 한 달 후 합격이 무산되었다는 비보... 운조차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서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우선 다니기로 했나 보다. 아들은 태안 서부발전 하청 한국발전기술에 입사하게 되었다.  안전장치 없는 현장에서 발견한 위험의 외주화 입사한 지 석 달 못 되어서 아들 사고 소식을 접했다. 하청 이사가 처음 만난 나에게 아들 잘못으로 사고가 났다고 했는데 뭔가 미심쩍었다. 그래서 아들이 어쩌다 사고를 당했는지 알고 싶어 사고 현장에 들어갔는데 현장은 70년대 탄광을 연상케 할 만큼 열악했다. 아주 비좁은 캐비닛 안에는 배고플 때 먹을 컵라면이 있었고 고장 난 플래시가 있었다. 입사한 지 사흘 만에 안전교육도 없이,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현장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랜턴 하나 지급받지 못한 채 어두컴컴한 현장을 개인 핸드폰 불빛으로 밝히며 1~2킬로나 되는 긴 거리를 혼자서 점검하러 다녀야 했다. 낙탄이 쌓이거나 탄 덩이가 회전체에 끼면서 불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이상 유무를 파악하는 것이 아들의 점검 업무 중 핵심이었다. 외항의 철재 구조물 속 컨베이어벨트 위에 수많은 회전체가 안전 커버도 없이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사고의 이유를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더욱 비상식적인 것은 개구부와 회전체가 일치하지 않아 머리를 개구부에 넣어야만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2인 1조는 규정에만 존재했으므로 회전체에 몸이 딸려 들어가 죽을 때까지 아무도 안전줄을 당겨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너무도 비참했다.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 사고 난 장소를 갔는데 사측은 이미 물청소로 모든 증거를 없앤 뒤였다. 그때부터였다.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이 꼭 되도록 제대로 밝힐 것을 다짐한 것이. 사람들에게 공공기관조차 현장의 안전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더 알리고 싶었다.  부르는 곳마다 연대하러 갔지만 실상은 아들의 위험한 작업장을 알리고 부당한 처우를 사회에 고발할 목적으로 다녔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산재 사망 소식은 끊임없이 들려왔고 모두 아들과 같이 안전하지 않은 현장에서 사람들이 죽었다. 아들의 피켓을 이어받아 하청에 월급도 주고 구체적 작업지시까지 하면서 안전 예산을 짜고 인력을 늘릴 권한이 있는 원청은 안전을 책임지지 않았다. 위험의 외주화로 발생하는 산업재해였다는 것이다. 업무 수칙을 더 잘 지키면 지킬수록 죽는다는 것이다. 원청은 하청을 주었으니 내 직원 아니라고 했고, 하청은 내 사업장이 아니라 현장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원하청 단절로 아무도 안전에 책임지지 않았으므로 동료들의 28번의 위험 시정 요구는 모두가 묵살시킨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사고 당사자한테 모든 잘못을 덮어씌우면 기업 입장에서 가장 피해가 없는 손쉬운 처리 방법일 것이다. 이런 부당함과 싸우기 위해 아들이 피켓을 든 이유처럼 나 또한 이어받아 싸우고 있다.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 유족들은 모두가 내가 당할지 몰랐다고 했다. 특히 위험하고 힘든 일일수록 걱정 끼치기 싫어서 부모에게 알리지 않으니 더욱 현장 상황엔 어둡기 마련이다. 하청에 재하청일수록 급속도로 위험한 현장이 증가했고 다치거나 죽는 것도 내려갈수록 더 심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유족들은 각자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모이다 보니 서로가 큰 의지가 되면서 산재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이라는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산재 피해 유족들의 바람은 하나같이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 더 이상 우리처럼 억울하게 가족을 잃는 끔찍한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수많은 죽음을 용인하는 사회 지난 7일 갑작스레 잡힌 아들에 대한 대법 재판을 하게 되었다. 정부 차원으로 이뤄진 특조위 조사에서 아들의 잘못이 아님을 낱낱이 밝힌 많은 증거가 있었기에 그대로 적용하면 원청 대표까지 처벌이 가능할 거라고 예상했다. ‘구의역 김군’ 사건도 원청을 처벌할 수 있었으니 당연히 좋은 결과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법은 판결은 원심 그대로 ‘기각’이었다. 오늘을 위해 5년 동안 열심히 싸워 왔는데 예상은 빗나갔고 결과는 참담했다. 용균이를 서부발전이 죽인 것은 맞지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기업 봐주기. 실제 감옥에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너무 부당한 판결이다. 사법 정의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어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중대재해처벌법 50인 이하 사업장 즉시 적용해야 할 이유를 재판에서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다. 원청에 사망사고의 책임이 묻지 못하면 아무도 처벌받지 못한다는 것이고 이러함은 수많은 죽음들을 용인하겠다는 것인데 국민의 생명 안전을 보호할 국가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   중대재해처벌법부터 지킬 수 있도록, 함께 여러 유족의 손을 잡고 힘을 주며 함께 했다. 마사회 문중원 기수 때도 동국제강 이동우 사건도 디엘이엔씨를 쭉 겪고 느낀 점은 기업은 기업이미지 리스크가 크면 클수록 잘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유족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대책 수립과 함께 합의를 성의 있게 협상하는 것을 봐왔다. 더 큰 성과는 시민들의 안전 의식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는 것이고 노동자 죽음이 과거에는 대부분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했지만 중대재해처벌법 이후 기업 살인이라는 인식이 크게 변한 것이다. 하지만 이편한세상 아파트를 짓는 디엘이앤씨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7번의 사고로 8명이나 죽었는데 단 한 번도 기소되지 않았다. 아마도 기업이 유족들에게 처벌불원서에 사인을 해야만 합의를 해준다고 협박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동안 죽음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던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든 취지마저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또 현재 50인 이하 사업장 유예하자는 경총의 의견을 받아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사망사고 80% 이상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함에도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 힘은 기업을 봐주기 위해 국민의 눈치를 보고 있다. 여기에 민주당도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놓고 협상하자고 나서고 있다. 이미 2년을 유예했음에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다시 2년을 더 유예해달라고 함은 앞으로도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예는 곧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 시도이기에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중차대한 일이 가장 시급한 민생임을 저들은 왜 망각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수많은 시민을 살리기 위해 내년 초 예정했던 그대로 당장 시행하길 바란다. 뒤늦은 후회는 무엇도 되돌릴 수 없으니 생명과 안전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중대재해처벌법 개악을 막는 일에 모두가 나서길 바란다.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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