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입시경쟁 교육 현장에서 한 배를 탄 청소년과 교육노동자
(부제: 청소년과 교육노동자의 인권의 상호취약성과 상호의존성) '고양 시민 학생인권 인식도 조사 결과 발표 및 학생 인권 보장을 위한 시민 토론회' (고양학생자치연구소 가론)(2023.11.18.토요일) 에 기고한 토론문 입니다.  1. 왜 ‘교권 강화’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걸까? 지난 7월 서이초 교사가 학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후, 고인의 사망 원인을 둘러싸고 일부 학부모의 악성 민원과 괴롭힘에 대한 논란이 거세졌다. 대중은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에게 문제 제기하는 일 자체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고, 이에 언론도 함께 일부 학생과 학부모의 비도덕적 또는 저항적이거나 반사회적일 수 있는 행동까지도 악마화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여당과 대통령실은 고인의 사망 원인을 공교육 범위를 벗어난 킬러 문항으로 형성된 사교육 이권 카르텔 탓으로 돌리는 동시에, 좌파 교육감들이 학생인권조례를 내세워 학생의 인권만 강조하다가 수많은 교사의 인권을 사지로 내몰고 교권을 위축시킨 것 1)이라는 색깔론과 이념 갈등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8월 1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인권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규칙과 질서를 위한 법 집행을 못 하게 막으면 오히려 국민의 인권이 침해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인권을 마치 이해 당사자 간의 충돌 문제처럼 보는 왜곡된 관점을 보여준다. 이어서 그는 사법적 행정 권력으로서의 교권을 강조했다. “교권은 학교의 규칙을 제대로 지키게 하는 것이고, 교권이 확립되지 않으면 다른 학생의 인권도 학습권도 절대 보장될 수 없다”, “인권을 이유로 규칙을 위반하는 학생을 방치하는 것은 인권을 이유로 사회질서를 해치는 범법행위를 방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라고 국가 권력의 남용을 정당화하면서 “2학기부터 당장 (교권 확립을 위한) 고시를 제정하라” 2)는 직접적인 지시를 내렸다. 8월 17일, 교육부가 발표한 “교원 학생생활지도 고시안”은 불명확하고 자의적인 기준으로 학생과 학부모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너무나 많다. 이는 학생에게 방어할 기회조차 없이 교사의 자의적 판단으로 바로 교실에서 분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이며 폭력적인 교실 문화를 양산할 수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게다가 학생에 대한 (물리적) 제지, 분리, 물품의 조사와 보관과 같은 기본권 제한 내용과 간접 체벌을 공식화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법성이 분명하다. 이러한 정부의 인권 침해적인 행정 법규는 어떠한 민주적 지원 체계와 예산을 비롯한 인력과 제도조차 없이 무방비로 학교 현장을 혼란과 갈등 상황으로 내몰고 있었다. 각자도생인 교육 현장에서 인권 감수성을 가진 교사들 또한 무기력하기만 하다. ‘내가 여기서 말해봤자 뭐가 바뀌겠어? 어차피 (관리자의) 답은 정해져 있는데…’라고 그저 문제를 방관하기에는 교사가 너무나도 과도한 독박 업무와 성과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내가 임용 경쟁시험을 통과해 14년 동안 겪었던 교사 사회는 너무나도 공고하게 승진제도를 기반으로 한 노동 착취 관계와 하향식(top-down) 관료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개인이 이해관계와 보신주의로 뭉쳐진 조직을 상대로 직접 저항하고 양심의 자유를 운운하기에는 한없이 너무나 약하다. 또한 백인,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 정규직 중심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Normal Family Ideology)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교사 사이에서, 심지어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크게 부딪히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교권이란 미명 하의 ‘특권’을 성찰하는 일이 개인적으로도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권의 포기는, 곧 정규직 교사(중간관리자) 사회에서의 낙인, 고립에 의한 불안과 고통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교권 논쟁이 학생 인권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것이 부당한 이유 대체 ‘교권’이란 무엇인가? 보통 교권은 교사를 위하는 것, 존경하는 것으로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현장 교사 중에서 ‘교사-학생-양육자’의 위계적 관계와 불평등성을 지적하거나 성찰하는 이들이 매우 드물어 보인다. 일상에서 “교사의 말에 학생과 양육자가 순응해야 하며, 교사가 학생에게 무언가를 못하게 하는 일(체벌 및 반성문 강요 금지 등) 또는 학생과 보호자가 교사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일 자체가 교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 3)를 매우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정작 ‘교권’의 실체는 임의적이고 불명확하고, 현장에서 제대로 토론되지 않는다. 교육 당사자조차도 교권을 학생 및 학부모와의 갈등 상황과 맥락을 지우고 이해관계에 맞춰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교육 3주체인 학생, 교사, 학부모의 관계를 분열시키고 불신하게 만든다. 실제로 ‘교권’은 현장 교사에게 동료와 동료 시민과 돌봄으로 연결될 기회를 빼앗아 버리기도 한다. 고도화된 입시경쟁 교육 안에서 누구나 생명보다 물질과 이윤이 최우선으로 여겨지는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단지 주류 기득권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착취와 희생, 차별을 겪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존엄한 시민 주체(사회적이면서 정치적 존재)로서의 평등한 대화와 토론, 돌봄을 체화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는 전혀 보장받을 수가 없다. 교실에서 민주적인 제도와 문화가 싹을 틔우고 풍성하게 연결되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획일적이고 비인간적인 경쟁 교육 환경에서 ‘교권’은 국가가 공인하는 체벌과 폭력을 자행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이미 기존의 학교생활 규정에도 여전히 명시되어 있다. 소위 ‘학생답지 못한’, ‘학생 생활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교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을 때, 공공연하게 교실과 학교에서 ‘문제 학생’으로 낙인된다. 교실 밖으로 바로 분리되어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받고, 자기 의사를 스스로 표현할 기회조차 없이 진술서와 반성문을 쓰도록 압력을 받는다. ‘정당한 교육활동’이라는 명목으로 간접 체벌과 정서적 학대가 공공연하게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을 정당화 해왔다. 여당과 대통령실, 교사들이 대대적으로 교권 강화를 표방하는 가운데, 대중도 함께 나서서 교권 강화를 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 또한 (청소년·노동자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기득권에게 더욱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주의와 능력주의, 성공 신화를 내면화한 노동자 계급일수록, 무한 시험 경쟁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경험하다 보니, 고소득 상위 계급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상위 가치로 여기며 욕망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개인이 공정한 선발 시험을 통해 상위 계층으로 갈 수 있는 자격증과 졸업장을 갖추고, 높은 스펙(학점, 점수, 해외 연수 등)을 쌓아서 취업 선발 시험에 통과하도록 하며, 이성애 결혼과 동시에 정상 가족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게 하며 기존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 모든 과정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안정적으로 실행시켜줄, 국가와 사회의 의무와 책임을 대신해서 처리해 줄 중간관리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가 가속화 하는 생태학살과 무한 자본증식을 추구하는 자본가와 그들의 권한을 위임받은 관리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지우고 은폐한다. 갈등과 폭력의 구조적 원인인 인종과 성별, 계급 불평등이 애초에 없는 것처럼 여기며, 개인이 범법행위를 저지른 사회적 배경과 맥락을 지우며, 사회규범을 어긴 개인을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악마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동시에 정부와 국가가 적극적 평화 추구와 불평등을 철폐하는 사회적 책임을 방관하고 개인에게 미루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교권에 대한 자성과 비판이 더욱 후퇴하고 있다. 3. 교사의 관점에서 바라본 '교권'의 개념, 그리고 교사의 노동권 보장의 필요성 현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교권’은 교사가 학생에게 학교 규칙을 제대로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때 교사와 학생에게 기본적으로 강제되고 있는 역할에 대해 분석해보자. 교사는 ‘교권’이라는 권력과 권한을 가진 중간 ‘관리자’의 역할을 수행 요구받는다. 학생에게 학습 의무를 부과하고,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규율과 규범을 지키도록 관리 및 통제하고 관리하도록 강제한다. 동시에 교사에게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강하게 부과하여 실질적인 노동권과 정치기본권을 심각하게 탄압하고 있다. 교사를 포함한 교육노동자들은 교육정책의 맹목적인 대상이자 현장 실행자로 전락한다. 반면에, 아동 또는 청소년인 학생은 나이를 이유로 ‘미성숙한 존재’로 대상화된다. 그렇기에 학생은 학교라는 획일적 공간 안에서 교사의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국민이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학교 자치에 참여할 권리, 노동권과 (투표권을 포함한) 정치권조차 박탈당한다. 교육할 대상으로서 교사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고, 공부할 의무를 갖는 존재 4)로 취급받는다. 이를 통해 기존의 사회체제의 이념과 체제의 규범을 내면화하도록 요구받는다. 수만 명에 달하는 교사들은 거리에 나와 고인을 추모하면서 생존권을 주장했지만, 동시에 노동권과 정치기본권을 위한 투쟁을 위한 목소리를 앞장서서 억압하기도 했다. 특히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 집회에서는 집회 주체들이 나서서 정치 중립적 성격을 표명하고, 질서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선전물 배부를 가로막기도 하고, 사상과 이념, 노동조합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강요했다. 특히 이날, 정규직 교사 중심의 노조들은 검은 점으로 거리에 선 개개인의 교사로 ‘교권 보호를 위한 아동복지법 개정’을 앞다퉈 촉구했다. 5) 비록 이 개정안이 학생과 학부모의 악성 민원으로 겪는 교사의 고통과 고충을 최대한 줄이려는 취지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교사의 정당한 교육활동에 관한 행위는 아동 학대로 보지 않는 ‘면책’ 입법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교사들의 움직임이 교사의 인권과 노동권을 보장하도록 하는 운동의 흐름과 연대하며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을까? 아동 학대를 부추기는 한국 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하고 있을까?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자본주의 사회체제와 입시경쟁 교육체제, 차별과 혐오 문화에 균열을 만들어 내고 있을까? 나는 교육 현장에서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느낀다. 그 근거로 ‘교권강화’를 표방한 경기도 교육청의 무리한 학생인권조례 개악 시도와 각 학교의 학칙 개정 압박이 더해지고 있으며, 청소년 활동 예산은 전액 삭감되었다. 게다가 교육 개혁을 외치는 윤석열 정부는 저출생과 학령기 인구 감소를 빌미로 한 교육 예산 축소로 교원정원을 감축할 계획을 발표했다. 또한, 교원평가체제를 전환하여 승진·인사·임금과 연계한 직무성과급제로의 개편으로 불안정 교육노동과 교원구조조정을 본격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6) "한국 사회는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돌봄 책임을 가족, 특히 여성(어머니를 비롯한 양육자)에게 독점적으로 지운다. 이는 가족(어머니)에게 커다란 경제적·심리적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그만큼의 독점적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에서 어린이·청소년들은 학대를 당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두려워하며 가족 관계에 매달리게 된다. 이는 공공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누리기 어렵게 하며, 삶의 폭을 제한하여 학대 같은 인권침해에 대처할 수 있는 자원과 역량도 줄어들게 만든다." 7)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 9월 17일, 아동 관련 학회 전문가들은 “교육 현장을 아동복지법의 아동 학대 대상에서 아예 제외시킬 수 없다”라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해당 아동복지법 조항 개정이 아동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하고, 교사의 교육활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우리 사회의 전반적 인권 보호의 체계를 후퇴시킬 수 있다고 강하게 비판 8)했다. 4. 교사의 노동권과 학생인권과의 연관성 이 교권 논의에서도 소외되고 배제된 존재들이 있다. 학교 안팎에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림자 취급을 받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며, 시설에 거주하거나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장애인’들이며, ‘교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교육노동자’ 등 무수한 사회적 약자들이다. 실제로 교육활동과 관련된 청소, 급식, 돌봄을 비롯한 필수노동과 행정업무를 비롯해 시간제 계약 강사로 노동하는 교육노동자 중에는 저소득층, 저학력, 여성, 고령의 노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은 ‘교권’과 동시에 생존권, 차별받지 않을 권리, 노조할 권리 등을 포함한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노동시간 착취를 당하며 아픈 몸으로 일하다가 노동 시장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는 결론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부터 교사는 교권이라는 ‘특권’을 가진 노동자였다. 동시에 지식전달자이자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강요받았다. 그런데 자본주의와 능력주의, 무한 경쟁 입시교육 체제 내에서 가속화되는 불평등과 양극화는 교사에게 ‘공정한 평가와 훈육’을 하도록 강제하면서, 죽음의 노동 환경 안에서 각자도생으로 절박하게 버틸 수밖에 없는, 심지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증을 호소하게 만든다. 지금 당장, 차별받지 않을 권리, 인권, 노동권, 정치기본권의 보장이 시급하고 절박하다. 또한,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돌봄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 가족을 벗어나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 곧 적절한 주거와 다양한 관계가 보장되어야 학대 문제를 더는 감추지 않고 다른 삶을 모색할 수 있다." 9) 청소년과 교육노동자의 인권은 상호취약성을 가지고 상호의존하고 있다. 죽음의 입시경쟁 교육 현장에서 청소년과 비정규직 여성 교육노동자를 비롯한 교육노동자들은 한 배에 탄 것이다. 10) (끝) 1) <서이초 교사 사망에도 헛소리를 하는 대통령실과 여당>, 굿모닝 충청, (2023.07.23.) 2) <[현장영상] '서이초 교사 사망' 2주 만에...윤 대통령 "교권확립 고시 제정하라" >, JTBC, (2023.07.31.) 3 )공현, <[들을 짓는 사람+들] 정말로 학생이 교육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있나>, 인권교육센터 들, (2023.10.10.) (직접인용) 4) 공현, <[들을 짓는 사람+들] 정말로 학생이 교육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있나>, 인권교육센터 들, (2023.10.10.) (직접인용) 5) <국회 앞에 모인 교사 10만명…"교권보호 4법은 미봉책">, 뉴시스, (2023.10.28.) 6) 최덕현, <윤석열 정권의 교육개악, 어디로 향할 것인가?>, 교육노동자현장실천, (2023.10.27.) 7)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미안하다는 말로는 아동학대가 해결되지 않는다: 어린이·청소년 삶의 사회화가 필요한 이유”, 책<바로 지금,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2023), p.63 8) <아동학회들 "아동-교사 권리 충돌 아냐"…아동학대법 개정 우려>, 연합뉴스, (2023.09.17.) 9)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미안하다는 말로는 아동학대가 해결되지 않는다: 어린이·청소년 삶의 사회화가 필요한 이유”, 책<바로 지금,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2023), p.64 (직접인용) 10)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여성’과 ‘청소년’은 닮은꼴, 한 배에 탔다: 여학생의 ‘우수함’은 차별의 결과일까?”, 책<바로 지금,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2023), p.4
보란
1,258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다. -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인권, 노동권, 정치기본권이 필요하다.
서울 S 초등학교 교사가 숨을 거둔 지 100일이 지났다. 학생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여겼던 1학년 담임이자 1년 차 신규교사였던 그는 여름방학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모든 자원이 집중된 부유한 도심지의 학교 안에서 고인의 고통을 덜어줄 지원체계가 전혀 없었던 것일까? 7월 18일 이후 부조리한 교육 현장을 바꾸지 못했음을 성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학교의 벽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벽은 개개인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애도의 공간이 되었다. 무수한 포스트잇을 마주한 채 눈물짓는 이들 옆에서 필자 또한 오랫동안 쌓아온 체념과 무기력증을 성찰했다.   그들은 거리에서 모였다가 검은 점으로 흩어졌고 또다시 움직여 커다란 검은 물결을 일으켰다. 고인이 온전히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힘겨운 고통에 다가가며,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고, 시민들과 함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무려 7명의 교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지난 10일, 경찰은 고인의 사망 경위 수사 과정에서 범죄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는 공식 발표를 했다.   고인의 죽음은 개인의 극단적 선택으로만 볼 수 없다. 이는 분명히 사회적 고통에서 비롯된, 사회적 타살이었다. 취약한 위치에 놓인 교사가 노동 현장에서 고립되었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일자리와 삶의 질이 양극화된 현실 속에서 노동은 소득의 유일한 수단이다. 직업 서열이 경제적 사회적 계급을 결정하고 불평등한 상호 관계 속에서 개인의 자존감과 더불어 삶의 존엄성이 수시로 침해받기가 쉽다. 동시에 개인의 풍부한 삶의 경험은 노동 현장에서 끊임없이 ‘성과 및 결과’로만 평가받는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에서 생존과 노동은 너무나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노동자가 사회적 안전망 및 돌봄의 공백 속에 위치할 때, 그가 겪는 소외와 고통은 정량적인 수치로만 납작하게 표시될 뿐이다. 동시에 정부와 국가는 이 고통을 개인의 책임에서 비롯된 특수한 사례로 여기려고만 한다. 게다가 개인이 노력을 통해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슈퍼맨’ 서사까지 더해지면 어느새 정부와 국가의 사회적 책임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해진다.   교사의 죽음을 초래한 원인에 대한 분석이 토론장 바깥으로 쉽게 밀려나 버렸다. 언론은 교사를 향한 무분별한 악성 민원과 아동학대 고발에만 초점을 맞춰 보도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교육부도 비도덕적인 학생과 양육자의 가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안을 급하게 추진했다. 학생과 양육자의 의무와 책임 강화를 명시한 법제도, 교사의 교권 강화라는 명목으로 학생 인권 침해를 조장하는 생활지도 고시안, 교권 관련 법률지원 및 치유 상담 지원 제도 등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 토론장 속에서 정작 학교 교육 당사자의 목소리는 소외되고 심지어 배제되고 있었다. 특히, 지난 8월 8일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안) 마련을 위한 포럼’과 8월 10일 ‘교권회복 및 보호를 위한 교육부-국가교육위원회 공동주최 토론회’에서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발제자와 청중의 입에서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과 악의적인 비난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 속에서 그 누구도 발언을 제지하지 않고 구성원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심지어 쉬는 시간에 발제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현장 교사를 교육부 직원이 물리적으로 제지하고 포럼장에서 끌고 나갔다.* 정부와 교육부는 학교현장 ‘교육’이 삶 대신 죽음을 양산하는 시스템이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교육 당사자인 학생 및 현장 노동자와 함께 원론적으로 고민하고 논의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 그로 인해 그들의 공론장은 비민주적이었으며 폭력적인 인권 침해가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논의를 되돌려 원점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양육자와 학생의 악성 민원을 양산하는 사회적 구조부터 성찰해야 한다. 개인에게 감당하지 못할 사회적 책임을 사회에게 묻기보다는, 다른 개인에게 더 큰 책임을 묻는 것으로 모든 갈등과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는 의도가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무한 경쟁 사회에서 개인은 오랜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 토론과 숙의를 힘겹게 여기기 쉽다. 외부적 개입이나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겪을 위험과 손해를 감당하는 것조차 극도로 꺼릴 수밖에 없다. 양육자도 교사도, 학생이 원하는 좋은 삶과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눌 여유를 전혀 갖지 못한다. 성적보다는 타인에게 존중받는 일, 더 나아가 교우관계, 학교 내의 다양한 소통에 신경을 쓸 여력조차 없다. 좋은 삶을 위한 연대보다는 나 자신만, 우리 가족만 잘살면 된다는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를 선택하는 것이 더 높은 지위와 소득을 획득하는데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민주국가 교육과정의 목표에서 교육은 가정, 경제, 문화적 배경과 관계없이 개인이 사회관계를 맺으며 일상적인 연대를 통해서 민주시민 역량을 체득하고 실천해나가는 현장이다. 하지만 교육 구성원들이 지향하고 바라는 ‘교육’의 모습은 너무나 양극화되어있다. 권력 위계로 기울어진 논의를 평등하게 바꾸려면, 더욱 다양한 위치성을 지닌 구성원들이 목소리를 촘촘하게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개인은 사회적 관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개인이 정부 및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면서 각자도생의 상황에 적응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사회적 연대를 통해 문제 해결하는 대신에 적극적 또는 극단적 자기 계발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여유를 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오로지 생존을 보장하는 물질적 기반(높은 성적, 학벌, 전문직, 부동산 획득 등)을 축적하는데 골몰할 수밖에 없다. 공교육은 개인의 성취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비 능력적 요인(가족 배경, 사회적 경제적 계급 등)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차별 기제를 은폐한다. 이는 사회 구성원 스스로 ‘사회적 존재’임을 부정하게 하며 불평등한 생산(노동) 관계에 침묵하게 만든다. 기존 체제 강화를 통한 소득 안정을 확보하고자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보장하는 것에만 매달리게 만든다.   먼저, 개인이 평생에 걸쳐 촘촘하게 겪는 ‘평가 집착적인’, ‘고부담’ 시험 문화에 대한 사회적인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혈연,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은 무한 경쟁 행위의 주체로 동원된 지 오래되었다. 차별과 불평등이 공기처럼 퍼진 한국 사회 안에서 ‘수능(대학입시) 제도’는 신분제적인 직업 위계를 결정지을 수 있는 공신력을 발휘한다. (실제 수능 날 오전에는 교통 체계를 비롯한 모든 일상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믿기 힘든 광경이 벌어진다.) 일 년에 한 번 치러지는 수능과 대입을 위해 가족의 배경과 자원이 장기간에 걸쳐 총동원되고, 경쟁 속에서 개인의 실패가 곧 가족의 불명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온갖 갈등과 사건, 폭력과 불평등에 연루되면서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교사도 존엄한 삶을 보장받는 것은 너무나 불가능하다. 1986년 1월 15일 새벽, 한 중학교 3학년 학생이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난 그 성적 순위라는 올가미에 들어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삶에 경멸을 느낀다’. 여성 청소년이 외친 이 말은 1989년 5월 28일에 결성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선언문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그리고 교사들은 학교 교육 현장의 민주화를 위한 일상적 연대와 역량 강화를 지향하였고, 학생과 양육자, 모든 노동자가 힘을 모아서 비폭력 저항으로 국가의 비인간적인 억압과 차별에 대한 치열하게 맞섰다.   경쟁은 능력주의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능력주의는 개인이 노력해 만들어 낸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재화(지위)를 보상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는 사회의 신념체계이다. 이 논리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 경쟁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시험/평가 절차의 공정함’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특히 경쟁의 공정성은 현재 사회구조와 체제를 정당화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요구된다. 이로 인해 더더욱 학생과 교육 노동자가 겪는 차별과 취약한 현실은 당사자의 목소리로 제대로 나오지 못한다. 게다가 계급 차별을 없애는 복지와 소득 재분배조차 공정하지 못하다고(역차별이라고) 여긴다. 이뿐만 아니라 인권 침해와 차별을 겪고 있는 당사자가 자신과 동료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품고 약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기점으로 불평등과 양극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재난 대응 시스템은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사람들은 소외 및 낙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신자유주의와 긴밀하게 결탁하여 대기업, 초국적(글로벌)기업, 플랫폼 기업 등이 코로나19라는 기후 재난을 이윤 축적의 기회로 전유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조력하였다. 비정규직, 간접고용, 특수고용 등의 고용 유연화를 통해서 말이다. 정부와 국가 또한 경제 성장이라는 명목하에 험난하고 위험한 노동 환경에 노동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차별에 침묵하며 노동을 착취했다. 동시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부정적인 편견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발언을 통해 구성원 간의 분열을 유도한다. 실제 현 정부는 고용 불안과 돌봄 공백에 있어 취약한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노골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동시에 돌봄, 복지, 의료, 교육, 교통, 에너지 등 공공서비스에 대한 민영화를 강행하고 있다.   교사 또한 능력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할 의지를 갖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학교는 교육 본연의 목적으로부터 소외되고 수단화되어, 혈연가족의 계급 세습을 위한 진학과 취업 기능에 충실할 뿐이다. 게다가 교육개혁을 외치는 윤석열 정부는 저출생과 학령기 인구 감소를 빌미로 한 교육예산 축소로 교원정원을 감축할 계획을 발표했다. 교원평가체제를 전환하여 승진·인사·임금과 연계한 직무성과급제로의 개편으로 불안정 교육노동과 교원구조조정을 본격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 감축은 지방교육자치 통제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지난 10일에 발표한 ‘2028년 대입제도 개편안’은 통합형, 융합형 수능 과목 체계 개편과 수능 심화 수학 개설, 고교 내신을 기존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바꾸고 상대평가를 병기하는 등의 큰 변화를 예고했다. 사교육 확대와 경쟁과 불평등을 심화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난 개혁(아닌 개악)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계와 현장 교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시행을 앞두고 학교 현장에 대혼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을 둘러싼 복잡하고 여러 단계의 논의가 소거된 채 정부는 ‘교권 회복과 공교육 정상화’요구를 ‘생활지도 고시안’ 발표로 입막음하려 했다. 이는 불평등한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교사의 (학생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권위 세우기 시도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고시안 예시를 들면 학생 소지품 압수, 문제행동 학생 교실 분리 등 학생 인권 침해를 교사의 ‘정당한 교육 행위’로 정당화하고 있다. 듣기와 상호소통의 책임이 간과된 권위와 권리인 ‘교육할 권리’와 ‘학습할 권리’를 보장하자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동료 시민인 학생과 양육자와의 연대를 외면하면서, 인권 침해적인 ‘낙인’을 발행할 권리를 당연하게 여길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교권’이란 용어에 차마 담기지 못한 중요한 생명의 존엄과 보편적 권리의 가치를 한없이 상상하고 염원할 수는 없을까?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한 학생과 양육자를 ‘능력’이 부족하다는 탓을 들어 제2의 ‘김용균’처럼 살아갈 가능성을 용인하는 일을 지속할 수 없다. 정부와 국가가 ‘기본적 시민권을 실현할 권리’와 더불어 ‘소득’, ‘노동권’, ‘정치기본권’을 보편적으로 보장하도록 투쟁하려면, 교사 스스로도 ‘교권’의 위계성과 특권을 해체해야 한다. 학교가 오로지 특권층이 전유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모두가 ‘실질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고 차별받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경험하는 시공간’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교사의 비통한 죽음은 불평등과 부정의, 그리고 정부와 국가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맥락 안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척박하고 위태로운 기반에서 독박 돌봄 노동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교사의 노동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논의에서 계속 멈춰있을 수 없다. 물질 만능주의, 능력주의, 개발(추출)주의, 생태 학살이 만연한 폭력적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을 꿈꾸는, 동료 노동자와 시민의 신념과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논의로 크게 확장되어야 할 때이다. (끝)   각주 *<학생인권조례가 일진회 구성 권리? 교육부 포럼 ‘황당’ 발제- [현장] “거짓말 마라 항의한 여교사, 교육부 직원들에게 끌려 나가>, 오마이뉴스,(2023.08.09.) ** 최덕현 (교육노동자 현장실천) ‘윤석열 정권의 교육개악, 어디로 향할 것인가’ (2023.10.27.) *** 희음 (멸종반란 한국), 이 토론문을 읽고 조언해준 말 (2023.10.26.)   참고문헌 1. 김진 (교육노동자 현장실천) ‘사회적 타살, 윤석열식 해법은 틀렸다!’ (2023.9.4.) 2. 이경숙(2020), <시험/평가체제 속 인간과 교육받을 권리>, 《능력주의와 불평등》, 교육공동체 벗, pp.34~62 3. 정용주(2020), <현수는 개인의 능력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능력주의와 불평등》, 교육공동체 벗, pp.63~92
교육 공공성
·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