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좋은 일인 거 아는데 여유가 없어요 - 공화주의를 위한 기본적인 물질 보장 [처음 만나는 공화주의]

202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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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사회를 위한 대안을 배달해 드립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에서는 우리나라를 민주공화국이라 설명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공화’에 대한 개념이 중요하지만, 민주에 비해 공화를 다룬 글은 많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화‘. 창작그룹 ’성찰과성장‘은 [처음 만나는 공화주의] 연재를 통해 ’공화주의‘에 대해 쉽게 풀어보고자 한다.


민주적 공화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3가지 요소가 강조된다. ▲적극적인 시민 참여 ▲기본적인 물질적 보장을 통한 민주적 평등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이번 4편에서는 민주적 공화주의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기본적인 물질적 보장’에 대해 탐구해본다.

고상한 일에 시간 쓸 여유

평일 내내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는 30대 직장인 조 씨가 있다. 그에게 공동선을 위해 “구청에서 정책 토론회가 열리는 데 같이 가볼래요?”라고 제안했다. 과연 조 씨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런 고상한 일에 시간 낼 여유가 어디 있느냐는 표정과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주중에 퇴근하고 들어오면 밤 9시예요. 그나마 주말은 오롯이 저를 위해 쓰고 싶고요. 남는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게임을 하며 쉬고 싶어요.”


성찰과성장은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이 경제적 불평등 해소와 새로운 경제체제 구상에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생계를 위해 온종일 일하고 주말에는 휴식을 원하는 사람에게 더 나은 사회(공동선)를 위해 논의하고 고민해보자는 권유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로서는 이러한 제안이 현실과 동떨어진 무의미한 외침으로 여겨질 수 있다. 생계가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공동선에 대한 고민이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생계 걱정이 해소되어야만, 개인을 넘어서 사회 전체를 위한 고민을 할 여유가 생긴다.


▲ 생계 노동에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고도 공동선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을까? Ⓒ성찰과성장

실제로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회나 주민자치회 참여자를 보면 상대적으로 개인 시간이 많은 가정주부나 은퇴한 장년이 많으며 생활 전선에 있는 청년이나 중년 남성의 참여율은 저조하다. 전국 960개 주민자치회 위원의 평균 연령은 58세이며, 20대 위원이 단 한 명도 없는 자치회는 839개, 무려 87%(!)에 이른다. (2021 이은주 의원)


지난 23년 11월, 한국은행은 우리나라가 경제 침체 국면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우리의 삶은 항상 힘들었던 것 같지만, 질적, 양적 데이터는 우리나라의 엄청난 성장을 입증했다(2021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그런데 한국은행이 공식적으로 이제 경제 ‘둔화’를 넘어 경제 ‘침체’에 들어섰다고 인정한 것이다. 여기에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 23년 3분기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소득 5분위 기준 1분위(하위 20%)의 소득은 전년동기대비 감소하였으며, 2~3분위의 소득은 증가하였으나 소득증가율이 물가 상승률(3.1%)을 밑돌았다. 이는 가계소득 하위 60%의 실질소득이 감소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1분위의 가계소득은 112.2만 원, 가계지출은 123.7만 원으로 적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1분위의 적자상태는 국가통계포털에서 데이터 확인이 가능한 2003년부터 매년 보이는 현상이다. 이는 하위 20%가 생계를 위해 빚을 지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상위 40%의 실질소득은 증가했는데 이는 국민연금, 기초연금 등 물가에 연동되어 지급되는 연금 수혜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받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경제적 상황과 관계없이 다양한 계층의 만남이 필요하다. Ⓒ성찰과성장

공화주의는 공허한 이상이 아니다. 우리 삶에 맞닿을 때 공동체의 운영 원칙으로서 힘이 생긴다. 이 원칙을 현실화시키는 힘은 다양한 계층 간의 만남과 대화에서 나온다. 이러한 계층은 기득권층 뿐만 아니라, 생계를 위해 일상에서 분투하는 직장인, 자영업자 그리고 사회적 약자로 여겨지는 장애인, 여성, 노인, 아동, 이민자, 저소득층까지 다양하다. 다양한 계층이 어떻게 만날 수 있냐고? 방법은 간단하다. 이들이 만날 수 있는 시간과 재정적 여건을 만들어 주면 된다.


하지만 재정적 부담이 덜한 부유층과 달리 소시민에게는 재정적 지원이 필수다. 구성원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재정적 자원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경제적 여유를 통해 시간적 여유까지 함께 제공함으로써, 공동선을 향한 참여와 이바지를 기대할 수 있다.



사회적 노동을 인정하는 참여소득 그리고 그 너머를 상상하며

사회 기여를 위한 시간과 재정적 여유를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은 ‘참여소득’이다. 기본소득이 모든 이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를 보장하여 사회적 최저선을 끌어올리기 위한 제도라면, 참여소득은 교육 참여, 봉사, 돌봄, 직업 훈련과 같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원하는 제도이다. 1990년대 영국 경제학자 앤서니 앳킨슨(Anthony Barnes Atkinson)이 처음 제안한 참여소득은 사회적 기여와 의무에 중점을 두고 있다.


비록 금액적으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참여소득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실현되고 있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공동선을 위한 회의 참여 시 지급되는 회의참석비(예: 청년네트워크, 주민자치회, 참여예산위원)이다. 또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실업자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월 30만 원 정도의 ‘훈련 장려금’과 훈련비가 지급된다. 아이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가정에는 최대 20만 원의 가정양육수당과 최대 70만 원의 부모급여가 제공된다. 사회적 기업・마을기업・사회적 협동조합과 같은 사회적 경제 조직에 대한 각종 지원금, 일반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노인이나 장애인을 위한 공공일자리도 역시 참여소득의 일환이다.


참여소득 제도는 시민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공동선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시간과 재정적 여유를 부분적으로나마 제공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현 단계에서 참여소득은 여전히 보조적인 수입원에 불과하다. 마치 봉사활동을 하고 소정의 교통비를 받는 것과 유사하다.


현재의 참여소득제도는 결함도 가지고 있다. 현재 시행 중인 대부분의 참여소득이 중앙정부와 지자체 관료의 행정력에 의해 결정된다. 시민과 공론을 통해 함께 결정한 소득이 아니기 때문에 그 내용이 참여소득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지 논란도 있고, 또한 참여소득의 존폐가 전적으로 행정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문제도 있다.


▲ 부유층과 빈곤층의 투표 참여 의향은 3배에 달한다. Ⓒ성찰과성장

2018년 한겨레 신문의 지방선거 국민 의식 조사에 따르면, 경제적 상황에 따른 최상위 계층과 최하위 계층 간 투표 의향 차이를 살펴보니 최대 3배 격차를 보였다. 이는 경제적 여유가 정치 참여도에 영향을 미침을 시사한다. 해당 조사는 투표율 향상의 장애물로 주거 불안정성과 경제적 불평등을 지목했다. 경제적 여건이 열악할수록 선거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지역 사회 내 네트워크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17대부터 21대 국회에서 보좌관으로 활동한 손낙구는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를 통해 부유한 지역일수록 투표율이 높다는 사실을 데이터로 입증했다.


소득 양극화는 공화주의에 큰 걸림돌이지만 문제는 점점 더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계층 간 이동의 가능성, 즉 ‘사다리’의 격차는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소득 양극화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만능열쇠 같은 답을 내놓긴 어렵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소득의 책임을 오로지 개인에게만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개인의 소득 불안정성을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하고 포괄적인 소득 보장 체계의 마련할 수 있다면 한층 더 공화주의에 다가설 수 있다.


▲ 각자도생 사회에도 희망은 있다. Ⓒ성찰과성장

과도한 경쟁, 불안정한 노동 시장, 예고된 장기 경제 불황, 우리는 대한민국이 민주적이지도, 공화적이지도 않은 각자도생 사회로 무너지는 걸 경험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인공지능(AI)이 촉발한 노동 시장의 변혁을 몸소 경험하고 있으며, 이는 경제 침체와 함께 고용 축소라는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기존에 유지되던 일자리도 점차 불안정한 형태, 예를 들어 하청 노동이나 플랫폼 기반 노동으로 전환되는 추세다. 개인이 가계 경제를 전적으로 부담하는 현재 구조를 넘어, 기존 복지 제도 외에도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사회적 노동에 대한 인정이 필요한 때다. 사회 참여에 대한 소득 보장은 개인을 넘어, 공화주의 실현을 위한 필수 요소임을 잊지 말자.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대안을 배달해 드립니다" - 창작그룹 성찰과성장
글 작성 ・ 편집 : 김설, 박배민, 신동주
(성찰과성장.com)


참고 자료

  • 이상준, “한국은 이미 참여소득 강국, 그러나…”, 프레시안, 2020.12.02.
  • 이상민, “2023년 윤 정부 재정위기…‘눈 떠보니 후진국’”, 한겨레, 23. 11. 5.
  • 정의정책연구소, “참여소득, 기본소득으로의 단계인가 사회적 경제의 실현인가”, 2020. 12. 01.
  • 이은주, 전국 주민자치회 현황 전수 조사, 2021
  • 통계청, ‘2023년 3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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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정치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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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님, 오동운 님, jay님, 생생이 님! 

성찰과성장 박배민입니다 :)
관심 갖고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모든 일에서 '먹고사니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요즘, 저희도 여러모로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

시민참여의 증대가 민주주의의 심화에 기여한다는 인식에 따라 "사회적 노동을 인정하는 참여소득 그리고 그 너머를 상상"한다는 것을 반기게 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많아지는 세상을 꿈꾸게 됩니다.

<2018년 한겨레 신문의 지방선거 국민 의식 조사에 따르면, 경제적 상황에 따른 최상위 계층과 최하위 계층 간 투표 의향 차이를 살펴보니 최대 3배 격차를 보였다. 이는 경제적 여유가 정치 참여도에 영향을 미침을 시사한다. 해당 조사는 투표율 향상의 장애물로 주거 불안정성과 경제적 불평등을 지목했다.>는 결과가 놀랍네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과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로 잘 먹고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고민까지..

저도 주변 사람들에게 정치나 참여 같은 것들을 더 깊게 제안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쁘니까'였는데요. 경제적인 보상을 넘어서는 효능감도 중요하지만 더 많은 사람을 논의 테이블로 초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의 경우 시민참여 테이블 같은 경우 어느정도 소득을 보전해주는 정도의 수당 지급이 있는 곳도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본문에 소개해주신 참여소득도 좋은 방법인 것 같네요.

'먹고 살기 바빠서'라는 게 생각보다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멈춰있는 이유가 아닌가 싶네요. '참여소득'이라는 개념으로 써주셨는데 일종의 '기여'에 대한 보상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참여하는 것 자체가 기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만들어져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기여하는 경험이 긍정적인 인식으로 남는다면 더 많은 문제에서 시민참여가 이뤄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