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처음 만나는 공화주의]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이익은 공존할 수 있을까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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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사회를 위한 대안을 배달해 드립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에서는 우리나라를 민주공화국이라 설명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공화’에 대한 개념이 중요하지만, 민주에 비해 공화를 다룬 글은 많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화‘. 창작그룹 ’성찰과성장‘은 [처음 만나는 공화주의] 연재를 통해 ’공화주의‘에 대해 쉽게 풀어보고자 한다.


'민주적 공화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3가지 요소가 강조된다. ▲적극적인 시민 참여 ▲기본적인 물질적 보장을 통한 민주적 평등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 5편에서는 민주적 공화주의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공동선’에 대해 탐구해본다.


사회적 불신 속 공동선의 가치를 되새기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갈등과 대립, 그리고 불신의 확산은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세대 간, 성별, 정치 진영, 지역 및 사회적 계층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다양한 축을 중심으로 깊은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경제적 불확실성, 국제 정세의 동요, 타인에 대한 이해 부족, 포용의 결핍 등이 이러한 분열의 원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 현상을 깊게 들여다보면 공동체적 가치와 공동선의 결핍이 근본적인 문제로 드러난다.


공동선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공동선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공동선은 각 구성원, 계층 간의 지속적인 대화와 소통, 그리고 조율을 통해 형성되고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는 공동체의 현실, 맥락, 그리고 구성원의 다양성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전근대 사회에서는 사람마다 정해진 귀천에 따라 사회가 구성되고 운영되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구조가 당시 공동체의 공동선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인식이 공동체의 합의된 공동선으로 자리 잡았다.


▲ 패러다임의 변화는 공동선의 변화를 불러온다 ⓒ성찰과 성장


자연 환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공동선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과거에는 자연을 무한한 자원으로 여기고 마음껏 이용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지속 가능한 자연과 지구 생태계를 고려하는 새로운 인식으로 변화했다. 이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공동선의 진화를 반영한 것이다. 우리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그토록 분노하는 이유도 전지구적 공동선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공동선은 중요한 것일까?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지향하는 정치공동체는 반드시 공동선을 고민하고 실천한다. 정치체제가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말이다. 공동선이 결여된 사회는 부패와 해체의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오로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결국 서로를 향한 끊임없는 투쟁의 장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상황은 공동체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며, 결국 사회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이에 비해, 공동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적극적인 실천은 사회의 건강과 지속적인 발전을 보장하는 기반이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공동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과 논의,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공동선: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이익 사이에서  

공동선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전에서는 공동선이 해당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 또는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개념은 어떤 의미일까? 공동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그 유기체 전체에 이로운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반대로 구성원 개개인의 이익이 모여 공동선을 형성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공동선이 공동체의 최종 목적지인지, 아니면 번영을 위한 수단일 뿐인지에 대한 질문은 공동선을 둘러싼 복잡한 논의를 잘 드러낸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차원에서 공동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가운데, 공화주의에서의 공동선 개념을 짚어 보자.


전통적으로 공동선은 선지자가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공동체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발견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현대로 넘어오면서, 공동선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시각은 개인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는 비판에 마주한다. 자유주의적 사상이 확산된 현대 사회에서는 비지배의 원칙을 바탕으로 개인의 이익을 출발점으로 삼아 공동선을 모색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제시되고 있다(곽준혁, 2008).


공동선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중 하나는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개인의 이익을 희생으로 이어 진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공익과 사익은 주종 관계가 아니다. “공동체주의의 관점과 달리 사익은 공익과 부분적으로 겹쳐질 뿐 종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놓지 않아야 한다(구은정 2021). 공익과 사익은 서로 대치해야만 하는 관계가 아니다. 둘의 공존은 가능하다. 어느 한 쪽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한 쪽이 희생해야만 하는 관계도 아니다.


▲ 누군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어야 하는 제로섬 게임만이 답일까? ⓒ성찰과 성장


우리가 공동선 개념을 쉬이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근대 사회를 구성하는 자유주의적 관점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관점은 제로섬 게임, 즉 한 쪽의 이익이 반드시 다른 쪽의 손실을 초래하는 구조가 기본이다. 제로섬 거래는 상호 작용과 타협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경쟁적이고 대립적인 거래 관계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공익과 사익의 교집합으로서 존재하는 공동선은 다르다. 공동선의 발전이 개인의 이익이며,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런 관점을 기반으로, 이익을 위한 ‘거래 행위’가 아니라, 서로 신뢰를 형성하기 위한 ‘호혜적 활동’이 필요하다.


공화주의는 오히려 공화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비-지배’를 기반으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넓히려고 노력한다. 비-지배는 ‘타인의 자의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라고 정의된다. 조금 어려운 개념이지만, 비유하자면 구성원 간 평등하여 권력, 재력 등으로 서로가 ‘주인과 노예’ 상태에 놓이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자.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어디까지나 ‘비지배 기반의 자유’이지,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의적 자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지배 기반의 자유 개념은 이 시리즈의 1편을 추천한다. 참고)


공동체 가치만을 우선하여 개인이 가지는 자유의 경계를 설정하는데 실패한 사례가 있다. 이웃 국가 중국이다. 중국은 ‘위(권력층)’에서 설정하고 꽂아 내린 공동선(민족주의, 국가 발전 등)을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 순위에 놓으면서 시민의 자유와 공동선의 경계를 설정하는 데 실패했다(Kwak, Matsuda 2015). 공동선이 위에서 내려진 지시로 간주될 경우, 진정한 공동선은 훼손된다. 공동선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가 상호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함께 추구해야 할 가치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적 덕성 - 공동선을 향한 사회적 기초 

이제 시민적 덕성을 살펴보자. 공동선을 이야기하면서 시민의 덕성을 빼먹을 수 없다. 시민적 덕성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법을 잘 지키는 착한 시민의 차원이 아니라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시민적 덕성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시민적 덕성은 자발적인 ‘행동’을 수반한다. 관심 있는 분야의 집회에 나가 의견을 표명하거나, 귀찮더라도 환경 보호를 위해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등 사익을 넘어 공동체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행위하려는 성향(조일수, 2011)’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나와 다른 의견을 수용하고 경청하는 태도이다. 이는 타인에게 ‘설득 당하려는 의지(구은정 2021)’로 바꿔 말할 수도 있다. 갈등 없는 사회는 없다. 우리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크고 작은, 아주 다양한 갈등 상황을 마주한다. 건강한 공동체는 갈등을 외면하고 묵살하지 않는다. 갈등이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인지하고 구성원 간의 충분한 소통을 통해 합의점을 찾아나간다. 시민적 덕성은 공동선을 위한 전제이다. 중국의 실패 사례처럼, 시민의 덕성이 함양되지 못 하고 강력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묻혀 버린다면 공동선을 찾아내기 어렵다.


시민적 덕성은 강력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묻히지 않고,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의 발전을 위해 협력하고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시민적 덕성 함양은 공동선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성장과 사회적 책임감을 높이는 데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일상 속 실천하는 시민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원동력이다 ⓒ성찰과 성장



우리의 공동선은? 

우리가 좇아야 할 공동선은 무엇일까? 성찰과성장에서 ‘이것이 답이다!’라며 제안할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공동선은 절대적이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며, 단일한 종교적 진리나 일률적인 도덕 규범으로 정의될 수 없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참여하여 만들고, 시간과 상황에 따라 발전시켜 나가는 동적인 과정이다. 이제 여러분의 몫이다.


우리 사회의 공동선은 공정성, 평등, 상호 존중, 지속 가능성 등의 기본 원칙에 기반해야 한다. 또한 경제적 번영, 사회적 안정, 문화적 다양성, 환경적 지속 가능성 등을 포함하여, 모든 구성원이 누릴 수 있는 복지와 기회의 균등한 분배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결국, 우리의 공동선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공동선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과정은 지속적인 노력과 헌신을 요구한다. 변화하는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모든 구성원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여정이다.


우리 사회에는 저마다의 진실이 존재한다. 다양한 관점과 경험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처음 만나는 공화주의' 연재가 일상생활과 시민사회 현장에서 활용되어 공동선을 향한 더 깊은 이해와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참고 문헌

  • 곽준혁(2008). “공화주의.” 『한국정치학회 편. 정치학 이해의 길잡이: 정치사상』 (pp.171-205). 서울: 법문사.
  • 구은정. (2021). 탈진실(Post-truth) 시대, 숙의와 공공선. NGO연구, 16(2), 1-38.
  • 조일수. (2011). 공화주의적 시민성에 대한 연구 -아테네적 전통과 로마적 전통의 차이를 중심으로. 倫理硏究, 1(80), 291-316.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드, <의무란 무엇인가>, 2021
  • Kwak, Jun-Hyeok and Koichiro Matsuda. 2015. Patriotism in East Asia. New York: Routledge.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대안을 배달해드립니다 - 창작그룹 '성찰과성장'
글 작성 및 편집 : 김설, 박배민, 신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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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보다. => 개인중심사고 즉 개인주의로 가야하고
=> 탈물질,탈위주의로 => 가족중심사회로 나아가야해요!.

저 기사에 잘못된점은 투쟁하는건. ( 마르크스 변증법적사고입니다)

그러나 공화국은 주권은 개인으로 맡는다 입니다.


허나. 우리는 개인중심,탈물질,탈권위주의로 나아가고

수평, 평등,공정,균등하게 가야해요.

그리고 타인공감,사교성,사회성을 증가시켜야며,

남과 비교질하는것보다. 서로 서로 개개인의 선택권을 자신이 책임지게해야하고.

인격체존중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이중행보,이중표본을 없애야해요!


여기서 한국사회는 전체주의,파시즘적 사고인지라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개인중심사회로 나아가야해요.


개인의 성취,욕망! 등등 !


사진출처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트위터에서 어떤분이 글써논거 저장했습니다).

저거 삼각형 다 필요한거예요!

'공동선은 각 구성원, 계층 간의 지속적인 대화와 소통, 그리고 조율을 통해 형성된다'는 말이 왜 이렇게 마음에 남는지 모르겠어요. 지속적인 대화에 대해서는 마냥 겁부터 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공동선을 지향하기 위해서... 저한테는 '건강한 소통'이란 무엇인지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모두의 자유를 골고루 보장하기 위해서는 , 정말 한 개인이 무한대의 자유를 가지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읽다보니 흔히 말하는 정부, 정당 차원에서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제대로 이야기 해보자는 이야기를 들은지 오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개인의 이야기를 공동의 이야기로 협의하고 설득하는 경험이 필요하겠다 싶네요.

공동선이라는 게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10년 전의 공동선과 지금의 공동선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더라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공동선이 실현되는 사회가 되려면 공동선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논의하는 과정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설득 당하려는 의지'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