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신유진_살아남은 1990년대생이 목도한 참사들

202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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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로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드는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의 캠페인즈팀입니다.
?작은공론장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 :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 에서 나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글을 읽고 아래에 댓글을 남겨주세요. 궁금하거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주시면, 12/20(화) 작은공론장에서 함께 논의 할 수 있습니다.


우린 무사히 30대 생일을 축하할 수 있을까요? 

: 살아남은 1990년대생이 목도한 참사들 

 

신유진(가까운 미래에초등학생을 만날 예비교사, 대학생)


The scapegoat 뭉뚱그려진 책임 소재와 죄책감의 방향 

희생자를 동정하면서도 “희생자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자신을 희생자들과 분리하려는 인간의 욕구,” “안타깝지만 저 사람들은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와 내 가족은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라는 인간의 욕구는 언제나 살아있다. 

-재난의 세계사(원제: The Big Ones: How Natural Disasters Shaped Us)』(2018)


늦게까지 기사, 유튜브, 트윗을 봤다. ‘사망자 대부분 20 대 여성’, 개인이 다수한테 가감 없이 나르는 이미지들. 잠에 들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게 내 앞에 당도해 있는 무언가로 느껴졌다. 고의로 기록을 게을리했다. 망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분명하고 확실한 이미지를 흐릿하게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었다.(상실 사진 참가 후기 박서연)


'일탈하다 변을 당한 애들' ‘흥청망청 유희를 즐기러 갔다가 죽은 애들'이라는 비난도 귀에 박힙니다. 국가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할 때마다 느끼는 이 공포는 왜 공유되지 못하는 걸까요? 간명한 애도는 새로운 정부에서도 반복되고 산 사람들의 이해관계로 간신히 아문 딱지는 자꾸 벗겨집니다.


"팽목항에서 사고가 났는데, 모두 구조됐대. 참 다행이지"라던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두어 시간 만에 "배 안에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데, 물이 차오르는데도 아직 못 나오고 있대"로 바뀌었던 열일곱의 그 날이 머릿속에서 재생됐습니다. 선생님은 그 일이 마치 당신의 오보로 벌어진 것처럼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검은 리본에 '근조'를 지우고 책임자 없는 사고라고 주장합니다. 교육부장관이 전국의 교육청에 노란 리본을 달지 말라는 공문을 보냈고, 끝까지 노란 리본을 달지 않은 한 대통령이 겹칩니다. "여기서 이렇게 많이 죽었단 말이야?"라는 말과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렇게 발견하기 힘듭니까?"라는 말이 겹칩니다.


애도는 그 연결을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일상 생활을 영위하기까지 연결되었던 무수히 많은 삶과 노동과 죽음을 기리며 매일을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할 때 애도가 곧 무서운 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는 나를 보살피는 방법이 되기도 할 것 같다. “그래, 애도는 매일 해야 하는 것이구나.”(상실 사진 참가 후기 박서연)


그들을 평생 곁에 둬야 할 존재들처럼 여기며, 소중한 사람들의 미래를 지키고 싶습니다. 안타깝게 희생된 분들을 끝까지 수호하면서요. 먼 미래에 친구가 될지도 모를 청년들이 새로운 시대를 아픔 없이 맞이하고 싶다고, 포기하지 말아달라 당부하는 듯해서 마음이 저리면서도 그 연약한 약속에 관해 생각하기를 멈추지 못합니다.




*"우린 무사히 30대 생일을 축하할 수 있을까요?: 살아남은 1990년대생이 목도한 참사들"(신유진), 위 글의 PPT 자료는 이 링크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슈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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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태원참사와 청년 파트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해봤습니다. 나중에 정리해주시겠지만 댓글 보시는 분들을 위해 일부라도 옮겨봅니다.

-이 사안을 혐오로 만드는 현상들 : 쿨찐 vs 감성파 라는 용어도 나오더라. ㅜ
-신경계가 안정되어 서로 손을 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고 있다.
‘싸우고 도망치고 얼어붙는다’ - 처음에는 이슈파이팅 하며 싸우고 응대하지만 나중에는 지쳐 외면하게 되고 결국 그 이슈에 무관심해지는 것 : 심리학 용어
이번에는 세월호와 다르게 싸우는 이들이 외롭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이 다양하면서도 응집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애도가 더 어렵고 안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생각.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져 서로가 혐오하는 현상이 문제. 공론장을 자주 만들자.
-집단상담 형태로 세대별로 얘기하면서 보듬는 작업 필요.
-죽음이라는 것을 급을 나누는 현상을 보았다. 타자화가 지나치게 이뤄지더라.
- 청년들은 10대때부터 경쟁해 온 세대. 연대가 어렵다. 극한의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긴장하며 생존을 위해 자라온 세대.
- 청년세대로서 사회에 대한 신뢰가 파탄났다는 느낌. 성소수자 낙인과 죽음을 떠올리는 사람, 여성들은 신당역 화장실을 떠올리며 힘없어서 죽은 여성들의 젠더문제를 떠올리더라. 이렇게 다양한 n개의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
-기존에 누적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불만과 문제의식이 쌓여왔기 때문에 이런 갈등이 불거지면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기 감정대로 상황을 몰아가려하는 것 같다.
-합리성이라는 것을 옳다 그르다의 문제로만 치환하려는 청년세대의 세태가 있는 것 같다.
- 그런 합리성도 무너진 것 같다. 신뢰가 파탄남.
- 모여 이야기해야 함. 의무가 아니라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각을 그저 가감없이 나누는 것.
- 어떤 전문가는 ‘생각을 다 드러내는 것’이 가진 위험성도 지적했다. 오히려 다른 생각들에 상처를 받는 사람도 있다는 점에서. 그러므로 오늘처럼 분야를 나눠서 이야기 모임을 열어보는 것도 좋겠다.

비회원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도 애도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유진님, 발제와 더불어 현장에서 좋은 이야기 더 많이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장 할 수 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하려는 뜻으로 읽었어요. 그리고 알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게 아닌 모르기 때문에 이야기하려는 뜻으로 읽었고요. 같이 고민하겠습니다. :)

먼 미래에 친구가 될 수 있었을… 이 글귀가 계속 마음에 맴돌고 있습니다. 사회는 나만 사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곳이니 한 번이라도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많이 모였스면 좋겠습니다.

정식 비회원

애도가 자책 되거나, 어떤 힘으로 규합되지 않는 일상 속 다양한 방식의 애도에 공감합니다

이기영 비회원

사회적 신뢰 마련, 제도적 방안 등 많은 문제점과 해결책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만 덧붙여 이야기 하자면 관점의 전환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불완전환 사회 일수록 우리 개개인이 불완전할 수 있음을 서로 인정하고, 불완전한 이야기야 말로 나누는 것이 불완전한 사회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누가’ 책임을 져야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하는가에 집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를 도출해내기 위해 ‘누가’를 찾는 것이라면, 그 본질적 목적을 간과하지 않고 응보적 관점의 책임 전가를 넘어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우리가 함께 어떻게를 찾아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모두 아픕니다. 애도를 위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뜻은 모두가 모여서 많이 말하고 듣는 공론장과 집담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로가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공간들이 많이 만들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성훈)

추도하는 것 이상으로 그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온전한 공유. 그리고 그 이후 지속적인 대화가 사람들간의 공감을 만들고, 더욱 건강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연주 비회원

살아남은 90년대 생이자, 곧 30대를 맞이하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참 씁쓸합니다. 학생때, 그리고 성인이 돼서 또 마주한 참사들을 보며 이 사회가 우리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늙어 죽을 수 있을까?'라는 말이 90년대생의 슬로건이 된 것 같아요. 너무나도 자주 벌어지는 사회적 재난 앞에서 청년들에게 미래를 꿈꾸라는 말이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계속해서 사회를 일궈갈 청년들이 무사히 살아갈 수 있게, 긴 호흡으로 삶을 향유할 수 있게 보다 든든한 국가와 사회가 바탕이 되었으면 합니다.

적어주신 내용 중 애도는 연결을 인지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들의 일 말고 우리의 일로 참사를 애도할 수 있는 제반조건들이 마련되길 바랍니다.

수많은 참사를 보며 자라 기성세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저 자신은 사회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반성해보고 있습니다. 무기력감 속에서 끊임없이 책임감을 다시 꺼내며 살아가려 합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참사 속에서 청년의 무기력감이 커져갑니다. 부디 안전한 사회가 오기를, 애도할 수 있는 사회가 오기를 바랍니다.

청년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언제쯤이 되어야 애도하고 싶은 만큼 애도할 수 있을까요?

유진님의 글을 읽고 위의 두 질문이 들었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일이 생기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요? 애도를 하고 싶지만, 또 이제 애도는 그만 하고 싶다는 마음도 듭니다


위 게시물에서 희생자 탓을 하는 댓글들이 가득한 것을 보면서 좌절감을 느꼈습니다.(일부러 보시진 않으셔도..) 조금만 깊이 들여다봐도, 개인의 탓이 아니며, 놀러간 것이 잘못이어서도 안되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텐데... 거기까지 도달하기가 어려운 것인가 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