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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열악한 봉제 노동 환경’ 함께 개선을!
‘열악한 봉제 노동 환경’ 함께 개선을! (2022-06-22) 박만복 | 봉제노동자 서울 성북구 인촌로 한 주택가 건물 지하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노동자가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나는 열일곱살에 돈을 벌러 서울로 올라왔다. 누나들을 따라서 봉제공장에 취직한 뒤 지난 36년 동안 봉제 일을 해왔다. 지금은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조그만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 공장에 들어가서 막내 시다(보조원)로 일했다. 조금 숙련된 시다를 거쳐 보조 미싱사가 되고, 오야(팀장) 미싱사가 될 때까지 죽어라 일을 배웠다. 입사해서 받은 첫 월급이 13만5천원인데, 5천원은 오야가 내게 일 잘했다고 얹어준 거였다. 내가 일한 만큼 받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공장에서 만난 아내와 밤낮으로 일하면 둘이서 한달에 500만~600만원을 벌었다. 마냥 이렇게 벌릴 줄 알았다. 광고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지면서 봉제공장에도 예외 없이 일거리가 줄었다. 단가도 내려가 미싱을 해서 먹고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을 그만두고 8개월 택시운전을 했는데 그것도 힘에 부쳐 다시 양복공장으로 돌아왔다. 공장으로 돌아와서 미싱을 그만두고 옷감의 치수를 재고 자르는 재단을 배웠다. 맨날 좁은 자리에 앉아 미싱 발판을 밟는 것보다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며 칼질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봉제공장에서 마무리 단계에 쓰이는 지그재그 미싱 등 여러 기계들을 익혀나갔다. 이런 노력으로 공장장이 됐다. 광고 광고 그러다 봉제공장에서 옷의 마무리 공정인 시아게(다림질)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1년 정도 배운 뒤에는 작업 성과에 따라 보수를 받는 객공 시아게사로 일했다. 오전 8시에서 밤 10시까지 일을 했다. 일이 많을 때는 자정을 넘기기도 했다. 돈을 버는 재미가 있었지만 온종일 서서 다림질을 하다 보니 다리, 발바닥, 어깨 등이 아파왔다. 시아게를 하면서 내가 공장을 운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품 팔아 이곳저곳 공장을 알아보러 다녔다. 드디어 신당동에 있는 공장을 운영할 기회가 생겼다. 계약하는 순간 ‘이제 나도 사장이 되는구나!’ 싶어 기뻤다. 포부도 있었다. 완성도 높은 옷을 만들어 홍보도 하고 내가 직접 영업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주문이 들어오면 납품기일 맞추기에 정신이 없었다. 영업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도 알음알음 소개로 온 사람들 덕에 일감이 조금씩 늘어났다. 광고 하지만 성수기인 봄가을에는 일감이 많아도 미싱사들을 구하지 못해 일감을 놓칠 때도 있다. 미싱사들은 일감이 많을 때는 하루 15시간 넘게 일한다. 하지만 비수기에는 미싱 한번 돌리지 못하는 날도 있다. 그러면 미싱사들이 다른 곳으로 일감을 찾아 떠난다.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됐다. 요즘 봉제노동자 평균 나이가 55~60살이다. 수십년을 일한 숙련된 봉제노동자들이 처한 노동환경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일하는 환경, 노동시간, 공임 등 처우가 나쁘니 청년들은 봉제 일을 하지 않는다. 30년 전 처음 미싱사가 됐을 때 난 내가 일한 만큼 돈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객공 시아게사로 일할 때는 새벽까지 일해도 벌이가 괜찮아 좋았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공임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중국, 베트남 등에서 싸게 들어오는 옷이 많아 단가 인하 경쟁을 하는 의류업체들 탓에 공임이 낮게 책정되기도 한다. 옷마다 다르지만 한장에 500원짜리도, 2천원짜리도 있다. 20년 전 재킷 한벌에 7천~8천원 하던 공임이 지금은 겨우 1천~2천원 정도 올랐다. 일당 노동자는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한다. 미싱은 12만~13만원, 마무리는 17만원, 재단은 20만원 정도를 일당으로 받는다. 일이 많을 때는 400만~500만원도 벌지만 일이 없을 때는 50만원도 못 벌 때가 있다. 광고 지금 영세공장을 운영하는 처지에서 봤을 때, 봉제업의 객공 시스템은 결코 좋은 게 아니다. 객공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기 어렵고 보너스도 퇴직금도 없다. 4대 보험도 가입되지 않는다. 서울 도심 제조업 중 가장 큰 게 봉제산업이다. 신당동에만 봉제공장이 수백~1천개 가까이 된다. 그중 노동자에게 4대 보험을 가입시킬 형편이 되지 않는 영세사업장이 열에 아홉이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서울만 봉제노동자가 9만명이 넘고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않는 사업장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제는 좀 바뀌면 좋겠다. 봉제노동자들의 공정임금, 공정단가 그리고 기본적으로 12시간 이상 일하는 작업시간을 바꿔나가고 싶다. 봉제노동자 주 5일 근무, 4대 보험 등 여러 가지를 바꾸고 싶은데 혼자서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영세한 봉제사업주가 노동자들을 4대 보험에 가입시킬 수 있게 독려하고 비용을 일부 보조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사업장 단가, 임금, 노동환경 개선에 나서주면 좋겠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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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수선한 옷 만족해하는 손님 보면 뿌듯해요
수선한 옷 만족해하는 손님 보면 뿌듯해요 (2023-11-13) 유미애 | 수선집 운영·서울 성북구 패딩점퍼 소매를 수선하고 있다. 필자 제공 올해로 수선집을 시작한 지 4년이다. 이젠 잘한다는 소문도 나고 자리가 잡혔다. 사실 내가 수선일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나는 결혼 전부터 손으로 하는 건 뭐든지 금세 배웠고 그 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살림하며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특히 일곱살부터 운동을 시작해 선수의 길을 걸은 작은아이 챙기느라 하루하루가 바빴다. 아이 뒷바라지가 끝나면 취미생활 겸 공방을 운영하면서 중년을 보내고 싶었다. 광고 인생은 내 바람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작은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했다. 아이들에게도 위기가 왔다. 특히 작은아이가 10년 동안 해온 운동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집안일만 해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고된 식당 알바를 하며 생활비와 작은아이 레슨비를 보탰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서 꿈꿔오던 공방 대신 돈벌이가 되는 수선일을 택했다. 아이와 함께 운동하던 누나의 어머니가 수선집을 운영하셨는데 일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주말마다 경기 고양시에서 서울로 와 수선 기술을 배웠다. 그런 와중에 사장님 제안을 수락해 아예 수선집을 맡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광고 광고 실전은 쉽지 않았다. 예전 사장님 단골들을 다시 내 손님으로 만들려면 실력도 있고 친절해야 했다. 처음엔 전 사장님과 비교하시는 손님들이 많았다. 가장 기본적인 바지 기장 줄임부터 소매 기장 줄임, 품 줄임, 지퍼 교환, 누빔, 고무줄 교체, 허리 줄임과 늘림 등 다양하게 수선을 의뢰받는데 그때까지 배운 것으로는 부족했다. 해보지 않은 수선이 들어오면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보며 배웠다. 그렇게 세월이 쌓이며 안 될 것 같은 수선을 통해 옷이 바뀌는 게 신기했고, 좋아진 내 실력에 스스로 감탄을 하기도 했다. 수선을 더 잘하기 위해서는 옷 만드는 법을 알아야 할 것 같아 요즘은 옷 제도와 재봉을 공부하며 틈틈이 실제 옷도 제작한다. 평일에는 오전 9시30분부터 저녁 8시까지, 토요일은 오후 6시까지 일하고 일요일은 쉰다. 보통 하루에 20~30벌 정도 작업한다. 간절기에는 수선하는 양이 두배 정도 늘어 매일 밤 10시가 넘도록 일하고 휴일에도 일할 때가 많다. 광고 처음엔 너무 오래 입어 해진 옷을 굳이 수선해 계속 입으려는 손님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의외로 그런 분들이 많아 놀랐다. 더 신경 써서 오래도록 입을 수 있게 도와드리려 한다. 수선협회에서 정한 가격을 기준으로 수선비를 책정하고 어떤 수선이든 손님이 만족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하려 노력한다. 수선 실력만이 아니라 손님을 상대하는 일도 중요하다. 다양한 손님을 만나면서 배우기도 하지만 힘들 때도 잦다. 보통 바지 기장 수선에 4천원을 받는데 손님들 반응도 제각각이다. 1만원 주고 산 바지인데 수선비 4천원은 너무 비싼 거 아니냐고 항의하던 손님이 기억난다. 원하는 대로 수선했는데도 트집 잡고 수선비도 내지 않고 가는 손님도 있었다. 한번은 자기 바지 대신 남의 비싼 바지를 가져간 손님이 있어, 옷이 없어진 다른 손님에게 바지값을 드리기도 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수선표를 만들어 손님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재해 손님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했다. 고생했다고 커피나 과일 같은 간식을 주시는 손님도 있다. 몸에 딱 맞게 옷 입는 걸 좋아하시는 한 손님은 수선하러 자주 오시니 내가 그 손님 취향을 잘 알게 되고 그에 맞춰 수선해 드리면 항상 만족해하신다. 손님이 만족할 때면 나 역시도 수선집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분들이 훨씬 많으니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도 잊게 된다. 남편도 다시 일을 시작하고 수선집 운영도 안정적이어서 아이들 뒷바라지나 생활에 어려움은 많이 줄었다. 나도 어느새 오십대 초반이지만 아직 젊으니 배울 게 더 많다고 생각한다. 가게에 오시는 손님이 만족해서 다시 오실 수 있도록, 발전하는 나를 만들기 위해 더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어려울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을 주고 도와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가 받은 도움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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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일본 사람이죠?…그래서요?
[6411의 목소리] 일본 사람이죠?…그래서요? (2024-03-11) 니카미 유리에ㅣ협동조합 쩜오책방 조합원 아시타청’ 프로그램을 함께 생각한 마을 사람들. 지난봄에 우리가 마을공동체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위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자 제공 ‘여기서 나는 외국인이 아니구나, 마을 사람이구나.’ 한국에 온 지 8년. 마을살이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주민이라고 하면 ‘외국인’이나 ‘불편함’ 같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가.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그런 단어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파주시 교하에서 ‘나다움’을 찾으며 성장하고 있다. 광고 그동안 일본 사람이라서 받은 상처들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던진 말 때문이었다. 아이를 안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내가 일본 사람인 것을 안 행인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일본 사람이죠? 나 같으면 결혼 반대할 것 같아요.” 광고 광고 하지만 한국에 살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상처의 말보다 마을 사람의 따듯한 말이다. 2016년, 남편 직장 때문에 교하로 이사하게 됐다. 아는 사람도 없고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채 도서관에 갔다. 책을 좋아했고 첫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터라 그림책을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도서관은 내게 쉼터가 되어줬고 아이에게는 놀이터가 되어줬다. 사서 선생님들은 나를 외국인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아이 엄마로 따듯하게 대해줬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과 만났다. 일본 소설을 원서로 읽는 모임 사람들, 육아하는 엄마들, 도서관에서 봉사하는 분들…. 그 인연으로 일본 그림책 읽기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도서관이라는 공간,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들을 만났고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마을에 있는 책방에서 일본어 수업도 하게 됐다. 주말이면 서울에 가 일본어 강사로 일했던 나는 생활 공간인 마을에서 일하며 아이를 키우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광고 마을 사람들과의 인연 덕분에 마을 책방을 운영하는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었고 ‘디어 교하’라는 마을 잡지의 기자단으로 활동하게 됐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좋아하는 것과 몰두하는 무언가가 있다. 육아를 하거나 일에 매진하다 보면 ‘나’를 잊을 때가 많다. 이 마을에서는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나는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나는 누군가의 친구이고 옆집 사람이자 이웃이다. ‘외국인’이라는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면 함께 고민해주며 적당한 거리에서 신경 써주는 분들이 많다. 어른이 되어도 다른 사람의 단점을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좋은 방향으로 공동체를 이끌기 위해 서로 노력한다. 가끔 다른 지역에 여행 가면 “일본 사람이세요?” 하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일본 사람이었지’ 하고 자각하게 된다. 사실 이제는 낯선 질문이라서 그 질문을 들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그 물음이 싫을 때도 있다. 마음속으로 ‘그래서?’ 하고 대답해 본다.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든다. 질문하는 사람은 별생각이 없었겠지만 내겐 차별의 말로 들린다. 그만큼 나는 이곳에서 한 사람으로 살고 싶은 것 같다. 지난해, 마을 사람들과 ‘교하 시청각 클럽’을 결성했다. 공동체 실험 사업에 선정된 것이다. 이 사업을 통해 나는 이주민이 아니라 마을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공동체 생활은 소통과 이해를 통해 풍성해진다는 것을 경험했다. ‘아시타청’(我視他聴)이라는 프로그램은 나를 잘 바라보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는 뜻이다. 여섯명의 팀원이 각자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기반으로 여러 활동을 기획했다. 나는 ‘마음 스트레칭’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책을 통해 나와 대화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여러번 가졌다. 광고 ‘외국인’이라는 낙인 때문에 주저한 일이 많다. 몇년 동안 공부한 그림책 심리학 또한 단순히 나를 위해 공부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주민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응원과 참여자들의 반응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주민으로 살며 때때로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조용히 상처받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어서 용기를 얻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이주민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통하는 이야기이다. 그 사실을 한 사회의 소수자가 되어서야 알게 됐다. 모르는 사람의 차가운 말보다 이웃의 따듯한 말이 몇 배의 힘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만나려면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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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맞는비 포럼] 여전한 피곤한 '투명인간들', 그들에게 정치란 아직도 '구경거리'일뿐
[함께맞는비 포럼]'시민정치지성'으로 '마지노선 민주주의'넘어야 박창규 노회찬비전포럼 운영위원장 노회찬의원은 노동 존중, 민생 살리기, 부정부패척결, 재벌개혁, 사법개혁, 검찰개혁, 정치개혁 등 수많은 정치·사회·경제 의제를 국민들에게 제시하고 정치의제로 만들었다. 그 과정은 통렬하기도 했고 유쾌하기도 했으며, 많은 이들로부터 "노회찬의 정치가 사회경제 약자들을 대변하는 정치 공론장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바라봤던 세상은 '노동이 존중받는 선진복지국가'였고, 그가 발 딛고 있길 원했던 정치 현장은 '6411번 버스 첫차를 타고 일터로 출근하는 투명인간들의 손에 닿는 정치'였다. 노회찬재단은 그러한 '노회찬정치'의 정신을 '6411정신'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것을 잇는 노회찬정치가 계속되길 기대한다. 노회찬재단 주최로 매월 열리는 '함께맞는비 포럼'은 6411정신을 통해 한국정치의 주요한 사회개혁 의제를 다루는 공론장으로서 기획되었다. '함께맞는비 포럼'이 국민들에게 노회찬정치의 실천동기가 되길 기대한다. 필자 지난 2월 20일 저녁 올해 첫 '함께맞는비 포럼'이 '6411정신과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노회찬재단에서 열렸다. 2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노회찬의원의 6411정신을 통해 한국정치의 현실을 깊이 있게 다시 성찰해보자'는 의도로 주제를 정했다. 4월 10일 총선을 앞둔 2월은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공천과 출마선언, 공약발표 등으로 정신없이 바쁜 시기이다. 노회찬의원도 2016년 4월 총선을 두 달여 앞둔 2월 1일에 새벽기차를 타고 창원으로 가서 창원성산구 출마선언 기자회견을 한 후 두 번의 예선을 거쳐 본선을 치르는 대장정을 시작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바쁜 때일수록 '내가 왜 정치를 하는지', '왜 출마하는지'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40년 가까이 경과하며 형성된 한국정치의 양당체제가 '불평등 심화'와 '기후 위기' 대응에 무기력한 낡은 체제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을 비도덕적이고 비정치적으로 사사롭게 행사하는 정권과 관료집단을 견제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보니 거대양당의 정치적 갈등은 주권자인 국민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과 거리가 멀고 극성팬들을 앞세운 정치적 소란만을 재생산하고 있다. 그 결과 정치는 국민들에게 그저 예능 프로그램이나 스포츠 경기와 같은 '구경거리'일뿐 관여하거나 참여해야 할 '삶의 일부분'이 아닌 것이 되었다. ▲ 6411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프레시안 다가올 총선에 뛰어든 정당과 정치인들은 이런 '양당체제의 철창'을 부수고, 국민의 삶의 일부가 되는 정치를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때에 노회찬재단의 '함께맞는비 포럼'이 '6411정신과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논의의 장을 연 것이다. 노회찬의원은 양당체제의 정치에서 배제되어온 사회경제적 현안과 정치적 개혁과제들을 정치의 장(場)으로 가져와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과 여론을 모으고, 또 양당의 정치적 갈등에 개입해 제3의 시선에서 문제 해결을 촉진했다. "만 명에게만 평등한 사법부"의 개혁을 촉구했고, '삼성X파일 떡값검사 명단'을 공개해 정-경-언이 유착된 부정부패의 척결을 온몸으로 외쳤다. 무소불위한 검찰권을 개혁하고자 앞장섰고, 신용카드사들과의 전쟁을 선포해 중소자영업자들 '가맹점 수수료' 인하를 이끌어냈으며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을 주도했다. 또,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을 촉진했다. 이런 노회찬정치는 샤츠슈나이더의 표현을 빌리자면 '갈등의 사회화' 정치이고, 노회찬 자신이 남긴 말대로 "투명인간들의 손에 닿는 정치"이자 '6411정신'이 담긴 정치였다. 이번 '함께맞는비 포럼'에서 '6411정신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발표한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노회찬정치와 6411정신을 상기시키며 '정치의 인문성'을 강조했다. 김윤철 교수는 "정치란 '문명' 공동체(polis)의 유지와 재생산을 통해 '나와 우리'의 삶과 해방을 위한 '실천'"이라고 정의했으며, 민주주의 위기의 핵심적 의미는 "주권자 지위의 훼손과 약화"인데 그 원인은 "정치의 왜곡과 실종에 의한 주권자들 '삶'의 방치, 갈등의 사유화에 따른 강자독식"이며, 그 결과 "주권자들이 '과잉주체'가 되어 숨 쉬며 자신의 마음으로 살 수 없는 처지, 反 해방의 현실/(자기) 억압의 현실"에 놓이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또한, 김윤철 교수는 "민주주의의 핵심 본질인 '민'의 물질적 자원배분 결정권 신장의 문제는 방치하고, 형식과 절차 지키기에만 열을 올리다가 결국 민주주의의 파탄을 겪게 된다는 의미"로 한국 정치는 '마지노선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즉, 김윤철 교수가 강조한 '정치의 인문성'은 정치가 주권자인 국민들의 삶을 돌보는 가운데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서사(narrative)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인문성'은 정치의 본질이자 정치인들이 체화해야 할 기본 소양이다. 한국사회의 경제불평등은 갈수록 심각하다는 이야기가 20년 넘게 반복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뿐만 아니라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 같이 충격적인 일이 발생할 때마다 빈곤층의 절대적 어려움과 사회보장의 허술함이 지적되었지만 여전히 이런 사회적 갈등 현안에 대한 정치의 효능감은 발휘되지 않고 있다. 세계적 차원에서 기후 위기의 심각성이 이야기되지만 정작 그것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정치는 경제성장과 기업부담을 운운하며 대응책 마련에 주저주저하는 모습만을 보이고 있다. 왜 한국정치는 이런 모습일까? 답을 찾기 위해 '정치의 인문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정당과 정치인이 평소에 '말로만' 존경한다고 말하는 주권자들의 정치참여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이날 '함께맞는비 포럼'의 토론자로 참석한 이동익 민주노총 인천본부 조직국장은 "민주노총을 비롯한 조직노동운동세력이 '6411 정신'이 호명하고 있는 계급 이하의 존재들과 소외된 노동의 보호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며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대표성'을 강화해야 하고 여성, 청년, 성소수자, 장애인, 불평등, 돌봄, 공공성, 직장 내 민주주의, 성차별, 노동안전과 건강 등 사업장 범위를 넘어선 문제를 노동조합 내부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샤츠슈나이더가 "우리 생활 속에 자리 잡은 보편적 이념들뿐만 아니라 평등과 공존, 모두에게 동등한 법의 보호, 정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이주의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 시민권과 관련된 이념들은 갈등을 사회화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극성팬들의 정치적 소란을 넘어 노동계급이 '정치의 인문성'을 강화시키고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확대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윤민섭 춘천시의원이 "주민들의 삶의 공간인 지역에서 6411정신을 바탕으로 다양한 정책과 실천을 통해 정치경쟁력을 강화하는 전략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역에서 ‘정치의 인문성’을 실현하는 주민들의 정치적 관심과 참여를 더 잘 촉진할 수 있음을 예감케 해준다. 한편, 이영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선임연구원이 '정치의 인문성'을 담보할 진보정치의 역할에 대해서 "'6411 정신'은 진보정치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며 "누구나 공감하고 지지받을 수 있는 진보정치, 그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누구와 함께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지지를 쌓아가는 '탄탄한 기본기'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4월 총선을 앞둔 정당과 정치인들이 앞으로의 정치에서 한국정치를 '마지노선 민주주의'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는 '정치의 인문성' 실천을 통해 주권자들인 국민들의 정치참여를 노동 부문과 지역에서 촉진해야 한다. 진보정치를 자처하는 정당일수록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한다. 이날 포럼의 발표자였던 김윤철 교수는 한국정치가 마지노선 민주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민정치지성의 발현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가 말하는 '시민정치지성'의 핵심은 "첫째, 기성 정치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압력과 도전이 없으면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둘째, 그 압력과 도전이 제 정치세력의 혁신 경쟁을 촉발하도록 작용해야 한다. 셋째, 그 혁신경쟁의 결과는 특정 정치세력의 선거 승패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시민주권의 증진에 기여해야 한다. 넷째, 시민주권은 투표권 행사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자원의 배분에 관한 정책결정권의 행사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구체적으로 "△특정 개인과 집단의 행태에 속지 않고 '구조'를 읽기! △삶의 현실, 특히 (교섭)권력을 갖고 있지 못한 다수 보통사람들의 현실을 읽기! △옳음의 강변이 아닌, 좋음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한지 살펴보기!"를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회찬 의원의 2012년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연설을 소개하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내일 새벽에도 6411번 버스는 정해진 시각에 출발합니다. 수많은 투명인간들이 여전히 피곤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아직 우리는 없었습니다…." * 노회찬재단 주최로 매월 열리는 ‘함께맞는비 포럼’은 모든 국민들에게 열려있는 공론의 장입니다. 상반기에 준비된 △ 자영업과 경제불평등(3월) △ 청년노동과 산업재해(4월) △ 농업·농촌·농민과 기후위기(5월) 주제의 사회현안 논의에 많은 분들의 참여와 토론을 기대합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함께맞는 비 포럼' 원고는 프레시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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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한해 두 번의 대출로 넘긴 가전제품 청소노동
[6411의 목소리] 한해 두 번의 대출로 넘긴 가전제품 청소노동 (2024-03-04) 조수형ㅣ가전제품 분해 청소노동자 필자가 드럼세탁기를 분해해 청소하고 있다. 필자 제공 나는 가전제품을 분해해서 청소하는 일을 한다. 이 일을 한 지 15년이 됐지만 여전히 이 직업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가전제품들이 의외로 많은 세균과 바이러스 등에 오염돼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 직업이 생겼다. 이 일은 청소업에서도 좀 더 특화된 영역이다.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분해 청소하는 일은 단순히 장비와 기술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전문성과 현장 경험이 필요하다. 모델마다 분해·조립 방법이 달라 새 제품이 나올 때마다 계속 연구하고 익혀야 한다. 광고 요즘은 인터넷이나 유튜브로 분해·조립 방법을 배우고 창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점점 늘고 있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가장 큰 이유는 비수기가 길어 안정된 수입 보장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겨울이 끝나가지만 계속되는 불경기 여파인지 주문이 급격히 줄었다. 나 역시 사업의 존폐를 염려할 상황이다. 올해 들어 문을 닫은 업체들도 상당수 보인다. 아주 큰 힘을 쓰는 일이 아니기에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시작했는데 녹록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이다. 광고 광고 가전제품 분해 청소에 걸리는 시간은, 대개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서너 시간 이상이 필요하다. 통돌이 세탁기는 수조를 들어내고 고객과 함께 오염도를 확인한 뒤 고압세척기와 곰팡이 제거제로 세척을 한다. 에어컨은 열교환기까지 분해해서 약품세척, 고압세척, 스팀세척을 하고 열교환기 탈취 후 다시 제품을 조립하고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한다. 냉장고는 내용물을 전부 비운 다음 청소를 해야 한다. 트레이를 분리하고 내부는 세척액을 묻혀 닦아준다. 가전제품 분해 청소 일은 고객의 선택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에 계절과 경기가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친다. 봄부터 여름까지가 가장 많고 겨울은 완전한 비수기다. 세균과 바이러스, 곰팡이 등은 계절과 상관없이 번창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육안이나 냄새 등으로 청소 시기를 판단하는 탓에 날씨가 선선해지거나 추워지면 위생에 대한 경각심이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광고 청소 작업 가격은 업체마다 다르지만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 등은 적게는 6만~7만원에서 많게는 19만~20만원에 이른다. 냉장고는 내부 음식물을 버려 달라거나 수납정리까지 맡길 경우 가격은 더 오른다. 작업 시간과 노동 강도에 비춰보면 싼 편이라 할 만하다. 한철 벌어서 1년을 먹고사는 직업들은 대개 단가가 높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전제품 청소를 하는 지인에 따르면, 제품 종류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우리보다 평균 3배 이상 높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노동이 천시되어서인지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요즘엔 생활서비스 앱이 생기며 가격 인하 경쟁을 부추긴다. 이런 앱들의 수익 창출 시스템이 작업자에겐 가혹하다. 고객 문의가 들어와 견적서를 보내면 계약이 성사되지 않아도 수수료를 물어야 한다. 견적서를 수십장 보냈지만 한 건도 일을 못 하게 돼도 수수료를 내야 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직업의 마지막 어려움은 고객 대면이다. 고객과 장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부담감, 정신적 압박감은 스트레스로 연결되기도 한다. 노동자를 업신여기는 고객을 만나면 비위를 맞추는 것 또한 쉬운 일만은 아니다. 더운 날 여섯 시간 이상을 작업하면서 물 한잔 얻어먹지 못한 적도 있고, 냉장고 청소 후 집 안에 음식물 냄새가 난다고 냄새를 지우고 가라고 했던 일도 있다. 불량한 제품인데 작업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도 있다. 작업 전에 제품이 잘 작동되는지, 소음은 없는지, 버튼은 잘 눌러지는지 등 철저한 사전 점검을 하는 이유다. 한번은 오래된 세탁기를 분해 청소하고 조립을 마친 뒤 재작동을 하는데 전원 버튼 작동이 오락가락했다. 세탁기 조립을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전원 기판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얘길 해도 고객은 수긍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도리가 없다. 6만원 벌러 갔다가 15만원짜리 중고 세탁기를 사 주고 와야 했다. 모든 고객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작업자를 믿어주고 배려하는 고객도 많다. 그럴 땐 일에 보람도 느끼고 내심 뿌듯하다. 광고 두번의 대출로 견딘 2023년. 겨울을 지나 봄을 맞지만 불경기인 요즘이 가전청소업의 현 모습이며 내 모습이다. 내가 가는 길이 옳은 선택인지 의심도 해본다. 하지만 앞일은 모르는 것이기에, 모든 게 나빠도 전부 나쁜 것은 아니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일터에 나선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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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세월호 다큐 방송 무산, 어떻게 생각하세요?
KBS가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4월 18일 방영 목표로 준비하던 <세월호 10주기 방송-바람이 되어 살아낼게>가 결국 방영 무산되었습니다.  지난달 30일 임명된 이제원 제작1본부장은 부임 일주일 만에 간부들을 긴급 소집하여 총선 전후 영향을 줄 수 있는 시기라 세월호 다큐 방송을 보류했다고 입장을 밝혔는데요. 이에 반발하여 제작진은 팀장, 부장, 국장과 함께 부당함에 대해 여러차례 이야기했으나 본부장은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시기라는 이유로 방영 연기를 통보했습니다(출처 한국기자협회). 그러나 이어 KBS는 4월 방영이 어려우면 출연자들 협조도 얻기 어려워 결국 제작을 아예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제작진에 통보했습니다. 제작진 설명에 따르면 해당 다큐는 40%가량 촬영을 마친 상태였습니다(출처 한겨레).  이에 21일 여의도 KBS 본관 앞에는 120명이 이를 큐탄하기 위해 촛불시위를 벌였습니다. 다큐멘터리 연출을 맡은 이인건 PD는 집회에 참석하여 준비하던 다큐는 단원고 생존자 A씨의 지난 10년간의 시간과 현재를 다루는 다큐라며 KBS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우리가 다음 10년을 살아내지 못하고 다시 과거 10년으로 갇히게 되는게 너무 싫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박미정 민언련 시민회원도 "세월호 다큐방송이 총선에 영향을 준다면 지금 KBS의 모든 시사방송도 멈춰야 한다"며 더이상 세월호와 재난 문제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일침하기도 하였습니다(출처 한국기자협회). 이번 세월호 다큐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는 세월호 참사 생존자인 당시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 2학년이었던 유가영씨가 쓴 동명의 에세이 제목을 본따서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10년을 압축하여 그들이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과정을 담아내며 우리 사회도 함께 반추하는 취지를 담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있는데요(출처 경남도민일보).  세월호 다큐 무산 소식을 들으며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구나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엊그제 일처럼 풍랑이 몰아쳤던 세월호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모든 국민의 염원이 한 명의 아이들이라도 구조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또 이 비극은 정치와 엮여 비판을 받기도 하고, 또 사람들의 기억속에 언제 일어났냐는 듯 까맣게 잊혀져 갔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흔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일이기에 힘들더라도 다시 우리 사회가 기억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10년 전 4월에 일어나 우리 사회에 큰 아픔을 준 세월호 사건이 더이상 정쟁화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다양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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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엄마를 위한 회사는 없다
[6411의 목소리] 엄마를 위한 회사는 없다 (2023-11-19) 박정민 | IT개발자 결혼과 육아로 정규직을 포기해야 했던 필자가 프리랜서 개발자로서 업무를 보는 모습. 필자 제공 나는 아이티(IT) 개발자다. 이 이름이 아직도 나는 너무 좋다. 2005년 7월, 대학을 졸업하기 전 만 21살 때 취업에 성공했다.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시작한 사회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감히 너 따위 어린애가 뭘 안다고’ 하는 시선 때문이다. 그래도 실제로 어렸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어려움쯤은 견딜 수 있었다. 일이 재밌었다. 광고 그 시절 아이티 개발자는 야근은 필수요, 주말 출근은 필수 권장 덕목이었다. 그래서 한달에 하루 이틀 빼고 내내, 또는 밤새워 일하기도 했지만 힘든 줄 몰랐다. 아이티 개발자로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뿌듯함과 선배들의 잘한다는 칭찬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야근도, 선배들과 술 마시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어렸고, 젊었고, 체력도 좋았고, 의지도 강했다. 힘든 것과 별개로 직업 만족도가 높았다. 그러던 게 결혼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칭찬해주던 사람들이 결혼하고 나자 “그럼 언제까지 일해? 곧 관두겠네?”라고 했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그만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계속 내가 곧 그만둘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임신까지 하게 되자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이 더 자주 “언제까지 일해?”라고 물어왔다.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일했다. 광고 광고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 내 자리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만삭 때까지 일했다. 출산 2주 전에야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육아휴직을 쓰다가 출산 9개월 만에 복직 권유를 받았고, 아직 어린아이가 걱정됐지만 회사 권유에 두말 안 하고 복직했다. 복귀에는 다소 적응 과정이 필요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여전히 개발자로서 인정받고 있는 듯했고,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그러던 중 차세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이티 업계에서 차세대 프로젝트는 힘들기로 손에 꼽히는 업무다. 야근은 기본, 주말 출근도 불사해야 한다.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한 파트를 맡았는데, 주요 업무가 아닌 그나마 혼자 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육아하는 여성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약간의 착잡함을 느꼈다. 광고 그렇게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뒤 어느 날 사장님이 불러서 말했다. ‘다른 회사에 자리가 하나 났는데, 거기는 아이를 키우며 일하기에 더 수월할 거다. (워킹맘에 대한) 지원제도도 잘돼 있다니 면접을 한번 보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였다. 평소 직원 사정을 잘 살피는 사장님은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내가 걱정돼 더 나은 일자리를 추천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그 제안이 그저 불안하게만 다가왔다. 돌려 말하는 해고인 듯해서였다. 이러다 진짜 잘리는 건 아닌가, 싶어 사장님이 권고한 회사 말고도 몇몇 다른 회사에도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고 그곳들에서 결혼 전에는 듣지 못했던 말을 들었다. “야근할 수 있어요?”, “우린 애 엄마는 안 써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데도 그럴 거예요.” 결국 나는 어디로도 이직하지 못했고 기존에 다니던 회사 사장님의 배려 아래 이직 권고는 없던 일로 마무리됐다. 이후 몇번의 프로젝트를 거치며 나는 프리랜서라는 신분으로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아이를 키우며 일해야 하는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더는 다른 곳으로 떠밀리듯 이직을 권유받지 않아도 되었고, 사실상 관두라는 말과 다름없는 먼 거리 파견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 정규직에게 주어지는 4대 보험 혜택은 받을 수 없게 됐지만, 이제 회사 소속 개발자가 아니라 업무 책임을 혼자 지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저 어쩌다 들려오는 ‘이 사람 개발 잘해요’라는 사람들의 평가가 내가 한때 개발자였음을 상기시켜준다. 생각해 보면, 결혼한 여자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나는 결혼과 임신을 하면서 좋아하던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었고, 아이를 키우면서는 정규직을 포기해야 했다. 누군가는 승진을 포기하고, 누군가는 경력을 포기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좋아하던 개발자의 마음을 포기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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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그래도 소신껏 살아보니 좋다​
[6411의 목소리] 그래도 소신껏 살아보니 좋다 (2024-02-26) 이창열 | 제화노동자·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성수분회장 신발 만드는 공정 중 가죽작업 모습입니다. 저희는 ‘가피’라고 하지요. 신발 윗부분 가죽을 재봉질로 조립하는 과정으로 여기에 밑창을 붙이면 신발이 됩니다. 필자 제공 벌써 4년이나 됐다. 딸이 결혼하는데 새하얀 웨딩슈즈를 만들었다. 나는 재단된 가죽을 재봉질하는 갑피 기술자라 다른 작업은 동료들이 했다. 딸이 좋아했다. 그렇다고 구두장이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은 안 든다. 봉제 일을 했으면 옷을 선물했을 거고, 보석 가게를 했으면 다이아를 줬겠지. 내가 만들 줄 아는 게 구두라 당연한 거였다. 부모님은 기술을 배우면 굶지는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다그쳤다. 서울 정동에 살았는데, 동네 선배가 구두 일을 했다. 1980년대 초 10대 후반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이 무지 힘들었다.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게 싫어 몇번 도망치기도 했다. 광고 사우디 가겠다고 중장비 자격증을 땄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못 갔다. 용접 자격증도 있는데 썩혔다. 서점 일도 했고, 막노동도 뛰었다. 엑스트라도 해봤다. 엠비시(MBC)가 정동에 있던 시절, 6·25 특집극에 총살당한 시체나 기차역 앞에서 종일 군가 부르는 병사로 출연했다. 재미는 있었다.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했어도 구두장이 선배가 불러 술 사주고 용돈 주면 그 맛에 빠져 또 돌아갔다. 결국 구두를 만들게 됐다. ‘구두장이가 되자’ 마음을 잡고 나서는 이왕이면 빨리 기술을 배우기로 작정했다. 어떤 기술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1년6개월 만에 한 사람 몫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5천원짜리 공임이면 딱 그만큼 하는 중간 정도 기술로 시작했는데, 세월 낭비하지 않고 나만의 비법을 차곡차곡 쌓았다. 광고 광고 서울아시안게임이 열린 1986년, 그땐 일감이 넘쳐났다. 어지간한 월급쟁이의 두배는 벌었는데, 나중에야 깨달았다. 공장에서 가죽 깔고 자면서 하루 20시간씩 일한 근로시간을 따지지 않았다는 걸. 구두 일은 월급제가 아니고 개수임금제다. 만드는 만큼 돈을 받으니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교장’이라고 불리는 관리자가 일감을 배분하는데, 말을 안 듣고 덤비면 일감을 적게 또 어려운 걸 준다. 이렇게 길들인다. 노동조합은 아니다 싶었다. 애들 엄마가 스티커 만드는 조그만 공장에 다녔다. 사장이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려고 30~40명을 자르려고 해서 노조에 가입해 싸웠다고 했다. 나한테는 철저히 숨겼다. 내 성향을 아니까. 집에서 전기장판, 이불을 들고 나가 안 가져오는 건 알았다. 나중에 금속노조에서 만든 투쟁 영상을 보니 애들 엄마가 나오는데, 세상에 그 사장 아들이 한 행동을 보니 돌아버리겠더라. 광고 2018년부터 탠디 하청업체 제화노동자들이 공임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하고 본사를 점거해 농성했다. 이겼다. 구두 만드는 사람들이 아는 게 없으니까 도움을 받으려고 노조에 가입했다. 불이 붙었다. 거긴 사당동인데 노조가 성수동에 와서 홍보하고 그러길래 어영부영 가봤다. 얘기 들어보니 필요하다 싶었다. 2019년 반신반의하면서 노조 가입원서를 썼다. 노조가 생기자 사장이나 관리자들이 조심했다. 퇴직금 얘기도 나왔다. 이런 대접은 못 받아 봤다. 나서면 된다는 성취감 같은 걸 느꼈다. 그때는 분위기에 휩쓸린 면도 있지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 열성적으로 빠져들었다. 아파트 경비노동자나 학교 비정규직들이 집회하면 우리 제화지부에서 도와주러 달려갔다. 일이 안 끝나면 할 수 없지만 좀 빨리 끝낼 수 있으면 막 쫓아갔다. 우리가 힘들 땐 그들이 도와주러 달려온다. 남을 위한다는 거, 내가 이런 걸 언제 또 해보겠냐 싶어서 뿌듯했다. 한 40년 구두 만들면서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백화점에 납품할 정도 수준의 구두를 값은 3분의 1만 받고 파는 거였다. 일하는 사람도 개수임금제가 아니라 월급쟁이로 하고. 협동조합식으로 공동투자하자며 동료들을 꽤 포섭했다. 하지만 끝내 성사되지는 못했다. 내 뒷심이 부족해서였다. 안타깝다. 광고 그래도 소신껏 살아보니 좋다. 결혼하고 애들 태어나고 학교 보내고 돈 들어갈 때부터는 공장 돌아가는 게 마음에 안 들어도 내 일이 아니려니 했다. 그만두고 다른 공장으로 옮기면 됐다. 애들이 학교 졸업하고 직장 들어가고 나니 홀가분해졌던지,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사장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게 원칙이라는 생각이 사라졌다. 잘못하고 있다 싶으면 나도 덤비고 싸운다. 후배들이 일할 환경을 선배들이 일찌감치 다져놓지 못한 거, 이게 늘 마음에 걸린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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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당신 곁의 성소수자 노동자가
[6411의 목소리] 당신 곁의 성소수자 노동자가 (2022-06-15) 지아(필명) |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2022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달 14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들머리에서 2022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기념대회 행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벌써 10년 전이네요. 면접을 보러 병원에 방문했던 날이 기억나요. 그때 저는 무릎을 덮는 단정한 치마 정장에 하이힐을 신었죠.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원래 저는 치마나 하이힐과는 거리가 멀어요. 당시에도 바지 정장을 입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바지 정장을 보여달라는 나의 말에, 옷가게 점원이 다리에 흉터가 있냐고 묻더라고요.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바지 정장을 입은 여성 지원자는 강한 이미지라 면접관이 선호하지 않는다는 글이 있었어요. 간호사가 되고 싶어 대학 시절 내내 열심히 공부했기에, 눈 꾹 감고 치마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면접을 봤던 거죠. 한동안 그때 저의 모습이 부끄러웠어요. 제가 병원에서 선호하는 이미지를 수용했기에 최종 면접에 합격했다는 생각 때문에요. 성소수자 친구 중에는 이력서 사진이 여성(남성)답지 않아서, 면접에서 눈으로 보이는 성별과 서류에 적힌 성별이 달라서 번번이 취업 문턱에서 미끄러진 경우가 많거든요. 물론 회사에선 서류나 면접 탈락 사유를 알려주지 않지만, 우리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죠. 광고 병원에 입사하고 폭풍 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아직 근무복도 익숙하지 않은데 환자가 쏟아지듯 배정됐거든요. 너무도 버거운데 환자 생각하라는 말만 하더군요. 조금이라도 힘들다는 티를 내면 저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는 반응이 돌아왔어요. 이에 여러 동료들이 ‘응사’ 하더라고요. 사직서도 내지 않고 도망치듯 퇴사하는 ‘응급 사직’이요. 저는 잠을 줄이고 밥을 먹지 않으면서까지 버텨냈어요. 그런데 회식은 힘들었어요. 회식에서 누가 저에게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봤어요. 남자친구는 없지만, 여자친구는 있는 저는 긴장해서 “있다”고 대답해버렸어요. 얼마나 만났는지, 남자친구 직업은 무엇인지, 질문이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지더군요. 대충 둘러대는데 머리가 아팠어요. 왜냐하면 한국은 이십대 여성과 남성의 인생주기가 살짝 다르거든요. 대부분 남성은 군대에 가잖아요. 급조한 내 연애 이야기가 누군가의 계산에 안 맞았어요. 급기야 남자친구 군대 어디 다녀왔냐는 질문까지 듣는데, 등에 땀이 줄줄 흘렀어요. 광고 광고 그때부터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했죠.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이제 눈을 낮추고 남자친구 사귈 노력을 하라는 말을 듣고, 회식마다 여자친구 없는 남성 직원과 엮어주더군요. 나를 보고 엄지를 척 들면서 집적거리는 남자 직원도 있었죠. 그래서 얼마 전부턴 다시 “애인 있어요”라고 대답해요. 물론 당신에게 내 애인이 여자라고 말하고픈 마음은 없어요. 예전 한 동료가 재미있는 거 알려주겠다며 영상을 보여줬어요. 게이 커플이 자신들의 일상을 촬영한 영상일기였는데, 게이 커플 중 한명이 우리가 아는 지인이었어요. 동료는 영상 속 지인을 가리키며 “게이”라고 웃으면서 말하더라고요. 그때 표정과 말투가 잊히지 않아요. 묘하게 경멸하는 뉘앙스였거든요. 그나마 직접적인 욕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광고 당신이 변희수 하사의 기사를 읽었다고 말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어요. 그동안 성소수자의 투쟁은 우리만의 투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거든요. 뉴스를 잘 보지 않는 당신마저 변희수 하사를 안다는 사실에 이번 투쟁은 뭔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똑같았어요. 트랜스젠더 변희수라는 이유로 노동자 변희수는 모든 것이 부정당했고 어릴 적부터 꿈꿔오던 직장에서 쫓겨났어요. 다시 군대에 돌아가기 위해 싸우던 그녀는 자신이 군대에 존재하면 안 되는 이유가 적힌 54쪽 분량 보고서까지 받아야 했어요. 최근에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변희수 하사가 군대에서 쫓겨난 것은 옳지 않다는 판결이 나왔지만,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녀가 투쟁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수많은 고민 끝에 나와 나의 노동을 지키기로 선택했어요. 그래서 여전히 나의 옆자리에 앉은 당신조차 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죠. 가까운 가족이 갑자기 상을 당했는데 관리자가 퇴근을 시켜주지 않아서 울면서 노동했던 동료와 임신 막달까지 아무도 업무량을 조절해주지 않아서 무리하다 결국 하혈해서 병원에 입원했던 동료의 얼굴이 떠올라요. 눈 밖에 나면 일이 험난해진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주는 일터에서 많은 노동자는 입을 열기보다 그냥 일터를 떠나는 게 쉽게 느껴져요. 오늘도 많은 동료가 침묵을 선택하거나 병원을 떠나고 있죠. 저는 성소수자를 위한 일터가 모두를 위한 일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모두를 위한 병원을 만들겠다는 작은 다짐으로 민주노조에 가입했어요. 요즘 저는 모두가 10년 뒤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나는 가만히 앉아서 일터가 바뀌기만을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늘 그랬듯 지금 나의 자리에서 변화를 만들려고요. 그 변화에 당신도 함께하길 기원하며 이만 글 줄일게요. 우리 함께해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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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바다가 이추룩 됐는데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6411의 목소리] 바다가 이추룩 됐는데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2023-11-26) 박영추 | 제주 해녀 제주에서 난 박영추씨는 열아홉살에 물질을 시작해 육십년 이상 해녀로 살고 있다. ♣️필자 제공 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에서 나고 자랐수다. 태어난 해는 1941년이고. 물질은 조금 늦게 시작했수다. 열아홉살에. 보통 열다섯살 정도면 시작하는데 우리 집은 (바닷가에서 떨어진) 윗동네라 늦게 된 거우다. 그때는 지금같이 큰 거 아니고 조그만 물안경을 썼수다. 물안경을 쓰고 물 아래를 보면은 물이 막 깊어 보이고, 손도 이만하게 크게 보이고 그랬주마씀. 적삼이랑 물소중이(무명천으로 만든 물옷) 입고 처음으로 미역 따러 가니까 미역이 가득 깔려 있는데도 물속에 들어가지질 않는 겁니다. 그래도 막 억지로 들어가서 미역을 붙잡으려고 하면 물살에 이리 착 눕고 저리 착 누워 그게 잘 안되는 거라. 어떻게 어떻게 확 잡았다 싶어 나와보니까 미역 꼬랑댕이만 쪼꼼. 하하하. 그렇게 차차 배운 거우다. 광고 첫날에는 아무것도 못 잡았는데 다른 해녀들이 망사리(채취물을 넣어두는 그물주머니)에 미역이랑 소라 몇개 넣어줬주게. 해녀들은 지금도 그래요. 만약에 깊은 데 못 들어가서 몇개 못 잡은 사람이 있으면, 깊은 데서 대여섯개쯤 해가지고 올라와서 망사리에 넣어주고, 막 추운 날 해삼 잡으러 갔다가 하나도 못하고 오돌오돌 떠는 사람 있으면 하나쯤 놔주고, 경(그렇게) 헙니다. 7~8미터 이상 깊이 들어가는 해녀는 상군, 5미터쯤 들어가는 해녀는 중군, 얕은 데밖에 못 가는 해녀는 하군, 그렇게 됩니다만 상군이 하군을 돕는 겁주(거지요). 어릴 때는 다 하군, 한창때는 중군도 되고 상군도 되지만, 늙어지면 다시 하군이 될 거니, 서로 도와사주마씀(도와야지요). 그게 해녀우다. 광고 광고 또 해녀는 바다에 갈 때 혼자 가는 법이 어수다(없습니다). 혼자 가면 안 됩니다. 잠수가 서툰 때는 물길을 잘 몰라서 물살에 휩쓸릴 수도 있고, 하나 더 하겠다고 욕심을 내다가 숨이 모자라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으니까, 위험할 때 도울 수 있도록 같이 어울려 가는 겁니다. 그래서 해녀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사람이라고 허는 말도 있는 거주마씀(것입니다). 해녀들한테 바다는 무서우면서도 고마운 곳입니다. 바닷속은 땅 위나 똑같수다. 농사지으면 땅 갈고 씨 심어서 싹이 나서 자라면 수확하고 그거지요. 바다도 철 따라 싹이 나고 자라고 수확하고. 옛날에 오염 안 됐을 때는 그랬지요. 몸(모자반)이 막 자라면 몇미터씩 자라서 물속이 꽉 차주마씀(찹니다). 땅 위에 수풀이 우거지는 거같이. 그 속이 왁왁해요(깜깜해요). 그걸 헤치며 헤엄쳐가면 그 소곱(속)에 소라가 있수다. 그때는 몸도 막 돌마다 많이 나고, 톨(톳)도 많이 나고, 감태도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많이 깔렸고, 그거 먹고 소라도, 전복도, 문어도, 오분자기도 그렇게나 많아났수다(많았었습니다). 그때는 바다가 그렇게 좋아서 물질로 밭도 사고, 집도 사고, 아기들 공부시키며 먹고살았수다. 밭에 갔다가 물에 갔다가 종일 일하느라 고달파도 막 힘이 나는 거지요. 광고 경헌디(그랬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어수다(없습니다). 한 15년 전부터 이렇게 된 거 달마예(같아요). 돌을 잡으면 돌이 바삭바삭 부서져. 바다가 얼마나 오염되었으면 경 되시코(그렇게 되었을까). 돌이 단단하고 깨끗해야 미역도, 톨도 붙을 건데, 그게 붙어서 자라야 고기들 의지도 되고 소라도 자라고 그러는 거주게(거지요). 풀이 못 자라니까 다른 거도 자랄 수 없어요. 물속이 사막이나 마찬가지라…. 성게가 먹을 거 없으니까 막 댕기다가 그냥 죽어버려요. 바다가 이추룩(이처럼) 됐는데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산에 소나무가 충이 들어 죽어가는 거 보니까 그거랑 같으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자연이 죽으면 사람도 죽어. 살 수 없잖아요. 바다에 해초가 없으면 고기도 못 살듯이 산에도 마찬가지라. 자연이 없으면 사람도 없어. 작은 거부터 죽어가다 차차 큰 것들까지…. 앞으로 질병만 남지 뭐 남을 게 있을까. 우리는 다 살았지만, 낼모레 죽을 거지만, 앞으로 후손들이 이 오염을 다 겪을 거난(거니까) 걱정입니다. ※정리 이혜영 ‘세대를 잇는 기록’ 대표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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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고공농성 한 달, 노동자 고용에 대한 책임을 묻다
[6411의 목소리] 고공농성 한 달, 노동자 고용에 대한 책임을 묻다 (2024-02-19) 박정혜│금속노조 구미지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 소현숙 조직2부장과 필자(오른쪽)가 공장 철거를 막기 위해 고공농성하는 모습. ♣️필자 제공 내 나이 27살이던 2011년 2월28일, 친구 추천으로 처음으로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일본 기업 닛토덴코의 100% 자회사로 엘시디(LCD) 핵심 부품인 편광판을 만드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란 회사였다. 구미국가산업단지 안 공장에서 방진복, 방진화에 후드까지 쓰고 캄캄한 암막에서 형광등 하나에 의지해 얇은 필름을 검사해 불량을 찾는 검사원으로 열심히 일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점심과 휴게시간 제외하고 10시간씩 일했다. 시간당 900매를 못 채우면 쉬는 시간까지 쪼개 수량을 맞춰야 했다. 3조 2교대로 4일 일하고 2일 쉬어야 했지만, 바쁘다 보니 대부분 5일 근무하고 하루 쉬는 구조였다. 팔다리, 어깨, 허리 안 아픈 곳이 없었고, 연차도 마음껏 쓸 수 없었다. 그래도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을 모으는 재미가 있었다. 안정적인 삶을 원했던 내게 힘들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광고 고객사 엘지(LG)디스플레이 구조조정으로 우리 회사도 같이 힘들어졌다. 2019년과 2020년 두번 희망퇴직으로 500여명이었던 직원은 57명으로 줄었다. 그렇게 57명이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2년을 열심히 일했다. 회사는 흑자를 냈고 성과금까지 들어왔다. 2022년 회사는 희망퇴직했던 사원들까지 다시 불러들이며 100명이 넘는 사원을 채용했다. 희망퇴직했던 사람 중에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숙련된 사람들이니 회사는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함께 힘을 모아 몇개월 만에 이뤄낸 일이었다. 그런데 2022년 10월 공장에 불이 나 공장동이 전소됐다. 기다려달라던 회사는 한달 만에 문자로 공장 청산을 통보했다. 그 한달 동안 일본 본사는 또 다른 100% 국내 자회사인 한국니토옵티칼(평택)에서 대체 생산할 수 있도록 준비했고, 이후 신규 인력도 30명 채용했다. 두 회사(사업장)는 납품처만 다를 뿐 동일한 설비, 원재료로 같은 제품을 생산한다. 광고 광고 달랑 문자 한통으로 청산을 통보하고 희망퇴직을 받는 태도에 너무 화가 났다. ‘그냥 불났으니까 위로금 줄게, 나가. 우리 지금 너희에게 최대한 인심 쓰는 거야. 이거라도 받고 떨어져.’ 회사의 소모품 같은 대우에 투쟁이 시작됐다. 1년 넘게 투쟁하면서 많은 사실을 알았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는 외국투자기업으로 2003년 구미국가산업단지에 입주하면서 토지 50년 무상임대와 법인세, 취득세 감면 등 온갖 혜택을 누렸고, 18년간 7조7천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가운데 원재료와 상품 매입비 등으로 6조원 넘게 본사로 흘러갔고, 이와 별도로 로열티와 배당으로 2천억원가량이 본사에 지급됐다. 그런 회사가 공장 철거를 방해한다면서 전셋집에 가압류를 걸고, 공장에 단전·단수를 자행하며 철거하겠다고 매일같이 찾아와서 위협한다. 광고 고용에 관해 열어두고 대화로 해결하자고 수차례 요청했지만 회사는 일방적인 청산 통보 뒤 지금까지 모든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다른 곳 책임은 없을까. 구미시는 고공농성에 들어가자마자 공장 철거를 승인했고, 고용노동부는 교섭을 통해 사태 해결에 나서도록 하기는커녕 방관적인 태도만 보인다. 법원은 2023년 8월 회사가 제기한 가압류를 충분한 입증도 없이 곧바로 받아들였고, 공장철거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노조 사무실 철거까지 허용했다. 회사는 화재보험금 1300억원까지 다 챙겨 도망치려 하는데 그 누구도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노동자는 권리도 없고 존중받을 가치도 없는 걸까? 1월8일 소현숙 지회 조직2부장과 함께 공장 철거를 막기 위해 옥상에 올라왔다. 공장 재건, 고용승계 쟁취를 외쳤다. 재건이 어려우면 평택공장에서 고용을 승계하라는 게 우리의 요구다. 온몸으로 공장 철거를 거부하고 고용승계가 되는 날 내려가겠다고 다짐했다. 정부는 특혜만 누리다 도망치는 외투기업 먹튀 문제를 모르는 척하고 있다. 누군가는 반드시 외투기업의 노동자 고용 등의 책임 문제를 물어야 한다. 고공농성을 시작한 지 한달이 넘었다. 2월16일 법원이 예고한 강제집행을 막기 위해 전국에서 1천여명의 노동자가 모였다. 우리의 목소리는 구미시를 넘어 전국에 퍼져나갔다. 강제집행은 막았지만, 그들은 또다시 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범한 노동자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장을 지키고, 우리도 지킬 것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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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눈 가리고 아웅’ 통학차량 안전, 이대로는 안 됩니다
[6411의 목소리] ‘눈 가리고 아웅’ 통학차량 안전, 이대로는 안 됩니다  (2023-12-04) 홍수인│전국셔틀버스노동조합 총무국장 오전에 우리 아이들 등원 운행을 마친 18인승 전기통학차량들이 차량 전기충전을 하고 미래세대 하원 운행을 위해 주차장을 나서고 있다. 필자 제공 통학셔틀 노동자들은 어린이집, 유치원, 각급 학교, 학원, 체육시설 등 교육시설에서 미래세대의 안전수송을 담당하고 있다. 학생·교육생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아 일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은 불안하기만 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60대 박영철(가명) 셔틀버스노동조합 조합원은 제빵 사업을 하다 한·일월드컵으로 나라가 떠들썩했던 2002년 셔틀버스 일을 시작했다. 당시 1300만원가량 하던 15인승 차량은 할부로 샀다. 목돈이 있을 리 없었기에 캐피탈사에 이자를 내야 했다. 일자리를 소개해준 브로커에게는 소개비 50만원을 줬다. 불법이지만 도리 없었다. 한달치 운행료를 줘야 하는 경우도 많다는데, 싸게 구한 셈으로 여겼다. 새로운 곳과 계약을 하려면 여전히 소개비를 줘야 하는데, 요즘은 70만원이다. 광고 20년 남짓 흐른 지금은 유치원과 초등학생이 다니는 학원, 두곳에서 차량을 운행한다. 한곳당 받는 돈은 한달 150만원 정도이고, 연료비에 보험료와 차량 유지비 등을 제하면 실제 수입은 100만원 남짓이다. 자기 차량을 이용해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고 최저임금 정도를 버는 셈이다. 이 돈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워 박 조합원은 이른바 ‘쪽타임’을 뛴다. 새벽시간 중·고등학생을 등교시키고, 밤늦게는 학원에서 집으로 실어 나른다. 현행법으로는 셔틀버스 기사와 교육시설이 공동소유한 차량만 유상운송이 가능하다. ‘쪽타임’은 그렇지 않은 일이다. 광고 광고 2015년 통학차량 안전사고가 연이어 터지자 정부에서는 사설 셔틀버스를 양성화한다며 차량 공동소유제를 도입했다. 교육시설을 운영하는 원장에게 셔틀버스 소유 지분 1%를 의무적으로 갖도록 해 안전운행 책임을 부과한 것인데, 그 1%로 책임을 지운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며 그 1%를 실제 원장이 지불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운행하는 학원을 옮길 경우엔 이전 학원 원장으로부터 1% 지분을 넘겨받아야 하는데, 관련 서류 절차가 제때 진행되지 않기도 한다. 시간이 중요한 셔틀기사들이 몇번이나 찾아가 독촉을 해야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폐업한 학원주가 잠적해 법원까지 가서 공동소유제를 풀었다는 조합원도 있다. 결국 있으나 마나 한 차량공동소유제로 불법의 굴레를 씌워 놓으니, 현장에서 일하는 우리 조합원들은 ‘외줄타기’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우리 노조는 공동소유제가 아니라 통학차량 등록제를 요구하고 있다. ‘어린이·학생 통학 전용차량’으로 등록하고 차량과 함께 운전자를 등록해 법률이 정한 교통안전교육 등을 이수하고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시행규칙 104조에 따른 유상운송 허가를 받아 운행하자는 것이다. 1천만 미래세대의 안전한 이동권 보장과 30만 셔틀버스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보장 등 사회 공공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다. 광고 최근에는 전기차 문제로도 혼란스럽다. 국회는 2019년 4월 대기관리권역의 대기환경 개선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4년 뒤인 2023년 4월3일부터 어린이 통학버스 경유차량 사용을 제한했다. 그런데 2021년, 유예기간을 2024년 1월로 연장하는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올해 8월에는 박찬대 민주당 의원 등이 유예기간을 5년 더 연장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러다 특별법이 없어질 것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단위체중당 호흡량이 2배 이상 많아 미세먼지에 취약하다. 미래세대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통학용 전기차량을 확대하려면 제대로 된 대안이 나와야 한다. 경유차량을 소유한 셔틀버스 노동자들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이렇다 할 만한 지원책도 보이지 않는데, 경유차량을 제한하는 특별법마저 없어진다는 설까지 있으니 머릿속이 복잡하다. 통학차량은 어린이의 안전만이 아니라 셔틀버스 노동자의 안전과도 직결된다. 유럽은 어린이 통학차량은 강화된 안전기준에 따라 제작 단계에서부터 별도로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안전장치를 개조하는 것에 그치는데, 비용은 셔틀버스 노동자의 몫이고 불량 개조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노조는 정부가 차제에 미래세대 건강권, 조합원의 안전과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를 미루기만 할 게 아니라 전기차 전환지원 정책 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바란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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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난 6일 의원총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은 4월 총선에서 현재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유지하고 통합형 미래정당을 만장일치로 추진하기로 하였습니다. 민주당은 윤석열정권 심판을 위해서는 야권이 분열되는 것보다 경쟁력 있고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로 뜻과 힘을 모으는 취지로 결정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출처 국민일보).  각 정당이 정당 투표에서 얻은 득표수에 비례하여 당선자 수를 결정하는 비례대표제. 그 방식을 이번 총선에서 어떻게 취할 것인지에 대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유지냐, ‘병립형 비례대표제’의 회귀냐에 대한 찬반이 뜨거웠습니다.  각 권역에서 정당이 득표한 비율만큼 의석을 확보하는 기존 병립형 방식이 거대 정당에 유리하기에 유력하게 검토되었지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거대 정당의 독식을 막고 소수정당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정당의 전체 의석수가 아닌 일정 비율만 연동되도록 하여 소수정당이 원내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어 민주당은 거대정당의 책임이자 새로운 연합정치로 나아가겠다는 포부로 이를 유지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통해 거대 정당의 2중대로 소수정당을 활용하는 것은 아니냐는 비판도 받았던 방식입니다.  이러한 민주당의 행보에 여야권 인사들은 각자 다양한 반응을 보였는데요. 새진보연합은 민주당에 비례연합정당 추진을 제시하면서 실제로 만나고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선거연합정당인 녹색정의당(정의당과 녹색당)은 선거연합정당의 제도화, 결선투표제의 전면화, 교섭단체 요건 완화 등 제도보장을 동반해야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민주당과의 연대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출처 뉴스1).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민주당의 원칙은 정치공학과 당리당략에만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민주당이 유지하는 준연동형 비례제에 관한 산식을 민주당 의원들도 잘 모를 것이라며 국민들이 선거에서 자신의 표가 어떻게 반영되는지 모른다면 선거라고 볼 수 없다고 강하게 질타했습니다(출처 데일리안). 국민의힘의 윤재옥 원내대표도 "이러한 결정은 이재명 당 대표 방탄과 함께 22대 국회에서도 운동권 정당들과 의회 독재를 계속해 나가겠다는 선언"이라며 대통령중심제 하에서 양당제가 우리 정치 기본 골격이라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제3지대도 부정적인 입장이 많았습니다(출처 매일경제). 양향자 개혁신당 대표 "준연동형 선거제 유지 방침은 꼼수"라 비판하며 지역구 타파를 위해 타협하지 않았던 노무현 대통령을 예시로 들며 어려워도 정도를 걷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낙연 새로운 미래 공동대표는 "양당독점 정치구조와 정치양극화의 폐해를 극대화하는 망국적 발상"이라며 여야가 총선의 승리를 위해 위성정당 설립을 서로 묵인하는 처사라 지적했습니다. 금태섭 새로운선택 공동대표는 "민주당과 민주당에서 한두석 해보려는 세력들은 역사에 길게 오명을 남길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번 총선은 양당제의 위기와 제3지대의 부상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 예측이 더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올바른 선택을 돕기 위한 선거제도의 투명성과 공정성입니다. 개인적으로 비례대표제도 주도권을 거대 양당이 갖는 모순적인 형태는 피할 수 있는 제도적 개편과 국민참여방안도 마련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다양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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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땀의 가치에 국적이 있나요
[6411의 목소리] 땀의 가치에 국적이 있나요 (2023-12-10) 이태현 |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선전편집실장 선박 건조 공정 가운데 하나인 (블록)대조립 작업장에서 용접하는 노동자. 필자 제공 우리나라 조선사들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건조 기술력은 워낙 뛰어나 전세계 발주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다. 환경 규제에 맞춰 친환경 연료 추진선으로 교체하는 추세인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엘엔지 해상운송 수요가 늘면서 전세계 엘엔지 운반선 발주량이 크게 늘었다. ‘신조선 발주 붐’에 웃음꽃을 피울 것 같지만, 현장 상황은 그렇지 않다. 조선업종은 노동강도에 견줘 임금이 형편없이 낮기에 일감은 가득 찼지만 일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물 들어와도 노 저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가 되니, 조선소들은 타이, 중국,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등에서 E-7(일반기능인력) 비자를 받은 이주노동자를 대거 받아들였다. 노동조합에서는 갑작스레 늘어난 이주노동자들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함께 활동해 나갈지 당혹스러웠지만, 차츰 이주노동자 보호를 위한 활동을 늘려가고 있다. 광고 지난해 10월 어느 저녁 퇴근 무렵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가 보니,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주노동자가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던 중 오토바이와 접촉 사고가 났는데, 이주노동자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사고 조사와 후속처리를 할 수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조선소라는 위험한 공간에서 어떻게 일을 하라는 것인가. 이런 비슷한 일이 몇 차례 있고 나서야, 회사는 외국인지원센터를 신설하고 외국어대 졸업생을 인턴으로 채용해 통역 업무를 맡겼다. 이제 생산 현장에서 교육 등 소통이 필요할 때면 지원센터에 요청해 통역사를 부른다. 지난 7월에는 타이 출신 한 이주노동자가 노동조합을 방문했다. 번역기를 써가며 그가 한 말은 “여권을 찾아달라”였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현지 송출업체와 계약할 때 ‘고용주가 여권을 보관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주노동자의 이탈을 막으려고 여권을 빼앗아 가는 것은 인권침해이자 출입국관리법 위반이다. 노동조합은 조합 소식지에 이를 알리면서 이주노동자 인권침해를 멈추라고 이주노동자들의 법적 고용주인 하청업체 업주들에게 경고했다. 광고 광고 올해 조선업에 취업한 이주노동자는 5470명으로 지난해(1017명)보다 5배 이상 늘었다. 이들이 받는 월급은 300만원가량(세금 공제 전)이다. 전문기능을 가진 이주노동자에게 발급하는 E-7 비자는 임금 하한선이 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의 80%(월 280만원) 아래로 급여를 줘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정부는 이 기준을 중소·중견기업에 한해 70%로 낮췄다. 올해 최저시급(9620원)으로 월 소정근로시간(209시간)을 일하면 200만원 언저리인데, 별도 수당이 없는 이주노동자들은 초과근무 수당으로 100만원가량을 채운다. 금속노조가 실태조사에 나서 이주노동자 410명을 설문조사하고 22명을 심층인터뷰했다. 타이에서 온 용접공에게 근무시간표를 적어달라고 하니, 평일 절반은 밤 10시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오전 8시 출근해서 오후 5시까지 일하고 있었다. 주 77시간 노동에, 한달에 쉬는 날은 3~4일에 불과했다. 이렇게 번 돈으로 브로커에게 준 수수료 빚을 갚고 가족들에게 송금한다. 광고 조선소 일거리는 내년이 더 많다. 근속기간이 길어지면 이주노동자들은 최저시급과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활동가로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현장에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은 없다. 1년 단위로 계약을 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불성실하거나, 노동조합 활동 움직임을 보이면 언제든 계약을 거절당할 수 있다. 부당한 현실을, 노동법 조항을 알아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다. 노동청에 법정 근로시간 초과 등을 신고해볼까. 하청업체 사장은 벌금을 내고서라도 이주노동자에게 일을 시키겠다고 한다. 원청으로부터 도급받은 물량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벌금 납부보다 더 곤란한 일이 생긴단다. 금속노조와 조선업종노조연대는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조선산업 종사자 차별 처우 금지, 표준계약서 사용 의무화 등 법과 제도를 통해 노동자를 보호하는 ‘조선산업 기본법’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기업이 불법을 저지르고 정부가 눈감아주는 부조리한 현실을 어떻게 해서라도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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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본업과 부업 사이 경계인, 프리랜서
[6411의 목소리] 본업과 부업 사이 경계인, 프리랜서 (2024-02-05) 안나(가명)|교통방송 리포터 2023년 설날 경부고속도로에 고향을 찾는 차량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연합뉴스 새벽 5시30분 알람이 울린다. 씻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방송국으로 출근한다. 나는 지방의 한 교통방송 리포터다. 이른 아침 방송국으로 가는 나에게 택시기사님이 넌지시 묻는다. “방송국에서 근무하세요? 멋진 일 하시네요. 저도 애청자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답하며 웃어 보인다. 아침 7시 방송국 도착. 7시15분 방송을 시작으로 15분·30분·45분. 매시간 15분 간격으로 교통정보와 기상정보를 전달한다. 낮 1시를 전후해 저녁 근무자와 교대하고 퇴근한다. 매달 새롭게 작성되는 근무표에 따라 휴무를 제외하고 한달에 20일을 출근해 꼬박 6시간가량을 근무한다. 휴무는 주말과 휴일 상관없이 근무표에 따른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방송국 지침도 늘 체크해야 한다. 이를테면, 업무 교대에 관한 지침과 기상정보에 추가할 내용, 방송 마무리 멘트 관련 지시사항 같은 것들이다. 광고 이렇게 한달 일해서 손에 쥐는 급여는 13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 최저임금 수준이다. 2013년 입사 때나 문화체육관광부가 특수고용노동자를 보호하겠다며 계약서를 쓰도록 한 2017년이나 그리고 2024년 지금이나 금액 수준은 큰 변함이 없다. 교통방송 리포터가 프리랜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더 있다. 입사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정보 방송 말고 다른 프로그램의 한 코너를 맡아 진행할 기회가 생겼다. 즐거운 마음으로 방송했지만 출연료는 없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어차피 근무시간 중 추가로 방송하는 것이니 별도 출연료가 지급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는 회사에서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았다. 한번은 리포터 근무 기준과 방송 출연료 기준이 알고 싶어 요청했다. ‘등급별로 큰 차이가 없으니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후 문체부가 마련한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면서 추가로 방송할 경우 출연료를 따로 받게 되었지만, 교통 리포터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경우는 드물기에, 임금 총액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광고 광고 1년에 두차례 방송 개편을 앞두고 계약서를 작성한다. 그러나 임금 협상은 없다. 방송 경력이 반영되지도 않는다. 방송 1개월차도, 20년차도 출연료는 동일하다. 열심히 해서 경력을 쌓아 더 나은 방송인이 되어도 처우가 더 나아지지 않는 현실은 2~3년차 리포터들의 퇴사율이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교통방송 리포터 대다수는 여성이다. 그래서 결혼과 임신은 권고 퇴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10년 남짓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결혼 뒤 출산하고 방송국에 복귀한 리포터는 단 한명뿐이다. 당시 출산으로 인해 자리를 비우게 될 리포터의 업무를 다른 리포터 10명이 대신하겠다고 회사를 설득해, 겨우 퇴사 아닌 한달 출산휴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후로 그런 요청이 다시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었고, 결혼하고 임신한 리포터는 퇴사 권고에 울면서 방송국을 떠났다. 그렇게 결혼과 임신 뒤 퇴사는 자연스러운 수순이 됐다. 광고 방송국 정규직 직원들은 말한다. 잠깐 와서 방송하고 돈 벌 수 있어 좋겠다고. 하지만 아무리 경력이 쌓여도 동일한 출연료를 받고, 결혼하고 출산하면 퇴사 권유가 이어지고, 퇴직금도 정년 보장도 없는 하루살이 인생임을 안다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실시간 교통정보 방송 덕분에 지·정체 구간을 피해 목적지에 도착했다거나, 일하기 수월하다는 각종 업무 차량 기사님들의 피드백을 받을 때면 보람도 느끼고 기쁘다. 하지만, 교통방송의 핵심 업무인 교통정보 전달을 담당하는 리포터로서의 존중도, 최소한의 권리도, 정당한 대가도 없는 프리랜서로서의 만족은 또 다른 문제다. 좋아하는 ‘일’과 ‘생계’ 사이의 고민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리포터는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자격증을 취득해 다른 일을 병행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프리랜서는 경계인이다. 본업과 부업의 경계, 소속과 독립의 경계, 자유와 계약의 경계를 넘나들며 일한다. 경계인으로서가 아닌 직업인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면, 나의 ‘직업’을 진정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나의 ‘일’은 사랑하지만, 나의 ‘직업’을 사랑하기는 어려운 이유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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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재일동포는 ‘투명인간’이 아닙니다
[6411의 목소리] 재일동포는 ‘투명인간’이 아닙니다 (2022-06-08) 공경순 | 재일동포 3세 한국·일본·미국에서 펼쳐지는 재일동포 4대의 가족사를 다룬 드라마 파친코. 애플티브이플러스 제공 저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동포 3세입니다. 일본에서 나서 자랐지만 민족교육을 받아 제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제 성격의 일부를 만든 것은 민족교육에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민족학교에서는 차별을 별로 못 느끼고 컸습니다. 제가 일본 사회에서 크게 차별을 느꼈던 때는 다 커서 어른으로 살아가게 되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벌써 20년도 지난 이야기여서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소한 걸림돌이 많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난 건데, 사회 초년생 때 자취를 하게 되었는데 집 계약을 할 수 없어 회사에서 빌려줬습니다. 그때 저는 “그래, 안 빌려준다면 빌려주는 길을 꼭 찾아올 거야”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낙담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되게 하는 길을 찾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빌린 건 아니니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네요. 그렇지만 굴하는 모습만은 보여주기 싫었던 그 시절이 기억납니다. 광고 제가 한국에 온 지 11년이 흘렀습니다. 한국에 오면 차별이 없을 거라는 기대를 살짝 했지요. 저는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이니깐요.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제가 한국에 넘어온 11년 전에는 아직은 거소신고증을 갖고 생활을 해야 하는 등 여러 면에서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그 흔한 네이버 아이디 등록도 힘들었고, 핸드폰도 남편 명의로 개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몇년이 흘러 거소신고증이 ‘주민등록증’으로 바뀐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가 생성되면 이제 나는 이 나라에서 내국인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일부 편해진 면도 있었으나 외국인 취급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외국인이 나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여러번 했었습니다. 요새 대포통장 때문에 법이 강화된 건 이해하는데 은행에 가면 저희는 늘 외국인으로 분류가 됩니다. 주민등록증을 보여줘도 전산에 외국인으로 뜹니다.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외국인인 셈입니다. 그런데 다문화가정 혜택에서는 제외됩니다. 어린이집 대기를 걸 때도 다문화가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내국인으로 대기 줄을 섭니다. 왜냐고요? 그냥 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답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외국인도 내국인도 아닌 법의 중간에 낀 ‘투명인간’이 된 것입니다. 광고 광고 작년에 제 명의 집을 매도할 일이 있었는데 내국인이 필요한 서류를 다 준비했으나 매도하는 날이 되니 세무서에서 세무 관련 서류를 떼오라고 하더군요. 부동산 계약용 인감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세무 관련 서류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세무서에 달려갔는데 그 서류를 떼는 데 2~3일 걸린다고 했습니다. 계약이 엎어질 수도 있는 큰 문제였습니다. 세무서 직원에게 빌고 빌었더니 다행히 빨리 대처해줘 그날 매도를 무사히 할 수 있었으나,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재일동포는 법 사이에 낀 투명인간이구나’라고 다시금 느꼈습니다. 재일동포 사회는 커뮤니티 사회입니다. 힘든 일이 많은 속에서도 작은 동네 안에서 서로 돕고 살았지요. 저는 그런 환경이 그리워설까요, 김포지역 한 봉사 모임에서 2018년부터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캘리그라피 작가로 활동 중인데요, 소외계층 분들에게 힘이 되는 글귀를 써드린 액자를 드리거나 사랑의 글귀를 담은 머그컵을 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경기도지사 표창도 받아보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이런 큰 상을 받게 될 줄 생각도 못 했지요. 광고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은 지금 이제는 외롭지도 않고 내 편이 많아서 든든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법 안에서는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일본에서 조선사람으로서 꿋꿋이 살아왔는데, 한국에 와보니 ‘내 나라는 어디일까?’ 헤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평생 외국인도 아닌, 내국인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려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나라를 가든 늘 투명인간 취급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슬프기도 합니다. ‘재일동포’라는 존재가 좀 더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에 오래 살았지만 한국 국적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 왜 그들은 국적을 바꾸지 않을까요? 재일동포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일제강점기의 아픔입니다. 제가 캘리그라피를 열심히 하고 인정받고 싶은 이유 중 하나가 ‘재일동포 공경순’이라는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캘리그라피 글귀에도 재일동포에 관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자주 담습니다. 수십년이 지나도 조국을 잊지 않고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재일동포를 더 알리고 싶고 한국 사회에서 더불어 잘 살아가고 싶습니다. 내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그런 ‘끼인’ 존재가 아닌, 저희 재일동포를 알아주세요. 저희도 같은 민족입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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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없는 <채식주의자>
사진 : <채식주의자> 저자 한강, 출판 창비, 2022.03.28. 발행 아무도 자신을 인간으로 존중해주지 않아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래서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존재하려하는 한 여자의 슬픈 이야기 <채식주의자>는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책이다.  지금의 나와 우리가 인간답게 잘 살아있는지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역작이다.  주인공 영혜는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맞고, 맞는 것을 가족들로부터 방관당하면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하며 자라온다. ‘자신에게 관여를 하지도 않고, 자신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았다’는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도 주체로서 존중받았을 리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기를 못 먹는 것은 차치하고 이상한 꿈 때문에 수개월 잠 못 이루고, 날로 여위어간다면 이유가 궁금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고생하는 것이 못내 가슴 아프고 염려되는 마음에, 왜 그런 꿈을 꾸는지 싸워도 보고, 화도 내보고, 병원도 데려가면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법 하다. 하지만 영혜의 남편은 영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깊이 알거나 관여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방치하다가 본인 삶에 폐를 끼치자 그때서야 친정에 알리는 방식으로 조치를 취한다.  때리던 아빠, 각자 살 길을 찾으며 숨죽이던 가족들, 남편, 그리고 그런 삶을 그냥, 살아낸 영혜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본인을 수없이 죽이고, 죽이는 것을 방관해온 것이다. 그렇게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죽어있는 삶을 살던 영혜는 아버지가 강아지를 죽이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먹으면서 인간이라는 동물의 동물(짐승)적인 모습, 본인 내면의 폭력성을 자각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다치게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부엌의 칼을 내심, 두려워한다.  그 후 남편의 삶속에 붙어있는 부속물처럼, 가정부처럼 여느 날을 보내다 일순간 도마 위의 칼이 밀리듯, 주위의 모든 것들이 밀려나간다. 그리고 꿈을 꾸기 시작한다. 사람을 죽이고 동물을 죽여서 맛있게 먹는 피 웅덩이에 비친 짐승같은, 괴물같은, 인간답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영혜는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붙든채 인간으로서의 본인을 상실하고 짐승이 되는 것을 거부하며 처절하게, 고기먹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이 영혜의 삶에 깊이 관여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채식주의자로 비추어진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채식주의자’ 라는 제목 자체가 아무도 이해하려들지 않는 삶, 관여해주지 않는 고립된 삶,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영혜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영혜를 채식주의자라 칭한다. 하지만 영혜는 단 한번도 본인을 채식주의자라 칭한 적이 없다. 그저 “저는 고기 안 먹어요.” 단호하게 말했을 뿐이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채식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먹기를 지양하는 것일 뿐이다. 꿈속의 날고기를 씹어 먹던 짐승이, 그 얼굴이 자신이었다는 두려움 가운데, 그런 짐승이 되기를 처절하게 거부하는 와중인 것이다.  그래서 ‘저는 고기 안 먹어요.’ 라는 영혜의 말이 ‘저는 고기를 먹던 꿈속의 그 얼굴, 그 짐승, 그 괴물이 아니에요’ 라는 말처럼 들렸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 너머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리려는 노력조차 해주지 않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책의 제목, <채식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무도 인간으로서 대해주지 않아 괴물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자신을, 인간이라는 일말의 자각으로 간신히 붙들고 있는 영혜의 입에, 아버지는 사정없이 고기를 밀어 넣는다. 그 후 자살을 시도하는 영혜의 모습이 마치 ‘나는 이제 인간으로서의 나를 상실해버렸다’, ‘나는 이제 그 짐승이 되어버렸다’ 울부짖으며 인간으로서의 나를 죽이는 동시에 인간으로서, 죽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후 1장 말미에 “...그러면 안돼?” 라며 뜯어먹은 동박새가 손아귀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인간으로서의 존재의식,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놓아버리고, 겉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영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사진: Unsplash의Melanie Wasser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있나 사진 : 늑대무리 속에서 양육되다 구출된 인도소년 디나(Dina Sanichar) 나는 영혜가 꾸는 꿈이 ‘무언가로 존재하려는 욕구의 분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늑대무리 속에서 살아온 인도소년 디나는 평생 늑대의 생활양식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둘러싼 사회, 환경이 그 사람을 인간으로 대해주고 존중해주어 스스로를 인간이라는 존재로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혜는 오랜 기간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런 영혜가 끝내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여도 좋으니, 어떤 존재로서, 유의미하게 실존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꾸만 꿈꾸게 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혜가 인간도 무엇도 아닌 존재라는 점에서 성적매력을 느꼈던 형부, 그런 형부로 하여금 온몸에 꽃이 그려지고, 식물로서 교합하고, 식물로 존재하는 길을 택하기 시작하면서 영혜는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된다. 인간이 아닌, 낯익지만 낯선, 꿈속의 얼굴을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라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영혜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기에 식물로 존재하기를 택하고, 완전한 식물이 되어간다. 영혜의 경우 극단으로 치달은 사례이긴 하지만, 영혜처럼 인간으로서 존중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잘 존재하지 못해 무너져내리는 일이 자주 일어나곤 하지 않나.  물건 값을 계산해주는 기계 대하듯, 사람을 대하지는 않았나,  눈인사는 하고 지냈나, 크고 작은 일상 속에서 나는 얼마나 사람들을 인간으로 대우하면서 살아왔는가를 돌이켜보며, 부디 내가 수많은 '영혜'를 만드는데 일조하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잘 살아있나 마음속으로 죽음을 체험함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을 극단적으로 죽음을 향해 기투함으로써,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을 비로소 자기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 견디어 내는 것이다…죽음에로의 선구란, 가장 독자적이고 가장 극단적 존재 가능을 이해할 가능성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일상적 현존재는, 죽음에로의 선구를 통해, 세인-자기로부터 벗어날뿐더러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 존재를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 앞에 직면할 단서를 마련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 : 선구 [先驅, Vorlaufen, Anticipation]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해제), 2004., 이선일) 영혜의 형부와 언니는 영혜의 모습을 보면서 하이데거가 말했던 ‘죽음에로의 선구' 를 한다.  형부는 스스로의 목숨을 쓰레기처럼 내던져버리려 했던 영혜를 보면서 일순간 무척이나 지치고, 버텨온 삶이 넌더리나고, 본인의 삶을 담아온 모든 것들이 견딜 수 없어진다. 십 여년 간의 작업이 그가 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 되어버린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그렇게, 그런 식으로 앞으로를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깊은 슬럼프에 빠진다. 성실을 천성으로 여기며 인내로 꽁꽁 뭉쳐진 삶을 살아온 언니도 하혈을 하는 자기 모습과 자살을 시도하던 영혜의 모습을 겹쳐보며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단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음을, 다만 견뎌왔을 뿐임을 자각한다. 그래서 살 시간이 기한 없이 남아있음을 알고도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다. 형부도, 언니도, 영혜를 통해서 죽음을 간접 체험한 뒤 내가 없이 죽어있던 삶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런 삶에 회의를 느껴 슬럼프에 빠지거나, 자살을 시도하려 산에 오른다. 앞으로도 그런 존재로, 그런 식으로, 견디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워진 것이다.   자살하러 올라간 산길의 끝에서 언니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지 못한다.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으로 버티고 서 있는 나무들, 박명 속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로부터 무서우리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을 듣는다. 그것이 부디 생명의 말이었기를, 언니는 앞으로 인간으로서, 나로서, 잘 존재하는 삶을 살기를, 그런 결말이기를 바라면서 책을 덮었다. 사진: Unsplash의todd kent 내 삶에 내가 잘, 살아있나?  ‘그렇다’고 명쾌하게 답할 수 없어서 새로운 삶을 찾아나서게 된 것 같다.  당신은 어떠한가? 인간답게, 당신답게 잘, 살아 있나? 당신다운 삶을 응원하고 당신답지 못했던 순간을 위로하고 싶다.   오늘도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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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저 옥천으로 가요”…괜찮은 귀촌 일자리까지, 운이 좋았다
[6411의 목소리] “저 옥천으로 가요”…괜찮은 귀촌 일자리까지, 운이 좋았다  (2022-12-18) 이다현 | 옥천군 마을공동체지원센터 팀장 충북 옥천군 이원면 장화리 손모내기 축제에 나온 어르신들. 필자 제공 “저 옥천으로 이주해요.” 이 말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6년 전 서울에 직장을 잡을 때부터 지역살이를 생각했다. 평생을 대도시에서 살았으니 한적한 곳에서도 살아보겠다는 정도였다. 그러다 지역에서 이런저런 활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설렜다. 그래, 지역소멸시대라는데 나 하나라도 지역으로 가자. 그렇게 나의 지역 이주 프로젝트에 시동이 걸렸다. 광고 전국 모든 지역을 후보지로 놓고 물색을 시작했다. 기준은 내가 참여할 만한 청년정책이 있는지와 교통, 접근성, 환경 등이었다. 그렇게 여러 단계를 거쳐 충북 옥천을 최종 점찍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오래 살았던 대전과 가까워 안정감이 있었다. 게다가 시민사회 활동이 활발한 곳이라니 나 같은 초짜 외지인도 슬쩍 끼어 살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였다. 아는 사람도 없는데 일자리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채용공고를 뒤지다 곧 좌절했다. 내가 해왔던 일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사회복지, 기술, 운전, 제조업 쪽으로 최저임금 수준의 단기계약직이 대부분이었다. 요즘 여성들도 굴삭기나 지게차 자격증 딴다는데 지금이라도 도전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기술 배워야 먹고산다던 어른들 말씀이 갑자기 사무쳤다. 광고 광고 약 석달을 그렇게 지내고 현재 나의 직장을 발견했다. 마을공동체지원센터라고, 행정이 지원하는 공동체 사업에 주민이 참여하도록 돕는 중간지원조직이었다. 마을공동체는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이고, 주민 활동을 지원하면서 지역을 두루 살피는 데도 도움 될 것 같았다. 그동안의 자괴감을 얼른 추스르고 진심을 담아 이력서를 썼다. 면접 뒤 약 2주 만에 나는 드디어 옥천군민이 되었다. 이곳 중간지원조직 업무는 도시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중간’은 행정과 민간의 사이라는 의미다. 옥천군 마을공동체 사업에 주민들이 참여하도록 돕고, 주민 활동을 지원한다. 이 ‘지원’에 내가 하는 대부분의 일이 포함되어 있다. 공동체 활동을 계획하고, 관련한 서류 준비를 돕는다. 행사가 있으면 홍보물도 만들어 참여자를 모으고 손뼉 치며 흥을 돋운다. 갑자기 행사 진행자(MC)가 되기도 한다. 모든 어르신을 어머님, 아버님으로 부르며 우리 사업에 재미와 보람을 느끼시도록 응원해드리는 것도 역할 중 하나다. 광고 문제는 컴퓨터다. 대부분 70~80대 이장님들이 마을 사업을 이끄는데, 관련한 컴퓨터 작업이 내가 봐도 보통 일이 아니다. 첨부해야 할 서류는 어찌나 많은지, 서류 때문에 일 못 하겠다는 협박(?)도 이따금 터져 나온다. 커피 타드리며 불만도 들어주고, 조금만 더 해보자고 설득한다. 정 안 되면 노트북 들고 옆에 앉아서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다. 영수증을 붙이고 정리하는 게 우리 같은 중간지원조직의 연말 풍경 중 하나이다. 이렇게 일하다 보니, 어르신들은 종종 나를 공무원으로 아신다. 중간지원조직 직원이라고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도 고개를 갸웃하신다. 이제는 나름 방법을 써서 ‘준공무원’이라 소개한다. 그러면 젊은 처자가 좋은 직장 다닌다고 대견스러워하신다. 진짜 공무원은 아니지만 어르신 말씀대로 좋은 일자리라 생각한다. 대체로 업무시간이 정해져 있고, 육체적인 노동강도도 세지 않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월급은 웬만한 도시 수준인데, 생활비는 그만큼 들지 않는다. 현재 사는 볕 좋은 18평형 아파트 월세가 45만원인데, 군에서 청년 월세지원금으로 월 10만원을 지원해준다. 확실히 서울에서 살 때보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여유를 느낀다. 지역살이에서 가장 기대한 바이기도 하다. 나는 운 좋게도 괜찮은 일자리를 잡아 고민하던 지역이주를 실현할 수 있었다. 여기 직원 가운데 나처럼 일을 계기로 옥천에 온 분이 5명, 도시로 나갔다가 유턴한 청년이 2명이다. 지역소멸 위기에서 일자리의 중요성을 새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자리는 매우 한정적이다. 갑자기 조직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 결국, 처음 마주했던 일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이제 생계를 위한 일뿐 아니라 재밌게 살기 위한 활동도 계획 중이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일과 활동의 중간에서 사람들을 연결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한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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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코로나 대처 영웅”이라 부르더니 지금은
[6411의 목소리] “코로나 대처 영웅”이라 부르더니 지금은 (2024-01-29) 김경운 | 간호사·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성남시의료원지부 마취회복파트 간호사로 코로나 환자 수술에 참여해 환자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필자. 필자 제공 2020년 1월 성남시의료원 개원을 앞두고 마취회복파트 간호사로 입사했다. 마취의를 도와 수술할 환자를 마취하고, 수술 뒤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의 회복을 돕는 일을 주로 했다. 처음 간호사 일을 시작한 2013년에는 사람들이 “남자 간호사”라고들 했지만, 지금은 그냥 간호사로 여긴다. 하지만 제약도 많다. 젊은 여성 환자를 간호하거나 시술에 참여할 때가 특히 어렵다. 병원 개원을 앞두고 코로나19가 시작됐다. 정부 지침에 따라 감염병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서 의료원은 정식 개원을 미뤘다. 숨 돌릴 틈 없이 업무가 밀려들었다. 방호복을 입고 환자의 기본적인 바이털(혈압, 맥박, 호흡, 산소포화도) 확인, 의사의 오더(지시)를 확인하며 투약, 침상 정리, 식사 제공까지 담당했다. 여기에 기저귀 갈기, 체위 변경, 욕창 처치, 시트 변경, 석션(가래나 혈액 제거), 심폐소생(CPR) 상황 환자 관찰, 환자 정보 조사와 고압산소요법 치료, 치매·정신질환 환자들 낙상이나 위험 행동으로부터의 보호, 화장실 동행, 각종 약물 처치, 코로나 치료제 처치와 부작용으로부터의 관찰과 대처, 청소와 방역, 의료폐기물 박스 만들기와 관리, 택배 수령…. 선별진료소를 설치하고 주출입구를 관리하면서 여름에는 땡볕과, 겨울에는 추위와 싸웠다. 광고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이런 일들을 하려니 숨쉬기가 힘들어 어지럽고 구토를 하기도 했다. 생활치료센터에서 일할 때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선제검사소, 백신 예방접종, 생활치료센터, 재택 격리자 관리까지 업무들이 수시로 바뀌고 추가되었다.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환자 임종을 지키고 사체까지 관리했다. 일부 환자들의 폭언, 폭행, 성희롱에 시달리기도 했다. 사업상 계약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야 한다던 50대 남성이 기억난다. 음성 결과가 나오지 않자, 자신은 상태가 괜찮다며 여러 욕설과 과격한 행동을 했다. 나를 비롯한 남성 의료진이 주로 간호해야 했다. 나중에 미안하다고 하셨는데, 초창기 엄격했던 규정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당시는 힘들었다. 광고 광고 정부와 언론, 국민들은 우리더러 “영웅”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영웅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적자 누적을 이유로 지방의료원 운영을 위탁하고 민영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부인하지만) 그 첫번째 타깃이 성남시의료원이다. 이미 성남시는 보건복지부에 위탁 승인을 신청했고 병원장은 15개월째 공석이다. 뒤숭숭한 위탁 논란 속에서 많은 의사가 병원을 떠나 정원(99명) 대비 충원율이 50%대에 불과하다. 지난해 연말엔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나순자 위원장과 전국 지방의료원 지부 간부들 28명은 18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2024년 감염병전담병원 회복기 지원 예산이 0원에 가까운 수준으로 깎였기 때문이다. 강바람 거센 국회 앞 농성장은 유독 추웠고, 단식 3일차부터 지부장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목숨 걸고 막아내야 한다는 각오로 물과 소금만으로 하루 24시간을 계속 버텨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요구했던 2900억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약 1천억원 예산이 편성됐다. 광고 하지만 끝이 아닌 시작이다. 각자 병원으로 돌아가 내부 현안 및 지방자치단체와 각종 사안을 협의해야 한다. 나 역시 의료원 정상화와 위탁 반대 투쟁을 해야 한다. 공공병원 적자를 얘기한다. 그런데 그게 직원들 잘못인가? 코로나 때문에 원래 병원을 떠나 3년간 다른 병원에 다닌 환자들에게 이제 다시 오라고 하면 올까? 그런데도 재정적 손해는 오롯이 지방의료원들 몫이 되었다. 신상진 성남시장은 병원 정상화를 위한 노력은 뒤로한 채 법무부(한동훈 전 법무장관)와 ‘중증정신질환 수용자 법무병상’을 성남시의료원에 들이겠다는 협약도 체결했다. 의료원이 있는 수정구는 취약계층이 많은 지역으로, 같은 성남이지만 분당구와 의료 격차가 크다. 분당에 의료원이 있었더래도 중증정신질환 수용자 병상을 들여오겠다고 했을까? 또 다른 신종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공공병원을 살려야 한다. 의료진들을 영웅이라 불렀던 그때를 기억하면서.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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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 청부민원, 진실 혹은 의혹?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이 가족과 지인을 동원하여 방심위에 뉴스타파 김만배 인터뷰 인용 보도 관련 방송의 심의를 요청하는 민원을 청부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포착되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은 최근 한 변호사가 익명의 제보자를 대리하여 국민권익위에 접수한 공익신고서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신고서에 따르면 뉴스타파의 김만배-신학림 녹취록 보도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된 때 방심위에 들어온 민원들의 상당수가 류 위원장의 가족과 지인들의 '셀프 심의'였다는 의혹입니다. 이 심의 때문에 뉴스타파 보도를 인용한 방송사들이 최고 수위의 징계인 수천만원 과징금 부과가 결정되었기에 사실로 밝혀질 경우 그 파장은 매우 큰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출처 뉴스타파). "류희림 위원장 동생의 민원은 사실 방심위 내부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실제로 전국언론노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지부는 지난해 JTBC 뉴스룸이 뉴스타파 김만배 인터뷰를 인용 보도에 대해 민원을 제기한 민원이 류 위원장의 형제분으로 추정된다는 문건의 일부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민원인의 이름이 흔치 않는 이름이라 류 위원장의 가족으로 추정되어 보고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출처 오마이뉴스).  해당 건으로 2024년 제1차 방심위 방송심의 소위 정기회의 도중 옥시찬 위원이 류 방심위원장의 청부 민원 의혹을 제기하면서 욕설과 함께 서류를 집어 던지고 퇴장해 논란이 되었는데요. 김유진 위원은 방심위 정기회의 의결 사항 안건 일부를 무단으로 배포하여 방심위원회에서 해촉되는 일까지 일어나며 논란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출처 중앙일보). 사실이라면 왜 류 위원장은 심의 민원 청부에 가족과 지인을 동원한 것일까요? 김준희 언론노조 방심위지부장은 이와 관련한 전화 인터뷰를 통해 지난 9월 4일 국회 과방위에서 이동관 방통위원장이 뉴스타파 인용 보도와 관련해 '방심위에서  엄중 조치할 예정'이라고 발언 한 후 바로 다음날 방송심의소위원회가 열리는 상황에서 빨리 안건을 상정시키기 위해 만든 무리수가 아니었나 추측하고 있습니다(출처 미디어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의혹이 사실일 경우, 심의기관의 장이 심의의 공정성을 스스로 훼손한 심각한 사안입니다. 류희림 방송통신심위위원장은 이러한 의혹에 강력히 부인하고 있습니다. 되려 이를 제보한 ‘제보자 색출’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방심위 직원들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이 벌어진져 방심위 노조가 피켓 시위 등으로 항의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지난 달 한 방심위 직원이 권익위에 부패 신고서를 내고 청부 민원 의혹이 알려진 후 류 위원장이 내부 감찰과 검찰 수사를 의뢰하자 직원 대다수가 스스로 공익신고자를 자처하며 연대하기도 하였습니다(출처 한겨레). 여러분은 이 청부민원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진실과 의혹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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