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거대 양당이 외면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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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속에 묻혀버린 '내 이슈' 시민 이슈 구조대가 꺼냅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란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 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 된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學歷),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 상태, 사회적신분 등을 이유로 한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 활의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ㆍ예방(차별금지법안)”하는 법안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번번이 무산되어왔다. 일부 개신교 단체의 반대 입김이 거센 것이 주 원인으로, 일부 개신교계에선 성경을 근거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서 성소수자를 떼어내고 싶어한다.

한국은 모두가 알듯 정교분리 사회로 성경의 뜻을 따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백보 양보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일부 개신교인의 성소수자 차별을 박해(?)하기 때문에 그들의 차별할 자유(?)를 침해한다고 봐 보자. 음… 동성애라는 잘못을 잘못이라 외치지 못하게 되어 답답한 가슴. 애타는 마음. 그 외에 무엇이 있을까.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 그건 사람을 미치게 만들긴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데, 이웃이 미칠 지경이라니 그 지점에서 생각해볼 의의는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한 번 짚고 넘어가보자. 동성애가 정말로 세상을 잘못 돌아가게 하는가? 동성애를 악마화하지 못하면 모두가 동성애를 하게 되는가?


역사상 인류에 동성애자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는 사실, 그러니까 동성애자 때문에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거라면 세상이 잘 돌아간 적 없이 현재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잊어두자. 그런데 동성애가 세상을 잘못 돌아가게 하기란 아무래도 힘든 것이, 동성애자란 무릇 힘이 없다. 일부 개신교인들이 어떤 무시무시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진 모르겠으나 동성애자들이 할 수 있는 사회적 활동이라야 기껏 퀴어 퍼레이드 참가하기, 혼인신고서 내고 불수리 통지서 받기 정도인데, 여기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세상이 바뀐다면? 이제 뒤집어지는가? 아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의 여파로 혼인평등법까지 제정된다면야 ‘혼인신고서 내고 불수리 통지서 받기’가 ‘혼인신고서 내고 기뻐하기’ 정도로 바뀔 수는 있겠다. 행복한 동성애자들이 조금 늘 뿐으로, 뭐 그리 크게 바뀌는 건 없다. 

행복한 동성애자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모두가 동성애를 하게 될까? 이제 동성애가 차별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성애자가 돌연 동성애자가 되는 일이 과연 있을까?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있을 것이다. 차별이 사라진다면 동성애가 잘못인 줄 믿고 있던 디나이얼 동성애자가 디나이얼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으로 가려져있던 본래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된다니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일부 개신교인들이여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된다. 이성애자는 언제나 다수일 것이다. 동성애를 터부시하는 세상에서도 동성애자들은 존재하는데, 하물며 이성애를 터부시하지도 않는 세상에서 이성애자가 이성애자의 자리를 벗어날 일이 얼마나 있을까. 이성애자를 우습게 보지 말고 안심하자. 행복한 동성애자들이 늘어나는 건 그저 행복한 사람들이 늘어나는 일일 뿐,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은 아니다. 무엇을 걱정하는건지 모르겠다. 동성애가 그렇게 솔깃하단 말인가? 부추기면 막 동성애 할 것 같고? 차별만 없으면 나도 동성애자 될 것 같고? 그래요…? 



종교의 이름으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부조리하지 않은지, 또 나의 기준은 나의 기준일 뿐이지 않은지는 차치해두고서 동성애를 악마화하지 못하면 세상이 잘못 돌아가게 되는가를 생각해봤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한다고 처벌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알고보면 동성애를 악마화 할 길이 아주 막히지는 않는다. 슬프게도.

차별금지법에서 처벌성을 갖는 행위는 보복성 불이익 조치를 행했을 때로 한정된다. 풀어 말하자면 "공공영역에서 피해자가 차별 행위에 대한 진정을 제기하거나 증언을 했다는 이유로, 좌천을 시키거나 임금을 삭감하는 등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면 형사처벌 대상(차별금지법, 말 잘못하면 감옥 가? [오해와 진실 편] | 닷페이스)"이 된다는 것. 다시말해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도,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 차별에 대한 일부 개신교인들의 권리(?)는 지켜진다는 것이다.


그렇든 저렇든 어쨌든 저쨌든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안된다는 외침이 크게 들리는 세상 속에서, 이번 총선에 차별금지법을 공약한 정당은 녹색정의당과 진보당, 노동당, 새진보연합이 있다(정당정책). 작고 소중한 당들. 거대 양당은 언제나 그렇듯 관심이 없다. 여론을 시끄럽게 만드는 소수자 문제는 무시하는 게 표에 이득이라는 심산이 아닐까. 실제로 민주당은 여성 정책으로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라는 진보적 행보를 보였지만 일각에서 논란이 일자 공약을 철회했다(‘비동의 강간죄 공약’ 착오로 넣었다는 민주당). 논란이 일면 꼬리를 내린다. 각종 차별로 인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사람들이 기울어지다 못해 떨어져 죽고 있는데, 여전히 기득권의 목소리에 집중할 뿐 사람이 죽고 산다는 문제의식이 없다.  

그런데 거대양당의 문제의식 부재도 무색하게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는 70프로 가까이가 찬성([사설] ‘사회적 합의’ 확인된 차별금지법, 더 미룰 이유 없다 - 경향신문)으로, 국민적 합의는 이미 이루어져 있다. 어떤 정치인들은 그저 겁을 낼 뿐이다. 혹시 모를 표를 잃을 것에 대해서. 그에 반해 성소수자는 소수니까 잃어도 되는 표, 혹은 어차피 들어올 표로 세는 곳도 있겠다. '니들이 거길 찍겠어? 더 힘들어질텐데.' 울며 겨자먹기로 거대 양당 중 조금 더 진보적인 당에 표를 주는 성소수자들도 실제로 많다. 그러나 이제는 성소수자들이 거대 정당에도 웃으며 기꺼이 표를 주는 사회가 되어도 좋지 않을까.



앞서 말했듯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도 차별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는 그 행위를 처벌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한가. 우리 사회는 아직 차별을 차별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정체성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면서도 그 정체성으로 인해 자신의 권리에 해를 입었다고 믿으며 자신의 믿음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렇다. ‘난민이 들어오면 우범지역이 된다’, ‘동성애를 막지 못하면 우리 아이가 동성애자가 된다’, ‘중국인이 많아지면 공산주의에 먹힌다’, ‘전라도 사람들은 뒤통수를 친다’, ‘여자들은 쉬운 일만 하려고 든다’....등등등. 우선은 나의 언행이 '차별'이라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무엇이 차별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처벌성이 없는 법률로라도 차별 금지를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정체성은 빼고 어떤 정체성은 넣어야 한다는 기준을 세운다면, 어떤 정체성은 차별해도 괜찮다는 용인이 된다. 차별금지법의 의미가 사라진다.


그래, 여전히 극렬하게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 정치인들이 이 세력에 거스르는 것은 꽤나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제도가 먼저 미래를 향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미 사회적 합의가 어느정도 이루어져있다면 더욱 그렇다. 모든 국민이 동의하는 법안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말로 옳은지, 무엇이 정말로 합리적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차별은 사람을 죽이고, 인권은 생명에 직결된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차별은 결코 합리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그리고 차별금지법 하나 생긴다고 세상이 그렇게 크게 변하지도 않는다는 것에 안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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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구독자 52명

'이성애를 터부시하지도 않는 세상에서 이성애자가 이성애자의 자리를 벗어날 일이 얼마나 있을까'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조호 님 말씀처럼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성애자가 아닌 사실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이 정체성을 드러내거나 아직 자신이 이성애자가 아님을 자각하지 못한 사람들이 정체성을 깨닫게 되지 않길 바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외에는 달라질 게 없으니까요. 굳이 추가하자면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 약속이 생기는 정도 아닐까요?

차별금지법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찬성의견이 70%나 되었군요. 더이상 '나중에'를 외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차별이 있는 한 그 누구도 평등할 수 없고, 누군가를 향한 차별은 곧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총선에서 차별금지법을 공약한 정당들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함께 분노하다가도 몇몇 구절들에서는 웃게 되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행복한 동성애자들이 늘어나는 건 그저 행복한 사람들이 늘어나는 일일 뿐,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은 아니다." 밑줄 긋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