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후기] 강산은 변했는데, 학교는 어떤가요?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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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썩들썩떠들썩 :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 축제 - 건강한 대화, 더 나은 삶을 위한 자리에 시민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이번 들썩들썩떠들썩에 참여하신 분께서 소중한 소감을 보내주셨습니다.


강산은 변했는데, 학교는 어떤가요?


중고등학생 때입니다. 정문에 어떤 선생님이 있는지부터 확인했습니다. 선생님이 누군지에 따라 귀 덮은 머리를 넘기느냐 덮느냐를 정했습니다. 잘못 걸리면 이름이 적혔고, 그 이름은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에게 불렸습니다. “잘라라”. 선생님은 다음날 검사를 했고 저는 몇 번 걸렸고, 몇 번 잘랐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남학생들에게 옆머리가 귀를 덮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1mm도 덮은 거고, 1cm도 덮은 건데, 선생님마다 잡는 기준이 다른지 어떤 선생님은 봐줬고, 어떤 선생님은 봐주지 않았습니다. 정문에서 선생님을 확인한 이유입니다.

전날 걸렸음에도 자르지 않은 학생은 운동장을 토끼걸음으로 걸었습니다. 쪼그려 앉아, 귀를 잡고 운동장을 돌았습니다. 저는 멋 부리고 싶었고, 1mm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이 그랬습니다. 교실 창문에서 보면 남녀 할 거 없이 운동장을 돌고 있었고, 친구가 돌면 웃으며 놀렸습니다.

학교에 다닌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경험입니다. 누군가는 추억이라 말합니다. 저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추억적인' 이야기도 강산이 변할 만큼 오래됐습니다. 강산이 변할 동안, 학교는 어떤가요? 변했나요? 지금 학생들에게 저 모습은 추억이 될까요? 학교는 여전할까요? 4월 22일(토) 학교 내 인권 현황을 들으러 삼각지에 갔습니다. 보고, 들은 걸 나눠봅니다.


발제1 : 학교에서 인권 찾기 - 학교에서 인권을 지키기는 왜 어려울까?

첫 발제자는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백호영 채움 활동가였습니다. 현재 경남의 모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인권 침해 사례, 학생인권조례가 있음에도 권리를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학교 내, 인권 침해는 여전합니다. 학생인권조례가 있어도 말이죠.”

학생인권조례는 2010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6개 지역에 제정됐습니다. 경기, 광주, 서울, 전북, 충남, 제주가 그 지역입니다. 조례는 학생들에게 ‘휴식권, 개성권, 참여할 권리, 사생활의 자유, 차별받지 않을 권리, 의사 표현의 자유, 권리를 지킬 권리,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등을 말합니다. 학교에서 학생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말해주는 근거입니다.

현재 학생인권조례는 비판받고 있습니다. 조례로 인한 교권의 하락, 조례의 동성애 조장이 그 이유라고 합니다. 이런 비판들로 조례는 폐지의 벼랑에 있습니다. 한편, 폐지 찬성과 반대 의견이 상반됩니다. 어느 투표에서는 찬성률이 높고, 어느 투표에서는 반대률이 높다고 합니다. 이 결과에 대해 백호영 활동가는 말합니다.

“학생인권조례가 있다고 해서 학생 인권 침해가 안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학생 인권이 높아져서 교권이 낮아진다는 논리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교권을 떨어트리는 학생이 있다면, 그건 그 학생 잘못이지 학생인권조례 잘못이 아닙니다.”

백호영 활동가가 말하는 학생 인권 침해는 이랬습니다. 화장하고 온 여학생을 복도에 세워 강제로 화장을 지우게 하고, 마스크 색을 규제하고, 장신구 착용을 금했습니다. 화장, 마스크 색, 장신구 모두 학생인권조례의 개성권에 해당합니다. 있어도 지켜지지 않는 조례의 현실을 담담히 말하며, 비판을 의식한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고) 예전보다 나아진 거 아니냐고 말한다면,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변했고, 처벌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침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제가 한 말을 생활기록부에 어떻게 기재하실지”

조례가 효력이 없는 이유는 강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권고 사항을 강제할 순 없습니다. 권고의 효력 없음을 학생들도 알고 있고, 그 때문에 공감대 형성이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학생이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두려움’입니다.

“학교 안에서 이야기 안 하고 왜 밖에서 이야기하냐? 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내가 말했을 때 생활기록부에 선생님이 어떻게 적을지 두렵고, 교장실에 불려 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안에서 못 하는 걸, 밖에서라도 이야기하는 이유는 활동가 자신이 하는 말이 작은 촛불을 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있다면, 학생들이 교육감이라도 직접 뽑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되면 조금이라도 학생 권 침해가 줄어들 것 같다는 바람을 힘을 줘 말했습니다.

백호영 활동가의 마무리 발언입니다.

“모두의 인권이 존중되려면 학생도 선생님을 존중하고, 선생님도 학생을 존중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서로 존중하면 학생 인권 침해도 교권 침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발제2 : 학생 인권 vs 교권이라는 담론을 넘어


두 번째 발제자는 ‘학생인권법과 청소년 인권을 위한 청소년 전국 시민행동'의 조영선 활동가였습니다. 현재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 중이고, 학생 인권과 교권 대립 프레임의 문제점, 본질적 문제, 학생 인권이 지켜져야 하는 이유를 발표했습니다.

“권력의 총량이 있고, 그걸 학생과 교사가 나눠 먹는 걸까요?”

그는 질문과 함께 학생과 교사의 역할이 다르며, 애초 인권이란 양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별개인 학생 인권과 교권을 마치 둘이 나눠 갖는 것처럼 말하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습니다.

교권이란 교사로서 지는 권위와 권력입니다. 권위는 강제할 수 없고, 스스로 말하는 순간 떨어집니다. 사실상 교권은 교사의 권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문제는 권력으로서의 교권이 선생님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학칙에 따라 교사가 체벌하면 된다는 말에, 그는 학칙을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학칙의) 현재 기준을 보면 ‘예의가 바르지 못한 학생’, ‘용의가 바르지 못한 학생'처럼 기준이 모호합니다. 이 모호함을 선생님 개인의 판단에 맡기고, 체벌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학생마다 피부톤이 다릅니다. 같은 화장이라도 다르게 보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요? 분명 똑같은 화장이고, 다르게 보일 뿐인데? 이 모든 게 선생님의 자의적 판단에 맡깁니다.”

일관된 기준 없는 선생님의 자의적 판단은 학생들에게 혼란만 일으키고, 교권과 학생 인권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 규제받는데, 학생들이 내 말을 듣는 상대방이 어떨지 생각할 수 있을까요?

조영선 활동가는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학생들의 혐오 발언이 늘었다는 비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문에 들어서부터 규제받는데, 학생들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들을지 생각하는 건 어불성설 아니냐고.

그는 선생님들의 자의적 판단으로는 교권도, 학생들의 인권도 지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을 그대로 두고, 다른 방식으로 학교 내 인권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대안은 뭘까요? 그는 학생 인권 보장이라고 말합니다. 학생인권법이 법으로 제정되고, 법안에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요. 그럴 때야 성평등 교육, 차별금지 수업을 해도 선생님들이 외부로부터 비판받지 않을 수 있고, 현재 이 부분에 대해 비판하는 외부로부터 학생과 교사 모두 보호할 수 있다고요.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다는 전제의 강화를 강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학생인권조례 제정 후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인지 말하며 발제를 마무리했습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후 가장 큰 변화는, 학교에서 맞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생겨서 누군가를 때릴 때 ‘이게 맞나?’라는 관념이 생긴 겁니다. 폭력을 경험하지 않는 게, 인권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소그룹 토론 : 학생 인권을 너머 어떤 어른이 될 지 논의합니다.


발제가 끝나고 세 질문으로 토론했습니다. ‘학교에서 존중받지 못 하거나, 존중받았던 긍정적 경험이 있는지?, 학교 내 인권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학교 내 인권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였습니다. 세 질문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나누며 토론했고, 인상 깊은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질문1 : 학교에서 존중받지 못하거나, 존중받았던 긍정적 경험(혹은 목격한 사례)이 있는지? 

  • 선생님이 항의에 대한 의견을 수용한 적이 있어서 앞으로 참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긍정적인 경험도 있었다.

질문2 : 학교 내 인권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 과거보다 정도는 나아졌으나 여전히 보장된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처벌방식이) 과거에는 체벌을 가했다면, 현재는 상벌제도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질문3 : 학교 내 인권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 학교라는 공간에서만큼은 아무리 비판해도 동등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학교를 만들기 위해 여러 주체가 각자 자리에서 대화나 협의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교사의 개인적 판단/역량으로 이뤄지는 게 아닌, 보편적인 학생 인권 관점이 필요합니다.


후기 : 오늘 촛불 하나를 켰습니다.

몇 년 전 한 동영상을 봤습니다. 6분으로 짧지만 강렬한 동영상입니다. 한 남자가 재판장에 물고기가 든 어항을 들고 판사에게 말합니다. “저는 오늘 현대 교육을 고소합니다.”

영상 속 남자는 지난 150년간 세상은 변했으나, 교육은 바뀌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다양한 가능성과 개성 있는 학생들을, 하나의 기준으로만 재단하고, 학교에 학생을 맞추고, 과거를 교육한다고 말이죠. 학생의 개성과 꿈을 꺾고,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게 하는 현대교육을 고소한다는 내용입니다.

비판이 남 일 같지 않습니다. 발제와 토론을 통해, 강산이 변한 제 중고등학생 때와 지금의 학교 모습이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바뀐 게 있겠죠. 하지만 본질도 바뀌었을까요? 여전히 개성과 학생 대신 규제와 학교, 입시가 있었습니다. 변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 그 변화의 시작을 오늘의 발제자들과 공론장에 모인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영선 활동가가 말했습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후 가장 큰 변화는, 학교에서 맞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생겨서 누군가를 때릴 때 ‘이게 맞나?’라는 관념이 생긴 겁니다.”

아이들이 미래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아이들, 학생들이 미래입니다. 그들이 커서 사회의 팔과 다리, 허리, 머리가 됩니다. 현재는 그 수가 20%일지 모르나, 미래엔 100%입니다. 그런데 학생들 미래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지금의 ‘어른' 아닐까요? 그 어른들은 학생들의 미래와 그들이 만들 사회를 얼마나 생각하고 듣고 있을까요? 어른들의 기준이 아니라, 학생 개별의 개성과 이야기하고 가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진짜 교육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생활기록부에 기재될지 모르는 두려움을 들으며 사회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와 상사를 비판했을 때 인사고과에 어떻게 반영될지 모르는 사회인의 두려움과 닮았으니까요. 사회의 미래인 학생들에게는, 과거의 교육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고 말해야 한다고, 말해도 된다고, 개성을 말해도 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학생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선생님들이 더욱 학생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는 체벌받았던 게 추억거리가 아니라, 내 권리와 개성을 뽐내고, 선생님이 그걸 알아봐 준 걸 추억이라 말하는 학교 현장이 되길 바라봅니다.

백호영 활동가가 말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촛불 하나를 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촛불이 커지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작은 불씨가 산을 태웁니다. 공론장에 모인 사람들만큼 불씨가 번지길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들썩들썩 공론장을 통해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가 떠들썩하게 들리길 바라봅니다.


✏️ 글 : 윤성민 / 들썩들썩떠들썩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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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질문과 함께 학생과 교사의 역할이 다르며, 애초 인권이란 양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별개인 학생 인권과 교권을 마치 둘이 나눠 갖는 것처럼 말하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습니다."

조영선 활동가님의 이 말씀에 동의합니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상황 속에서 피해자를 보호하는 방법에는 비가해자들이 피해자를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뭉치기 위한 동력, 그러니까, 내가 남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으면 남도 나의 권리에 관심이 없을 거라는 상호신뢰와 기대가 가해자로부터 피해자와 비가해자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신뢰와 기대는 권리라는 것을 교사vs학생의 구도에서 서로 뺏고 뺏기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주고받는 것으로 인식할 때에야 형성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아가 교사와 학생 간의 연계를 넘어, 교사를 향한 학부모, 교감, 교장의 부당한 요구나 학생을 향한 학부모의 부당한 침해 등의 예방 또는 대항, 학교라는 기관의 주변부 직원들(청소하시는 분이나 경비원 등)의 권리도 다같이 보호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걸 지역사회차원의 보호로 확장시키는 건 조심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른들의 기준이 아니라, 학생 개별의 개성과 이야기하고 가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진짜 교육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 것이 개개인에 대한 존중이네요.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삶에서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는지를 다시 한번 떠올려봅니다. 

“저는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촛불 하나를 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말이 눈에 들어오네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들이 모이면 촛불이 횃불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 글을 읽고나니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한 눈에 이해했습니다. 학생인권조례가 있음에도 학교 내 인권침해가 여전하다는 발언은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지 못한걸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참 마음이 아프네요.
글을 읽고 교사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최근 유행한 드라마 <더 글로리>의 "푼돈으로 방금 내가 쟤 하늘이 됐어"라는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무런 이유가 없었음에도 학생의 입장에서 '교사'는 '학생이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두발 검사'라는 이름으로 전교생이 같은 날, 같은 길이의 머리카락을 맞추거나 교사의 시각만으로 학생을 체벌하는 일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벌어졌으니까요. 생각해보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법이나 하물며 규정조차 없었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여전히 학교 내 민주주의는 부족하구나', '학생인권, 교권 같은 대립을 야기하는 말들이 아니라 상호 존중을 위해서 학교 내 민주주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여해주신 분이 정리해주신 덕분에 생각의 크기를 더 넓힐 수 있었습니다.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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