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자들] 페미니즘 글에는 왜 꼭 “너만 힘드냐”는 댓글이 달릴까?
성평등 교육을 시작한 지 벌써 5년이 흘렀다. 직장인부터 시민사회단체 구성원, 초·중·고등학교 청소년과 군인 등 다양한 참여자를 만났다. 막상 어마무시한 저항이 있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꼭 참여자 표정이 굳기 시작하는 대목은 있다. 바로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을 이야기 할 때다.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 여성 어린이가 자신의 가족 제사 때 겪은 성차별을 이야기했더니, 옆자리 남자 어린이가 "너는 대신 군대 안가잖아!"라고 소리치는 모습을 봤다. 의아해진 나는 남자 어린이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혹시 저 어린이가 군대에 보낸건가요…?" 여성 차별에 "너만 힘드냐"라니 이런 사례가 결코 적지 않다. 페미니즘 관련한 글, 아니 꼭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과 폭력에 대한 글마다 '남성도 힘들다!'는 댓글로 가득하다. 남성의 삶이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고통이 다른 이의 고통을 상쇄해 주는 것도 아닌데, 대체 이게 무슨 생뚱맞은 이야기일까? 뉴스에서 흑인을 향한 폭력, 장애인을 향한 차별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는 거냐며 발끈하는 경우가 드문데, 왜 젠더 문제에 대해선 그런 반응이  흔할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실제로 모르기 때문이 크다. 나도 학창시절, "성차별은 옛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학교만 봐도 똑똑하고 대학 잘 가는 여자애들이 이렇게 많은데, 무슨 성차별이냐'는 생각이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22년 국가성평등보고서'에 나타난 '성평등한 사회참여 영역 분야별 성평등 수준 현황'에 따르면, 학교 같은 교육·직업훈련 영역은 94.5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부터다. 경제활동영역 76.4점, 의사결정영역은 38.3점으로 처참한 수준이다. 고용률만 봐도 그렇다. 20대 때까지는 비슷하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고 여성이 임신·육아·출산을 경험하는 시기에 엄청난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100대 기업 임원 비율은 여전히 6.8% 수준이다. 누구도 이를 제대로 가르쳐준 적 없으니 각인된 오해가 쌓이고 쌓여 오늘날의 성별인식격차가 됐다. 인권은 뺏고 빼앗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모르면 알아가면 그만인데, 왜 알려고 하기보다 화부터 낼까? 인권을 '제로섬 게임'으로 여기며 여성의 인권이 올라가면 남성의 인권이 추락할 것을 생각하며 불안에 떨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폭력을 오직 '피해자'와 '가해자'의 문제로만 치부하고 자신은 피해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장애 이동권을 위해 생긴 지하철 엘레베이터가 모두에게 편리함을 줬듯, 인권은 함께 증진될 수 있다.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이기에 남성도 피해자가 될 수 있고 우리는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는 동반자로 나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남성들이 이러한 이해 없이 페미니즘에 학을 뗀다. 어떨 때는 이런 남성들의 분노가 일종의 비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남성의 어려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교육 현장에서 듣게 되는 이야기나 글에 달리는 댓글을 찬찬히 살펴보면 결론이 비슷하다. 군대에 가야해서, 연애나 결혼할 때 경제적으로 부담이라, 더 위험하고 어려운 일에 내몰려서 '힘들다'는 이야기다. 힘들 수 있다. 실로 더 많은 남성들이 일터에서 사망한다. 2022년 자살률 역시 남성이 여성보다 두 배 이상 더 높다. 그러나 드러내지 못한다. 나약하다고, 남자답지 못한 '하남자'라고 낙인 찍힐까봐 염려하느라 꽁꽁 숨기고 산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감정은 분노다. 그래서 그렇게 길 잃은 엉뚱한 분노로 자신의 비극을 발산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불행 배틀은 할 수 있을지언정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남성들이 꽃다운 나이에 군대에 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연애, 결혼에서 남성이 더 경제적인 부담을 지는 이유는?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운다는 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모두 옆에 앉은 여성 때문이 아닌, 우리 사회의 성별고정관념과 성차별적 문화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을 끝내기 위해 목소리 내는 사람들이 바로 페미니스트다.  늦지 않았다. 문은 언제든 열려있다. 지금껏 그랬듯 세상은 더 나은 쪽으로 변할 수 있다. 언제까지 '너만 힘드냐!'며 불행에 머물 것인가. 문제의 원인을 찾으며 함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것인가. 당신은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은 남성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벌거벗은 남자들> 시리즈는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합니다.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의 이한 활동가가 작성하여 여성 신문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여성신문 원문 주소 : https://n.news.naver.com/mnews...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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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그런 식으로는 내 표 못 받아
필자는 이대남이다. 부산이 고향이지만 인생의 1/3을 서울에서 살고 있다. 반골 기질이 있어 권위적인 것을 싫어하고 자유와 다양성을 추구한다. 동시에 대한민국 육군 장교 출신이며 안보에 있어 보수적인 편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로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번 총선, 어디에-누구에게 투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의 고민이며, 내 친구의 고민이자, 많은 주변 사람의 말이다. 나는 큰 걸 바라지도 않는다. 획기적인 기후 정책이나 신냉전에 맞설 새로운 외교-안보 노선을 제시하는 정치인을 기대하지 않은지는 이미 오래됐다. 그저 공인답게 품격 있고, 사회적 참사에 슬퍼할 줄 알며, 타인을 차별하지 않는, 그저 조금 더 공공선을 지향하는 인물(정당)이면 표를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안일했다. ‘이재명 후보가 차은우보다 잘생겼는지’, ‘대파 가격이 한 단인지 한 뿌리인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내가 이상한 멀티버스 지구에 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모 당의 후보는 지역을 여성의 가슴에 빗대 성적 대상화를 하질 않나. 다른 당의 후보는 ‘연예인 성적 대상화’부터 ‘난교’ 발언 등 처참한 성인지 감수성으로 논란을 빚다 공천이 취소되기도 했다. 큰 걸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혐오 표현’을 하지 않는 것도 기성 정치엔 매우 어렵고 큰 일인가 보다. 나도 선거를 뛰어봤다. 유권자들을 설득하며 정책을 제안하고, 나라는 인물을 세일즈 해 본 경험이 있기에 선거의 어려움을 안다. 이기기 위해 애쓰다 보면 보다 대중적인 정책을 고민하게 되고, 더욱 자극적인 멘트로 연설을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넘어선 안 될 ‘선’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공인의 책임이 있고, 선출직 후보자의 품위라는 게 있다. 그리고 그 전에 인간으로 해야 할 도리가 존재한다. 그 선을 넘으면 ‘괴물’이 되는 것이다. 2차 가해를 저지르거나, 피해자를 탓하고 공격했던 전력이 있는 인물들을 떳떳하게 후보로 내세우는 주요 정당을 보며 정말 놀랐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가해 전력과 검증 부실에 대한 국민과 당원의 비판을, 오히려 ‘우리 편’이라며 옹호하거나 감싸는 행태였다. 비판이 거세지자 마지못해 낙마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끝내 피해자에게는 단 한 문장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괴물’이었다. 왜 정치는 혐오를 놓지 못하나.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여성과 소수자, 장애인과 참사 피해자에 대한 혐오를 늘어놓아도 제대로 된 제재나 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나아가 그것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과 비판을 불러오더라도, ‘상대편’을 잘 공격하는 일이면 오히려 승승장구 하게 되니 너도나도 괴물이 되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대결 정치’와 ‘혐오 정치’를 해결할 희망은 없는 걸까. 우린 이대로 훌리건과 헤이러에게 이 사회를 맡기고 자포자기해야 하는 걸까. 아니다. 극약 처방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대결을 부추기는 정치 구조를 개혁하는 일일 테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다양성에 투표하는 일’이다. 현역 정치인의 대다수는 여성도, 소수자도, 장애인도, 피해자나 약자도 아닌 ‘기득권 중년 남성’이다. 당장 현 21대 국회만 봐도 여성 비율은 19%에 불과하고, 2030 청년 비율은 5%가 채 안 된다. 그에 비해 5060 정치인은 무려 82%에 육박한다. 만약 국회가 중년 남성과 같은 숫자의 여성과 소수자와 장애인과 다양한 사회적 약자로 구성된다면, 그때도 함부로 이들을 대상화하고 혐오하는 표현이 난무할 수 있을까. 회색빛 국회가 무지갯빛으로 다양해진다면, 더욱 획기적인 기후 정책과 사회적 안전망 확립부터 자살 문제와 지역 불균형 문제 해결 그리고 성평등 사회 실현과 디지털 전환까지 수많은 시급한 의제들을 ‘자기 일’처럼 다룰 일꾼들이 늘어날 것이다. 이들에게 대결 정치는 사치다. ‘자기 일’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할 테니까.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당신이라면, 혹은 대결 정치와 혐오 정치에 질려버린 당신이라면, 이번 총선 투표 테마로 ‘다양성 있는 국회’를 적극 제안한다.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의 김연웅 활동가가 작성하여 여성 신문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여성신문 원문 주소 : https://n.news.naver.com/mnews... 
선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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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장막을 걷어, 그 너머로
<연애의 장막을 걷어, 그 너머로> by 남함페 연웅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우리,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어느 날, 어떤 연애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저무는 연애 앞에서 무엇도 하지 못한 채 가장 초라하고 몹쓸 사람이 돼 있을 뿐이었다. 연애가 내게 남긴 감상은 늘 ‘너무 어렵다'는 것에서 시작했다. 연애란, 정답지는 당연히 없을 뿐더러, 한 사람의 성숙이 그 관계의 성숙을 보장하지 않는 극한의 팀플이었다. 성숙한 한 사람이 나였을 때도 상대방이었을 때도 혹은 둘 다라고 믿었을 때도, 팀플의 난이도는 낮아지지 않았다. 연애의 끝에선 늘 실패만 돋보일 뿐이었다. 연애는 늘 맑은 거울처럼 나를 비췄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뾰루지와 생채기가 왜 이렇게 눈에 띄는 걸까. 거울 앞에선 자꾸 지난 상처에 손이 가곤 한다. 만지다 덧날 걸 알면서도 그런다. 상처 위에 뽀로로밴드를 붙여도 상처는 티가 나기 마련이다. 때로 연애는 내가 알고 싶지 않던, 보고 싶지 않던 내 모습들을 자꾸 무대 위에 올려 놓는다. 무대가 익숙한 사람도 아닌데, 기획부터 연출에 연기까지 꼼꼼히 재고 있다. 어떤 대사는 날 간지럽게 하고, 어떤 배역은 내 깊숙한 심연을 자꾸 건드린다. 시나리오는 내 몫이 아니라 손 댈 수도 없다. 괜찮다. 어쨌든 무대만 잘 만들면 된다. 하지만 자만은 가끔 실망스런 결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생각보다 적은 박수나 예상치 못한 비평에 난 하염없이 무너진다. 자존심은 비틀거리고 서운함이라는 불청객은 어느새 안방까지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겨우 무대를 내려오며 할 말을 참는 날이 하나 둘 늘다 보면 어느새 지쳐 그만 둘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애정은 망한 극장처럼 알게 모르게 자리를 뜨고, 금새 이별이다. 다시 한 번 무대에 장막이 드리운다. 밀린 숙제처럼 지난 연애의 장면 장면을 곱씹다 보면, 자주 ‘사람’과 ‘관계’를 외면하고 ‘연애’ 그 자체에 집중하고 몰입하던 내가 보인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연애는 그 시작부터 엔딩까지 특별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이어지다 연인이 되는 과정 중 아련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연애만 왜 특별한가. 다른 관계들에 비해 ‘특별 대우' 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연애는 ‘특별해야만 한다'는 그 생각이 우리가 이걸 늘 망치는 근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사람을 놓칠 수 없어"“이번이 아니면, 다신 없을 것 같아"“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절대 헤어질 수 없어”“우린 특별하니까" 나도 그랬다. 언제나 사랑은 새로 발견한 불 같았다.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어느 날 가랑비에 젖어 식을 수도 있다는 생각, 날 다치고 아프게 할 거라는 생각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이전에도 데였으면서 이번엔 오래 따뜻하기만 할 거라고, 내가 그렇게 되게끔 만들 거라고 쉽게 자만했다. 단순히 근거 없는 자만은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 헌신하고, 사소한 것까지 잘 돌보고, 근사한 데이트를 기획하는 일을 ‘잘 해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 반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한 명의 헌신은 다른 이의 부담이 되었고, 돌봄은 늘 상황 의존적이었다. 성실한 데이트 기획은 부담에 부담을 덧대는 꼴이 될 뿐이었다. 어느새 소원해진 관계를 돌아보며, 뭔가 바꿔보려고 할 때는 이미 역부족이거나 역효과라는 걸 깨닫게 된 후였다. 우린 보통 친구 관계를 비롯한 인간 관계의 친밀함을 측정할 때 ‘편하다'는 감각을 그 지표로 많이 애용한다. 편하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가 쌓였다는 방증이고, 그 관계가 부담스럽거나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관계가 ‘연애’로 가게 되면, ‘편하다'는 감각은 오히려 ‘이별'의 징후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 관계가 편해졌다는 것이 곧 그 사람에게 질린다거나 지루해졌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다. 왜 우리는 같은 ‘편함’의 감각을 연애에만 다른 잣대를 두고 보는 걸까. 계속 팽팽하기만 한 고무줄은 끊어지기 마련인데, 왜 유독 연애만 끊어질 것을 어떤 관계보다 두려워 하면서 끊어질 때까지 몰아 붙이는 걸까. 나도 여기에서 함정에 빠졌다. 나도 ‘연애'를 ‘일상적 관계'로 보지 않았던 게 아닐까. 고독과 고통으로 점철된 생으로부터 나를 구해 줄 ‘백마 탄 구원자' 정도로 ‘연애'를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러면서 그 특별함과 소중함에 잔뜩 취해 ‘연애’가 늘 ‘연애’답길 바란 게 아닐까. ‘연애 다운 연애’가 수많은 ‘연애’를 망친다. 연인과 친구가 무엇이 다를까. ‘섹스'를 한다는 것? 그건 개인 간에 취사 선택할 영역이다. ‘섹스 없는 연애'도 분명 있을 수 있다. 아니 있어 마땅하다. ‘이별’이 존재한다는 것? 친구 사이에도 이별이 없지 않다. 때론 연인 사이보다 드라마틱한 이별의 순간이 친구 사이에도 있질 않나. 누군가와 친해지지 않고 연인이 되려는 것, 가능하지 않거나 폭력적인 일이다. 연애는 일상이고 관계다. 관계는 그들만의 스펙트럼과도 같아서, 당사자들이 쌓아 온 시간과 애정의 역사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고백 같은 선언이나 일방적인 발버둥으로 연애를 얻으려 한다면, 필시 외롭고 쓸쓸하게 남을 것이다. 결국, ‘구분 짓기'가 만들어 낸 촌극이다. ‘친구'와 ‘연인'을 억지로 구분하려 하니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남녀 사이엔 친구가 없다는 말'로 ‘이성 간 친구'라는 관계를 세상에서 지우고, 동성애 차별로 ‘동성 간 연인’을 삭제하는 것도 ‘구분 짓기'가 만들어 낸 비극이다. 심지어 굳이 ‘연애’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솔로'라는 이름을 붙여 조롱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연애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두지 않고, 연애하고 싶은 사람이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드는 것. 즉, 구분 짓고 이름 붙이는 것에 급급한 사회가 각종 차별과 배제를 만들어 내고, 우리 관계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우리 관계가 더 편해지고 좋아지는 데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갑자기 웬 정치냐고? 이는 결국 ‘정치'의 문제다. ‘관계'의 문제보다 우리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 또 있을까. 우리의 행복한 ‘관계 맺기’를 ‘구분 짓기'로 방해하는 사회에 제발 그만하라고 외치는 것이 넓은 의미의 정치가 아니고 대체 무엇이겠는가. 모두가 편하게 연애 하거나, 편하게 연애 안 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 나는 이것도 ‘페미니즘'이라 부르고 싶다. 여기 A가 있다. 그는 평범함을 미덕으로 여기며 한국 사회가 가리키는 표지판을 따라 성실하게 달려온 학생이다.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들은 ‘대학 가면 연애한다’고 말씀하셨다. 연애를 하고 있든 한 적 없든 모두 캠퍼스를 거니는 커플의 모습을 상상하며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A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선생님의 말대로 지금은 연애하거나 놀기보다도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 생각했다. 대학을 간 다음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이었다. “대학만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연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 경험의 유예를 권장할 뿐이었다. 모두가 대학에 갈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게 된 A는 그간 인질로 잡혀 있던 연애가 풀려나 자신에게 반갑게 올 줄 믿었다. 근데 웬 걸? 대학은 고등학교보다 더 했다. 그야말로 자유경쟁시장이었다. ‘누가 더 많이 실수하나’의 각축장을 방불케 했다. 대학을 간다고 연애를 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로 밝혀졌다. A는 억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등학생 때 연애할 걸. 억울한 마음을 풀고자 하는 의미였을까. 단순히 연애가 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A는 적극적으로 미팅과 소개팅에 나가고, 주변에 조언을 구하며 연애에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A의 일방적인 고백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고, 동기들은 공지해 줄 과대표를 잃었다. A는 군대 갈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년, 군대를 다녀 온 A는 이번엔 ‘복학생’ 신분으로 ‘연애’에 ‘재도전’하기로 했다. 그간 인터넷 커뮤니티를 드나들며 배운 토막 연애 상식들로 단련된 A는 각종 동아리와 학회에 출석 도장을 찍으며 열심히 ‘노력’했다. 심지어 관에서 하는 ‘솔로대첩’과 같은 행사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 하지만 결과는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고립되고 배제될 뿐이었다. 그는 억울했다. 화가 나기도 했다. 자신의 노력이 보상받지 못하고 자신이 사회로부터 차별받는다고 느꼈다.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뭐가 문제였을까. 그는 한 번도 연애를 관계로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연애는 성취, 목표, 도전과 같은 것이었을 테다. 매력적인 여성을 ‘여자친구’로 만드는 일을 ‘성공'하기 위해 최대한 열심히 ‘노력’하고 ‘도전’하였으나 처참히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자신을 성취의 ‘대상’으로 보고, 물건마냥 얻고자 ‘노력’하는 그와 같이 있고 싶은 여성은 단언컨대 없다. 물론 A는 억울할 수 있다. 청소년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억압이 큰 영향을 미쳤을 거고, 연애를 성취로 취급한 주변 어른들의 영향도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성과 ‘동료 되기’보다 ‘공격 하기’를 선택한다면 난 기꺼이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를 위해서라도. 나도 대한민국의 수많은 A였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처참히 반성하고 조금이라도 나아갔다. 어느 시절 나의 ‘고백’은 ‘폭력’이었을지도 모르고, 어느 시절 나의 ‘연애’는 애인에게 ‘감당’해야 할 짐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페미니즘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페미니즘 활동을 공개적으로 하기 시작하고, 성평등을 지향한다는 것을 주변에 공유하기 시작했을 때, 친구나 지인 혹은 모르는 사람(주로 인터넷 악플)에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라 쓰고 공격이라 읽는 것)이 하나 있다. “너, 여자 만나려고 하는 거지?” 이 질문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어딜 가나 쫓아다니며 날 괴롭혔다. 이 질문이 악질인 것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과 소수자가 받는 성차별에 대해 저항하며 시작한 나의 페미니즘 활동을 폄하할 뿐 아니라, 나의 소중한 ‘동료’들을 납작한 질문 속에 가두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면, 오히려 ‘맞다’고 대답해주고 싶다. 맞다. 난 페미니즘 활동을 하며 정말 다양한 여성을 많이 만난다. 그들은 내 가족, 애인, 친구, 동료, 상사이며 함께 공동체를 구성해 살아가는 동지다. 나는 이들을 만난다. 나는 이들과 대화한다. 나는 이들과 공감하며 소통한다. 나는 이들과 함께 자주 웃고, 때로는 울고, 어느 날은 아파한다. 내 곁의 여성 동료는 내가 주눅 들지 않고 계속 페미니즘을 외쳐야 할 더 진한 이유가 되어, 날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게 만든다. 이들이 있어 나는 치열하게 살아가며, 또 행복하게 죽어간다. “페미니즘에 분명 답이 있다.” 나는 A를 사석에서 만나게 된다면, 꼭 이 얘길 해주고 싶다. 뭔가 생각했던대로 풀리지 않아서,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연애와 관계의 첫 발을 떼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 이젠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할 그에게 ‘이 길'을 알려주고 싶다. 부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익명의 안티-페미니스트에게 같잖은 위안을 받으며 여성과 소수자를 조롱하는 길로 빠지지 않길 정말 절실하게 기도한다. 그 길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방향이다. 나는 당신이 다시 우리의 공동체로 돌아오길 희망한다. 그가 생을 살아오며 만든 ‘업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손과 함께 페미니즘을 건네겠다. 여성과 관계 맺기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연애를 할 수 있겠나. 여성과 연애를 하고 싶다면, 먼저 여성과 동료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여성과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곱셈도 못하면서 미적분 한다고 나서는 사람에게 코웃음 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여성의 현실을 알고, 여성의 아픔에 공감하고, 여성의 문제에 함께 나서는 것이 여성과 동료가 되는 일의 충분히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페미니즘에 분명 답이 있다는 것이다. ”좋고 나쁜 그런 걸 떠나 그냥 나 자신일 수 있어야 해요.”“그러니 결국 내가 나 자신일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거예요.”“오직 나약한 남자들만이 강한 여자를 못 견디죠.”“강한 여자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강한 남자예요.”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10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q1tlawV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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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Man Box)는 내 목젖에 있었어
<맨박스(Man Box)는 내 목젖에 있었어> by 남함페 정민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맨박스(Man Box):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 주어지는 억압, 남자다움에 대한 강요로, 전통적인 남성 상에 맞춰 마초적으로 살아갈 것을 주문하거나, 타인(특히 여성, 성소수자)을 통제하거나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강화하도록 만드는 문화규범으로 나타난다. “주말에 한 번 만나면 되는 거 아냐?”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여느날과 다름없이 나는 늦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애인에게 걸려온 전화의 첫 음성, “나 할 말 있어.” 그 말은 신호탄이었다. 이미 지난 인연들이 언젠가 꼭 한 번씩은 했던 말이자, 우리의 관계가 이전과 아주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갈 것임을 알리는 경적소리였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말도 소리도 아닌 대답으로 통화를 이어갔다.  60분의 통화시간, 벌 서는 기분으로 듣고만 있었다. 애인은 수 개월 쌓인 감정의 응어리를 빠른 속도로 쏟아내고 있었다. 언어는 날이 서있었고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었다. 올 것이 온 날, 나는 초조함 속에 짝다리를 짚고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내가 네 우선 순위에 몇위쯤 있어? 한 10위쯤은 되니? 일, 활동, 스터디, 모임, 술자리, 출장, 네 개인시간에 다 내어주고 그 다음 자리쯤은 돼? 내가 보자고 할 때까지 너는 먼저 만나자는 말 한 번을 안 하잖아. 나는 만나자는 말도 ‘네가 바쁠 텐데’, ‘체력적으로 힘들 텐데’ 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쳐서 겨우 눈치보다 한 마디 꺼내는 건데, 그렇게 다 고려해서 물어봐도 항상 너는 어디가야 한데, 또 회의가 있데,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작업하는 게 생겼데, 나 완전 바보 된 것 같아. 우리 연애 왜 해? 우리 카톡도 전화도 그렇게 자주 안 하잖아. 나도 이거 겨우 이야기하는 거야. 내가 너무 속이 좁은가? 열심히 사는 애한테 괜히 뭐라고만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몇 번이고 주저했어. 알아?”정적 끝에, 내가 되돌려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미안해,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물론 이 말은 애인을 더 화나게 했고(그걸 왜 나한테 물어?), 통화는 곧 끊어졌다. “뭘 더 어쩌라고?”  목에 걸려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내가 하고팠던 항변은 아래와 같았다. “그러니까,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주5일을 밤낮없이 일하고, 주말에도 스터디에 특강에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는 나에게 뭘 더 기대하는 건데? 어디 한 눈을 판 것도 아니고, 거짓말과 핑계로 둘러댄 적도 없어. 쉴틈 없는 와중에 꼬박 하루 내지 반나절은 너에게 온전히 바치는데, 내가 왜 너에게 그런 미움을 받아야 하는 거야? 혹시 주말 내내 같이 있자는 거니? 그럼 당장은 좋겠지만 나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게 돼. 그것은 곧 더 나은 커리어,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걸 포기하는 거고. 내가 잘 되는 건 곧 네가 잘 되는 것이기도 해. 당장 내가 돈이 있고, 능력이 있어야 너에게 옷 한 벌이라도 사주고, 때우는 식사가 아니라 밥도 제대로 된 걸 먹을 것 아냐? 우리, 언제까지 분식에 메가커피만 먹고 살 거냐고.”이쯤 되면 여러분도 알지 않는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나는 기념일을 놓친 적 없고, 맛집과 좋은 카페를 훤히 꿰고 안내했으며, 항상 친절했고, 장을 보고 음식을 해먹일 줄 아는 애인이었다. 월급도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에 다녔고, 데이트 비용도 쓰면 더 썼지 섭섭하게 한 적은 없었고 말이다. 꾸밈노동 또한 잘했다. 츄리닝과 삼선슬리퍼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어디서 옷 못 입는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다. 한 마디로 ‘미루어보고 견주어봐도 손색없는’ 남자친구였다. 그런데 대체 왜, 나는 애인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심지어 갑자기 걸려온 60분짜리 폭탄에도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방법을 물었지 않은가.나의 구속일지통화 이후, 애인과 연락은 잠정 중단되었다. 억울함이 구름처럼 밀려왔지만, ‘그럴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상 나의 연애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전개되었으니까. 나의 좋아하는 마음과 구애로 관계가 시작되고, 상대는 고민하다가 몇 번의 데이트 후 연애를 승낙한다. 평화로운 몇달이 지나고, 어느 날 갑자기 애인이 서운하다면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만남 도중 화를 내고, 간밤에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헤어지거나 예전만 못한 사이가 된다. 나도 애인과 다투는 일이 즐거울리 없고,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상대가 나로 인해 서운하고 속상해하니 언제나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뭘 잘못한 건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본디 연애라는 게 구속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이거나, “우리 사회에 아직도 서로를 집착하고 못 잃어서 안달인 연애 문화나 연애 시나리오가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씁쓸해 했다.그게 아니면  마치 응당 받고 누려야 할 것을 내가 주지 않아 괘씸하다는 듯이 말하는 애인이 더 괘씸하게 느껴졌다. 나도 분명히 연애를 위해 잃고 감수하는 것들이 있고, 지켜야 할 선을 넘은 적도 없었다. 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져야 할 책임을 다 짊어졌다. 그런데 이런 태도로 나오다니. ‘더 내놓으라’며 떼를 쓰는 애인이 대책없어 보이고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늘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 이런 순간을 으레 예견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때 가서 할 말을 준비해둔 채 말이다. 이전 통화에서 꺼냈던 “미안해, 잘못했어”와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라는 말은 개중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둔 것이었다. 대실패였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자경(손석구 분)이 염미정(김지원 분)에게 했던 말이 처절하게 다가왔다. 염미정: "할 말 없나?"구자경: "할 말 있으면 니가 해.여자들은 꼭 맡겨 놓은 거 있는 것처럼 툭하면 뭘 달래.내가 너한테 빚졌냐?”염미정: "누가 다이아몬드 달래?"구자경: "다이아몬드가 더 쉬워. 추앙이 뭐냐? 난 몰라."JTBC, <나의 해방일지> 10화 中 그렇지 않은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말하면 되고, 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면 되는데 왜 이러는 것인가. 그렇게 같은 실랑이, 동어 반복이 몇 번 더 이어진 후에, 이번 연애는 끝이 났다. 한 계절이 이리 지나간 것이다. 끝을 지은 이후에도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따금씩 열이 나기도 했고, 한숨을 푹푹 쉬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수많은 감정이 일었지만 가장 굵직한 결은 억울함과 속상함이었다. 이렇게 끝날 관계가 아니라고 믿었기에 억울했고, 아무리 섭섭해도 그렇지, 지난 시간 내가 공들여 쏟았던 마음들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아 속상했다. 낮이 밤인 것 같고, 밤이 아침인 것 같았던 며칠을 보내고도, 이 관계를 한층 더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함께한다는 것그 무렵, 마음을 환기하려 펼친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등장했다.  “여보 , 우리 주말 껴서 2박 3일 정도 도쿄와 하코네에 갔다 와요.” …“그래, 그러지 뭐, 당신 마음대로 해.”남편은 가정사의 결정과 선택을 모두 나에게 일임했다. 아내에게 전적인 선택권을 주면서 배려하는 것 같지만 달리 말하면 자신은 관심도 가지지 않겠다는 뜻이자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얘기와도 같았다.임경선, <나의 남자> 中 날카로운 칼에 베인듯 마음이 스산해졌다. 사위가 이토록 어두웠나 싶을 만큼 나는 일순간 고독해졌다. 다친 마음을 달래려고 꺼내든 독백체의 소설이 나를 사뭇 심각하게 만들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애인에게 선택권을 주고, 애인이 하자는 것을 따랐다. 애인이 만나자고 하면 만나고, 애인이 원하지 않으면 곧장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헌신이자 역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의 언어는 소설 속 남편의 목소리와 무척 닮았다. “어, 그러자.”, “응, 네 마음대로 해.”, “하고 싶은대로 해.”는 내가 참 자주 쓰는 말이었다. 그래서 애인과 뭘 하며 만나면 좋을지 먼저 떠올리기 어려웠고, 애인을 따라나선 곳이 좋아도, 심지어 별로여도 특별한 감흥이 일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애인이 하자는 것을 하기만 하면 되었으니 말이다. 이는 내가 생각하는 애인과의 교제, 관계에 대한 무게와 분리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 날 애인은 내게 이 무게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누군가 연애는 함께하는 것이냐고 물을 때, 그렇지 않다고 답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럼 연애를 혼자 하냐?’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엇이 함께하는 것일까? 몸이 같은 곳에 있으면 함께하는 것일까? 같은 식기, 같은 화장실, 같은 침대를 쓰면 함께하는 것일까? 고백하건데 나는 이런 고민을 제대로 자문한 적이 없다. ‘내가’, ‘연애를’, ‘누구랑’, ‘하는지/안하는지’에 골몰했을 뿐, ‘어떻게 함께 만날지’ 떠올려보지 않았다. 나는 연애를 해도 주어가 ‘우리’로 좀체 바뀌지 않았다. 그러므로 연애가 시작되면 ‘나’의 역할과 기능, 능력 그리고 남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만 신경썼다. 내가 느꼈던 억울함은 역할에 충실했음에도 발생한 갈등 때문이고, 애인(아마도 내 삶의 모든 애인들)이 느꼈던 속상함과 화는 내가 연애가 시작된 이후로도 여전히 내 생각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비롯됐음을 몰랐다. 목젖에서 마주친 맨박스(Man Box)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맨박스(Man Box)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실상 내가 이 연애에 문제가 없다고 안심한 근거는, 남자다움에 근거한 조건과 역할이 충족되었다고 착각한 것에 있었다. 남자다움의 조건은 더치페이 이상의 데이트 비용을 지불할 능력, 데이트 공간인 집의 소유, 애인에게 부족함 없는 학력, 지식, 문화자본, 사회적 관계의 충족을 의미했다. 남자다움의 역할은 데이트 시 적절한 행동의 수행과 많은 것을 가타부타 요구하지 않는 과묵함이었다. 그러니 나는 남자의 조건과 역할을 모두 달성함으로써 ‘좋은 남자’로 승인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연애에 문제는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맨박스, 남자다움의 억압은 단지 근육을 기르고 돈을 잘 버는 멋진 남자가 되라는 압력 이상의 영향을 미친다. 조건과 역할을 따지는 것에만 빠져, 상대와 좀처럼 상호작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애인이 섭섭함을 토로하면, 왜 섭섭해하는지에 부당함을 느끼고 섭섭할만한 이유를 탐색하는 게 아니라, 애인의 감정을 마주하고 그에 상응하는 나의 감정으로 되돌려주었어야 한다. 애인의 섭섭함 아래에는 나와 더 친밀해지고 싶은 욕구, 나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싶다는 동기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너무나 표면적으로, 피상적으로 애인의 감정을 쳐내기 바빴다. 나는 맨박스에 맞춰 사고하지 않는다고 자부했음에도 그랬다. 맨박스는 가슴 속  감정의 길목에, 그것을 언어로 실어 나르는 목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다. 상대와 소통하지 말라고, 상대는 지금 너의 역할과 헌신을 무시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며. 60분의 통화시간-그날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도록 했다. 아마 애인이 그날의 전화에서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 바랐던 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나를 더 사랑해줘.내가 너에게 하나뿐인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싶어.사랑도 없고 특별함도 없다면 그냥 달콤한 거짓말이라도 해줘.무미건조했던 나는 말 한 마디를 못했다. 억울함과 부당함에 골몰했을 뿐,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말을 끝내 듣지 못하는 사람과 계속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끝끝내 우리가 걷는 길의 풍경이 달라졌다. 당시 애인에게 걸려온 전화에 나는, 그동안 이 관계의 무게를 오롯이 혼자 감당하게 한 것을 미안하다고 답해야 했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바빠서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네가 여전히 나에게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참신한 언어로 돌려주었어야 했다. 이러한 변화 가능성이 담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건너갔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너무 늦어버렸지만 말이다. 당시 애인의 말을 골똘히 번역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번역 할 필요가 없도록, 애인이 그때 나에게 저 말을 그대로 직언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답은 ‘아니다’였다. 당시의 나로서는 어떤 말을 듣더라도 부당한 처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게다가 저 번역된 말은, 누구라도 쉽게 발음할 수 있는 무게의 언어가 아니다. 나를 더 사랑하고 특별하게 대해달라는 말. 차마 직접 발화할 수는 없어도 너무 간절하게 원하는 말. 나는 기대도 하지 못해 표현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말을 애인은 온 힘으로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위에 인용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소통을 시도하는 염미정에게 “추앙이 뭐냐? 난 몰라.”라고 답한 구자경, 이에 대한 염미정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들개한테 팔뚝 물어뜯기길 각오하는 놈이그 팔로 여자 안는 건 힘들어? 어금니 꽉 깨물고고통을 견디는 건 있어 보이고, 여자랑 알콩달콩 즐겁게사는 건 시시한가 보지? 뭐가 더 힘든 건데?들개한테 물어뜯기고 코 깨지는 거랑 좋아하는 여자편하게 해주는 거랑 뭐가 더 어려운 건데?”JTBC, <나의 해방일지> 10화 中 사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만나고 사귀려고 연애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연애가 하고 싶어서, 애인을 인형처럼 곁에만 두려고 만나는 게 아닐까? 진정으로 말을 걸지도, 듣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나는 분명 나의 애인을 사랑했다. 내가 사귀었던 애인들 모두 마찬가지로 당시의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그 마음만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사랑으로 대했는지 더는 확신할 수 없게 됐다.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나, 그것이 목젖에 가로막혀 바깥으로 표현될 수 없었다면, 그것을 진정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흔히들 사랑하면 다 잘 만나게 된다는 식으로 쉽게 이야기하지만, 나는 더는 이 통념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맨박스는 단순히 남자다움에 갇혀 근육만 기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맨박스는 사람이 사랑을 매개로 진정 함께할 수 없도록 한다. 삶에서 이보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래서 성별고정관념으로 점철된 문화에 도전한다는 것은, 왜곡된 사랑을 부디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 투쟁이다. 표현되어야 사랑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을 막는 억압이 있다. 그러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 내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 상대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가로막는 맨박스여야 하지 않을까.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9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1RtMnRv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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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외롭게 죽고 싶지 않아
<혼자 외롭게 죽고 싶지 않아> by 남함페 이한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무연고 사망자의 75%가 남성이고 그 중 60대 남성(886명)이 가장 많다.” 스스로에 대한 돌봄, 가족과의 관계 맺음, 감정 표현이 익숙하지 않은 우리네 많은 남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숫자다. 남성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하면서 왜 남성이 성평등과 페미니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 강조하기 위해 저 숫자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섬찟하다. 남성 섹슈얼리티를 탐구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낸 이후로, 주변에서는 ‘꼭 필요한 주제다’, ‘너무 심각한 문제’라는 이야기를 많이 건넸지만 사실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다분히 개인적인 관심과 걱정 때문이다.나도 혼자 외롭게 죽고 싶지 않다.연애를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나름 절절한 연애를 해왔고 심지어 지금도 하고 있다. 결혼할 수 없는 법적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순전히 운 좋게 아직까지 이성애자로 살고 있기에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결혼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난 몇 번의 연애와 이별은 점차 내가 우리 사회의 ‘정상가족’과 ‘정상연애’ 이데올로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결혼과 혈연을 통한 가족이라는 기존 관계도 싫지만 동시에 외롭고 싶지도 않은 이 복잡한 마음이 비단 나 하나만의 고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이번 기회에 투정을 조금 부려볼까 한다.실수와 실패로 점철된 연애 스무 살, 대학에 갓 입학한 나는 연애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연애를 해야 한다는 주변 분위기에 한참 휩쓸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사회는 “대학 가서 하면 돼!”라는 말로 청소년기의 모든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구와 탐구를 유예시키지 않았던가. 그렇게 성숙하지 않은 성인이 된 이들은 늦은 숙제를 하듯 허겁지겁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는 게 미덕이라 여겼다. 그러나 늘 그렇듯 인생은 예상처럼 풀리지 않고, 연애에 혈안이 된 스물의 남자애는 못나기 그지없어서 모태솔로라는 딱지를 멍에처럼 지고 몇 년을 보낸 이후에야 연애다운 첫 연애를 하게 됐다. 그것을 ‘첫사랑’ 같은 아련한 단어로 추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돌이켜 생각해 본 첫 연애는 실수와 문제투성이 그리고 실패로 점철됐다. 안타깝지만 그 이후의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과거의 실수와 부족함으로부터 배워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던데, 유독 연애에서는 이런 교훈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이를테면 나는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떤 이성을 만났을 때, 그 친구가 좋고 함께 있는 게 즐거워서 같이 자리하다 보면 어느새 하하 호호 하다가 손을 잡고 뽀뽀를 하고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여기까지 보면, ‘술과 밤이 있는 한 이성 간에 친구는 없다’는 구린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실 난 그 친구와 뽀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성격 잘 맞고 함께 있으면 즐거웠으나 그렇다고 꼭 그 관계가 ‘연애’의 형태여야 했을까? 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말처럼, “우리는 살면서 동성이기에 우정으로 넘겼던 사랑이 많고, 이성이기에 사랑으로 착각한 많은 순간을 살아간다”고 하지 않는가. 여성과 너무 친한 남성은 ‘게이’거나 그에 준하는 매력이 없는 남성으로 여겨지기 일쑤였고 나는 그런 오해와 낙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성과 거리를 두거나 아니면 연애로 숨는 비겁한 방식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여성과 깊은 우정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고 연인이 되더라도 그에 따라오는 기대와 책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벅차 도망치기 일쑤였다.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다른 관계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내 인간관계는 좀 더 다채롭고 폭넓지 않았을까? 페미니즘을 접하고 비로소 그 문제를 자각했으나 여전히 ‘그래서 어쩌지?’의 영역은 미지수다. “고도로 발달된 우정과 사랑은 서로 구분할 수 없다?” 앞서의 이야기대로라면, “결국 사랑과 연애는 몸이 끌리는 관계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또 몇 번의 연애와 고민은 그 명제마저도 부정하게 했다. 어떤 연인과는 뜨겁게 불타올랐으나 그만큼 빠르게 식었고 또 어떤 연인과는 꽤 오랜 시간 성관계 없이도 행복하게 지낸 바 있다. 사회에서는 이를 ‘섹스리스’라 하여 엄청 대단한 문제인 것처럼 여기기도 하지만, 서른 줄에 들어온 지금 주변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도 문제없이 잘 지내는 커플이 적잖다. 분명 연애에 있어 섹스의 위상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또 연애의 기준이나 전부 역시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렇게 요모조모 따졌을 때, 내가 내린 결론은, “고도로 발달된 우정과 사랑은 서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질투와 독점 같은 것을 따져 물어도 마찬가지다. 그저 미디어에서 보고 배운 것으로, 주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들으며 미약하게 연애라는 것의 정의를 내리려 울타리 세워 봤지만 그 때마다 태풍같은 관계가 휩쓸고 지나가 지난 내 생각들을 무용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렇게까지 고민하게 된 데에는 기나긴 연애 이후의 ‘현타’가 한 몫 했다. 그러니까 써놓고 보면 결국 되게 뻔한 이야기인데, 나에게 딱 맞는 반려자 같은 대상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제법 죽이 잘 맞았고 여느 연인처럼 사랑했다. 그러나 천재지변처럼 권태가 찾아왔고 지지부진한 관계가 지속됐다. 극복하거나 매듭짓거나, 오직 이 두 개의 선택지가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세상에서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영 이상했다. 대체로의 친구 관계는 함께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례하여 우상향하기 마련인데, 왜 대체로의 연인 관계는 굴곡이 생길까? 그리고 그 하나의 요소가 달라졌다는 이유로 왜 세상에서 제일 친하던 친구와 다신 못 보는 사이가 돼야 할까? 기존의 연애관에서 벗어난 관계를 상상하고 실천해 볼 수는 없을까?  서로를 아끼고 돌보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열망 돌이켜보면 이런 고민은 이별하지 않는 공동체를 꾸리고 싶은 마음의 발현이고 그것은 다분히 나의 결핍에서 출발했지 싶다.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부모의 직장을 따라 신도시와 지방을 오가며 잦은 이사를 다녔고 이렇다 할 고향이나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고향 친구 같은 게 없다. 나름 안정적이고 가정에 충실한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동시에 가족이라는 관계가 얼마나 많은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지 배우기도 했다. 아니 딱히 과거를 파헤치지 않아도 충분하다. 성인이 된 이후, 나의 경제적인 사정은 늘 비정규직과 프리랜서로 대표되는 불안정 그 자체였다. 앞선 관계를 통해서 내 인생에서 사랑 역시 중요하지만 일과 취미 역시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게다가 지구에는 인간이 너무 많다. 그저 나라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취약해진 노후를 위해 재생산을 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비윤리적이고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돌봄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언젠가 혼자가 될 테고 사랑하는 사람은 병약해질 것이며 나 또한 병들고 돌봄이 필요해진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나약해질 서로를 돌보고 돌봄 받고 싶다. 다만 언제 또 변할 지 모르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모든 것을 내맡길만큼 용기있지 않고 결혼 과정에서 쓰는 문서와 보증인에 얽혀서 원치 않는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 건 끔찍하다. 게다가 세상에는 사랑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도 성별이 같다는 이유로 결혼 하지 못하는 연인도 너무 흔해서 더더욱 결혼이라는 제도로 쉽게 흘러들어가고 싶지 않다. 아직 뒤죽박죽에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지만, 이 모든 고민을 유예하고 그저 때가 되었기 때문에 가족을 꾸리는 일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지금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래서,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수식어를 붙이든 결국 뒤에 따라오는 건, 그래서 지금의 연애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연애, 지금의 혈연 가족 형태가 아닌 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방법은 모른다. 나는 아직까지 그런 형태의 공동체를 꾸리거나 비슷하게 경험해 본 적도 없다. 내가 누군가를 돌보거나 편히 돌봄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까지 ‘정상’이라 이야기 되어왔던 관계에 유통기한이 임박해 왔으며, 더더욱 이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형태의 관계와 가족을 시도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혼자 외롭게 죽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혈연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메어 살아가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를 꾸리고 싶어 이렇게 떠들어대지만 여느 가족들처럼, 혹은 과거 연애처럼 실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우리는 새로운 시도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이 글이 공감이 간다면 조심스레 제안해 줬으면 좋겠다. “우리 동료가 되지 않을래?”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8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kZtLyoY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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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던 돌봄을 목격하다
<보이지 않던 돌봄을 목격하다> by 남함페 태환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보이지 않던 돌봄을 목격하다2020년 9월의 셋째 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이 새하얬다. 퇴근하고 집에 온 아버지는 주차장 계단을 오르는 순간 어지러움이 몰려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잠시 쉬고 왔다고 했다. 그리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실 바닥에 고꾸라졌다. 형은 쓰러진 아버지를 일으켜 앉혔고, 나는 119에 전화를 걸었다. 구급 침대에 눕혀진 아버지는 아파트 1층에서 잠시 정신을 차렸다가 몇 마디 말을 하더니 다시 한번 의식을 잃었다. 인근 대학 병원 응급실에서는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손쓸 도리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결국 지인의 지인을 통해 다른 대학 병원 응급실로 향했고, 아버지는 뇌출혈 수술을 무사히 받을 수 있었다.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아버지의 수술 이후 한 달이라 하겠다. 중환자실에 계셨던 아버지는 회복세가 좋아 일반 병실로 금방 내려왔다. 처음엔 기뻤지만, 그 뒤가 가시밭길이었다. 어떤 이를 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거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사의 기로를 가로지르는 때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지만, 정작 생의 영역으로 돌아와 일상으로 회복하기까지 갖은 고생을 자진해 짊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돌보는 사람의 활력은 바닥을 향해 추락한다.어머니는 그 바닥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형제에게 간병인을 고용하는 대신 돌아가며 아버지를 돌보자고 했다. 형과 나는 교대로 저녁부터 새벽까지, 어머니는 매일 아침부터 낮까지 아버지 곁을 지켰다. 바로 그때 어머니의 돌봄을 목격했다. 아니 목격한 건 태어나는 순간부터였을 테니, 비로소 알아차렸다. 아버지에게 눈 한 번 못 떼는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또 일을 했다. 이중 노동. 페미니즘 책에서 읽고 읽었던 그 이중 노동을 어머니가 하고 있었다.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이중 노동이란, 주로 집 밖의 임금노동과 집 안의 가사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물론 집의 안과 밖을 나누는 이분법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돌봄 노동을 수행하며 돈까지 벌어야 하는 여성들의 억압적 현실을 고발하는 용어로 주로 사용된다. 아버지와 함께 이불 가게를 운영하시던 어머니는 퇴근 후 집에서 가사노동까지 책임 진지 이미 오래였고, 아버지가 병상에 눕자 이제는 간병까지 해야 하는 다중 노동을 수행해야 했다. 병실에서 어머니의 돌봄 노동을 바라보며 나는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서 받았던 돌봄의 순간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돌봄의 장면과 기억따뜻한 밥과 눈부신 햇살. 나에겐 돌봄이 그렇게 기억된다. 8~9살 즈음, 태권도 학원이 끝나고 울면서 집으로 달려갔다. 초등학교 고학년 형들과 피구 게임을 하고 싶었지만 거절당했던 억울함을 어머니에게 달려가 하소연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가슴팍에 폭 안아주며 등을 두들겨 줬고, 샤워하고 나오면 밥을 차려주겠다고 위로했다. 엉엉 울며 샤워를 끝마친 나는 부엌 식탁에 차려진 밥을 어머니와 함께 먹었다. 밥을 다 먹어갈 때 즈음, 내 머리에서 태권도 학원의 기억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돌봄은 밥과 햇살이다. 따끈따끈한 밥과 어머니 등 뒤로 들이치던 부엌 창가의 금빛 햇살.어른이 된 나의 하루를 샅샅이 뜯어보면, 돌봄으로 조립되어 있다. 흔히 돌봄이라 하면 사람들은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을 떠올리지만, 돌봄의 영역은 말과 행동의 경계를 넘나든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서며 들었던 “잘 다녀와”는 나의 평온한 하루를 바라는 가족의 돌봄이다. 놓칠 뻔한 엘리베이터를 잡아준 이웃의 돌봄, 출근하자마자 커피 한 잔 사다 주는 동료의 돌봄, 퇴근하고 술 한 잔 같이 먹으며 일하는 건 괜찮냐는 친구의 돌봄. 나의 하루는 나를 아끼는 누군가의 돌봄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타인의 돌봄으로 가득 찬 나의 하루를 살펴보다 문득 나는 누구를 어떻게 돌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가장 첫 번째로 떠오르는 돌봄 대상은 부모다. 하루하루 건강이 달라지는 부모를 돌보는 것이 나의 의무이자 역할이다. 매일 아침 약을 드셔야 하는 아버지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피곤해하는 어머니. 나에겐 늘 그들의 낯빛과 걸음걸이가 눈에 밟힌다. 다음으로 애인. 요즘 애인은 아침 출근 전에 산책하며 강아지를 유치원에 등원시킨다. 나는 그런 애인의 건강과 출근길을 신경 쓴다. 간밤에 잠은 잘 잤는지, 출근에 늦지 않았는지, 걸렸던 감기는 다 나았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오후에 참석한 회의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료의 안위를 걱정한다. 일이 너무 많지 않은 지나 개인적인 고민이 있지 않은지 뒤풀이 자리에서 속 얘기를 꺼내놓고 대신 빈 자리에 술을 채워넣는다.나는 다른 이들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성, 청년, 아들, 친구, 동료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나에게 어떤 돌봄의 의무와 역할이 주어져 있을까? 일부의 나는 충분히 돌봄을 수행하고 있겠지만, 다른 일부의 나는 돌보는 자로서의 역할에 소홀하지 않나? 아니 애초에 돌봄의 필요성에 대해 마음 속 깊이 공감하고 있지 못 할 수도 있겠다.돌봄을 바라보는 관점우리 모두는 돌봄 받는다. 이렇게 확언할 수 있는 건, 그 누구도 혼자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사회로부터 돌봄은 수행된다. 그리고 받은 돌봄은 휘휘 돌고 돌아 다시 누군가에게 건네진다. 돌봄은 사회적이다. 일방향적이지 않고 순환적이다. 그래서 돌봄을 받는 존재라면 좋든 싫든 누구나 돌봄을 다시 수행하게 된다. 흔히들 얘기하는 ‘사회적 안전망’처럼, 돌봄도 우리 사회에 거미줄 같이 쫀쫀하게 존재한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많아서 목이 좀 칼칼하네” 하는 자기 돌봄이, 애인에게 하는 카톡 한 마디, “오늘 미세먼지가 심하니까 마스크 꼭 끼고 외출해요”로 이어진다. 나의 카톡을 확인한 애인이 멀리 떨어져 사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건강 챙기라는 애정 어린 말을 하고,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친구들과의 저녁 모임에서 요즘 같은 간절기에 건강 조심하자는 위로를 건넨다. 이렇듯 돌봄은 ‘나’로부터 시작해 끊임없이 누군가를 향해 전달되며 이어지고 또 확장된다.코로나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언론은 ‘영 케어러’에 주목했다. 아픈 가족을 간병하거나 돌보는 청년을 일컫는 영 케어러는 2021년 5월, 아버지를 홀로 돌보다 끝내 방치하여 죽게 한 한 청년의 이야기를 기점으로 특히 더 주목받게 되었다. (“뇌출혈 아버지 방치한 ‘간병살인’ 청년 항소심서도 징역 4년”, 세계일보) 위기감을 느낀 정부와 지자체는 영 케어러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각종 지원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 가족 돌보는 ‘영 케어러 청년’ 900명 지원한다”, 조선일보)영 케어러에 대한 사회 각계의 관심을 지켜보다 어느새 마음이 뾰족해졌다. 영 케어러에 대한 정책의 실효성이나 부족한 지원에 대한 거슬림이 아니다. 언론 보도와 각종 정책에 담겨있는 돌봄에 대한 시각이 매우 협소했다. 영 케어러 서사에는 ‘아픈 가족’이 기본으로 등장한다. 아픈 가족 - 청년 구조에서는 일상적 돌봄에 대한 논의가 낄 틈이 없다. 앞서 썼듯이, 우리의 일상은 누군가로부터의 돌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받은 돌봄을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돌려준다. 아픈 가족을 청년 개인이 돌봐야 하는 현실이 아니라, 평범한 누군가를 돌보려는 청년들의 능력이나 의지에 주목하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돌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아픈 사람을 간병하는 식의 너무 좁은 시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모성 얘기는 이제 그만질문에 답하기 이전에 이 글에서 소개한 나의 이야기에도 비판받을 점들이 많다. 페미니즘 렌즈로 본다면 내가 돌봄을 인식하고 고민하게 된 이야기는 지나치게 어머니의 돌봄 노동을 낭만화하는 한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 결국엔 또 남성 화자가 여성(어머니)의 돌봄을 언급하며, 한국 남성 특유의 가부장적 권력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나이와 상관없이 멀쩡한 아들이 낮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어머니가 차려준 밥 얻어먹다 문득 어머니의 노고를 깨달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이제 징글징글하게 느껴지리라. 여기에 더해 돌봄 노동의 당위성만을 호소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도 든다. 남성이 일상적으로 어떤 돌봄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여전히 이 부분이 나에게는 자기성찰의 영역으로 남아있으며, 나의 짧은 식견이 드러나는 것 같아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남자 간호사들끼리 모여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버지 수발을 드는 딸은 볼 수 있지만 어머니 수발을 드는 아들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한다.”_간호사가 되기로 했다(*)/ 김진수 외 * 남자 간호사 14명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간호사라는 직업과 남성이라는 성별이 교차하는 의료 현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이 문장이 내가 이번 글의 주제를 돌봄으로 정하게 된 계기였다.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침묵할 수만은 없었다.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듯, 남성의 돌봄 노동은 여전히 요원하다. 보이지 않고 돈으로 매겨지지도 않는 돌봄 노동은 어째서 여태껏 남성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어떻게 하면 “돌봄은 주로 여성이 하는 것”이라는 여전한 사회적 관념을 깨고, 우리 모두의 책임과 역할을 논의할 수 있을까? 간병 수준으로 논의되고 있는 청년 세대의 돌봄 역할을 어떻게 일상적 돌봄의 영역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는 돌봄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써야 한다.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 어떻게 다른 이를 돌보는 것으로 연결되는지, 그 돌봄의 현장을 너무 당연시하지는 않는지 질문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돌봄의 주체이자 대상이니,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나가면 좋겠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한 것처럼, 한 사람이 살아가려면 온 세상의 돌봄이 필요하니 말이다.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7화 원문 주소 : https://campaigns.do/discussions/792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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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안 했는데 강간이라니요?
<섹스를 안 했는데 강간이라니요?> by 남함페 연웅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A는 ‘먹방’을 즐겨 본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쌓아놓고 탐스럽게 먹어치우는 모습은 그에게 왠지 모를 충족감을 주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먹을 수 없으니 누군가의 폭식을 보며 대리 만족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모니터 화면 속 스트리머는 무엇인지 모를 고기를 한가득 쌓아두고 바삐 먹고 있다. A는 일만 원을 후원하며 고기 세 점을 한 번에 쌈에 싸서 먹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먹방을 보던 A는 이제 조금 질린다고 생각하며 ‘더 재미있는 영상’을 찾아 다른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 접속한다.해당 방송 플랫폼 메인에는 현재 인기 있는 라이브 방송이 순위별로 나열되어 있다. 대부분 게임 방송이나 스포츠 혹은 소위 ‘벗방’이다. A는 눈에 들어오는 한 여성의 라이브 방송에 접속한다. 화면 상단으로는 엄청나게 쌓인 후원금 수치가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게 보인다. 화면 한 쪽에는 후원금 액수별로 해당 스트리머가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선정적인 ‘모습’들이 정리되어 있다. 후원은 이어지고 스트리머는 받은 돈에 비례하는 포즈나 자세를 취해 ‘보여’준다. 왠지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 A는 이내 해당 방송을 끈다.A가 다음으로 들어간 라이브 방송은, 분명 ‘벗방’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한 여성 스트리머의 라이브 방송이다.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니 음악 방송인 듯 하다. 이내 후원금이 들어오는 알림음이 들리고, 요청사항이 올라온다. … ‘만 원에 발 보여주세요’ … ‘3만 원에 겨드랑이 보여주세요’ … 해당 스트리머는 당황하다가도 자연스럽게 농담으로 요청을 넘기는 모습이다. 곧 이어 ‘돈을 냈는데 왜 안 보여주냐고’ 화내는 시청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당한 대우라도 받은 듯 스트리머를 향해 날것의 분노를 표출한다. 더 이상 보고 있는 게 께름칙한 A는 해당 라이브 방송에서도 도망치듯 나온다. 잠시 쉼이 필요해 이내 컴퓨터를 끈다.어두워진 모니터에는 지친 얼굴이 비친다. “난 뭘 보고 있었던 걸까?” 본다는 것은 뭘까. 단순히 내 앞에 있는 어떤 현상, 사물, 사람을 인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시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내포하는지 알고 있다. 때로는 직접적인 말 한 마디보다 한 줄기 시선이 더 강한 메시지가 된다.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보자. 나는 줄곧 “눈 깔아!”를 남발하는 사람들을 지나왔다. 엄하기로 소문한 선생님은 꾸중할 때 ‘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냐’고 물었고, 학교에서 만난 선도부와 군대에서 만난 선임은 자꾸 ‘눈을 깔라’며 내 시선을 통제했다. 내 시선은 곧 내 방향이었고, 내 의사였으며, 내 권위와 주체성이었다. 나를 통제하거나 이용하려 했던 사람들은 내 시선부터 순종시키려 한 것이다. ‘판옵티콘’을 아는가.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밴덤’이 고안한 감옥의 설계로, 감옥 건물이 둥글게 중앙 망루를 둘러싼 형태로 지어져, 간수는 가운데 망루에 서서 모든 죄수를 빠짐없이 감시하는 동시에 죄수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자에게 노출될 것을 의식하며 24시간 경계하게 된다. 죄수들은 실제로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중앙에 놓인 ‘시선의 존재 가능성’만으로도 통제 당하게 된다. 이렇듯 시선은 분명 권력이다. 다른 시선은 어떠한가. ‘사키 바트만’을 아는가. 인류는 불과 200여 년 전, 한 인간을 광장과 대학에서 알몸으로 ‘전시’했다. 당시 그는 남아프리카 코이코이족의 평범한 소녀였는데, 유럽인들의 침략으로 납치되어 영국에 팔려 ‘인종 전시’를 겪다 다시 프랑스에 팔린 후 성적으로 착취당하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 불과 100여 년 전에는 서양인들이 ‘만국박람회’ 등에서 유색 인종을 ‘인간 동물원’의 형태로 전시했었다. 당장 우리나라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도쿄권업박람회에서 조선인 2명을 전시했던 기록이 있음을 알 수 있다.최근 어린이대공원을 탈출해 서울 도심을 누볐던 얼룩말 ‘세로’를 기억하는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연이어 부모의 사망을 겪은 뒤 방황하고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좁은 우리에 갇힌 채 반대편 우리에서 지내던 캥거루와 싸운 일도 있었다. 얼마 뒤 그는 스스로 나무 울타리를 부수고 동물원을 탈출해 서울 도심을 활보했다.‘동물권’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그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지만 이 글에서는 차치하도록 하고, 시선 권력을 대입해 얼룩말 ‘세로’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가둘 수 있는 우리를 만들고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집어넣고 나오지 못 하게끔 울타리를 높게 세운다. 그리고 밖에서 ‘안전’하게, 안에 갇혀 ‘전시’된 존재를 ‘구경’하고 일방적으로 말을 걸거나 가지고 있는 걸 주기도 한다. 그렇게 권력과 위계의 차이는 가시화 되고, 차별은 더 명확하게 전시되고 공인된다.얼룩말 ‘세로’가 갇혀있던 우리를 빠져나와 서울 도심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세로’를 걱정하고, ‘세로’에 대해 궁금해 하고, ‘세로’가 겪었던 외로움이나 아픔에 공감했다. ‘세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울타리 안에 있던 ‘세로’가 그저 ‘전시’된 얼룩말로 취급되며 ‘구경’의 대상이었던 것에 비해, 울타리라는 장벽을 넘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세로’는 하나의 ‘존재’이자 ‘주체’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처럼 동물원부터 과거 서구권의 제국주의가 ‘사키 바트만’과 ‘유색 인종’을 전시하고 구경하려 했던 그 모든 시도는 ‘주체’를 ‘대상’으로 격하시키고자 하는 의도의 ‘대상화’였던 것이다. 온라인 환경이라고 오프라인과 다를까. 라이브 방송 같은 환경에서 스트리머나 유튜버가 겪는 일부 폭력적인 상황은 마치 ‘디지털 동물원’처럼 보인다.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각종 매체를 가리지 않고 댓글이나 실시간 채팅에서 보이는 성적대상화와 성희롱, 외모 이야기와 분별없는 비난은 정말 심각하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이들은 마치 본인이 판옵티콘의 가운데 망루에 선 간수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여성은 아무 잘못 없이 판옵티콘의 죄수가 되어 살아가야 하는가.시선은 분명한 권력이다. 시도 때도 없이 꺼내놓는 보잘 것 없지만 폭력적인 그것은 분명한 의사와 방향을 가지고 대상을 향한다. 동성 커플이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면 지나친 후 살짝 뒤돌아보는 눈길이 따른다. 흘깃. 외국인이 지나가면 누군가 슬그머니 쳐다본다. 흘깃. 휠체어를 탄 사람이나 목발을 짚는 사람이 대중교통에 타면 슬쩍 쳐다본다. 흘깃. 지나가는 여성의 신체를 흘깃거리는 남성의 시선. 흘깃. 흘깃하고 지나가는 이 모든 것이 시선으로 저지르는 권력 행위이자 차별과 폭력이 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시선을 통해 한 번 더 짚어내는 그 행위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찍어내며 사회와 구분짓는 일이 되는 것이다.지나가는 여성의 신체를 함부로 훑는 남성의 시선. 그 시선이 카메라에 담기면 불법 촬영이 된다. 그 시선이 모여 단톡방에서 여성을 품평하고 성희롱하며, 그 시선이 만든 ‘불법 촬영물’을 서로 돌려 본다. 최근에는 이러한 시선으로 자신의 지인이나 동료를 음란물과 합성해 인터넷에 유포하는 ‘지인능욕’도 존재한다. 이 시선들은 여성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닌 성욕과 소유의 대상으로 구분하며 ‘대상화’ 한다. 이때 ‘대상화’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를 ‘대상’으로 격하하거나 폄하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폭력이고 혐오다. ‘사람을 물건 다루듯이 하면 안 된다’는 표현 역시 이러한 맥락인 것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이자 소유의 대상, 지배의 대상으로 보는 그 시선은 여성에 대한 ‘대상화’이며 곧, 시선으로 행하는 ‘폭력’이 된다. 앞서 우리는 여러 사례를 통해 어떤 존재가 ‘대상화’ 되었을 때, 얼마나 쉽게 더 큰 폭력에 노출되는지 함께 보았다.‘섹스를 안 했는데 강간이라니, 말이 안 된다’고? 많은 이들이 불편해 하는 ‘시선 강간’이란 명명은, 단순히 ‘쳐다보는 것만으로 강간이 성립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고안된 표현은 분명 아닐 것이다. 흘깃거리고 훑어보고 뚫어져라 보는 그 시선을 통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를 소유와 욕정의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일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 그러한 대상화가 얼마나 끔찍한 폭력의 전조 현상이 될 수 있는지 경고하기 위한 표현이 아닐까. ‘시선 강간’이라는 표현이 과하다고 느껴진다면 ‘시선 폭력’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경각심을 갖는 일이다.2018년 당시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하던 황다건 치어리더가 있었다. 당시 나이가 고등학교 3학년으로 미성년자였던 그는 삼성 라이온즈를 대표하는 치어리더 중 한 명이었으나, 일베 등 커뮤니티의 성희롱과 욕설, 성적대상화로 결국 해당 시즌이 끝난 후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당시 황다건 치어리더는 개인 SNS를 통해 이러한 성희롱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으나, 이를 일베 등 커뮤니티에서 ‘그런 시선 강간이 싫다면 치어리더를 안 하면 된다’고 발화한 것이 보도(기사 링크 : 황다건 성희롱 피해 호소.. 일베 “싫으면 치어리더 안 하면 된다” - 한강타임즈) 되기도 했다. 평소 남성들이 어떤 눈으로 치어리더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일베 속 발화자의 말처럼 정말 황다건 치어리더가 칼군무를 췄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우린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게임 속 멋있는 기사 갑옷이 여성 캐릭터에게 닿으면 비키니 갑옷이 되고, 수많은 아이돌이 박자 맞춰 칼군무를 춰도 여전히 '섹시 아이콘'이자 '움짤'로 소비되는 현실을. 게다가 황다건 치어리더는 당시 미성년자였음을 빼놓을 수도 없고 말이다. 아직도 ‘시선 강간’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과하다 생각하는가. 솔직히 정말 과하고 말이 되지 않는 건 치어리더로서의 꿈을 이어나가고 싶은 한 사람이 겪어야 하는 성희롱과 성적대상화, 메일 게이즈(Male Gaze) 쪽 아닌가. 그 시선, 분명 폭력이다. 그렇다면 ‘남을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냐’고 되묻는 소리가 들린다. 틀렸다. 오히려 우리는 타인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아서 문제다. 애정하는 영화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on Fire)>이라는 영화다. 이 영화는 시선을 통해 사랑을 그려낸다. 사랑이 소유가 아닌 흘러가는 추억이자 시선으로 하는 예술임을 너무나도 황홀하게 보여준다. 추천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한 마디로 추천사를 쓴다면 ‘메일 게이즈(Male Gaze)’를 전복시키는 퀴어 영화이자 시선으로 사랑을 그려낸 걸작이라 쓸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남성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특정 남성이 나와 특정한 폭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특정 남성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엄존하는 가부장제 속 여성에게 내면화된 폭력과 억압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가부장제 속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강요받던 주인공은 또 하나의 시선을 만나게 된다. 그 시선에는 착취도, 대상화도, 평가도, 의도도 없다. 그저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이다. 응시를 통해 존재 자체를 보려하는,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던 것이다.우리 사회는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자꾸 훑어보거나 흘깃 보거나 곁눈질로 본다. 노려보거나 내려볼 때도 많다. 함께 살아가는 동료가 ‘대상’으로 격하되고 ‘폭력’에 노출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어떻게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겠나. 어떻게 안심하고 관계 맺을 수 있나. 우리는 우리가 가진 암묵적인 편견과 차별의 렌즈를 벗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른 존재를 ‘대상’으로 만드는 시선이 아닌, 그 존재의 있는 그대로를 응시하는 시선이어야 한다. 여성을 신체로만 본다면, 당신은 여성과 관계 맺을 수 없다. 아니, 관계 맺어서는 안 된다. 이미 여성을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시선 강간’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제안한다. 스스로 의식적으로 자신의 시선을 검수하는 일을 하자. 이미 오랜 시간 써 온 암묵적인 편견과 차별의 렌즈 없이 살아가는 일은 분명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여성 동료와 동행하고, 약자와 소수자와 더불어 살아가고자 한다면, 과감히 그 시선을 벗어야 한다. 내 시선이 내 의도 혹은 의사와 무관하게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경계하며 지속적으로 검수해야 한다. 소유나 구경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존재로 누군가를 온전히 바라보는 연습을 하자. 당신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날까지. [참고]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6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OEtOY1b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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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돌,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나
<리얼돌,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나> by 남함페 연웅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지난해 12월 26일, 관세청은 보도자료를 통해 『리얼돌 수입통관 지침』이 개정・시행됨을 알렸다. 사실상 전신형 리얼돌의 수입, 유통의 활로가 열린 셈이다. 근거가 된 법원 판결문 중 ‘문란한 느낌을 주지만,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평가할 정도는 아니다’에서, 어떻게 더 표현해야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아함을 누른 채 자료를 찾았다. 이때 몇몇 포스팅을 훑다가 깜짝 놀란 대목은, 쿠팡에서 리얼돌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었다. 국세청 창고에서 보관되던 리얼돌이 시중에 풀린다는 기사, 기다렸다는 듯 체험방이 운영될 거란 보도는 접했지만, 우리 집 현관까지 진입한 쿠팡에서 리얼돌과 만나리라 상상한 적 없었다. 가격도 천차만별, 수십만원부터 7백만원이 넘는 제품도 검색됐다. 두 번의 성인인증만 거치면 ‘프리미엄・플래티넘・명품’이라는 ‘인물’을 장바구니에 담아 소유할 수 있었다. 조사를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리는 내게 남은 생각은 이뿐이었다. ‘아니,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법적 허용 & 금지 이전에 따져볼 문제들 사실 수입・통관의 허용 여부는 핵심이 아닐 수 있다. 리얼돌은 이미 국내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쿠팡의 상품 후기를 통해 구매 시기를 확인해보니, 진즉 유통과 구매가 이뤄지고 있었다. 국내 공급에는 수입이 절대적 요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또한 수입・통관의 논의는 ‘전신형 리얼돌’에 국한되어 있는데, 실상 여성의 특정 신체를 본떠 만든 ‘남성용 자위기구’는 오래전부터 판매되어 왔다. 나아가 이 제품 중 몇몇은 실제 일본 AV 배우의 신체를 본떠 만들었다고 홍보한다. 이는 리얼돌을 비롯한 남성용 자위기구가 포르노 및 성매매와 같은 성산업과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는 또한 리얼돌이 한 사회가 여성을 어떤 존재로 대하는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소비하는가와 관련한 문제임을 시사한다. 즉, 법적 금지에 관한 논의 이전에, 여성의 신체를 성적 도구로 전락시켜 소비하는 건 괜찮은지,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규정해 남성의 성욕을 위해 ‘봉사’하도록 여겨도 되는지에 관한 최소한의 도덕적 물음이 있어야 한다. 설사 그것이 ‘물건’이라도 말이다.이른바 리얼돌 논쟁에서 너무 쉽게 전제되는 사항은 ‘리얼돌은 사람이 아닌 인형’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형이니 괜찮다’는 진술로 이어진다. 문제는 그것의 제작 기준이 실제 여성의 몸으로 설정됨에 있다. 리얼돌은 현실 여성의 신체와 유사할수록 높은 값이 책정된다. 2019년 리얼돌의 수입 및 판매를 금지하라는 국민청원이 개재된 데는 실존 여성의 얼굴을 리얼돌로 제작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합성 기술과 AI 안면인식을 활용해 ‘지인능욕’이라는 이름의 디지털 성폭력이 발생하는 작금의 현실을 고려하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염려였다(지인능욕 뿌리뽑기). 국민청원으로 표출된 분노는 리얼돌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넘어 현실 여성이 실체적인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위에 놓인 것이었다. 리얼돌에 담긴 여성의 성적대상화는 하나의 스펙트럼처럼 연속적 단계를 가지는 것 같다.‘성매매&성산업 - 남성용 자위기구 - 전신형 리얼돌 - 실존 여성을 두고 제작한 리얼돌’의 도식처럼 말이다. 이 과정은 여성을 향한 남성의 지배 욕구가 노골화・실재화 되는 과정이다. 이처럼 리얼돌은 그 묘사와 구현 방식에 있어, 남성이 여성의 몸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대상화라는 문제 리얼돌이라는 인형 안에 담긴 속성이 비록 성적대상화로 가득차있다 하더라도, 어찌되었건 인형은 인형 아니던가. 인형한테 무엇을 어떻게 한들 결국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싶을 수 있다. 마치 누아르 영화를 즐겨 본다고 해서 실제 폭력을 자행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대상화라는 건 여러 각도로 따져볼만한 관점이다. 우리는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누군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또한 중대하게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래 글은 가수 이적이 과거 SNS에 게재했던 단상이다. 물론 이 글을 두고 ‘비약이다’라고 응답한 네티즌의 말마따나, 눈사람을 걷어차는 행위가 곧 동물 학대는 아니며, 동물 학대가 곧 사람에 대한 폭력은 아니다. 그러나 글에 묘사된 남자친구가 어떤 대상을 걷어차며 크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중요하다. ‘눈사람’ 정도로 여겨지는 대상은 언제든 다시 걷어찰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는 언젠가 A씨가 ‘파괴해도 될 대상’이 되면 걷어차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걷어차는 행위는 그것이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강자/약자, 윗사람/아랫사람, 귀한 것/천한 것, 중함/사소함이라는 위계와 약자에 대한 대상화가 뚜렷할 때 가능하다. 사연의 남성은 이러한 인식에 깊이 뿌리내린 권력의식을 바탕으로, 아무 맥락 없이 ‘그냥’ 눈사람을 걷어찬 것이다. 위 글 속의 성별관계 또한 중요하다. 걷어찼던 성별이 여성이고, 그걸 남성이 지켜봤어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사뭇 달랐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데이트 폭력으로 여성이 죽고, 성폭력 가해자가 직장동료·학우·이웃·친족 등 ‘가까운 사이’인 경우가 부지기수임을 너무 잘 알지 않은가. ‘그냥 발길질 한번 가지고’로 넘어가기에, 무맥락의 ‘사정 없는’ 폭력성은 무게가 꽤 나간다. 안전이 전제돼야 할 연애관계를 고려하면 더 그렇다. 이러한 논의는 눈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해함・평온함・온정의 상징과 그것을 만들었을 누군가의 정성을 무미건조하게 짓밟은 것을 차치하고도 가능하다.이 서사에서 리얼돌의 포지션은 눈사람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리얼돌로 여성의 몸을 소유하려 한다면, 이 성적대상화의 종합적인 산물을 유희를 위해 꺼내 쓸 수 있다면, 평소의 사람 관계를 어떻게 상정하고 있을지, 그리고 그 관계가 한쪽으로 기울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를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인과관계라면 비약이겠지만, 상관관계라면 이 기울어진 운동장 속에서 다뤄볼 여지가 많다. 게다가 이러한 사고의 비약은 유효하다. 우리 인간은 노비를 재산으로 셈하며 팔아먹던 역사, 흑인 노예를 상자에 가둬 짐짝처럼 다뤘던 기억을 갖고 있다. 당연히, 그들은 그때도 인간이었다. 그러나 ‘노예인데 뭘 어때’라는 일념으로 인간이 그들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다. 먼 얘기 같다면 20세기 초 조선인의 삶을 떠올리면 된다. 모든 순사가 조선인을 죽이진 않았지만, 순사로부터  총검이 떠오르는 건 결코 억지가 아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하기에 그 결과는 참혹했고, 아직 끝난 이야기도 아니다. 함부로 대해도 되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구별, 그리고 그런 대상을 막 대하는 건 정당하다는 뻔뻔한 폭력성을 사유하는 비약이라면 몇 번이고 이뤄져야 한다. 남성의 성적 욕망과 여성의 몸 한편 리얼돌과 이를 옹호하는 주장들은 아주 오래된 편견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데,  남성의 성적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반드시 해소해야 한다는 성별고정관념이다. 성적 욕구는 남자라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때마다 경험하는 것도 아니며, 끌려다니도록 조건화된 것도 아니고, 반드시 배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배가 고파도 빵집에서 빵부터 집어먹지 않는다. 식욕 정도는 참을만 해서가 아니다. 꾸준한 교육과 훈련으로 학습된 ‘기본소양’이 만들어낸 결과다. 또 이따금 리얼돌이 성욕 해소를 대신해주므로 성범죄를 막는 데 유용하다는 따위의 주장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범죄는 성욕이 아니라 왜곡된 성인지와 위계로 인해 발생한다. 욕구가 행동을 결정하지 않으며(제발), 이 글은 리얼돌의 소비로 인해 더 왜곡될 성인지를 우려해 쓰는 글이다(제발2). 짚고 넘어갈 것은 또 있다. 남성의 성욕은 반드시 여성의 몸을 통해 해소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남성의 성욕을 매우 고유하고 본능적인 주체 행위로 이야기하면서, 그것의 해소는 반드시 어떤 대상이 ‘마련’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앞뒤가 안 맞다. ‘남성’의 욕구가 꼭 ‘여성’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면, ‘여성’은 ‘남성’의 욕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위치시키는 꼴이다. 여성의 몸을 경유하지 않고 스스로 욕구조차 충족할 수 없다는 건 그야말로 의존성이지 않을까. 이런 낡고 오래된 통념이 바로 맨박스(Manbox)이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과 그것을 위한 실천이 ‘남성지배’다. 이러한 편견들을 모두 조합하면 다음과 같은 명제가 성립된다. 남성의 당연한 성욕은 주기적으로 해소해야 하는 것이니, 그 역할은 여성(또는 여성형 리얼돌)이 도맡아야 한다. 이게 말이 될까? 그런데 리얼돌 산업은 이 두 가지 명제를 거름으로 먹고 자란다. 이러한 편견들이 가리키는 지점은, 바로 관계의 말소다. 실제 같아야 하지만, 실제는 안 되는 아이러니 리얼돌 제품의 상품 후기를 보면 흥미롭다. ‘여친을 만들어 주었다’, ‘여친보다 좋다’, ‘여친이 없어서’, ‘결혼 생활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 등 끊임없이 현실 관계를 호출하고, ‘실제 살결 같다’, ‘진짜 사람 같다’, ‘완전 리얼하다’ 등 사람과 비교하는 발화가 이어진다. 여기서 가장 큰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리얼돌을 순수한 인형으로 인식하자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앞에서 밝혔듯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 리얼돌의 가장 좋은 점이 ‘실제 사람 같아서’라니. 사람에 가까워질수록 좋은 평가를 받지만, 실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모순이다. 아마도 실제 사람이라면 제 멋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실상 성욕의 달성을 언제든 원하는 만큼 취하고 싶을 진데, 상대가 사람이라면 거쳐갈 단계가 많고 복잡하다고 느낄테니까. 그리고 그런 일방향적인 욕구가 곧 남성 성욕이라 여길 것이 불보듯 뻔하고 말이다.그렇기에 리얼돌을 구매하는 이들은 ‘틈만 나면 침대로 가자’고 말하는 여성 앞에서는 얼어붙거나 심지어는 못마땅히 여길 것이라 확신한다. 그들이 기대하는 건 이렇게 상호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적 역동은 ‘관계의 소멸, 대상화의 확대’가 리얼돌을 소유하는 심리의 핵심이자 구매요인임을 말해준다. 이 지점에서 리얼돌에게도 옷을 입혀주고, 이름을 지어주고, 같이 목욕하고, 잠도 잔다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리얼돌의 본질을 놓쳐선 안 된다. 리얼돌의 목적은 어쨌든 성기능이다. 성기능이 없으면 리얼돌이 아니다. 존재 가치가 성기능으로 결정된 리얼돌에 관계성을 일부 부여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대상화되지 않은 성욕 해소의 대안이 없어서일까? 대안은 버젓이 있다. 한국에 진출한지 7년이 다 되어가는 텐가라는 기업의 존재 때문이다.  텐가(tenga)는 남성 중심의 성인용품을 취급함에도, 여성에 대한 성적대상화로부터 자유롭다. 제품군 모두 성감을 위한 즐거운 자극 부여에 집중할 뿐, 그것의 외형을 묘사할 때 여성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제품의 모양은 기둥, 타원, 달걀로 다양하지만 모두 일관되게 여성의 몸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실제 여성과 비교했을 때 느낌이 어떤지 등을 언급하며 마치 물건 견적을 비교하듯 도구화를 일삼는 병적인 마케팅이 없다. 기능에 집중하고 제품의 특성을 말할 뿐, 특정 대상이 소비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텐가의 CEO 마츠모토 코이치는 창립 15주년 인터뷰에서, 텐가가 ‘여성의 나체나 소녀의 일러스트, 여성기를 본뜬 노골적인 형상에 관한 위화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제품을 만들자는 생각에서 출발했음을 밝혔다. 텐가의 성공은 ‘여성의 몸을 경유하지 않은’ 성적 즐거움의 가치와 독창적인 제품 개발의 조화를 통해 이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시각적으로 ‘보는’ 남성 쾌락에서 실제로 내 ‘몸을’ 체험하는 남성 쾌락으로 담론을 이동시킨 것이다. 그렇기에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에 있어 텐가라는 기업은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텐가에서 프라이드 에디션 제품을 출시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프라이드: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일련의 축제, 행진, pride month를 일컫는 상징) 리얼돌, 왜곡된 남성 섹슈얼리티의 온상 리얼돌은 왜곡된 남성 섹슈얼리티의 모든 요소의 집합이다. 여성에 대한 지배(통제), (성적)대상화, 고립이 그 요소들이다. 여성의 형상을 한 ‘몸’에 자신의 모든 섹슈얼리티(특히 성적 욕망과 실천)를 담고, 집에 가둔다. 자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 꺼내쓸 수 있으므로 자유로운 듯 보이나, 실상 그 집에 갇힌 것은 자신이다. 가장 병폐적인 것은 고립이다. 고립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가능성의 상실이다. 고립된 생활에서 더 나은 삶, 더 나은 관계,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기대가 자랄 수 없다. 이는 지배가 아닌 평등, 대상화가 아닌 관계맺음에 대한 고민을 원천차단하는 기재로 연결돼, 결과적으로 고립을 심화시키는 악화일로의 원인이 된다. 리얼돌은 고립을 고착화시킨다. 남성의 성해방은 커녕, 안 그래도 비좁은 자아와 소통의 창을 피부색 플라스틱 조직으로 틀어막을 뿐이다.이 고립의 굴레를 빠져나가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위계나 권력 없이 사람을 만나기 어렵고, 평등하게 관계 맺는 것이 낯설고 불편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유해한 남성문화는 남성이 자신의 약자성을 드러낼 때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았던가. 또 우리 주변에는 여자 같다, 게이 같다, 하남자다, 찌질하다는 언어로 무장한 젠더 폴리스(특정 성역할의 강요를 위해 마치 경찰처럼 ‘문화적 감시·단속’을 실천하는 이들의 비유)들이 언제나 존재했고 말이다. 이로 인해 취약성을 드러내본 경험과 그것이 수용받은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길도 여전히 고립무원하다. 성적대상화 또는 성폭력과 관련된 이슈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남성들의 발화는 늘 이런 식이니까. ‘현실에서 여성을 만나기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아느냐’, ‘내가 내 돈 내고 누리겠다는 데 뭐가 문제냐’, ‘솔직히 똑같이 해놓고 왜 남자 탓만 하느냐’는 식의 항변들 말이다.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방법을 찾기는 커녕 오히려 본인을 사회적 약자로 상정하고 여성을 강자의 위치에 놓는 경우가 허다하다. 코로나19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지금은 글로벌리즘(세계화)이라는 게 흔들리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벽 안에 틀어박힐 것인가, 아니면 벽을 넘어갈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_무라카미 하루키(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 인터뷰에서의 논점은 '반전(反戰)'이었으나, 유해한 남성 섹슈얼리티가 사실상 여성, 그리고 우리의 몸을 매개로 벌이는 전쟁과 같다고 보기에 해당 인터뷰를 인용한다. 현관문 앞까지 ‘사무용품’ 처리된 리얼돌이 직배송되는 시점에서, 리얼돌에 관한 논의가 더 진전되지 않는다면 고공행진하는 기술력이 향하는 곳은 불보듯 뻔하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리얼돌이 등장하고 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앞선 문제들이 해결되는 걸까? 이런 접근을 우리는 해결이라 부를 수 있을까? 지금이야말로 남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비판과 성찰, 새로운 탐구를 반드시 이어가야 하는 시기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넘어 '비정상의 상식화'가 이뤄지는 세상에서, 모쪼록 성평등한 사회가 더는 뒷걸음질 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제 여성만한 리얼돌이 버젓이 거래되는 세상에서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논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남성 스스로 길을 찾아나서는 수밖에 없다. 끝끝내 자신의 선택일 것이다. 리얼돌에 틀어박혀 침몰할지, 불확실하나 심장이 박동하는 관계의 장으로 넘어갈지. [참고]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5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ZktbMG8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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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잘(?)하고 싶은 남자들
4화 <섹스 잘(?)하고 싶은 남자들> by 남함페 이한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섹스… 드디어 섹스 이야기다. 이전부터 꾸준히 이와 관련한 주제로 글을 쓰고자 벼르고 있었으나 지면의 한계상, 체면과 엄숙주의 등으로 인해 글 써볼 겨를이 없었다. 허나 성교육을 하는 직업 특성상, 또 남함페 활동을 하면서, 언젠가 이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해야만 하지 않을까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 사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남성들이 또 섹스 이야기를 한다는 게 자못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남성이라는 젠더 권력을 지닌 존재의 배부른 소리라는 비판의 여지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프롤로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남성의 섹스 이야기는 이미 너~무 차고 넘쳐 고리타분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실로 남자 중·고등학교에 강의를 가면 복도에서부터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없이 “섹스~!”를 외치는 남자 청소년 무리를 목격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성교육을 시작하겠다고 하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어’라는 묘한 웃음을 띤 채 거들먹거리는 이들 역시 한 트럭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남성 청소년의 성 지식수준은 늘 또래 여성에 비해 낮은 편이다. 일례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18년 연구(조영주 외 3인 '청소년 성교육 수요조사 연구')에 따르면 중학생을 대상으로 ‘성에 대한 지식수준’을 살펴본 결과, 여성 청소년이 평균 4.29점일 때, 남자 청소년은 3.16점이었다. 그런 와중에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여성혐오적이거나 폭력적인 섹스 이야기만 떠돈다. 그 결과는 참혹해서, 한동안 인터넷에는 ‘3분 카레’(빠른 사정 또는 조루에 대한 은유)나 ‘6.9cm’(한국 남성의 성기가 6.9cm라는 조롱)라는 숫자에 과민반응을 보이며 온갖 손가락 모양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는 남성들의 횡포가 요란했다. 대체 이 엉망진창 와장창의 사태는 어떻게, 왜 만들어진 걸까? 그것을 알기 위해, 남성이 섹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과 공포를 진솔히 이야기 나누는 과정이 필요하다. 열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아무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채 겉핥기 식으로 다루어지는 남성들의 섹스 이야기, 오늘 한 번 원 없이 해보자.  "너희들의 첫 섹스는 아마 실패할거야" 간혹 남자 고등학교에서 성교육을 하게 되면 정말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온통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다가 성교육이라고 하니 얼마나 신나고 즐겁겠는가.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들에게 꼭 필요한 성을 최대한 즐거우면서도 기억에 남도록 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그 일환으로 성적인 관계 맺음에 대한 교육을 할 때, 들뜬 청소년을 진정시키며 던지는 말이 있다.     “여러분 중 약 90%의 첫 섹스는 실패할 겁니다.”     교실에서 섹스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잔뜩 흥분했던 청소년들은 강사가 던진 이 한마디에 갑자기 찬물이라도 맞은 듯 조용해진다. 그럼 이때, 한 마디를 더한다.     “자, 이제 여러분은 첫 섹스가 끝나고 분명 제가 떠오르게 될 거예요.”      첫 섹스에 대한 환상을 깨는 걸로도 모자라서, 그 아름답고 기대했던 순간에 웬 강사의 얼굴이 떠오르게 될 거라니. 청소년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첫 경험에 초를 친 강사에게 야유를 퍼붓거나 불안해하며 자신은 10%일 것이 분명하다고 초조해하고 낄낄거리거나 괴로워한다. 그럼 이제 한결 개운한 표정으로 위 이야기를 한 까닭을 설명한다. 첫 섹스가 실패할 거라는 이야기는 질투 섞인 저주도, 오지랖 넘치는 예언도 아니다. 그것은 유경험자의 회환과 안타까움이 담긴 염려의 말이자 섹스에 대한 환상과 오해를 벗기기 위한 시도다. 실로 나뿐만 아니라 작년 남성 섹슈얼리티 탐구 인터뷰와 주변인들의 많은 공통된 이야기 중 하나가 첫 섹스의 실패였다. 어떤 이는 어떻게 섹스를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 분위기를 깨버렸고 어떤 이는 삽입(결합) 하는 방법을 몰라 쩔쩔맸다. 더 많은 이들이 지나치게 긴장하여 ‘야동’에서 본 것과 다르게 너무 빨리 사정하거나 발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부끄러워하거나 속상해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동의를 제대로 구하지 못하거나 피임 방법을 잘 몰라서, 마땅한 시간과 장소가 없었다거나 서로 제대로 소통하는 법을 몰라서 등등으로 첫 섹스의 실패를 기억했다. 수많은 남성들이 첫 섹스에 갖고 있는 환상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많은 이들의 첫 섹스에 이렇게 공통적으로 실패 경험이 묻어 있는 건, 당연히 저 이야기를 한 강사 때문이 아니며 그저 남자 청소년만의 문제도 아니다. 가장 큰 원인은 학교를 비롯한 교육과정과 기성세대 전반이 마치 세상에 섹스라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터부시하며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0년 발생한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을 둘러싼 파열음만 봐도 그렇다. 많은 전문가들이 숙고하여 좋은 책으로 꼽았고 해외에서 우수도서로 뽑혔던 책이 한국에서는 보수 개신교 세력의 횡포로 부적절한 음란물 마냥 취급되며 회수됐다. 비단 일부 사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여전히 고등학교에서 피임 교육 한 번 하려면 담당 선생님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당장 지난주에 출강 갔던 학교에서도 콘돔 시연이 문제가 될 여지가 있다며 꺼려 하여 그 과정을 오직 말로 설명해야 했다. 막상 현장에서 만난 학생들은 왜 청소년에게 돌기형이나 초박형 콘돔을 팔지 않는지 물어보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성표현물(이른바 ‘야동’으로 이야기되는 음란물)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도 아니라서 당장 거의 대부분의 청소년이 VPN(IP우회 접속으로, 해외 성인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다) 사용법을 알고 ‘야동’을 놀이문화처럼 여기고 있으니 제대로 된 성적인 관계 맺음이 요원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섹스는 오르가슴을 위한 프로젝트 사업이 아니다 많은 성표현물에서 여성이 성관계를 맺는 주체가 아닌 오직 남성의 성욕을 위해 대상화되고 폭력적으로 다루어진다는 문제는 이미 다른 곳에서도 이야기되었다. 거기에 더해 성표현물로 배운 섹스의 또 한 가지 문제는 그것이 과정과 소통 없이 오르가슴만을 향한 급행열차처럼 그려진다는 데 있다.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관심 가지면서 의아했던 지점 중 하나는 많은 남성이 마치 섹스에 환장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어떤 섹스는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기혼 남성의 섹스가 그렇다. ‘의무방어전’,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라는 말은 인터넷 밈이 되었고 샤워하는 아내를 두려워하는 남성은 드라마, 영화에서 유머 코드로 흔히 쓰인다. 한창 섹스 노래를 부르던 이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비단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호르몬과 체력만의 문제는 아니다. 많은 남성이 섹스와 섹스 과정에서 소통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오직 ‘야동’에서만 접하다 보니 섹스가 오직 오르가슴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프로젝트처럼 여겨지게 되고 그 방법도 더 세고 빠르고 오래가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게 된다. 즉 섹스에서 마저도 일종의 결과지상주의(?)가 작용하여 도달해야 할 목표에 도달하지 않으면 실패하고 만다는 생각에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남성은 늘 섹스에 환장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사회에서 그에 부합하지 못하는 남성의 남성성은 쉽게 의심받으니 아예 섹스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허나 섹스는 오르가슴을 위한 프로젝트 사업이 아니고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은 더더욱 아니다. 만약 오르가슴이 섹스의 전부라면, 세고 빠르고 오래가는 게 최고의 남성성이라면, 그 어떤 남성도 싸구려 딜도에 비하지 못할 것이다.  섹스를 '잘'하고 싶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한 사람으로서 딜도와 경쟁하지 않고 나도 즐겁고 상대도 즐거운 섹스를 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 섹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나도 마땅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못 되고 모두에게 통용되는 명료한 답 따위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와 상대, 그리고 섹스를 둘러싼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소통하는 것이 정력에 좋다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만족감과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왜 섹스를 하는가? 단순히 성기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위해서라면 자위라는 가성비 좋은 활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섹스를 하는가? 평소 섹스의 만족도는 어떤가? 만약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불법 촬영에 대한 공포? 예상치 못한 임신에 대한 염려? 사회적 낙인이나 앞서 말한 남성성 증명에 대한 불안 때문은 아닌가? 섹스할 때 들이는 공과 시간 같은 기여도(?)는 어떠한가? 5:5로 공평하게 나눠 갖고 있는가? 기울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섹스의 시작과 끝은 무엇인가? 삽입 섹스만이 섹스의 전부인가? 등등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길고 밤은 짧다.  섹스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는 건, 이게 비단 음담패설이 아닌 관계에 대한,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페미니즘 운동에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로 우리 일상이 정치·사회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이야기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페미니스트로 이름을 남긴 나혜석은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은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유롭고 평등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라는 말로 우리의 사랑이 사회의 평등과 연관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남겼다. 그러니 이제 우리 차례다. 당신의 건강하고 즐거운 성생활을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의 평등하고 안전한 일상을 위해 부디 당신의 낮과 밤에 섹스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하기를 빈다.  [참고]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4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54t4BMn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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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의 연애, 남자로서의 연애
3화 <나로서의 연애, 남자로서의 연애> by 남함페 태환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첫 연애의 기억 첫 연애라 하면 누군가는 낭만과 추억을 떠올릴 거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의 나에게 첫 연애는 온갖 고통과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자기 각성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이번 글을 통해 과거의 연애를 돌아보고, 그때의 경험이 어떻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며, 남성성과 성평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는지 써보고자 한다.첫 연애 상대는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때의 내 기준으로 대단히 ‘개방적’인 여성이었으며, 학창 시절 동안 여성과의 대화를 몇 번 나눠본 적도 없는 나에게는 그 개방성이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데이트는 주로 그의 결정으로 만들어졌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무엇을 먹고 어떤 것을 함께 할지 등등.  거의 모든 데이트 비용은 그가 지불했다. 그가 나보다 더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보면 참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연애 아닌가 싶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 역시 그 안온함에 가랑비에 옷깃 젖듯 순응하고 있었다.그러나 시간이 점차 지나자, 그는 나에게 남성다운 모습을 요구했다. 내가 자신의 들쭉날쭉하는 감정을 전부 받아줄 만큼의 멋진 남자가 되어주길 바랬다. 멋진 남자를 넘어, 나는 1년 365일 섹스를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어떤 때는 애교를 부려 그의 사랑을 받아야 했고, 어떤 때는 아버지처럼 그를 한없이 보호해 주어야 했다. 그리고 침대에서는 미쳐 날뛰는 짐승이 되어야만 했다. 실제로 애인은 나에게 “너는 왜 나랑 섹스하고 싶어 하지 않아? 내가 매력적이지 않아?”라는 질문을 몇 번씩이나 건네곤 했다. 몇 개월간의 연애가 지속되면서 내 정신 건강은 바닥을 찍었다. 그리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즈음에 나의 첫 연애가 끝이 났다.  연애의 기대와 현실 끝이 난 연애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첫 연애를 하면서 내가 겪었던 불안감과 두려움을 고백해 보고자 한다. 돌이켜 보건데, 연애하는 내내, 발목을 옥죄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시원히 해소되지 않는 고민들이 있다.첫째, 헤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연애를 하면서 선을 넘는 상대방의 부탁과 강요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헤어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나를 힘들게 했지만 동시에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이 이 연애니까. 내가 조금만 참고 견디면 우리의 행복과 평화는 계속 이어지리라 착각하고는 했다. 그러나 모든 인간관계는 어느 한쪽의 희생과 노력으로만 지탱되지 않는다.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나를 깎아먹으며 바쳤던 희생이 결국엔 임계점을 넘어섰다.  나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헤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커질 때, 낭만 가득했던 연애를 내 손으로 끝냈다.둘째, 섹스를 못하는 남자가 되는 것. 아! 정말 잘하고 싶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섹스를 정말 잘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비록 1년 365일 섹스를 원할 수는 없더라도, 한번 할 때 만큼은 수개월을 굶주린 사자처럼 감춰뒀던 힘을 발산하고 싶었다. 침대 위에서 멋진 남자가 되어 애인을 만족시켜주어서, 낮져밤이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짓궂게도 나란 사람은 낮져밤져도 안 되는 그 이하였다. 피임을 위해 콘돔을 준비해온 나에게 당시 애인은 “그거 어디다 쓰려고?” 식의 장난 아닌 장난을 치곤 했다. 나는 이런 장난에 얼굴이 붉어졌을 뿐 아무런 농담도 맞받아치지 못했다. '오늘, 불 한번 활활 지펴보려고'였다면 어땠을까. 그런 말을 입에도 담지 못했던 당시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만 더 급해졌다. '보여줘야 하는데...', '만족시켜야 하는데...' 그래서 애인을 만족시키기 위한 온갖 방법을 시도했다. 심지어 욕과 비난이 섞인 외설적인 말을 섹스 도중에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섹스할 때 만족할 수 없었다. 계속 고민이었다. 왜 그럴까? 내 성기가 너무 작나? 전희가 충분하지 않았나? 삽입 자세가 잘못됐나? 혼자서만 끙끙 앓는 시간이 길어졌다.셋째, 리드하지 못하는 지질한 남자로 남는 것. 앞서 밝혔듯이, 첫 연애 상대는 정말 적극적이었다. 본인이 원하는 데이트를 결정해서 나에게 알려주었고 나는 거기에 잘 따르는 편이었다. 데이트 비용도 그가 냈었기에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는지의 결정권도 주로 그에게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위축됐다. 남자라면 결정도 시원시원하게 내리고, 데이트 코스도 짜서 먼저 제안하고, 밥 먹고 식당을 나서기 전에 자연스럽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카운터 직원에게 내밀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결정도, 제안도, 지불도 모두 여자인 애인이 하고 있지 않은가. 자존심이 상했다. 남자로서 구실 못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나 스스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어, 연애를 하면 할수록 내 자아는 점점 더 작아져만 갔다. '나'로서의 연애와 '남자'로서의 연애 각종 불안감과 두려움을 잔뜩 껴안은 채, 나의 첫 연애는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교 학과에서 하는 작은 책모임에서 페미니즘을 마주쳤다. 당시 책모임은 참여자들이 각자 읽고 싶은 책을 한 권씩 추천하고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학과 선후배들과 함께 하다보니 대부분 비슷한 주제의 책을 추천했는데, 어느 날 한 후배가 독특한 책을 추천했다. 그 책을 읽으며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과거 내 삶을 돌아보게 됐고, 자연스레 첫 연애가 떠올랐다. 첫 연애에서 가졌던 불안과 두려움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어졌고, 이후에 여러 책을 탐닉하고 사람들과 소통한 끝에 내가 갖고 있는 고민을 해석 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를 갖게 되었다.첫째, 헤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있다. 그러나 두려움에 가려져 있던 진짜 진실은 내가 평등한 관계를 맺어가는 한 명의 주체였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관계는 주체(Subject)와 주체의 만남이다. 특히 연애만큼 가깝고 내밀한 사이는 두 주체의 결합도가 여타 관계들보다 훨씬 높다. 따라서 조심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종속되기 쉽다.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 아닌, 주체와 객체(Object)의 만남.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당사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은밀히 진행된다. 나는 이 전환의 과정을 첫 연애에서부터 겪었다. 데이트 계획을 짜고 돈을 지불하는 애인은 여전히 주체로 남아 있었지만, 그것에 끌려가는 위치였던 나는 주체에서 객체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연애는 주체와 주체의 역동적인 만남이지 않은가. 나에게 쏟아져 밀려오는 애인의 욕구와 기대는 나의 동의 없이는 오롯이 그만의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나 자신을 객체로 인식하지 않고 주체로 인정했다면 분명히 상호만족하는 연애를 하지 않았을까. 헤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내일 무얼 하며 재밌게 놀까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았을까.연애할 때의 나 또한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진짜 ‘나’로서의 주체는 객체가 되어가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기 힘들었고, 그래서 버티고 버티다 한계를 넘었을 때 주체로서의 내가 연애의 끝을 선언했다.둘째, 섹스를 주제로 애인과 더 소통했어야 했다. 나는 섹스를 잘할 것을 논하기 전, 기본적으로 섹스 토크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성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하면 된다. 섹스를 원하는 것과, 너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사실 다르다고 말하면 된다. 이런 것도 섹스 토크이지 않던가? 그런데 나는 애인의 욕구와 적극성에 뒷걸음질쳤을 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했다간 내가 '남성'이기를 포기한 사람 처럼, 마치 풀이죽은 사람처럼 보여 애인이 실망하고 떠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섹스가 불만족스러울 때, 아주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대화를 나누면 된다. 많은 연애 또는 성 관련 전문가들은 성관계가 끝난 직후 이불 덮고 자지 말고, 애인과 함께 방금 한 섹스에 대해 평가해 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한다. 평가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별것 없다.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싫었는지 솔직히 말하면 된다.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더 좋겠고, 이런 건 피해달라고 당부하면 된다. 그 간단한 시간을 가지지 못해 나의 첫 연애는 지지부진했다. 나는 늘 혼자였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찾아보고, 혼자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애인도 혼자 남겨졌을 테다.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을 것이고, 그게 다시 연애의 만족감을 떨어뜨리는 계기가 됐다. 또 하나, 섹스와 관련된 소통뿐만 아니라 평상시 소통도 중요하다. 섹스는 연애가 선사하는 명장면 중 하나이지 않은가? 그러나 섹스는 연애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섹스하는 시간보다 밥 먹고, 데이트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훨씬 길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나머지의 긴 시간 동안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각자가 가진 생각을 서로 솔직하게 확인할 때, 관계의 안정과 발전이라는 선물이 주어진다.셋째,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남성성이 내 안에도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보고 자라온 모습들, 친구와 지인 등 주변 관계로부터 습득하는 경험들, 인터넷과 각종 매체들이 재현하는 남성성의 모습들까지. 연애와 남성성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래서 나 또한 첫 연애에서 그 동안 학습해온 남성성을 실천 또는 실험해 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배워온 세상과 전혀 다르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돈도 없고, 소심하고, 위축된 남성으로서의 나는 우리 사회 가부장제가 심어놓은 ‘정상 남성’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정상성’을 문제삼기는 커녕 끊임없이 이 기준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그로 인해 번번히 실패하고 마는, 마치 시시포스의 형벌을 받는 굴레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끝끝내 달성할 수 없는 정상 남성이 되기 위해 나답지 않은 행동들을 반복하고 내면화해야 하는 형벌. 그 끔찍한 형벌은 첫 애인도 아니고,첫 애인의 개방성과 적극성도 아니고, 우리 사회 여성들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나에게 내리고 있었다. 아직 남아있는 고민들 우리 모두는 다차원적 존재다. 그렇기에 성과 사랑, 일과 노동, 관계 등의 어떤 측면에서 분명히 부족한 면이 있을 수 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각종 갈등을 겪고 있으며, 아파하고 신음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노력하는 중이다. 이렇게 다차원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페미니즘을 실천한다고 해서 어찌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늘 부족하기에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 그 인간끼리 연애를 한다면 자연스레 갈등과 실망이 관계를 채울 것이다.그러나 페미니즘은 또한 말한다.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관계는 평등한 두 주체의 만남이 되어야 한다고. 더 나아가 관계와 관계의 연결인 사회와 문화 또한 평등해야 한다고. 그래서 힘의 논리가 아니라 돌봄과 존중이 우리 모두의 ‘인간관계론’이자 ‘사회계약론’이 되어야 한다고. ‘남자답지 못한’ 스스로를 괴롭혔던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도 유해한 남성성을 버리고 무해한 남성성을 찾아나가는 노력을 해야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한다.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남성들이여. 페미니스트의 연애도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진짜 ‘나’로서 편안하게 연애할 수 있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연애다. 그러니 함께 공부하고 함께 실천하자. 평등한 관계를 연습하며 페미니즘을 찾아나가는 삶은 절대 쉽지 않지만, 그 끝에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자기 자신이 있을 것이다. 캠페인즈팀 영상을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참고]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3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potbK87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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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론을 설거지하다
2화 <설거지론을 설거지하다> by 남함페 연웅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그는 모니터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다. 화면으로 보이는 한 커뮤니티 게시판, '퐁퐁남'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게시판에는 소위 '퐁퐁남'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두고 키득 거리며 조롱하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 이내 그가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렸을 때, 세상은 고요하고 그는 생각에 잠긴다. ‘가만, 이거 내 얘기인가?’ ‘설거지론’ 그리고 ‘퐁퐁남', 21년도를 기점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떠돌던 야담(野談)이다. 나는 오늘 이 야담의 실체를 드러내고, 키득거리는 농담 뒤에 암약한 여성 혐오와 폭력적인 대상화를 고발하려 한다.‘설거지론'의 세계관은 다음과 같다. 사회 초년생 시기, 소위 20대 때 ‘연애’ 한 번 못 하고 공부만 하던 ‘순수한' 남자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된다. 본인이 가진 ‘능력’을 동원해 한 여자와 결혼하게 되고,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 된다. 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여러 연애 경험을 가진 ‘순결’하지 않은 여자였고, 이제는 남자가 벌어오는 돈으로 ‘편하게' 지내게 된다. 남자는 여자가 주는 ‘용돈'만 받고 경제권을 잃은 채, 가사노동의 대표격인 ‘설거지’를 ‘퐁퐁'으로 ‘해줌'으로써, 간신히 성관계를 ‘허락' 받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어떤 때는 동반자 간의 성관계를 ‘의무방어전’이라 부르며 피하거나 억지로 임하기도 한다. 이 남자는 ‘좋은 직장'이라는 ‘능력'을 가진 억울한 ‘퐁퐁남'이고, 이에 비해 ‘좋은 직장'을 가지지 못 하고 연애 경험이 일천한 남자를 두고 ‘도태 한남'이라 한다. 그와 결혼한 여자가 20대 시절 만났던 잘생기고 연애 경험이 많은 남자는 ‘지뢰 설치반'이라 부른다. ‘퐁퐁남’ 야담은 그야말로 폭력의 마라탕이다. 유해한 남성성으로 팔팔 끓는 육수에 각종 여성 혐오와 폭력적인 대상화, 인간 경시의 문화가 가득 들어있다. 무한 경쟁의 능력주의, 이성애 중심주의, 남성 중심의 가부장 문화,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대상화, 여성을 트로피로 여기는 폭력적인 도구화, 가사노동에 대한 무시와 차별, 연애와 관계를 ‘성적 거래'로만 여기는 왜곡된 남성 섹슈얼리티와 외모지상주의까지. 마라탕으로 비유한 것이 마라탕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특이한 것은 여성에 대한 왜곡되고 폭력적인 시선으로 대놓고 일관하는 이 야담(의 발화자들)은 오히려 시대의 ‘희생양'인 것처럼 군다는 것이다. ‘옛날이랑 다르게 요즘 남성들이 얼마나 살기가 힘든데'라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나는 식당과 맥주집에서 테이블이 떠나가라 시끄럽게 떠들었던 아저씨들의 말을 분명히 기억한다. ‘에이~ 마누라한테 잡혀 살아~’라며 능글맞은 표정과 함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그 아저씨는 ‘잡혀 산다'는 말이 무색하게 가사노동을 여성 배우자에게 일임했던 가부장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퐁퐁남 야담’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 오히려 지긋지긋한 성차별의 동어 반복일 뿐임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설거지론'은 왜 계속 ‘소비'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설거지론’을 계속 소비하고 있는 이들의 사고나 정서가 ‘식민지 남성성’의 그것과 이어진다고 느꼈다. ‘식민지 남성성’이란 식민 지배로 인해 상처받은 남성성과 사회적 지위를 내부의 여성과 약자에게 ‘가부장적 권력’을 과시함으로써 회복하려는 고유의 남성성을 일컫는다. 설거지론을 소비하는 이들은 무엇에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는가? 소위 ‘연애 경험’과 ‘잘난 외모’, ‘사회적 성공’을 거둔 '더 나은' 남성들에게서다. 이 남성들을 상위 계층으로 상정한 뒤, 자신은 하위 계층에 속하는 남성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고 계속 갈급하게 자신을 채찍질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채찍질은 그 자신보다 '더 낮은' 계층에게도 향하는데, 그것이 바로 설거지론이 지목하는 '집에서 놀고 먹는다고 일컫는' 여성이다. 이 ‘식민지 남성성’에 빠진 남성들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상상 속 상위 계층과 비교하며 받은 억압을 주변의 여성에게 푼다. 지질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들은 ‘사회적 성공'을 꽤나 주관적으로 해석하면서, ‘나 정도면'을 시전하기도 한다. 스스로 상위 계층이 되지 못 한다고 상정해놓고, ‘나 정도 능력이면' 하위 계층은 아니라는 태도다. 자신보다 ‘사회적 성공’이 부족한 남성을 ‘하위 계층’으로 정하고 깔보기도 하고, 상위 계층이 되어봐야 결국 ‘퐁퐁남'이 될 뿐이라고 자위(自慰)하기도 한다. 본인은 ‘연애 경험'이 부족해도, ‘사회적 성공'을 가진 ‘순수한' 남성인데 “왜 본인을 만나주지 않느냐고” 여성들을 혐오하는 모습을 보면 머리가 띵하고 어지럽다. 동시에 정작 본인이 만나는 여성을 자신의 ‘능력을 보고 만난다’고 혐오하기도 하는 등 논리 내(內) 모순을 겪기도 한다. 이러한 혐오와 ‘구분 짓기'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식민지 남성성'이 ‘퐁퐁남'의 그림자 위로 보였다. ‘설거지론'의 가장 해로운 대목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대상화다. 설거지론을 제창하는 남성들이 가장 크게 놓치고 있는 부분은, 첫째, 본인들이 달성하고자 노력했던 ‘사회적 성공과 지위’를 획득한 후에도 여전히 관계를 능숙하게 맺지 못 한다는 것이다. ‘배경이 아닌 나를 사랑해주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사랑 이전에 사람과 제대로 관계 맺는 법을 배우는 게 먼저다. 사람 간의 관계가 어떻게 ‘사회적 성공과 지위’의 획득만으로 가능하겠는가. ‘좋은 관계’는 힘과 권력에 근거해 형성되는 게 절대 아니다. 즐겁고 안전한 관계 맺기, 평등한 관계 맺기가 무엇인지 고민하다 보면 답은 가까이에 있다. 외롭고 쓸쓸한 당신이 기대야 할 곳은 ‘설거지론’이 아니라 ‘성평등론’, 즉 ‘페미니즘’이다. ‘구분 짓기’가 아닌 ‘평등해지기’가 당신을 구원할 것이다.둘째, 여성을 주체이자 인격체, 사회의 동료로 보는 것이 아닌 ‘능력’과 ‘자본’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폭력적 시선이다. 당신에게 소위 ‘여사친’이나 친밀한 ‘여성 동료’가 없는 것은 그들이 나빠서도, 당신에게 ‘매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당신의 시선과 생각이 ‘폭력적’이라서 그렇다. 설거지론을 제창하며 여성을 대상화 하는 당신을 좋아할 사회적 동료는 없다. 누군갈 구분 짓거나 조롱하며 맺는 남성 연대만 곁에 남을텐데, 그들 중 일부는 분명 속죄하며 떠날테고, 쪼그라든 집단엔 돌봄은 부재하고 한탄만 남아, 커지는 고독은 영원한 미해결 과제로 남을 것이 선하다.셋째, 설거지론은 여성에게 성적 ‘순결성'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언제든 자신을 ‘배신’하고 잘생기고 돈 많은 남성에게 귀속될 수 있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 이는 여성을 트로피로 여기는 폭력적인 도구화로 이어지면서, 종국에는 연애와 관계를 ‘성적 거래'로만 생각하는 왜곡된 남성 섹슈얼리티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결국 그 여성과 함께 하는 건 본인이 아닌가. 본인은 그 사람을 '매력적'이라 생각했고, '선택'해서 만났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아까우니 이제 그만 떠나겠어”도 아니고, “내가 너보다 더 아까운데 그걸 몰라주고 이런 푸대접을 한다니”라니 이런 자기모순과 지질함의 근거는 무엇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지질함’이 아닐 수 없다.‘설거지론’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 어느 누구와도 친밀하고 진솔한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이 자명하다. 나아가 누군가와 연애를 하거나 제대로 관계를 맺는 게 불가능할 것은 더욱 분명하다. ‘식민지 남성성’으로 사람들을 알량한 기준의 저울 위에 올려두고 값을 매기고, 성급하게 일반화 하여 판단한 후, 시간을 쌓고 감정을 공유하는 게 아닌 ‘성적 거래’를 하고자 하는 이와 누가 친밀하게 지내고 싶겠는가. 아니, 지낼 수 있겠는가. 모든 관계가 서열을 다투는 처연한 계급 투쟁의 장이라니, 너무 끔찍한 인생이다. 이는 결국 ‘설거지론’을 소비하는 당신을 외롭게 하고 열등감 속에서 고통받게 할 것이다. ‘아침밥'은 받아야 하고, ‘브런치’는 허락할 수 없다는 그 남자. ‘설거지론’에는 ‘아침밥’과 ‘브런치'가 각각 대조되어 상징적으로 등장한다. 아침밥 차려주기, 넥타이 매주기, 배웅해주기 등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이 뒤섞여 있는 ‘자발적 봉사'를 바라는 남자는, 본인이 출근한 후 배우자가 본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카페에 가서 ‘브런치 먹으며 수다 떠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자신은 ‘쌔 빠지게 일’하는데, ‘농땡이’ 피우냐는 것이다.이 역시 앞서 살펴 본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대상화와 맥락이 같다. 본인과 결혼한 여성이 본인에게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당연히’ 제공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더 나아가 하나의 상품이자 서비스로 ‘아침밥’을 인지하는 것이다. 내가 받아 마땅한 상품과 서비스가 제때 제대로 제공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태도로 연애와 결혼, 관계를 ‘측정’하는데, 이때 배우자인 여성은 남성의 트로피로 전락해 대상화 된다. 여성 혐오이자 성차별인 것이다.장담컨대 세상 어떤 여성도 남성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브런치 먹으며 수다 떨기' 위해, ‘농땡이' 피우기 위해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다. 한국의 3040 여성 고용률은 OECD 하위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0대 여성 고용률이 OECD 평균을 웃도는 것을 고려할 때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는 심각하고, 결혼과 임신 그리고 육아를 선택한 여성은 경력보유 여성으로서 어떻게 본인의 커리어를 이어나갈지 고민한다. 가사노동은 기획부터 인력 배치, 실행과 평가까지 많은 업무 과정을 갖춘 고강도의 어려운 노동이다. ‘정돈된 상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시시포스의 바위 속으로 빠지게 되는 일이다. 동시에 이따금씩 내외부의 변화나 수요를 반영하여 루틴을 재정비하는 구조조정까지 동반되어야 한다. 규모는 작지만 하나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 일은 그럼에도 경력이 없고, 임금도 없고, 사회적인 관계도 없다. 가사노동을 전담해 본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세상과 현실을 전혀 담지 못 하는 ‘설거지론’이 진짜 론(論)일 수 없는 이유다.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빠진 내용이 있다. 도대체 아내와 그 동안 어떻게 소통해 왔던 것일까? 어느 날은 분노에 가득차 글을 쓸 수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속상하고 실망해서 이불을 뒤집어 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퐁퐁남’을 자처하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파트너와 진중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했다는 내용은 없다. 오로지 '안 봐도 비디오'라는 식의 지레짐작이나 한두 마디 정도의 관습적이고 단편적인 반응을 언급할 뿐이다. 명색이 함께 살기로 서약한 배우자일 텐데, 정작 자신의 배우자와는 제대로 소통하지도 않은 채 익명의 커뮤니티에 불만만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문제라고 느끼는 게 있다면 함께 고쳐나가면 되지 않을까? 대접 받는 데는 저돌적인 남성들이 문제 해결 앞에서는 회피적이다. 이 모순을 어찌하면 좋을까. ‘설거지론’을 심판대에 올려 고발한다. 그리고 부디 ‘허상의 공동체’를 깨고 진정으로 관계 맺길. 혐오와 조롱으로 손에 손을 잡은 인터넷 커뮤니티 속 연대는 허상에 불과하다. ‘설거지론’은 틀렸다. 아니, 그릇되었다. 폭력이다. ‘설거지론’이 세상인 것처럼, 현실인 양 살아간다면 허상 속에서 관계는 점차 메말라 갈 것이다. 그 곳에서 당신은 무한하게 평범한 악일 것이다.설거지론의 연대기가 처음 시작된 20대로 돌아가보자. 연애 대신 공부를 선택했던 '순수한' 당신의 젊은 시절 말이다. 이때 공부했다면 공부한 것이고, 연애했다면 연애한 것이다. 왜 공부를 선택한 당신의 20대가 마치 밑지는 장사였던 것처럼, 저당이라도 잡힌 것처럼 말하는가. 남성 섹슈얼리티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 '여자를 어떻게 잘 만날 수 있을지'를 넘어서, 여성과 연애를 어떻게 생각해왔는지를 말이다. 왜 연애를 마땅히 해야 했던 의무 또는 권리로 여겼는지, 그 시절 하지 못 했던 것에 미련을 가지며 '보상' 받으려고 애쓰는 것인지 말이다. 20대는 연애로 물들어야만 하는가? 행복한 결혼 생활은 아내의 헌신과 수용으로 완성되는가? 설거지론은 파트너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품질처럼 따지는 심각한 성차별인 동시에, 자신의 선택에도 열패감으로 가득한 가격표를 붙이도록 강요하는, 오로지 상처와 패자만 존재하는 세계관이나 다름없다.현실이 외롭고 고단하다면, 당신의 손에 든 ‘설거지론’을 버려라. 그리고 ‘성평등론’을 들고 펼쳐보자. 그렇게 펼쳐진 넓고 다채로운 세상에서 당신은 성별과 정체성으로 차별받지 않을 것이고, 성역할 고정관념에 의해 부당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며,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누구와 관계 맺고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의해 함부로 구분 짓거나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미끄러질 때 조롱 대신 위로가 함께 할 것이고,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함께 서로의 행복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허상의 공동체’를 깨고, ‘식민지 남성성’을 건너, 혐오와 조롱의 페이지를 뜯어내 버리는 일. 늦지 않았다. 들여다보던 모니터 화면이 어두워지며 컴퓨터 전원이 꺼지고 이내 고개를 돌렸을 때, 당신은 깨달을 것이다. 현실에선 웃을 수 없다는 것을.“고독하구만.” [참고]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2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6MtOOok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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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를 제물로 바친 남자들
1화 <섹슈얼리티를 제물로 바친 남자들> by 남함페 정민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글을 쓰겠노라 호언장담 해놓고 마감일까지 한참을 빈 화면인 채로 머리만 벅벅 긁었다. 모두 나의 부족한 식견과 필력 탓이지만, 변명거리가 있다. 남성인 내가 뭐라고 섹슈얼리티에 대해 알은 체를 늘어놓는단 말인가? 이미 온 세상이 남성 섹슈얼리티로 가득하지 않던가? 그런데 남성이 또 나서서 남성 섹슈얼리티를 말한다니? 게다가 나는 앞장서서 ‘올바른 섹슈얼리티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하며 깃발을 펄럭일 만큼 자랑스럽고 올곧은 인사도 아니다.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삶에 즐비해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건 내가 글을 완성하고 송고까지 마쳤다는 의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리한 걸까. 내가 백지의 공포를 이겨낸 데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고민은 앞선 글 "네? 남성 섹슈얼리티요? 지금? 여기서요?"에 잘 나타나있다. 본 글은 프롤로그의 바통을 이어받아, 어쩌다 남성의 섹슈얼리티가 ‘방법을 불문하고 섹스와 성욕으로 돌진’하는 일차원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동시에 고단하고 빈곤한 처지에 이르렀는지 조목조목 따져보려 한다. 나의 연애는 저지르고 보는 우당탕탕 행동주의였던 동시에 유치와 무지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요란한 베틀이었다. 편의점 야간 근무를 하던 나를 보고 애인은 ‘무서워서 어떻게 이 시간에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헛웃음을 쳤고, ‘생각보다 한가롭고 재밌으니 너도 나중에 해보라’며 애인을 귀여워했다. 그와 헤어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당시의 내가 가진 순진무구한 폭력성을 깨달았다. 그는 밤길이 겁이 나 그토록 좋아하는 운동도 낮에만 하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밤은 한가로이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은 기억에는 월경에 대한 무지도 있다. 부끄럽게도 나는 오랫동안 월경이 한 달에 딱 한 번 찰나에 이뤄지는 것으로 알았다. PMS(월경전증후군)도 애인을 통해 알게 됐다. 애인이 PMS로 앓아 눕고 나서야 말이다. 그 전까지 월경은 내게 마법의 날 또는 여자에게 마카롱을 사줘야 하는 시기로 통했다. 어쩌면 내 문제로 생각해본 적 없는 어떤 죽은 사실에 불과했다. 그토록 수다스럽던 내가 월경과 PMS 앞에서 침묵을 지킴으로써 ‘나는 월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시민이에요’를 자수하고 있던 그때, 애인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는 잠시 허공에 머물다 다른 이슈로 옮겨갔다. 그 날 일은 이게 전부이지만, 회상할수록 참 서글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애인의 침묵은 남성 섹슈얼리티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월경을 몰라도 되는 지식으로 여기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를 갖추며, 침묵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의사소통 기술까지 겸비한 나는, 몰라도 사는 데 문제가 없는 남성이었을 뿐이다. 나의 무지는 편의점 야간 근무에 이어 이렇게 또 한 번 증명되었다.이 두 사건은 단순한 ‘연애 썰’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첫째는 내가 거칠게 말해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삶과 현실에 까막눈이었으며, 둘째는 성을 주제로 한 의사소통에도 미숙했다는 것이다. 이는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의 완전한 부재를 뜻한다. 오래도록 이어진 차별적인 성문화를 그대로 답습하였고, 여기에는 의심 한 점이 없었다. 애인과 연애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막상 애인이 어떤 삶 속에서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애인에게 성적 매력을 느꼈음에도 애인의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무관심했다. 내가 성적 존재로서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척척 키워가고 있었을 때, 상대도 나처럼 한 성적 존재로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나는 이때를 떠올리면 아득하기만 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나는 나의 성장과정을 반추하며 한 가지 단서를 포착할 수 있었다. 바로 남성연대다. 돌이켜 보면 학창시절은 하나의 생존게임을 방불케 했다. 남학생으로 구성된 무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갖은 수를 짜내야 했던, 무리 내 소속감이 목숨처럼 중요했던 시기였다. 이때 무리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건 성적 발화였다. 야한 농담으로 똘똘 뭉친 무리는 연신 키득거리며 온갖 날 것의 표현을 주고 받았고, 그 와중에 여학생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갑작스레 모두 입을 다무는 방식으로 여성을 타자로 만들며 모종의 펜스를 형성했다. 사춘기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으로 치부하기에는 위계를 상당히 계산적으로 작동시켰고, 여성을 대상화하고 성을 재미와 놀림거리로 삼는 폭력적인 남성문화를 형성했다.이러한 남성연대는 대학 생활과 군 생활을 거쳐 더욱 공고해졌다. 해봤는지, 안 해봤는지, 해봤다면 어디까지 해봤는지가 그토록 중요했다. 애인이 있는 남성은 묘하게 무리에서 승리자의 위치를 점유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애인이 없는 남성은 ‘모쏠’, ‘아다’라는 수식어를 짐짓 스스로에게 부여하며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음을 시인하고 조언에 귀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여학우를 성적으로 안주 삼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훈련소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문화가 펼쳐졌다. 성관계 경험을 훈장처럼 떠벌리고, 애인과의 사적 관계를 발설하거나,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어떻게 해보겠다며 속내를 분출하는 발언까지 있었다. 그러나 특정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남성연대 자체가 너무나 공고했고, 여기에 동조하지 않는 자를 찾기 어려웠으며, 그런 자가 있다면 응징 또는 시비의 대상이 되거나 ‘게이’, ‘찐따’로 불리며 무리에서 배척되기 십상이었다. 청소년기-청년기-군대로 이어지는 남성연대의 생애주기 속에서 나는 때로 공모하고 때로 구분되려 발버둥쳤다. 어느 날은 적어도 같이 웃지는 않았으니 괜찮다고 합리화했고, 또 어느 날은 읽을 책이 있다며 혼자 있을 공간을 어떻게든 찾아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내가 누군가를 대상화하는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교묘한 우월감과 검은 우산 속에 있는 듯한 안정감을 내면화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한 성별 권력이었다. 내가 여성이 밤길을 편히 다닐 수 없음에 무지하고, 월경과 PMS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했던 것은 이 사회에서 남성으로서 특권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며, 섹슈얼리티에 아는 바 없이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배경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위치성의 토대를 공고하게 만든 것이 성장과정 속 연속적인 남성연대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 남성연대는 문자 그대로 연대감을 형성하며 하나의 단단한 집합체로 존속할까? 그렇지 않다. 연대감은 집단 안의 평등한 공통성을 근거로 형성된다. 그러나 남성연대는 어떤 대상을 놀림거리로 삼고 배척함으로써 맺어진, 일시적 공모의 형태에 가깝다는 점에서 연대라고 할 수도 없다. 뚜렷한 공동의 달성 목표가 있고 그것이 획득되면 해산하는 이익집단과도 다르다. 공동체라는 언어도 맞지 않다.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써 소속감이 강화되는 공동체는, 실상 차이의 이해와 다양성 존중이라는 공동체가 갖는 본연의 속성과 맞지 않다. 다시 말해 중심과 주변, 나와 타자를 구분지어 탄생한 집단은 그 안에서도 계속해서 차이의 경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연대 또는 공동체의 속성을 가질 수 없다. 그 당시에는 안정감과 소속감의 획득을 위해 효과적이었을 수 있으나, 허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 빈곤한 관계일 뿐이다. 남성은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섹슈얼리티를 다뤄본 경험이 거의 없다.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돌보는 대신 타인을 욕망하는 법부터 배우고, 그 욕망의 강도와 실천 여부를 과시하고 힘겨루기 했기 때문이다. 성을 재미로 소비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진지한 탐구의 대상으로 여겨본 적이 없다. 모두 한 번쯤은 웃어넘길 수 없던 성적 고충과 두려움이 있었을 텐데, 이를 진중하게 토로하거나 위로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한 염려를 드러내는 순간부터  남성문화 속에서 약자임을 발표하는 꼴이 되므로, 공감적 지지와 조력의 언어 대신 은근한 무시와 정상 기준의 압박을 강화했을 것이다. 이렇게 채우지 못한 섹슈얼리티의 영역은 연애 빈도, 성관계 횟수, 시간, 성기의 크기와 길이 따위의 정량화된 수치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숫자로 구성된 수치로서의 섹슈얼리티는 더 길게, 더 크게, 더 오래! 만을 강조하며 상대와의 진솔한 소통에는 무관심 하게 만들고, 스스로 타인과 비교하며 영원한 불만족에 빠지게 할 뿐만 아니라, 그저 "좋았어? 얼마나 좋았어?"라는 말로 짜게 식게 만드는 미숙함으로 이어진다. 자신에 대한 이해를 키우지 못한 만큼, 타인에 대한 몰이해는 커진다. 남성이 섹슈얼리티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잃은 것은, 관계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과 질적 성장이다.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하는 자는 사기꾼이다.그러나 절망을 설교하는 자는 개자식이다._볼프 비어만  지금의 남성 섹슈얼리티는 해롭다. 완전히 폭주하거나 작동을 멈춰버리는 방법 외에 스위치가 없는 열차와 같다. 희망을 가벼이 발음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나 그리고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은 남성을 변화 불가능한 상수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려 한다. 열차가 탈선하거나 시동이 꺼지기를 바라지 않으며, 남성이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쉬이 절망을 논하지 않겠다. 그럼 희망도, 절망도 논하기 어려운 이 간극 속에서 무엇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는 미명하에 내달리는 대신, 정지하는 한이 있더라도, 왔던 길을 거슬러 한참을 뒷걸음질 치더라도, 다음의 질문을 반드시 길 위에 떨어뜨려 두기를 소망한다.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남성 섹슈얼리티 새로 쓰기’는 이러한 희망과 절망 사이, 간극의 비탈길에서 출발한다. 이 간극의 비탈길에 버티어 서서, 한 발자국의 변화라도 만들어내고자 한다. 열차가 지나온 과오를 씻을 수는 없더라도, 다시 방향을 잡은 열차가 새로운 풍경을 선물할 수 있도록, 종국에는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1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yEtZVz7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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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성 섹슈얼리티요? 지금? 여기서요?
0화 <네? 남성 섹슈얼리티요? 지금? 여기서요?> by 남함페 이한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과 남성성을 주요 의제로 활동하는 페미니즘 단체다. 남성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 실천한다는 목표로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2017년 독서모임으로 시작하여 불법촬영 시청가해 규탄 캠페인과 성차별·성폭력 반대 집회, 페미니즘 인식 개선 교육, 남성성 연구, 서로 돌봄을 위한 네트워크 등 성평등을 실천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2022년, 남함페는 서울시 청년허브의 지원을 받아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탐구하기 위해 8명을 인터뷰 하고 자료집 남성 섹슈얼리티 현실 말하기: 지배적 남성성과 불화하는 개인의 경험을 중심으로 를 집필했다. 그 과정에서 가부장제하에 왜곡된 지배적 남성성과 성역할 고정관념이 만들어내는 현실과 불화하는 개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2023년, 작년의 연구 경험을 토대로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풀어내보고자 한다. 남함페 활동가 4인(이한, 정민, 연웅, 태환)으로 구성된 필진은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서로 대담을 진행한 후, 그 내용을 각자의 방식으로 정리하여 돌아가며 발신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기획된 남성 섹슈얼리티 탐구 주제를 살짝 소개하면 이런 내용들이다. 남성들이 말하는 ‘잘’하는 섹스는 무엇일까? 기나긴 시간? 엄청난 힘과 크기? 상대를 오르가즘에 이르게 하는 것? ‘정력’이라는 말로 많은 이야기들이 떠다니지만, 막상 그것이 정말 즐거운 섹스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나? 그렇게 치면, 사실상 그 어떤 남성도 싸구려 딜도보다 오래가지 않고 어떤 여성용 자위기구는 3분 안에 오르가즘에 이르게 한다는데 과연 그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남성이 있을까? 스포일러가 될 지 모르니 소개는 여기까지 하고 본격적인 연재에 앞서, 대체 왜 지금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이야기하는지, 지난 연구보고서에 담은 글을 프롤로그로 준비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애정 어린 비판을 바라며, 대망의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연재를 시작해보려 한다. <네? 남성 섹슈얼리티요? 지금? 여기서요?>_이한(남함페, 성평등 교육 활동가)    남함페 활동은 느리고 미약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남성연대에 균열을 만들어내고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고 믿는다. 지금도 그 믿음에 변함은 없지만 우리의 활동에 비해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는 거대해져만 가는 듯 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뉴스는 마치 이 폭력과 차별의 굴레가 끝이 없을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 와중에도 동시대 페미니스트를 가장 경악하게 했던 일은 이른바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일 것이다. 가해자는 각종 방법으로 여성을 협박하고 속여 그들의 성을 착취하는 등 각종 폭력을 일삼았다. 유례 없이 많은 남성들이 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었다. 연령과 직업, 지역 불문 수만 명에 달하는 남성들이 모니터 뒤, 익명에 숨어 성착취, 성폭력에 가담했다. 이제 더 이상 ‘일부’라 선 긋고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남성들은 조심스레 혀를 차며, 저것은 ‘너무’ 심했다고 말했으나, 그것은 뒤늦은 변명이고 반성 없는 회피였다. 가해자를 악마화 하는 것, 그것은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를 일부의 일탈로 축소하고 자신의 안온한 세상에 변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일 뿐이다. 이 ‘너무 심한’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진공 속에서 발생한 유별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여성을 향한 멸시, 혐오, 폭력을 놀이처럼 치부하고 피해자를 탓해 온 역사가 만들어 낸 비극이다. 해당 사건 이전에도 우리 사회는 여성 연예인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의 불법 촬영물을 이른바 ‘국산 야동’이라 부르며 죄책감 없이 시청하고 공유하는 일이 만연했다. ‘웹하드 카르텔’이라는 말이 사용 될 정도로 수많은 업체가 불법으로 촬영, 유포 된 여성의 몸으로 부를 쌓았으며 수많은 보편의 남성들은 이를 통해 우정을 다지고 남성연대를 공고히 했다. 혹여나 이에 문제를 제기해도, 가해자에게는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면죄부를, 피해자에게는 ‘그러게 왜 그런 영상을 찍었냐’며 책임을 전가 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왜곡되고 뒤틀린 욕망은 기어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가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제대로 질문하고 탐구해야 한다. 처벌 강화와 함께 이러한 문제가 반복되어 온 남성연대와 그 문화 전반에 대한 성찰과 개선을 위한 목소리, 행동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남함페는 가장 먼저, 남성들의 섹슈얼리티에 질문을 던졌다. ‘남성들의 성욕은 컨트롤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위태롭기에 여성들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던 시선이다. 하지만 수많은 페미니스트가 성폭력 처벌법 개정 운동을 비롯한 활동으로 성폭력이 비단 성적인 욕구의 문제가 아닌, 젠더 권력에 기반한 폭력임을 이야기해 왔다. 이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가해자들은 사람과 또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한 폭력을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허나 그 안에 ‘성적 욕구’는 보이지 않고 그저 폭력과 지배욕, 여성을 향한 멸시와 혐오만 가득할 뿐이었다.    이들은 왜 폭력과 지배, 억압을 자신의 성적 욕구로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 왜곡된 성적 욕구, 남성성에 대한 갈망은 어디서 기인했는가? 남성들의 섹슈얼리티는 이미 흔하게 이야기되는 듯 하다. 어디에서나 음담패설하는 남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게임과 영화, 만화 등 수많은 미디어에서 남성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있다. 허나 이것이 정말 남성들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인가? 남성은 항상 섹스와 성욕에 환장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실로 남자 학교에 강의를 하러 갈 때면, 복도에서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섹스”를 외치는 남자 청소년을 수두룩하게 만날 수 있다. 허나 동시에 이상하게도 기혼 남성의 섹스는 ‘의무방어전’으로 이야기 되고 샤워를 하는 아내와 두려움에 떠는 남편은 흔한 유머 코드로 쓰인다. 일상에서 발기부전이나 조루 등 섹슈얼리티에 고민이 있어도 이를 토로하는 남성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6.9’라는 한국남성의 성기 길이를 조롱하는 미러링 언어에는 누구보다도 발끈하며, ‘정력’과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다고 하면 장어부터 복분자, 각종 이름 모를 곤충과 식물까지 씨가 마를 정도로 먹어 치운다.    남성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말들은 실체 없이 떠돌고, 그 안에 남성들의 실제 고민과 경험, 즐거움에 대한 탐구보다는 능력주의와 자격지심,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다. 이 남성들의 취약한 섹슈얼리티는 쉽게 왜곡되어 폭력과 결부된다. 허나 우리는 남성이 결코 동일한 집단이 아니며, 변화 불가능한 상수가 아닌, 시대의 변화에 공명하고 함께 운동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남함페는 이들과 함께 고민하고 더 나은 질문을 제시하며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것이 견고한 남성연대에 발생하고 있는 균열을 더 크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미흡하게나마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탐구하고자 했다. 많이 부족하지만 이 활동을 기록하는 게 변화를 만드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본격적인 남성 섹슈얼리티 탐구 활동의 문을 연다. [참고]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0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70tmk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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