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연애의 장막을 걷어, 그 너머로

20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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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남성성' 의제로 활동하는 페미니즘 단체입니다.

<연애의 장막을 걷어, 그 너머로> by 남함페 연웅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unsplash


“우리,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어느 날, 어떤 연애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저무는 연애 앞에서 무엇도 하지 못한 채 가장 초라하고 몹쓸 사람이 돼 있을 뿐이었다. 연애가 내게 남긴 감상은 늘 ‘너무 어렵다'는 것에서 시작했다. 연애란, 정답지는 당연히 없을 뿐더러, 한 사람의 성숙이 그 관계의 성숙을 보장하지 않는 극한의 팀플이었다. 성숙한 한 사람이 나였을 때도 상대방이었을 때도 혹은 둘 다라고 믿었을 때도, 팀플의 난이도는 낮아지지 않았다. 연애의 끝에선 늘 실패만 돋보일 뿐이었다.

연애는 늘 맑은 거울처럼 나를 비췄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뾰루지와 생채기가 왜 이렇게 눈에 띄는 걸까. 거울 앞에선 자꾸 지난 상처에 손이 가곤 한다. 만지다 덧날 걸 알면서도 그런다. 상처 위에 뽀로로밴드를 붙여도 상처는 티가 나기 마련이다.

때로 연애는 내가 알고 싶지 않던, 보고 싶지 않던 내 모습들을 자꾸 무대 위에 올려 놓는다. 무대가 익숙한 사람도 아닌데, 기획부터 연출에 연기까지 꼼꼼히 재고 있다. 어떤 대사는 날 간지럽게 하고, 어떤 배역은 내 깊숙한 심연을 자꾸 건드린다. 시나리오는 내 몫이 아니라 손 댈 수도 없다.

괜찮다. 어쨌든 무대만 잘 만들면 된다. 하지만 자만은 가끔 실망스런 결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생각보다 적은 박수나 예상치 못한 비평에 난 하염없이 무너진다. 자존심은 비틀거리고 서운함이라는 불청객은 어느새 안방까지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겨우 무대를 내려오며 할 말을 참는 날이 하나 둘 늘다 보면 어느새 지쳐 그만 둘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애정은 망한 극장처럼 알게 모르게 자리를 뜨고, 금새 이별이다. 다시 한 번 무대에 장막이 드리운다.

밀린 숙제처럼 지난 연애의 장면 장면을 곱씹다 보면, 자주 ‘사람’과 ‘관계’를 외면하고 ‘연애’ 그 자체에 집중하고 몰입하던 내가 보인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연애는 그 시작부터 엔딩까지 특별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이어지다 연인이 되는 과정 중 아련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연애만 왜 특별한가. 다른 관계들에 비해 ‘특별 대우' 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연애는 ‘특별해야만 한다'는 그 생각이 우리가 이걸 늘 망치는 근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사람을 놓칠 수 없어"
“이번이 아니면, 다신 없을 것 같아"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
“절대 헤어질 수 없어”
“우린 특별하니까"


나도 그랬다. 언제나 사랑은 새로 발견한 불 같았다.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어느 날 가랑비에 젖어 식을 수도 있다는 생각, 날 다치고 아프게 할 거라는 생각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이전에도 데였으면서 이번엔 오래 따뜻하기만 할 거라고, 내가 그렇게 되게끔 만들 거라고 쉽게 자만했다. 단순히 근거 없는 자만은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 헌신하고, 사소한 것까지 잘 돌보고, 근사한 데이트를 기획하는 일을 ‘잘 해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 반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한 명의 헌신은 다른 이의 부담이 되었고, 돌봄은 늘 상황 의존적이었다. 성실한 데이트 기획은 부담에 부담을 덧대는 꼴이 될 뿐이었다. 어느새 소원해진 관계를 돌아보며, 뭔가 바꿔보려고 할 때는 이미 역부족이거나 역효과라는 걸 깨닫게 된 후였다.

우린 보통 친구 관계를 비롯한 인간 관계의 친밀함을 측정할 때 ‘편하다'는 감각을 그 지표로 많이 애용한다. 편하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가 쌓였다는 방증이고, 그 관계가 부담스럽거나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관계가 ‘연애’로 가게 되면, ‘편하다'는 감각은 오히려 ‘이별'의 징후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 관계가 편해졌다는 것이 곧 그 사람에게 질린다거나 지루해졌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다. 왜 우리는 같은 ‘편함’의 감각을 연애에만 다른 잣대를 두고 보는 걸까. 계속 팽팽하기만 한 고무줄은 끊어지기 마련인데, 왜 유독 연애만 끊어질 것을 어떤 관계보다 두려워 하면서 끊어질 때까지 몰아 붙이는 걸까.


@Pixabay


나도 여기에서 함정에 빠졌다. 나도 ‘연애'를 ‘일상적 관계'로 보지 않았던 게 아닐까. 고독과 고통으로 점철된 생으로부터 나를 구해 줄 ‘백마 탄 구원자' 정도로 ‘연애'를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러면서 그 특별함과 소중함에 잔뜩 취해 ‘연애’가 늘 ‘연애’답길 바란 게 아닐까. ‘연애 다운 연애’가 수많은 ‘연애’를 망친다.

연인과 친구가 무엇이 다를까. ‘섹스'를 한다는 것? 그건 개인 간에 취사 선택할 영역이다. ‘섹스 없는 연애'도 분명 있을 수 있다. 아니 있어 마땅하다. ‘이별’이 존재한다는 것? 친구 사이에도 이별이 없지 않다. 때론 연인 사이보다 드라마틱한 이별의 순간이 친구 사이에도 있질 않나. 누군가와 친해지지 않고 연인이 되려는 것, 가능하지 않거나 폭력적인 일이다. 연애는 일상이고 관계다. 관계는 그들만의 스펙트럼과도 같아서, 당사자들이 쌓아 온 시간과 애정의 역사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고백 같은 선언이나 일방적인 발버둥으로 연애를 얻으려 한다면, 필시 외롭고 쓸쓸하게 남을 것이다.

결국, ‘구분 짓기'가 만들어 낸 촌극이다. ‘친구'와 ‘연인'을 억지로 구분하려 하니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남녀 사이엔 친구가 없다는 말'로 ‘이성 간 친구'라는 관계를 세상에서 지우고, 동성애 차별로 ‘동성 간 연인’을 삭제하는 것도 ‘구분 짓기'가 만들어 낸 비극이다. 심지어 굳이 ‘연애’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솔로'라는 이름을 붙여 조롱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연애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두지 않고, 연애하고 싶은 사람이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드는 것. 즉, 구분 짓고 이름 붙이는 것에 급급한 사회가 각종 차별과 배제를 만들어 내고, 우리 관계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우리 관계가 더 편해지고 좋아지는 데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갑자기 웬 정치냐고? 이는 결국 ‘정치'의 문제다. ‘관계'의 문제보다 우리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 또 있을까. 우리의 행복한 ‘관계 맺기’를 ‘구분 짓기'로 방해하는 사회에 제발 그만하라고 외치는 것이 넓은 의미의 정치가 아니고 대체 무엇이겠는가. 모두가 편하게 연애 하거나, 편하게 연애 안 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 나는 이것도 ‘페미니즘'이라 부르고 싶다.

여기 A가 있다. 그는 평범함을 미덕으로 여기며 한국 사회가 가리키는 표지판을 따라 성실하게 달려온 학생이다.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들은 ‘대학 가면 연애한다’고 말씀하셨다. 연애를 하고 있든 한 적 없든 모두 캠퍼스를 거니는 커플의 모습을 상상하며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A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선생님의 말대로 지금은 연애하거나 놀기보다도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 생각했다. 대학을 간 다음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이었다.


“대학만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연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 경험의 유예를 권장할 뿐이었다. 모두가 대학에 갈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게 된 A는 그간 인질로 잡혀 있던 연애가 풀려나 자신에게 반갑게 올 줄 믿었다. 근데 웬 걸? 대학은 고등학교보다 더 했다. 그야말로 자유경쟁시장이었다. ‘누가 더 많이 실수하나’의 각축장을 방불케 했다. 대학을 간다고 연애를 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로 밝혀졌다.

A는 억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등학생 때 연애할 걸. 억울한 마음을 풀고자 하는 의미였을까. 단순히 연애가 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A는 적극적으로 미팅과 소개팅에 나가고, 주변에 조언을 구하며 연애에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A의 일방적인 고백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고, 동기들은 공지해 줄 과대표를 잃었다. A는 군대 갈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년, 군대를 다녀 온 A는 이번엔 ‘복학생’ 신분으로 ‘연애’에 ‘재도전’하기로 했다. 그간 인터넷 커뮤니티를 드나들며 배운 토막 연애 상식들로 단련된 A는 각종 동아리와 학회에 출석 도장을 찍으며 열심히 ‘노력’했다. 심지어 관에서 하는 ‘솔로대첩’과 같은 행사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

하지만 결과는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고립되고 배제될 뿐이었다. 그는 억울했다. 화가 나기도 했다. 자신의 노력이 보상받지 못하고 자신이 사회로부터 차별받는다고 느꼈다.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한국갤럽리포트(편집: 남함페 활동가 가현)


뭐가 문제였을까. 그는 한 번도 연애를 관계로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연애는 성취, 목표, 도전과 같은 것이었을 테다. 매력적인 여성을 ‘여자친구’로 만드는 일을 ‘성공'하기 위해 최대한 열심히 ‘노력’하고 ‘도전’하였으나 처참히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자신을 성취의 ‘대상’으로 보고, 물건마냥 얻고자 ‘노력’하는 그와 같이 있고 싶은 여성은 단언컨대 없다. 물론 A는 억울할 수 있다. 청소년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억압이 큰 영향을 미쳤을 거고, 연애를 성취로 취급한 주변 어른들의 영향도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성과 ‘동료 되기’보다 ‘공격 하기’를 선택한다면 난 기꺼이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를 위해서라도.

나도 대한민국의 수많은 A였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처참히 반성하고 조금이라도 나아갔다. 어느 시절 나의 ‘고백’은 ‘폭력’이었을지도 모르고, 어느 시절 나의 ‘연애’는 애인에게 ‘감당’해야 할 짐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페미니즘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페미니즘 활동을 공개적으로 하기 시작하고, 성평등을 지향한다는 것을 주변에 공유하기 시작했을 때, 친구나 지인 혹은 모르는 사람(주로 인터넷 악플)에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라 쓰고 공격이라 읽는 것)이 하나 있다.


“너, 여자 만나려고 하는 거지?”

이 질문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어딜 가나 쫓아다니며 날 괴롭혔다. 이 질문이 악질인 것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과 소수자가 받는 성차별에 대해 저항하며 시작한 나의 페미니즘 활동을 폄하할 뿐 아니라, 나의 소중한 ‘동료’들을 납작한 질문 속에 가두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면, 오히려 ‘맞다’고 대답해주고 싶다.

맞다. 난 페미니즘 활동을 하며 정말 다양한 여성을 많이 만난다. 그들은 내 가족, 애인, 친구, 동료, 상사이며 함께 공동체를 구성해 살아가는 동지다. 나는 이들을 만난다. 나는 이들과 대화한다. 나는 이들과 공감하며 소통한다. 나는 이들과 함께 자주 웃고, 때로는 울고, 어느 날은 아파한다. 내 곁의 여성 동료는 내가 주눅 들지 않고 계속 페미니즘을 외쳐야 할 더 진한 이유가 되어, 날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게 만든다. 이들이 있어 나는 치열하게 살아가며, 또 행복하게 죽어간다.


“페미니즘에 분명 답이 있다.”

나는 A를 사석에서 만나게 된다면, 꼭 이 얘길 해주고 싶다. 뭔가 생각했던대로 풀리지 않아서,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연애와 관계의 첫 발을 떼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 이젠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할 그에게 ‘이 길'을 알려주고 싶다. 부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익명의 안티-페미니스트에게 같잖은 위안을 받으며 여성과 소수자를 조롱하는 길로 빠지지 않길 정말 절실하게 기도한다. 그 길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방향이다. 나는 당신이 다시 우리의 공동체로 돌아오길 희망한다. 그가 생을 살아오며 만든 ‘업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손과 함께 페미니즘을 건네겠다.


@온라인 커뮤니티 '뽐뿌'


여성과 관계 맺기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연애를 할 수 있겠나. 여성과 연애를 하고 싶다면, 먼저 여성과 동료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여성과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곱셈도 못하면서 미적분 한다고 나서는 사람에게 코웃음 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여성의 현실을 알고, 여성의 아픔에 공감하고, 여성의 문제에 함께 나서는 것이 여성과 동료가 되는 일의 충분히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페미니즘에 분명 답이 있다는 것이다.


@YOUTUBE 채널 '차린건쥐뿔도없지만'
”좋고 나쁜 그런 걸 떠나 그냥 나 자신일 수 있어야 해요.”
“그러니 결국 내가 나 자신일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거예요.”
“오직 나약한 남자들만이 강한 여자를 못 견디죠.”
“강한 여자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강한 남자예요.”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10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q1tlaw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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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정도 당사자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3자의 태도로 공감하는 것은 언젠가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요. 여성 대상 차별에 "당신의 아내/어머니/여동생/딸이라고 생각해보세요"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는데요, 발견할 때마다 꼭 누군가와의 관계로만 차별을 감각하는 것으로 보여 안타깝기도 합니다. '내가 이 일을 당한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에서 다름을 느끼기도 하고요. 

누군가의 '동료'로서 함께 하는 마음이, 다른 섹스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는 것, 나 또한 가부장제의 피해자임을 감각하고 사회변화를 꿈꾸는 움직임으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머리로 생각으로 글로 고민할 시간에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그 속에서 인연은 찾아옵니다. 행동하셔요~

실제 주위에서 한번쯤은 들었을법한 이야기로 읽기 쉽게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여성과 관계 맺기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연애를 할 수 있겠나. 여성과 연애를 하고 싶다면, 먼저 여성과 동료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여성과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곱셈도 못하면서 미적분 한다고 나서는 사람에게 코웃음 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에 공감합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설정이 먼저이지, 그걸 뛰어넘어 성취로만 가려고 하면 탈이 나지 않을 일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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