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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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당신에게 세월호란
당신에게 세월호란? -현(hyun) 질문자 : 현 장소: 니트생활자 사무실 *인터뷰이: S, H(닉네임으로 작성했습니다)  *인터뷰이는 니트컴퍼니 모임 닛커넥트 에서 만난 멤버들로, 2시간 가량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니트컴퍼니 : 무업 청년들이 모인 가상회사로, 해마다 상/하반기 기수를 모집하고 있으며 온라인/오프라인에서 업무 인증과 주간 회의, 전시 등의 활동을 합니다. Q1. 10년 전 4월 16일, 그 날 여러분은 어떤걸 하고 있었나요? S: 미국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주변 지인들로부터 세월호 참사에 관한 연락을 받았고, 도서관에서 내내 기사에 대해 찾아봤다. 토론 시간마다 세월호가 소환됐다. 언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분노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외국인들 앞에서 나는 한국인으로서,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H: 그 날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첫 날이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퇴근 길에 참사 소식을 듣게 되었고, 한 주가 우울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참사를 목도할 수 밖에 없어서 충격이 컸다. Q2. 어떤 것을 기억해왔나요? 어떤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S: 유학 시절 기숙사 화재경보기 알람이 울렸을 때, 모두 1층으로 내려가는데 나는 안전불감증이라 알람이 꺼질 때까지 귀를 막고 잠을 잤다. 그 정도로 안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호를 겪고 나서 내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요즘은 건널목에서도 멀리 떨어져서 기다릴 만큼 다가오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걱정한다.  H: 말도 안 되는 참사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는 참사 원인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여러 참사를 지나며 생겨난 리본을 4개나 봤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리본을 달게 될지 무섭다. S: 이태원 참사 때 주변에 있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참사 소식을 접했다. 그날, 밤새도록 SNS에서 여과 없이 노출된 참사 현장을 봤다. 근처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살아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Q3. 세월호 참사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H: 국민을 지켜야 할 국가가 없구나, 각자도생 사회구나,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구나, 어른들의 탐욕으로 아이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참사로구나. 수장이라는 표현이 세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이 단어만큼 세월호를 잘 표현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416재단에서 만든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가 문을 열어 개소 강좌를 듣고 왔다. 김일란 영상감독, 홍은전 기록활동가, 그리고 김승섭 교수님이 와서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올해가 세월호 10주기라 책도 많이 나오고 영화도 많이 나올 테니 관심을 갖고 함께 해달라고 하셨다. S: 요새 친구들이 출산을 앞두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도 지켜주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종용한다. 축하한다는 반응조차 나오지 않는다.   Q4. 세월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월호를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S: 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 또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정치가 묻을 수 없다.  H: 앞서 들었던 김승섭 교수님 강연에서 해주신 말씀으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했던 말을 인용한다.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 저희 오빠가 죽은 거잖아요. 여러분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꼭 용기를 내주세요" 이 말을 듣고 교수님이 책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세월호를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 담지 못한 인터뷰 비하인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여과없이 참사 현장을 전하는 SNS의 보도윤리에 대해 이야기 나눴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겐 일상 곳곳이 참사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남성 위계에 의한 여성 피해자의 사망사건과 더불어 여전히 이름도 직업도 알 수 없는 여성들의 죽음이 가려지는 이유와 문제도 짚어보았습니다. 참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느냐를 떠올린 시간이었습니다. 작년 사회적으로 충격을 준 신림역• 서현역 칼부림, 동작역 침수사고는 큰 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덮어둔지라 언제 사고로 이어질 지 몰라 두려웠습니다. 해결되지 않고 넘어간다면 안전한 사회는 멀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전을 원한다면 참사를 기억하라’   작년 이태원 참사 1주기 기억식에 나온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선 책임을 좌시해선 안될 것입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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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타자화 될 수 없는 참사
타자화 될 수 없는 참사  -인연은 이어져 돌아온다- hyun "잠수부 자격증 있는 장병. 지휘통제실로.“ 기상 나팔소리와 함께 지휘통제실에서 나온 방송을 잊지 못한다. 2014년 4월 16일, 육군 훈련소 가입소 기간 사흘 째 되던 날인 오전 6시. “지휘통제실에서 전파합니다. 잠수 자격증이 있는 장병이 있으면 지휘통제실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육군에서 숱한 자격증들 중에 왜 하필 잠수부 자격증을 찾는걸까. 그 의문은 훈련소 연대로 넘어갈 때 알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맞이한 첫 주말 종교행사 날이었다.  연무대 교회는 1주차 훈련병부터 5주차 훈련병 모두 한 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 1주차에 막 접어든 나는 4~5주차 전부터 온 선임(?) 훈련병들과 함께 있었다.  선임 훈련병에게 있어 우린 괴롭히기 좋은 대상이었다. ‘우리는 갈게! 너희들 각개!((훈련소 수료 후 자대로 가니까 너네들은 남아서 각개 전투(훈련소 5주차 마지막 주에 실시하는 훈련)나 해라는 의미)’ 라 조롱하는 것도 모자라 연무대 교회의 꽃 ‘실로암’ 찬양에 맞춰 이들은 ‘각개전투!’ 외치며 자극하기 바빴다. 이 곳만의 환영방식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하게 있던 찰나 군종 목사가 강대상에 올라 훈련병들을 향해 호통을 치셨다.  “지금이 어느 시기인데 웃고 떠드는거야!”  무슨 시기이기에 이토록 그는 분개한걸까. 요 며칠 동안 꼬리표처럼 붙은 잠수부 자격증의 정체에 혼란스러워질 때 즈음 그는 스크린으로 영상을 띄우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안산에 고등학생들이 탄 배가 진도 앞바다에 침몰했는데 웃을 때가 아니다.“  세상과 단절 된 지 1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접한 소식은 충격이었다. 스크린에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탄 배가 진도 앞바다에 침몰하여 400여 명이 실종되었고, 잠수부들은 실종자 수색에 들어갔다. 기자는 눈시울 붉히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고 택시와 버스기사들은 유가족들을 진도까지 실어나르는 장면이 스쳤다. 입대한 지 불과 이틀 사이에 배에 탄 470여 명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목사는 “제발 0.0001% 라도 기적이 있다면 이들이 전원 구조되길 바랍니다.” 라며 애통한 심경으로 기도와 함께  “부디, 살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오라.” 는 말로 예배를 마쳤다.  안산을 포함한 대한민국은 애도의 분위기였다. 자대배치받고 간 교회에서도 기도제목 말미가 세월호 무사구조로 맺곤 했다. 하지만 사회와 군대 사이 해소할 수 없는 단절감이 존재했다. 군대는 ‘정치적 중립' 이라는 이유로 애도가 들어설 틈도 없거니와 그런 이야기도 꺼낼 수도 없었다. 바쁜 일과도 한몫했다. 선•후임 심지어 나조차 당장 주어진 일상과 휴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세월호는 관심에서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했다. "이윤에 눈 먼 기업과 컨트롤 타워의 부재가 빚은 참사" 그러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날이면 혼자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답답함만 커졌던 것 같다. ‘배가 왜 침몰했고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나님은 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나?’  원망의 마음도 따라서 커졌다. 파편처럼 끊긴 기억은 휴가 때 읽은 책 한 권으로 선명하게 그려나갈 수 있었다.  세월호는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고, 선체를 불법으로 증축했고, 배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평형수를 빼냈고, 갑판 위의 화물을 단단히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흔들릴 때 복원력을 상실하고 한쪽으로 쏠려서 침몰한 것이라고 검찰은 수사결과를 밝혔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2015) 중 세월호의 최대 화물 적재량은 2500t. 객실 증설을 위해 개조하여 선박의 무게중심이 높아지고 복원성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윤에 눈 멀어 생명을 버린기업과 비상사태에 부재한 국가가 빚은 참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도 침몰 사실에 충격만 받았다. 반복되는 일상이 물밀듯 밀려오니 또 다시 세월호 생각은 진전되지 않고 가라앉았다. 자대에 정착한 지 1년이 3개월 정도 지났을 즈음, 후임이 들어왔다. 그의 고향은 안산. 세월호에 탔던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대였던 그와 대화를 오랫동안 나누지 못했으나, 고향에서 전해진 슬픔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멀게만 느껴진 안산이 가까이 스민 순간이었다. "이제 그만할 때 안됐나? 안산 출신 후임과 대학 동기의 죽음을 통해 슬픔은 외면할 수 없어" 10년이 흘렀다. 여전히 세월호의 아픔은 그치지 않았다. 인양해야할 진실은 곳곳에 남아있다. 더러는 이제 그만하라며 날선 비난과 피로감을 호소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죽음을 결코 외면해야할까. 한 사람의 죽음은 가능성이 소멸하는 것이다. 한 사람과 그와 관계된 세계도 줄줄이 무너지는 비극이다. 그 고통이 국가의 외면으로, 이 고통은 나와 무관하다는 타자화로 이어진다면, 세상은 지옥이 되지 않을까. 나와 무관하다 여겼던 것들이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체감한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2023년 12월 토요일 아침. 대학교 동기의 비보를 접했다. 대학원 학비를 벌려고 여름방학 중 아파트 건축 현장에서 창호 작업 중 6층 높이에서 추락사한(이 또한 안전 시설이 제대로 구비되지 못한 채 빚어진 참사였다) 대학교 동기의 소식을 그와 인연도, 연고도 없던 지인에게서 접할 줄은 몰랐다. 슬픔은 결코 나와 먼 일이 아님을 절감했다. 죽음은 먼 일처럼 느껴졌는데 인연의 고리는 어떻게든 닿아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동기의 죽음을 접한 이후 변화가 필요했다. 살아가면서 인연은 어떻게 맞닿을 지 아무도 모르기에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했다. 내가 만난 누군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칠 인연이 될 지도 모르니까.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은 연결되고 이들과 함께 시대를 관통하기에.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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