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자녀를 살해 후 자살한 끔찍한 악마들'을 위한 변명

202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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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술에 중독된 사람입니다. 읽거나, 시청, 접한 콘텐츠에서 주제를 뽑아 고민하는 걸 좋아합니다.

글의 가독성을 위해 높임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무능력한 부모를 잘못 만난 탓으로 죄 없는 어린이가 희생당했다고 비난하는 당시 기사들의 '희생자'담론은 가족 집단동반자살의 원인을 부모의 죄로 사고하는 도덕적 결정론을 초월하지 못한다. 가부장에게 순진무구한 어린이를 잔인하게 죽인 죄인이라는 화살을 돌리는 것은 결국 부권적 개발논리의 허점을 묻지 못하고 가족내부의 폭력성으로 원인을 두는 순환론의 반복에 봉사한다. 희생자담론은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탈정치화한다. 이것은 이웃의 자살을 방조한 세태에 화살을 돌리는 태도와 유사한 한계를 갖는다. 암묵적으로 (가족단위의) 각자도생을 '책임감의 정당화'로써 전제하는 형식의 연민은 동정에 가까울 뿐이며 윤리성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이정숙, 2017; p361)

 

"이 사건에 대해 박완서는 에세이를 남겼는데, TV뉴스로 보도된 사건에서 범인이 죽기 전에 소리 내어 한바탕 울었다는 점을 들면서 처자식까지 죽인 비정성을 간단히 극악무도하다고만 단정할 수 없는 사회의 부조리를 겨냥했다.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시 하지 말자는 생각은 모든 서구식 사고방식이 그렇듯이 듣기 좋고 합리적"이지만 우리 사회의 실상이 그런 사고방식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실정에서, 사형수의 자식으로 살아갈 아이들의 혐란한 인생을 그려보았을 때 총을 쏜 것이 그 나름의 부정(父精)이었을 거라는 견해이다. 그리고 그의 심성이 극한으로 몰린 것은 근명과 성실로는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고질적인 가난 때문임을 짚었다."(이정숙, 2017; p364)



오늘 쓸 글은 쓰기에 있어 다른 글보다 고민이 크다. 가정의 달인 5월에만 잇달아 발생한 이른바 '자녀 살해 후 자살'에 대한 현재 주요 담론에 (어찌보면) 역행하는 논지의 글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 역시 진정한 의미의 가족동반자살은 적어도 아동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설사 아동은 아동 나름대로 학교에서 교우관계도 안 좋고, 너무 이른 미디어 유해물을 접해 온 결과 삶이라는 것에 아동 나름의(?) 회의감이 들어 자살의 뜻을 부모와 일치했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책임은 아동의 그같은 죽음욕구가 형성된 과정을 쫒고 아동을 그같은 욕구로부터 잠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녀 살해 후 자살'의 일부 원인에 '가정 문제'나 '가족 갈등'이 포함된다는 사실은 그들 모두가 '경제적 원인'으로 '내몰려 자살한' 이들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최아라, 2022).

그런 이유로 '자녀 살해 후 자살'에서 "아동에겐 아무런 선택권도 없었다-"라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 집단동반자살'이란 표현과 그 사건에 대한 일반대중의 '온정주의적'인 시각을 금기시하는 현상은 우려스럽다고 생각한다.

늘 그렇듯 많이 부족한 글이 될 것이다. 특히 많은 '자녀 살해 후 자살'은 그 '가해부모'가 자살에 성공한 경우가 많아 그들의 입장을 추론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객관적'으로 표시되는 여러 지표들이 있겠지만, '객관적' 지표들은 그들의 '주관적' 세계를 보여주는데 한계가 있다.

이 글은 한 줄기로 매끄럽게 주제를 논하기보단 단편적인 여러 목차로 이 글이 담고있는 어떤 우려를 최대한 설명해보고자 했다. 필자의 어떤 글보다도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길 바란다.

 


-목차

1. "아동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지 말라"는 명령

   1-1.  '자녀의 성공'은 어떤 경로를 통해 상상되는가?

2. "내가 죽으면 우리 자녀는 어디로 가나요?"

3.  '실패에 대한 책임'과 '질타의 소비'를 통한 '성공신화'에의 굳건한 봉사   

4. 맺으며

 


1. "아동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지 말라"는 명령

이 명령의 내용은 얼핏 보기에 심플하고, 또 너무도 당연하다. 특히 이같은 명령은 "내 자식 훈육을 위해 내가 몇 대 좀 때리겠다는데 왜 말려!"로 대표되는 체벌적 훈육을 문제 삼을 때 핵심이 되는 명령이다. 이같은 체벌은 아동의 '신체, 정신'적 안녕을 가질 권리를 침해하기에 근절될 필요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같은 체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아동에 대한 '신체, 정신'적 안녕을 침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으로 대표되는 '입시 지옥'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출처 : https://m.khan.co.kr/life/heal...)

이미 한참 전인 2009년에 처음 찍어낸 엄기호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마라]에는 "항상 자녀의 주위를 맴돌며 보살핀다고 해서 '헬리콥터 맘'이라 불리는 중산층 엄마들은 아이를 피트니스 센터에 보내고, [r] 발음을 잘하기 위해 혀 밑을 자르고, 일찍이 성형수술을 시키는 등 아이의 신체 자본 역시 관리한다."(엄기호, 2009; p60)라는 지적이 있었다.

혀 밑을 자르는 사례는 차마 믿을 수 없지만, 그 맥락에 대해서는 모두가 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대한민국 부모가 아동을 고문하길 좋아하는 사디스트는 아닐 테고, 부모 역시 이러는 '이유'가 있을 터. 그것은 분명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로 대표되는, 무한경쟁사회에서 자기 자식이 생존해낼 수 있도록 부모 나름의 '원조'라고 생각된다.

자녀가 성장해 사회에서 성공하느냐 마느냐, 아니 비록 '성공'이 아니더라도 '생존'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책임'이 온전히 한 '가족 단위'에 전가된 무한경쟁사회에서 부모는 자녀의 '삶(놀기, 더 먹기 등)'을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의 '소유물'에 둘 필요를 느낄 수밖에 없다. "자식새끼를 '사람되게'하는 책임"이 부모에게 전가된 우리 사회에서 자녀의 실패는 곧 부모의 실패이게 된다.

정리하자면 A)'자기 자녀'가 우리사회에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생존하기 위해서)는 B)부모의 지원(강제)이 필요한데, C)그 필요한 부모의 지원이 불가능하거나 극히 미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빈곤, 가난, 차별, 계층 억압) D)'부모의 실패'가 곧 '자녀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바, E)이런 상황에서 "자녀를 부모와 독립된 인격체로 보라!"는 명령이 현실적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부모의 세계에서 자녀를 자신과 독립된 (운명적)인격체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자녀를 두고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곧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유기하는 것에 다를바 아니다. 적어도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러하다. 

학교폭력이 만연하고,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부터 부산의 돌려차기남까지 끈질기게 이어지는 여성혐오, 노동자의 끼임사고와 그럼에도 그치지 않는 산업재해, 그 시정에 대한 비웃음, 학교폭력 등. 이같은 현실 앞에서 "자녀를 그러한 삶에 홀로 노출시키는 것과 데려감으로써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그들'의 입장에서 '부모된 도리'는 무엇일까?


1-1. '자녀의 성공'은 어떤 경로를 통해 상상되는가?

그런데 부모가 피치못해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면서까지 바라는 '자녀의 성공'이란 무엇인가? 아니, 애초에 부모는 어떤 경로를 통해 '자녀의 성공'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 상상의 근거나 재료는 누구에 의해 제공되는가?

이렇게 질문을 펼쳐놓았으나 필자는 대답할 수 없다. 얼핏 신자유주의를 욕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신자유주의가 엄습하지 않았던 전근대 사회에서조차 '횟초리'로 표상되는, 자녀의 '인간됨'을 목표로 하는 훈육은 있어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자녀의 성공'을 부모가 무엇으로 상상하고, 또 어떻게 상상했는지를 논하려면 좀 더 큰 개념을 가져와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러나 필자는 부족하여 그러한 논의를 이끌어낼 능력이 안 된다. 해서, 목차 1-1은 질문의 형태로 남겨두고자 한다.

다만, 현재로 한정해 얘기해보자면, 입시지옥의 대척점으로 상징되는 '대안교육' 담론을 논의로 끌어올 필요가 있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레 적어본다. 예컨대 대안교육을 폄하하는 이들의 문장이나 표현을 통해 그들이 말하는 성공이란 무엇인지를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대안교육에 들어선 이들이 말하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2. "내가 죽으면 우리 자녀는 어디로 가나요?"

'책임있는 부모'가 자기네 자녀를 살해하지 않고 자기들만 자살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남겨진(버려진) 자녀는 어디로 가는가?

통상 부모를 잃은 미성년 자녀는 '위탁' 또는 '입양'의 기로에 놓인다. 

아동의 친척이 남겨진 아동을 맡아 키우는 걸 상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해법은 우선 여전히 문제를 '가족'의 영역에 남겨두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친척은 이미 아동과 최소 3촌(寸) 사이인지라 거리감이 있으며, 친척이 자기네 자녀를 갖고 있는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빈곤한 부모'의 친척은 높은 확률로 1) 역시 빈곤하거나, 2) 빈곤에 허덕였던 부모를 내버려두었거나, 3) 도움을 요청할 수 없을 정도로 (물적, 심리적) 거리가 긴 친척일 것이다. 이들에게 자녀가 위탁된들 '그들' 부모로서는 자녀를 불행의 구렁텅이에 버려두는 것은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필자가 알기로는 친척에게 남겨진 아동을 위탁해야 할 법적인 의무조차 없다. 

"'가정위탁보호제도'는 원가정의 역할을 대신할 대리보호가정에 요보호 아동의 건강한 발달과 성장을 위임하는 공적 계약이며, 이를 가정외보호(out-of-homecare)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가정외보호 형태는 아동양육시설, 아동공동생활가정(그룹홈), 가정위탁으로 나뉜다."(박혜지 외, 2020; p66)

 "가정위탁은 크게 아동과 혈연관계가 없는 일반가정위탁, 조부모가 양육하는 대리양육가정위탁, 조부모를 제외한 8촌 이내의 혈족이 돌보는 친인척가정위탁, 2세 이하 또는 학대 피해나 경계선 지능 아동 등 전문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아동을 돌보는 전문가정위탁, 긴급보호조치가 필요한 아동을 돌보는 일시가정위탁보호로 나뉜다."(https://www.newspim.com/news/v...)

"가정위탁은 소규모 가정 내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단체생활을 하는 시설위탁보다 가족과 같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복지부의 아동보호 기본방향도 시설보호보다는 가정위탁 등 가정보호 조치가 원칙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여전히 시설보호가 압도적이다. ... 가정위탁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해선 위탁가정 확대가 먼저 이뤄져야 하지만 위탁가정에 대한 지원이 부족해 모집 자체가 쉽지 않다. ... 보호아동을 24시간 내내 돌봐야 하는 위탁가정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 육아비용은 더 불어날 수밖에 없다."(https://www.newspim.com/news/v...)

가정위탁이 그렇다면 시설보호는 어떠한가?

시설 안에서의 경험은 어느 정도 운에 맡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아동의 심리적 고통은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다.

중요한 건 시설에서 아동이 나와야 하는 순간, 즉 그들이 '보호종료아동'이 되는 순간에 있다. 비록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자산형성을 장려하는 중앙정부 차원의 제도인 '디딤씨앗통장'이 있지만, "후원자의 후원금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여 운영되는 한계가 존재한다."(김규리 외, 2021; p29)

 경제적 자립을 넘어 "자립준비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잇따라 발생한 가운데 ... 심리적 자립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https://m.khan.co.kr/national/...)는 지적은 여전히 심리적으로도 많은 지원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읽다보면 느껴지겠지만 목차2의 글은 필자가 논문이나 인터넷 뉴스를 '훑어보아' 정리한 자료로서, 그 내용의 정확성 등을 의심할 여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내용을 훑은 이가 필자가 아닌 '자살로 내몰린 부모'라면, 그 내용이 불안정하거니와 내용의 분위기도 결코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렇다고 공공이 대놓고 "안심하고 자녀분을 남기고 자살하세요! 남겨진 자녀는 우리가 이러이러한 과정을 통해 안전하고 행복하게 키워드리겠습니다!"라고 광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자살을 고민 중인 부모가 공공기관에 전화로 남겨진 자신의 자녀가 어떻게 될지 문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살을 국가의 실패로 바라보는 현상황에서 그들은 통치 권력에 포섭되고 싶지 않을 거니까. 

즉, 부모에게 있어 남겨진 자녀가 가게 될 어떤 곳도 희망적인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 곧 부모에게 있어 자녀의 행복한 삶을 상상할 근거가 부재하다는 것이고, 차라리 '지옥'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걱정되는 우려의 근거들만 잔뜩임을 가리킨다. 

2023년 4월 12일 고영인, 인재근 의원과 세이브더칠드런 등이 공동주최한 "'개인의 비극' 너머 대안을 묻다"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제자들은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은 남은 자녀가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회안전망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보았"(https://www.sc.or.kr/news/stor...)라고 말하는 점은 이런 맥락에서 주목해야 한다.


3.  '실패에 대한 책임'과 '질타의 소비'를 통한 '성공신화'에의 굳건한 봉사

'자녀 살해 후 자살'이란 용어는 '가족동반자살'이라는 용어가 '아동 살해 가해자'인 부모를 향해 "얼마나 힘들었으면-"하고 '온정주의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막고자 제안된 용어다. 위 국제 심포지엄 참가자들 중 일부는 "온정주의와 연결되지 않도록 자녀 살해 후 생존(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주면 좋겠다."(https://www.womennews.co.kr/ne...)고 의견을 냈다고 한다.

'처벌'이란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을 가리킨다. 처벌이 존재함을 공포하는 것으로 다른 이들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경고의 기능도 겸한다. 

상습적 아동학대나 음주, 방임, 또는 가족갈등 등을 원인으로 하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이 아닌 경제적 빈곤 등을 원인으로 하는 자녀 살해 후 자살에서 '잘못'은 곧 '경제적 실패'이다. (필자는 앞의 요인들도 결코 경제적 어려움과 연관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건 생존의 과정에서의 역기능이 아닐까?)

이같은 '경제적 실패'가 '사건'의 형태로 사회에 드러나면 사회구성원이 공유하고(기대고) 있는 '체제'에 의문이 가해진다. "과연 지금의 체제는 잘 작동하고 있는가?" 이 의문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잘못'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려야 한다. 이같은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담론'이라면, 담론의 주조자는 언론이라 할 수 있다. 

언론, 특히 신문은 기사의 작성에 있어 작성자의 의도가 개입된다. 작성자의 의도를 반영한 언어로 기사가 작성되고, 그 기사가 대중 사이에 공유되며, 특정 사안에 대한 대중적 차원의 담론이 형성된다. 성소수자 집회를 다루는 기사에서 작성자의 의도로 '에이즈의 확산!'이라던가 하는 언어가 강조되거나 장애인 탈시설 시위를 두고 '일반시민을 볼모로...'와 같은 언어가 대표적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언론은 '가족동반자살'이라는 언어를 지양하고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언어를 지향하는 것으로 '가해자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자 하는 건 아닐까? 필자는 이 점이 우려스럽다. 

이렇게 체제의 결함 또는 모순에 의해 발생한 사건에서 가해자를 개인으로 한정 지어 그 개인에게 대중이 질타하는 것을 '성숙한 시민의 태도'로 생각하는 현상이 확산될수록, 체제를 의심하지 않고 싶어하는(불안을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개인들이 '실패한 개인'을 향한 질타에 참여해 질타를 소비할수록, 제1가해자라 할 수 있는 체제는 손 안 쓰고 코 푸는 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단지 이런 차원의 우려에서, 필자는 개인을 악마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그 악마가 조주빈이나 조두순이라 하더라도, 필자는 악마들의 서사를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4. 맺으며

변명이지만, 3번 목차의 내용이 좀 마음에 안 든다. 사실 글을 쓰던 도중 필자의 실수로 내용이 전부 삭제되고는 되돌려지지 않아 다시 쓴 결과 내용이 논리적 정합성이나 타당성과 신뢰성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시간에 쫓겨 쓰는지라 더더욱 그런 것 같다.  개인적인 바람으로 캠페인즈에도 <임시저장> 기능이 생겼으면 한다... (실수로 ctrl+z를 누르니 글이 태반이 싹 날아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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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의 해결책 중 하나로 '가족단위의 돌봄'을 뛰어넘는 돌봄 체계의 필요를 주장하고 싶다. 

'아파트'로 대표되는 이웃과 이웃 간의 단절은 당장 부모가 죽으면 남겨진 자녀를 누가 돌볼지, 아니 애초에 자녀가 남겨졌음을 누가 발견이라도 해낼지 우려하게 만든다. 비단 아동뿐 아니라 돌봄을 받는 장애인이나 노인도 이에 속한다. 

돌봄의 책임이 온전히 '가족'에게 있지 않아 가족이 무너지더라도 누군가 다른 이가 아동에 대한 돌봄을 '기꺼이' 이어나갈 수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용어가 진정으로 의미있는 언어로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 돌봄의 책임이 온전히 가족에게 있다면, 그래서 부모가 자녀의 독립된 인격체를 상상하기 어렵다면, '가족동반자살'이란 용어는 결국 설득력 있는 언어가 아닐까? 어차피 자녀가 실패하든, 부모가 실패하든, '가족'이 실패하는 것은 똑같기 때문에.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의견 주시면 더더욱 감사합니다.




-참고 및 인용

1.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엄기호, 2009

2.[1960-70년대 '가족 집단동반자살'을 둘러싼 징후적 불안의 문제], 이정숙, 2017

3.[1950~60년대 한국사회 경제구조 변화와 가족동반자살], 정승화, ?

4.[가정위탁보호가 종료된 청소년들의 자립과정 경험에 대한 질적연구], 박혜지, 이정화, 2020

5.[아동양육시설 보호종료아동이 경험한 디딤씨앗통장의 의미에 관한 질적 사례연구], 김규리,김용회,한창근, 2021.

6.[자녀살해 후 자살에 관한 연구 : 주요일간지를 중심으로], 최아라, 2022

7. 그외 링크로 삽입한 뉴스와 글



이슈

아직은.. 중간중간 수정이 필요한 긴 글을 작성할 때에는 구글 독스 같은 곳에 작성한 후에 옮기는게 나은 것 같더라구요.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요약해서 한 줄로 안타까움을 표하거나 욕하거나, 어땠어야 했다고 평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아니지만 너무 쉽게 지나가는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이면에 따져보고 생각해봐야 할 일들을 상세하게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셔서 감사해요. 결국 명확한 하나의 정답이 있기보다는 조금 더 나은 방향이 무엇일지, 지금의 우리의 고민과 생각은 괜찮은 것인지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겠다 싶습니다.

글을 읽고 나서 정확히 일치하진 않지만 교도소 내의 유아 양육 수감자가 떠올랐습니다. 수감 시설 내에서는 18개월까지만 함께 할 수 있고 이후에는 양육시설로 보내지는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양육자와 분리되어 남겨진 아이에 대한 대책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가 양육자에게 고민을 안기는 비슷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지적해주신 문제를 단순한 대책 하나로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것부터 해결할 수 있을지 논의가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재난에 가까운 자살 문제와 그 속에 있는 부가적인 문제들까지 돌봄 차원에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사안을 바라볼 때 단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겠네요.

일반적인 여론과 다른 관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좋은 글입니다. 제 평소 생각과 다른 내용이었음에도, 많은 부분에서 동의를 하게 됐네요. 정말 탁월한 문제제기라 생각합니다.

글의 전반적인 흐름 - 자살을 '개인화'함으로써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 에는 동의합니다.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용어의 평가와 같은 세부사항에서는 약간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녀(가족)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행위의 기저에는 신자유주의/가족주의라는 구조적 압력이 '아주 크게'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개인에게는 최소한의 행위의 자유가 있으며, 그에 따른 책임이 존재합니다. 심각한 경제적, 가족적 위기를 겪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자살한 후 자녀의 삶이 아주 암울할 것으로 예상되더라도, 개인은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할 것인지, 홀로 자살할 것인지, 삶을 지속할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 어떠한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도 논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조적 문제의 은폐를 걷어내는 일이 개인의 선택을 은폐하는 일로 이어지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