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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이야기(2) 대만의 지금과 이번 선거 이야기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狗去豬來)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 장개석의 국민당 군이 공산당을 피해 조금씩 대만으로 상륙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은 대만 사람들에 대한 약탈, 강간을 서슴치 않았다. 이 이전부터 대만에 살던 사람을 본성인(本省人), 국민당을 따라 대만에 건너온 사람을 외성인(外省人)이라고 부르는데, 본성인들은 국민당의 모습을 보고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狗去豬來)고 탄식했다. -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만 통치가 훌륭했다는 증거로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뻔뻔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 그러던 중, 1947년 본성인들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정치, 경제, 군사, 사법 등 중요한 요직을 외성인들끼리 차지하는 정치적 문제, 국민당군과 외성인에 의한 약탈, 강간 등의 범죄 문제 등으로 인해 본성인들의 불만 등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차별과 그에 대한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던 때의 일이다. 1947년 2월 27일, 남편 없이 혼자 자식 둘을 키우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성이 밀수 담배를 팔다가 적발되었다. 공무원들은 그녀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기 시작했고, 이를 구경하며 공무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공무원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 총격으로 스무 살 학생 천원씨(陳文溪)가 사망하면서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국민당은 3월부터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약 3만 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부천대(國府遷臺) 1949년, 국공내전에서 완전히 패배한 대만은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옮기고 강력한 계엄령을 실시했다. 장졔스(蔣介石)를 중심으로 하는 개발독재가 시작되었고, 10대 건설 등 다양한 경제 발전 정책을 통해 경공업에서 중공업 중심의 국가로 변화해 갔다. (이 모습도 한국과 똑같다) 이 와중에도 중국과 대만은 무력 충돌을 이어나갔다. 1981년까지 거의 한달에 한번 중국과 대만은 포격을 주고 받았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의 군수기지 역할로 대만이 경제 성장을 이룬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계엄령에 반대하며 민주화 운동이 있었던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 1975년 장졔스가 죽고 그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대만 총통 자리를 물려받자 민주화 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1979년 2월에는 『메이리따오(美麗島)』라는 잡지에서 주최하는 시위가 있었는데 경찰이 시위 주최자들을 잡아가면서 대만의 언론 탄압이 크게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이를 메이리따오 사건이라고 부르고 이 때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은 사람이 바로 훗날 총통이 되는 천수이비옌(陳水扁, 1950~)이다. 이 시기 민주화 세력을 비롯해 국민당 비판 세력 등을 모두 묶어 국민당 1당 독재에 바깥이라는 의미에서 당외세력이라 불렀다. 1987년, 장징궈는 민주화 여론을 받아들여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외세력들도 정당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대표가 바로 민주진보당, 줄여서 민진당이라 불리는 세력이다. 대만의 정치 지형 대만의 정치는 양안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범람연맹과 범록연맹으로 나눈다. 범람연맹은 국민당 로고가 남색인 데에서 유래하는 보수파 연합이다. 이들은 중화민국을 중심으로 중국을 재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안에서 중화민국 단독 통일을 주장하는가, 일국양제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중국 대륙의 민주화가 가능한가 등의 이견은 있지만 하여튼 이들은 반-공산주의 색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중국과의 교류 확대를 추진하기 때문에 친중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 미국의 원조 아래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친미성향을 띄고 있기도 하다. 범람연맹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복지, 분배를 강조하는 보수파인 친민당, 민국당 등은 로고 색깔이 오렌지색인 데에서 유래해 범귤연맹이라 불리기도 한다. 범록연맹은 민진당 로고가 녹색인 데에서 유래하는 반중-진보파 연합이다. 이들은 대만 정부가 중국을 점령한다거나, 일국양제로 중국과 통일을 한다거나 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 중 일부는 중화민국이라는 여권에 대만국이라는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중화라고 엮이고 싶지도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꺼려 양안관계에 있어서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러한 역사적 연장 으로 중국과의 통일을 추구하거나 중국과의 교류 확대를 추진하는 국민당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대체로 민진당을 지지하고, 과거 계엄령 하에 있었던 독재정치에 대해서도 반감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이들은 양안의 교류 확대는 중국의 경제 체제에 대만이 잠식되는 것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잘 드러내는 것이 2014년 해바라기 운동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봉열전을 참조) 대만 정치는 중국과의 관계라는 큰 틀에서 둘로 나눠지지만 그 안에서도 과거 독재정치에 대한 입장 차이, 경제 정책 문제, 대만 내 소수민족 문제, 세대/성별/성적지향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슈가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칭더(賴淸德)의 당선과 그 이후 라이칭더는 1959년 신뻬이시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3개월이 되던 해에 부친이 탄광 사고로 죽고 모친이 석탄을 주워 팔며 자식들을 길렀다고 한다(天下雜誌.2017.09.04.). 내과의사가 되었다가 1994년 정치 무대에 뛰어든 그는 여러 자리를 거쳐 2020년에 부총통이 되었거, 2022년에는 민진당 주석이 되었다.  2019년, 그는 민진당의 정책은 반공불반중反共不反中이라고 표현했다(ETtoday.2019.12.23.). 공산당에 반대하는 것이지 중국이 싫은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트와이스 쯔위의 깃발을 놓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 - 대만에서는 쩌우쯔위 국기사건이라 부른다 - 이후에는 대만을 주권국가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이야기를 강하게, 자주 하고 있으며 상당히 강성한 대만 독립 주의자로 보인다. 台獨份子有自己的國旗,拿青天白日滿地紅的旗子,不是台獨份子。 대독분자(대만독립분자)에겐 자기의 국기가 있다.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든 자는 대독분자가 아니다. (ETtoday.2016.01.16.) 我們已是主權獨立國家,不需另行宣布獨立。 우리는 이미 주권독립국가이고, 따로 독립을 선포할 필요가 없다. (自由時報.2017.09.26.) 希望任何國家都應該要正視中華民國存在的事實。 어떤 국가든 모두 중화민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길 바란다. (Newtalk新聞.2017.09.27.) 台灣不屬於中華人民共和國的一部分。台灣斬釘截鐵地就不是中華人民共和國一部分。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에 속하지 않는다. 대만은 명백히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가 아니다. (中央通迅社.2023.08.07.) 台灣是一個民主國家。中華民國國名不必改。 대만은 민주국가다. 중화민국의 국명은 바꿀 필요가 없다. (上報.2023.08.15.) 대만에게 있어서 중국과의 관계는 단순히 안보 문제가 아니다. 2023년 대만의 전체 수출 수지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35.4%이고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18조 3천 억 원 가량인데 이것이 21년만의 최저치다. (한국무역협회.2023.12.16.) 최저치가 35%라는 것은 대만과 중국 사이의 경제 교류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로 한국의 대중국 수출 비중은 2023년에 19.7%, 대미국 수출 비중은 18.3%였다. (지표누리) 이런 상황에서 마치 대만이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할 것 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상황을 진짜 모르는 것이다. 물론 선거를 앞두고 중국이 대만에 무역 제재를 행하는 썩 좋지 못한 수를 두었고 이 때문에 대만에서도 새로운 수출길을 모색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중국 경제가 코로나 이후 상당히 심각한 상황을 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난 2014년, 대만 젊은이들의 시위인 해바라기 운동이 일어난 이유는 중국과 대만이 서로 노동시장을 개방하는 협의를 진행하려 한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대만 안에도 취업, 결혼 등의 이유로 대륙 중국인들이 꽤 많이 들어와 살고 있고, 대만 연예인들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꽤 많다.  대만인들에게 중국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너무 멀어져도 안 되지만 가까워져도 안 된다. 이미 홍콩을 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홍콩의 우산혁명만을 기억하지만 홍콩에도 계급이 있고 정치 지형이 있다. 홍콩의 집값은 살인적이다. 그래서 홍콩 부자들 중에는 아무리 좋다고 해도 홍콩에서 다닥다닥 붙어 사느니 대륙으로 가서 넓은 집에서 살겠다고 홍콩을 떠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도 굳이 사람들과 싸우는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주느니 홍콩 사람들을 대륙으로 가게 하고 대륙 사람들을 홍콩으로 가게 해서 서로 섞이게 하면 그만이다. (물론 지금 시진핑의 중국 정부가 이 정도로 세련되지 않아서 문제다.) 대만에도 한국 농촌에서 외국인 신부를 맞이하는 것과 마찬가지 모습으로 대만 농촌의 노총각에게 시집 간 중국 여성들이 꽤 있다. 냉전 이후 양안관계는 정치적 현안에 따라 부침은 있으나 남북한에 비하면 서로 분리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가능성도 낮다. 대만의 군사력이 중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결코 약하지도 않기 때문에 중국도 엄청난 피해를 봐야함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중국과 대만의 전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물론 최근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사태가 불러온 전쟁 공포도 있지만 미국의 태도와 중국의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보통의 국가는 매년 연초나 새해가 되기 전에 새해의 경제 성장률을 추정하고, 중간에 수정을 하기도 하며 연말에는 그 추정이 어느 정도 맞았는지 발표를 한다. 하지만 중국은 연초에 발표한 경제성장률을 수정하지 않고 무조건 연말에 맞춰놓는다. 이래저래 해봤는데 경제 성장률이 예상에 못 미치면 부동산에 거액을 풀어서 경기를 끌어올리는 식으로. 하지만 23년부터는 이게 안 먹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동산 살 돈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코로나 기간 동안 돈을 풀지 않았다. 그래서 코로나가 끝나도 도무지 경기가 좋아지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시진핑은 거의 매년 국가의 부패를 잡겠다면서 우리로 치면 장관급부터 거의 모든 공무원을 숙청하고 있다. 하지만 부패는 이런 식으로 잡히지도 않거니와 결국 다음 세대의 정치인이 나오지 않는 결과만 초래되었다. 시진핑 다음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오는 이유는 시진핑의 장기 집권 때문도 있지만 이런 이유가 크다. 그래서 이런 방식 저런 방식을 다 썼는 데에도 경제가 안 살거나 정치적인 인기를 얻기 어렵다고 여겨지면 독재자들은 결국 극단적인 수를 쓰게 되지 않겠냐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진핑과 중국이 자원의 부족, 특히 식량의 부족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 힘들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다. 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다 대비해야 겠지만 전문가들의 중국 예측에는 객관적인 예측 이전에 사적인 감정이 많이 담겨있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대만 입장에서도 미국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도, 이스라엘에도 직접 파병을 하지 않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전쟁을 바라는 대만인이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우세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만 믿고 중국과 각을 세울 수 만도 없다. 입법원(국회)에서 민진당보다 국민당이 우세한 결과를 얻은 것도 어쩌면 혹시 모를 민진당의 급발진에 대해 브레이크 역할을 하기 바라는 대만 국민들의 민심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추신: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전쟁 시나리오를 예측하자면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남한과 북한은 파병을 하기보다는 서로를 노리며 힘의 균형을 도모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병력이 아니더라도 돈이나 무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미 미국 정치권에서는 한국을 향해 본인들이 강대국인 것을 좀 인정하라는 이야기가 나온지 오래되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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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이야기(1) 대만의 옛날
2024년은 선거의 해이고, 그 포문을 연 첫 선거가 바로 대만 총통 선거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대만의 역사 대만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빙하기 이후라고 한다. 『삼국지(三國志)』「오지(吳志) 오주전(吳主傳)」에 보면 오나라 왕 손권이 황룡 2년(230) 정월에 장군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을 시켜 바다 건너의 섬 이주(夷洲)와 단주(亶洲)에 가게 했는데 이 두 사람이 이주에 살던 사람 수천 명을 강제로 끌고 왔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온 이주와 단주가 대만이라고 하기도 한다. 대만이 본격적으로 중국 역사 안에 서술되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 때다. 이때는 지금의 펑후제도(澎湖諸島)와 대만 일대를 복건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에 속하는 하나의 영역으로 보았다. 본격적으로 대만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명나라 때의 일이다. 왜구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대만이 왜구의 근거지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고, 먹고 살기 힘들어진 중국인들이 바다를 건너 대만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또 이 즈음은 유럽의 대항해시대에 해당한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인도양을 거쳐 동남아시아까지 들어왔다가 대만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포르투갈 사람들이 대만에 붙인 별명이 바로 아름다운 섬, 포르모사(Formosa)다. 아름다운 섬 16세기 말, 17세기 초가 되면 일본은 전국시대를 마무리짓는 시기였고 중국도 대제국 명나라가 쇠약해지는 시기였다. 그 사이에서 조선은 소위 양란이라 불리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겪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역시 이 틈을 타 명나라가 갖고 있던 펑후제도를 점령하고 1624년부터는 대만 따위엔(大員)에 요새를 쌓기 시작했고, 2년뒤에는 스페인도 지롱(基隆)에 요새를 쌓기 시작했다. 두 세력이 대만에서 각축을 벌이다가 1642년이 되면 네덜란드가 스페인 세력을 대만에서 완전히 추방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중국 복건성, 광동성 연안의 중국인들을 모집해 대만으로 데리고 가 농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시기 대만 원주민들이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는 뜻에서 타요우안(Tayouan)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지금 타이완의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정성공(鄭成功) 네덜란드가 대만에 요새를 쌓기 시작한 1624년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 하나 태어났다. 중국인 무역상이자 무장집단의 수장이었던 정지룡(鄭芝龍)이 지금의 나가사키 근처인 히라도(平戸)번의 무사 타가와 시치자에몽(田川七左衛門)의 딸 마츠(まつ)와 하룻밤 정을 쌓고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이가 바로 정성공(鄭成功)이다. (중국역사박물관 소장 정성공화상) 타가와 마츠는 정성공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중국 복건성으로 길을 떠났다. 머리가 좋았던 정성공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해 생원이 되었고, 당시 이름난 유학자였던 전겸익(錢謙益)의 제자가 되었다. 전겸익은 동림당(東林黨) 소속이었다. 당시 명나라 황실과 정치를 비판하던 재야인사들이 동림서원에 모여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며 하나의 학파이자 정파인 동림학파/동림당을 결성하게 된다. 이들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양명학을 비판했다.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주자학이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기 쉽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행을 하여 사사로운 욕망을 줄여나가야 하고(존천리거인욕) 이를 통해 개인의 도덕적 수양이 천하라는 공적인 영역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해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양명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인간의 마음 그 자체가 곧 하늘의 이치라고 주장하면서(심즉리) 인간의 자유의지는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림당을 중심으로 한 주자학 그룹은 양명학의 ‘자유에 대한 강조’가 천하를 그르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림당은 주자학 중에서도 살짝 특이한 그룹이었는데, 그들은 학문적 목적이 사회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사회적 욕망과 도덕적 수양, 정치적 활동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 속에서 천하의 이치(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유럽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고 농업, 공업 기술의 발전과 경영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천하의 이익을 위해서는 군주제가 아니라 지방 분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성공은 이 그룹에서 지식인/개인의 강렬한 사회적 의무에 대한 마음가짐을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1644년, 농민봉기군의 수장인 이자성(李自成)이 궁궐에 난입해 명나라가 멸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리장성을 지키던 장수 오삼계(吳三桂)는 이 소식을 듣고 성문을 그냥 열어버렸고 이로 인해 만주족이 장성을 타고 내려와 청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때 명나라 지식인들 중 일부는 청나라에 대항하는 군대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정지룡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황족인 주율건(朱聿鍵)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주율건은 정성공의 외모가 수려한 것을 보고 매우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딸과 결혼하게 하겠다, 명나라 황실의 성인 주씨를 하사하겠다 운운했는데 정성공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이 널리 알려지면서 정성공에게는 ‘나라의 성씨를 받은 나으리’라는 뜻의 국성야(國姓爺)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것이 바로 정성공의 영어 별명 중 하나인 콕싱야의 어원이다. 청나라와의 싸움 와중에 아버지 정지룡이 청나라에 항복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더이상의 저항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정성공은 자신의 부친과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군대를 이끌며 청나라와 싸웠다. 각각의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청나라의 강력함을 이길 수는 없었던 정성공은 결국 대만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것이 1661년의 일이다. 1661년, 펑후제도를 점령한 정성공은 같은해 3월에 네덜란드가 쌓았던 강력한 요새 질란디아(Zeelandia)를 포위, 1년 남짓 공격한 끝에 네덜란드 세력을 대만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게 되었다.  정씨왕조 네덜란드 세력을 타이완에서 완전히 몰아낸 정성공은 대만을 동도(東都)로 개명하고 정씨 왕국을 세웠다. 정성공은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낸 1662년에 병으로 사망했고, 아들 정경(鄭經)이 뒤를 이었다. 정경은 1681년에 사망했고, 그 다음은 정경의 아들 정극상(鄭克塽)이 뒤를 이었는데 정극상은 1683년에 청나라에 항복해버린다. 이를 통해 정씨왕조의 대만통치도 끝이 난다. 정성공 일족의 대만 통치는 20년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대만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고 대만 개발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대만의 시조이자 개국 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화외지지(化外之地) 정씨왕조의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는 대만에 대만부, 대남현(타이난), 고웅현(까오슝), 가의현(쟈이)를 설치하고 복건성 아래에 편입했다. 하지만 대만은 어디까지나 변방이었다. 청나라 황실에게 있어서 대만은 황제의 교화 바깥의 땅(화외지지化外之地)였고, 대만에 정착한 중국인과 대만 원주민도 교화 바깥의 백성(화외지민化外之民)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중국인들은 끊임없이 대만으로 건너갔고, 19세기가 되면 그 이전에는 사실상 대만섬 전역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 (이전에는 대만섬 남쪽에 주로 살았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과 대만 원주민들의 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만인이라 불리는 한족 그룹이 만들어졌다. 원주민들도 이렇게 한화된 대만 원주민을 평보족(平埔族), 평지에 사는 사람들이라 불렀다. 1839년, 아편전쟁이 시작되면서 청나라 내부의 갈등과 모순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이후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여러 열강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대만에도 드나들게 되었다. 청나라 측에서도 대만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뒤늦게 인식하고 1885년, 대만을 복건성에서 분리해 대만성을 만들고 대만을 적극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진다. 여러 신료들은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하건 협상을 벌이건 우리끼리 알아서 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고종이 강력하게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톈진조약의 조선에 청나라가 출병할 경우 일본도 자동출병해야 한다는 조항에 따라 일본군도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청일전쟁의 시작인 것이다. 결과 역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배하게 되었다. 결국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이 대만 통치를 시작한다. 대만총독부 1895년, 대만에 살던 사람들은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대만민주국을 건립했다. 이때 일본군과 벌인 일련의 전쟁을 을미전쟁(乙未戰爭)이라 부른다. 하지만 대만민주국은 우리가 예상하듯이 패배하고 말았고, 1896년이 되면 일본이 완전히 대만을 장악하고 통치하기 시작한다. 일본에 대한 대만 내부의 여러 활동은 조선과 꼭 닮아 있다. 친일파도 있고 독립세력도 있으며 이들이 좌우로 나뉘어 싸움을 벌인 것도 똑 닮았고, 식민지 후기에 황국신민화 정책이 벌어진 것도 똑같다. 한가지 다른 점은 일본이 싫으면 언제든지 대륙으로 넘어가 생활을 하거나 일본과 싸울 준비를 하는 한족의 입장과 일본이 싫어도 이 땅을 떠날 수 없는 원주민의 입장, 이 두 가지 입장이 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기억했으면 하는 두 가지 무장 투쟁 사건이 있다. 하나는 1915년에 벌어진 시라이안(西来庵事件)이다. 이 사건에서 대만인 14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하나는 1930년 원주민 세디크족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인 우서 사건(霧社事件)이다. 한국에는 막연하게 대만이 친일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마치 독립 운동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인터넷 검색만 좀 해봐도 다 알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소위 전문가 딱지를 붙이고 나온 사람들이 너무 성의 없이 떠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시라이얀 사건을 주도한 위칭팡余淸芳의 사진. 일본인들과의 경제적 차별로 인해 벌어진 무장봉기였다.) (다음 화에 계속)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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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이목이 쏠린 2024 대만 선거
2024년 첫 선거이자 대만을 너머 중미전으로도 다뤄지던, 대만 제16대 총통 선거가 1월 13일 치뤄졌다. 중앙선거위원회에 따르면 각 후보 득표수(득표율)는 다음과 같다. 라이칭더(頼清徳): 558만 6019표(40.05%), 허요우이(侯友宜) : 467만 1021표(33.49%), 커원저(柯文哲)  : 367만 466표(26.46%).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 라이칭더(頼清徳, 64)가 총통으로 당선되면서 중국, 미국, 한국 등 주변 나라가 오히려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한국 역시 대만 선거결과가  한국에 끼칠 경제적 정치적 영향 등을 분석하는 글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대만에게 이번 선거는 어떤 의미였을까  대만에서 직접선거가 치뤄진 역사는 30년 정도밖에 안 된 최근의 일이다.  4년 중임제에 8년 주기로, 민진당의 차이잉원이 8년간 대만 첫 여성 총통으로 활동한 뒤, 또 다시 민진당의 라이칭더가 16대 총통으로 당선되면서 8년 주기로 번갈아 집권하던 당교체는 희석되었다.  1. '친중이냐 친미냐’,라기 보다 ‘민주주의를 지킬 것인가 잃을 것인가’의 문제  대부분 친중의 국민당, 친미의 민진당의 대결 구도에, 새로 등장한 중도 성향의 대만민중당, 세 당의 승부로 보았다.  국민당은 중국과 협력하여 평화를 지킬 것을 표방했고, 민진당은 독립국가로서의 중국과의 분리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또 대만민중당은 현재 체제(양안)를 유지하는 것을 주장했다. 핵심이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모아져 있었다. 그러나 좀더 주의깊게 살펴보면 대만인들에게 더 중요한 사안은 ‘민주주의를 지켜갈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대만에서 중국에 대한 반감이 거세진 것은, 중국 정부의 경제적 정치적 압박 탓이 크다. 우선 홍콩 사태와 관련해서 중국 정부의 폭력적 대응을 본 대만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생겨났다. 중국 정부의 한층 강화된 통제 검열과 시진핑 주석의 일당 독재체제는 과거 역사로 회기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것은 곧 대만 민중들이 힘들게 얻어낸 자유민주주의를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을 낳았다.    2. 민중당 커원저 후보로 간 제 3의 표심, 선거를 판가름하다  대만인들은 왜 민진당의 라이칭더 총통 당선을 선택했을까. 앞선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이 타이완 정체성을 주장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이루었고, 경제적으로도 발전한 점, 또 코로나19에 대한 적절한 대응 등도 대만인들이 언급하는 주요한 요인들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이번 선거의 결과를 좌우한 것으로 꼽히는 부분이, 대만민중당(이하 민중당)으로 분산된 표심이란 사실이다. 국민당과 민중당의 야권 단일화가 실패하면서 국민당을 지지하거나 민진당을 지지하던 표심 중 적잖은 수가 민중당으로 향했다. 이들은 대부분 젊은 층으로, TV나 현수막, 집회연설 등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국민당과 민진당보다, 인터넷 SNS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내세운 커원저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또한 크게 변화하지 않는 현상 유지에 좀더 매력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젊은층은 커원저 후보가 총통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민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데에 의의를 뒀다고 말한다.  특히 선거 막판에 중국 정부의 전쟁 도발 위협과 국민당 총통이었던 마잉지오우(馬英九)의 “나는 시진핑 주석을 믿는다.”는 발언은 민중의 표심이 민진당으로 향하게 역효과를 냈다.  3. 입법의원 의석수로 드러난 표심 - 여러 당이 공존하는 민주주의를 원하다    대만 선거는 총통 부총통 선거 뿐 아니라 입법의원 선거도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민진당이 과반수 이상의 의석수를 점하지 못했다는 것, 근소한 차이로 국민당이 앞서고 소수 정당들이 늘어나, 여소야대의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민진당 지지자들로서는 아쉬움을 표하긴 하지만, 국민당이나 민중당 지지자들은 국가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데에 안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입법의원 선거 결과 역시 대만 민중들이 바란 것은, 급진적인 독립이나 중국으로의 치우침이 아닌 현상 유지와 다양한 의견이 공존할 수 있는 민주주의 자체였다.  한국에게 대만 선거는 왜 중요했나 경제적인 부분에서 대만 선거가 중요했던 것은.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과 경쟁하고 있는 TSMC가 대만 주력 반도체 사업이기 때문이다. 생성형 인공지능 시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반도체 경쟁은, 4차 산업의 주요 격전지다. 한국에서는 삼성의 반사이익을 계산하기도 했지만, 민진당의 라이칭더 후보의 당선과 여소야대 국면은 대만을 둘러싼 반도체 경쟁에 큰 변화를 끌어당길지는 의문이다. 다만 대만의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은 확실히 더 부각되었고, TSMC 등 대만 경제와 AI시장과의 관계가 전 세계 AI 시장과 연관되어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의 특이점이 있다.  정치적 부분에서는 역시나 중국과 미국간의 갈등이 대만 선거에, 또한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염려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라이칭더의 당선으로 한국, 미국, 대만, 일본이 협력구도를 유지하는 현재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앞으로 중국정부가 대만을 상대로 어떤 정치적 경제적 제재나 압박을 가할지가 주목된다. 이미 중국정부는 이번 선거로 대만 민심이 중국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으로 파악하고 내부 진단에 나섰다.  그럼에도 대만인들은 의연하다. 대만이 민주주의를 잘 구현하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이번 선거를 통해 더 확고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가 폭력을 내세운 방식으로는 대만 민심을 되돌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대만이 급진적으로 중국과 척을 지고 독립국가로 가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두 나라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긴장과 묘한 협력관계와 더불어, 국제 사회 역시 대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중국 정부에 대한 눈치 보기로 적당한 거리두기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한국의 총선이다. 한국 총선에서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지가 2024년 새로운 국제적 이슈로 부상할 것이고,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시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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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함께 평화’ 집담회 : 함께 상상한 평화의 미래
캠페이너들이 같은 기간동안 동일한 주제로 사회 이슈에 대한 토론을 만드는 ‘함께 프로젝트’ 지난 11월에는 ‘함께 평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프로젝트를 정리하며 프로젝트에 참여한 캠페이너와 평화에 관심 있는 시민들이 집담회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먼저, 함께 평화에 참여한 캠페이너들이 본인의 글을 직접 소개했습니다.  “나 하나 목소리낸다고 변하는 게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 평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전부터 일상생활에서부터 평화를 자꾸 이야기하고 평화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평화의 분위기에서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작은 실천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팔레스타인이라고 명명되는 사태들에 너무 많은 왜곡, 뒤틀림이 섞여있는 듯 하다. 그런데 그 안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장은 어땠을까? 모두가 나름의 판단의 근거가 있겠고 그로 인해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만. 팔레스타인 내부인의 입장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함께 평화 페이지’에서 확인해보세요! 🧊아이스브레이킹 하나의 주제로 모였다 할지라도 각자의 배경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마련인데요. 먼저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있을만한 질문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캠페인즈 시즌이슈 시리즈인 ‘국제 분쟁,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에 답하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평화를 상상하는 질문들 더 진솔하고 다른 곳에서는 편하게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위해 질문을 기반으로 집담회가 진행되었는데요. 그 중 몇 가지 질문과 참가자들의 발언을 공개합니다.  1) 미디어가 국제 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요?  “팔레스타인 입장에서의 보도는 얼마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디어는 좀 더 부추기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의 인권과 존엄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미디어 뒤에 있는 원동력은 현장에서 70여 년동안 이어진 사건 그 자체라고 봐야 합니다.”  “미디어의 폭력성에 우리가 우려를 많이 하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알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거든요.” 2) 평화는 왜 중요할까요?  “먼저 ‘평화'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합니다. 누군가 ‘하마스가 테러를 하지 않았다면 평화로웠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런데 이스라엘이 평화롭지 않게 되니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온 상황이죠.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은 그동안 본인들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요? 말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듣지 않은 우리 탓인 거죠. 우리도 방치하는 데 일조했기에 하마스가 테러를 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평화가 뭘까?'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화, 중요하지', '평화 필요한 거야'라고 생각은 해도 평화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동의를 하는데, 평화가 뭔지에 대해 정의하고 합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권도 그렇고 평화도 그렇고 그 개념이 뭔지를 아는 것도 필요할 수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언제 이야기하는지, 어떤 사람이 얘기하고 있는지, 누구에게 필요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의 평화이냐'가 중요합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몰랐던 것을 빼앗겼을 때 그리고 결핍이 생겼을 때에 비로소 평화에 대해 고민하게 되거든요.” “평화가 모두의 평화라면 나는 어떤 윤리적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남의 나라 일에 대해 가장 실감하는 방법은 그 나라 친구를 만드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지순례도 많이 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팔레스타인 친구는 얼마나 되나요? 이런 것들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결국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힘을 위임한 정부가 역할입니다. 한국 정부는 교묘하게 계속 결의안에서 기권을 해왔는데요. 이스라엘의 잘못된 점령 정책에서 적극적으로 플레이를 해온 게 미국과 한국입니다. 국가는 가만히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화를 이어내는 힘은 실감에서 오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믿는 인권과 존엄과 평화를 옳다고 믿는 힘에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부를 압박하고 밀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회고 “중,고등학교 때 팔레스타인에 대해 배운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는 20년 가까이 지나면서 최근까지 이 주제에 대해 돌아보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누구의 평화인가?' '누구의 인권인가?' 이야기를 나눌 때 결핍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화나 생각을 나누는 게 필요했다는 생각을 해왔는데요. 잘 온 것 같아요.” 대화의 장이 끊이지 않고,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누는 행동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캠페인즈는 디지털 시민광장으로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더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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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 2023년 11월 29일, 헨리 키신저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세. 2 헨리 알프레드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는 1923년 5월 27일에 독일에서 태어나 1938년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3년에 완전히 미국으로 귀화한 그는 군인이 되어 독일어 통역 업무를 맡기도 했다. 뉴욕시립대학 시티 칼리지 경영-행정관리학부에 입학했다가 2차대전을 맞아 군대에 간 키신저는 1946년에 다시 하버드에 입학, 1950년에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의 지도교수는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얜델 엘리엇(William Yandell Elliott, 1896~1979)이었고, 윌리엄 교수의 지도 하에 1952년에 19세기 유럽 외교사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54년에는 빈 체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빈 체제란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었다가 완전히 패배한 후, 메테르니히 등을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이 국경, 국제질서 등을 전부 나폴레옹 이전으로 되돌리기로 한 것을 말한다. 그는 박사 논문에서 나폴레옹 이후 백년 동안 유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나폴레옹과 프랑스에 대해 다른 유럽 국가들이 징벌을 내리지 않고, 힘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에 중점을 주었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한국의 많은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빈 체제에 대해 서술할 때 나폴레옹이 퍼트린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저버리고 메트리니히 등이 중심이 되어 나폴레옹 이전의 군주제로 돌아가려고 했다고 서술하며 그 보수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키신저를 빈 체제를 균형의 회복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박사 과정을 졸업한 후에는 하버드 대학 정치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외교 정책에 대해 다양한 발언을 쏟아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핵’에 대한 이야기다. 키신저는 아이젠하워 정권의 핵전략은 ‘대량 보복 전략’을 비판하면서 핵무기와 기존의 무기를 단계적으로 운용하면서 무슨 전쟁이든 일단 최대한 안 일어나게 하되,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는 제한전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케네디 정권의 고문이 되어 외교 정책에 잠시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확실히 정치인이 된 것은 닉슨 대통령 시절이다. 3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 대통령후보 예비선거에 입후보한 넬슨 록펠러(Nelson Aldrich Rockefeller, 1908~1979)의 외교정책 고문이 되었다. 1964년, 1968년 대선에서도 그를 지원하면서 록펠러 가문과 연을 맺게 되었다. 록펠러가 선거에서 완전히 패한 후에는 1968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리차드 닉슨에게 직접 스카우트되어 국가안보문제 담당 보좌관이 되어 정권의 핵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전까지 미국의 외교정책은 국무장관이 결정권을 쥐고 있었으나, 닉슨 정권 때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외교정책의 결정권을 쥐게 되었다. 키신저는 이에 앞서 「관료와 정책입안」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데, 미국 외교의 기능 강화를 위해서는 유명무실한 존재인 NSC가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키신저는 젊은 외교관, 장교, 국제정치학자들을 스카웃해 NSC 특별 보좌관에 임명해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국무성 등과 권력투쟁을 벌여 닉슨 정권 하에서 외교정책의 결정권을 완전히 독점하게 되었는데, 국무장관을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배제시킬 정도였다. 이 시기 미국의 대사, 주재 군인, CIA 지국장 등은 NSC, 어떻게 보면 키신저의 수족들이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훗날 그가 이룬 최대 업적인 미중교류 개시 역시도 키신저가 동남아시아와 유럽의 주재군인, CIA 지국장들을 활용해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을 했으며 그 모든 과정에서 국무장관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고 한다. 4 1971년,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의 밀사 자격으로 중국에 극비 방문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도 회담을 진행하며 중국과의 화해와 외교 관계 수립을 도모했고, 이와 동시에 중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교섭 카드로 삼아 북베트남을 만나 베트남 전쟁 종전 교섭을 하고, 소련과도 제1차 전략무기제한조약(SALT1)을 체결했다. 이런 일련의 정책을 데탕트라고도 부른다. 이 시기,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을 하고 있었다(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키신저는 소련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중국과 함께 파키스탄을 지원하였다. 파키스탄은 중국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를 중개하는 역할을 맡았고, 키신저는 이에 대한 대가로 동 파키스탄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과 강간을 외교적으로 엄호해 주었다. 동 파키스탄은 훗날 독립해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1973년에는 마오쩌똥(毛澤東) 주석을 만나 미국, 일본, 중국, 파키스탄, 이란, 튀르키예, 서유럽이 함께 소련을 포위하는 포위망을 구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키신저가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중국, 소련과 관계를 맺으며 또 해결한 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 종전이다. 키신저는 중국,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북베트남이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고 압박을 했고, 동시에 대규모 폭격과 봉쇄라는 군사적 압박을 진행해 결국 베트남과 평화적인(?) 종전을 타협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키신저는 북베트남의 보급선 역할을 하던 라오스, 캄보디아에도 비밀리에 폭격을 지시해 최대 수십 만명으로 추산되는 사상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제4처 중동전쟁 후에는 중동지역을 돌아다니며 이슬람권 국가들과 이스라엘을 조정하기 위한 셔틀 외교를했다. 1974년에는 아랍의 맹주였던 이집트의 사다트 정권을 소련과 분리시키고 미국편으로 만들기 위해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했고, 사우디 아라비아와는 원유를 달러로 결제하기로 약속해 미국의 자원 공급을 원활히 하면서 사우디 아라비아에는 안전 보장을 제공했다(워싱턴-리야드 밀약). 1973년. 키신저는 국무장관이 되어 포드 정권이 퇴진할 때까지 미국의 외교를 장악했다. 이 시기, 키신저의 지휘 하에 있던 NSC에서는 [국가안전보장과제각서 200(National Security Study Memorandum 200)]이라는 것을 작성했는데 이를 흔히 키신저 리포트라고도 부른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이렇다.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는 인구가 증가하는 나라의 정권의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이는 미국의 불안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개발도상국에 대해 인구를 억제하는 의학적, 정치적 개발원조를 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보고서는 1989년에 기밀이 해제되었다. 5 1977년,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콜롬비아 대학 교수 자리를 제의 받았지만 학생들의 격한 반대로 취임하지 못했다.  그 후에는 조지타운대학 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 가서 자신이 공직에 있었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1982년, 키신저 어소시에이트라는 국제 컨설팅 회사를 설립해 주로 중국 대상 비즈니스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자문을 해주는 일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큰 부를 얻었다. 그 이후로도 그는 수많은 기업은 물론 트럼프 정권에 이르기까지 외교/무역 관련 자문을 계속했다. 2007년에는 「핵무기 없는 세계(A World Free of Nuclear Weapons)」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의 내용은 핵무기는 더 이상 전쟁 억제가 불가능하니 미국 정부는 핵무기를 없애는 게 낫다는 이야기였다. 이란, 북한의 핵실험이 화제가 되던 당시, 이 논문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19년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의식을 초월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며, 전쟁이나 분쟁에서 인공지능을 이용해 전쟁을 하는 게임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코로나로 인한 건강 문제는 금방 해결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국제 장벽이 생겨날 우려가 있으며 이런 장벽이 세워지면 앞으로 몇 세대 동안 이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6 그의 외교정책을 흔히 현실주의라 평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로지 미국의 이익과 미국이 맹주가 된 상태에서의 국제 안정을 꾀했기 때문이다. 그가 박사논문에서 빈 체제를 높이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의 현실주의는 강대국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뿐이었다. 말로는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실상을 잔혹한 독재자들을 지원해주고 있었던 미국 외교의 한 측면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최근에는 결정은 닉슨이 한 것이고 키신저는 ‘사신’에 불과했다는 연구도 있다.) 그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공산국가인 중국을 제3세계라 부르며 마치 미-소-중 삼국이 강대국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적중했다. 중화민국의 UN 탈퇴와 중화인민공화국이 UN 상임이사국이 되는 데에도 그의 활약이 있었다. 현재 중국을 만드는데에 어느 정도 키신저의 공이 있다고도 하겠다. 그는 미국을 위해 캄보디아 폭격을 감행해 수십 만을 죽였고, 1973년에는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인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리기 위해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지원해 대통령궁을 폭격하게 만들었다. 칠레 사람들은 피노체트 정권의 폭력적 정치 하에서 고통을 받았는데 1989년에 미국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피노체트를 바로 버렸다. 1975년에는 동티모르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얻어냈는데 동티모르 해방전선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점령하는 걸 묵인했다. 인도네시아에 의한 동티모르인 학살을 묵인한 것도 그였다. 7 키신저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고, 그의 현실주의적 정책을 배워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 그의 전쟁범죄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강약약강처럼 보이는 것은 나 뿐일까? 이렇게 또 한 시대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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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분쟁에서 한국시민들이 잊지 말아야할 국제인권기준
국제분쟁에서 한국시민들이 잊지 말아야 할  국제인권기준 국제민주연대 나현필     분쟁과 평화, 그리고 한국 한반도에서 전쟁이 멈춘 지 70년이 지났습니다. 북한과의 무력충돌과 갈등도 계속되고 있지만, 적어도 한국전쟁의 기억은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북한이 발사한 비행발사체에 대해 서울시가 경보문자를 보냈을 때도,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놀라 우리만큼 침착함을 유지했습니다. 외국에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상 섬나라나 다름없는 한국에게 이웃국가의 분쟁은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한국 군대가 파견되어 본격 전투에 참여한 것도 베트남 전쟁이 마지막이니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분쟁 뉴스들이 남의 일로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오랜 기간 한국에선 국제민주연대와 같은 일부 시민단체들이 분쟁을 일으킨 당사국 대사관 앞 등에서 항의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활동의 전부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이 나서서 연대와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과의 교류도 늘어나면서 국제사회의 분쟁문제에 직접 참여하고 행동하는 시민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국제민주연대가 2022년 6월부터 12월까지 미얀마 군부와 협력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정부를 규탄하기 진행한 러시아 대사관 앞 1인시위) 홍콩, 미얀마, 우크라니아, 팔레스타인 2019년에 있었던 홍콩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는 홍콩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국에서도 시민사회 뿐만 아니라 대학생들과 일반시민들도 홍콩 시위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다른 국가의 문제에 특정 시민단체들이 아닌 광범위한 한국 시민들의 행동이 있었던 것은 2019년 홍콩시위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문제는 한국에 있던 중국유학생들이 대학내에 있던 홍콩지지 대자보를 훼손하고, 중국 영사관이 홍콩 관련 행사에 압력을 행사하는 모습도 나타난 것입니다. 즉, 그 전까지는 두드러지지 않던 국제분쟁의 갈등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비해 2021년 2월, 미얀마 군부쿠데타가 일어난 후에 한국에서는 당시 코로나19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가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시민사회는 물론, 국회와 일반시민들도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했고, 그 열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홍콩과 마찬가지로 미얀마에 대해서도 한국에서는 이념과 지역을 넘어선 광범위한 지지가 이뤄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홍콩과 미얀마 시민들과 한국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많은 행동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우크라이나는 조금 양상이 다릅니다. 2022년 3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한국 시민사회는 러시아 침공을 비판하고 있지만,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러시아이 부당한 침공에 맞서 싸울 무기를 한국이 제공해 주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즉각적인 휴전보다 러시아가 현재 침공 후 점령한 영토를 반환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한국 시민들의 실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쟁의 여파로 물가가 올랐고 이로 인해 우리의 삶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한국시민들의 관심을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이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워낙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과 인권침해는 계속되어왔지만, 이번처럼 단기간에 만명이 넘는 민간인이 희생된 예는 드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가 광범위하게 이뤄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국제인권기준준수를 위해 노력할 이유 사실, 왜 어떤 분쟁에는 많은 한국시민들이 지지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어떤 분쟁에는 그렇지 못한지는 큰 고민입니다. 전쟁과 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은 존재하지만 한국에선 고통 받는 이들보다 누구의 편인가가 더 관심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미국이 가해자인지, 중국과 러시아가 가해자인지는 중요한 문제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가해자를 찾는 동안 피해자들의 고통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실 누가 가해자인지도 우리는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러한 국제사화에서 발생하는 분쟁들이 결국 우리의 안전도 위협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급망 문제가 아니더라도 최근 국제사회 분쟁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평화를 보장하는 체제로서의 UN이 제 역할 못하는 것과 함께 반인도적 전쟁범죄가 횡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핵무기 사용까지 거론되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분쟁의 확산과 심화는 한반도의 전쟁위협도 동시에 높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전쟁위협을 넘어 기후위기를 포함하여 지구촌 공동의 노력이 필요한 이 시대에 각자 도생의 아비규환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 전쟁과 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한국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금에 참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을 위해 한국시민사회는 긴급모금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미얀마 난민을 위해 식량생산 사업을 하는 해외주민운동연대라는 한국 단체도 있습니다. 두 곳 모두 오랜 기간 팔레스타인과 미얀마를 위해 활동해왔던 단체가 주축이 되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시민들의 소중한 후원이 직접 현지의 피해자들과 주민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경험과 현지에서의 신뢰가 쌓여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이러한 한국 시민단체들의 역량이 이런 분쟁상황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 곳 말고도 세계 곳곳에서 분쟁지역의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많은 시민단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러한 단체들의 활동을 후원하고 지원하는 것에 여전히 부족합니다. 하지만 꼭 한국 시민단체들을 지원해 달라는 뜻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주민들을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무능력하다고 비판 받는 UN이지만 앞서 언급했던 여러 분쟁상황에서 UN의 인권전문가들이 내놓는 입장은 명확합니다. 우리에겐 오랜 기간 인류가 함께 고민하고 논의한 국제인권기준이 있고 그것을 위반한다면 그 누구도 비판 받고 처벌 받아야 합니다. 한국의 이주민들과 한국시민사회가 요구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국제인권기준을 준수하라! 국제인권기준을 위반한 국가와 집단을 국제사회가 단죄하라! 한국시민들이 국제인권기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정부와 기업들이 이 기준을 지키도록 더 많은 목소리를 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우리 시민들의 목소리가 법과 제도로 실현될 때, 우리는 더 많은 일들을 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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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 죽음의 불꽃놀이로 낭비하는 골든타임
얼마 전 DX KOREA 2022 (대한민국 방위산업전 2022) 저항 평화행동으로 재판을 받은 평화 활동가 8명이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전시된 탱크 위에서 바이올린과 기타를 연주한 그들에게 사법당국은 총 1,700만 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주변인들에게 그들의 탄원을 애원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의 이 부정의하고 기울어진 판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긴 한 걸까?' 이런 생각을 매일같이 하며 점점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나는 언젠가부터 "불꽃놀이"를 직접 보거나 그 단어를 듣게 되면 묘한 기분을 느낀다. 아마도 불꽃놀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알게 된 후, 불꽃놀이가 환경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일 것이다. 사람들은 불꽃놀이를 낭만적인 이벤트라고 여기는 것 같다. 서울 여의도에서 매년 열리는 서울세계불꽃축제를 사랑하는 연인 혹은 가족, 친구들과 함께 '명당'에서 보기 위해 일찍이 자리 경쟁을 시작하기도 하니까. 불꽃놀이를 그저 낭만적인 "놀이"로 여기는 비약을 저지르기 전에 짚어야 할 사실이 있을 것이다. 폭죽과 폭약의 차이점은 그저 사람을 향하느냐 공중을 향하느냐의 차이다. 불꽃놀이는 화약 제조법을 연구하던 과정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시작되었다. 군사용 화약이 정교해짐에 따라 불꽃놀이 기술도 발달되었던 것이다. 서울세계불꽃축제는 대기업 한화에서 주최한다. 시민들의 일상을 위한다는, 겉보기에 언제나 좋은 대의명분을 앞세운다. 전쟁에서 대의명분이 없었던 적 없듯이. 서울세계불꽃축제는 한화가 주력하는 정교한 화약 제조기술을 홍보하는 박람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이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불꽃놀이를 보며 의식해야 할 것이다. 전쟁의 비윤리성을 이야기하자면 아마 시민들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평화를 외치며 한국이 무기 수출 및 군사훈련을 중단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온갖 감투가 다 씐다. 빨갱이, 종북좌파 등 흔히 포털 댓글 창만 봐도 나오는 그런 단어들 말이다. 그들의 논리는 더 많은 무기 확보와 군사 훈련 및 동맹 즉 "힘"만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지켜주는 평화의 전제조건이라 한다. 정말 그럴까?  탄소중립을 외치는 시대에 군대는 그야말로 숨은 기후 악당이다. 글로벌 책임을 위한 과학자(SGR)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군사활동에서 비롯된 탄소 배출량은 전체의 약 5.5%를 차지한다. 군사 부문이 항공·해운·철도 부문 배출량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 또한 전략폭격기 연비는 승용차의 100분의 1 수준이고, 소비하는 연료도 엄청나다. 전략폭격기의 1시간 소비 연료량이 자동차 1대의 7년 사용량에 맞먹는다고 한다.  하나 이 수치는 매우 보수적이고 비공식적인 추정치일 것이다. 군사 부문의 탄소 배출량 보고 의무는 모든 국가가 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일부 선진국에서 공개가 되더라도 "일부"만을 공개할 뿐이다. 1997년 체결된 교토의정서에는 미국의 반대로 인해 탄소 배출량 보고 의무 중 군사 부문이 제외되었고, 2015년이 돼서야 선진국만 배출량 보고 의무를 가진 상태다. 또 배출량 보고 의무만 질 뿐 탄소 배출량 절감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국가 안보, 국방과 직결된다는 이유로 매우 축소 보고되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숨은 기후 악당임을 직관적으로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 위기가 우리 평화를 위협한다는 것은 이제 보편적이고 자명한 "사실"로서 받아들여지는데, 왜 그 기후 위기를 부추기는 군비 경쟁과 전쟁을 하기 위한 군사 훈련은 우리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에 한치의 의심도 보태지 않는가? 물가 상승이 연쇄적으로 이뤄지듯이 하나의 국가가 때아닌 이념 전쟁을 자초하며 안보를 강조하고 군사력을 강화할수록 주변국의 군비 경쟁은 심화되고 군사적 긴장감은 고조된다. 누군가가 나를 언제 찌를지 몰라 무장하고 다니는 상태를 우리는 평화로운 상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거대한 농담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의심의 미덕을 지녀야 한다. 힘의 논리에 의해 쓰인 수많은 글 속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떠야 한다. 세계 곳곳에서 죽음의 불꽃놀이가 터지고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우리의 통각은 점점 마비되며 그렇게 골든타임은 지나가고 있다는 것도 의식해야만 한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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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모여
영화 ‘잇다,팔레스타인(Stitching Palestine)’은 전통 자수를 놓는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 여성 12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점령에 의해 삶터를 떠날 수밖에 없고, 팔레스타인에 정주할 수 없는 이들의 삶이 천에 수를 놓듯 영화에 새겨진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며 전통의상인 토부와 쿠피예를 입고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행위는 팔레스타인 문화를 기억하기 위한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국내에서도 팔레스타인의 희생자를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한 연대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참여연대 황수영 활동가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은 학살을 멈춰라. 팔레스타인에 자유와 평화를! : 모든 희생자를 애도하는 신발들의 시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신발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팔레스타인에 연대하기 위한 크고 작은 움직임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팔레스타인에서 1달 동안 1만 개 넘는 우주가 사라졌다 지난 11월 17일(금), 광화문 보신각 광장에 신발 2천 켤레가 놓였다.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이하 팔레스타인 긴급행동)은 가자와 서안 지구에서 한 달간 희생된 1만 명 넘는 이들을 애도하고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중단을 촉구하고자 <모든 희생자를 애도하는 신발들의 시위>를 개최했다. 광장에 배치된 어린이 및 유아 신발부터 운동화, 장화, 구두 등 다양한 신발은 약 일주일 동안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바라며 시민들이 기증해 준 것들이다. 애초에 목표로 했던 1천 켤레를 넘어 3천 켤레의 신발이 사무실에 도착했고, 사람들의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모여 신발 시위는 시작되었다.  신발 2천 켤레는 단순히 팔레스타인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을 넘어, 공습으로 희생된 사람 한 명 한 명을 조명하고자 했다. 매일 전 세계로 타전되는 비현실적인 사망자 통계가 아닌, 이스라엘의 공습이 없었다면 누군가의 가족이나 지인, 친근한 이웃으로 살아갔을 사람들을 호명하는 비폭력 시위였다. 신발 시위가 있던 날 광장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애도와 평화의 마음을 나눠주었다. 매서운 추위에도 아침 일찍부터 신발 설치를 함께한 활동가들, 신발 시위를 찬찬히 둘러보다 사진을 찍거나 꽃다발을 신발 위에 내려놓고 가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참여한 시민들이 적은 애도와 연대의 메시지가 쌓여갔고 금세 보신각 광장을 팔레스타인에서 사라진 1만 개의 우주를 기억하려는 움직임으로 가득 메웠다. 신발 시위가 저물어 가는 ‘추모의 밤’ 시간에는 "태어난 국가에 따라 평화를 누릴 수 있는지 나뉘는 것이 부당하다"는 청소년과 희생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떠올리며 시를 낭독하는 시인의 발언을 들을 수 있었다. ‘추모의 밤’에 참여한 시민들은 실제 팔레스타인의 희생자 수는 신발 2천 켤레가 상징하는 2천 명의 약 7배에 달한다는 현실을 떠올리며 큰 목소리로 집단학살 중단과 즉각 휴전을 촉구했다. 전 세계의 평화를 향한 외침이 전달되었을까,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측이 나흘간의 임시 휴전에 합의했다. 공습이 시작된 이후 46일 만에 이루어진 이 조치를 통해 양측은 인질과 수감자를 풀어주고 가자 지구에 연료, 물 등 인도주의적 지원을 허용하기로 했다. 국제사회의 잇따른 환영 성명에도 이스라엘은 ‘일시적인 공습 중단’으로 단정 짓고, 향후 계속 공습을 진행할 예정이라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인질 석방을 위한 ‘임시 휴전’ 상태임을 감안할 때 아직은 상황을 주시해야할 때다.  사라진 우주를 기억하기 위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 신발 시위를 제안한 황수영 활동가는 “팔레스타인을 위해 뭐라도 해야겠어서,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어서” 기획서를 순식간에 써 내려갔다고 한다. 매일 언론으로 타전되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공습 소식, 병원 바닥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주민과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 사진을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몫이 없는 이들의 곁에 서서 연대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대안을 찾는 게 직업인 활동가로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던 터라 동료의 제안이 반가웠고 감사했다. 팔레스타인 긴급행동에서 신발 기증을 위한 웹 포스터 홍보를 시작한 뒤, 참여연대 사무실로 택배 박스가 ‘쏟아졌다’. 신발이 가득 든 큰 상자부터 한 켤레가 든 작은 쇼핑백까지 매일 같이 사무실로 신발이 든 상자가 배송되었다. 많은 물량에 택배 노동자분께서 사무실로 전화를 주시기도 하고 (“1층으로 내려와 주세요. 택배 20박스가 왔어요.”), 토요일 아침을 ‘택배 40박스를 사무실 2층에 두었다’는 문자로 시작하기도 했다. (참여연대 사무실이 위치한 동네를 담당하는 택배 노동자분과의 새로운 인연!) 뿐만 아니라 하루 평균 10명 이상이 사무실을 방문해서 신발을 기증했다. 친구들과 신발을 들고 방문한 청소년부터 아이 신발을 들고 찾아온 가족, 신발을 기증하며 당일 시위 현장을 촬영하고 싶다는 청년, 신발이 가득 든 가방을 내려두면서 “도움이 더 필요하면 이야기하라”고 음료수를 건네던 수녀님 등 신발을 매개로 많은 시민과 만날 수 있었다. 매일 저녁, 사무실 지하에서 신발이 담긴 택배 박스를 정리하는 일이 익숙해질 무렵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다들 뭐라도 하고 싶었구나. 팔레스타인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고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상처 난 마음이 모여 만드는 변화 세계 저편에서 일어나는 집단학살의 현장을 보며 ‘뭐라도 해야겠다’ 결심하는 그 마음은 힘이 세다. 전화를 걸어 신발 기증에 관해 조심스레 묻고, 사무실 입구에서 쭈뼛쭈뼛 어색한 얼굴로 서성이던, 두 손 모아 신발을 건네며 꼭 감사 인사를 덧붙이는 사람들. 신발을 부치는 택배에 편지와 작은 선물을 담아 보내던 이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파커J.파머는 책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지 강조하며 마음은 감정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음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매개”이고, “오로지 마음만이 이해할 수 있고 마음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경험”이야말로 우리를 생각하는 대로 살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고 설파한다. 그 마음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고 흩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깨지고 열리는 과정에서 모순을 끌어안고 다양성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했다.   자칫 추상적일 수 있는 이 이야기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떠올려 본다. 전 세계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현장을 목도하며 인간성 상실의 위기를 느끼는 현재, ‘뭐라도 해야겠다’는 소박하고 단단한 마음이야말로 세계시민으로서 함께 살고자 하는 ‘열려있는 마음’이라고 확신한다.   신발 시위 때 사용할 신발 2천 켤레를 짝 맞춰 포장 이사 박스에 정리하는 이 단순한 일은 시민들의 마음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신발 시위가 정말 전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 않냐며 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혹자에게는 시위를 통해 외치는 “학살을 멈춰라”, “즉각 휴전하라” 같은 촉구하는 언어가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역만리에서 우리가 요구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냐는 냉소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되새겨 본다. 매 순간 이어지는 공습에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희생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마음을 모으고 ‘폭력을 멈춰라!’ 큰 소리로 외치는 일이다. 세상은 뭐라도 하지 않으면 못 참겠어서,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깨지고 상처 난 마음이 모여 변화시킬 수 있다. 팔레스타인의 자유와 존엄을 되찾는 날까지 함께 걸어주시라. * 이 글은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이지원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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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 군사주의를 넘어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 실천으로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 시리아, 수단… 세계 각지에서 수일, 수개월, 수년째 무력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몇줄의 기사와 숫자로 나열되는 피해 규모, 사상자 기록을 읽다보면 가늠조차 어려운 현실이 아찔하고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피스모모가 번역출판한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2023 연감: 군비, 군축, 국제안보>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무력분쟁을 경험한 국가는 총 56개국으로 2021년보다 5개 증가”했으며 “이 무력분쟁 중 세 개(우크라이나, 미얀마, 나이지리아)는 확실히 10,000명 이상의 분쟁 관련 사망자가 포함된 주요 무력분쟁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합니다.  무력 충돌과 전쟁 뒤에는 항상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해 관계와 지난한 역사적 맥락이 놓여 있습니다. 지역마다, 국가마다 발발 원인과 개별 사건은 다를 수 있지만 폭력의 굴레는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합니다. 어린이들은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고, 여성과 노인, 무고한 사람들이 공습 두려움에 떨다 목숨을 잃습니다. 그렇게 다치고 아픈 이들을 어렵게 돌보던 마지막 병원조차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폭격 앞에 잿더미가 됩니다. 이런 현실 앞에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는 매해 전 세계의 군사비 지출을 추적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수치는 8년 연속 증가하여 2022년 약 2조 2400억 달러에 달하며 지난 몇년 중 최고치를 갱신했습니다. 2조 2,400억 달러는 한화 약 2,900조 원이 넘는 돈입니다. 어느 정도 금액인지 대한민국 정부 예산과 비교해보았습니다. 한국 정부의 2023년 총 예산은 638조원 가량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4년 반 동안 한국과 같은 나라가 전국 국가 사업을 운영할 정도의 비용이 전 세계에서 1년 동안 군사비로 쓰였다는 의미입니다. 군비 경쟁은 많은 인명과 자원을 소모하며 반인류적인 피해와 낭비를 초래합니다. 전쟁을 통해 이득을 보는 무기 거래상, 패권 국가, 정치 세력, 자극적이거나 무관심한 일부 언론의 극단성을 지켜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시민에게 질문을 건넵니다. 수십 수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이득과 이념이 정말 존재할 수 있나요? 국제사회가 동시에 모든 무력 분쟁을 멈추고 군사비 지출을 피해 복구, 갈등 중재, 국제협력을 위한 방향으로 새롭게 쓸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마주하게 될까요. 너무 비약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상상인가요? 지구 곳곳에서 매일 폭격과 테러가 발생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이야말로 얼마나 비약적이고 비현실적인지 잠시 멈추어 함께 떠올려보기를 제안합니다.  국제관계와 평화 연구 분야의 이론가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1960년대부터 평화와 폭력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간접적 혹은 구조적 폭력을 넘어서려면 단지 전쟁이나 무력 충돌이 부재한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가 아니라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전쟁의 종식뿐만 아니라, 적극적 평화를 추구함으로써 사회 정의, 평등, 포용적 문화 교류 등 긍정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평화적 협력이 아닌 긴장과 불신을 조성하는 군비 경쟁과 대립에 반대하며, 국제 사회와 개개인이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지속가능한 평화를 모색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함께 읽을 거리 [캠페인즈] 이 전쟁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당신에게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팔레스타인 : 모든 희생자를 애도하는 신발들의 시위 [전쟁없는세상 이로운넷 기고] 전쟁과 무기산업에 저항하라 - 군사적 이분법을 넘어 [피스모모] 2023 시프리 보고서 (SIPRI 연감) 한국어 요약본 피스모모는 매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연감요약(Yearbook Summary) 자료를 번역 출판합니다. '2023년 SIPRI 연감: 군비, 군축, 국제안보'에서 전 세계 군사비 지출, 국제무기 이전, 무기생산, 핵전력, 무력분쟁 및 다자간 평화활동 분야의 독자적인 데이터 및 군비 통제, 평화, 국제 안보 분야의 주요 부문의 최신 분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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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고 자극적인 것은 틀렸다?
잔인하고 자극적인 장면을 담은 사진이나 영상을 통한 재현이 가진 정치적 한계에 대해서는 수잔 손택의 논의가 유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 논의가 짚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종종 생각해 보곤 했다. 그 시작은 서경식이 헨미 요의 소설을 두고 ’울트라 리얼리즘’이라고 규정한 대목을 읽으면서였다. 아무리 말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말하기란, 잔인한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묘사해내며 눈앞에 들이미는 것외에 다른 방도가 있는가? 당신이 외면하는 현실은 이러하다고, 가감없이 노골적인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재현의 한 방식일 수는 없는가? 일전에 발표한 원고에 이런 문제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이태원 참사 직후부터 했던 얘기이지만 자세히 상술해서 공적 자리에서 언급한 건 처음이다. 이태원 참사 당시 업로드된 수많은 영상과 사진들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 비난을 가했다. 자극적인 장면을 아무런 검열없이 버젓이 올리고, 또 그걸 그대로 받아 내보내는 언론의 보도들, 수익을 올리려고 그 영상들을 활용하는 유튜버들… 하지만 그걸 비판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까?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사진과 영상을 내려야 한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참사는 혐오와 부정에 둘러싸여 포위되어 있었고, 그렇다면 오히려, 당신들이 ‘놀다가 죽었다’며 남 일처럼 여기는 장면이 바로 이것이라고, 이 모습을 보고도 그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냐고 물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나아가, 사진과 영상을 비난할수록 참사 현장을 지켜본 이들에게서 목소리를 박탈하는 것 아니었을까. 나는 당시 거의 모든 영상을 다 찾아봤다. 그런 내게도 참사의 장면들은 비현실적이고 불가해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하고 묻기 이전에, 이게 대채 무슨 일이지? 싶은 장면들. 사람들이 뒤엉켜 있고, 사람들을 운반해 아스팔트 이곳저곳에서 CPR을 하고 있고, 그런 와중에 클럽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노랫소리들, 참사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너무나 비현실적인 장면들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 역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이 겪는 상황을 설명할 언어가 없을 때, 그들에게 주어진 언어라곤 그저 카메라를 들어 참사의 순간을 담아 SNS에 업로드하는 것밖에 없지 않았을까. 사실 그 영상과 사진들은 말을 잃은 사람들의 절박한 언어 아니었을까.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보를 찾아 헤매다 보니 지금 내 인스타 계정에는 들여다 보는 게 무서울 정도로 온갖 쇼츠와 사진들이 가득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SNS는 심리전이 벌어지는 뜨거운 전장이 되었던 바있다. 현대의 심리전의 주체는 국가와 군대이며, 이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심리전 전술이 수행된다. 지금 심리전 역량에서조차도 이스라엘이 압도적이다. 애초에 팔레스타인은 ‘국가’조차 아닌 상태이고, 정규군과 게릴라군 사이에서 심리전 역량의 격차는 명백하다. 이스라엘은 외신 기자들을 전장에 동행시키며 옆에서 늘상 인터뷰를 하고, 자신들의 관점을 마치 ‘현장의 이야기’인 것처럼 주조해내고 있다. 한국 언론은 이스라엘 대변인의 브리핑을 장면을 담은 영상을 수도 없이 내보내지만, 하마스든 파타든 팔레스타인 측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온 몸으로 겪고 있는 끔찍한 상황을 영상과 사진으로 담는 것 이외에 과연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근대의 국민국가 체제와 국제법 체계 하에서, 전쟁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치르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근대 전쟁의 핵심적 요소 중 하나로 시민들의 열정과 지지를 지목한 바있다. 근대 전쟁의 성격은 총력전이고, 총력전은 전 국민적 역량과 자원을 동원하는 것이니만큼 시민들의 여론과 정서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핵심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류 최대의 총력전이었던 세계 2차대전에서 본격적인 심리전이 등장해, 적의 사기를 빼앗는 동시에 아군과 시민들의 지지를 구하고자 했다. 이스라엘은 정확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은? 국가기구도 아니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민간인들의 목소리를 심리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재현의 권력’을 박탈당한 존재들의 비명소리일 뿐이다. 극단적인 대항폭력은 보통 재현 권력의 비대칭성에서 온다. 일상적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저질러온 테러와 학살은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아무리 말해도 아무도 듣지 않는 현실. 역설적으로 하마스의 ‘충격적인 공격’만이 사람들에게 들릴 수 있는 목소리였다. (왜 전태일을 비롯해 열사들이 분신을 하고,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에 방화를 했겠나?) 그렇다면 과연 근본적으로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사람들 수백명이 죽어야 그제서야 관심을 기울이는, 바로 나와 당신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고간 가해자들 아닌가. 사람들이 죽고 있다. 이것만큼 명백한 문제가 없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과연 지금 당신에게는 들리고 있는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목소리가 미약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당신이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기 때문인가. 사진과 영상이 아무리 잔인하고 자극적인들 지금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준들 과연 바뀔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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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 '연결'은 평화의 단서가 될 수 있을까
가자지구의 저널리스트가 공습 현장을 영상으로 기록한 모습 2023.10.11. BBC  미국 보수단체가 트럭 전광판에 팔레스타인 지지성명에 참여한 하버드대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띄우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모습 <2023.10.15 연합뉴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23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민간인 제노사이드.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명목으로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발생한 전쟁 사태를 지켜보며 나는 참담함과 무기력을 느낀다. 두 전쟁으로 수 만명의 민간인이 죽어가고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죽음이 조명되고 있다. 한국으로부터 머나먼 땅, 현장을 직접 볼 순 없지만 온갖 미디어와 매체를 통해 ‘생지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며 지옥을 ‘목격하는’ 사람으로서 나를 둘러싼 새로운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연결이자 단절이다.  폭력을 멈추라는 목소리와 그것을 막는 권력 거대한 생명 파괴와 학살의 현장을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개인들은 분열된다. 가자지구의 시민들이 틱톡,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가자지구 폭격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다. 곳곳이 부서지고 불이 꺼진 건물 속, 바깥은 폭격으로 먼지가 자욱하고 건물 파편이 날아다닌다. 사람들이 무너진 건물에 깔려있고 전기도, 수도도 없는 지상 최대 규모의 감옥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세계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을 규탄하고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의 대학생들도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고, 이스라엘 민간인 학살을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하버드 학생연합단체에서 반이스라엘 공동성명을 발표하자, 미국의 보수단체에서 독싱트럭 전광판에 ‘하버드 학부 팔레스타인 연대 위원회’ 구성원들의 얼굴과 이름을 싣고 캠퍼스를 배회했다. 보수단체는 ‘X(옛 트위터)’에 온라인에 매시간 새로운 이름을 등록하고 있다며 연대 위원회를 탈퇴한 학생 이름은 삭제하겠다고 올렸다. 미국 자본 권력의 핵심 중 하나인 빌 애크먼은 이스라엘을 비판한 대학생들을 채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자본을 움켜진 거대 권력의 횡포와 보수단체의 폭력적 위협에 공포를 느낀 학생들은 성명을 철회했다고 한다.  폭력에 대한 저항이 자본과 위력에 좌절당하는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다. 이 모습으로부터 나는 연결과 단절의 감각을 더욱 생생하게 느꼈다. 나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민간인과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약자들에게 더 강하게 연결된다. 동시에 어떤 목소리도 듣지 않고 움켜진 무기를 힘껏 사용하는 권력을 바라보며 더욱 무력해진다. 연결, 그다음이 필요하다. 어떻게 우리는 나아갈 수 있을까. 단절을 딛고 더 큰 목소리로 전쟁을 지켜보며 참담함, 무기력을 느끼는 이들과 전쟁을 정무적 관점으로 보는 이들의 단절이 비극을 심화시키고 있다. 고통은 고통끼리, 권력은 권력끼리 서로를 연결하고 강화한다. 약자는 서로의 고통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이 판을 쥐고 있는 권력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나같이 고통과 연결된 힘없는 개인은 무력함에 힘이 부쳐 결국 무감각 해 질것이다.  고통으로부터의 무감각과 흐린 눈이 결국 권력이 생존하는 방식임을 안다. 그래서 더욱 연결됨, 그다음의 감각이 절실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서로의 인질을 일부 석방하고 4일간 휴전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네타냐후는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하마스 붕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그의 의지가 앞으로 더 암담한 폭력의 세기가 펼쳐질 것임을 암시한다.  국제사회의 지성은 시험에 들었다. ‘우리’의 연결은 무거운 과제를 지니게 되었다. 폭력을 목격하고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우리의 노력이 부디 나아감의 과정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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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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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면
애석하게도 오늘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군대 얘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최대한 적게 쓰려고 했으니까 조금만 참아주시길 부탁드린다) 올해 8월 말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다. TMI이지만 예비군 훈련은 금요일이었고, 나는 월요일에 코로나19 확진을 받았다. 코로나19 확진 후 훈련에 참여하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내가 받아야 하는 훈련 이름이 더 당황스러웠다. 살아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저격수 훈련’이라니. 도대체 저격수 훈련은 어떤 사람들이 끌려가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봤더니 현역 시절에 ‘특급사수’ 이력이 있으면 차출당한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커뮤니티 글이 검색됐다. 불현듯 8년 전 여름이 떠올랐다. 논산훈련소 사격장은 너무 더웠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여름에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외부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 힘들다. 그때의 나도 그랬고, 빨리 쉬고 싶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단 한 번에(!) 20발 중 18발을 맞췄다. 사격 훈련이 끝날 때까지의 휴식은 물론이고, 어쩌다 보니 중대 1등을 기록해서 특급사수 표창까지 받았다. 그게 내 인생 마지막 특급사수였다. 물론 2년 가까운 군 생활에서 사격 훈련은 한참 더 있었다. 하지만 멋모르던 훈련병 시절 이후 나는 사격을 좋아하지 않게 됐다. 나름의 계기가 있었다. 내가 생활했던 부대 안에는 동원훈련을 위한 사격장이 있었다. 사격장 뒤로는 순찰로가 있었고, 사격이 진행되는 동안엔 안전을 위해서 순찰을 하지 않았다. 군 생활 절반이 채 안 되었던 시기로 기억하는데, 영점 사격을 한창 하던 중 순찰로에서 병사 두 명이 내려오는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총기의 조준선 너머로 보이는 표적이 단순한 종이, 플라스틱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총 쏘시는 거 좋아들하시니까 마지막 훈련 열심히 받고 가세요” 마지막 예비군 훈련은 운이 좋게도 3시간이나 일찍 끝났다. 어떻게든 집에 일찍 가고야 말겠다는 예비군들의 집념이 만들어 낸 사격 우수 성과 덕분이었다. 그런데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마냥 유쾌하진 않았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들었던 교관의 말이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뭘 위해서 오늘 총을 40발이나 쏜 걸까? 사격을 즐거워해도 되는 걸까?’ 전투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내 손에 있던 총기가 향했던 곳엔 종이 표적지가 있었지만 세계 곳곳에 있는 누군가의 손에 있는 총기는 살아있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 분쟁, 갈등, 투쟁의 역사에 적혀있는 사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2023년의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과거의 한반도를 비롯해 수많은 곳에서 사람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벌어졌다. 누군가에겐 투쟁이었고, 누군가는 분쟁 혹은 전쟁이라 표현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분쟁과 전쟁은 비단 사람의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한국 전쟁이 시작된 지 70년이 넘은 지금도 한반도에선 ‘빨갱이’, ‘종북좌파’ 같은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념전쟁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시계가 느린 분들이 참 많다. 자기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철 지난 이념을 악용하는 사람도 참 많다. 없는 간첩도 만들어 내던 시대보다야 덜 하겠지만 여전히 북한에 대한 적개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분쟁과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뿐만 아니라 상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도 만들어 냈다. 사람이 죽지 않아야 한다는 건 너무 당연한 명제다. 평화가 필요하고,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답은 사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갈등을 보며 한 가지 확실한 건 ‘힘에 의한 평화’와 같은 거짓말은 하지도, 믿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내 무장조직 하마스의 군사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였다. 그 큰 차이가 평화를 만들어줬을까? 오히려 평화를 위한 노력 대신 큰 힘의 차이를 만들어 상대를 억압한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 아닐까? 너무 뻔한 말 같지만 그래서 진짜 평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배경엔 분쟁과 전쟁 속에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대한 공감과 지속적인 관심이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총구를 들이밀면 총구가 돌아올 것이다. 반대로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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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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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당신에게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요즘은 많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요즘은 안부를 묻는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밤새 모니터를 통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습과 의료시스템 붕괴, 난민 상황들을 모니터링하고, 그 곳의 활동가들과 간신히 연결을 이어나가면서 지내고 있는 동료들에게, “잘 지내요?”라는 인사가 잘 나오지 않더라고요.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마음일 것 같아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또 다시 수십, 수백, 수천 명의 죽음을 마주해야 하니까요.  저는 2018년부터 병역거부운동과 무기거래반대운동을 하는 평화활동가로 지내오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악플과 비난을 경험했어요. 이를테면 ‘군대도 안갔다온 게 어디서 큰 소리냐’, ‘무기가 있어야 우리를 지키는 거다’, ‘빨갱이다. 쳐서 죽여야 된다’ 이런 말들을 들어왔어요. 근데 저를 정말로 상처입게 만드는 말은 그런 말들이 아니더라고요. 전쟁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거나, 정치적으로 필요악이라는 말, 어차피 내 일은 아니라는 말들을 들으면서 저항 없이 쭈그러드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자포자기와 자조가 섞인 말들이 가져다 주는 절망은 생각보다 큰 것이더군요. 불과 한 달 만에 1만 개의 찬란한 우주가 사라졌는데요 (각주1).  우리 곁에  숨쉬던 그 많은 이웃들을 한꺼번에 잃었는데요. 이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니요. 정말 그럴까요? 가끔은 그 말에 맞서 싸우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사흘 전 신촌역 부근이었습니다. 약속시간에 늦어서 바쁘게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어요. 어디선가 퍽 퍽 퍽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횟집이었습니다. 사람들로 꽉 찬 횟집 앞이었어요. 제 몸통의 반 만한 물살이, 소위 ‘생선’이라고 하죠. 그 물살이가 뜰채에 잡힌 채 아스팔트 위에 마구 내동댕이 쳐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물살이를 회로 뜨기 전에 죽이거나 기절 시키는 과정이었겠지요.  고통에 몸부림치는 팔딱거림이 멈출 때까지 몇 번이고 퍽, 퍽, 퍽, 차갑고 단단한 아스팔트 위로 내동댕이 쳐지고 있었습니다. 제 몸통 반만한 물살이가 피를 흘리면서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어요. 물살이가 고통스럽게 죽임당하고 있었고, 그 장면이 너무 끔찍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가던 길을 서둘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순간이 계속 떠올랐어요.  ‘왜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을까.’ 전쟁이 남의 일이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은 어쩌면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믿기지 않는 잔혹한 대량학살을 매일같이 뉴스로 보고 있는데, 그게 너무 끔찍하잖아요. 사상자를 가리키는 어마어마한 숫자들 뒤로, 방금까지 살아 숨쉬던 삶들이 있다는 걸 차라리 믿어버리지 않고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저들의' 죽음과 ‘나의’ 삶을 분리시켜버리는 게 아닐까요? 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을테지만, 무언가를 목격한 사람에게는 책임이 부여된다고 믿습니다. 길을 걷다 옆 사람이 갑자기 쓰러진다면 누구든 119에 전화를 걸테니까요.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은 그 장면들을 우리는 지난 한달 간 계속해서 목격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더 오랜시간 지속되어온 점령과 억압을 애써 외면해왔지요. 저는 그 학살을 목격한 이상, 우리 모두에게 이미 책임이 생겨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해요. 폭력을 승인하지도, 폭력에 익숙해지지도 않을 책임, 그리고 이 전쟁을 끝내라고 말할 책임 말입니다.  책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다른 이유 그리고 그 책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이 세계 9위의 무기수출국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이스라엘 무기수출액은 3배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2014년 가자분쟁으로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던 수천 명 팔레스타인인이 희생된 이후에도 한국 정부는 꾸준히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수출을 허가했고, 한국의 무기기업들은 배를 불려온 것이죠.  바로 지난 달 있었던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무기박람회 아덱스 (ADEX) (각주 2)에서는 이스라엘관을 운영하며 이스라엘 국방부와 무기 회사들이 비즈니스를 펼쳤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을 정당화하며 ‘전장에서 증명된’ 이스라엘의 무기들을 홍보하고 있었어요. 그 무기들의 성능을 증명하는 ‘전장’은 그간 이스라엘 점령군으로부터 셀 수 없는 폭격과 전쟁범죄를 겪은 팔레스타인이지요. 이 전쟁으로 방산업계는 또 한 번 절호의 찬스가 왔다며 무기 판매에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크게 웃는 정치 카르텔과 부패한 권력자, 그리고 무기상인들을 곁에 둔 이상, 이 전쟁은 남의 일일 수도, 남의 일이어서도 안됩니다. 전쟁은 우리 일상 속에 켜켜이 쌓인 차별과 착취, 암묵적 동의, 승인으로 인해 만들어지고 지속됩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달리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기 판매 중단을 요구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지원하는 기업들을 보이콧하고, 서명운동에 참여하고, 현지의 상황과 목소리를 알리는 글과 영상을 공유하고, 시위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런 행동들이 있을 때에만 전쟁을 멈출 수 있습니다. 무력감에 젖을 이유가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으니까요.  전쟁을 끝내는 힘은 우리에게 있다 어제 (11/17), 서울 보신각 앞에서는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애도하는 신발들의 시위가 하루 종일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위는 시민들의 신발 기부로 이루어졌어요. 신발들의 수신처였던 참여연대 사무실에는 수십개의 택배 박스가 쌓였습니다. 애초에 2천 켤레를 목표로 시작했던 신발 기부는, 3천 켤레의 신발이 도착하며 마감되었습니다. 그 신발들을 하나 하나 옮기며 많은 얼굴들을 떠올렸습니다. 저마다의 사랑과 희망과 꿈, 그리고 절망과 분노 역시 품었을 삶들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뉴스로, 인터넷으로 들려오는 가자지구의 소식에 눈물 지으며 신발을 모아 보내준 수많은 시민들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그 시민들의 마음과 호소가 하루 동안 보신각 앞을 채웠습니다. 그 호소는 전쟁 중단을 요구하는 강력한 메세지가 되어 국내외에 전달되었고요. 전쟁을 끝낼 힘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더더욱 발휘할 때, 우리는 마침내 전쟁을 끝내게 되겠지요. 너무 끔찍해서 때로는 눈을 질끈 감고 싶어지지만, 그래도 끝까지 눈을 부릅뜨고 똑똑히 바라보자고 용기내어 말을 건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의 목격자가 된 책임을 함께 지자고요. 그 책임이 때론 버겁고 힘들지 몰라도, 도망가는 것 보다는 덜 버겁지 않을까요. 다음 시위는 11월 26일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인근에서 진행됩니다. 함께해주세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피해주민 긴급구호를 위한 모금에 참여해주세요. (클릭) (각주 1) 지난 10월 7일 이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약 1만 2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각주 2) 한국에서는 한 해에도 여러 차례 무기박람회가 열린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인 서울 아덱스가 매 홀수년 10월에 개최된다. 올해 서울 아덱스는 10월 17일부터 22일까지, 성남 서울공항에서 진행됐다. 피스모모를 비롯한 국내 평화/인권/기후 단체들이 아덱스에 저항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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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 평화를 위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중
국제 분쟁이 일어나고 일상 속 변화를 실감한 순간이 있나요? 어떤 순간인가요? 나는 생일을 맞이해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서 깼다. 애타게 생일을 기다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일은 내가 태어난 날인만큼 소중하고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022년 나의 생일을 나는 차마 즐겁게 보낼 수 없었다. 생일 전날 새벽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뒤부터였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나의 생일날이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정도가 다른 것일까 하는 의문이 자꾸만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쓸모없어 보였고, 점점 무기력해지기만 했다. 하지만, 충격도 한순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혼자 걱정만 한다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로, 내 일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는 나로서, 나의 활동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다. 2주 동안 기숙사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제는 집보다 학교가 더 익숙하고 친밀하다. 그렇지만, 또 그만큼 외부 활동을 많이 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다. 그래도 나는 그 안에서 나름대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갈 길을 만들어 갔다. 전쟁이 일어난 후, 학교 내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앉아서만 지켜볼 수 없었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학생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깊이 엉켜있는 역사를 공부했고, 서방권 나라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이 다루었다. 그 뒤, 다른 학생들에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전쟁으로 인해 나타나는 참혹함과 불행함을 벽보에 붙여 알렸다. 외부 활동을 꾸준히 하기는 어려웠지만, 해바라기와 촛불을 들고 반전시위에 학생들과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내 일상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해갔다. 그렇게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어느덧 학교 내 반전 NGO에서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저희 NGO 소식이 궁금하시면! 관심이 있으시면! 🥰 인스타그램 : lets__peace / 이메일 : lets_peace@naver.com) 지금 평화가 가장 필요한 국제 분쟁 지역은 어디라고 생각하나요? 세계지도를 보면 조각 케이크처럼 아주 반듯하게 잘린 지역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이 그러하다. 하지만 아프리카가 처음부터 반듯한 국경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대항해시대를 시작으로 수많은 서방권 국가가 아프리카를 침략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들은 금과 은을 얻기 위해 광산을 캤고, 끝이 보이질 않는 플랜테이션을 만들었으며, 아프리카 부족민들을 짐승 취급했다.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서방권 국가들의 무분별한 약탈과 만행을 저지른 시대가 대항해시대다. 그 당시 국부의 가치는 국가가 얼마나 많은 금과 은을 보유하는지에 있었다. 그렇기에 유럽 열강들은 금과 은을 더 많이 얻기 위한 땅따먹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프리카 대륙이 국부를 늘리는 땅따먹기에 불과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갈라진 땅처럼 조각조각 부서졌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가진 부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유럽 열강들은 그들의 편의로 그은 국경선 안에 서로 다른 부족들을 강제로 거주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이 가지고 온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이념은 더 많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켰다.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대륙은 분쟁 속에 있다. 외부의 세력에 의해 갈라진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할까. 부족들 간의 크고 작은 갈등과 싸움은 계속 일어날 것이고, 갑작스러운 해방은 나라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조각난 땅 위의 삶은 굉장히 불안하고 무서울 수밖에 없다. 몇백 년간의 지배가 현재 분쟁의 가장 큰 원인이다. 너무나도 슬픈 건, 이러한 분쟁을 만든 나라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꼬여버린 실타래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아프리카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게 참 슬프다.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많은 나라들은 다른 외부 세력으로 인해 땅이 갈라진 채로 살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중 하나다. 그러한 나라들에 평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국제분쟁을 멈추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요? 국제 분쟁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갈등이 전쟁을 낳는다. 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과정이 존재한다. 가족 간의 갈등이, 마을의 갈등으로 번지고, 그것은 나라 안의 갈등으로, 결국 나라 간 혹은 나라 안의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과정이 빨리 일어나기도 하지만, 몇백 년간의 길고 긴 싸움 끝에 터지는 것이 전쟁이다. 그러한 전쟁을 우리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이며,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인가. 처음에 나는 전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좌절이 먼저 들었다. 아무리 전쟁이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켜도 막을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그래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어떤 수가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 내 고민을 수업 때 털어놓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평화 시에 서로 간의 교류와 외교를 잘해야지 전쟁을 막을 수 있지.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서야 교류하려고 하고, 외교를 하려고 하니 해결이 되지 않는 거지.” 너무 와닿는 말이었다. 왜 우리는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만, 극한의 상황까지 가야지만, 그제야 행동하는 걸까.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도, 민간인 차원에서도. 그렇기에 작은 실천도, 매우 소중하다. 우리 안의 평화를, 내 주변의 평화부터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전쟁은 거대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작은 눈덩이가 커지고, 커져서 괴물이 된 것이 전쟁일 뿐이다. 작은 눈덩이가 산에서 굴러가는 걸 막는다면, 우리는 전쟁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당연히 시위 한 번이, 발언 한 번이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모이고 모이면, 큰 변화가 일어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굵직한 사건들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굵직한 사건이 될 수 있는 건, 역사로 남을 수 있는 건 그전에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은 실천이 무의미하지 않다는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걸 계속 명심해야 한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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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는 연결되어 있다
제목 : 참사는 연결되어 있다 1,134명이 사망한 참사 2013년 4월 24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 위치한 ‘라나 플라자'가 붕괴했다. 건물은 오전 8시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쏟아지는 천장을 피하지 못했다. 1,134명이 사망했고, 2,5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참사로 기록 된, ‘삼풍 백화점' 참사 사망자가 502명이었다. 단순 수치로 2배에 달하는 참사였다. 수치로 고통의 무게를 잴 수는 없으나, 우리나라 역대 최악의 참사보다 2배 이상의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참사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덮쳤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무너진 라나 플라자 라나 플라자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 건물이었다. 붕괴 당시 라나 플라자는 총 9층 높이였다. 하지만, 애초에는 4층짜리 건물이었다. 건물주인 소헬 라나(Sohel Rana)는 상업용 4층짜리 건물로 2007년에 처음 지었다. 지하는 주차장 겸 소헬 본인의 사무실이었다. 1층엔 다른 사무 공간과 상업 건물, 2층엔 상점과 은행들이 들어서 있었다. 3~4층은 다국적 의류 기업의 옷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이곳에서 주로 하청을 받아 옷을 생산했다. 2023년 기준, 방글라데시의 의류 산업은 전체 GDP의 16%를 차지할 정도로 큰 산업이다. 수출 규모로는 중국에 이어 전 세계 2위다.  이렇게만 보면 전혀 문제가 없는 듯 보인다. 사무실이 있고, 은행이 입점해 있고, 봉제 공장이 있는 건물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건물이 무허가 건물이었다는 점이다. 무허가 건물이라 정부의 관리 감독이 소홀했고, 건물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건물에 입점하면 할수록 건물주는 돈을 벌게 되어 있다. 이에 소헬 라나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무허가 증축을 이어간다. 4년 동안 총 4층의 건물이 무허가로 증축됐다. 증축을 제재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 무허가 건물에 증축 허가와 관리 감독이 있을리 없다. 무리한 증축은 붕괴 원인이 됐다. 건물이 올라갈 수록, 지반은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건물 옆에 금이 가고, 기둥의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갔다. 사고의 징조였다. 건축 엔지니어인 압둘라 라자크 칸은 건물주인 소헬 라나에게 건물 붕괴 위험이 있으니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건 소헬 라나 자신 뿐이었다. 생계를 위해 출근했던 3,000여 명의 사람들은 2013년 4월 24일 오전 8시 45분 무너지는 건물에 파묻혔다. 파묻힌 사람 중 1/3은 사망했고,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깔린 사람들은 팔을 절단하며 구조됐다. 비록 살아 남았지만, 그들이 참사 이전과 동일하게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다. 무너진 잔해에 척추를 다쳐 걸을 수 없는 상황에 먹여 살려야 하는 자식을 위해 걷게 되기를 소망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라나 플라자 참사는 이익을 위한 무리한 증축에, 충분히 대피 시킬 수 있었음에도 책임지지 않은 인재가 겹친 참사였다. 건물주였던 소헬 라나는 참사 직후 인도로 도망치다가 잡히기 도했다. 그리고 참사 3년 만에 재판장에 섰다.  어느 한 사람의 이익, 사회의 부정 부패가 극심할 수록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들이 피해를 받는다. 이익 앞에 그들의 안전과 생계는 안중에서 사라진다. 애초 고려 대상이 아니게 된다. 이러한 참사를 겪고서도 방글라데시 여공들은 또다시 옷을 만들러 가야 했다. 나라 전체 GDP의 16%를 차지하고, 전 세계 수출 2위를 차지하는 산업인 만큼 생계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참사 당일, 붕괴 조짐을 일하는 노동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일터로 보내졌다. 괜찮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건물이 무너졌다. 참사의 책임이 어느 한 사람에게만 있지는 않다 참사의 책임을 어느 한 사람에게만 물게하는 건 자칫 마녀사냥이 될 수 있다. 책임이 있을 수는 있으나, 온전히 그 사람의 문제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라나플라자 참사도 마찬가지다. 참사가 대대적으로 언론을 통해 보도됐고, 참사 희생자들이 어느 브랜드의 옷을 만들고 있느냐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글로벌 SPA 브랜드 들의 옷을 만들고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시민들은 온라인 상에서 누가 내 옷을 만들었냐라며 #whomademyclothes 해시태그를 달기 시작했다. 일부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오기도 했다. 참사가 발생하고 난 뒤, 방글라데시에 가장 많은 하청공장을 가지고 있던 H&M에 변화를 촉구하는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라나플라자에서 일했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은 의류 노동자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3,000다카(월 4만 원)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참사 이후 국제사회 압박과 최저임금 인상 시위에 못이겨 월 최저임금이 5,300다카(7만 원) 수준으로 올랐다.  또한 H&M은 방글라데시 현지 하청업체들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 개선을 약속했다. 고층 빌딩의 스프링 쿨러 설치, 비상계단 사이 방화문 설치 등이었다. 또한,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1500곳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는 어땠을까? “클린 클로즈 캠페인은 방글라데시에 있는 H&M 공급업체 32곳을 조사했는데, 이들은 H&M과 이른바 골드 파트너십 관계에 있었다. 이 대기업에서 특히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생산하는 공장을 선별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클린 클로즈 캠페인은 이들 공급처의 건물에서 안전에 미흡한 점 518가지. 화재에 취약한 점 836가지, 전기 안전상의 문제 650가지를 발견했다. 그런데 H&M은 2014년 지속 가능성 보고서와 웹사이트에 건물 안전 및 화재 안전과 관련한 모든 조치를 기한 내에 모두 시행했다고 선전했다.”* 방글라데시 라나플라자 참사는 돈을 벌려는 개인의 탐욕과 값싸게 옷을 생산하려는 기업의 어찌보면 당연한 논리에서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안전은 비용으로 치부됐고, 최대한 아껴야 하는 것이 됐다. 그렇게 싼 값에 생산 된 옷을 사 입는 건 방글라데시 현지인들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같은 선진국 나라들이었다. 참사 당시 시간당 24센트 임금을 받으며 일했던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일터로 나갔고, 여전히 저임금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내가 입는 옷도 없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처음 들어보는 나라의 참사가 우리의 일상과 연결되어 있는 이유다.  방글라데시 파업, 생계를 위한 싸움 현지시각으로 지난 9일, 방글라데시는 파업에 돌입했다. 현재 월 최저임금인 9만 원을 올려달라는 요구에서 비롯됐다. 지난 2019년을 마지막으로 코로나 여파로 인해 최저임금이 4년 째 동결됐는데, 그 과정에서 물가는 끊임없이 상승해 생계가 어렵다는 이유다. 방글라데시 노동자 측은 월 27만 원을 요구했고, 정부는 14만 원을 제시한 상태다. 이러한 요구에 반발한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은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세계의 의류 공장으로 불리는 방글라데시가 파업하면, 옷 값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현재까지 약 300개 의류 공장이 가동을 중단했다. 파업이 계속된다면 어쩌면 이들이 만든 옷을 입는 우리들의 옷 값도 비싸질지 모른다. 정부와 노조는 계속해서 협상을 하고 있고, 가장 많은 공장을 가진 H&M은 "근로자와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한 새 최저 임금을 지원한다"고 밝히면서도 구체적인 임금 인상 계획은 공개하지 않았다. 어느 한 나라의 참사가, 어느 한 나라의 파업이 우리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우리의 옷을 만들다가, 우리가 먹을 음식을 재배하다가 참사를 맞은 것일 수도 있고, 파업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회적인 참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요즘, 나와 관련한 참사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관심을 갖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설령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참사가 아닐지라도, 우리나라에서 진행되는 파업이 아닐지라도 그것은 우리와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해당 참사의 맥락을 제대로 살펴보고, 나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작은 관심이라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내가 먹고, 입고, 마시는 무언가를 위한 참사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위장 환경주의>(카트린 하르트만/ 에코리브르/ 초판 2쇄/ 2019)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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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갈등, 투쟁의 역사
피라미드 같은 고대의 거대 건축물이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고대 도시나 유물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혹시 외계인이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고대인을,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힘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지만 재미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 신전이나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 걸 보면서 그런 음모론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음모론에는 유럽인들이 세운 게 아닌데 대단해 보이면 그것을 외계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태도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서유럽 백인들의 기본 마인드이고 근대 이후 세계의 기본 마인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어떤 이들은 1945년 이후의 분쟁은 국가와 국가의 분쟁 보다는 비-국가적 분쟁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하며, 그런 의미에서 1945년 이후를 긴 평화(Long Peace)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기만적인 말이다. 1, 2차 대전의 당사자 강대국들이 자기네 땅에서 안 싸웠다고 이 세상을 평화롭다고 말하는 것도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그 싸움의 근본적인 원인이 강대국들 자신이라는 점을 쏙 빼놓고 말한다는 점에서도 참으로 책임감도 없고 반성도 없는 문제가 많은 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평화였는가? 베트남전쟁은 평화였는가? 자기들이 만들지 않았는데 좋아 보이는 것은 죄다 외계인이 세운 것이고 자기들이 한 나쁜 일은 자기들 탓이 아니라는 태도. 이것이 서유럽 백인들의 기본 마인드이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과학이 오랜 시간 가져왔던 태도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국제 분쟁을 두고 분쟁이 일어나는 지역은 자원이 많거나 전략적 요충지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자원이 많아서 어리석고 악한 독재정권이 이를 꽉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거나(이른바 자원의 저주),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어서 분쟁은 정말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는 식의 설명들 말이다. 하지만 궁금하다. 우리는 독도의 자원 때문에 독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독도에 별 자원이 없으면 우리는 독도를 일본인들에게 그냥 넘겨줄 수 있을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순전히 지정학적인 이유로 알박기를 하는 것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슨 지정학적인 이유로 죽어가면서도 그 땅을 나가지 않는 것일까? 가끔은 우리 세계와 우리 지구가 사실은 ‘세계들’, ‘지구들’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엄연히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지구는 당연히 단 하나지만, 그 지구를 바라보고 그것을 각자의 머릿속에서 재구성해 만들어낸 세계/지구는 수십억 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만들어진 세계/지구의 일정 부분, 특히나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개념은 미국이 만들어 놓은 줄 세우기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그 잘잘못에 대한 이야기 이전에, 길어야 백년인 우리네 인생에서 그렇게 남이 만들어둔 안경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다소 억울한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앎을 얻는 과정을 배움이라고 표현한다. 배움은 나의 앎이 어떤 위치에서 이루어져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고, 그 깨달음을 통해 나의 앎이 수많은 인과관계 중 일부에 해당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앎이란 우리의 사회, 세계, 우주의 일부에 불과하며 나의 앎, 타인의 앎이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인지를 파악해야 하며,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어떠한 구조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끝없이 돌아보며 고민해야 한다. 그게 바로 공부다. 우리의 앎에 그런 조건, 인과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작게는 잘못된 앎을 가지는 것이고 태도가 오만한 것이지만 크게는 윤리와 정의에 어긋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최근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국제 분쟁들에 대해서 대강의 원인과 결과를 정리해두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이 참고로 삼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분쟁/학살의 원인과 형태에 의한 분류 #영토 영토의 통치권, 개발권, 점유 등을 두고 싸우는 경우 #민족 민족, 부족 단위의 갈등, 학살 #종교 종교 혹은 종교관의 차이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 학살 #이념 이념 갈등으로 인해 벌어진 갈등, 학살 #자원 석유, 천연가스, 광물, 토지, 수자원 등을 두고 벌어진 갈등, 학살 #식민지와분할통치 갈등, 학살의 원인이 강대국의 식민통치, 분할통치 등과 관련이 있는 경우 #역사적갈등 1900년 이전, 즉 전근대 이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갈등 #전쟁범죄 전쟁의 와중에 벌어진 집단 학살, 약탈, 방화, 강간 등 #재난 갈등, 학살의 원인 중에 자연재해가 있는 경우 #기후위기 지구온난화, 사막화 등의 기후변화로 인해 생겨난 갈등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일본-러시아, 쿠릴열도) #영토 #역사적갈등 러시아와 일본이 조약을 맺어 아이누족이 살던 땅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지기로 했다. 일본은 쿠릴 열도(일본 이름 치시마)를, 러시아가 사할린 전역을 가지자는 내용이었다. 일본이 세력이 강해지면서 1904~1905년에 러일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2차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소련이 사할린을 수복하고 쿠릴 열도까지 점령했다. 당시 소련의 수장 스탈린은 홋카이도 북부까지 러시아 땅으로 삼고 싶었지만 미국의 반대로 쿠릴 열도를 가지는 정도로 만족하게 되었다. 이후 벌어진 도쿄재판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은 쿠릴열도의 영유권을 포기한다는 조약을 새로 맺게 되었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문제를 다루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한국, 중국 등 실제로 일본에게 피해를 입었던 국가들이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독도 문제도 이와 걸려 있다.) 1950년대 이후 일본이 다시 국세를 회복하자 일본은 시코탄 섬, 하보마이 군도, 쿠나시르 섬, 이투루프 섬이 쿠릴열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러시아에게 다시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쿠릴열도 분쟁, 일본에서 말하는 북방영토 분쟁이다. 일본의 우익들은 이 네 개 섬을 모두 돌려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 공산당 등 좌익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만이 유효하고 그 이후의 조약은 모두 문제가 있는, 무효에 가까운 조약이라고 주장하면서 쿠릴열도 전체를 돌려받아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홋카이도가 비교적 비-자민당 세력이 강세인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는 아이누족과 일본인, 러시아인들이 널리 걸쳐살고 있고, 징용, 징병으로 끌려간 조선인들도 살고 있다. 이 문제까지 겹치면서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다. 1894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영토 #민족 #종교 1894년부터 1917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을 원하던 여러 민족과 종교를 탄압한 사건들을 총칭해 부르는 말이다. 아르메니아 인이 기독교인으로 가장 많은 학살을 당했지만 그 이외에 그리스정교회나 가톨릭, 튀르크 족 이외의 다른 이슬람교 부족들도 대규모 학살을 당해 근대 최초의 제노사이드라 불리기도 한다. 적게는 60만 명에서 많게는 150만 명 정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튀르키예와 다른 이슬람국가, 동유럽 국가들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아직도 가해의 주체가 누구인가(국가인가 민간단체인가 둘 다인가), 피해의 규모가 얼마인가 등을 두고 다투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과 튀르키예 사이에 우호 분위기가 일자 일부 기독교 단체에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이슬람 국가들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일본-중국/대만, 센카쿠열도혹은조어도) #영토 #자원 센카쿠 열도, 댜오위다오(조어도)는 무인도다. 명나라 영락제 때 만들어진 지도에 중국 땅으로 표시되어 있긴 하지만 그 이후의 중국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류큐 왕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결국 오키나와 현이라는 이름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894년~1895년에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중국의 북양함대가 일본에게 패배했다. 중국의 직예총독 이홍장이 시모노세키로 가 이토 히로부미와 조약을 체결하며 대만과 요동의 통치권을 일본에 할양하게 되었다. 이때 조어도는 언급이 되지 않았다. 바로 직전인 1895년 1월, 후쿠오카 출신의 오키나와 상인 코가 타쯔시로(古賀辰四郞)가 조어도가 주인 없는 섬임을 확인하고 일본 정부의 땅으로 편입시켰다. 문제는 1960년대 이후 이 땅에 상당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후다. 중국과 대만에서는 이 땅이 고대 중국 지도에도 표시된 중국 땅인데 청일전쟁 중에 일본이 불법으로 편입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애초부터 이 땅이 류큐 열도의 일부인 암초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1904년 독도(한국-일본) #영토 #식민지와분할통치 러일전쟁 당시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은근슬쩍 편입한 일본은 지금도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원래 무인도였으니 먼저 선점하는 사람이 임자 아니냐는 주장(무주지 선점론),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국이 독도를 일본 땅의 일부인 것처럼 이야기했다는 것 등을 들고 있다. 1904년~1098년 독일의 나미비아 학살 #민족 #식민지와분할통치 나미비아에는 원래 코이코이족, 반투족, 산족, 헤레로족, 나마족 등이 살고 있었는데 1884년에 독일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독일인들은 이곳에 광산을 건설하고 헤레로족과 나마족의 가축, 토지를 빼앗았다. 독일의 폭력으로 삶의 기반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린 이 지역 원주민들은 결국 독일인들의 광산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남성들은 폭행, 여성들은 성폭행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이를 견디지 못한 헤레로족의 사무엘 마하레로가 사람들을 이끌고 독일인들을 공격해 폭력/성폭력의 가해자 140여 명을 처형하고 그 이외의 독일 남성과 여성, 어린이 등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군대를 보내 나미지아 원주민들을 토벌하게 했다. 독일군은 무차별적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했는데 1904년 8만 5천 명 가량이던 헤레로족이 1908년에는 만 오천 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독일인들은 무기를 이용한 살해는 물론 사막이나 바다에서 아사를 시키거나 맹수에게 사람을 산 채로 던져주기, 생체실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 지역 원주민들을 살해했다. 나미비아에서는 독일에게 이 문제에 대한 인정과 사과, 배상을 요구했지만 독일은 이 일이 히틀러 이전의 일이므로 사과나 배상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고 지금도 정치인 개개인이 사과 발언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아직 정식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기록되어 있다.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아일랜드-영국, 북아일랜드) #영토 #민족 #종교 #이념 #식민지와 분할통치 #역사적 갈등(1900년 이전부터의 갈등) 오랜시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를 둘로 나누어 개신교 신자가 많이 사는 북아일랜드를 영국 땅으로 남기고 가톨릭 신자가 많이 사는 나머지 땅을 독립시키게 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아일랜드 문제를 오랜 기간 동안의 식민과 비식민, 착취와 피착취 문제라고 이야기하는데 영국인들은 이를 종교 갈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민족과 종교, 역사 문제, 식민지 문제에 더해 왕정을 지지하는 사람과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도 존재하고 아일랜드에 주재하는 영국인들이 대체로 보수적인 편에 속하는 한편 오랜 기간 착취에 시달렸던 아일랜드인들은 진보, 개혁, 더 나아가서는 맑시즘(IRA)을 지지한다고 하는 이념 문제도 존재한다. 1972년에는 영국에서 비폭력 아일랜드인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실시해 14명을 죽인 일이 있었고(피의 일요일) 1982년에는 IRA 활동혐의로 체포된 정치범들이 자신들을 일반범죄자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대우해달라는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아일랜드 단식투쟁). 과거 식민시절부터 현대의 폭력적 시위 진압에 대해 영국 정부가 사과를 하긴 했지만 영국의 초중고 교과서에서는 이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재난 #민족 #이념 1923년 9월 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관동지역 전역에 진도 6의 강진이 발생해 대규모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 지진 이후 사람들이 혼란한 와중에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조선인, 중국인과 함께 일본인들을 죽이고 정치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정부는 이를 방관하며 조장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소문은 언론을 타고 계속 확대 재생산 되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거나 지진의 원인이 조선인이라는 말까지 돌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3~4주 동안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를 관동대학살이라 한다. 같은 해 12월 5일 <독립신문>에서는 학살에 의한 사망자 수를 6,661명이라고 했고 일본의 기독교 사회주의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1933)는 2,500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매년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고 1945년 이후로는 도쿄도지사도 이곳에 참석하거나 사과 문구를 보냈지만 2017년부터는 코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지사에 의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의 난징 함락 #영토 #민족 #전쟁범죄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중국이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분열되어 있고 군대의 질과 양 모두 수준이 낮다고 판단해 중국을 순식간에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많은 시간과 자원, 인명피해를 발생시켜야 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 내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강해지게 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난징을 지키겠다는 열의를 보였지만 능력이 부족했던 난징 수비 사령관 탕성즈(唐生智당생지, 1889~1970)는 결국 12월 12일 오후 다섯 시에 10만 명의 군인들과 25만 인민들을 그대로 두고 핵심 참모들만 대동한 채 난징을 빠져나갔다. 12월 13일 오전 네 시, 일본군이 난징성에 입성해 정부청사를 점령하면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난징대학살이다. 일본인들은 총알을 아끼기 위해 칼이나 몽둥이로 사람을 죽였고 학살 대상은 군인에서 민간인, 성인 남성에서 여성과 아동, 노인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에서의 약탈과 방화를 교범에도 명시하고 있었다. 이런 교육 방식에 더해 일본군 내에 만연해있던 가혹한 군기 문화, 중국인에 대한 우월감, 전쟁 과정에서 생겨난 강한 적개심 등이 학살을 더욱 잔인하게 만들었다. 6주 동안 벌어진 대학살에 대해 일본에서는 지금도 중국이 학살자 수를 부풀린다거나 학살은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1990년대에 이후 사회가 우경화되면서 직접적으로 이를 조롱하는 일본인들까지 존재한다. 1941년~1945년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영토 #민족 #종교 #이념 #전쟁범죄 1932년, 나치당은 총선을 통해 독일의 제1 정당이 되었고, 1933년 1월에는 히틀러가 정권을 받아 독일을 통치하게 되었다.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홀로카우스토스(ὁλόκαυστος)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희생양을 불태우며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뜻한다. 나치독일에서는 이를 엔틀뢰중(Endlösung; 최종해결책)이라 불렀다. 가장 많이 수용되고 사망한 것은 역시 유대인이다. 유대인 이외에도 집시, 소련의 군인과 민간인, 정치범, 여호와의 증인 신도, 남성 동성애자, 장애인, 폴란드인 등이 강제수용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1944년 5월 타타르 족 이주 정책 실시 #민족 #영토 타타르 족은 몽골고원에서부터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에 걸쳐 살던 유목민이고 이 중에서 크림 반도에 사는 이들을 크림 타타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이 망하고 이들은 크림 인민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세속주의 이슬람 공화국을 세워 잠시 독립을 했지만 곧 볼셰비키의 침공을 받아 무너지게 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들을 3일만에 전부 화물칸에 싣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버렸다. 이 과정에서만 8천 명이 사망했고 그 전후 사망한 사람까지 합치면 최소 3만 명 이상의 피해자가 생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도 크림 타타르족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주로 살고 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선언(팔레스타인-이스라엘 등, 가나안, 시나이반도) #민족 #종교 #영토 #식민지와분할통치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열강들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분쟁이 시작되었다. 가나안 영토, 시나이 반도에 대한 분쟁은 물론 여러 종교의 성지이기도 한 예루살렘 문제, 골란 고원의 실효지배를 둘러싼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사이의 갈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 정부 수립, 9월 9일 북한 정부 수립 #이념 #영토 #식민지와분할통치 #전쟁범죄 1949년 12월 7일 국부천대(國府遷臺) #영토 #이념  중국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장졔스가 이끌던 국민당이 정부를 대만으로 옮긴 사건. 이를 계기로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대만(중화민국)이 성립하였고 지금까지 두 나라의 문제를 양안(兩岸) 문제라 부른다. 1951년 5월 23일 티베트 17조 협의 #영토 #이념 #민족 #자원 #종교 티베트는 고대부터 독립적인 국가를 유지하며 살았다. 고대에는 선비족이 이곳에 살았고 기원후 633년이 되어 지금의 티베트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티베트 왕국을 송첸캄포가 건국했다. 당시의 최강국이라 할 수 있는 당나라를 상대로도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했던 티베트 왕국은 1750년 청나라 건륭제에 의해 청나라의 보호령이 되었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티베트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열강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향해 진격하자 티베트와 중국은 17개 협의를 맺어 티베트는 자신들이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고 중국은 티베트의 자율통치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마오쩌똥의 정책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되고 공산당 내에서도 마오의 정책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일자 마오는 어린 학생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선동을 시작해 과거의 구습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자는 명목을 내세우며 문화대혁명을 벌이게 되었다. 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한 환경파괴는 물론, 종교 탄압을 위해 사원 파괴, 종교인 학살, 공개된 장소에서의 강제 성관계 지시 등을 벌였다. 이 과정을 다룬 영화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쿤둔(1997)>이다. 티베트에 대한 비인도적 행위와 정치적 탄압은 지금도 진행중이며 핵개발이나 원자력 발전으로 생겨난 방사능 물질을 이 지역에 버리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대만 정부도 티베트는 중국 영토이며 티베트인은 중국인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1954년 11월 1일 알제리 전쟁 발발 #민족 #식민지 #역사적갈등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것은 1830년대의 일이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후, 1945년 5월 8일에 나치가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하자 알제리 인들이 모두 거리에 나와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때 벌어진 프랑스인들의 알제리인 학살을 세티프 구엘마 학살이라고 한다.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알제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지속적인 학살과 테러를 자행했다. 그러던 중 호치민이 중심이 된 베트남 독립은 알제리인들에게 매우 큰 자극이 되었다. 1954년 11월 1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을 선언하고 1962년 3월 19일까지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인들은 알제리에서는 물론 프랑스 본토의 알제리인에 대해서도 학살과 강제수용을 자행했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도 프랑스인과 온건파 알제리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1959년 르완다 내전 시작 #민족 #식민지 #전쟁범죄 1959년 르완다 내전이 시작되었다.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에는 후투족과 투치족 등이 자유롭게 각자의 영역을 지켜주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문제는 벨기에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벌어졌다. 벨기에 사람들은 키와 콧대의 길이 등을 이유로 투치족을 더 우월한 부족이라고 평가하고 이들에게 권력을 주며 이 일대를 통치하게 했다. 벨기에는 소수의 투치족에게 권력을 몰아주고 다수의 후투족들의 권력을 빼앗고 후투족 족장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재편했다. 부룬디에서도 이와 관련해 내전이 벌어졌지만 두 민족의 사람수나 재산에 큰 차이가 없었으므로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르완다는 달랐다. 권력은 투치족이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수는 후투족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권력을 쥔 투치족과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계속되는 내전 끝에 1994년 4월 7일, 르완다 학살이 벌어졌다. 후투족 민병대가 약 3개월 동안 투치족을 최소 50만 명 이상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제의 양극화 속에서 대체로 직업이 없었던 후투족 젊은이들이 이곳에 대거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이 시기에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가 최소 천 명 이상이라는 통계도 있다. 1960년 11월 13일 과테말라 내전 발발 #민족 #정치 #자원 #식민지 과테말라는 1954년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 군부가 통치했다. 이 과정에서 크리오요라 불리는 유럽 이주민들의 후손과 친-군부 인사들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대다수의 과테말라 국민들은 소작농이나 빈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 11월 13일 젊은 좌익 장교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쿠데타는 금방 진압되고 실패했지만 이 일이 기폭제가 되어 수많은 좌익 단체들이 결성되어 과테말라 정부와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은 1996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는데 이 사이에 과테말라 정부는 미국, 이스라엘, 대만 등의 지원을 받아 좌파 지식인, 노동조합에 가입된 사람, 종교인, 언론인, 학생, 기타 반정부적으로 보이는 사람 약 20만 명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1962년 3월 2일 버마 군사반란과 네윈의 집권 #민족 #종교 #식민지 버마(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인들은 이 지역을 쉽게 다스리기 위해 그 지역 부족에게 토지의 경영을 맡겼는데 그렇게 선택된 사람들이 바로 로힝야족이었다. 버마족을 비롯해 미얀마에 살고 있는 수많은 민족들이 로힝야족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또 대체로 불교를 믿는 다른 민족과 달리 로힝야족이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점도 있다. 영국이 미얀마를 떠나고, 네윈이 무혈 쿠데타로 집권을 하면서 정치, 경제 분야에서 나름대로 힘을 발휘하던 로힝야족이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네윈의 집권 이후 버마족의 힘이 강대해지자 다른 민족들은 버마족에 대한 경계를 하는 편인데 로힝야족의 탄압에 대해서만은 동일하게 같은 찬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2012년 로힝야족 남성이 라카인족 여성을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과 추방의 정도가 더욱 심해지기도 했다. 1962년 10월 20일 중인전쟁 발발 #영토 #민족 #식민지와분할통치 #역사적갈등 인도와 중국의 국경분쟁은 사실상 티베트 땅을 둘러싼 두 나라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가 히말라야 주변에 있던 작은 부족국가들을 정복하고 달라이라마가 중국을 피해 인도로 망명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은 티베트의 종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인도는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가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티베트 근처에서 군사행동을 벌이려 했다. 영국의 지원을 받아 자신만만해 하던 인도는 설마 중국이 전쟁을 일으키겠느냐고 생각했지만 중국군은 오랜기간 국민당, 일본과 싸웠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결국 1962년 10월 20일 중국이 공격을 시작했고 중국은 뛰어난 화력을 갖춘 인도군을 재래식 보병으로 정밀타격하고 보급로를 끊으며 계속 승리를 거뒀다. 중국은 인도 국경까지 밀고 들어갔고 세계 열강들은 한국전쟁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냐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계속 밀리던 인도는 결국 비동맹 원칙을 깨고 미국에게 중국에 폭격을 가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소련도 이를 승인했다. 결국 중국은 11월 21일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제3세계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인도는 이 일로 완전히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인도는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인정하고, 중국도 인도가 네팔과 부탄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이 전쟁은 끝이 나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는 이 이후에도 티베트, 히말라야 지역을 두고 계속 국경 분쟁을 벌이고 있다. 1967년에는 시킴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중국이 군사행동을 벌였다가 인도에게 패했고 2017년에는 부탄을 두고 중국과 인도가 서로 심리전을 벌이다가 투석전을 벌이는 일이 벌어졌고  2020년에는 카슈미르에서 주먹과 돌, 몽둥이 등을 이용해 백병전을 벌였고 2022년에도 인도 타왕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이들의 싸움에 대해 부탄과 네팔, 티베트 사람들의 입장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66년 5월 26일 가이아나 독립 #식민지와분할통치 #영토 #자원 1966년 영국령 기이나라 불리던 지역이 독립하면서 과야나에세키바(Guayana Esequiba) 지역의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다. 과거 베네수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스페인과 영국은 과야나에세키바를 두고 싸움을 거듭하며 뺏고 빼앗기기를 거듭했는데 가이아나가 독립하면서 이 땅을 두고 가이아나와 베네수엘라 사이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가이아나가 이 영토를 개발하려고 하면 베네수엘라에서 경제적, 군사적 제재를 시행해 방해를 하는 방식으로 분쟁이 진행되었다. 과야나에세키바는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석유가 매장되어 있기도 하며 가이아나 영토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 집권 #이념 #식민지와분할통치 캄보디아의 극좌 무장단체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했다. 과격한 방식으로 집권을 하고도 국가의 발전이나 민생의 안정을 이루지 못했고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괴상한 정책들을 쏟아내자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져갔다. 이에 크메르루주와 지도자 폴 포트는 캄보디아 민족주의와 자신만들만의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도시에 살던 사람들을 지방으로 추방해 강제노동을 시켰고, 스포츠 선수, 연예인, 학자, 학생, 공무원, 의료인, 종교인, 외국인 등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바로 킬링필드다. 심지어는 안경을 쓰거나 손이 부드러운 사람, 배가 나온 사람,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책을 똑바로 드는 사람 등을 지식분자로 몰아 그 가족들까지 고문하고 살해했다. 또 10세 미만의 아동들을 부모와 떼어놓고 고문기술, 사격 등을 가르쳐 사람들을 죽이게 했고, 지방 간부들은 모든 여성을 성폭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대학살극은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공격하면서 끝이 나게 되었지만, 미국은 베트남을 견제한다는 이유로 크메르루주 정권을 지원했다. 시간이 흘러 2006년부터 2022년까지 크메르루주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주동자인 폴 포트는 이미 죽은 뒤였다. 매년 5월 20일은 킬링필드 희생자 추모의 날이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통일 #이념 #식민지와분할통치 1975년 12월 7일 동티모르 사태 #영토 #민족 #자원 #전쟁범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해 강제 병합했다. 이 당시 동티모르인 18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이를 취재하던 호주인 기자와 뉴질랜드 기자들도 인도네시아군인들에게 처형당했다. 이 이후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은 이 지역에서 최소 10만 명 이상의 동티모르인을 죽였다. 1999년, 인도네시아의 학살 계획을 사전에 입수한 김대중 한국 대통령이 이를 APEC에 긴급 안건으로 제기해 인도네시아에 대한 선진국들의 경제적 원조를 하면서 동티모르의 학살을 막고 독립을 지원한 일이 있다. 이로 인해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동티모르는 2002년에 완전히 독립했다. 1976년 2월 27일 서사하라 독립 선언 #식민지와분할통치 #영토 #민족 서사하라 지역은 고대부터 베르베르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다. 대항해시대 이후 여러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분할점령했는데 잠시 모로코 왕국이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가 스페인이 다시 빼앗아 식민지로 삼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한때 스페인령 사하라라고 했다. 서사하라 원주민들은 계속 독립을 요구했고, 모코로에서는 스페인이 자신들에게 이 땅을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UN에 스페인을 제소하기까지 했다. 1974년, 스페인이 민주화 운동으로 어지러워지면서 식민지들을 포기하게 되었는데 이 틈을 타 모로코가 이 지역을 군사점령했다. 이에 앞서 1973년 서사하라인들이 중심이 되어 폴리사리오 전선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진행했는데 모로코가 군사적 개입을 시작하자 1976년 폴리사리오 전선은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다. 지금도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은 독립운동을 진행중이다. 1982년 4월 2일 포클랜드 전쟁 발발 #식민지와분할통치 #영토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 근처, 남극 바로 위에 있는 영국령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이 섬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 전에는 누가 여기에 살았는지, 정확히 언제 누가 발견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1810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이 땅은 자연스럽게 아르헨티나 영토가 되는가 했는데 영국이 실효지배를 했고 1833년에는 군대를 보내 아르헨티나 주민들을 추방하면서 완전한 영국 땅이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악화되고 민심이 악화되자 아르헨티나에서는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자 군대를 일으켜 포클랜드 제도를 공격했다. 당시 포클랜드에는 소수의 영국군이 주둔중이었는데 아르헨티나에서 이 섬을 점령하고 포로로 잡은 영국군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영국의 여론이 들끓게 되었다. 마가릿 대처 영국 수상은 즉시 군대에 명령을 내려 포클랜드 탈환을 지시했다. 영국이 승리한 후, 아르헨티나의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자국 국민들에게 아르헨티나가 승리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 패전 소식이 아르헨티나 내부로 빠르게 전해졌다. 결국 이후 아르헨티나 정치는 악화되어 거의 2년 동안 네 명의 대통령이 바뀔 정도로 불안정해졌고, 인기가 떨어지고 있던 대처는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일조하게 되었다. 1983년 11월 15일 북 키프로스 독립 선언 #영토 #민족 #종교 1960년 키프로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키프로스는 8할 정도가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 인이었다. 이를 이유로 1974년,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통합을 추진하는 그리스인 중심을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 군은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키예 인들이 모여 사는 키프로스 섬 북부를 ‘보호’라는 명목으로 점령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키프로스 전체에서 튀르키예 인들은 키프로스 섬 북부로, 그리스 인들은 그 이외의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키프로스 섬 북부 사람들이 키프로스 연방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UN에서 중재를 시작했지만 남 키프로스 사람들은 쿠데타 이전으로 돌아갈 것을, 북 키프로스 사람들은 공화국의 승인을 요구하며 타협점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1983년 11월 15일, 북 키프로스가 완전히 독립을 선언하면서 중재는 결렬되었다. 지금까지도 연방제 방식의 통합 논의가 나오고 있지만 남북 각각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논의는 진전되지 않고 있다. 1990년 11월 2일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 발발 #영토 #이념 소련 몰도바 공화국의 일부였던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독립을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의 중재를 통해 1992년 몰도바와 트란스니스트리아는 화해를 했지만 지금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사람들은 독립을 원하고 있다. 원래 같은 지역이었던 두 나라는 소련의 성립 이후 친소련 성향의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루마니아 왕국에 속해 있었던 몰도바로 나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1991년 11월 27일 소말리아 내전 발발 #역사적갈등 #영토 #민족 #이념 #식민지와분할통치 원래 소말리아 땅은 에티오피아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지금의 소말릴란드 땅에는 아달 술탄국이 있었다. 1880년대 들어서 소말릴란드 해안가는 영국이 점령하고 내륙은 에티오피아가 점령하게 되었다. 1936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점령했다. 이 시기 이 지역을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라 불렀다. 1945년 이탈리아가 패전을 하고 무솔리니 부부와 그 일당들의 시체가 거리에 매달릴 무렵에는 영국이 잠시 이 지역을 지배했다가 1950년부터 다시 이탈리아가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소말리아 지역이 독립한 것은 1960년의 일이다. 소말리아가 독립한 직후 소말리아에는 대-소말리아 주의가 퍼지면서 에티오피아와 국경분쟁을 벌이게 되었다. 전쟁이 계속되자 1969년 시아드 바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셰르마르케 대통령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시아드 바레는 마레한 족 출신 아버지와 오가딘 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제 발전과 영토확장을 국시로 삼고 국내의 불만을 억누르며 독재를 하던 시아드 바레는 소말리아가 군사적 요충지임을 이용해 소련과 미국 사이를 오가는 외교를 행했는데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에티오피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발생했다. 에티오피아는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아 소말리아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했고 라틴 아메리카와 동아프리카를 휩쓴 금융위기와 시아드 바레의 자기 부족 중심의 정치에 대한 불만이 겹치면서 결국 소말리아는 시아드 바레와 반 시아드 바레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1987년에는 작은 규모의 내전에 불과했지만 1991년, 반 시아드 바레 파인 통일 소말리아 회의(USC)가 모가디슈를 점령하면서 바레 정권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시기를 다룬 영화가 조인성, 김윤석 등이 출연한 <모가디슈(2021)>이고 이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소말리아 내부의 갈등을 소말리아 내전이라고 부른다. 소말리아 정부군과 각 부족, 씨족 사이의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1993년에 벌어진 모가디슈 전투를 다룬 영화가 바로 <블랙 호크 다운(2001)>이다. 내전으로 인해 살기 어려워진 소말리아 청년들은 해적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이는 주변 아프리카 국가들까지 이 내전에 참전하게 만들었고 한국의 청해부대도 피랍된 한국 선박을 구조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작전을 펼친 바 있다. 그 와중에 소말릴란드 지역은 1993년에 부족간의 화해를 이루며 독립하고 자신들끼리 평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소말리아 측에서는 소말릴란드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지금은 내전으로 인해 소말릴란드에 대한 행동은 없는 상태다. 1992년 8월 14일 압하지야(Аԥсны) 전쟁 발발 #영토 #민족 #역사적갈등 압하지야는 압하지야인들이 사는 땅이다. 이들은 이전부터 조지아(그루지아)로부터의 독립을 원했지만 조지아가 이를 묵살해왔다. 결국 압하지야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조지아로부터 독립전쟁을 벌였고 사실상의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 전쟁 과정에서 압하지야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조지아인들에 대한 인종청소가 벌어졌는데 1989년 525,000명이었던 압하지야 인구가 216,000명으로 줄어들 정도였다. 전쟁 자체는 1993년에 끝났지만 인종청소는 1998년까지 계속되었고 조지아는 이에 대한 복수와 영토 수복을 위해 지금까지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를 견제하는 미국과 서유럽세계에서는 압하지야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93년 10월 21일 부룬디 내전 #영토 #민족 #자원 #정치 #식민지 #역사적갈등 부룬디에는 트와족, 투치족, 후투족 등이 살던 왕국이었다. 독일과 벨기에가 차례로 브룬디 왕국을 점령했는데 벨기에는 항상 부족들을 이간질 시미켜 식민지를 다스렸다. 1962년 부룬디가 독립하고 투치족 중심의 독재정권이 서면서 후투족을 탄압해 왔다. 1972년 이후로는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해 왔는데 1993년 드디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후투계 민주정당인 부룬디 민주전선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쿠데타 시도는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런데 부룬디 대통령이 비행기 요격사건으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이를 계기로 후투족과 투치족 극단주의자들이 무장봉기를 하게 되었고 서로 학살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2005년 5월에 종료되었는데 이때까지 최소 2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2월 28일 코소보 전쟁 발발 #영토 #민족 #역사적갈등 코소보는 원래 세르비아의 발상지였지만 후에는 오스만 제국 휘하로 편입되었다. 이 이후로는 세르비아인이 아니라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에 살게 되었다. 1815년, 세르비아가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한 후 발칸전쟁(1912)을 거쳐 코소보를 차지하였다.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코소보를 세르비아화 시키고자 하였는데 이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서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티토는 코소보 내의 세르비아화를 중지하고 모든 민족의 생존권과 거주권을 자유롭게 보장하려 하였다. 티토라는 지도자 하에서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듯 했지만 티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분리되었고 과격파 세르비아인인 밀로셰비치가 유고의 대통령이 되면서 코소보를 세르비아의 역사적 성지라는 이유로 자치권을 박탈하고 다시 세르비아화를 추진했다. 결국 코소보는 알바니아인들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했고 급진파를 중심으로 코소보 군대가 결성되면서 상황이 험악해졌다. 문제는 코소보 독립군이 인신매매, 마약밀매, 장기매매 등으로 자금을 마련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코소보와 알바니아인의 자유를 외치는 코소보와 코소보를 범죄집단으로 보는 유고 군대가 충돌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코소보 전쟁(혹은 코소보 사태)이다. 코소보, 세르비아, 그리고 인접국인 몬테네그로는 물론 NATO가 개입하면서 이 전쟁은 대규모 국제전이 되었고 밀로셰비치는 이 기회를 빌려 알바니아에 대한 인종청소를 시행했다. 이 전쟁은 살짝 특이하게도 서구 학계에 화제가 되었는데 전쟁범죄를 일으킨 밀로셰비치에 대한 NATO의 공격에 대해 위르겐 하버마스, 수전 손택 등이 지지를 표시했고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을 벌인 NATO에 대해서 노엄 촘스키가 비판적인 입장을 표시하여 학자 개개인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2003년 2월 다르푸르 학살 시작 #영토 #민족 #자원 #기후위기 #전쟁범죄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수단 다르푸르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 이 지역에는 이전부터 아프리카 흑인과 아랍계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갈등이 있어 왔다. 또 유목민인 바가라족과 농경민족은 푸르족, 자가와족, 마살라이트족이 있었다. 문제는 기후위기였다. 인구의 증가와 토지의 사막화로 인해 유목민들이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목초지를 만들려는 유목민들과 경작지를 유지, 확대하려는 농경민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랍계 유목 민병대들은 정부와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의 비호하에 약탈, 방화, 강간 등을 벌였고 2003년 2월에 이에 대항해 흑인 반군이 조직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를 핑계 삼아 흑인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이 내전/학살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지금까지 최소 3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2008년 8월 26일 남 오세티야(South Ossetia, Хуссар Ирысто) 독립 #민족 #역사적갈등(1900년 이전부터의 갈등) 오세티야는 오세트 인들이 사는 땅이다. 러시아 제국이 오세티야를 러시아 땅의 일부로 병합했고, 소련 혁명 직후에는 오세티야를 둘로 나눠 북 오세티야는 소련의 일부로, 남 오세티야는 그루지야(조지아) 공화국의 일부로 삼았다. 소련이 해체된 후 남 오세티야는 조지아의 일부가 되었지만 오세트 인들이 반발하면서 결국 전쟁이 일어났고, 남 오세티야는 조지아 통치령과 오세트 자치령으로 나뉘게 되었다(1991~1992 오세티야 전쟁). 이후 남 오세티야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부를 성립하고 독립을 선포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2008년 러시아와 손을 잡은 남 오세티야는 군대를 일으켜 조지아가 통제하던 지역을 전부 탈환했지만 지금도 러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남 오세티야를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2011년 그랜드 에티오피아 르네상스 댐 건설 #기후위기 #자원 에티오피아는 2011년부터 청나일강 부근에 수자원 확보를 위한 댐을 짓고 있다. 하지만 사막화로 인해 나일강 하류의 수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이 댐이 건설되면 청나일강에 수자원을 의존하고 있는 이집트는 수자원이 급감하고 오염된 물을 마실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이 댐을 두고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수단이 계속 협상을 진행했지만 지속적으로 협상재개와 결렬을 반복 중이다.  2014년 야지디족 학살 #민족 #종교 #전쟁범죄 이라크, 시리아 지역을 점령한 ISIL은 야지디족에 대한 학살을 시행했다. 야지디족은 야지드교를 믿는 사람들이다. 야지드교는 야지단이라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아브라함 계열 종교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인 ISIL은 이들에 대한 학살을 벌였다. ISIL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나디아 무라드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14년 2월 28일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영토 #민족 #이념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땅이지만 러시아계 주민이 60%,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러시아계 주민들은 군사력도 강하고 경제력도 높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차지하길 원했고, 15% 정도를 차지하던 타타르인들은 과거에 자신들을 크림반도에서 추방했던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인 불안정이 늘 존재하는 곳이었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는 독재 친러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를 지지하는 친서방 과도정부가 들어섰다(유로마이단 혁명). 러시아에서는 이것이 쿠데타에 의한 불법적인 정권탈취라고 비난했는데 그 해 2월 25일, 친러시아계 주민들이 크림반도에서 러시아 국기를 들고나와 우크라이나 과도정부 해산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틀 뒤, 세르게이 익쇼노프라는 범죄단체 수장 출신의 정치인이 갑자기 등장해 20여 명의 무장병력으로 크림반도의 관공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크림반도 총리가 된 세르게이 익쇼노프는 푸틴에게 크림반도의 치안과 안보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고 푸틴은 2월 28일에 러시아 군대를 크림반도로 보내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결국 3월 17일 크림반도에서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독립투표가 벌어졌고 크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2014년 4월 6일 돈바스 전쟁 #영토 #민족 #이념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으로 인해 친러 성향이 강하던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돈바스 지역은 원래 소련으로부터의 독립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가 강한 곳이었지만 우크라이나의 계속되는 부정부패와 정책 실패는 돈바스의 상황을 계속 악화시켰다. 돈바스 지역의 평균임금은 1993년에는 소련 독립 시기(1991년)에 비해 80%나 하락할 정도였고 헐리우드에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리고 싶으면 이곳을 촬영해간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이 이후로 돈바스는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도 원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유로마이단 혁명이 벌어졌고 이 기회를 틈타 우크라이나 안에서 자치를 원하던 지역들이 모두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시위나 군사행동을 벌였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군사행동을 벌인 곳이 바로 돈바스였다. 이 전쟁은 결국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이것이 확대된 것이 바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2014년 4월 30일 우루무치 역 테러 사건 #영토 #민족 #식민지 시진핑 주석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시찰한 직후 벌어진 위구르족의 자살 폭탄 테러다. 총 79명 사망. 원래 위구르 땅에는 몽골계 유목민인 준가르라는 사람들이 살았다. 이들은 끝까지 청나라에 저항하면서 청나라를 괴롭혔고, 건륭제는 준가르 사람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단행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메운 것이 준가르 이전에 원래 살던 위구르족과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등이다. 근대에 들어서 청나라의 힘이 약화된 후에는 독립과 병합을 반복하다가 1955년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청나라 때부터 독립 혹은 이슬람 문화권과의 병합을 원하던 이 지역 사람들이 다시 중국 정부에 불만을 품게 된 것은 19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의 일이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외곽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이렇게 밀려난 빈민, 농민공들이 신장 지역까지 오게 되면서 선주민들과 한족 빈민/농민공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된 것이다. 2014년의 테러를 기점으로 시진핑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였고 이것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신장 위구르 재교육 수용소로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서 위구르인들은 강제 노동은 물론 폭행, 성폭행, 강제 개종, 강제 결혼 등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23년 9월 19일 아르차흐 분쟁 #영토 #민족 아제르바이잔과 아르차흐 공화국 사이에서 일어난 20시간 동안의 군사충돌. 이 일로 아르차흐 공화국은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Наго́рный Караба́х)라 불리는 이 지역은 원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스탈린 시절에 소련의 침공을 받고 소련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취임하면서 이 지역이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소련이 해체된 후에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가 되었는데 그곳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전쟁이 벌어졌다. 1988년부터 1994년까지의 1차 전쟁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승리해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했지만 202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을 벌일 때에는 아제르바이잔이 승리하면서 이 지역의 일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결국 2023년 아제르바이잔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고 아르차흐 공화국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완전히 아제르바이잔 땅이 되었다.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강 댐 건설 #영토 #자원 중국이 이 지역에 향후 댐을 건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티베트 지역에서 시작해 인도와 방글라데시로 흘러가는 이 강의 수로가 댐 건설에 의해 바뀔 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고 물을 무기로 삼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와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은 인도와 중국이 이 문제로 다시 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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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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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주민 관점에서 돌아보는 이스라엘-하마스 갈등
캠페인즈 미디어를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해당 영상은 2023년 10월 17일 촬영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이 흘렀다. 중동지역 언론인 알자지라 발표(11월6일 기준)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망자 1,400명,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9,922명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가자지구의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망자의 대부분이 가자지구에서 발생했고 희생자 중 아동과 여성의 비율이  60% 이상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인하여 가자지구 건물의 25~45%가량이 파괴됐고 주민들은 하루에 빵 2조각으로 버티고 마실 물이 부족해 염분이 있는 지하수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최악의 인도주의 재앙에 직면한 현 사태를 막기 위해 전 세계적인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90개 단체가 모여 이스라엘의 공습을 규탄하고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국제사회의 공습 중단과 휴전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부의 태도는 단호하다.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휴전은 곧 하마스에 대한 굴복이고 지상작전이 인질 구출의 유일한 길”이라고 공언하며 가자지구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스라엘 국방장관 요아브 갈라트 역시 “전쟁이 끝나면 하마스는 더 이상 가자지구에,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며 “만일 가자지구의 주민들이 그에게 먼저 도달한다면, 전쟁이 단축될 것”이라고 언급하였고, 가자지구 주민들이 하마스의 지도부를 제거하기 위해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또한 이 비극의 중요한 역할자인 미국은 가자지구에서 급증하는 민간인의 피해가 하마스의 인간방패 전술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마스 게이트(?) 이스라엘과 미국의 입장을 정리하면 이번 전쟁의 시작은 하마스에 있고 종착역 역시 하마스 제거에 있을 것이다. 또한 그동안 팔레스타인에 온정적인 시선을 두었던 많은 국제사회 역시 10월 7일 하마스가 일으킨 민간인에 대한 무참한 테러와 살해, 납치에 대해서 큰 충격을 받았고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10월 7일 이후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공습과 지상군에 의한 공격, 전기와 물, 식량과 의약품을 막아버리는 반인도적 행위에 대해 크게 우려하며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하고 있다. 가자지구의 민간인 피해가 급증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하마스 원죄+원흉론’은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군사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때로는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주민을 분리(주민대피 명령 등) 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주민을 동일시(전기, 물, 식량, 의약품, 연료 차단)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나크바(Nakba)와 나크사(Naksa)  이 사태를 처음 접한 분들에게는 10월 7일이 시작이겠지만 팔레스타인 주민들 입장에서는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이 분쟁의 시작이다. 1945년경 토착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소유한 팔레스타인 영토는 87.5%이고 유대인은 6.6%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1947년 유엔이 제시한 분할안은 유대 국가에 56.47%, 아랍 국가에 42.88%, 예루살렘은 국제 관할 지역으로 0.65%를 할당하였다. 이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시작된 제1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전체 영토의 78%를 차지하게 됐다. 그 결과 75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난민이 되어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건국일을 ‘나크바(대재앙)’라고 칭하고, 아직까지도 현 이스라엘 지역을 ‘1948년 영토’로 부르며 빼앗긴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1967년 6월, 3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현재의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동예루살렘이 모두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당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때를 나크사(Naksa, 패배 또는 악화)라고 부르며 또 하나의 커다란 재앙으로 기억한다. 나크바 때 78%의 영토를, 나크사를 통해 나머지 22%의 영토마저 빼앗긴 것이다. 또한 팔레스타인 난민 30만 명이 추가로 발생했다. 나크바에 의해 이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 / Benny Morris의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탄생] 커버 사진,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 1989. 팔레스타인 난민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을 담당하는 기구인 UNRWA(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기구)의 발표에 따르면 1차 중동전쟁 이후 75만 명이었던 팔레스타인 난민은 오늘날 590만 명으로 늘었다(UNRWA 등록 기준). 또한 최근까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가자지구, 동예루살렘에 약 160만 명의 난민들이 캠프 내 외곽에서 살고 있다. UNRWA 2022년 10월 보고서에 따르면 가자지구 난민캠프의 81%는 국가 빈곤선(National Poverty Line) 아래의 삶을 살고 있고 60%의 가족이 친척으로부터 식량을 빌리거나 도움을 요구하고 있다. 16세 이상 여성의 4%만이 고용되었고 9%가 구직 중이며 나머지 87%는 무직이거나 구직을 포기했다. 16세 이상의 남성은 29%만이 고용되었고, 29%가 구직 중이며, 나머지 42%가 무직이다.   70년 이상 세대와 세대를 걸쳐 난민캠프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현실은 열악하고 극단적이다. 특히 2차 인티파다(2000~2005년) 이후 캠프에서 태어난 팔레스타인 젊은 세대들에게 삶은 시작부터 감옥이었다. 이들에게 난민캠프에서의 삶은 공습과 공격이 반복되는 죽음과 절망의 삶이었다. 캠프의 많은 젊은 세대들은 각자가 선호하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 가입하여 이스라엘 점령에 대한 저항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스라엘은 이들을 체포하고 제거하기 위한 공습과 공격을 반복했다. 그리고 난민캠프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희생된 이들은 ‘순교자(Martyr)’로 추앙받는다. 실제 팔레스타인 어디를 가나 순교자를 기리는 포스터를 쉽게 확인할 수 있고, 피해 가족은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된다. 분리장벽과 정착촌 2002년 2차 인티파다 이후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동예루살렘에 설치된 총 길이 713km의 10미터 높이에 달하는 콘크리트 분리장벽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동을 철저하게 막고 팔레스타인 마을을 두동강내며 주민들의 삶을 고립시켰다. 이 분리장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발부한 허가증이 있어야 하고, 허가증이 없으면 이동은 불가능하다. 또한 장벽 사이사이에 위치한 이스라엘군의 감시탑과 검문소, 상시 주둔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존재는 주민들에게 상시적 위협과 공포감을 심어 주었다.   또한, 가자지구가 2007년 이후 이스라엘에 의해 완벽하게 봉쇄됐다면 팔레스타인의 또 다른 점령지역인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불법정착촌으로 인해 야금야금 영토가 잠식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국제사법재판소와 유엔인권기구는 이스라엘 정착촌을 불법으로 규정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개의치 않고 1967년 이후 지금까지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 정착촌을 확대해왔다. 이러한  불법정착촌은 팔레스타인 전체 주민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폭력 중 하나이다. 이스라엘에 의한 군사공격이 2008년 이후 반복되고는 있지만 시작과 끝이 분명한 반면, 정착촌은 자신들의 마을 인근에서 계속 크기를 확장해 나가는 암세포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정착촌이 신규 건설되거나 확장되면 주변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토지는 필연적으로 몰수되고 거주민은 추방당하게 된다. 이에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힘을 모아 집회 및 시위를 진행하지만 이스라엘 군의 진압에 막혀 정착촌의 건설을 막지 못하고 있다. 서안지구 나블루스 인근의 쿠파 카둠(Kufr Qaddum) 마을은 2011년부터 십년 이상 매주 금요일에 정착촌 반대 집회를 진행하고 있지만 수십 명의 마을 주민이 부상당하고 수백 명이 체포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쿠파 카둠 마을의 정착촌 반대 집회에 참여한 주민과 이스라엘 군인들 / Mohamad Torokman/Reuters 4차례의 가자 침공 이번 전쟁 이전에도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은 공식적으로 4차례 반복됐다. 2008년 12월 27일부터 2009년 1월 18일까지 3주간 이어진 첫 번째 가자전쟁은 이스라엘 측 사망자 13명, 가자지구 사망자 약 1400명을 기록했다. 이후 2012년 11월 이스라엘이 하마스 최고사령관을 암살한 것을 계기로 하마스 측에서 로켓 보복 공격을 하자 이스라엘이 다시 가자지구를 공습하여 제2차 가자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 동안 팔레스타인 측 167명과 이스라엘 측 4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2014년 6월 이스라엘 소년 3명이 서안지구에서 살해되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동시에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측 2251명이 사망했고, 이스라엘 측 72명이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2021년 5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군과 경찰이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공격하자 하마스는 이스라엘 측에 로켓을 발사했고 이스라엘은 또다시 가자지구를 폭격했다. 이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232명이 사망했고, 이스라엘 측도 12명이 사망했다.  단순히 사망자 수만 비교하면 이스라엘 측 1명이 사망했을 때 팔레스타인은 약 40명이 사망하는 셈이다. 여기에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 피해 등을 더하면 양측 간 피해 규모는 크게 차이가 난다. 국제인도법은 민간인에 대한 고의적 공격을 금지하고 기대되는 군사적 이익보다 민간인 희생이 과도한 공격은 금지하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귀환을 위한 대행진(Great March of Return)  2018년 3월부터 19개월 동안 이스라엘 봉쇄 철회와 난민 귀환권 보장을 요구하며 가자지구에서 진행된 귀환 대행진(Great March of Return) 시위는 가자지구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충격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다수의 참석자들이 비무장 비폭력 방식으로 시위에 참석했지만 이스라엘 군은 최루탄과 고무총탄, 실탄을 발사하며 시위를 진압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발표에 따르면 아동 46명을 포함하여 214명이 사망했고, 36,100명이 부상당했다. 이중 아동은 8,800명이다. 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전체 부상자 중 22%(8천명이상)이 실탄에 의한 부상이고 실탄 부상 중 88%(약 7천명 이상)이 손과 발에 부상을 당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저격수에 의한 조준 사격임을 의미한다. 당시 가자지구에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던 국경없는의사회는 이스라엘 총격으로 중상을 입은 수많은 환자들은 대부분 다리 부상 환자이고 온전한 치료가 필요함에도 가자지구의 의료 서비스 붕괴로 인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체 인구 200만 명 중 36,100명이 부상당했던 비폭력 저항운동의 결과는 지켜봤던 국제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지만, 가자지구 주민들에게는 부상자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 친척이었을 것이기에 그 때의 충격과 분노는 감히 예상하기도 어렵다.  귀환을 위한 대행진에 참여한 사람들 / The Palestinian Information Center 하마스와 파타에 대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생각 2023년 9월에 있었던 팔레스타인 정책조사연구센터(Palestinian Center for Policy and Survey Research)의 여론조사(2023년 9월 6~9일, 127개 장소, 1270명 팔레스타인 성인 대면 인터뷰, 오차 범위 +/-3%)에 따르면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PA)에 대해 응답자 중 87%가 부패했고 하마스에 대해 72%가 부패했다고 응답했다.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자격에 대해서는 27%만이 하마스의 대표성을 인정했고 파타는 24%에 불과했다. 하마스와 파타 모두 대표 자격이 없다는 응답은 42%였다. 또한 새로운 의회 선거를 개최한다면 응답자 중 36%가 파타를 지지하고 34%가 하마스를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전체 응답자 중 2/3가 현재 상황이 오슬로 협정 이전보다 악화됐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여론조사기관인 아랍 바로미터의 여론조사(2023년 9월 28일~10월 8일, 가자 399명, 서안 790명 인터뷰)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67%가 하마스 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72%가 하마스 정부는 부패했다고 응답했다. 78%의 응답자는 식량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이고 그 원인에 대해 31%는 하마스 정부의 관리 잘못이라고 응답했다. 정당 선호도에 대해서도 응답자의 27%만이 하마스를 택했다. 이는 2021년 조사에서의 지지율(34%)보다 7% 하락한 수치이다. 또한 응답자 중 73%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선호했고, 58%가 2국가 해결안을 지지했다.  비단 이 2개의 최신 여론조사 결과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매년 방문하여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하면 압도적인 비율로 현재 지배 정당인 파타와 하마스에 대한 신뢰도가 낮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두 정당은 부패했고 독재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렇듯 낮은 신뢰와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하마스와 파타가 건재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 때문이다.   신규 무장세력 등장과 이스라엘의 대응 팔레스타인 통치세력인 파타와 하마스의 부정부패와 독재로 인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지만, 이 역시도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 하에서는 용이치 않다. 반복적인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과 서안지구 공격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일상에서의 사회적 경제적 이슈보다는 군사 점령으로부터 생존권을 확보하고 이를 위한 무장 투쟁 방식의 해결책을 우선 고민하게 했다. 그 결과로 서안지구 나블루스와 제닌 지역에 신흥 무장 조직들이 탄생하게 되고, 파타와 하마스에 실망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들에게 열광하게 된다.  또한 네타냐후 총리는 2022년 12월 극우파 종교적 시온주의자당과 초정통파 사스당,  통합토라유대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하면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정부를 구성했다. 그동안의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던 2국가 체제마저 던져버리고,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하에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 확대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네타냐후의 집권 이후 이스라엘군은 신흥 무장 조직들을 테러리스트라 명명하고 나블루스와 제닌 캠프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2023년 2월 이스라엘은 서안지구 나블루스를 공격하여 최소 11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고 80명이 부상 당했다. 이중 6명이 신흥 무장 조직 ‘라이온스 덴’의 조직원이라고 이스라엘군은 발표했다. 또한 2023년 7월 인구 1만 8천 명 규모의 제닌 난민캠프에 지상군 1000명을 투입하는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했다. 이는 서안지구에서 20년 만에 발생한 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으로 팔레스타인 측 12명이 사망했다. 캠프 전체 인구의 1/3이 대피해야만 했다.  팔레스타인 주민 시선으로 바라본 이스라엘-하마스 갈등 앞서 언급한 주요한 사건 외에도 이스라엘 점령 폭력과 저항 투쟁, 테러와 전쟁범죄는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오슬로 협정 이후 수립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와 하마스는 주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상실했고, 이스라엘의 군사점령 정책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기본권을 지속적으로 박탈했다. 특히 2008년 이후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은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공포와 절망을 심어주었고, 2021년부터 가중된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군사공격과 정착촌 확산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증오와 분노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바라보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갈등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영토에서 몰아내는데 혈안이 된 이스라엘이라는 존재와, 팔레스타인 주민의 민생과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지만 이스라엘에게만큼은 지속적으로 무장저항하는 하마스와의 대결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습하면 사람들은 하마스를 환호할 수밖에 없고 하마스의 극단성과 선명성이 더욱 부각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를 위한 해결방안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무력공격으로 매일 수백 명 씩 민간인들이 죽어나가며 그 사망자 중 절반 이상이 여성과 아동이다. 이미 이스라엘에도 민간인 1,400명이 사망했고 팔레스타인 사망자 역시 1만 명을 돌파했다(11월 7일 발표). 이스라엘과 미국은 계속 하마스의 테러와 민간인 인질 납치를 반복 강조하며 가자지구에서의 군사작전을 정당화하고 있다. 명백한 것은 지금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은 단순히 하마스 제거를 넘어서 팔레스타인 전체 주민에 대한 집단처벌(Collective Punishment)과 전쟁범죄를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전기와 물, 생필품, 의료품을 모두 차단한 상태에서 군사작전을 개시했고 서안지구에서는 시위자에 대한 발포, 무차별적 체포, 도시 봉쇄를 진행 중 이다. 모두 국제인도법과 국제인권법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말한다. 이 사태는 하마스가 시작했으니 하마스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들 중 60% 이상이 여성과 아동인 현시점에서 이 희생자들이 하마스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또한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를 제거한 후에 새로운 정치세력에게 가자지구를 넘긴다고 하는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각인된 분노와 증오는 하마스가 아닌 이스라엘 점령 정책이다.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제거하기 위해 함께 희생 시킨 희생자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가족이고 친구이고 친척이다.  이번 전쟁은 처음이 아니다. 비슷한 형태로 4 차례나 반복됐다. 이번 전쟁 역시 이스라엘의 공언대로 하마스를 제거한 후에 마무리된다면 유사한 전쟁은 더 심각하게 반복될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다시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급하게 휴전을 해야 한다. 너무 많은 이들이 희생됐고 삶의 조건이 무너졌다. 이번 전쟁으로 무고하게 사망한 모든 이들의 희생이 더 이상 무의미하지 않도록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국제사회는 평화 협상을 이뤄내야 한다. 그리고 평화 협상의 가장 핵심적인 원칙은 그동안 배제됐던 이들의 의견을 우선시하고, 모두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동등하게 보장하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 ○ 본 글은 사단법인 아디에서 팔레스타인 인권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이동화 활동가의 글입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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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평화와 한국사회의 태도
캠페인즈 미디어를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해당 영상은 2023년 10월 17일 촬영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인권 조약은 무엇일까? 유엔이나 인권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세계인권선언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하루 차이로, UN 총회가 가장 먼저 채택한 것은 제노사이드 협약이다. 제노사이드 협약은 제2차 대전 시기의 잔혹행위를 국제사회가 ‘절대로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담아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결의가 무색하게도 1945년 이후의 인류는 전쟁과 학살을 반복해왔다. 학자들은 1945년 이후 냉전 시기를 두고 그것을 ‘냉전Cold War’이라 일컫는 것은 매우 서구중심적인 관점이라고 비판했다. 이른바 제3세계의 경험으로 보자면 그 시기는 격렬한 ‘열전Hot War’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1945년 8월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과 학살의 역사는 제3세계 국가들이 겪을 열전의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누구보다 빠르게 식민지, 전쟁, 학살의 기억을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했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오늘날 서구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진 채 과거의 역사를 지금과는 무관한 옛날 얘기로만 받아들인다. 최근 몇 년 사이 극동아시아에서는 대만이나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은 상황이지만,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우리와 무관한 일처럼 여겨지고 있다.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오랜 식민주의적 지배를 받아왔지만, 한국사회는 식민지의 경험을 잊어버린 채 서구 미디어의 편향적인 보도와 중동 및 이슬람에 대한 스테레오타입화된 이데올로기적 편견으로만 팔레스타인을 바라본다. 물론 조금이라도 팔레스타인의 처지나 역사를 아는 이들은 하마스의 테러로만 현재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특히 보수 개신교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이슬람에 대한 혐오적 편견과 이스라엘을 성지를 수호하는 핍박받는 유대인처럼 여기며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대개는 현재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이 프레임에 비판적인 이들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실은 둘 모두 정확하지는 않은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채 자기 땅에 유폐된 채 ‘하늘만 뚫린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다. 팔레스타인 땅에 세워져 국가로 인정받는 것은 이스라엘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건 과장된 수사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다. 그렇다면 국가간의 교전을 뜻하는 ‘전쟁War’이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담아내는 말일 수 있을까? 하마스조차 국가가 아니라 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무장정파 혹은 정당일 뿐이다. 전쟁이라기에는 너무나 비대칭적인, 압도적인 강자와 약자 사이의 관계다. 수많은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이 현재 살해되고 다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이 박살나는 상황에서, 우선은 학살을 막아야 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물론 ‘자업자득’이라느니 ‘이슬람 박멸’ 따위를 외치는 비상식적인 사람들도 있고, 그들이야말로 1945년 이후 UN의 설립과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법 및 국제사회의 노력을 깡그리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대화 상대로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단 학살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현재의 팔레스타인 문제에 ‘근본적 원인’을 해결해 갈 필요가 있다. 애초에 국제법상 불법적 상태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해 온 이스라엘의 식민지배가 없었다면 하마스가 테러를 할 이유가 없다. 하마스의 탄생과 성장을 지원해 민족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파타’를 견제하려 했던 것 역시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었다. 학살을 막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의 중요성은 오늘날 더 이상 팔레스타인이나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헤게모니 국가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가 오늘날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고, 미국에 응전하는 여러 강대국들이 부상하고 있다. 이를 과거의 냉전 시대처럼 양대 진영의 대결로만 볼 수 없는데, 러시아와 중국이 하나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100년 전 세계 1차대전 직전의 상황,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과 제국 본토 바깥에서의 국지전이 일어나던 상황과 오히려 유사하다. 다만 미국은 EU 및 NATO 국가들을 한편으로 그리고 인도-태평양 전략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냉전 시대처럼 하나의 진영을 형성하려 하지만, 그것이 성공할지는 예측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대국들 간의 또 다른 대리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가장 큰 지역으로 대만과 한반도가 꼽히고 있다. 100년 전 인류가 저지른 과오를 21세기에 다시 반복할 것인가? 과거 전쟁과 학살, 식민지배를 겪은 인류는 평화와 인권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만들어 가기를 희망했다. 그 희망이 완벽히 실현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오늘날엔 그조차도 급속히 후퇴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듯 국제질서의 전환기에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다시 평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 2차 대전 이후 탄생한 평화학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을 다음과 같이 뒤집었다.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준비하라.” 전쟁은 반드시 사회구조적 지배와 증오의 심성을 남긴다. 전쟁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의 불씨를 남길 뿐이다. 평화를 통해, 앞으로의 평화를 써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학살을 옹호하는 논리와 과감하게 단절하고, 평화에 기반해 전쟁과 지배, 착취와 억압이 없는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 그리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평범한 시민들의 자그마한 염원들이 모이는 것에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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