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애도 방식
1.  일상을 살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맨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다. 가만 있다가도 울컥 울컥 뭔가가 올라온다.  예술가라 예민한게 아니고, 예민한 사람이라 예술가가 된 것 같다.  이따금 나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매이거나 휘둘리는 게 답답해서 프리랜서 예술가가 된 건데, 여전히 나는 너무 많은 것들에 휘둘리며 산다.  2. 서른초반까지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에너지가 넘쳤던 것 같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던 20대의 패기가 살아있었다.  그 때에 나는 정치권에서 일하고 있었고, 스스로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정부 여당의 후안무치함에 분노하고, 야당의 무능함에 진저리 칠 때였다. 나는 민주당 모 의원실의 비서 나부랭이였고, 야당에게 책임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온몸이 말라버릴 것 같았다. 그때까지 슈퍼맨이라 믿었던 나의 대장이 너무나 작게 느껴졌고, 대장의 발가락도 안 되는 거 같은 나 따위는 땅굴 파고 들어갈 지경이었다. 비도덕적인 정치권력과 여기저기 구멍나버린 국정 운영, 매일매일 비상식적으로 돌아가는 상황들.  차곡차곡 무력감이 쌓였다. 국회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나는 하찮은 부품 한 톨조차 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다 내가 죽을 것 같아서 결국 그곳을 떠났다.  3. 어차피 이생망(!), 그냥 막 살기로 마음먹었다. 이전에는 정치와 정책으로 세상을 큼직 굵직하게 바꾸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나는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내 옆의 단 한 사람에게라도, 감동이나 변화를 줄 수 있는 예술, 그런 예술을 하고자 하는 예술가라면, 충분하다고.  프리 선언 8년 차. 돌아보면 참 아등바등 살았다. 뭐라도 해보겠다고 작은 작업실을 내고, 젠더 이슈를 다룬 창작 프로젝트를 하기도 하고, 청년기획자들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기도 하고, 나의 삶과 세상의 안녕을 더불어 도모하며 살고자 나름 애썼다.  그리고 얼마 전, 아마 11월 11일쯤. 인터넷에서 순천향대병원 복도에 시신이 방치돼있는 그 사진을 보고, 펑펑 울며 깨달았다.  아, 2014년 그 때 이후로, ‘극복’하지 못하고, 그냥 ‘견디면서’, 살았었구나. 해소되지 못한 마음들이 켜켜이 쌓여버린 것을, 그저 개인의 무력감으로 혼자만의 우울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옛날 왕조시대나 군사독재시대에 비하면 좋은 세상 아닌가? 나의 예술로 조금이나마 세상에 기여하고, 적지만 충분한 소득에 감사하며, 그냥 가끔 사랑하는 사람과 수다 떨면서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이 정도 인생이면 괜찮은 거 아닌가? 나의 바람은 소박하고, 나는 내 인생이 제법 만족스러운 면도 있는데, 문득문득 나를 덮쳐오는 이 무력감은 뭐지?  나는 그저. 행복하고, 안전하게,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  젠더폭력, 불평등, 기후 위기부터, 마흔 언저리의 비혼 퀴어 예술가를 향한 편견어린 시선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매일 섀도우 복싱을 하며 사는 걸로도 버거운데, 아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바라는 게 그토록 큰 일인가?  큰 일이었던 거다. 놀러나갔다가 길거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거다. 내가 불과 하루 전에 지나쳤던 바로 그 골목에서.  4. 7년 전 쯤 할로윈 때에도 이태원에 있었다. 인도를 넘어 차도까지 점령할 정도로 엄청난 인파였다. 그것은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러나 그때는, 조금 무섭기도 하지만, 흥미롭기도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여기에 나온 이유는 뭘까. 궁금했다. 사실 당시의 나는 같이 가자고 떼쓰던 친구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가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내가 내린 결론은, 모두들 에너지를 발산할 공간이 필요했구나, 라는 거였다. 학교에 갇혀있고, 회사에 갇혀있고, 자기감옥에 갇혀있던 사람들.  ‘남의 명절에 왜 난리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때도 있었다. 하지만 ‘할로윈’은, 어쩌면 핑계였을 것이다. 코스튬을 만들어 입고, 얼굴에 분장을 하고, ‘나’지만 내가 아닌 상태로, 괴상한 아우라 속에서 안전하게 나의 에너지를 표출하고 싶은 욕망. ‘할로윈’은 그저, 계기이자 통로였을 뿐.  ‘할로윈’ 무드에서는, 서로 암묵적인 약속이 작동하는 것 같다. “내 코스튬 어때 멋지지?” 사진을 찍혀도 좋고, 누군가 기꺼이 말 걸어줘도 좋은. “너 코스튬 멋지다 우리 같이 사진 찍을래?” 처음 보는 사이에도 선뜻 말 걸어볼 수 있는. 모두가 괴상한 복장으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마치 ‘We are the world’처럼, 거대한 공감의 지대가 만들어지는. 이태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다양성과 포용의 아우라.  나는 예술가다. 특히 사람들 사이의 갈등, 오해, 감정적 변화, 욕망과 같은, ‘에너지’의 흐름을 기민하게 포착해낸다. 나는 할로윈의 물결 속에서, 사탕이나, 호박인형이나, 각양각색의 분장 너머, 사람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목격했다.  ‘자기표현’과 ‘연결감’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할로윈에서 나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 암묵적이고 거대한 공감 속에서 안전함을 느끼며 즐길 수 있는 것. 월드컵 거리 응원도 나는 같은 맥락에서 본다. 붉은악마 복장을 하거나, 누군가의 손을 잡고, 굳이 광장에 나와서 많은 이들과 함께 응원하고 싶은 욕구.  5. 내게도 분출하고 싶은 에너지가 있다. 참사의 희생자나 유가족들에 대한 공감과, 분통함과, 답답함 같은 감정들이 일렁인다. 세월호 이후 ‘해소’하지 못했던 슬픔과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을 느낀다.  2014년에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밤마다 야근 뒤에 글을 썼다. 무대에 올리지 못한, 그때에 써내려간 희곡 습작들이 여전히 책장에 있다.  지금도 그렇다. 아무것도 안하고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슬퍼만 하고, 체념하고 말 게 아니라, 뭐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여전히 너무 많은 것들에 휘둘리면서 살지만, 내가 계속 예술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내가 숨쉬고 살고 싶어서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예술적 행위들을 통해, 나도 숨통 트이고, 누군가의 숨구멍을 열어줄 수 있는 예술가가 되길 원한다.  나의 예술은 작고, 큰 영향력을 갖지도 못하지만, 흩어져 알 수 없는 마음들을 발견하고, 그런 마음들이 각자의 일상을, 나아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도록, 손내밀어보고자 한다. 미쳐돌아가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내가 미친 건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염려와 고립감을 같이 떨쳐내자고 말 걸고 싶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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