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2023-10-08) 고현석 | 영어 번역가 번역은 옮김보다는 만듦에 가깝다. 하지만 번역자는 뭔가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대우와는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H6s픽사베이 번역 일을 처음 시작하고 하루에 꽤 많은 시간을 작업에 할애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당시 매우 어렵게 얻은 일거리를 붙잡고 하루 12시간 넘게 번역에 매달렸다. 그렇게 몇년 동안 일하면서 나름 노하우도 생기고 번역료도 어느 정도 받게 됐지만, 이젠 허리 통증 등 몸이 안 좋아져 장시간 작업하기 힘들다. 초기의 절반쯤이나 일할까. 나는 주로 과학 단행본을 번역한다. 처음에는 긴 호흡의 글과 싸움하는 게 쉽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신문사와 뉴스통신사에서 일하면서 짧은 글을 쓰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은 원저자의 문장을 매우 충실하게 우리말로 옮겨야 하는, 매우 지루한 작업이다. 가끔 원저자가 잘못된 내용을 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원문을 뜯어고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약간 고민하다 결국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 뒤 편집자와 나중에 상의하기로 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광고 늘 마감에 쫓기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외국어 문장을 우리말로 옮긴다는 것이 애초 가능한 일인지 하는 생각을 쓸데없이 많이 하게 된다. 어떤 날은 어떻게 번역해도 문장들이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Absence of evidence is not evidence of absence.” 내게 번뇌를 일으키게 만드는 전형적인 문장이다. ‘코스모스’의 저자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 영어 문장을 직역에 가까운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라고 옮길 것인지, 조금 풀어서 “증거가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옮길 것인지 며칠을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풀어서 번역하면 이해는 쉽지만 원저자의 글맛을 살리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런 고민을 별로 하지 않는다. 몇년 번역 일을 하면서 요령이 생겼거나, 무감각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광고 광고 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문제들은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문제일 수 있다. 생계형 번역가인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수입, 즉 번역료와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수십권 책을 번역하면서 계약서에 명시된 날짜에 번역료를 받은 경우는 몇번 안 된다. 지급일에 입금을 기다리다 출판사에 연락하면 담당 편집자는 매우 미안해하면서 다음 달 또는 그다음 달에 반드시 지급하겠다고 약속한다.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출판사와의 관계에서 을인 처지이기에 다음에 주겠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담당자에게 밉보이면 차후에 내게 일거리를 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번역 단가 문제도 크다. 내 경우 초보 딱지를 떼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된 몇년 전에 받던 번역료와 지금 받는 번역료가 거의 같다. 심지어 1990년대와 비교해도 거의 같은 수준이다. 번역료 책정에는 물가상승 요인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번역 단가를 올리기 위한 협상은 위험하다. 그러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은 경험을 한두번 하며 웬만해선 출판사가 제시하는 단가에 맞추는 것이 결국 이득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광고 가끔 원서를 검토해달라는 의뢰를 받곤 한다. 출판사에서 책이 얼마나 시장성이 있을지 판단하는 데 참고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번역자에게는 계륵 같은 일이다. 책 전체를 읽고 출판사가 원하는 양식대로 정리해야 하므로 원서 검토에 걸리는 시간은 동일 매수의 번역 원고를 작성하는 시간보다 길다. 그럼에도 며칠 시간이 필요한 검토 의뢰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검토비 명목으로 주는 10만~20만원보다도 출판이 결정될 경우 자신이 번역을 맡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몇년 동안 번역 일을 하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은 언제 이 일을 그만두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모든 프리랜서가 그렇듯이 번역가도 일거리가 더는 들어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산다. 그럴 때마다 이번 책만 마감하고 차분하게 미래를 생각해 보자고 결심하지만,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 책을 번역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좌절하곤 한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문장도 어떤 번역가의 손을 거쳤으리라. 그 번역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
2
·
[6411의 목소리] “오늘도 무사히, 나는 퇴근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나는 퇴근하고 싶습니다” (2022-07-27) 백재민 건설노동자 서울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긴 20일 오후 건설노동자들이 서울 강동구 한 건설현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찬물로 땀을 씻어내고 있다. 연합뉴스 새벽 6시. 일출과 함께 하늘 빛깔이 불그스름할 즈음, 작업복을 챙겨 입고 인력사무소로 향할 때면 참새들만이 무던한 하루의 시작을 반겨준다. 새벽 댓바람부터 인력사무소 입구는 사무소장의 ‘간택’을 기다리는 막일꾼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막일을 하려면 먼저 인력사무소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품삯은 인력사무소가 원금인 10만원의 20%를 떼어간 뒤 나머지 7만~8만원 정도를 받는다. 내가 사는 경북 포항은 다른 지역들보다 임금이 적은 편이다. 인력사무소장은 ‘쓸 만한’ 사람들을 선택해 추린다. 여기서 ‘쓸 만한’ 사람들이란, 장기근속할 것 같은, 힘 좀 쓸 것 같은 사람을 뜻한다. 새벽부터 사무소장의 간택을 기다리던 사람 중에는 선택을 받지 못해 허탕만 치고 돌아가는 이들도 많다. 그들 중에는 힘없는 노인이 많다. 광고 현장 형태는 제각각인데, 내가 작업했던 현장은 제철소나 항만 같은 곳이었다. 현장에 도착하면, 간단한 작업 지시를 받고 바로 작업을 개시한다. 고된 노동이 두렵다가도 작업을 시작하면 몸이 어느덧 적응한다. 그렇게 작업을 하다 보면 같은 그룹 안에서도 서열이 나뉜다. 인력사무소에 일을 맡긴 사쪽은 관리직 직원을 끼워넣어 일용직들을 감독하게 한다. 그러면 일용직들은 관리직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깐깐한 관리직에게 찍히기라도 하면 그날은 두배로 고생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일용직 사이에서도 ‘짬밥’에 따라 서열이 생긴다. 막일을 오랫동안, 꾸준히 했을수록 에이스 대접을 받는다. 다양하고 위험한 작업을 오랫동안 섭렵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받는 것이다. 정오쯤, 점심시간이 찾아오면 또 다른 하청업체에서 조리한 도시락을 일용직들의 손에 쥐여준다. 그러면 너 나 할 거 없이 땅바닥에 둥그러니 앉아 도시락을 까먹는다. 수많은 노동자가 길거리나 땅바닥에서 식사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관리직들은 식당에서 식사하니, 일용직들만이 남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식사를 한다. 작업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점심시간이야말로 막일꾼들의 세계가 계급사회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광고 광고 그렇게 점심을 먹고 작업을 재개하면 너 나 할 거 없이 다들 늘어진다. 그 시간이 되면 관리직들은 눈치 봐가며 일용직들에게 휴식 시간을 준다. 그때 연장 쥔 손으로 땀을 닦아가며 마시는 물은 천상의 맛이다. 그 뒤 작업을 정리하고, 오후 4시쯤 일이 끝나면 먼지를 털어내고 관리직들 몰래 함께 담배를 태운다. 이때는 알 수 없는 ‘동료애’가 싹트며, 노동의 참맛을 함께 나눈다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고된 노동을 하루이틀 함께 하다 보면 처음 만난 동료들과도 가까워지게 된다. 함께 일했던 이들은 용돈벌이 삼아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막일을 자신의 ‘생업’으로 삼은 사람들이었다. 정규직들이 싫어하는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배정받아 일하다 보면 부러지고 깨지는 부상은 물론,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는 이들도 생겨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부상과 죽음을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현장에 투입되기 전에 안전교육을 받게 돼 있지만, 막상 사고가 나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산재보험이 있긴 하지만, 일용직이라는 이유로 급여가 깎이기도 하고 그마저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광고 나의 부친 역시 막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부친은 얼마 전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인력사무소와 원청이 산재 책임을 부친 개인에게 떠넘겼고, 혈혈단신으로 살아가는 부친은 졸지에 생존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또 어느 날은 인력사무소에 나가보니 함께 일하던 정씨 아재가 보이지 않았다. 주말 빼고선 매일같이 인력사무소로 나오던 정씨 아재였다. “정씨 아재가 안 보이네요. 무슨 일 있습니까?” 하고 다른 아재들에게 물으니, 잠시 침묵 뒤 기가 차는 답변이 돌아왔다. “항만에서 화물 싣다가 죽어버렸다….” “회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하고 재차 물었지만, 아재들은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일용직 막일꾼의 삶은 생존과 온전한 휴식을 보장받지 못한 삶이다. 공휴일이든 주말이든 쉬지 않고 일하지만, 과로사는 물론 언제 어디서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만연하다. 출근하면서도 ‘오늘은 무사히 퇴근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이유다. 점심 뒤 현장 한 귀퉁이에서 20~30분 눈 붙이는 짧은 시간, 휴게실 푹신한 소파에서 ‘단잠’을 자는 몽환을 꿈꾼다. 우리의 작업 현장이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현장이 되기를…. 일하는 사람의 안전과 안녕을 생각하는 작업 현장, 아직은 먼 미래일까.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
4
·
[6411의 목소리] 나는 지역에서 혁명을 꿈꾼다
나는 지역에서 혁명을 꿈꾼다 (2024-04-28) 조혁민 | 두루미책방 대표 지난달 22~23일 열린 ‘국제회관 디아이티(DIT·Do It Together) 워크숍’에서 지역민들과 함께 새로 이사한 국제회관 공간에 들어갈 책장을 만들었다. 필자 제공 2008년 12월 말, 나는 이웃으로부터 폐기물처리장에 있는 재활용선별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하루 8시간 주 6일 근무에 급여는 120만원. 2009년 1월2일 첫 출근을 했다. 컨베이어 벨트로 지나가는 재활용 폐기물 가운데, 정해진 재활용품을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캔을 선별해내는 일을 맡았다. 충남의 제일 끝자락 금산은 인구 5만의 작은 지역이다. 공기가 맑고, 별이 잘 보이는 이곳에 사는 청년은 농사가 아닌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아버지 서재에 꽂혀 있던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2005)을 읽으며 혁명가를 꿈꾸었다. 혁명적인 삶,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기 위해 모부님과 나는 대안학교를 찾았다. 그러다 금산간디학교 고등과정 비인가 대안학교를 알게 되었다. 형과 나는 차례로 학교에 입학했다.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학교에 다니며 사랑과 자발성을 기반으로 한 여러 종류의 공동체 실험을 경험했다. 일주일에 한번 학교 구성원들과의 전체회의로 약속과 규칙을 결정하고 소외된 의견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다양한 시선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내 삶의 혁명을 시작했다. 광고 내가 바라본 금산은 도시만큼이나 다양한 사람과 가치가 충돌하는 곳이었다. 이주민들, 특히 비인가 대안학교 졸업생에 대한 지역민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늘 곧 떠날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그런데도 나는 금산이라는 지역에서 문화 활동을 계속했다. 친구들과 함께 글을 쓰고 공부했으며 연극, 버스킹, 축제와 같은 문화 행사를 기획하며 삶을 꾸려갔다. 하지만 주변의 여러 청년은 밥벌이 때문에 지역을 떠나야 했다. 지역에서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밥벌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8년 12월, 졸업생 청년들과 간디학교 선생님이 모여 청년문화예술협동조합 들락날락(들락날락협동조합)을 세웠다. 들락날락협동조합을 세우고 처음 맡은 일은 축제 기획이었다. 금빛시장 상인들과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지역 축제 ‘금산월장’을 열었다. 이를 통해 많은 주민을 만나게 됐다. 상인들과 매주 회의를 했고, 축제 참여자들에게 설문해 문제점을 고쳐나갔다. 축제가 매회 진행될수록 우리를 바라보던 지역민의 시선은 불신에서 믿음으로 변해갔다.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으며 문화예술 활동을 하며 먹고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역에서의 정주를 상상했다. 우리는 금산 지역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광고 광고 금산은 각종 인프라가 현저히 부족하다. 나와 또래 청년들이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머무를 수 있는 공간도 충분치 않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가고 있다. 그중 하나가 금산 청년들의 아지트가 된 두루미책방이다. 책방에서는 우리가 원하고 지역민이 원하는 프로그램이 열린다. 다수가 원하는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소수가 원하더라도 지역과 우리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지역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청년과 청소년의 욕구를 반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광고 서울을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장애인들의 이동권 이야기, 시와 소설을 읽는 낭독회, 주로 대도시에서 열리는 음악 공연,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과 철학 강의, 여성의 이야기와 여성의 글쓰기, 지역에서 쉼을 얻어 갈 수 있는 북스테이 프로그램 등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잇고, 엮어내는 활동을 진행 중이다. 지역에서 산다고 해서 문화적 욕구가 없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문화예술을 찾아 나선다. 도시에 가서 강연을 듣고 콘서트를 다닌다. 당연히 수도권 사람들보다 더 큰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지역 삶의 지속가능성을 점점 잃게 된다. 그렇기에 작은 지역에서의 문화예술 활동이 중요하며 나와 같은 문화예술가들의 밥벌이 실험은 큰 의미가 된다. 코로나로 잠시 읍 단위 거점이 아닌 면 단위 거점으로 활동을 진행해오다 올해 다시 새로운 실험을 위해 금빛시장에 있는 낡은 건물인 국제회관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실험을 진행하며 지역에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부딪히는 여러 가치를 받아들이고, 때론 싸우며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역을 상상한다. 이 실험의 끝은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계속해서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며 더 다양한 가치들을 지역에 정착시키려 한다. 더 많은 청년이 지역에서의 삶을 실험하고 자신의 욕구를 실현해나갈 기회의 장을 만들어가고 싶다. 우리의 실험은 우리의 삶을 넘어 사회와 지역의 혁명이 될 것이다. 나는 지역에서 혁명을 꿈꾼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3
·
[6411의 목소리] 재활용품에 반려동물 사체, 주삿바늘…우리 노동은 쓰레기 아니다
재활용품에 반려동물 사체, 주삿바늘…우리 노동은 쓰레기 아니다 (2024-04-22) 익명 | 재활용선별노동자 2021년 2월 서울의 한 재활용 선별시설에서 직원들이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8년 12월 말, 나는 이웃으로부터 폐기물처리장에 있는 재활용선별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하루 8시간 주 6일 근무에 급여는 120만원. 2009년 1월2일 첫 출근을 했다. 컨베이어 벨트로 지나가는 재활용 폐기물 가운데, 정해진 재활용품을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캔을 선별해내는 일을 맡았다. 손 씻을 수도시설이 없다고 했다 첫날 긴장한 채로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손을 씻어야 해 세면장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는데, 수도 시설이 없다고 했다. 화장실도 재래식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점심 식사 후에는 따로 앉아 쉴 곳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내 차에서 점심시간을 보내야 했다. 난감했지만, 차츰 개선되겠지, 생각했다. 그땐 몰랐다. 이런 상황이 1년이 지나도 변함없으리란 것을. 오후 1시, 다시 작업이 시작됐다. 그때부터 6시 퇴근까지는 잠시 쉴 틈도 없이 일해야 했다. 중간에 화장실 갈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광고 한자리에서 서서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선별작업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선별할 물건을 놓친다.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것보다 더 힘든 건, 생각지도 못한 온갖 생활 쓰레기들을 직접 만져가며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섞여 들어오는 각종 음식물 쓰레기에 반려동물 사체, 깨진 유리병, 심지어는 피 묻은 의료용 거즈나 주삿바늘까지 일일이 손으로 만져가며 일한다. 자주 다치고, 무릎이나 어깨 등 근골격계 질환 한두 가지 생기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 됐다. 시간이 가고 일이 익숙해질 즈음 여름이 왔다.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벌레가 들끓기 시작하고 악취가 심해졌다. 그것도 익숙해지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선별작업 노동자 2명이 해고되었다. 한 사람은 재활용품을 집에 갖고 간다고, 또 한 사람은 유언비어를 유포해서라고 했다. 작업자들은 이제 해고의 두려움까지 생겼다. 광고 광고 문자로 받은 해고 통보 그해 12월이 되자 재계약이란 말이 나왔다. 그동안 별 탈 없이 일해왔던 나는 당연히 재계약이 될 줄 알았다. 12월31일 퇴근 시간이 되자 회사 대표가 말했다. 재계약 여부는 개인 휴대전화 문자로 알려줄 것이라고. 퇴근 후 ‘재계약 불가’라는 통보 문자를 받았다. 영문도 모르고 해고된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2010년 1월2일, 회사로 쫓아가 재계약이 안 된 이유를 물었고, 대표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알고 있는 막연한 지식으로 회사 측이 사전 통보 없이 해고했으니 3개월치 급여를 내놓으라고 했다. 대표는 정당한 계약 해지여서 그럴 의무가 없다고 했다. 허탈하고 분한 마음에 시청과 고용노동청을 찾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회사 측과 같았다. 정당한 계약 해지란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이고, 누구를 위한 고용노동청이란 말인가. 광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보던 남편이 노동조합에 문의해 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노동조합에 가 보니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당장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함께 해고된 동료 4명과 함께 복직 투쟁을 했다. 그렇게 75일간의 투쟁 끝에 우리는 2010년 3월25일 복직 통보를 받았다. 해고 뒤 약 3개월 만이었다. 복직하고 보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수도도 놓여 있고, 비록 비닐하우스지만 휴게실도 생겼다. 이후 여러 명이 노조에 가입했고, 조합원이 늘면서 단체교섭도 시작했다. 휴식 시간과 휴가도 확보했다.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한 투쟁 2015년 재활용 선별시설에 새 공장이 세워졌다. 자동화 시스템을 갖춘 곳이라고 했다. 자동화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손이 닿지 않을 순 없다. 이 시스템이 원활히 돌아가도록 선작업과 후작업은 사람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동화라는 말이 그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려 버렸고, 매번 바뀌는 새로운 업체들은 우리 임금을 깎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투쟁과 복직의 연속, 그 투쟁들은 더 나은 조건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생존의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지금도 재활용선별장에서 일한다. 이 일을 시작한 지도 어언 15년이 지났다.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 변하지 않은 건 재활용 선별작업 노동자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의 노동으로 선별된 재활용 쓰레기는 가치 있는 무언가로 다시 태어나지만, 우리의 노동은 여전히 매립장에 쓰레기들과 함께 매몰되고 있을 뿐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3
·
[6411의 목소리] 정부가 허락한 병원 노예, 간호조무사 실습생
정부가 허락한 병원 노예, 간호조무사 실습생 (2023-10-16) 임정은 | 간호조무사·민주노총 서비스연맹 특성화고노동조합 운영위원 지난 8월30일 국회 소통관에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이 간호조무사 실습생 최저임금 청구 소송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 제공 저는 2022년 9월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해 10개월째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조무사입니다. 간호조무사가 되기 위해서는 740시간 이론수업과 780시간 의료기관 실습을 거쳐 시험을 보고 합격해야 합니다. 환자의 생명, 건강과 관련된 일을 하는 만큼 이런 과정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780시간 실습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이 아니라, 온갖 잡일과 허드렛일, 심부름 등으로 채워진다는 점입니다. 병원의 부족한 인력을 메꾸는 일을 하는데 ‘실습’이란 이유로 임금도, 노동법의 보호도 받지 못합니다. 광고 저는 정형외과 병원에서 약 5개월 동안 실습했습니다. 주로 환자 대기실 의자 청소, 진료실 문 열어주기, 환자 혈압 및 체온 재기, 원무과로 환자 안내 등 단순 업무를 했습니다. 그러다 실습생 관리 담당자인 간호부장이 갑자기 자기공명영상(MRI) 부서에서 실습하라고 하더군요. 그곳에서 환자들 자기공명영상 검사 안내를 했는데, 한달 뒤 신규 직원이 채용되더니 제 업무를 하더군요. 저는 또 다른 부서로 옮겨졌고요. 자기공명영상 부서 직원을 구할 때까지 임시방편으로 간호조무사 실습생에게 업무를 맡겼던 것입니다. 제가 운이 없었던 걸까요? 아닙니다. 실습생 대부분 단순 허드렛일로 시간을 보내는데, 심지어 빨래, 직원 커피나 우체국 심부름, 병원 에어컨 청소를 하며 시간을 채우기도 합니다. 일부 병원은 간호조무사 학원에 연락해 ‘우리 병원에 실습생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답니다. 광고 광고 지난해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에서 간호조무사 실습생 603명을 대상으로 병원실습 실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업무가 주요 실습 내용에 있는지 묻는 말에 71.3%가 ‘그렇다’라고 응답했습니다. 부당한 업무로는 잡무, 허드렛일이 71.9%로 가장 많았고, 병원 직원 개인 심부름(49.1%), 청소(41.2%)가 뒤를 이었습니다. 병원 특성상 감염 등 산업재해를 당할 우려가 크지만, 간호조무사 실습생은 노동자가 아니기에 다쳐도 산재 적용을 받지 못합니다. 환자 혈당을 체크하다가 주삿바늘에 찔려도 개인 돈으로 검사를 진행하라고 하거나 방역 마스크 하나 던져주고 감염병실에서 혈압을 재라고 시켰던 사례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습생이 결핵에 걸리거나 감염돼도 병원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광고 보건복지부의 방관 아래 병원들이 간호조무사 실습 제도를 통해 인력난을 해결하는 사이 실습생은 그저 혼자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매년 간호조무사 시험에 응시하는 이는 약 4만명에 이릅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렇듯 무임금으로 노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8월 말, 실습병원 병원장을 상대로 임금청구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임금청구는 저의 780시간 노동에 대한 정당한 권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근로자성 여부를 형식이 아니라 실질에 비추어 종속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고 합니다. 형식은 ‘자격 취득을 위한 실습’이지만, 실제로 병원에서 지시하는 노동을 했다면 노동자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2016년 고용노동부는 실습생, 수습생, 수련생 등이 교육 없이 단순 노동력으로 활용되는 문제를 막기 위해 ‘일경험 수련생에 대한 법적 지위 판단과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습니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직무교육 프로그램 없이 업무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업무를 지시하는 등의 방식으로 일경험 수련생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경우’, ‘교육·훈련 내용이 지나치게 단순·반복적이어서 처음부터 노동력의 활용에 그 주된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경우’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수련생이 사실상 근로를 제공한다면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근로자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간호조무사 실습생은 노동자로 인정돼야 합니다. 저의 소송이 간호조무사 실습생들의 권리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첫 시작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소송으로 다른 간호조무사 실습생분들도 용기와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간호조무사 실습생 노동착취 문제가 알려지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기를, 실습생의 노동 사각지대가 없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간호조무사 실습생은 정부가 허락한 병원의 노예가 아닙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2
·
[6411의 목소리] 일본에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려면
일본에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려면 (2024-04-15) 이동석 | 재일동포 지난해 10월29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필자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과 함께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 고교무상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김창섭 제공 나는 1952년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다. 일본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8살에 조선 사람임을 자각하게 됐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조선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재일동포 동급생과 일본학교 내에 ‘조선문화연구회’를 만들고 그때까지 썼던 일본 이름을 버리고 조선 사람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조선문화연구회에서 조선 고등학교 학생하고 교류하며 일본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포 학생들의 모임에도 참가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 사람으로 살려면 우리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한국 유학을 결심했다. 1971년 처음으로 서울에 왔고, 1973년 한국외국어대학 프랑스어과에 입학했다. 1975년 11월 보안사 요원이 하숙집에 와서 영장 없이 나를 연행했다. 40일간 보안사에 감금된 채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당하고 나는 ‘간첩’이 됐다.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배우고 싶어서 가입했던 조선문화연구회에서 총련계 사람을 만나 이야기했다는 게 ‘간첩’이 된 주요 혐의였다. 재일동포 17명이 구속된 이른바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이다. 나는 5년형을 받아 대전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됐다. 그러한 나를 지원해주고 격려해준 건 일본 사람들이 조직한 ‘구원회’였다. 구원회 사람은 재판을 방청하고 격려하기 위해 서울에 몇번이나 왔고 대전에도 여러 차례 면회를 왔다. 광고 나는 구원회가 없었더라면 건강한 정신으로 못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석방되어 1981년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전두환 독재정권하에서 재일동포 간첩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구속된 재일동포의 가족을 만나서 격려하고 구원회와 함께 지원 운동을 했다. 내가 많은 사람의 지원을 받았으니 이번에는 내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던 나는 한국의 양심수가 거의 석방된 1990년대 후반에 ‘재일고려노동자연맹’(고려노련)에 가입했다. 고려노련은 우리나라에 뿌리가 있는 재일동포라면 남북 관계없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이었다. 그 조합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노동차별 개선, 한국 노동자 지원과 교류를 위해 활동했다. 비록 감시를 받긴 했지만 2000년대 들어 한국에 올 수 있게 됐고, 일본과 한국 노동자의 교류 과정에서 통역을 맡아 여러 번 한국에 왔다. 광고 광고 2005년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생겼으나 일본에 사는 우리가 그 존재를 알게 된 건 한참 후였다. 국가권력으로부터 고문을 받고 교도소 생활을 오래 한 재일한국인 양심수는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를 믿지 못했고 처음에는 진상규명 신청을 망설이는 분위기였다. 나도 그랬으나 진실화해위는 한국의 민주화 투쟁의 성과라고 생각해서 2011년에 진상규명을 신청했다. 그 뒤 법원이 재심에서 ‘고문으로 강요한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2015년 무죄가 확정되었고 배상금도 받았다. 배상금은 국가 잘못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돈을 줄 테니 더는 국가 책임을 묻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대학에 재입학하기로 했다. 2017년 외국어대학에 들어가 나보다 젊은 교수님한테서 배우면서 2020년 2월에 졸업했다. 대학 생활 동안 좋은 한국 사람을 많이 알게 되어 졸업 후에도 한국에서 살고 싶어졌다. 4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에서 살면서 재일한국인 양심수의 재심을 지원하고, 한국 내 난민 문제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등에 관심이 있어 모임이나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 식민지하의 아픔을 경험했고, 해방 후 4·3 사건으로 많은 난민이 생겨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한국인도 노동자로 외국에 일하러 간 역사가 있다. 한국에 있는 외국인이나 난민을 대하는 한국 정부나 국민의 태도를 보면 너무 안타깝다. 한국이 국가의 잘못을 인정해 수정하고, 외국인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을 보장해야만 ‘위안부’나 ‘징용공(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또 재일동포 차별을 없애라고 외칠 수 있다.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 활동을 하는 이유는 잘못한 역사는 고쳐야 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 책임이 한국인으로 사는 내게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나는 언제나 약자의 입장에 서서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3
·
[6411의 목소리] 휠체어로 지하철타기, 뭐가 문제냐구요?
휠체어로 지하철타기, 뭐가 문제냐구요? (2022-07-20) 황시운 | 소설가 휠체어 생활자가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를 힘겹게 건너고 있다. 백소아 기자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서 산책하듯 전시를 관람한 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려울 게 없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이 간단하고 평범한 일정을 실행할 용기를 내기까지 장장 11년이나 걸렸다. 2011년 봄에 일어난 추락사고로 척수가 손상되면서 하반신이 마비됐다. 그리고 척수손상 후유증으로 신경병증성 통증을 앓게 됐다. 사고 이후 내 인생은 그전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산책과 미술관을 좋아하던 나는 더는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휠체어 생활자가 됐고, 경제적으로 한없이 무능력해졌으며, 온종일 하반신이 불에 타거나 살갗을 사포로 갈아내는 것 같은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광고 하루아침에 몸의 절반을 잃고 휠체어를 타게 된 내게 세상은 불친절하기만 했다. 문밖으로 나서면 온갖 턱과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았고, 믿었던 사회안전망은 성기고 약해서 나를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했다. 게다가 마약성 진통제로도 잡히지 않는 끔찍한 통증은 번번이 내 발목을 잡았다. 세상이 내게 등을 돌렸다고 믿었다. 그리고 내게 등 돌린 세상을 피해 긴 세월 좁은 방 안에 숨어 웅크리고 있었다. 다시 산책하고 미술관에도 가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된 것은 지난해 봄. 낯선 도시의 골목을 걷고 또 걷는 꿈을 꾸기 시작한 뒤의 일이었다. 꿈이 거듭될수록 바람은 점점 더 간절해졌다. 친구에게 반복되는 꿈과 그로 인해 갖게 된 바람을 이야기하자, 친구는 지하철을 타고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인덕원역에서 친구와 만나 함께 승강기를 타고 지하철 승강장까지 내려갔다. 인덕원역은 승강기를 통해 지상에서 지하 승강장까지 어려움 없이 내려갈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다. 수많은 장애인이 이 당연한 편리를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 뼈아프게 투쟁해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승강기를 탈 때 잠시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친구와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지하철 이용이 생각했던 것보다 편리하다는 얘기를 나눴다. 이런 정도라면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휠체어를 타고 서울로 미술관 나들이를 다닐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자,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하며 용기를 북돋워줬다. 광고 광고 지하철이 도착했고 우리는 휠체어 표식이 있는 승강장을 통해 별 어려움 없이 지하철에 올랐다. 늘 그랬듯 사람들이 흘끔대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불쾌하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앞으로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잔뜩 신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그동안 왜 못하고 있었나, 자책감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하차할 역에 도착해 지하철 문이 열리는 순간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지하철을 탈 때와 달리, 내가 타고 있는 수전동 휠체어가 통과하기에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 거리가 너무 멀었다. 걷는 사람들에겐 발이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서 건너면 그만일 틈이, 휠체어를 탄 내게는 앞바퀴가 빠져버릴 것이 분명할 만큼 넓었다. 휠체어가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의 틈에 끼는 것만도 위험했고, 그 과정에서 휠체어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2차 장애를 입을 수도 있었다. 나도 친구도 어쩌면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지하철 문이 닫혔다.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버렸다는 사실에 불안이 몰려왔다. 다행히 나보다 침착하고 요령있는 친구는 지하철이 다음 역에 도착하자 내 휠체어를 뒤로 기울여 앞바퀴를 든 다음 휠체어를 밀어 지하철에서 내리도록 도와줬다. 어쩌다 보니 한 정거장을 더 와서 내리게 된 우리는 승강기를 찾아 긴 승강장을 한참 헤맨 끝에야 건너편 승강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잠시 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이 도착했다. 이번에도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 거리는 너무 멀었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휠체어를 뒤로 기울였다. 지하철 안 사람들이 나와 친구를 흘끔거렸다. 이번에는 불쾌했고 화도 났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다음 역에서 마찬가지 방식으로 친구가 도와줘 하차할 수 있었다. 휠체어 표시돼 있는 장애인용 승강장이었지만, 자력 휠체어 승하차는 불가능했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미술관에 도착했을 땐, 전시회 관람이고 뭐고 이미 진이 다 빠져버린 뒤였다. 광고 친구 덕분에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지만, 나 혼자서는 건너기 힘든 간극과 마주할 때마다 한껏 의기소침해졌다. 겨우 10여㎝ 틈이, 여차하면 내 삶을 집어삼키고 말 크레바스라도 되는 양 절망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후에 나보다 오래 장애를 가진 채 살아온 선배 장애인은 승하차 역마다 미리 연락해서 타고 내릴 때 역무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해줬다. 하지만 매번 하차할 역에 시간 맞춰 전화해 승강장으로 역무원을 불러 내리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누구도 소리 내 거절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세상은 늘 수많은 턱과 장애물을 둬 끊임없이 거절의 메시지를 던졌다. 휠체어를 타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마주해야 했던 턱과 장애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휠체어 생활자가 된 뒤 나는 매 순간 세상의 거절과 마주한다. 그리고 차곡차곡 쌓이는 거절들에 밀려 점점 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내 딴에는 용기를 내서 시도한 11년 만의 지하철 타기를 통해 세상이 여전히 내게 등 돌리고 있음을 확인했다. 내게 등을 돌린 세상에서 언제쯤 다시 산책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
2
·
[6411의 목소리] 서울 마지막 산업단지, 문래동 기계공의 하루
서울 마지막 산업단지, 문래동 기계공의 하루 (2024-04-08) 전희순 | 1인 소공장 운영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는 대부분의 공장은 10~20평 정도 되는 오래된 주택에 금속가공에 필요한 기계와 장비를 들여놓고 일을 한다. 윤주성 사진작가 아침 출근길, 일터 앞 슈퍼마켓을 지나려는데 골목이 시끄럽습니다. 얼핏 보니 영화나 드라마 촬영 중인가 봅니다. 몇년 전부터 문래동에서 가끔 마주치는 풍경입니다. 어떤 촬영을 하는지 호기심이 살짝 생기지만 출근이 늦은 관계로 궁금증을 뒤로하고 일터를 향해 걸음을 재촉합니다. 일터에 좀 늦게 도착했습니다. 지각입니다만, 늦었다고 눈치 주는 사람은 없네요. 혼자 일하는 사업장이라 그렇습니다. 문래동에 있는 공장 대부분은 1인 기업이거나 가족과 함께 일하는 소규모 사업장입니다. 10평에서 20평 정도 되는 오래된 주택에 금속가공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계와 장비를 들여놓고 일을 합니다. 광고 아무리 작은 부품이라도 완성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합니다. 문래동은 각 공정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공장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업체들끼리 잘 연결된 네트워크 덕분에 소재부터 최종 완성품에 이르는 과정이 원스톱으로 가능합니다. 경기가 한창 좋았을 때는 3천여개의 사업장이 문래동 일대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1230여개의 기계금속 관련 사업장이 문래동에 있다고 합니다. 기계 전원을 올리고 일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기계를 예열하는 동안 믹스커피를 마시면서 오늘 작업할 도면을 살펴봅니다. 도면의 형상을 머릿속으로 그려가면서 작업 방법과 가공 순서를 정합니다. 가공 공정마다 어떤 공구를 쓸지, 재료를 고정하기 위한 지그(jig, 보조용 기구)도 어떤 게 좋을지 정합니다. 마지막으로 도면을 한번 더 들여다봅니다. 도면의 지시 사항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작업하다 낭패를 당한 경험 때문입니다. 평소 성격과 상관없이 일을 대할 때는 차분하고 꼼꼼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가 뒤따르니까요. 광고 광고 준비가 끝났으면 프로그램을 짜고 기계를 세팅합니다. 제가 다루는 기계는 엔시(NC)공작기계입니다. 가공물과 공구를 세팅하고 프로그램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가공해주는 기계입니다. 수동 공작기계에서 하기 어려운, 정밀하고 복잡한 형상을 가공할 수 있습니다. 철공 일을 한 지 30년이 되었지만 기계 앞에서는 늘 긴장합니다. 아무리 숙련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칫 실수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혼자 일하는 중에 사고를 당하면 당장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더 큰 일입니다. 광고 이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합니다. 사실, 준비만 잘해놓으면 그다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작업공정을 잘 관리하고 그것에 맞게 정해진 노동을 하면 됩니다. 오후에는 필요한 재료와 공구를 사기 위해 밖으로 나섰습니다. 거리를 지날 때마다 많이 변해버린 풍경과 마주칩니다. 골목마다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공장이 있던 자리는 음식점과 카페, 술집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방송과 온라인 매체를 통해 자주 소개되더니 어느새 서울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네요. 오래되고 낡은 공장이 있는 거리가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갔나 봅니다. 우리의 뜻과 상관없는 이런 변화는 참 곤혹스럽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되었으니까요. 여기에 재개발 이슈까지 더해져 공장들이 빠른 속도로 밀려나는 중입니다. 예술인들이 문래동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런 변화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비록 불편하긴 했지만,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잘 지내고 있었거든요. 어차피 낮은 철공인, 밤은 예술인의 시간이었으니 부딪칠 일도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술인들과 협업을 한다면 침체된 철공단지에 활기를 주지 않을까도 기대했습니다만, 현실의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네요. 이 도시에서 작은 공장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문래동 공인들이 가진 기술적인 자산가치가 세월과 함께 없어질 것 같습니다. 문래동과 같은 처지에 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일본 도쿄 오타구의 사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문래동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 마을공장을 이전시키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남은 공장들이 마을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공장들은 지역사회와 환경 개선에 공헌하고 마을은 그런 공장들에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상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작은 공장이 가진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광고 이제 퇴근입니다. 아침에 늦게 와놓고 일찍 가려니 너무 좋습니다. 골목 사이로 비치는 노을이 몽글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오래도록 느끼고 싶은 정든 퇴근길입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2
·
[6411의 목소리] 나는 대리기사 노동자다
나는 대리기사 노동자다 (2022-07-13) 한기석 |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경기지부장 지난 5월12일 오전 서울 중구 동반성장위원회 앞에서 ‘대리운전기사 권익과 시민 안전을 보장하는 사회적 대책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대리운전을 시작하고 벌써 13년이 지났다. 조그만 사업을 하다가 문 닫고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친구가 매일같이 찾아와 운전면허증이 있으니 대리운전이라도 하라고 얘기한 게 그 시작이었다. 대개 그렇듯, 새로운 직업을 찾을 때까지 6개월 정도만 하리라 마음먹었다. 친구가 소개해준 업체를 찾아 “수중에 만원도 없으니 대리운전 보험료와 콜 수수료 충전금을 먼저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하니, 업체 사장님이 웃으면서 그러자고 말해 일을 시작했다. 지금도 첫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업체에서 알려준 식당으로 찾아가 “대리운전 부르신 분 계세요?”라고 외칠 때 심장이 쿵쾅거렸고, 식당 안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짧은 거리를 운전하면서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집으로 가는 길을 설명해주는 고객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장거리, 그러니까 타 지역으로도 나가기 시작했다. 자주 다니는 지역이 아닌데다 한밤중이라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경우가 잦았다. 혼자 고립됐다는 생각에 이렇게 살아야 하나 슬퍼지기도 했다. 낮과 밤을 바꿔 살면서 세상일에 점점 무덤덤해지고 이웃이나 친구들과도 점점 멀어져 가니 더욱 외로워졌고 나 자신이 외계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광고 대리운전 기사들은 밤에 혼자 일하기에, 본인이 얘기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각자의 사정이나 어려움을 알 수 없었다. 매일같이 마주치던 동료가 갑자기 사라진 뒤 2~3개월 만에 나타나 “그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 말한 경우도 있었다. 또 동료 결혼식이나 상갓집에 찾아가면 자신이 대리기사라는 말을 주변에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오기도 했다. 안타까웠고 속상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열심히 사는데 왜 당당하게 자신의 직업을 밝히지 못해야 하는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 고민이 시작됐고, 대리기사의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며 계속 나를 설득해왔던 민승 형을 찾게 됐다. 형은 나를 서울 강남 교보사거리 현장에서 진행된 첫번째 공식 회합에 데리고 갔다. 2015년의 일이다. 회합에 모인 기사들은 업체들의 갑질을 개선하고 기사들을 모으기 위한 방안에 관해 열띤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업체들의 대표적인 갑질 중 하나는 콜을 받는 프로그램을 서울, 인천, 경기 세개로 쪼개 사용료를 세배로 받는 것이었다. 장거리 콜을 받기 위해 기사들은 지역별로 쪼갠 같은 프로그램 두세개를 핸드폰에 깔고, 두세배 사용료를 낼 수밖에 없었다. 프로그램당 사용료가 한달에 1만5천원이고, 수도권 대리기사가 10만명 정도임을 고려하면 대리운전 업체들은 대략 매달 20억~30억원의 부당이익을 얻어 프로그램 개발사와 4 대 6으로 나눠 가졌다. 광고 광고 대리운전 업체들은 대리기사들을 단체보험에 가입하도록 묶어두고 보험사와 손잡고 월 7만~8만원 하던 보험료를 12만~15만원 수준으로 올리기도 했다. 물론 업체는 보험사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았다. 또 업체들은 매달 관리금 명목으로 3만원을 고정적으로 빼갔지만 뭘 관리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업체의 갑질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콜을 잘못 수락해 미안하다며 빼달라고 요청하면 온갖 쌍욕을 들어야 했다. 이런 상황들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회합에 합류하게 됐다. 함께 고민해 끌어낸 결론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이를 통해 대리기사 개개인의 의식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저녁과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고, 새벽에는 홍보 활동과 업체 갑질 철폐투쟁에 나섰다. 물론 순탄치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짓밟혀도 또 다른 새싹이 피어나는 세상의 이치처럼, 다시 모이기를 반복하면서 차츰 동료 기사들을 설득해나갔다. “우리는 한 가정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다. 왜 패배의식에 젖어 있어야 하는가?” “일하다 다쳐도 보상은커녕 휴무수당도 받지 못하는데, 함께하면 4대 보험 가입을 쟁취해낼 수 있다”고 가는 곳마다 호소하고, 기사들과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론사 인터뷰 요청에도 적극적으로 응해 대리운전 기사들의 현실을 국민에게 최대한 알리려 했다. 광고 그런 끝에 2019년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경기지부가 설립됐고, 지부장을 맡게 됐다. 이후 3년 동안 참 많이 변했다. 조합원 수는 100명 남짓에서 500여명으로 늘었고, 몇몇 시·군에는 풀뿌리 지회도 생겼다. 하지만 업체들의 갑질은 여전하고, 개선해야 할 노동조건은 수두룩하다. “나는 대리기사 노동자다!”라고 자신 있게 외치며 동료 기사들과 함께 계속 전진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1
·
[6411의 목소리] 자활근로자의 노동은 노동이 아닌가요
자활근로자의 노동은 노동이 아닌가요 (2023-10-22) 이종천 | 자활노동자 삼색 볼펜심을 보디에 하나씩 꽂고 각각 스프링을 끼운 뒤 디바이더를 삽입해 볼펜심들을 나눈다. 그 뒤에 선축을 조립하고 마지막으로 볼펜을 쥐면 손에 닿는 라바라는 고무를 끼운다. 이렇게 볼펜 한자루가 조립된다. 필자 제공 오늘도 오전 9시에 출근해 작업 책상에 앉는다. 옆자리 동료와는 눈인사나 대화도 없이 바로 볼펜 조립을 시작한다. 내가 하는 일은 검정, 파랑, 빨강 볼펜심에 스프링을 끼우고 볼펜 본체에 끼워 넣어 조립한 뒤 제대로 조립이 되었는지 딸깍딸깍 작동해보고 바구니에 담는 일이다. 이렇게 온종일 작업해서 한 사람당 하루 볼펜 400~500개가량을 만든다. 단순 작업이라 일은 쉬워 보이지만, 일하는 환경까지 수월하지는 않다. 50분 작업에 10분 휴식 주기로 돌아가는 근무시간. 화장실도 가고, 담배도 한대 태우고, 작업시간 중이라 받지 못했던 전화 통화라도 할라치면 휴식시간 10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특히 10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올 초에는 대장, 소장 협착으로 절개 수술을 받았던 나는 물이나, 커피 같은 걸 조금만 잘못 마셔도 바로 설사를 하는데, 작업시간 50분을 참다가 휴식시간 10분 안에 해결하려면 여간 고통스럽지 않다. 그렇게 철저히 시간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휴식시간 10분에서 1분이라도 늦으면 ‘지시 불이행’이라며 징계를 받기 때문이다. 물론, 징계라고 해서 무슨 큰 제재를 가하는 건 아니지만, 감독관의 눈이 늘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광고 나는 2년차 자활노동자다. 정확한 사업 명칭은 ‘자활 근로 참여자’. 노동자(근로자)가 아니란 얘기다. 그러나 자활 근로 참여자도 엄연히 법정 근로시간인 하루 8시간 일한다. 그렇게 한달을 일하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120만원 남짓. 자활 근로 참여자는 노동자가 아닌 참여자이기에 근로기준법에 따른 최저임금이나 4대 보험을 적용받지 못한다. 저소득 취약계층의 자활과 자립을 위해 마련된 자활센터 사업장은 만기 5년짜리 한시적 일자리다. 5년을 채우면, 더 일하고 싶어도 떠나야 한다. 5년간 일한 데 대한 퇴직금은 물론 없다. 퇴직이 아닌 참여 종료이기 때문에. 내 나이 60이다. 1989년부터 알루미늄 업계에서 30년간 일했다. 품질관리 기사로 시작해 관리팀장, 공장장을 거쳐 개인사업까지 그야말로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 그 결과 완성차 대기업에도 내가 생산한 제품을 여럿 납품했다. 그러나 내리막은 한순간이었다. 한번 삐끗한 사업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가진 것이라곤 몸뚱어리 하나 딱 남게 된 나는 닥치는 대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여름에 가로등 세우는 현장 일은 물론 아파트 경비, 지하주차장 관리원 등으로 열심히 일했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 고된 노동으로 건강이 나빠지며 그마저도 모두 그만두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깨 골절 수술까지 받게 되면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졌다.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는지 거주지 행정복지센터에 신청해 일정 정도 생활비를 지원받고 치료도 받을 수 있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광고 광고 3개월이 지난 뒤 구청에서 연락이 왔다. 수급자 신분이 유지되려면 자활센터에서 근무해야 한다고. 나 또한 일하고 싶었기에 잘된 일이라고 여겼다. 나처럼 자립 의지는 있으나 여러 상황으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노동자로서 일할 기회를 준다니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다. 누구든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쓸모와 노동의 가치를 확인하고 자신감과 자존감을 채울 기회라니, 그것을 또 공적으로 지원해주다니, 참으로 좋은 제도 아닌가. 그러나 한달, 두달 일을 해나갔지만 나는 자존감을 얻지 못했다. 자립과 자활을 돕기 위한 것이라던 나의 일이 정작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로서 사회 구성원의 일원이 되고 싶어 참여한 자활사업이지만, 정작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또 한번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현실이 서럽다. 정부가 취약계층에 ‘희망’을 준다며 일자리 늘리기에 열을 올리면서 정작 보호받아야 할 이들의 권리는 왜 보호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다가오는 2026년이면 나도 참여 기간이 종료돼 더는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때까지 나는 이곳에서 노동 아닌 노동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과연 나는 이 사회의 일원인 노동자로서 내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고 있는지, 값싸게 빼앗기고 있는 것인지 헷갈려 하면서.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2
·
[6411의 목소리] 나는 네번의 전쟁을 겪은 27살 팔레스타인 난민입니다
나는 네번의 전쟁을 겪은 27살 팔레스타인 난민입니다 (2024-04-01) 살레 알란티시 | 팔레스타인 난민 지난 3월2일 협동조합 쩜오책방에서 열린 ‘파주 팔레스타인 평화’ 행사에 필자가 발표자로 참여해 가자지구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H6s김지하 제공 폭발의 굉음이 시작된 2008년 여름, 나는 영어시험을 치르려고 교실에 앉아 있었다. 학교의 온 사방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제야 이스라엘 점령군이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급히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틀었다. 사람이 죽어가고 건물이 파괴되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가자에서 내가 목격한 첫번째 전쟁이 시작됐다. 내 이름은 살레 알란티시, 1997년 가자시티에서 태어났다. 세상에 나온 첫날 이래 지금까지 난민으로 살고 있다. 1948년 야브나로부터 강제 이주한 내 부모님과 가족은 칸유니스, 마가지, 마지막으로 샤티까지 여러 난민 캠프를 전전해야 했다. 2022년 12월, 한국에 유학생으로 입국한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상태다. 생계를 위해 중고차 매매업에 종사하며 팔레스타인의 인권 상황을 알리는 활동가로 살아간다. 광고 광고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 살아가는 가혹한 현실을 깨닫게 한 그날 이후, 가자에서 나고 자란 팔레스타인인으로 고통은 점점 커졌다. 지구의 어떤 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지옥과 같은 상황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75년이 넘도록 초법적인 살인과 자의적 체포와 구금에 시달려왔다. 내가 처음으로 폭격에 노출된 건 2001년, 네살 때였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나는 시장에서 산 조그만 병아리의 집을 짓고 음식과 물을 주면서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즐거움에 들떠 있었다. 해 질 무렵, 폭격이 시작되고 집이 마구 흔들렸다. 어머니가 달려와 덜 위험한 아래층 할아버지 집으로 피하라고 했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고, 미처 데려오지 못한 병아리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첫번째 폭격의 기억은 불행히도 마지막이 아니었다. 광고 살아오며 네번의 전쟁(2008, 2012, 2014, 2021년)을 겪은 나는 현재 스물일곱살의 난민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지붕 없는 감옥’으로 불리는 가자에서 19년 동안 가혹한 봉쇄 속에서 살아왔다. 사람이 아니고 새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는가? 한국에 오기 전에 내가 그랬다. 벽을 넘어, 어떤 곳이든 여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새와 달리, 나는 장벽과 가시철조망에 둘러싸인 새장에 갇혀 있었다. 가자를 벗어날 수 없는 나와 200만 주민들의 고통은 이스라엘 점령군이 이집트로 통하는 육로를 차단하고, 물건의 이동을 가로막으며, 유일한 공항을 파괴하고, 지상과 해상 봉쇄를 시작한 2006년 시작됐다. 가자지구는 기본적인 생필품마저 바닥난 거대한 감옥이 되었다. 16시간이 넘게 전기가 차단되어 봉쇄가 시작된 직후엔 완전한 암흑 속에서 지내야 했다. 작은 손전등에 의지하다 배터리가 다 되면 촛불을 켜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가자의 다른 지역에서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자동차 배터리로 등을 밝히는 것을 생각해냈다. 부엌 가스가 바닥나 나무나 종이로 불을 지펴 요리했고, 유일한 이동 수단인 자동차의 연료가 없어 주민들은 요리용 오일을 이용했다. 담수화를 위한 연료 부족으로 물을 얻기도 쉽지 않았다. 이것이 가자에서 매일 겪어야 했던 일이고, 나는 그 세세한 장면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나는 심각한 파괴와 참혹한 전쟁을 피해 안전하고 더 나은 삶을 찾으려 한국으로 왔다. 2022년 12월에 새로운 삶이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한국에 온 지 1년이 채 안 돼, 잔혹한 전쟁이 다시 가자에서 벌어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전쟁은 120일 넘게 지속되고 있다. 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인 3만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6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으며, 70%가 넘는 주택과 시설이 파괴되었다. 할아버지, 삼촌, 외숙모, 사촌 그리고 많은 내 친구들이 죽임을 당한 이후,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버지 차에 떨어진 폭탄, 여동생 집을 파괴한 포탄에도 불구하고, 기적처럼 내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은 살아남았다. 전쟁은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수천명이 고향을 잃고 난민이 되어 극한의 추위에도 텐트에서 살고 있고, 먹을 것이 없어 나뭇잎과 동물 사료를 먹으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나의 민족이 겪는 고통이 끝나기를, 전쟁이 종식되기를, 내 나라가 해방되어 모두가 평화와 안전 속에 살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광고 번역 유유리 ‘한옥커즈’ 공동대표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1
·
[6411의 목소리] 나는 배달라이더 그리고 플랫폼 노동자
나는 배달라이더 그리고 플랫폼 노동자 (2022-07-06) 위대한 | 라이더유니온 조합원 라이더유니온 조합원들이 지난달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JU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배달의민족(배민)의 실거리요금제 분석 결과를 발표하고, 배민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에 대한 검증과 안전배달료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배달을 시작하고 벌써 3년이 흘렀다. 27살에 시작해 지금은 계란 한판 나이다. 시작은 너무나 쉬웠다. 동네배달대행사에서 면허증 확인하고 보증금 10만원을 내고 리스 오토바이를 받아 일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할 때 보통 오토바이는 렌트와 리스 가운데 선택하는데, 하루 사용료가 더 저렴한데다 1년 계약기간을 채우면 내 오토바이로 가져올 수 있는 리스를 선택했다. 광고 그렇게 1년2개월을 배달대행사에서 일하다 팬데믹이 오면서, 배달의민족(배민)이나 쿠팡이츠 등에서 배달하는 이른바 플랫폼 노동자가 되었다. 당시는 너도나도 일반배달대행에서 더 높은 수수료를 받을 수 있던 배민, 쿠팡으로 갈아타던 때였다. 배민과 쿠팡은 기사 모집을 위해 돈을 엄청나게 쏟아붓고 있었다. 여러곳이 아닌 한곳만 배송하는 단건배달이라는 것도 장점이었다. ‘생각대로’라는 일반배달대행업체에선 평균 3~6개를 모아 배달을 했는데 쿠팡이츠와 배민은 한번에 한건 배달이니 여유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착오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실시간 배달수수료와 피크시간의 높은 수수료를 받기 위해선 정말 위험을 감수하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납득이 안 되는 상황도 여럿 있었다. 라이더들은 최초 배달수수료 단가를 보고 콜을 수락하는데, 안내받은 수수료와 배달 완료 뒤 수수료가 달랐다. 고객센터에 항의하니 (서로 다른 액수가 나온) 스크린샷을 찍어 보여달라는데, 구글 정책상 앱 내 캡처가 안 돼 입증할 수가 없었다. 고객센터 상담사는 정해진 가이드로만 안내할 뿐, 결국 손해를 보고 말아야 했다. 광고 광고 개인이 아무리 불합리하다고 외치고 싸워봤자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생각에 2020년 12월께 라이더유니온이라는 배달노조를 찾아갔다. 이때부터 플랫폼 회사들이 혁신적이라고 말하는 인공지능(AI) 알고리즘에 대항하면서 내 인생 첫 노조활동이 시작됐다. 사실 말이 좋아 인공지능이고 알고리즘이지, 어차피 사람이 하던 일을 사람이 프로그래밍해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았다. 일하다 보면 ‘이게 과연 인공지능이 계산해낸 최적의 일감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상황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가 대표적이다. 대치동에 있는데 잠실 롯데타워 또는 잠실새내까지 가서 픽업해서 다시 대치동 아파트로 배달하라는 콜을 받은 적이 있다. 4㎞ 이상 이동해 음식물을 픽업한 뒤 다시 4㎞ 이상 되돌아와 배달하란 것인데, 저녁시간에 편도 15~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왕복 운행하라니 이게 말이 되나? 보통 콜은 내가 있는 지역 근방에서 픽업해 근방으로 배달하는 것들인데, 인공지능은 되레 이렇게 꽤 먼 거리를 오가도록 지시를 내린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인공지능 배차 방식을 지금도 하루에 몇번씩 받곤 한다. 광고 인공지능은 그냥 플랫폼 회사의 좋은 방패막이이자 우산 아닐까? 우리가 이런 문제를 제기해도 플랫폼 회사는 인공지능 뒤에 숨기 바쁘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점을 개선해야 하는데 오히려 인공지능을 내세우며 더 갑질을 한다. 영화에서나 그려지는 인공지능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를 사는 것 아닌가 느낄 때도 잦다. ‘생각대로’나 ‘바로고’ ‘부릉’ 같은 일반배달대행업체 라이더들은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일반 직장인처럼 출퇴근 시간을 정해 놓고 일한다. 근로기준법상 이렇게 일하면 근로자로 봐야지만, 라이더들은 아직도 프리랜서, 개인사업자일 뿐이다. 이런 문제들이 산적한데 관계 부처와 정치권 움직임은 거북이보다 느리다. 두곳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는 라이더의 경우 한 사업장에서 월 소득 115만원 이상을 벌거나 93시간 이상을 일해야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전속성 기준 폐지에도 2년이 걸렸고, 이 과정에서 정말 많은 투쟁을 해야 했다. 선진국들은 다르다고 한다. 스페인만 보더라도 배달라이더를 근로자로 인정하고 알고리즘을 공개하도록 한 ‘라이더법’이 지난해부터 시행되고 있다. 배달라이더는 플랫폼 노동자의 문제점을 몸으로 받아내는 직업군이다. 사회적으로 이슈화가 되면서 많은 점이 개선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자기가 일을 하는 수수료 결정권도 없을뿐더러 평점제도에 묶여 결국엔 회사가 원하는 대로 일을 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회사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일하지만, 우리는 플랫폼 노동자이자 개인사업자고 프리랜서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도로 위에 있을 것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며, 여러분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한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1
·
[6411의 목소리] 나의 퇴직공제금은 누가 가로채 갔나?
 나의 퇴직공제금은 누가 가로채 갔나? (2023-10-29) 최우영 | 권리찾기유니온 마루지부장 ‘전국 아파트 마루시공 불법하도급 명단발표 및 폐지투쟁 돌입 기자회견’이 지난 4월11일 오후 정의당과 권리찾기유니온 주최로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나는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실내에 마룻바닥을 시공하는 노동자다. 7년 전 일을 시작할 때는 열심히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기에 죽어라 일만 했다. 하루 평균 14시간 마루를 시공하느라 온몸 관절이 골병들어 신음하는데, 받는 돈은 일하는 시간으로 환산하니 최저임금 수준이었다. 일당이 아닌 시공하는 만큼 돈을 받는 평단가 구조에서 전국 각지를 돌며 일하느라 식비, 숙박비까지 부담해야 하니 주 80시간, 90시간 노동할 수밖에 없다. 주 52시간을 지키면 최저임금도 안 되기에 장시간 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시공 전 바닥 기초작업, 청소, 짐 치우기 등 무보수 노동시간도 많았다. 왜 이 일을 시작했나, 자괴감 속에 하루하루 버티던 중 일본에서 일했던 작업자를 만났다. 일본은 하루 일당 30만원에, 노동자를 보호하고자 하루 시공 평수를 8평으로 제한한다고 했다. 미국, 유럽에서도 마루 시공자가 전문기술자로 존중받는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왜 존중받지 못할까. 마루 현장의 실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2021년 10월부터 부산에서 파주까지 5개월 동안 현장을 돌며 많은 시공자와 대화하며 하나씩 문제를 알게 됐다. 광고 건설 현장에서 마루 회사는 실내건축 면허가 없는 불법 하도급업체 ‘오야지’로 불리는 중간관리자에게 노무관리를 맡기고, 오야지는 노동자를 고용해서 마루를 시공한다. 임금 지급은 세가지 방식이 있다. 먼저, 마루 회사에서 4대 보험을 공제하고 마루 노동자에게 임금을 정상적으로 지급하는 경우다. 두번째는 마루 회사와 불법 하도급업체가 6 대 4 비율로 임금을 나누어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때 마루 회사 지급분은 정상적인 근로소득으로 신고하지만, 나머지는 3.3% 세율이 적용되는 사업소득으로 신고한다. 세번째는 불법 하도급업체가 전액 지급하는 방식인데, 이때 임금 전부를 사업소득으로 신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루 회사가 직접 고용할 때 지켜야 하는 근로기준법, 4대 보험 가입 등을 피하기 위한 꼼수였다. 광고 광고 임금은 20년째 ‘1평 시공 1만원’이다. 건설노동자에게 퇴직금을 주기 위한 퇴직공제금 제도가 마련돼 있지만(건설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 현장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건설사나 마루 회사는 공사를 시작하면 퇴직공제금으로 노동자 1인당 하루 3000~6500원을 건설공제회에 적립해야 하는데, 한달을 일했는데 한두주만 적립해주거나 아예 하루도 적립해주지 않는 현장도 있었다. 공사비에 포함된 나의 퇴직공제금은 누가 가로챈 것일까? 부당한 마루 노동 환경을 바꾸기 위해 2022년 6월 대구에서 뜻 맞는 동료들과 만나 회의하고 규약을 만들어 한국마루노동조합 설립 신고필증까지 받았다. 기자회견, 간담회, 국회 방문, 노동청 고발, 국토교통부 고발 등 정신없이 달렸다. 일과 노동운동을 병행하니 가정생활은 엉망이 되었고 생계 때문에 떠나는 동료들이 생겨 2명만 남았다. 광고 그러던 중 올해 3월 같은 현장에서 일하던 동료가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금요일에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먼저 숙소로 들어간 뒤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뉴스로만 보던 과로사가 내 옆에서 일어나다니. 결혼도 안 하고 부산에 노부모를 모시고 일만 하던 49살 동료는 산재 인정도, 어떤 사과도 못 받고 떠나갔다. 알려지지 않은 동료들의 죽음이 소문처럼 들려왔다.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지난 9월 체불 임금 사건 조사 때 마루 회사 대표는 노동청 근로감독관 앞에서 대놓고 노조원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조합원들에게 백지 근로계약서를 사진 찍게 하고 일한 일수를 기록하게 한다. 그리고 퇴직금이 적립되고 있는지 건설공제회에 확인하고 만약 누락돼 있으면 전국 노동청에 진정을 넣는다. 하지만 건설공제회는 강제수사권이 없다며 공제금 적립 감시에 손을 놓고 있고, 불법 하도급을 없애겠다던 국토교통부는 검찰에 가보라고 한다. 그 결과 지금도 마루 공사 현장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임금 체불이 여전하고, 불법 하도급과 백지 근로계약서 관행 등도 마찬가지다. 우리 투쟁을 보면서 같은 처지의 타일 노동자들도 노조를 만들겠다고 한다. 우린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기도한다. 다시 현장에서 마루를 시공할 그날이 오기를.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1
·
[6411의 목소리] 예술과 밥벌이 노동 그 사이 어디쯤
예술과 밥벌이 노동 그 사이 어디쯤 (2024-03-25) 제소라 | 읽고 쓰고 그리는 예술노동자 2016년 지역의 문화예술단체에 여성 작가로 초대를 받은 이후 내가 사는 서울에서도 차차 여러 예술활동을 하게 됐다.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과 하는 예술활동은 내 작업의 동기이자 영감이 된다. 필자 제공 매해 연말과 연초가 되면 마음이 다급해진다. 예술 관련 공공기관의 창작 지원 마감일이 모두 이때 몰려 있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활동비를 얻기 위해 주변 예술인들은 다들 ‘영혼을 갈아가며’ 지원서를 작성한다. 지원서엔 작가로서의 예술관, 그동안의 작업과 예술 활동에서의 성취, 이번 지원금으로 하게 될 작업의 예술적·사회적 기대효과를 작성해야 한다. 거기에 공공기관의 예술 지원 사업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애정 어린 관점을 더하면 더 좋다. 마흔 중반에서 쉰이 되는 동안 예술 관련 사업에 지원하여 활동하고 작업했지만, 사실 예술 작업과 관련 활동이 생계를 해결해주진 못한다. 그러나 이런 활동과 작업마저 없다면 예술가라는 명함, 작가라는 존재 증명을 사회 시스템에, 더 정확히는 문화예술 공공기관에 하지 못한다. 나는 예술 장르마저 애매하다. 미대에서 동양화를 공부했지만 전시 그룹에 속한 것도 아니고, 전시로 작업을 발표하는 화가는 아니다. 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 증명을 오래전 출간한 그림책으로 받았으니, 일러스트레이터인지 아니면 순수 미술 작가인지, 요즘은 글과 그림을 잡지에 연재하고 있으니 글도 되고 그림도 되는 작가인지, 내 정체성을 나도 잘 모르겠다. 작년엔 그림 작업이 아닌 어린이 교구 설명서에 들어가는 동시를 쓰고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옛이야기를 다시 써서 고료를 받았다. 광고 그래서인지 최근 몇년은 창작 지원과 예술 활동 지원 사업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의기소침하지만 언제까지 예술 지원 사업에 기댈 수 없는 노릇이다. 삼사십대의 작가들 틈에서 심의를 받을 땐, 젊은 작가에게 갈 지원금에 늙수그레한 선배가 주책없게 끼어들어 욕심을 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로 작가를 위한 창작 지원도 있지만, 그건 십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어중간하게 늙은 나는 올해 모든 예술 활동과 창작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방안이나 생계 수단이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나의 가장 오랜 생계 수단은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가자 사설학원에서는 더는 나를 쓰지 않았다. 강사로 일하기엔 나이가 많다고 학원장들이 말했다. 그렇다고 생판 다른 일은 구할 수 없어서, 알음알음 알아본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 평생교육원에서 미술 강사로 일하기도 하고, 지금은 어른을 위한 드로잉 강좌를 열고 있다. 부정기적으로 하는 강습 역시 생계를 해결해주진 못한다. 작업을 하면서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려고 몇년 전에는 꽤 긴 시간과 돈을 들여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땄다. 젠더폭력 상담원 교육도 받았다. 시민단체 활동가인 친구는 나에게 정말 단체에서 일할 수 있냐고, 그럼 작업은 어떻게 하냐고 했다. 나는 몇년 작업 좀 못 한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작업은 세상의 여러 경험에서 나오는 거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단체에서 일하진 못했지만 이 생각에는 변함없다. 광고 광고 나를 포함한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예술 작품을 팔아 생계를 해결하지 못한다. 나처럼 강좌를 열거나 편의점 알바, 카페와 식당 서빙을 하고, 시민단체에서 일하기도 한다. 나와 동갑인 한 작가는 청소 노동을 했다. 가끔 생각한다. 계속 벌이가 시원찮다면 나도 청소 노동이든 요양보호사든 일을 찾아야 할까? 절대 그 일이 쉬워서가 아니라 중년 여성에게 열린 일자리는 청소 노동이거나, 식당 서빙, 장애인이나 노인을 돌보는 노동 등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 그리고 글을 쓰며 예술과 관련한 일, 관련 없는 일을 오가며 일하는 노동자이고, 제도 밖 문화예술 강사이다. 나에게 밥이 되어준 노동은 연차를 더해가지만 시장에서의 가치는 높아지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예술가라고 아름답고 귀한 재능이 부럽다고 하는데, 귀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어떻게 먹고사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중간중간 쉬어가는 틈이 있긴 했지만, 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예술 작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이렇게 저렇게 메뚜기처럼 밥벌이를 찾아 뛰어다닌다. 광고 예술은 작업실에 은둔한다고 나오지 않는다. 예술 작업이든 밥벌이를 위한 생계 노동이든 삶을 꾸리는 모든 행위가 내 예술의 근원이 된다. 단 한번도 내 미래가 불안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불안과 함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건 적더라도 돈을 버는 일과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만약 나의 예술이 세상과 맞닿아 생기롭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예술가, 창작자라면 그건 밥 버는 노동의 경험 때문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
2
·
[6411의 목소리] 인디음악인들은 버리고 가는 대상인가
인디음악인들은 버리고 가는 대상인가 (2022-06-29) 안악희 | 뮤지션유니온 조합원·인디밴드 ‘리셋터즈’ 베이시스트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소규모 인원만 입장시키던 지난해 4월 서울 마포구 ‘생기스튜디오’ 공연장이 텅 비어 있다. 사진 안악희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의 일터가 폐쇄된다면 어떨까? 한참 영상편집 작업 중인데 누군가 들이닥쳐 컴퓨터 전원을 내린다면? 공장에서 일하는 도중 누군가 컨베이어를 멈추며 나가라고 한다면? 바로 이런 일이 팬데믹 기간 공연음악(라이브음악) 업계에서 벌어졌다. 지난 2년간 인디 공연은 방역수칙 변동에 따라 전면적 금지와 절반의 허용 사이를 오갔다. 음악인들은 방역수칙에 따라 환호성도 못 지르는 관객들 앞에서 간헐적으로 공연을 이어왔다. 대체로 6개월 단위로 공연을 기획하고 계획을 짜던 음악인들은 순식간에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광고 그러던 중 지난해 2월 말, 서울 마포구청 직원들이 라이브음악 클럽에 들이닥쳐 진행 중이던 공연을 중단시켰다. 식품위생법상 일반음식점으로 분류된 곳이었고, 구청 담당자들은 공연장으로 분류된 곳이 아니면 공연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항의하자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이 공연장이고, 일반음식점에서 칠순잔치 정도는 그냥 넘어갔지만 코로나19 이후에는 이것도 안 된다”는 반박이 돌아왔다. 인디음악가들의 ‘일’인 공연이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 1990년대까지 식품위생법 시행령 7, 8조에 의해 음악인들은 ‘유흥접객원’으로 분류됐고, 일반음식점에는 2인 이상 유흥종사자를 둘 수 없었다. 그러나 1999년 ‘라이브클럽 합법화 운동’으로 규제가 폐지됐다. 당시에는 이것도 큰 성과였으나, 불완전한 승리였다. 일반음식점에서 공연을 하면 ‘안 된다’는 규제를 삭제했을 뿐, 소규모 클럽의 법적인 권리를 명확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 공연을 위한 ‘정식’ 공간은 공연장과 나이트클럽이 전부다. 하지만 라이브클럽은 나이트클럽과 성격이 다르고, 영세한 소규모 라이브클럽이 법적 지위를 얻자고 유흥업소로 등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나이트클럽에서 인디음악을 올리는 일 또한 없다. 시대는 변했는데, 법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광고 광고 한국은 유독 음악공연에 엄격하다. 카페에서 미술 전시는 괜찮고, 심지어 식당에서 연극공연도 가능하지만, 이런 장소들에서 음악공연을 하면 따져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다른 장르들은 ‘예술’이지만 음악공연은 ‘유흥’ 내지는 ‘행사’다. 방역규제가 강화되면서 음악공연이 금지된 이유다. 거리두기 업종 분류표에도 ‘공연장’과 ‘일반음식점’만 존재할 뿐 ‘공연을 하는 일반음식점’은 고려 대상에서 배제됐다. 결국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기에 관료들은 이들의 외침에 대답할 의무도 없었다. 군대에서는 전쟁 중 후퇴하게 될 때 싣고 갈 물건과 방치할 물건을 분류해두라고 가르친다. 팬데믹 상황을 이에 비유한다면, 공연음악인들은 버려두고 가는 대상인 셈이다. 광고 공연음악은 대중음악의 풀뿌리다. 많은 음악인은 작은 베뉴(공연을 볼 수 있는 카페나 클럽)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베뉴는 새 음악인들이 수급되는 장이기도 하다. 여러 베뉴를 오가며 서로 교류하고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체계를 전문용어로 신(scene)이라고 한다. 지난 2년 정부는 비대면 공연 육성에만 집중했고 이미 존재하는 소규모 라이브클럽에는 아무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결국 음악인들 사이 소통은 끊어졌고 신은 무너졌다. 이 와중에 치러진 선거 유세에 수백, 수천명이 운집했을 때 ‘이게 다 뭔가’라고 생각한 이는 필자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온라인이 아무리 발달해도 오프라인을 대체할 수는 없다. 음악인들은 관객의 반응을 통해 자신과 곡에 대한 평가를 가늠할 수 있고, 관객들은 신곡의 ‘베타테스터’(시험 사용자)가 된다. 그리고 양질의 온라인 공연을 위해서는 오프라인에 필요하지 않던 장비와 인력이 필요하고, 여기에는 많은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 팬데믹이 시작됐을 때, 음악인들과 스태프들은 “당분간 공연은 없겠구나”라고 직감했다. 대중에게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공연음악은 창조적인 한편 상당히 노동집약적인 분야다. 공연과 창작을 위해 적지 않은 숙련 기간과 오랜 학습이 병행돼야 하는데, 팬데믹은 이들의 일을 빼앗아갔다. 학교, 도서관, 카페, 박물관도 문을 닫아야 했다. 심지어 공원의 벤치에도 접근금지 표시가 붙었다. 그러나 소위 ‘핵심 생산부문’이나 큰 기업들은 팬데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일을 지속했다. 모두가 강제당한 것이라 생각했던 거리두기에서 누군가는 ‘예외’였다. 이름난 대기업 중 팬데믹으로 도산에 가까운 위기를 맞이한 곳이 있다는 뉴스를 들어본 적 있는가? 음악인들도 팬데믹을 함께 이겨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공연장과 음악인들은 사실상 2년간 셧다운 상태였다. 우리의 존재와 활동은 ‘삭제’됐다. 누구를 버리고 가자고 정한 이는 누구일까? 모두가 함께 견딜 줄 알았는데 버려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2
·
[6411의 목소리] 계약기간은 절대 12개월을 넘지 않아요
계약기간은 절대 12개월을 넘지 않아요 (2023-11-06) 문세경 | 사회복지사·‘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 에너지 서울 동행단’ 사업에 참여한 문세경씨가 취약계층 집을 방문해 현관문에 방풍재를 붙이는 창호 시공을 하고 있다. 필자 제공 “이 일이 연장되면 또 하실 생각 있으세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내게 물었다. 지금 하는 일은 서울시 공공일자리인 ‘에너지 서울 동행단’ 사업이다. 여름철에는 에너지 절약을 위한 홍보와 캠페인을 하고 가을과 겨울철에는 취약계층의 노후 주택에 창호 시공을 해주는 일로, 6월1일 시작해 12월20일 끝난다. 내년에도 이어서 할 모양이다. 전문 기술이 필요한 시공 일이라 힘들다. 계속할지는 생각해 봐야겠다. 광고 연말이 다가오면 우울하다. 내년에도 일할 수 있을까? 한다면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나는 사회복지를 전공했지만, 경증의 청각장애가 있어서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다. 초등학교 5년 때 갑자기 청력이 나빠졌다. 보청기를 끼려 해도 나의 청력에 맞는 보청기를 찾지 못해 안 하고 있다. 학부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차별받는 장애인이 너무 많았다. 차별은 구조적이고, 삶을 지속하기 어렵게 한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법을 만들고, 건물 구조를 바꾸고, 장애인을 가두는 시설을 없애야 했다. 장애인운동판에 뛰어들었다. 활동가로 살다가 장애인 문제를 더 공부하고 싶어 석사과정을 밟았다. 공부 마치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느라 활동을 지속하지 못했다. 광고 광고 생계를 위해 사회복지 쪽 직업을 찾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잘 듣지 못하는 나를 써주는 곳은 ‘장애인 우대’라는 조건을 단 곳이다. 주로 공공기관에서 이런 단서를 단다. 공공기관은 장애인 의무고용을 지켜야 하니까. 서울시 일자리 포털에서 채용공고를 본다. 이력서를 백번도 넘게 넣었다. 서류 100% 합격, 면접 100% 불합격이다. 2009년 1월, 지인이 만든 쪽방촌 공동체인 ‘동자동사랑방’에서 사회복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2년간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직책은 사무국장이지만 그냥 활동가였다. 최저임금도 안 되는 활동비를 받고 일했기에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부족한 생활비를 메꿨다. 그 일도 오래 하지 못했다. 서비스를 받는 어르신이 내가 말을 잘 못 듣는다며 교체를 원했다. 요양보호센터장은 어르신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잘렸다. 광고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생계를 위한 일을 찾았다. 서울시 뉴딜일자리 사업에 참여했다. 지역아동센터에 파견돼 아이들 독서를 지도했다. 근로계약서에 적힌 계약 종료일은 12월31일이다. 연말이면 계약이 종료되고 연초엔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불안한 노동자로 산 지 십년이 돼 간다. 2015년에는 뉴딜일자리 아동독서멘토링 지도(10개월)를 시작으로 2016년부터 2018년까지는 단기 아르바이트로, 2019년에는 수도사업소 수질검사원으로(8개월), 2020년엔 여성인력개발센터 홍보마케터로(10개월), 2022년엔 50플러스센터 중장년 인턴으로(6개월), 국립공원공단사무소 직원 식당 조리원으로(3개월) 일했다. 2023년 현재 7개월짜리 공공일자리는 계약 종료까지 한달 반 남았다. 수도사업소와 국립공원공단을 빼고 나머지는 계약자(서울시)와 실제 일하는 곳이 다른 파견직이었다. 계약기간은 평균 8개월이다. 12개월은 절대 넘지 않았다. 12개월 이상 근무하면 퇴직금을 줘야 하니까. “2023년 10월20일 오전 8시, 삼각지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 및 장애인 권리예산 보장 촉구 기자회견이 있습니다. 많이 참여해주세요.” 광고 며칠 전 아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온 문자다. 30년 전 함께 활동했던 장애인 동지들은 아직도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출근길이 지체된다는 시민들의 온갖 비난을 받으며 말이다. 2007년 3월, 지난한 투쟁 끝에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법을 만들기 위해 싸워 온 수많은 동지에게 경의를 표한다. 법이 제정된 지 16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게 냉혹하다. 20년째 이동권 보장을 외치며 목숨 건 투쟁을 해도 완전한 이동의 자유는 오지 않았다. 그런 사회에 청각장애인의 일자리, 그것도 전공 관련 일자리 내놓으라는 나의 요구는 공허한 메아리 같다. 고령화 사회니 정년이 65살이라고 치자, 나에게 남은 노동 가능 기한은 십이년이다. 십이년 동안 근로 시작과 근로 종료를 몇번이나 반복해야 할까? 내년에도 내가 일할 곳은 있을까?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3
·
[6411의 목소리] 지역아동센터, 빛없이 머무는 이들
지역아동센터, 빛없이 머무는 이들 (2024-03-18) 김용희 | 하늘샘 지역아동센터장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학습을 지도하고 있다. 필자 제공 나는 인구 4만명 남짓한 폐광지역 군 소재지 지역아동센터에서 17년째 일하고 있다. 센터를 이용하는 35명의 아이는 읍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5개 학교와 집에서 센터 차량으로 등하원을 한다. 학기 중에는 학교가 마친 뒤부터, 방학 때는 아침부터 아이들을 돌보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방학 때는 아침 9시에 문을 열지만 늦어도 30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아이들 몇 명은 이미 40~50분 전부터 센터 앞이나 복도에서 서성인다. 일찍 일 나가는 부모들이 서둘러 다녀가서다. 아이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난방을 가동한다. 9시가 되면 대학생인 근로장학생과 조리사,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출근한다. 센터에서는 모두 7명이 일한다. 많아 보이지만 사회복지사 3명을 제외하면 모두 2시간, 3시간, 5시간, 7시간씩 일하는 시간제 근무자들이다. 차량 운전을 하는 선생님은 오후 3시에 출근해 3시간 근무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작된 노동 유연화는 여기도 예외가 아니다. 아침 시간, 근로장학생이 아이들을 보살피는 동안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은 그날 프로그램에 대해 상의하고 전날 했던 프로그램 일지를 쓴다. 아이들은 레고나 할리갈리 게임, 그림 그리기를 하다가 11시 무렵부터 한자와 영어 공부를 한다. 점심은 12시부터다. 대개 아침을 먹지 않은 아이들이라 넉넉하게 준비한다. 급식관리지원센터에서 제공해 준 식단표에 사과나 귤 같은 제철 과일을 곁들인다. 광고 오후 1시, 학습지도 전담 교사, 특수목적 교사들이 출근한다. 장애아동이나 느린 학습자들을 집중적으로 보살피는 특수목적 교사는 하루 2시간 근무한다. 해마다 예산이 줄어 근무시간도 4시간에서 3시간, 2.5시간, 2시간으로 짧아졌다. 운전 선생님은 오후 3시에 출근해 차로 왕복 1시간 이상 거리에 사는 아이의 귀가를 위해 차량 운행을 시작한다. 9인승 승합차 1대뿐이라 이 차가 돌아온 뒤 저녁 식사를 마친 다른 아이들 귀가가 시작된다. 차량 운행을 마치면 정각 오후 6시. 운전 선생님은 꼬박 3시간 동안 일하다 퇴근한다. 40평 남짓한 센터 안에 아이들이 종일 북적거리며 머무는 동안 사회복지사들은 아이들을 돌보고, 프로그램일지, 상담일지를 작성한다. 아이들은 수시로 달려와 문제를 호소한다. 재미있게 놀다가도 툭하면 다툼이 벌어진다. 별것 아닌 다툼도 소홀히 하면 큰 싸움으로 번지기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한다. 광고 광고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피려면 모든 선생님이 종일 센터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느린 학습자들을 보살피는 특수목적 선생님은 아이들 활동을 지켜본 후 교육을 해야겠지만 하루 2시간으로 정해진 근무시간은 숨 고르기에도 부족하다. 학습 전담 교사도 마찬가지다. 하루 5시간을 가르치려면 연구하고 준비하는 데만 3시간 이상이 필요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아이들 앞에 앉아야 한다. 패스트푸드나 패스트패션처럼 아이들마저 패스트 케어의 대상이 된 것 같아 안타깝다. 아이들도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고 스스로의 존엄을 키우며 성장하려면 ‘적절한 돌봄’이 요구되는데 현실은 여의치 않다. 오후 3시부터 2시간, 3시간, 5시간씩 근무하는 선생님들이 차례로 퇴근한다. 최저시급을 받고 짧은 시간 일하는 선생님들 급여는 노동에 대한 적정한 보상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이 든다. 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고는 매일 하는 학습을 제외하면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독서 프로그램과 방송 댄스뿐이다. 요리나 영화관람, 1박2일 캠프라도 데려가고 싶지만 꿈일 뿐이다.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는 날에는 선생님들이 가진 재능을 살려 놀이활동이나 미술활동을 한다. 저출산으로 국가 소멸을 염려하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을 품어줄 지역아동센터의 현실은 늘 빠듯하다. 광고 아이들이 귀가한 6시부터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은 관찰일지와 상담일지, 운영일지를 작성한다. 아이들의 성장을 관찰하고 보살피는 데 꼭 필요한 일이지만 7시를 넘기기 일쑤다. 중학생들이 영어를 하는 날은 8시까지 이어진다. ‘래디컬 헬프’를 쓴 힐러리 코텀은 ‘돌봄은 인간적인 연결, 우리 모두의 발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안녕과 존엄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돌봄은 선의를 가진 사람의 일방적인 보살핌이 아니다. 서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함께 노력할 때 더 건강하다. 그렇게 될 때 지역아동센터는 가장자리 환하게 밝히는 봄맞이꽃처럼 따뜻한 공간이 될 터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2
·
[6411의 목소리] ‘열악한 봉제 노동 환경’ 함께 개선을!
‘열악한 봉제 노동 환경’ 함께 개선을! (2022-06-22) 박만복 | 봉제노동자 서울 성북구 인촌로 한 주택가 건물 지하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노동자가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나는 열일곱살에 돈을 벌러 서울로 올라왔다. 누나들을 따라서 봉제공장에 취직한 뒤 지난 36년 동안 봉제 일을 해왔다. 지금은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조그만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 공장에 들어가서 막내 시다(보조원)로 일했다. 조금 숙련된 시다를 거쳐 보조 미싱사가 되고, 오야(팀장) 미싱사가 될 때까지 죽어라 일을 배웠다. 입사해서 받은 첫 월급이 13만5천원인데, 5천원은 오야가 내게 일 잘했다고 얹어준 거였다. 내가 일한 만큼 받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공장에서 만난 아내와 밤낮으로 일하면 둘이서 한달에 500만~600만원을 벌었다. 마냥 이렇게 벌릴 줄 알았다. 광고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지면서 봉제공장에도 예외 없이 일거리가 줄었다. 단가도 내려가 미싱을 해서 먹고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을 그만두고 8개월 택시운전을 했는데 그것도 힘에 부쳐 다시 양복공장으로 돌아왔다. 공장으로 돌아와서 미싱을 그만두고 옷감의 치수를 재고 자르는 재단을 배웠다. 맨날 좁은 자리에 앉아 미싱 발판을 밟는 것보다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며 칼질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봉제공장에서 마무리 단계에 쓰이는 지그재그 미싱 등 여러 기계들을 익혀나갔다. 이런 노력으로 공장장이 됐다. 광고 광고 그러다 봉제공장에서 옷의 마무리 공정인 시아게(다림질)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1년 정도 배운 뒤에는 작업 성과에 따라 보수를 받는 객공 시아게사로 일했다. 오전 8시에서 밤 10시까지 일을 했다. 일이 많을 때는 자정을 넘기기도 했다. 돈을 버는 재미가 있었지만 온종일 서서 다림질을 하다 보니 다리, 발바닥, 어깨 등이 아파왔다. 시아게를 하면서 내가 공장을 운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품 팔아 이곳저곳 공장을 알아보러 다녔다. 드디어 신당동에 있는 공장을 운영할 기회가 생겼다. 계약하는 순간 ‘이제 나도 사장이 되는구나!’ 싶어 기뻤다. 포부도 있었다. 완성도 높은 옷을 만들어 홍보도 하고 내가 직접 영업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주문이 들어오면 납품기일 맞추기에 정신이 없었다. 영업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도 알음알음 소개로 온 사람들 덕에 일감이 조금씩 늘어났다. 광고 하지만 성수기인 봄가을에는 일감이 많아도 미싱사들을 구하지 못해 일감을 놓칠 때도 있다. 미싱사들은 일감이 많을 때는 하루 15시간 넘게 일한다. 하지만 비수기에는 미싱 한번 돌리지 못하는 날도 있다. 그러면 미싱사들이 다른 곳으로 일감을 찾아 떠난다.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됐다. 요즘 봉제노동자 평균 나이가 55~60살이다. 수십년을 일한 숙련된 봉제노동자들이 처한 노동환경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일하는 환경, 노동시간, 공임 등 처우가 나쁘니 청년들은 봉제 일을 하지 않는다. 30년 전 처음 미싱사가 됐을 때 난 내가 일한 만큼 돈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객공 시아게사로 일할 때는 새벽까지 일해도 벌이가 괜찮아 좋았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공임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중국, 베트남 등에서 싸게 들어오는 옷이 많아 단가 인하 경쟁을 하는 의류업체들 탓에 공임이 낮게 책정되기도 한다. 옷마다 다르지만 한장에 500원짜리도, 2천원짜리도 있다. 20년 전 재킷 한벌에 7천~8천원 하던 공임이 지금은 겨우 1천~2천원 정도 올랐다. 일당 노동자는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한다. 미싱은 12만~13만원, 마무리는 17만원, 재단은 20만원 정도를 일당으로 받는다. 일이 많을 때는 400만~500만원도 벌지만 일이 없을 때는 50만원도 못 벌 때가 있다. 광고 지금 영세공장을 운영하는 처지에서 봤을 때, 봉제업의 객공 시스템은 결코 좋은 게 아니다. 객공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기 어렵고 보너스도 퇴직금도 없다. 4대 보험도 가입되지 않는다. 서울 도심 제조업 중 가장 큰 게 봉제산업이다. 신당동에만 봉제공장이 수백~1천개 가까이 된다. 그중 노동자에게 4대 보험을 가입시킬 형편이 되지 않는 영세사업장이 열에 아홉이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서울만 봉제노동자가 9만명이 넘고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않는 사업장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제는 좀 바뀌면 좋겠다. 봉제노동자들의 공정임금, 공정단가 그리고 기본적으로 12시간 이상 일하는 작업시간을 바꿔나가고 싶다. 봉제노동자 주 5일 근무, 4대 보험 등 여러 가지를 바꾸고 싶은데 혼자서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영세한 봉제사업주가 노동자들을 4대 보험에 가입시킬 수 있게 독려하고 비용을 일부 보조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사업장 단가, 임금, 노동환경 개선에 나서주면 좋겠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3
·
[6411의 목소리] 수선한 옷 만족해하는 손님 보면 뿌듯해요
수선한 옷 만족해하는 손님 보면 뿌듯해요 (2023-11-13) 유미애 | 수선집 운영·서울 성북구 패딩점퍼 소매를 수선하고 있다. 필자 제공 올해로 수선집을 시작한 지 4년이다. 이젠 잘한다는 소문도 나고 자리가 잡혔다. 사실 내가 수선일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나는 결혼 전부터 손으로 하는 건 뭐든지 금세 배웠고 그 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살림하며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특히 일곱살부터 운동을 시작해 선수의 길을 걸은 작은아이 챙기느라 하루하루가 바빴다. 아이 뒷바라지가 끝나면 취미생활 겸 공방을 운영하면서 중년을 보내고 싶었다. 광고 인생은 내 바람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작은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했다. 아이들에게도 위기가 왔다. 특히 작은아이가 10년 동안 해온 운동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집안일만 해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고된 식당 알바를 하며 생활비와 작은아이 레슨비를 보탰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서 꿈꿔오던 공방 대신 돈벌이가 되는 수선일을 택했다. 아이와 함께 운동하던 누나의 어머니가 수선집을 운영하셨는데 일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주말마다 경기 고양시에서 서울로 와 수선 기술을 배웠다. 그런 와중에 사장님 제안을 수락해 아예 수선집을 맡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광고 광고 실전은 쉽지 않았다. 예전 사장님 단골들을 다시 내 손님으로 만들려면 실력도 있고 친절해야 했다. 처음엔 전 사장님과 비교하시는 손님들이 많았다. 가장 기본적인 바지 기장 줄임부터 소매 기장 줄임, 품 줄임, 지퍼 교환, 누빔, 고무줄 교체, 허리 줄임과 늘림 등 다양하게 수선을 의뢰받는데 그때까지 배운 것으로는 부족했다. 해보지 않은 수선이 들어오면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보며 배웠다. 그렇게 세월이 쌓이며 안 될 것 같은 수선을 통해 옷이 바뀌는 게 신기했고, 좋아진 내 실력에 스스로 감탄을 하기도 했다. 수선을 더 잘하기 위해서는 옷 만드는 법을 알아야 할 것 같아 요즘은 옷 제도와 재봉을 공부하며 틈틈이 실제 옷도 제작한다. 평일에는 오전 9시30분부터 저녁 8시까지, 토요일은 오후 6시까지 일하고 일요일은 쉰다. 보통 하루에 20~30벌 정도 작업한다. 간절기에는 수선하는 양이 두배 정도 늘어 매일 밤 10시가 넘도록 일하고 휴일에도 일할 때가 많다. 광고 처음엔 너무 오래 입어 해진 옷을 굳이 수선해 계속 입으려는 손님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의외로 그런 분들이 많아 놀랐다. 더 신경 써서 오래도록 입을 수 있게 도와드리려 한다. 수선협회에서 정한 가격을 기준으로 수선비를 책정하고 어떤 수선이든 손님이 만족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하려 노력한다. 수선 실력만이 아니라 손님을 상대하는 일도 중요하다. 다양한 손님을 만나면서 배우기도 하지만 힘들 때도 잦다. 보통 바지 기장 수선에 4천원을 받는데 손님들 반응도 제각각이다. 1만원 주고 산 바지인데 수선비 4천원은 너무 비싼 거 아니냐고 항의하던 손님이 기억난다. 원하는 대로 수선했는데도 트집 잡고 수선비도 내지 않고 가는 손님도 있었다. 한번은 자기 바지 대신 남의 비싼 바지를 가져간 손님이 있어, 옷이 없어진 다른 손님에게 바지값을 드리기도 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수선표를 만들어 손님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재해 손님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했다. 고생했다고 커피나 과일 같은 간식을 주시는 손님도 있다. 몸에 딱 맞게 옷 입는 걸 좋아하시는 한 손님은 수선하러 자주 오시니 내가 그 손님 취향을 잘 알게 되고 그에 맞춰 수선해 드리면 항상 만족해하신다. 손님이 만족할 때면 나 역시도 수선집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분들이 훨씬 많으니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도 잊게 된다. 남편도 다시 일을 시작하고 수선집 운영도 안정적이어서 아이들 뒷바라지나 생활에 어려움은 많이 줄었다. 나도 어느새 오십대 초반이지만 아직 젊으니 배울 게 더 많다고 생각한다. 가게에 오시는 손님이 만족해서 다시 오실 수 있도록, 발전하는 나를 만들기 위해 더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어려울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을 주고 도와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가 받은 도움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1
·
[6411의 목소리] 일본 사람이죠?…그래서요?
[6411의 목소리] 일본 사람이죠?…그래서요? (2024-03-11) 니카미 유리에ㅣ협동조합 쩜오책방 조합원 아시타청’ 프로그램을 함께 생각한 마을 사람들. 지난봄에 우리가 마을공동체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위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자 제공 ‘여기서 나는 외국인이 아니구나, 마을 사람이구나.’ 한국에 온 지 8년. 마을살이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주민이라고 하면 ‘외국인’이나 ‘불편함’ 같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가.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그런 단어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파주시 교하에서 ‘나다움’을 찾으며 성장하고 있다. 광고 그동안 일본 사람이라서 받은 상처들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던진 말 때문이었다. 아이를 안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내가 일본 사람인 것을 안 행인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일본 사람이죠? 나 같으면 결혼 반대할 것 같아요.” 광고 광고 하지만 한국에 살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상처의 말보다 마을 사람의 따듯한 말이다. 2016년, 남편 직장 때문에 교하로 이사하게 됐다. 아는 사람도 없고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채 도서관에 갔다. 책을 좋아했고 첫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터라 그림책을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도서관은 내게 쉼터가 되어줬고 아이에게는 놀이터가 되어줬다. 사서 선생님들은 나를 외국인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아이 엄마로 따듯하게 대해줬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과 만났다. 일본 소설을 원서로 읽는 모임 사람들, 육아하는 엄마들, 도서관에서 봉사하는 분들…. 그 인연으로 일본 그림책 읽기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도서관이라는 공간,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들을 만났고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마을에 있는 책방에서 일본어 수업도 하게 됐다. 주말이면 서울에 가 일본어 강사로 일했던 나는 생활 공간인 마을에서 일하며 아이를 키우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광고 마을 사람들과의 인연 덕분에 마을 책방을 운영하는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었고 ‘디어 교하’라는 마을 잡지의 기자단으로 활동하게 됐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좋아하는 것과 몰두하는 무언가가 있다. 육아를 하거나 일에 매진하다 보면 ‘나’를 잊을 때가 많다. 이 마을에서는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나는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나는 누군가의 친구이고 옆집 사람이자 이웃이다. ‘외국인’이라는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면 함께 고민해주며 적당한 거리에서 신경 써주는 분들이 많다. 어른이 되어도 다른 사람의 단점을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좋은 방향으로 공동체를 이끌기 위해 서로 노력한다. 가끔 다른 지역에 여행 가면 “일본 사람이세요?” 하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일본 사람이었지’ 하고 자각하게 된다. 사실 이제는 낯선 질문이라서 그 질문을 들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그 물음이 싫을 때도 있다. 마음속으로 ‘그래서?’ 하고 대답해 본다.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든다. 질문하는 사람은 별생각이 없었겠지만 내겐 차별의 말로 들린다. 그만큼 나는 이곳에서 한 사람으로 살고 싶은 것 같다. 지난해, 마을 사람들과 ‘교하 시청각 클럽’을 결성했다. 공동체 실험 사업에 선정된 것이다. 이 사업을 통해 나는 이주민이 아니라 마을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공동체 생활은 소통과 이해를 통해 풍성해진다는 것을 경험했다. ‘아시타청’(我視他聴)이라는 프로그램은 나를 잘 바라보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는 뜻이다. 여섯명의 팀원이 각자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기반으로 여러 활동을 기획했다. 나는 ‘마음 스트레칭’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책을 통해 나와 대화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여러번 가졌다. 광고 ‘외국인’이라는 낙인 때문에 주저한 일이 많다. 몇년 동안 공부한 그림책 심리학 또한 단순히 나를 위해 공부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주민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응원과 참여자들의 반응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주민으로 살며 때때로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조용히 상처받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어서 용기를 얻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이주민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통하는 이야기이다. 그 사실을 한 사회의 소수자가 되어서야 알게 됐다. 모르는 사람의 차가운 말보다 이웃의 따듯한 말이 몇 배의 힘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만나려면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새 이슈 제안
·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