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을 넘어, 사회에 대한 객관적 지식은 가능한가?
사회에 관한 객관적 지식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실'만을 다뤄야 하고 가치를 담고 있는 의견은 개인의 자유의지 영역에 둬야 한다며, '주관적인 가치로부터 분리된 객관적 사실의 추구를 통해 객관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에 만만치 않게 지식의 ‘경험적 사실이나 사실판단이 이론이나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관점에 따라 사회와 관련해서는 객관성을 말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에 대한 지식주장, 더 나아가 사회과학에서는 어떻게 객관성을 확보하여 '옳음'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이 글에서는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을 넘어, 사회에 대한 객관적 지식은 어떻게 가능할지 (사회)과학철학/방법론의 관점에서 좀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이는 의견이 아닌 사실에 대한 서술만이 팩트를 체크 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좁고 엄격하게 말하는 팩테체크의 관점보다는, 의견의 경우에는 의견에 전제 되어 있는 사실들의 '맥락'을 파악하여 '팩트'가 아닌 '트루스'를 종합적으로, 맥락적으로 체크를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팩트체커들의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글은 이기홍의 2015년 논문 [사회과학에서 가치와 객관성]의 논의를 요약 및 재정리하여 쓴 것으로, 2021년 12월 6일에 다른 곳에 업로드했던 글의 상당 부분을 재업로드 한 것입니다. 더불어 이 글의 모든 인용은 해당 논문에서의 인용입니다. I. 팩트지상주의의 근원, 가치자유과학과학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객관적 사실(정확하게는 ‘경험’)과 주관적 믿음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경험론의 전통”(퍼트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견해는 '경험(적 사실)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진위를 검증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의 기초이지만, 가치판단은 주관적이이기 때문에 편향이나 오류를 낳고 검증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에서 가치 주장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과학 지식의 객관성을 훼손하고 편향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주관일 뿐이니 팩트를 가져오라'는 강력한 힘을 가지는 일상에서의 상식적 표현은 이와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이러한 관점을 ‘가치자유과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과학의 추구는 실증주의의 중심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물론 가치자유과학은 연구문제를 선택하거나 연구결과를 활용할 때 가치가 개입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막스 베버는 물 자체(객체)는 알 수 없고, 인간은 인간의 인식만을 알 수 있을 뿐이라는 신칸트주의에 입각하여 “경험적 사실 확인과 실천적 가치판단의 분리”를 주장하며, 가치연관성은 경험적 연구 대상의 선택과 구성을 위한 학문적 관심에 대한 철학적 해석으로 위치시키고, 연구는 가치자유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관점을 정립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베버의 논의에 따라 사회과학은 사실만을 다루며 행위결과에 대한 조건적 예측을 정식화 하는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행위 목표는 정당화 할 수 없으며, 과학적 지식은 정치적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베버에게서 가치판단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베버의 가치자유과학은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가치의 이분법'을 함의하게 됩니다.(논리)실증주의 과학철학 또한 경험적 사실이 이론과 가치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며, “이론들을 창조적으로 고안하는 ‘발견의 맥락'과 이론들의 진위를 검사하는 ‘정당화의 맥락'을 구분"하여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가설이나 이론을 평가하는 정당화의 과정은 엄격한 논리, 통제된 경험적 시험, 치밀한 검증/반증 등을 통하여 주관적 요소들의 개입을 배제함으로써 과학지식의 진위를 확인하고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입니다.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러한 관점의 문제는 무엇일까요?II. 과학은 가치와 분리할 수 없다.가치자유과학, 주류사회과학, 팩트만이 맞다고 하는 주장들이 지식주장의 기초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경험적 사실’일 것입니다. 경험적 사실은 ‘인간에 의해 경험 된 것에 대한 서술’입니다. 경험은 인간의 지각에 의해 인지된 것을 말하며, 경험적 사실은 인간에 의해 인지된 경험을 인간의 사유에 입각하여 서술한 것입니다. 이는 객관적 지식의 기초로서의 경험이라는 관념이 인간중심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1] “경험의 이론 적재성 명제” “해석되지 않은 경험이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경험은 ‘이론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이론 의존적' 또는 ‘이론 적재적'”이다. “경험의 의미나 내용은 … 인식 주체가 지각 정보를 해석하여 구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해석에 동원하는 ‘주관적인' 가정이나 이론이나 가치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2]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 명제" “‘주관적인 이론'을 (덜 주관적인) 경험에 의해 시험한다고 하더라도 … 간단하게 이론을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가적인 가정들의 조절을 통해 대체로 방어할 수 있다. 즉 “경험이 이론의 진위를 결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경험은, 그리고 경험에 의해 서술된 사실은 더더욱, 가치와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확실성을 완전히 보증해주는 만능키로서의 특정한 과학적 방법 같은 것은 없으며, 과학자들은 과학에서의 이론의 정합성을 확인하기 위해 경험증거들과의 일치의 정확성, 내적 및 외적 일관성, 적용 범위의 광범성, 단순성 및 결실성 등의 평가 기준들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며, 이는 이 기준들이 “규칙이 아니라 가치로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토마스 쿤)  뿐만 아니라 “이론 선택은 기본적으로 정교하고 복잡한 가치판단의 사안"이며 이는 과학적 방법의 선택 및 적용과 뗄 수 없도록 연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입각하여 주관적인 경험을 다룰 것입니다. 가치자유과학의 관점을 가진 이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믿을만한 지식을 여전히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과학은 가치로부터 분리할 수 없습니다. 자유, 평등, 공정, 정직, 개방, 비판 등의 사회적 가치 없이는 과학이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과학은 특히 세계의 객체들에 대한 인간의 통제와 유물론적 전략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내장하고 있으며, 그 가치는 경험 자료의 선택과 이론 구성의 길잡이”(lacey, 1999)라는 점에서, 과학과 가치는 분리하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지식에 대한 신뢰 자체가 가치관련적이라는 것입니다. III. 사회적 사실 또한 가치와 분리할 수 없다. 지식주장이 사회적인 것에 대해서 이루어진다면 자연과학에서보다 더 복잡해질 것입니다. 사회적인 것들은 의미와 의도를 내포하며 가치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특정한 사회연구에서 배제하기 어려운(배제해서도 안되는) 실업, 양극화, 불평등, 주류경제학의 ‘합리적 행위' 등과 같은 단어들은 단어 그 자체가 부정적인/긍정적인 가치평가를 내재하고 있습니다. 정의, 공정, 범죄 등 수많은 단어들이 개별적인 서술의 층위에서도 평가와 서술은 혼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연도 그렇지만) 사회적인 것에 대한 서술은 가치자유적/가치배제적일 수 없습니다. 즉 “사실과 가치의 복합"일 수밖에 없습니다. “개념들을 가치 자유적 언어로 … 분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철학자의 환상일 뿐”입니다.(Gorski, 2013) 이러한 상황은 사회에 대한 지식주장이 객관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가치자유과학은 중립적 어휘를 사용한다거나 외국어를 차용한다거나 기술적 신조어를 고안하는 등의 대응을 합니다. 그리고 가치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량화 전략’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여러 시도에 의한 겉보기에 가치중립적인 정보는 항상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는 판단과 평가가 요청됩니다. 가치는 주관적이라며 그토록 배제하고자 하는데, 정말 가치관련적이면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아래는 나치 치하에 이루어진 일에 대한 서술입니다.  나라의 인구가 줄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어떤 서술이 가장 적합 할까요? 네 번째 서술이 가장 가치관련적이지만, 동시에 더 많은 진리를 제공하며, 가장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위의 세 진술은 가치중립적으로 표현된 듯 하지만 잘못된 이해를 가져옵니다. 가치배제적 서술은 글의 의미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며 핵심을 회피하게 됩니다. 로이 바스카가 제시한 이 유명한 사례는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적 분리가 불가능하며, 주관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가치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사회적인 것의 접근에서 가치의 배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며 가치판단에서 자유로운 사실판단은 없다. 가치 배제의 시도는 또 다른 가치를 적재하는 것이다.”(이기홍, 2015)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사회과학적 설명은 다른 설명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과학 지식은 평가적, 규범적, 도덕적 판단을 포함하는 사실과 가치의 혼합물"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특정한 사회구조/사회제도/사회문화가 발생시키는 문제에 대한 연구는 그것에 대한 비판일 수밖에 없으며, 그 비판의 함의는 변형의 필요성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IV.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가치? 사실이 상대적일 수 있고, 가치가 객관적일 수 있다.사실은 인간의 인식 밖에 객관적으로 물 자체나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경험'을 통해 사유 속에 포착하여 개념적으로 구성할 때 ‘사실'이 됩니다. 사실은 인간의 인식 외부의 객체를 포착하여 재생산한 사회적 구성물인 것입니다. 사실은 이론에 의존하고 가치에 의해 구성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경험적 사실이 가치판단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련'과 '구성', 그로 인한 '제약'이 '결정'의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식은 인간의 주체적이도 능동적인 활동의 생산물이지만 그 객체와의 상호작용에서 획득하는 지각에 근거하고 지각의 안내를 받는다. 객체들은 그것들에 대한 주체의 지각을 매개로 경험적 인식의 방향과 내용과 경계를 한정한다.”(이기홍, 2015) 현실에서 사실과 가치는 완전히 분리하여 한 가지를 배제할 수 없지만, 이는 두 가지가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치가 사실에 기초하여 형성되고, 사실이 가치에 의해 일부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지식이 가치관련적이라는 것은 모든 지식이 똑같이 타당하다는 '판단적 상대주의'로만 이해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믿음은 같은 대상에 대한 조금씩 다른 인식들의 관계 형성 속에서 사회적으로 생산된다는 '인식적 상대주의'로 이해 될 수도 있습니다. 지식의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가치를 배제할 수 없는 인간의 인식/경험/이론에 기초한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사실이 가치관련적이어서 주관적이더라도, 인간의 인식 밖의 객체의 성질에 준거하고자 하는 사실적 서술들의 사회적 생산 속에서 가치는 객관성을 확보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가치판단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판단에 기초합니다. ‘x에 관해 무엇이 참인가?’와 ‘x에 관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는 논리적으로 독립적인 질문이 아니며, 동등한 질문입니다. 참이지만 믿지 않는다거나 참이 아니지만 믿는 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 됩니다.(콜리어, 2010) 사실도 가치도 주관적 인식에 기초합니다. 사실과 가치는 둘 다 “외부세계와 인간의 상호작용 형태"이며, “경험적 증거에 대한 주관적 해석"입니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은 둘 다 정확하거나 그릇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과 가치는 객관과 주관의 상이한 영역에 속하는 범주가 아니라, 주관의 영역 안에서 상대적으로 잠정적으로 구별되는, 그리고 인간의 인식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경계가 변화하는 계기들일 뿐이다.” “사실과 가치의 문제는 우리가 특정한 대상이나 사태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 상호작용하는 방식의 문제"이다.(노양진, 2005) 가치자유과학의 사실-가치 이분법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이분법은 가치 논의를 자의적인 것, 권력과 독단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가치 문제에 대한 합리적 토의를 봉쇄합니다. “토론의 방해자"이자 “사유의 방해자"로 기능하는 것입니다.(퍼트남, 2010) “과학은 가치를 배제(해야)한다는 이상 자체로 가치판단"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V. 사회에 대한 지식주장이 객관적일 수 있는가?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라 사실과 가치가 분리 불가능하고, 가치도 객관성을 가질 수 있다면, 사회과학이 가치관련적이라는 사실이 사회과학의 객관성을 부인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객관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1] 존재론적 객관성존재론적 객관성은 “객체가 인식 주체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근대 이후 철학자들은 존재론을 형이상학이라 배책하고 인식론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자연)과학은 인간의 인식 외부의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객체를 상정하고 그것에 대해 탐구하지 않으면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작업해오고 있습니다. 존재론적 객관성은 확실한 지식주장을 찾고자 하는 과학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관점에 대한 확인 자체가 과학적 지식 생산의 결과를 저절로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2] 인식론적 객관성많은 사람들은 '객관성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서술과 동일한 것'이라는 관점의 인식론적 객관성을 추구해 왔습니다. 인식론적 객관성은 “주체의 인식이 그 대상 객체를 정확하게 모사하거나 재현함으로써 획득하는 속성"인 것입니다. 이는 “인식과 객체의 상응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존재론적 객관성을 잊고 인식론적 객관성에에만 매달리는 것입니다. 앞서 열심히 살펴본 인간의 경험이나 이론에 기초하여 지식을 생산하고자 하는 관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인식론적 객관성의 확인은 주체의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서 객체의 자기 운동에 개입하는 실천-그 인식에 기초한-을 통해서만 가능"(관찰과 실험 같은!)합니다. 현실에서 인신론적 “객관성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의 문제이기보다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는 주장들을 판단하는 기준에 도달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절차적 객관성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주체의 의도적 객관성일 뿐이며 결과에서 객관성을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존재론적 객관성의 추구에 기초한 인식론적 객관성의 추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3] 상호주관성완전한 객관성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상호주관성에서 해답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상호주관성 이외에는 객관성은 없다. 객관성은 지식과 객체의 상응의 문제가아니라 다른 주체들과의 의견 일치의 문제이다”(로티, 1998)“실질적으로 ‘인식의 객관성을 직접 확인하거나 확보할 수 없는 조건에서 상호주관성은 객관성의 이용가능한 최선의 대체물"(Leccy, 1999) 이와 같이 상호주관성을 '불가능한 객관성의 대체물'로 여기기도 하지만 ‘상호주관성’이 반드시 객관성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나은 객관성으로 나아가는 객관성의 단계적 접근으로서의 상호주관성을 생각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상호주관적이라는 것은 “인식의 절차와 결과를 다른 주체들의 비판적 심사에 개방하고 승인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과학의 진보는 절차적으로 객관적인 연구를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조금 더 나은 결과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결과적 객관성은 이상으로 존재하고, 현실에서는 조금 더 나아져가는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과정의 상태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개방과 비판은 과학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객관성은 정도의 문제"가 됩니다. “객관성은 상호주관적 비판의 포용뿐 아니라 그것의 절차와 결과 둘 모두가 비판들에 반응하는 정도에 있는 것"입니다. 과학의 객관성은 경험이나 사실, 이론 등 각 요소의 환원으로는 다다를 수 없지만 각 요소들의 복합적 접근을 통해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VI. 나가며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사회에 대한 지식주장에서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 둘 모두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와 '상호주관적이고 사회적인 토의'가 객관성의 확보에 핵심적인 것이 됩니다. 사회과학에서는 지식 주장에 대한 ‘결정적 시험'이 불가능하며, 지속적인 비판과 검증밖에는 지식 주장의 객관성을 확인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사회에 대한 지식주장에서는 ‘상호주관성'의 범위를 과학공동체뿐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더 광범한 사회로 확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과학의 민주주의이기도 할 것입니다.팩트지상주의도 문제이지만, 팩트지상주의를 넘어서는 이론적재성에 대한 적절한 인식이, 혹시나 모든 지식주장이 정파적일 수밖에 없다거나, 객관적 지식은 있을 수 없다는 인식으로 과하게 나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경험적 인식을 통해 구성된 사실이 가치/이론관련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인식하고자 한 그것은 인간으부터 독립된 과학/지식의 대상입니다. 옳고 그름은 그 대상의 성질로부터 규정되는 것이지 인간의 경험이 맘대로 결정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제한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론/가치에 영향 속에서 과학적 절차/방법에 따라 더 나은 지식주장을 업그레이드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 과학자 공동체/언론/전문가/시민참여 등과 관련한 개방과 비판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과학은 전문가주의/엘리트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속에서 발전해 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 이슈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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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주의와 협약주의의 이분법을 넘어
이 글은 “이기홍, 2019,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한울"의 논의에 기초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사회조사방법론’이라는 이름으로 정형화 되어 있는 사회를 분석하는 방법을 다루는 한 흐름은, 실증주의에 입각하여 서술되어 있습니다. 특히 ‘양적 방법’을 다룰 때 더욱 그러합니다. 양적 방법만을 활용하는 것의 한계를 지적하며 ‘질적 방법론'이라는 별도의 연구방법을 이야기 하지만, 양적 방법과 질적 방법의 이분법적 구분 자체의 문제나 두 방법론이 경험주의 철학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문제제기 하지 않습니다.근대의 한 축인 ‘과학혁명’의 영향 속에서 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의 성과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철학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고, 이는 과학철학으로 불리게 됩니다. 사회과학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들, 그리고 인간으로 이루어진 사회 또한 과학적으로 연구 될 수 있다는 믿음 아래에서 성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과학이 가능하다는 생각의 주류는 경험주의-실증주의로 이어져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지속적으로 같은 결과값을 가지게 되는 반복적인 사건과 사건의 결합으로서의 법칙을 발견할 수 없었고(혹은 어려웠고), 인간의 자유의지/자율성의 독자적인 강조에 입각한 경험주의-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것을 거의 무너뜨리다시피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과학은 불가능하다'라는 관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자연객체를 다루는 자연과학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루는 인문학/철학/해석학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을 애써 부여잡으려고 하는 입장은 자연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대안없이 무너진 주류적 관점을 애써 부여잡고 있는 셈입니다. ‘사회조사방법론’의 지속은 이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방법론에 관한 논의들을 지금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지만, 실증주의를 대체하고 있지는 못한 상황입니다.이 글에서 방대한 (사회)과학철학 논의를 깊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회과학 학문들에서 공유되고 있는 실증주의/경험주의, 그리고 그의 대척점에 서 있는 협약주의를 구분하고 두 관점의 난제들의 핵심을 ‘수박겉핥기 정도’로 함께 공유해보고자 작성합니다. 이는 사회를 좀더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안경’이 아닌 ‘여러 안경들'의 가능성을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실증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 실증주의 (사회)과학철학에 의하면 ‘형식논리적 진술’과 ‘검증할 수 있는 경험적 진술’만이 정당한 지식입니다.(논리실증주의) 이러한 관점에서 경험자료와 관련한 논리적인 보편적 진술을 추구합니다. 실증주의에서 이론적 용어는 관찰가능한 용어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이론적 서술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배제됩니다. 실증주의는 논리실증주의, 반증주의를 거쳐 가설연역적 방법, 포괄법칙적 설명모형에 이르게 되며 과학에 대한 표준적 견해, 법칙적 설명의 정통으로 불리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실증주의에서의 ‘법칙’은 ‘사건과 사건의 결합’으로 여겨지며, 이는 ‘관찰된 규칙성의 서술’입니다. 즉 경험의 귀납적 일반화의 산물인 것입니다. 이러한 실증주의의 관점에서는 경험이 두 가지 특권적 지위를 지니게 됩니다. [1] 경험의 인식론적 특권은 경험이 과학적 지식의 객관적 기초라는 믿음입니다. [2] 경험이 이론적 진위의 심판자라는 믿음 또한 경험의 특권적 지위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조사방법론'이라는 이름으로 공유되고 있는 논의의 대부분은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경험이 유일한 혹은 근본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경험은 ‘인간에 의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인간과 분리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경험주의는 인간중심주의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에 있든 없든 과학의 대상인 세계는 존재합니다. 인간의 경험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경험 그 자체가 객관적인 것이나 사실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으며, 현실에서의 과학적 작업은 항상 경험 너머의 것들을 이론적으로 다뤄 왔습니다. 경험 너머의 것을 발견해왔습니다. 경험만이 기준이 된다는 관점은 그러한 경험 너머의 것을 다룰 수 없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간의 자연과학의 성공적인 과학적 작업들과 사실상 배치되는 관점이 됩니다. 경험된 것만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경험적 실재론’은 존재론을 부당하게 인간중심의 인식론으로 환원하는 ‘인식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식주장은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과학은 경험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이론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이론적 서술을 아무리 경험적 서술로 환원하려 해도, ‘조작적 정의'를 해도 그것을 걷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는 [1]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 [2] ‘경험의 이론의존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실증주의/경험주의에 대한 해석학/협약주의/철학적 비판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과학자들의 작업에 대한 과학철학적 분석에 기초한 비판입니다. 과학자들은 사회조사방법론에서 대체로 전제하는 실증주의적 방법에 기초하여 작업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연역과 귀납뿐만 아니라 역행추론(탐정이 범인을 찾듯이 가능성을 하나씩 소거하여 답을 찾아나감)을 통해 경험 너머에 존재하는 기제들에 대해 이론적으로 탐구하고, 그것이 실재 하는지를 경험과 관찰, 논리적 검증 등을 통해 해답을 찾아나갑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이 때로는 성공하여 경험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류 사회과학의 방법론은 이러한 점을 포착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물론 이러한 실증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이, 실증주의적 관점에서의 수많은 연구들이 전혀 의미가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연구들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 연구만이 유일한 과학적 지식이라는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이며, 그러한 연구들은 연구의 끝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파악으로써, 그 기층의 구조적 기제로 들어가기 위한 도입부로 여겨야 한다는 점, 그에 따라 생산된 이론적 추론이 실재적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수많은 도구들중 중요한 일부로 여겨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협약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 협약주의는 ‘과학은 협약에 따라 형성된다’는 관점으로, 대체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로부터 비롯합니다. [1] 과학은 과학자의 창조물/구성물이라는 관점, [2] 과학은 어느정도 주관적이며, 주관성의 원천은 과학자(공동체)라는 관점, [3] 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키트와 어리) 명제 등이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쿤의 패러다임/정상과학/과학혁명 개념들, 이론의 공약불가능성(과학혁명기의 경합하는 두 패러다임은 비교불가능하다는 의미) 논의등이 협약주의의 전통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파이어아벤트의 ‘방법론적 무정부주의’가 됩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과학자가 수행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과학 이론이 공약불가능하다는 것은 상대주의를 의미합니다. 상대주의는 어떤 이론이든 동등하게 의미있다거나, 어떤 이론이든 아무 의미 없다는 관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의 대상인 외부 세계조차 과학의 이론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오류입니다. 그러한 관점은 과학을 확실하지 않은 지식으로 해체해버립니다. 이는 과학에 대한 도구주의적 견해로 이어지게 됩니다. 실재를 실재에 대한 합의로, 진리를 진리에 대한 합의로 대체해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과학철학자들이나 사회과학자들이 그렇게 보든 말든 과학자들은 과학적 방법을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믿고 작업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고, 그에 입각하여 전에 보지 못한 수많은 기술들이 개발됩니다.협약주의는 경험의 이론의존성을 지나치게 확대합니다. 지식의 구성은 개념과 믿음에 의존하지만, 그러한 의존이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경험의 이론의존성은 경험이 이론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외부에 있는 객체의 성질에 일관성 있게 영향 받지만 특정한 이론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파악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부정하기 어려운 과학적 방법으로서의 ‘실험'은 이론에 근거하고 이론에 의해 안내 되지만 실험의 결과는 이론이 아니라 객체(지식의 대상)의 성질에 의해서 규정됩니다.지식을 경험/관찰으로 환원할 수 없지만, 이론들에 대해 관찰은 중립적일 수 있습니다. 관찰진술은 과학적 진술의 사실적 기초의 일부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관찰은 직접적인 절차에 의해 공공적으로 시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이며, 폐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류가능한 것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경험이 이론의존적이라는 것은 확실한 지식의 기준이라는 관점에서 경험도 별 소용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중요한 일부중 하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이론의 경험적 미결정성이 과학이 공약불가능하다는 식의 상대주의로 빠져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과학이론의 공약불가능성을 말하면서도, 학자들은 누가 더 맞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합니다. 누가 더 맞는지 논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같은 대상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식간의 경쟁은 동일한 객체를 다르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각기 다른 이론들은 나름대로의 설명력을 각기 가질 수 있으며, 각각 다른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중요 현상들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나은 이론이 됩니다. 뉴턴의 물리학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대체했다고 하지마는 뉴턴의 물리학은 특정 범위 내에서는 여전히 작동하는 설명력이 있는 이론입니다, 상대성 이론은 뉴턴 물리학이 밝힌 것을 포괄하면서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하게 된 것인 셈입니다. 패러다임간 비교 및 선택, 이동 및 수용은 가능합니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논의처럼 사회성은 과학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이 과학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과학의 사회성이 과학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과학의 대상인 객체의 성질은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다르건 간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객관성은 과학의 대상인 객체의 성질을 더욱 잘 드러내는 것에서 확보되는 것입니다.  실증주의와 협약주의의 이분법을 넘어 실증주의와 협약주의는 대립되는 두 관점으로 인식되지만 함께 공유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협약주의는 ‘경험과 이론의 분리’라는 실증주의의 이분법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고 경험주의에서 이론주의로 전환했을 따름입니다. 즉 실증주의와 협약주의는 (주관적) 이론과 (객관적) 경험의 이분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물론 이는 너무 단순한 정리이며, 각각의 세부적인 논의들에서 그렇지 않은 측면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두 관점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주의와 이론주의의 양 경향은 철학의 분류로 봤을 때 ‘인식론'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인 것입니다. 과학의 인간의 인식 외부의 대상/객체를 다루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기준을 인간의 인식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대상/객체의 성질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인식론의 존재론적 전환) 중간에 끊긴 것처럼 이 글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언제 쓸지 모를 다음 글에서는 두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로이 바스카의 과학철학에 대해 짧게 소개해보고자 합니다.(로이 바스카의 논의의 핵심을 빠르게 파악하고 싶으면 “이기홍, 2017, [로이 바스카], 커뮤니케이션북스"를 참조해주세요.)(2021년 11월, 다른 곳에서 썼던 글을 이동/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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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공론장] 시민의 힘을 모으는 ‘디지털 시민 광장'을 향해
사회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과 대안 마련을 위해 노력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공론장이 원활히 작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주요한 공론장의 일원인 학계와 언론의 역할을 중심으로 그동안의 노력과 성과, 한계 그리고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을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공론장 참가신청하기 ?https://url.kr/25tlg9  시민의 힘을 모으는 ‘디지털 시민 광장'을 향해 시민의 집단지성이 발휘되는 디지털 시민 광장의 등장, 2008년 ‘다음 아고라’ 2008년 촛불시위는 PD수첩이 정부가 수입하기로 한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는 보도가 뇌관이 되어 촉발되어 3달 내내 100만명 이상 참여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5월 2일 첫 집회는 ‘안티이명박 카페’,두 번째 집회는 ‘미친소닷넷’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사회운동조직들의 연대체인 ’광우병국민대책회의‘는 5월 6일이 돼서야 출범합니다. 이후 벌어진 집회는 대책회의 주도로 청계광장에서 문화제 형태로 이어졌지만, 5월 25일 인근의 다른 장소에서 집회를 연 ’다음 아고라‘의 주도로 거리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촛불이 급진화 된 것입니다(김연수, 2010, 2017).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다음 아고라‘가 디지털 공론장인 동시에 시민직접행동의 근거지로 기능했다는 것입니다. 온라인에서 논의하고, 서명운동을 벌이고, 전략을 짜서 오프라인으로 세력화 되어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안티이명박카페' 등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다음 아고라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소규모 공론장 및 온라인에서의 조직 단위로 기능했습니다. 대책회의와 자신들을 구별하며 긴장 관계 속에서 수많은 깃발을 들고 시위를 주도하는 또 다른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처음 거리를 나선 것도, 광우병 이슈를 넘어 여러 의제를 확산하고자 한 것도, 대책회의가 시위를 정리하고자 할 때 끝까지 남아서 투쟁하려 한 것도 그들입니다(김연수, 2010, 2017). 다음 아고라의 ‘이슈 청원'에서 ‘안단테'가 개설한 대통령 탄핵 요구 서명운동은 148만명의 서명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2008 촛불의 최초 참여 주체인 여중여고생, 그리고 소울드레서, 쌍코 등 여초 커뮤니티에서의 활동을 매개로 거리로 나온 여성 청년들의 비폭력 구호로부터 출발하여 다음 아고라를 통해 ‘비폭력 무저항’ 담론이 광범하게 퍼져 나갔고, 이는 광장에서 ‘자발적 연행’, ‘닭장차 투어’ 실천 전략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김연수, 2010, 2017). 이처럼 다음 아고라는 디지털 캠페인의 공간이자 디지털 공론장으로 ‘디지털 시민 광장'이라 부를만 했습니다.  다음 아고라에서 형성된 주장과 그에 따른 시민들의 행동이 항상 옳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아고라에서의 수많은 시민들의 논의를 거쳐 그들만의 관점과 전략이 형성되고 그에 따라 오프라인 직접행동에서의 응집력을 발휘했던 현상을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기존의 정당과 사회운동의 리더십과는 구별되는 디지털 공간을 매개한 시민들의 집단지성 리더십이 형성되고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적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2008년 촛불시위 이후,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디지털 시민 광장’이 디지털 시대의 민주주의 실현에 필수임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디지털 공간에서의 시민들의 집단적인 소통에 기반한 응집력의 확산은 피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고, 숙의를 통해 공론이 형성되고, 그에 따른 직접행동이 이어지는 ‘디지털 시민 광장’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과제가 도출 된 셈입니다.  현 시대의 디지털 시민 광장, 캠페인즈&믹스 ‘다음 아고라’가 주목 받았던 2008년으로부터 15년이 지났습니다. 다음 아고라는 서비스를 종료하고 없어졌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지구적 차원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의 신냉전이 이야기 되고 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등 국가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지구적인 경제 위기도 심각합니다. 국내 정치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 속에서 다른 진영에 대한 무조건적 적대라는 정치 양극화(정치적 부족주의)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에 의한 편향의 발생과 허위조작정보의 범람은 정치 양극화 현상을 뒷받침합니다. 기후위기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역시 여전합니다. 기업간의 경쟁, 국가간의 경쟁 속에서 기업에 의한 디지털 기술의 혁신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대응이 부재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시민의 주도적 참여를 모을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공유하며 활동하는 공간인 공공재로서의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빠띠는 캠페인즈와 믹스를 통해 ‘디지털 시민 광장'을 구축해 나가고자 합니다. 디지털 시민 광장을 만드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다음 아고라'를 현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재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민, 시민사회단체 및 비영리조직, 전문가, 이해당사자, 사회적 소수자 등 다양한 주체들이 여러 사회 이슈에 대해 디지털 캠페인을 통해 직접 목소리를 내고, 투표·토론 등을 통해 서로 의견을 나눠 공론을 형성할 수 있는 이 공간은 시민들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고,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디지털 시민 광장'입니다. 월 100만명이 캠페인즈에서 사회 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고 논의하게 된다면 한국사회는 어떻게 바뀔까요? 빠띠는 지난 1년동안 캠페인즈를 디지털 시민광장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2022년 한 해 동안 166건의 캠페인, 148,026건의 서명, 37,507건의 댓글, 총 185,553건의 시민참여를 이끌어냈습니다. 캠페인뿐만 아니라 투표, 토론, 데이터, 뉴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하반기에 오픈한 투표, 토론 기능을 통해 만들어진 48개의 투표, 131개의 토론으로 시민들이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현재는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미디어’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 ‘투데이’를 만들었습니다. 시의성 있고 중요한 사회 이슈에 관한 캠페인·투표·토론이 메인 슬라이드와 메인 섹션에서 보여지고 ‘주목할 이슈'를 노출하고, ‘오늘의 캠페이너’를 노출하여 활동하는 시민들을 주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외에도 ‘오리지널’을 신설하여 실시간 공론장 행사에서의 논의 과정과 결과, 워킹그룹 활동의 과정과 결과 등과 관련된 콘텐츠를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텍스트 중심의 캠페인, 투표, 토론뿐만 아니라 행사와 영상 등 다양한 콘텐츠를 시민들과 함께 나누는 공간으로 만들어 갈 예정입니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시민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디지털 시민 광장을 만들 최소한의 준비를 마친 셈입니다. 그리고 최근 베타 오픈 날(6/13)에 ‘캠페이너 응원하기’ 기능의 개발을 통해 시민사회단체 및 비영리조직뿐만 아니라 캠페이너 개인까지 캠페인, 투표, 토론 등 다양한 활동, 콘텐츠의 생산을 통해 지지하는 사람의 응원(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개발하였습니다. 아직은 베타 테스터 30여명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랜드 오픈 이후에는 모든 분들이 활동의 지속가능성을 확보 할 수 있는 ‘내 활동의 중심지'로 이용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캠페인즈에서의 다양한 활동 과정에서 이슈와 사람 중심으로 지지자들이 모이면, 믹스에서 멤버십을 형성하여 공동의 지속가능한 활동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믹스의 멤버십 기능 또한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캠페인즈는 ‘내 활동의 중심지’, 믹스는 ‘우리 활동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가 마련됩니다. 시민들의 서로에 대한 지지와 응원이 좀더 많이, 좀더 깊이 결합되어 이루어진다면 캠페인즈와 믹스는 ‘디지털 시민 광장'이 됩니다.  사회적 대화와 협력의 시민공간, 공론장과 워킹그룹 디지털 시민 광장의 실현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시민의 권리와 주권을 확대함으로써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빠띠의 비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캠페인즈와 믹스에서의 시민들의 자발적인 활동은, 공론을 형성하는 실시간 공론장과 시민들이 협업하는 워킹그룹 활동과 결합 될 수 있다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공론장과 워킹그룹은 사회적 대화와 협력의 공간을 만들고 확장합니다. 이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신뢰와 협력의 기반을 조성함으로써 ‘더 나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빠띠의 두 번째 비전을 심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디지털 시민 광장과 사회적 대화와 협업의 시민 공간은 자연스럽게 연결 될 수밖에 없고, 또한 의식적으로 연계하여 추진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월 100만명이 캠페인즈와 믹스에서 활동하고, 연간 1만명이 공론장과 워킹그룹에 참여하며 역량을 강화하고 캠페인즈와 믹스를 넘나들며 활동을 벌여 나간다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사회적 임팩트를 발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캠페인즈라는 ‘일상의 공론장'에서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비동기로 원하는 시간에 접속해서 이슈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의견을 나눌 수도 있지만, 관심을 가지는 이슈에 관한 ‘실시간 공론장' 행사에 참여하여 좀더 응집력 있게 토론하여 더 나은 공동의 의견을 도출할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형성된 논의 결과들을 다시 캠페인즈에 콘텐츠로 공유하고 새롭고 더 나은 의견을 촉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전적인 일상의 공론장은 실시간 공론장을 좀더 효과적으로 만들고, 사후적인 일상의 공론장은 실시간 공론장의 사회적 확산으로 이어지며 다음 단계의 실시간 공론장으로 나아가는 매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여자의 관점에서 보면 캠페인즈의 캠페이너들이 ‘들썩들썩떠들썩'의 발제자 혹은 참여자로 실시간 공론장에 참여하거나 ‘들썩들썩떠들썩'의 발제자 혹은 참여자들이 캠페인즈의 캠페이너가 되는 것입니다.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개방적이고 안전한 네트워크에서, 자율적이고 주도적인 활동을 통해 일상의 문제를 정의하고 대안을 논의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업하는 워킹그룹은 믹스에서 멤버십을 형성하며 좀더 효과적으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활동은 동시에 캠페인즈에서 캠페이너로서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활동을 한 성평등 커뮤니티, 공익데이터 실험실에 함께 한 참가자, 민주주의활동가학교에 함께 한 참가자들은 캠페인즈와 믹스에서 민주주의 활동가, 혹은 협력가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론장과 워킹그룹 활동이 연결되어 있는 캠페인즈와 믹스의 활성화를 통해 ‘시민 활동 플랫폼'이 만들어집니다. 시민 활동 플랫폼을 만드는 것은 ‘시민 활동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또 하나의 필수적인 조건이기도 합니다. 캠페인즈와 믹스에서 월 100만명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공론장과 워킹그룹 활동에 연간 1만명이 참여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시민 활동 플랫폼은 한국사회의 문제를 시민들이 직접 해결 할 수 있는 사회적 임팩트를 실현하는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 사회문제 해결 플랫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민들과 공동체의 힘을 모아 함께 만들어가는 시민 활동 플랫폼 이렇듯 활동의 전개 과정에서도, 디지털 기술과 플랫폼의 활용에서도, 활동하는 주체들의 연결에서도 시민주도의 다양한 활동과 민주주의 플랫폼은 떼려야 뗄 수 없게 맞물려 돌아갑니다. ‘오리지널’ 페이지는 캠페인즈에서 이를 더욱 부각시킬 것입니다.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디지털 시민 광장’, 캠페인즈&믹스에 사회적 대화와 협력의 ‘시민 공간’을 만들어가는 공론장과 워킹그룹의 활동이 연결됨으로써 다채롭고도 고도화 된 시민 활동이 가능해지는 ‘시민 활동 플랫폼’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빠띠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플랫폼의 구축 및 활성화는 플랫폼을 활용하여 활동하고 또 함께 발전시켜 나가는 시민들이 함께 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민들과 공동체의 힘을 모아 ‘시민 활동 플랫폼’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기 때문에 시민 활동 플랫폼을 만드는 일이 곧 ‘시민 활동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업이 아닌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민주주의 플랫폼, 혐오와 차별 없는 더 나은 공론장 플랫폼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고 서로 의견을 나누고,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생태계를 꿈꾸게 됩니다. 참고문헌 - 김연수, 2010, "2008 촛불항쟁 담론 연구", 석사학위논문 - 김연수, 2017, '2008, 2016 촛불시위와 사회운동', "정동하는 청춘들", 채륜 - 디지털 시민 광장, 시민 활동 플랫폼, 시민 활동 생태계와 관련한 논의들은 빠띠 내에서의 논의를 통해 형성된 담론을 이 글의 저자의 이해에 따라 작성한 것입니다. 특히 '시스'(권오현 대표)의 논의에 빚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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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노동 4.0’,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챗GPT’ 열풍입니다. 인간이 일자리를 빼앗기고, 허위조작정보를 구별하기 어려워지고, 심지어는 AI의 통제 아래 놓일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반면 AI의 도움에 힘입어 인간이 새로운 차원의 일을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새로운 일자리들이 창출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합니다. AI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이에 대응하기 위한 AI 관련 윤리의 정립, 법과 제도의 도입은 늦어지고 있습니다. 챗GPT의 등장으로 인한 구체적인 사회변화의 맹아들을 살펴보고, 대응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사회적으로 논의 할 필요가 있지만, 이 글은 AI보다 좀더 넓은 범위에서 디지털 기술의 혁신에 따른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재인식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시작해 보려 합니다.  챗GPT로 인해 한층 앞당겨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이전부터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고립된 비대면 상황에서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소통과 협업의 급속한 진전을 확인했습니다. ‘4차산업혁명’, ‘산업4.0’ 등의 이름으로 수년간 그 이야기되고 있던 일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실제로 진행중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 변화는 AI뿐만 아니라 로봇, 플랫폼, 사물인터넷, 스마트 팩토리, 빅데이터, 공유경제, 자동화 등 각기 다르면서도 겹치거나 연결된 단어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 변화의 장면들 이제 식당에 가면 키오스크와 로봇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테이블에 앉아 키오스크로 메뉴를 고르고 결제하여 주문을 하면 로봇이 음식을 가져다 줍니다. 식당에서 사람을 대면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카페에서 키오스크로 커피를 주문하면 바리스타 로봇이 커피를 내리고, 배달 로봇이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로봇이 치킨을 튀기고 떡볶이를 만듭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경제위기 등 악조건 속에서 인건비라도 줄여보고자 로봇을 반기는 자영업자들의 인터뷰가 쏟아져 나옵니다. 대형마트 또한 키오스크를 도입하고 있는데 지난 5년간 1만여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고 합니다.(MBC, 2023.2.7) 2023년 기준 최저임금이 월 200만원이 넘었는데, 키오스크 월 대여비는 5만원이라고 하니 바꾸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겨질 상황입니다. 소자영업자와 노동자의 구조적으로 강제된 생존 대립 구도 속에서 소자영업 영역에서의 일자리가 사라져 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화이트 칼라의 노동 형태 또한 이전과는 달라졌습니다. 일은 반드시 사무실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점점더 낡은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집이나 카페에서 ‘줌zoom’이나 ‘구글 미트'를 활용하여 화상회의를 하고, ‘슬랙’이나 ‘잔디' 등의 업무 소통 툴을 활용하여 일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구글 캘린더로 서로의 일정을 공유하여 확인하고, 구글의 문서, 시트, 슬라이드 등을 활용하여 일을 하고, 구글 드라이브 등의 웹드라이브에 문서를 저장해두고 어디서든 꺼내 작업하는 모습은 이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노트북이 앞에 있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거의 모든 것을 확인하며 일을 하고, 심지어는 운동을 하다가도 스마트워치로 급한 일을 처리하기도 합니다.  이런 비대면 노동의 확산에서 시간과 장소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유연성이 가장 큰 장점으로 여겨지고, 노동자의 만족과 생산성 향상이 기대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중력 저하, 동료와의 소통 역량 약화, 사회적 고립 가능성의 증대와 같은 우려를 하기도 합니다. 앞으로의 노동의 변화는 어느쪽에 가까울까요? 이미 놀랄 정도로 변했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라 더욱 급변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생성형 AI를 활용한 노동의 급격한 변화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셈입니다. 변화발전하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노동을 잘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은 이제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빠르게 적응 할 수 있는지에 따라 생겨나는 ‘디지털 격차'에 의해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라 지속적으로 재교육되는 노동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업장, 공장의 변화는 더욱 놀랍습니다. 쿠팡 물류센터에서는 무인운반차 로봇이 택배 물품을 나르고, 분류로봇 ‘소팅봇'이 물건을 분류하고 있습니다. 쿠팡은 전 과정에서 자동화 기술을 도입해 노동력과 시간을 1/3로 줄였다고 합니다. 이미 AI와 로봇이 상당부분 사람을 대신하고 있는 셈입니다. 네이버 쇼핑과 협업하는 물류업체 파스코의 작업장에는 사람이 다니는 길 자체가 없다고 합니다. CJ대한통운, 롯데쇼핑 역시 이미 자동화 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기계가 인간에 비해 정확도가 높고 속도도 더 빠르고 드는 비용도 적기 때문에 이는 효율도 높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MBC, 2023.2.7) SF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 AI와 로봇에 의해 자동으로 돌아가는 작업장이 실현되고 있는 중입니다. 경제ㆍ산업의 급속한 디지털화/자동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플랫폼 경제의 확산은 이미 많은 분들이 인식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배달의 민족’ 앱을 통해 음식을 주문하면 빠른 시간 안에 배달 노동자가 음식을 가져다 줍니다. 배민 안의 ‘비마트’로 주문하면 슈퍼에 가지 않고서도 생활 물품들을 빠르게 받을 수 있습니다. 비마트에 원하는 물건이 없다면 쿠팡을 통해 장을 보면 ‘로켓배송'으로 물건을 빠르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 청소 할 시간과 여유가 없다면 청소 도우미 서비스 앱에서 사람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플랫폼을 통해 법률상담도 받고, 약을 배달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일들이 플랫폼의 매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플랫폼 경제의 발전은 플랫폼 노동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배달의 민족 등 배달 플랫폼을 통해 배달 노동을 수행하는 라이더 노동자들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플랫폼 노동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앱으로 택시를 부르거나, 법률 자문, 집청소 등 다양한 다양한 노동이 플랫폼 노동이 될 수 있고 또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플랫폼 노동은 팬데믹을 거치면서 대도시에 인구가 극도로 몰려 있는 한국 상황과 결합되어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고용하는 사람과 일을 하는 사람이 조건에 따라 매칭으로 연결됐다 흩어지는 형태로 일을 하며, 이는 전통적인 회사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입니다. 적재적소에서 원하는만큼 일 할 수 있어 효율적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회 안전망의 보호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불안정한 노동을 하고 있다는 우려가 훨씬 큽니다.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프레카리아트들은 긱 워크, 즉 단기적인 계약을 맺고 수행하는 일회성 노동, 플랫폼 노동이라는 이름의 불안정 노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플랫폼 노동자들의 권리는 무엇이며 이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은 어떻게 구축해야 할까요? 택배를 분류하는 쿠팡의 소팅봇(쿠팡 뉴스룸) 독일의 대응, ‘산업 4.0’과 ‘노동 4.0’ 앞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변화가 급격하게 진행중이고, 대응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시급함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른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을 독점하고 있는, 이를테면 플랫폼을 소유하고 있는 최상위 계층이 부를 독점하게 될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계층이 그 다음 계층이 되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적 안전망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불안정 노동을 하는 프레카리아트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지어 프레카리아트조차 될 수 없는 사람들은 실업 상태에 놓일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일자리의 총량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더욱 심할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인간의 노동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가 시급합니다. 일자리의 양도 중요하지만, AI가 핵심적인 일을 맡고, 사람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점, 즉 노동의 질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른 급격한 사회변화가 이루어지는 시대를 ‘4차산업혁명', ‘산업 4.0’ 등의 용어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특히 독일은 지구적인 디지털화, 고도의 자동화에 대응하는 국가적 전략 차원의 연구 및 사회적 대화 프로젝트로 ‘산업 4.0’를 추진해 왔습니다. ‘산업 4.0’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제조업의 완전 자동 생산체계를 구축하는 산업 정책입니다. ‘노동 4.0’은 그 논의의 결과로 제시된 것입니다. ‘노동 4.0’을 도출하기 위한 핵심 질문은 ‘디지털 기술에 따른 사회변화 속에서 모든 국민의 노동, 좋은 노동은 어떻게 가능한가?’입니다. 우리도 같은 질문에 누가 어떻게 대답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독일은 2012년에 ‘2020 액션 플랜’을 발표하며 ‘산업 4.0’을 제시했습니다. 목표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전 국가 차원의 스마트 팩토리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015년, ‘플랫폼 인더스트리 4.0’을 정부, 기업, 연구소, 민관학 공동으로 구성하여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표준화-참조 체계 구축, 연구와 혁신, 네트워크 시스템의 보안, 법적 체계, 노동-직업 교육” 5개의 워킹 그룹이 구성되었습니다. 이는 ‘산업 4.0’이 기업 중심을 넘어 정부-기업-노동의 사회적 차원으로 논의하고 진행하게 되었고, 사회 정책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논의를 통해 먼저 <노동 4.0 녹서>를 내놓고 미래의 노동에 대한 국민 토론 주제 상정하여 사회적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노동 4.0’의 목적은 디지털 시대의 ‘좋은 노동’의 의미와 조건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기업, 협회, 학계, 노동계, 일반 시민 등이 2년간 논의하여 그 결과물로 <노동 4.0 백서>를 발간했습니다. ‘산업 4.0’과 ‘노동 4.0’은 동시에 추진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이명호, 2018 20~22p.)   사회적 논의의 결과로서의 <노동 4.0 백서>는 ‘양질의 노동’을 달성하기 위해 ① ‘양질의 노동’을 달성하기 위한 소득과 사회안전망 확보, ② 안정적이고 직업적 상승이 가능한 ‘양질의 노동’ 기회 제공, ③ 생애단계에 따라 변화하는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표준의 인정, ④ 노동의 질 유지, ⑤ 공동결정, 참여, 기업문화 논의라는 다섯 가지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에 따라 사회적 대화 및 연구를 거쳐 ① 실업보험에서 고용보험으로의 전환, ② 유연하지만 자기주도적인 근로 시간, ③ 서비스 부분에서 양질의 근로조건 확보, ④ 산업안전보건 4.0을 위한 접근법 마련, ⑤ 근로자 정보보호기준의 강화, ⑥ 공동결정과 참여의 지속과 사회적 파트너십에 기반한 전환, ⑦ 자영업자를 위한 사회적 보호의 증진, ⑧ 미래지향적 복지국가의 구축이라는 여덟 가지의 구체적인 정책방안을 제시합니다.(제제, 2023) 독일에서의 ‘노동 4.0’ 사회적 논의의 결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우리도 그 내용을 참조하며 사회적 논의를 해야만 한다는 점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 혁신에 따른 산업의 재구조화, INDUSTRY 4.0(pixabay) 한국판 ‘노동 4.0’의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소위 ‘디지털 기술에 의한 혁신’은 창조적이고도 효율적인 경제 성장의 장미빛 미래를 그리는 관점과, 기술에 의한 인간의 일자리 상실 및 종속이라는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관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정한 디지털 기술 존재 자체로는 대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디지털 기술은 자연·인간과 관련하여 누가 어떤 맥락 속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비윤리적이거나 사회문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챗GPT의 등장에 따라 ‘AI 윤리'를 제도적으로 갖춰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AI의 윤리'가 아니라 ‘AI와 관련한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에 대해서일 것입니다.   한국사회에 지구적인 디지털 기술 혁신과 관련한 대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디지털 기술 혁신이 ‘경제성장을 위한 신성장 동력 발굴'을 목표로 기업과 산업, 정부와 전문가 중심으로 기업간의 경쟁이나 국가간의 경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시민의 권리와 민주주의보다는 자본의 이윤이나 국가의 통제 논리에 따라 발전 방향을 결정하고 그 성과를 특정 주체가 독식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기술 그 자체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기술을 발전시키고 활용하는 특정 주체가 독점적인 이윤과 통제를 추구한다는 점이 위험한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에 힘입은 새로운 산업 체제의 구축은 국가와 자본이 아닌 시민·노동자·사회적 소수자 등, 시민사회 차원의 다양한 주체의 대응이 없다면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하고 고착화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4차산업혁명, 산업 4.0등의 표현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다고, 옳거나 틀렸다고 판단할 수 있도록 고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 갈래의 가능성을 지닌 디지털 기술에 의한 사회변화의 총체적인 흐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묘사한 여러 장면들은 우리가 이미 그러한 변화의 한 복판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기업은 달리고 정부는 일부 지원하고 있는데, 시민사회는 우왕좌왕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독일에서의 사회적 대화를 통해 도출 된 ‘노동 4.0’에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정부, 기업, 학계, 노동계, 시민 등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연구, 토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적 논의를 거쳐 정책 방안을 도출하는 대응 전략을, 한국사회의 버전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의 혁신에 따른 한국사회에서의 변화 양상에 대한 탐구, 그에 따르는 민주주의와 노동 차원에서의 문제점의 인식, 사회변화에 대응하는 사회안전망의 변형 및 제도화 대안 마련,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현 시대에 적합한 디지털 민주주의의 실현 등 다양한 이슈에 관한 국가 차원의 사회적 논의를 할 수 있는 공론장과 거버넌스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글 : 람시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캠페인즈팀 / ramsci@parti.coop <노동 4.0>의 상세한 내용은 ‘독일의 '노동 4.0'을 알고 계신가요?’에서 찾아보실 수 있고, 훨씬 더 상세한 내용은 <노동 4.0 백서(요약 번역본)>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플랫폼 노동에 관한 노동 4.0에서의 논의는 ‘노동 4.0이 예측한 플랫폼 기업의 이윤 독식'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플랫폼 노동의 문제에 대한 시민사회적 대응의 최근 사례는 ‘비가 내리는 어린이날 연휴, 배민라이더의 파업’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노동 4.0>의 한국적 함의를 담은 또 다른 글은 '한국형 , 진정한 노동개혁을 위하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시민들’에 의한 ‘공론장’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디지털 공론장을 만드는 집단지성과 인공지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빠띠의 블로그, 홈페이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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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민주주의와 시민주도 공론장
숙의민주주의와 시민주도 공론장 이 글은 한국행정연구원에서 2019년 2월 26일에 발간한 ‘행정포커스’ 138호에 ‘시민주도 공론장의 발전, 민주행정의 새로운 동학’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로, 현 시점에서 봤을 때 충분히 업데이트 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2019~2022년 동안의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의 수많은 시민주도 공론장 사례 등이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빠띠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주세요! 공론화의 시대? 공론화 유행의 시대? 2019년 1월 28일, 한국리서치와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가 발표한 ‘2018 한국인의 공공갈등 의식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52.4%가 이번 정부에서 갈등이 늘었다고 대답했고, 47.1%가 갈등 해소 노력이 부족하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90%가 집단 간 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기업과 노동자 간의 노사 갈등, 빈부 갈등, 보수와 진보의 이념 갈등,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갈등 등이 심하다고 인식되고 있으며, 최근 몇 년 사이 남녀 간의 젠더 갈등이 전면에 부상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갈등들의 해소 방안은 공론화가 행정 신뢰도를 높이고 숙의민주주의에 기여한다는 대답이 65.3%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공론화 법제화’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는 신고리 원전 공론화,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제주교육 공론화 제도화, 서산시 자원회수시설 공론화 등, 최근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제도적 공론화 실행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례는 ‘신고리 원전 공론화’입니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신고리 5, 6호기 건설을 계속하되, 탈원전 정책은 지속하기로 결론을 냈습니다. 이에 따라 차후의 다른 원전 건설 계획은 백지화되었습니다. 전면 백지화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원전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탈원전 정책이 아니라 여전히 원전 확장 정책이라고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원전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다른 원전의 건설 백지화가 이후의 전력 공급에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비판할 것입니다. 공론화 결과를 지지하는 입장은 공론장에서 절차적 합리성을 거쳐 합의에 도달했기 때문에 민주적으로 공공정책 추진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고리 공론화는 숙의민주주의의 제도화라는 차원에서 국가가 민주주의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데에서 중요한 경험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원전을 건설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에너지 공급 정책의 미래 비전 혹은 대안적 방향성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단발성으로 이루어지고 정당화에 그쳐서는 안 되며, 지속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떠올릴 수 있는 사례는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입니다. 교육부는 대학입시 개편 안을 ‘열린 안’으로 국가교육회의에 넘겼고, 이는 이견이 크고 사회적 합의가 충분치 않아 공론화 과정 통해 합리적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의도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는 시나리오 워크샵에 의해 제안 된 4가지 의제 중 시민참여단이 숙의를 거쳐 선택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시민참여단은 교육부와 마찬가지로 납득할만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였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의제 간에 치열한 경쟁이 있었지만 시민참여단에게 납득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였고, 특정 의제의 선택이 불필요한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우려되었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시민이 아닌 특정 전문가들로만 구성된 시나리오 워크샵의 임의적인 의제 설정, 공론화의 외주화, 정책위기 극복을 위한 동원으로서의 공론화 목적 등이 문제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교육에 관한 다양한 가치관과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복잡한 사안에 대해 단발적인 공론화 절차로는 결론이 나기 어렵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장기적인 과정으로서 대안적인 미래 비전을 만들어가는 공론장을 구축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갈등 의식조사로 돌아가서 흥미로웠던 점은 갈등해소 방안으로 공론화 법제화에 공감하는 동시에 공론화가 책임회피 수단으로 남용 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52.3%라는 점입니다. 이는 공론화 결정 여부를 정부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대답했던 비율이 10.7%에 불과하고, 일정 여건을 구비해 국민의 제안에 따른다는 비율이 58.5%에 육박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앞서의 두 사례가 정부 주도의 제도로서의 공론장이라고 볼 수 있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심화, 숙의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일보 진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왜 심화 될 필요가 있고, 숙의민주주의가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지, 그리고 정부 주도의 제도 공론장으로는 왜 여전히 한계가 있고, 어떻게 그것을 넘어 더 나아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숙의민주주의 협의의 대의민주주의는 선거 참여를 통한 대표자의 선출, 3권 분립 등 민주주의 제도를 지칭합니다.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협소한 이해로 인해 정책의 결정, 집행, 평가 등의 과정에서 민의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특히 소수자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못한다는 비판 속에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이 대두합니다. 그리고 시민들의 참여가 민주주의를 심화하는 데 중요하다는 관점이 대두하게 됩니다.  ‘시민참여’는 행정에 시민이 참여하여 정책 결정 및 평가 등, 정책 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문위원회, 공청회, 시민운동을 통한 참여 등의 방법을 들 수 있습니다. 대의의 정도를 강화하는 차원뿐만 아니라 행정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 확산이라는 차원에서도 중요합니다. 이는 ‘참여 민주주의’와 궤를 같이 합니다. 시민참여라는 정부 차원의 슬로건 하에 이루어지는 정책들이 실제로는 관에 의한 민의 동원, 정책 추진의 정당화 차원이 될 수 있다는 비판 속에서 ‘시민주도’라는 슬로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수동적인 참여가 아니라 자발성과 자율성에 입각한 시민들의 주도적 참여가 필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민과 관의 협력 관계 구축을 통한 통치라는 의미의 ‘거버넌스’도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차원에서 동일선상에서 추진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들은 시민참여를 증대하여 대의의 정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직접민주주의적 보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민참여를 강조하는 접근에는 공적 의제들에 대한 다양한 시민들의 숙의가 빠져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칫하면 얕은 정보에 의존하여 일면 합리적이면서도 일면 무지한 상태로 순간의 선호를 모아내는 데 그칠 수 있습니다. 미디어의 편향된 정보와 정치권력의 의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의 집단적 편향성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반면 숙의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주도적 참여를 전제로 시민들의 숙의와 포괄적 대표성을 더하여 한 단계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숙의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론화’와 ‘공론장’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공론은 공적 의제에 관하여 모아진 의견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순히 조사를 통해 다수의 의견을 파악한 여론과 달리, 공론은 충분한 시간과 적절한 절차의 과정을 거친 깊은 토론, 즉 숙의를 통해 재형성된 여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론화는 공적 의제에 관하여 다양한 의견들을 모으는 과정을 말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경험의 맥락에서 보면, 공론화는 공공성을 지니지만 논의되지 않는 의제를 여럿이 의논하는 대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의미와 공공 정책 관련 의사결정 과정에 시민들의 의견을 확인하고 결집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공론화는 대개 후자의 의미이고, 시민사회에서 새롭게 제기하는 공론화는 전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공론장이란 공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론장이란 정부를 포함하는 국가와 시민들로 이루어진 시민사회 사이에서 형성되는 공간으로서, 시민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숙의하여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내는 공적 공간을 말합니다. 이러한 논의에 따라 숙의민주주의는 시민 주도적 참여에 의해 공론장에서 공론화라는 의사수렴 제도 및 실천들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민주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숙의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상호 이해를 통해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과 합의의 가능성을 높입니다. 그리고 사회갈등을 극복하거나 예방하고, 참여자들의 책임감이 높아져 결과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이 강화되어 민주주의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숙의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고 민주주의의 심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정부 주도의 제도 공론장의 한계와 다양한 시민주도 공론장의 가능성 지금까지 논의한 숙의민주주의는 현재 폭발적으로 시도되고 있는 정부 주도의 제도 공론장과 대체로 조응합니다. 앞서 언급한 신고리 원전 공론화와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의 사례에서 볼 때, 정부 주도의 제도 공론장은 정부가 이미 추진중인 정책과 관련한 갈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짧은 시간 안에 결론을 내려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공정하고 객관적인 설계와 관리, 즉 절차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부 주도의 제도 공론장을 민주주의의 진전이라고 평가하더라도 한계를 주목하고 극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정부 주도의 제도 공론장의 한계는 앞서 살펴봤던 하버마스식의 거시적인 국가 공론장 자체에 내재하는 한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국가기구에 대항하는 시민사회의 공론장 역할을 강조하지만 최종적인 의사결정 권한을 여전히 국가기구에 위임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등한 시민들의 이성적 논의를 전제하고 있지만 현실의 제도 공론장은 약자, 소수자들의 경험에 대한 표현을 다수자의 관점에서 억제하고 배제하는 경향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위해서 시민들이 주도하는 시민사회 공론장의 가능성, 시민에 의한 자발적 공론화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사회 공론장’은 시민 주도의 자율적 참여를 통한 시민사회 차원의 다양한 공론장 실험들을 의미합니다. 가장 작게는 개인 대 개인 간의 숙의 토론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다양한 단위의 집단, 조직, 공동체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주제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숙의 토론 방식들의 실험들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제가 몸담고 있는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에서는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한 시민사회의 역량 강화라는 차원에서 다양한 공론장 실험들을 수행하고 있습니다.(바꿈은 2020년 초에 해소) 청년들이 자신들의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 젠더 문제, 대학 문제, 어린이집 영유아교사의 노동 조건 문제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로 공론장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공론장 실험은 공론조사를 응용한 정책 배틀, 사이언스 슬램을 차용한 정책 경연, 합의회의, 월드카페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공론장 실험들이 기존의 행사들과 다른 것은 참여자들로 하여금 소비자나 수동적 참여자가 아니라 능동적 참여자로 논의하고 자신의 참여로 인해 산출되거나 변화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시민사회 공론장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주도적 역량을 점차 갖출 수 있게 됩니다. ‘풀뿌리 공론장’은 시민사회 공론장과 상당 부분 겹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독자적인 영역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풀뿌리 공론장은 ‘지역’ 차원에서 실현되는 생활세계의 일상적 공론장을 의미합니다. 풀뿌리 공론장은 정부 주도 제도 공론장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공론장 또한 협의의 의미에서 시민사회단체들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으며 시민 개개인들의 문제의식들을 충분히 대의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제기된 것입니다. 풀뿌리 공론장의 대표적인 최근 사례로 대전의 ‘누구나 정상회담’을 들 수 있습니다. 2018년 지방선거 시기에 대전지역의 시민들은 자체적인 대화 모임을 거쳐 지방선거 의제들을 도출했고 후보와 협약을 맺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월평공원 공론화’를 들 수 있습니다. 아파트 단지가 공원에 들어서게 되는 상황이 되자 찬반 속에서 공론화위원회가 시민숙의단을 모아 현장답사 및 상호토론을 거쳐 산출한 결과를 지방정부에 전달하여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친 사례입니다. 풀뿌리 공론장은 각 지역별로 일상적인 공론장에 시민들이 상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시민사회 공론장과 풀뿌리 공론장도 거시적인 공론장의 문제, 정부주도의 문제를 피할 수는 있지만 대표성의 문제가 잔존할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 제기된 ‘소우주(microcosm) 모델’은 무작위로 추첨 선발한 사람들로 구성된 시민들의 작은 공중이 숙의토론의 단위가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대표성을 확보하면서도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 공론장과 풀뿌리 공론장도 항상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소우주 모델과 결합되는 방식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디지털 공론장’을 별도의 공론장 영역 및 실험의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디지털 공론장이란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동시에 작동하고 있음을 전제하는 개념입니다. 디지털 공론장의 발전 및 확산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활동가 그룹 ‘빠띠’가 제작 및 운영하는 서울시의 디지털 민주주의 플랫폼 ‘민주주의 서울’을 일례로 들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서울’에 난임 시술 받는 사람이 주기적으로 꼭 맞아야 하는 주사를 보건소에서 맞게 해달라는 청원글이 올라왔습니다. ‘민주주의 서울’은 50명이 공감하면 부서가 답변하고, 500명이 공감하면 공론장이 열리고, 5천명이 공감하면 박원순 서울시장이 답변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해당 의제는 공론의제선정단 회의에서 논의 후 공론화 단계를 밟아 제안된 발굴 사례로 서울시에서 당사자와 만나고 시민제안 워크숍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디지털 공론장에서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디지털 공론장 또한 일상적 공론장의 핵심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게 됩니다.  시민사회 공론장, 풀뿌리 공론장, 디지털 공론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을 강화한 시민들은 정부 주도의 거시적인 국가 제도 공론장에서도 점차 자신들의 주도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시민주도 제도 공론장의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시민주도 제도 공론장’이란 시민사회가 기획 및 주도를 하고 정부가 운영 및 지원을 하는 거시적 제도 공론장이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공론장이 국가 차원의 하나의 거대한 영역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영역에서의 다양한 형태의 시민주도 공론장이 있을 수 있고 제각각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조성되고 발전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공론장들이 서로 연결되어 선순환하는 네트워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공론장의 발전 방향은 민주시민들의 역량을 강화할 것입니다. 역량을 갖춘 민주시민들의 주도적 참여에 의한 숙의민주주의는 갈등 회피나 덮기가 아닌 근본적인 해결의 가능성을 높이고, 시민들의 의제 설정 권한을 확대할 것입니다. 정부의 관심 정책만이 아닌 시민들의 공익,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시민주도 공론장들의 발전은 국가 차원의 거시적 제도 공론장이 제 역할을 하는 데 필수이며, 좀더 정확한 의미에서의 거버넌스, 주민자치, 지방분권 등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토대가 됨으로써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할 것입니다. 시민조차 되지 못한 배제된 자들의 임파워먼트를 통한 민주주의의 급진화  아직 좀더 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심화와 관련 된 논의들의 이면에는 시민의 ‘임파워먼트empowerment’에 대한 강조가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임파워먼트는 단순히 역량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힘ㆍ권력을 가지지 못했거나 적게 가진 자에게 더 많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깊이 들어가면 시민 자신의 자발적 표출,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공간과 자원의 지원과 독려, 시민들의 조건과 요구를 표현할 수 있는 담론의 구성 등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요인들을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제도화와 요인들 간의 생산적인 관계의 발전 등을 포함합니다. 시민은 정의상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집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성소수자, 난민, 여성, 청년과 같이 충분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배제된 자들이 존재합니다. 시민들의 더 많은 임파워먼트도 중요하지만 ‘배제된 비시민’의 임파워먼트 또한 그에 못지않게, 혹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시민의 주도적 참여에 의한 숙의민주주의의 발전, 민주주의의 심화는 분명 더 나은 대의민주주의를 의미하지만, 급진적 실험을 통한 사회구조 혹은 제도의 변형까지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정치체제 역시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그 자체의 변형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일부러 막아둘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급진적 실험의 성공과 성과는 제도 혹은 구조의 변형을 가능하게 해주는 맹아가 되며, 때로는 변형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청년 당사자들에게 예산 편성 등의 행정 권한을 상당 부분 직접적으로 위임하기로 한 서울시의 청년자치정부는 기존에 시도되지 않던 급진적인 실험으로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려는 전략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급진화는 시민조차 되지 못하는 배제된 자들의 임파워먼트와 급진적 실험에 의한 구조 혹은 제도의 변형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더욱 진전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숙의민주주의와 공론장의 발전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심화를 의미하지만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급진화와 잘 조화될 수 있습니다. 이상적 담화 상황에서의 합리적 토론에 의한 상호합의라는 의사소통 가능성을 지향하는 숙의민주주의의 관점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물신화하지 않고, 더 나은 민주주의적 제도로의 변형에 관한 합의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공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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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토의로 더 나은 답을 찾기 위한 노력, 숙의!
?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분법을 넘어 우리는 일상에서 이것인지 저것인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자주 겪게 됩니다. 이것도 장단이 있고, 저것도 장단이 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이것과 저것의 장점을 합친 것 등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을텐데,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시도들은 저것의 편이 되고, 저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시도들은은 이것의 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박쥐로, 때로는 회색분자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회는 복잡다단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분법은 대체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문제로 인한 갈등 상황을 끝없이 재생산 할 뿐입니다. 복잡다단한 사회는 다층적인 균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층적으로 접근하여 분석해야 합니다. 다양한 숙의 과정들을 통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늘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공론을 형성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도록 촉진하는 공론장이 필요합니다. 전의 글에서 공론장에 ‘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썼던 것 같습니다. 이번 글에서 그 이야기를 좀더 해보려 합니다. 토론과 토의와 숙의의 개념의 구분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보고자 합니다.  ? 토론debate,  토의discussion, 숙의deliberation토론(debate)은  특정한 주제에 대해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 의견 교환을 통해 어느 쪽의 주장이 옳고 그른 지를 따져 각각 자기 쪽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상대방 또는 청중을 설득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토론의 주체와 청중들은 토론 과정에서 주제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점에서, 토론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토론은 찬성과 반대 입장으로 나누어 대립 관계에서 논쟁을 벌이기 때문에 경쟁적이고, 서로에게 공격적으로 대하기 쉽습니다. 타협, 협의, 조정이 없는 승패에 의한 결정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토론만 강조된다면 적대의 이분법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함정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토의(discussion)는 의견 교환을 통해 어떤 문제에 대해 다양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여 의견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토의는 [1]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것 자체'와, [2] '협의, 조정, 타협 등을 통해 다양한 의견들의 간극을 좁혀 하나의 안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단계적으로 구별하여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1] 다음에, 토론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3]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토의는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방법이며, 노력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토의는 상호 협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토의는 옳음을 관철하는데 있어서는 항상 부족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토의는 때로 기계적인 타협에 의한 정당화로 형식화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숙의(deliberation)는 “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의논함”을 의미하며, 토론과 토의를 포괄합니다. 숙의를 다양한 주체의 다양한 논의를 모아 사회의 문제를 민주적으로 풀어가는 것으로 본다면, "시민, 이해당사자, 활동가, 전문가, 국가 등에 의한 깊이 숙고하는 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숙의에 대한 강조는 토론이 부족/종족주의 혹은 진영론의 재생산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할 필요성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숙의는 어떤 면에서 토의discussion의 고도화를 의미하며,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한 제도 변형이라는 정치체제로서의 논의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종합적으로 본다면, "숙의는 토론과 토의를 병행하여 공론을 형성하고 민주적 의사결정으로 나아가고 사회적 합의에 이르고 제도화로 나아가는 프로세스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일 것입니다. ? 숙의, 공론장, 민주주의일상에서 토론과 토의는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구분 없이 혼용해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엄격하게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기기 위한 토론도 중요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토의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주체들의 다양한 의견이 제시 될 수 있고, 생산적으로 논의되어 더 나은 답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하는 숙의가 중요하다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공론장에는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토의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주체들의 토론과 토의가 모여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지성, 집단지성이 형성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에너지가 대의민주주의 정치를 통한 제도변화의 노력들이 형식화 되지 않도록 하는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숙의가 이루어지는 공론장에서 개개인들이 서로 더 많이 배우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공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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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자정 없이 공론장은 없다
이 게시물은 “유민석, 2019,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서해문집”의 1장 ‘존엄한 삶에 대한 확신의 파괴_혐오표현'을 요약 정리한 것에 아주 약간의 의견을 보탠 것입니다. 혐오표현의 정의혐오표현은 “소수자 집단의 특성을 겨냥한 적대적인 표현"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종, 피부색, 국적, 성, 장애, 종교, 성적 지향과 같은 어떤 집단의 특징을 근거로 행해지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반감이나 경멸의 소통"입니다.(John T. Nockleby 외) 혐오의 대상은 “소수자 개인이거나 그 개인이 속해 있는 집단(표적 집단)이며, 혐오표현은 “‘그냥 말’이 아니라 여러 감정에 기반한 차별행위이자 폭력행위"입니다. 혐오표현을 좀더 넓게 해석하고자 할 때는 “소수자의 도덕성이나 능력에 대한 의심을 나타내는 표현에서부터 해당 집단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까지, 다양한 의사소통을 아우르고자” 합니다. 이 경우에는 특정 발화가 혐오표현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더 많이 생깁니다. 애매하거나, 이론적 분석이 필요하거나, 특정 맥락속에만 혐오가 되거나 해서 규제의 대상인지 논의의 대상인지 토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 많습니다.혐오표현의 종류[1] 모욕의 혐오표현 “모욕 형태의 혐오표현은 ‘특정 집단에 대한 비하, 조롱, 경멸, 무시 등을 드러내는 표현'들"로 모욕 대상을 직접적으로 비하하고 폄하하는 것입니다. “언어로 하는 구타”인 셈입니다. [2] 선동의 혐오표현 선동의 혐오표현은 “표적 집단을 향한 혐오와 차별을 고조시키고 증폭시키는" 행위입니다. “증오의 촉진” 행위인 것입니다. [3] 종속의 혐오표현 종속의 “혐오표현은 기존 권력관계에서 종속된 위치에 있는 청자들을 재종속시키면서 일종의 열등한 지위의 신분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합니다. 종속의 혐오표현은 1) “소수자들이 열등하다가 서열을 매기고”, 2) “그들을 향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3) “그들에게 부당하게 권력을 박탈"합니다. “혐오표현은 이 3가지 작동방식을 바탕으로 피해자들을 권위와 권력이 박탈된 지위로 종속시키는 행위"입니다. 종속의 혐오표현은 “열등한 신분의 창조” 행위인 것입니다.  [4] 무시의 혐오표현 무시의 혐오표현은 소수자의 위치로 인해 거절이나 항의가 힘든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고, 책임을 돌리고, 침묵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를테면 “‘피해자 비난하기'는 또 다른 폭력”이고, “이중으로 침묵시키는 것”입니다. “묵살과 왜곡”의 혐오표현인 것입니다. 책에서 구별하는 혐오표현의 네 종류에 대한 논의는 혐오표현을 특정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의 불쾌함으로 이해하여 생기는 한계를 넘어, 혐오표현의 판정, 혐오표현의 경중의 정도 등을 판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토론을 하거나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혐오발화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내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혐오표현에의 대응혐오표현에의 대응은 크게 법적 규제와 대항표현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1] 법적 규제는 “‘혐오표현이 소수자들을 침묵시키며, 침묵당한 소수자들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규제해야 한다'는 언어철학적 논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차별금지법'의 추진이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관점에서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를 법제화 하고자 하는 시도일 것입니다. 혐오표현에 대한 법적 규제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규제함으로써 소수자의 안전함을 확보함으로써 자유와 평등을 신장할 수 있지만, 충분한 토의를 통해 혐오표현의 사회적 기준을 확립하고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법 적용 기준에 있어서의 애매모호함으로 인한 잘못된 법 적용의 가능성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혐오표현에 대항하는 대항표현에의 법적규제가 되는 경우도 있으며,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토론의 영역을 법적 규제로 닫아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2] 대항표현은 “전복하거나 되받아침으로써, 즉 대항표현으로 맞서 싸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항표현은 개인 차원의 대항표현, 집단 차원의 대항표현, 국가 차원의 대항표현이 있습니다. 공론장에서의 토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거쳐 공론을 형성하는 것은 시민들 자신에 의한 사회적 기준을 마련하는데 필수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나 활동가나 시민들의 개인적 대항표현은 필수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에게 큰 부담을 지우는 일입니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저격'은 피하고 싶은 무서운 일입니다. 관련 사회운동조직 등에 의한 집단 차원의 대항표현은 안정적으로 정제된 대항표현을 지속성 있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 또한 필요한 일이지만, 힘든 일입니다. 국가 차원의 대항표현은 권위있는 공직자가 혐오표현의 사례를 비판하는 대항표현을 하는 직접적인 방식이나,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차별 대응 특별추진위원회' 등과 같은 활동을 지원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차원의 대항표현은 각각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필요한 것입니다. 혐오표현 없는 안전한 공론장의 가능성공론장이 안전하다는 것은 시민 누구나 공격받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롭게 말한다는 것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만의 자유가 된다면, 그 자유는 누군가를 공격할 자유가 될 수 있고, 그 공격으로부터 누군가를 안전하지 못하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혐오표현이 단순의 감정 차원의 혐오의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 집단의 특성을 겨냥한 적대적인 표현’이라면, 우리는 사회적 소수자가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야 민주주의 사회의 필수적인 전제인 사회 구성원들이 공존하는 집합적인 자유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안전을 위한 법적 규제는 그 필수적인 필요에도 불구하고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을 때, 그 법의 빈 공간을 채우는 시민들의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을 때, 국가권력에 의한 통제의 한 방법으로 형식화되거나 악용될지도 모릅니다. 플랫폼에서의 규제 또한 법적 규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비슷한 관점에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잘 작동하는 법적 규제를 잘 만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법적 규제로만은 채울 수 없는 빈 공간들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개인의/집단의/국가차원의 대항표현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개인은 공론장의 주체로서 ‘토론하는 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시민의 역할을 합니다. 집단은 사회운동의 주체로서 ‘활동하는 민주주의'를 통해 소수자들을 대변하고 대항표현 활동의 지속성을 담보합니다. 국가는 촉진과 조정의 주체로서 ‘제도화 하는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안전하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민주주의 사회는 구성원들이 공존하며,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다수의 지지를 점점 확장해 나감으로써 시민지성에 입각한 시민문화를 형성하는 사회일 것입니다. 그렇게 형성된 공론에 입각하여 끊임없이 더 나은 제도의 변형을 이루어 가는 사회일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혐오와 차별 없는 안전한 공론장’을 만들기 위해, 공론장에서 혐오와 차별이 무엇이고 그 구체적인 기준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힘들고 지난한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순적인 이 과제는 이론에서의 추상적인 논의와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복합적 얽힘의 표현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이 실타래를 풀어야만 합니다. 이 실타래를 한 번에 풀어줄 단 하나의 묘수 같은 것은 찾기 어렵겠지만, 함께 하나씩 풀어가보면 좋겠습니다. 명백한 혐오표현은 즉각 규제해야 하지만, 애매하거나, 토의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더 나은 합의/협의/조정에 이를 가능성이 있거나, 맥락 파악에 따라 이론적인 논증이 필요한 경우 등에는 바로 규제하기 보다는 시민들이, 활동가들이, 전문가들이 함께 토의를 통해 풀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빠띠 캠페인즈가 그런 공간이 될 수 있길 바래봅니다.함께 ‘혐오가 자정되는 공론장’을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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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은 숙의가 필요하다
공론장에서 숙의의 의미 '숙의'는 일반적으로 “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의논함”을 의미합니다. 민주주의와 공론장 등과 관련해서는 deliberation의 번역어이며, 거의 이러한 맥락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deliberation은 숙의뿐만 아니라 토의, 심의로도 번역됩니다. 이는 deliberation에 “어떤 문제에 대하여 검토하고 협의”한다는 의미와, “심사하고 토의”한다는 의미까지 포괄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민주주의를 더욱 민주적으로 만들기 위한 제도화의 맥락에서 보면, 숙의는 “법원의 배심원, 의회 입법자, 위원회 위원, 혹은 다른 사람들이 이성적 토론 이후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의미합니다(존 개스틸 외, 18).여기서 ‘제도화'를 일단 제외하고,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숙의는 공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시민, 이해당사자, 활동가, 전문가, 국가 등 다양한 주체가 모여 깊이 숙고하여 논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들리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공론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공론장은 다양한 주체들의 숙의를 통해 공론을 형성하는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숙의 공론장제인 맨스브리지는 “반대만 하는 민주주의"를 넘어 “통합하려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통합하려는 민주주의에서 대중은 서로 존중하는 숙의 과정에 참여하며, 서로 경쟁하는 증거들과 주장들의 경중을 잘 판단한 다음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차이를 억눌러버리는 은밀한 체제 순응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존 개스틸 외, 19). 반대와 통합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반대가 아닌 통합’ 혹은 ‘순응이 아닌 저항’의 선택을 강요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이야기만 나눈다고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저항만 한다고 더 나은 사회가 도래하는 것도 아니겠지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저항은 민주주의 내에서의 제도적 변화를 위한 토의의 제도화와 공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활동의 민주주의와 토의의 민주주의는 둘 다 필요합니다.벤저민 바버는 ‘약한 민주주의’와 ‘강한 민주주의’를 구별합니다. 약한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경쟁하는 것 , 또는 개인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며, 강한 민주주의는 “개인보다 공동체의 행동에 더 큰 중요성을 두고, 대중이 함께 논의하고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존 개스틸 외, 19). 전자는 다원주의적 접근에 조응하며, 후자는 공화주의적 접근에 조응합니다. 숙의가 이루어지는 공론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민주주의는 후자의 관점과 친화성을 가집니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며, 대의민주주의는 ‘시민들이 대표자를 선출해 정부나 의회를 구성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 제도’를 의미합니다. 대의민주주의는 최소한의 필수적인 민주주의 제도를 지칭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만으로는 선거 때 외에는 시민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제도로서의 공론장을 구축하는 것’과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의하는 시민사회 공론장을 활성화’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가 더욱 민주적일 수 있도록 보완 혹은 변형하는 중요한 일이 됩니다. 숙의는 공론장의 필수 전제이며, 숙의 공론장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중요한 방법일 것입니다.  숙의의 필요숙의는 여러 차원에서 중요합니다. 이론적인 정합성을 갖추기 위해 학자들 주도로 숙의하여 작업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좀더 나은 사회정책을 만들기 위해 정치인, 행정가, 전문가들이 숙의하여 작업을 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토의하는 과정에서 더욱 깊이 이해하고 성찰하고 정제된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하는 시민역량강화 역시 그만큼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론장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강화의 공간이며, 민주적 대화라는 문화를 형성해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엘리트에 의한 대의를 넘어 일종의 ‘시민 지성'을 필요로 한다면, 숙의가 이루어지는 공론장만큼 중요한 것을 없을 것입니다. 시민 지성을 형성하는 정부 차원의 제도 공론장이 필요하겠지만, 시민들이 직접 주도적으로 토의를 전개하는 시민사회 공론장 또한 필요하며,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디지털 공론장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사회적 균열이 드러나고 다양한 주체들이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논의를 하고 있는 현 시대에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활용함으로써 집합적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가장 좋은 수단이 바로 대화와 숙의"이기도 합니다. “신념, 가치, 문화, 혹은 삶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해결 방안을 찾는 데 숙의가 강하고 좋은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다양한 주체들은 숙의를 통해 합의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고 숙의를 거치며 잠정적인 해결 방안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좀더 포용적으로 변하고 수용성이 높아지게 됩니다(존 개스틸 외, 37).숙의가 있는 공론장이 되기를 바란다.여기에서 서로간의 생산적인 토의가 활성화 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주체들이 함께 의견을 나누고 모아가는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그 과정에서 빠띠 캠페인즈에 함께 하는 우리 모두가 좀더 많이 알게 되고, 좀더 잘 쓰게 되고, 서로 대화를 잘 나눌 수 있고, 좀더 잘 의견을 모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양한 주체들이 권력에 맞서는 목소리를 내고 있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주체들이 복잡한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여 새로운 사회계약을 만들어 가야 하는 혼란의 시대입니다. 숙의 공론장이 만능키가 될 수는 없지만 각 집단간의 적대의 재생산에 그치는 것을 넘어 서로간의 간극을 좁혀 좀더 나은 답을 찾아갈 가능성은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함께 ‘숙의가 있는 공론장’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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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정의를 향한 민주주의의 여러 얼굴
기후정의를 향한 민주주의의 여러 얼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기후위기의 심각함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이어지는 기후변화가 있다’는 문항에 대한 긍정 95%, 인간 활동 때문에 기후변화가 발생했다고 믿는 비율 86%, 기후위기 대응이 미흡하다는 응답 73.5% 등의 수치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기후활동가 아빠, 2023)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대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위기에 대한 인식만큼 시민적 대안 도출을 해내지 못해서일까요? 전문가들의 문제일까요? 시민들을 대의하지 못하는 정치권의 문제일까요? ‘기후정의’는 기후위기의 원인이 정의롭지 못함을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하는 사회운동을 말합니다. ‘민주주의'는 기후정의와 떼려야 뗄 수 없이 함께 등장합니다.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민주주의가 필수적이라는 말인데, 이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일까요?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민주주의의 다양한 의미라는 차원에서 지난 일들을 살펴봄으로써,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실질적 대응의 방향을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복원해야 할 민주주의 기후정의운동에서의 민주주의의 의미 중 하나는 ‘민주주의의 복원'입니다.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영향 속에서 ‘경제성장’이 사회의 지상명령이 되는 것은 기후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인간의 생산은 생존을 넘어 욕망과 축적을 위해 지속불가능한 방향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가진 나라, 가진 자의 부를 늘릴 뿐이기 때문에 양극화와 불평등, 탄소배출에 따른 기후위기가 심화됩니다. 부유한 나라, 부유한 계급의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은 점점더 강해지고, 민주주의는 훼손되고 형식화됩니다.  이처럼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는 자본에 의한 정치·사회의 식민화에서 비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후위기로 피해를 얻게 될 다수의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행사하는 민주주의를 복원, 혹은 실현하는 것이 기후정의의 목표가 됩니다.   시민행동으로서의 민주주의 두 번째는 ‘시민행동’입니다. 기후위기를 인식한 시민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및 비영리조직 등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하는 다양한 시민행동이 또 다른 민주주의의 의미입니다. 2021년 9월 24일 5만여명이 참가한 ‘9.24 기후정의행진’이 최근의 시민직접행동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400여개 단체와 2,400여명의 추진 위원이 함께 만들어가는 조직위원회에 의하면 “기후정의행동은 정부와 기업의 녹색성장과 탄소중립 정책이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돈벌이 시장을 창출하는 것에 불과한 상황에 맞서, 기후정의를 기치로 기후위기를 초래한 현 체제에 맞서고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싸움”으로 정의됩니다.(9.24 기후정의행진 홈페이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기후정의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말은 시민행동이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의미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세 번째는 다양한 ‘캠페인’과 ‘공론장’입니다. 기후정의을 위한 수많은 캠페인들과 상호 토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국가 탄소중립기본계획'의 최소한의 기준을 책임있는 대상들에게 요구하는 ‘지역에너지넷’의 촉구 캠페인이 진행중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물가와 기후위기의 대안으로서의 '1만원 교통패스' 도입을 추진하는 ‘1만원 교통패스연대’의 서명 캠페인, ‘청소년기후행동’의 기후소송 제기 등 다양한 캠페인이 이루어집니다. 시민과 지역사회가 중심이 되어 탄소중립을 실천하는 도서관의 사례도 있습니다. 시민들은 우주개발의 환경에의 영향, 탈원전의 필요, 대중교통 확충의 필요, 탄소중립농업의 다양한 방법과 가능성, 탄소중립을 위한 녹색교통의 한 가능성으로서의 자전거 이용 활성화,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찬반, 일회용컵보증금제의 필요 등 다양한 기후위기 관련 이슈에 대해 서로 토의하며 정답 혹은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갑니다.  2022년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이 열렸다.(기후정의행진 홈페이지 영상 갈무리) 거버넌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네 번째는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거버넌스’입니다. 2019년 시민사회의 기후위기 비상선언, 2020년 국회와 지자체의 비상선언을 거쳐, 정부가 탄소중립 목표와 그린뉴딜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2021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법(탄소중립기본법)」이 제정되고, <2050 탄소중립 녹색성장 위원회(탄중위)가 꾸려졌습니다. 2023년 3월 25일에는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발표습니다. (장윤석, 2023) 이는 사회적 논의를 통해 부족하나마 탄소중립이라는 법과 목표를 정립한 것입니다.  탄소중립기본법에 따르면 탄중위는 “청년, 노동자, 시민사회 등 각 사회계층의 대표성이 반영되도록 구성해야” 합니다.(들썩들썩떠들썩, 2023) 탄중위는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거버넌스 제도인 것입니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의 탄중위를 둘러싼 시민사회의 평가는 엇갈렸습니다. 탄중위가 기후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체제의 유지를 위한 정부와 자본의 논의 틀이라는 비판, 사회적 합의와 숙의가 정부 책임의 외주화로 기능한다는 비판, 탄중위의 기준과 목표치에 대한 비판 등이 존재하며, 시민사회의 탄중위 불참 후 기후정의행동으로 가시화 되었습니다.(구준모, 2021)(오연재, 2021)  다른 한편으로는 숙의와 결합된 더 나은 사회적 대화, 즉 정부와 다양한 주체들이 함께 하는 거버넌스와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됩니다. 한 예로 영국의 기후시민의회는 추첨으로 구성된 시민들의 모임으로 숙의 공론장을 거쳐 보고서를 제출하고, 그 보고서가 의회 정책 권고안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의 후정의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습니다.(들썩들썩떠들썩, 2023) 탄중위는 법으로 다양한 계층의 대표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국민참여분과의 설치는 시민의 목소리를 더욱 반영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거버넌스를 강조하는 입장에는 다양한 계층의 주장과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민주적 테이블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후정의의 진전이 어렵다는 전제가 작동합니다. 민간위원, 협의체, 시민회의, 공론장 등 다양한 층위를 포함하는 거버넌스 구성의 시도는 그 자체로 바림직한 것입니다. 다만 충분한 시간을 거쳐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권오현, 2023)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탄중위는 정권과 시민의 지지에 따라 제한적인 목표라도 설정하고 사회적 합의에 따라 추진하고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힘이 되거나, 형식화 된 정부 정책의 정당화 기제가 되거나 하는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시민참여 제도가 됩니다. 탄중위를 둘러싼 대립하는 시각들은 나름의 이유와 독자적인 합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탄소중립’이라는 비전과 탄중위의 기준 및 목표가 제한적이라는 주장, 다양한 주체들이 모여 공론을 형성하고 제도화 하는 거버넌스의 필요에 대한 주장은 시공간적 맥락에 따라 옳은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때로 공허한 구호로 그치고, 후자는 때로 시민 없는 제도의 형식화로 귀결됩니다. 기후위기에 실질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제한된 시간 안에 기후정의로 나아가기 위한 시민적 압력, 그리고 그와 결합된 정치적 제도화를 이뤄야 합니다. ‘기후정의행동’과 ‘탄소중립 거버넌스’의 간극을 좁히는 집단적 실천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기후정의를 위한 체제의 전환이 어려운 양당정치체제 내에서라면, 특히 더 거버넌스 제도 안팎에서의 시민 활동을 활성화 해야 합니다. 2021년 9월 11~12일 개최된 ‘2050 탄소중립위원회 탄소중립시민회의 시민대토론회'(탄중위 유튜브 갈무리) 정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 다섯 번째는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제도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기후 위기에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치권이 제대로 대의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선거에서 정당이 받은 표와 의석수에서의 차이가 큰 불비례성, 공고한 양당체제, 그로 인해 시민들이 대의가 되지 않는 점이 문제입니다.(기후활동가 아빠, 2023)  유일한 해법은 아니다 하더라도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되고 작동된다면, 양당제가 아니라 다당제로 이동 할 수 있다면, 기후위기에 대한 실질적 대응의 가능성은 높아지게 됩니다. 공정한 의석배분, 다양한 목소리의 반영, 정책의 질 향상, 지역구도 완화를 기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례대표제 국가들은 “환경정책에서 더 엄격”하고,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대체로 더 좋은 성과를 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비례대표제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율은 9.5%, 승자 독식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45.5%라는 수치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기후활동가 아빠, 2023)  민주주의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가?  이처럼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는 여러 얼굴들을 가지고 있고, 서로 대면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기후위기는 생산력을 중시하고 경제성장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개발 자본주의로 인해 심화됩니다. 시민의 집합적 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토대입니다. 기후정의를 위한 정치 제도화를 강제하기 위한 시민의 집단적인 압력 없이는 체제의 구조적 힘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후위기에 대해 시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고,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시민은 집단적인 역량을 강화합니다. 특히 2016년 촛불시위와 같이 시민의 거대한 직접행동은 국가와 자본에 의한 독점 권력을 극복하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복원 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 힘은 정치 제도 차원의 민주주의가 지금보다 더 나은 조건일 때 체제의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양당체제에서는 정치가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의 할 동기가 적습니다. 시민의 목소리를 더욱 잘 대의하는 제도정치적 조건을 마련할 때 기후정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시민행동과 제도정치는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적인 두 차원입니다. 분리되어 있다면 시민행동은 휘발되고 제도정치는 형식화되기 쉽습니다. 때문에 이를 매개하고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시민참여의 제도화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다양한 주체를 대의하는 거버넌스 제도의 구성, 집단적인 시민들의 숙의 공론화를 구현하는 공론화 제도의 구성은, 시민행동이 제도화되고, 제도정치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실질적인 힘입니다. 물론 거버넌스와 공론장 제도 또한 시민행동이 없을 때 형식화 될 수 있고, 제도정치적 조건이 부재할 때 시민행동의 하나로 환원되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한 차원으로 환원하기보다는, 민주주의의 여러 차원을 일직선상에 놓고 생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연계된 힘을 발휘 할 수 있도록 할 때 기후정의를 실현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특정한 국면에 민주주의의 어떤 차원이 강조되어야 할 지는 시민의 숙의, 그리고 시민의 집합적 힘에 달려 있습니다.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제도정치 조건 하에서 다양한 시민 활동을 통해 역량강화된 시민들과 전문가 및 이해당사자들이 공론장에서 숙의하여 공론화 하고 거버넌스를 통해 목소리를 낼 때, 기후정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고,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기후정의를 위한 제도화, 더 나아가 체제 전환이 가능할 것입니다.  ✏️글 : 람시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이사, 캠페인즈팀 리더 / ramsci@parti.coop 이 글은 오마이뉴스, 빠띠 홈페이지,  빠띠 블로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전장연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와 민주주의의 위기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 방법이 문제? 이제는 국민 모두가 알게 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투쟁은 아직 계속 되고 있습니다.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를 통해 최근에 많은 이들이 전장연을 알게 됐지만, 이 투쟁은 그보다 훨씬 오래됐습니다. 2001년 장애인 노부부가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를 타다 추락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고, 장애인 단체들은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선로를 점거했습니다. 이 날은 '중증장애인이 장애운동 역사의 전면에 선 날'이라고 평가받는 날입니다(한겨레21 2022.4.11). 전장연의 현재의 투쟁은 어떤 면에서 그때의 절절한 요구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2021년 12월 3일부터 진행해 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는 휠체어에 탑승한 시위 참가자들이 평일 출근 시간대에 서울 지하철에 탑승하여, 지나는 역마다 반복적으로 타고 내리는 방법으로 시위가 진행됩니다. '무고한 시민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말, '시민들을 볼모로 잡지 말라'는 말을 들을게 뻔한데, 왜 이런 방식의 시위를 택했을까요? 전장연의 박경석 대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시민에게 불편을 끼친다는 지적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관계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가 바로 관심이다. (장애인이) 사회와 분리되어 20년이고 30년이고 살아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불쌍한 시각으로 볼 뿐이다. 이런 풍조가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받는 비난조차 우리는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그 비난이 이 문제를 바라보게 되는 일종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북저널리즘, 2022년 5월 보도) "다른 방법도 당연히 있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게 아니에요. 이미 수많은 그 다른 방법을 했다는 게 중요하죠. 합법적으로 하라고 해서 공문을 보내고 면담을 요청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그렇게 다섯 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지낸 21년은 배신의 세월인 거죠."(한겨레21 2022.4.11)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시쳇말을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와 사회가 20여년간 외면해 온 그들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고, 더 나아가 관련 정책들을 제도화 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전장연이 지하철 시위라는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살펴봤지만, 시위의 '방법'에 대해 집중하는 것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장연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 장애인 탈시설 지원, 장애인 교육 보장, 장애인 권리 예산 반영 등을 요구하며, 서울시와 면담 등 대화를 나누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비마이너 2023.2.4.). 전장연이 이러한 요구들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시위 방법만 따지는 것은 본말이 전도 된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지하철, 버스, 택시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 권리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한지 함께 이야기 나누면 좋겠습니다. 장애인들의 시설 입소와 탈시설, 그리고 교육의 권리에 대해 논의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예산 반영에 대해 논의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의 위기: 공감, 연대, 신뢰의 부재 속에서 시민조차 될 수 없는 이들 우선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부재'라는 사회적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사고를 자신에 옮겨가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감이 주로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의 일로 여겨진다면,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공감은 '사회적 공감'일 것입니다. 장애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려 하지 않으면서 한국사회에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의 방법에만 집중하여 비난하고 있는 상황은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충분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시민들의 사회적 공감에 기초한 '연대의식'의 창출이야말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힘의 형성을 의미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시민조차 되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사회적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시민'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모든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자유민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시민의 권리는 소수자를 제외한 다수자의 권리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무고한 시민의 피해'와 '장애인의 이동권'의 이분법적 대비는 그 증거입니다. 장애인은 '비시민'으로 여겨지는 셈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민은 모든 이를 포괄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억압의 단어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는 지켜지지 않고 깨어지는 약속들 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의견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민주사회의 기본적인 권리의 실행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게 됩니다. 비시민의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들리게 하고, 그것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모든 이들의 실천을 통해 지금보다 더 많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라는 신뢰의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는 합법적인 법의 틀 내에서 정부와 정치권과의 대화라는 방법을 충분히 거친 후에도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제도를 신뢰 할 수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따름입니다. 시민들이, 사회적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전문가, 정치인 등과 함께 공론으로 벼려내어 정부가 제도화 할 수 있는 '신뢰의 제도화'를 이루어낼 때 지금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장애인의 권리에 관한 시민주도의 공론장, 커뮤니티,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전장연의 이동권 투쟁이라는 구체적 맥락 속에서, 장애인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과 연대의식을 형성하고, 사회적 신뢰를 형성해내기 위한 첫걸음은, 들리지 않던 이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시민주도의 공론장입니다. 수많은 매체에서 관련 이슈를 다루지만, 시민들의 토의를 통한 공론의 형성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소셜미디어에서 좋은 글들과 그에 대한 지지와 토론들이 오갈 것입니다. 하지만 휘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경우에 진영으로 나뉘어 일방적인 비난이고 오고 갈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일방향적인 메세지의 발신이나 일시적인 토의에 그치지 않는 실질적인 공론의 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민들의 공론장에서, 시민들의 상호간의 토의와 그에 따른 공론의 형성이 이뤄질 수 있도록 만들어 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양한 사례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한 예로 캠페인즈의 '장애인 권리' 이슈 페이지에서는 장애인의 권리에 대해 캠페인, 투표, 토론 등 다양한 방식으로 토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우리 주변의 '장애인 권리' 이슈, 캠페인즈에서 함께 이야기 나눠요' 참조). 캠페인즈와 같은 플랫폼에서의 일상적인 토의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 다양한 시민들이 모여서 함께 머리를 맞대어 이야기를 나누는  '들썩들썩떠들썩 :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 축제' '이동권 보장, 함께 나누어야 할 이야기' 같은 공론장 행사도 다양한 방식으로 많이 열릴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커뮤니티들에 의해 따로 또 같이 다양한 협력 프로젝트들이나 공동행동들이 이뤄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오마이뉴스, 2023.2.18 참조). 이러한 다양한 방식의 시민행동과 공론장 활동의 힘에 기초하여 정책의 제도화까지 이어질 수 있는 시민협력의 거버넌스를 만들어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함께 역량강화되어 연대하고 민주주의는 지금보다 좀더 잘 작동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글은 빠띠의 블로그, 홈페이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장애인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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