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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페미니즘(볼드모트) 소환하기
?작은공론장 ‘버터나이프크루 그 후, 우리가 나눠야할 성평등 이야기’에서 나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글을 읽고 아래에 댓글을 남겨주세요. 궁금하거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주시면, 9/23(금) 작은공론장에서 함께 논의 할 수 있습니다 버터나이프크루 페미리(Femi-ly)의 경험을 통하여 by. 팡세 버터나이프 크루 사업은 SNS로 지인이 링크를 보내주면서 소개해서 알게되었고, 그 때 페미니즘이 나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오면서 스트릿아트에 담아 시도해 볼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것을 대구인 나의 고향에서 이야기 하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해 생활 곳곳에서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대구에서는 일상에서의 대화가 부족했다. 대구에서 페미니즘이란 마치 볼드모트처럼 감히 그 단어를 꺼내선 안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페미니즘에서 내게 가장 컸던 것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이였기 때문에, 예술을 통해 그것을 나누고 싶었다. - 서울/수도권과 대구/지방의 문화적 격차/한계 (원인, WHY) 수도권에 몰리는 문화 예술 현상과 지방의 청년 이탈문제들이 오랜시간 지속되어왔다. 대구는 타 지방에 비해 미술대학이 많이 있는데, (대구에 있는 6개 미술대학, 경북대, 계명대, 대구가톨릭대, 대구대, 대구예술대, 영남대) 대구 내에서 이 청년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고, 청년들을 위한 정책이 수도권에 많이 특화되어있다. 특히나 디자이너, 미디어 아트 등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갤러리나 문화공간, 회사 등은 수도권에 몰려있다. 나는 대구 출신으로, 13년도 서울에 올라와 그래피티 작업을 시작했다. 홍대를 중심으로 전자음악과 미디어 퍼포먼스, 사진, 등 다양한 시도를 동시에 배웠다. 처음 그래피티 씬은 남성중심 연대문화가 강하게 깔려있었고, 이방인의 경험과 여성으로써 예술을 하기위해선 나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야했다. 학업으로 인해 서울에서 6개월, 대구에서 6개월을 보냈는데 수도권ㅡ지역간 분위기의 갭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대구에서도 문화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대구를 가면 그저 뉴스에나 나올법한 하나의 사건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있었다.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금방 휘발되었고, 비교적 열려있다는 예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희한하게 전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들이 전혀 이야기되지 않았다.   - 페미리가 이 격차/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계획한 것들 (어떻게, HOW) 페미리(Femi-ly)는 페미니즘을 통해 모인 가족이란 뜻으로, 대구 지역에서 여성인권 예술행동과 연대를 도모하는 팀 이다. 페미리 멤버는 대구-서울을 오가는 나와, 서울-수원을 오가는 예람, 대구에서 미술활동을 하는 현진 이렇게 세명이 멤버이다. 충남 천안 출신의 예람은 아프리카 케냐에서 3개월 동안 할례 반대 운동과 올바른 성교육 의식을 장려하는 <와이걸즈> 활동으로 펀딩을 진행했다. 현진은 여성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퍼포먼스로 처음 알게되었다. 그 후 페미니즘의 의식을 담은 개인전을 열어서 찾아가 이야기 나눴었다. 대구의 문화예술 인프라를 잘 이해하고 있는 분이었다. 대형 스트릿아트 벽화를 대구 시내에 작업하는 것을 임파워링 라이브 행사로 기획하기 위해, 먼저 대구 곳곳의 뜻이 맞는 창작자들을 모으고 교류했다. 특히 대구의 인디씬에서 공간 운영자이자 기획자로 활동해온 독립서점지기들을 인터뷰해 대구의 문화예술씬 안에서 페미니즘 담론이나 기획의 필요성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함께 이야기를 나눈 서점들에서 페미니즘 문구와 로고를 스텐실로 오리고 락카를 뿌려 완성하는 워크샵을 진행하고, 추후 제작한 임파워링 포스터와 스티커를 배치하였다. 이후 반나절 정도 벽화를 작업하면서 완성 시간에 맞춰, 파티를 열었다. 길을 거니는 누구나 참여하고 구경할 수 있는 자리였고, 여성의 힘과 자신감을 표현하는 대구 여성 댄서들의 공연과 로컬 디제이의 음악이 함께 했다. - 앞으로의 과제 버나크 덕분에 페미리 활동이 가능했고, 페미리 활동 이후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대구역 앞 랜드마크 벽화가 세워지고 주말이 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인증샷을 남겨 올리기도 한다. 페미리 프로젝트가 끝나고 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벽화라는것이 문화예술로 소비되니 페미니즘이라는 장식을 보다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서 그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여가부 라는 국가부처가 있고, 그곳에서 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개인이 진행할 때보다 여러모로 작품활동이 보호받고 있다는 마음가짐, 그 힘이 가장컸다. 지역은 아직 지속적인 교류와 인프라가 필요한 상황이다. 지금 이 이야기의 자리처럼 사람들이 모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도 많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다. 여성들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공유될 수록 우리의 경험은 폭넓어지고 서로간의 든든한 힘이 될 것 이다. 나는 그래피티 작업을 통해 사람들과 평등에 사랑 대하여 계속 이야기 나눌 것 이다.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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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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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겁’, 따분해진 전쟁… 다시 겁먹기를 바라며
“무서워”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침략당했을 때, 뉴스를 보고 “무서워”라고 했다. 나의 어머니가 그랬고, 친언니가 그랬고, 카톡을 하던 친구가 그랬다. 적어도 그 직후에는, “안타까워”라는 표현은 듣지 못했다. 현장 사람들의 절박함과 거리를 두는 ‘안타까움’보다는 당장의 ‘무서움’이 앞섰던 것이다. 러시아 씩이나 되는 강대국이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건 우리의 삶에도 영향을 줄만큼 두려운 사안이었으니.   지금까지도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하는 온라인 집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책방이음) 민간 단위의 반전 운동이 미처 나의 정보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도 형형히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침공당한지 반 년이 넘은 현재의 소식이다. 한편,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지는 어느덧 일 년 반이 됐다. 홍콩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폭력을 우리는 공중파 뉴스에서 목격해왔다. 헤드라인 위에 ‘전쟁’과 ‘인권침해’, ‘민간인 학살’… 이라 적힌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제는 좀 태연해 보인다. 전반적으로 ‘무심해진’ 분위기가 퍼져있다. 관심이 미비해진 건 이 소식에 ‘질려’있기 때문이다. 홍콩도, 미얀마도, 물리고 식상해진 소식이 되어버렸다.   고립은 비밀리에 벌어지지 않았다. 온 세상이 알고 있는 비극이 고립된다는 것, 이런 '앎'은 때로는 몰랐을 시절만큼도 못한 비관을 발 딛게 한다. 아무도 모를 때는, 적어도 누군가 알면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있으나 앎 속에서 고립되면 희망의 경로를 뚫기 어렵다. 이미 알았고, 따분해졌으므로, 절망적인 걸까? 나는 여기에 앎의 일각이 아닌 전체를 재구성하자는 생각을 던져본다. 지금은 대상과 거리를 전제하고 상황을 ‘관조’하는 앎이 전체인 양 퍼져있다. 그러나 얼음은 만져야 차갑고, 송곳엔 찔려야 아프다. 즉 거리를 좁혀 대상과 닿을수록 기존에 관조하던 ‘앎’의 일부는 소용이 없어진다. 피부로 깨달은 두꺼운 ‘앎’으로 대체될 뿐이다. 이에 반년 전 내 귀에 “무서워”라 들렸던 사람들의 진심을 다시 꺼낸다. “쯧쯧. 어떡해.”가 아니고, “불쌍하다.”가 아니고, “안타까워”도 아닌 “무서워”라는 실감 나는 겁을. 겁 먹던 자들은 전쟁을 하는 수 없이 멈춰야 한단 걸 피부로 알았다.   우리가 다시 겁먹기를 바란다 겁은 나약하다. 겁은 수동적이고 공격하지 않는다. 겁은 오히려 울고 도망치기에 바쁘다. 그리하여 당한 쪽이 ‘이기길’ 바란다거나 정권을 혁명적으로 갈아엎기를 응원하자고 제안하지는 않겠다. 그것도 승리의 한 방식이지만, 여기서는 겁과 슬픔과 공감으로 이뤄진 해방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전쟁 현장에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은 자국의 승패와 무관하게 자주 패배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다쳐서 돌아오고, 터전이 훼손되고, 이웃공동체가 망가진다. 승전국의 승리는 수많은 시민의 승리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나라를 위해 용맹하게 희생하는 ‘위인’보다, 무서워서 줄행랑치는 보통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죽고 죽이는 게 무섭고 우리 동네가 무너져서 슬픈 이들의 나약함이 바로 전쟁 없는 다음 사회의 가능성을 쥐고 있다.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저 보통의 두려움을 환기해보자. 비극의 식상함에서 벗어나자. 겁을 먹음으로써 당신도, 나도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자.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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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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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앞에서: 스러져가는 문화재들을 위하여
지금은 자본주의 시대잖아요? “지금은 자본주의 시대잖아요?” “자본주의 시대에 알맞는 선택이죠.” 우리는 일상에서도 자본주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실제 사용되는 예를 가지고 자본주의가 무슨 의미인지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돈이면 다 되는 세상, 돈이 가장 중요한 세상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본도 그냥 많은 돈이라는 의미 정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資本主義, Capitalism)는 말 그대로 자본이 중심인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자본은 뭘까요? 자본은 그냥 돈을 뜻하는 말은 아닐 겁니다. 돈이란 어떤 물건의 가치를 알기 쉽게 표현해주는 수치이기도 하고, 물건을 교환을 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고, 물건을 언제든지 바꾸기 위해 저장해두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돈이 자본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그 양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노동을 통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돈을 통해서 불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게 돈과 자본의 차이고, 이를 한자 단어로 표현하자면 증식(增植)되는 돈이야말로 자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본주의란 돈의 증식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 구성 방식, 돈의 증식을 위해 사회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믿는 생각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노동을 통하지 않고, 돈이 저절로 불어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주식 투자를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부동산 매매를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만, 중요한 건 결국 사람들이 특정 물건을 실제 가치보다 더 높이 판단하면 돈이 돈을 버는 현상이 생겨납니다. 과거에는 물물교환이 중심이었겠지만, 대부분의 아시아-유럽의 국가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한 가지 물건을 기준으로 놓고 거래를 하였습니다. 조선 땅에서는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까지도 쌀이 그 기준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금, 은, 구리, 철 같은 금속이 거래의 기준으로 쓰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화폐의 형태는 꽤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죠. 금속으로 만든 화폐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금속 화폐를 중심으로 세상을 판단하기 시작했고, 화폐가 곧 부(富)의 실체이고 가치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가치와 가격을 마구 섞어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가격과 가치가 구분되지 않고 섞이기 시작하면서 자본이 등장했습니다. 자본이라는 것이 어느날 갑자기 ‘나는 자본이다’라고 말하고 등장한 것은 아니고, 자본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꽤 최근의 일이지만, 인간들은 이미 기원년 전후가 되면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본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신분이냐, 계급이냐, 계층이냐’의 차이는 있지만서도, 개인이 어떤 형태로든 자본을 소유하고, 노동 혹은 노동력의 대가를 화폐로 지불하는 체제 하에서, 자본의 증식을 가장 핵심적인 동기로 삼는 사고방식, 혹은 그러한 사회구조를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노동에 기생하는 형태를 띌 수 밖에 없습니다(착취라고 말하면 거품 물고 뒤집어지는 분들이 계실까봐 기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신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누군가가 노동 혹은 노동력을 주고 받은 화폐를 끌어모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이 증식될 도리가 없거든요! 왕릉뷰 아파트와 DDP 이야기를 잠시 조선왕릉으로 돌려볼까 합니다. 서울, 경기 지역에 두루 분포되어 있는 조선 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조선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단순히 왕의 무덤이라서가 아닙니다.  전문용어로는 천인상관(天人相關)이라고도 합니다만, 천지(天地) 질서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우주,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유교적 자연 이념에 기반하여, 무덤의 구조는 물론, 무덤의 위치까지 매우 세밀하게 구성해, 산과 강으로 대표되는 자연과 마을, 도시로 대표되는 인간 사회, 죽음과 조상, 뿌리라는 경건함과 태어나고 먹고 마시고 싸고 섹스하다가 죽는 세속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그 배치 방식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사상의 표현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네스코에서 조선 왕릉 40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할 때에는 그 완전성과 진정성에도 매우 높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도시개발이 몇몇 유적의 경관에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대체로는 엄격한 법률로 개발을 제한하고 있으며, 모든 유적이 본래의 기능과 경건함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완전성과 진정성을 평가받은 것입니다. 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문화재보호법> 등의 실정법으로 이러한 유산을 광범위하게 보호하고 있으며, 효율적으로 보존 계획을 세우고 관리하고 있다는 점, 일관성 있게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매우 큰 평가를 받았습니다. (유네스코-조선왕릉)  그런데 이제는 이런 것도 자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인조의 부친 원종(元宗. 추존왕으로,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이라고도 함)과 인조의 모친 인헌왕후(仁獻王后)의 구씨(具氏) 능인 장릉(章陵) 앞에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불법으로 지어진 것이라면 그것도 문제지만, 이것이 법에 합당하다고 하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한국 정부의 문화재 정책이나, 한국의 문화재 관련 법률, 혹은 문화재 담당 기관이 문화재를 지키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파트 건축이 합법이건 불법이건, 아파트 시공으로 인해 세계적인 문화재가 훼손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의 주택 보급률은 103.6%였습니다. 한국의 전체 가구수를 100으로 치면, 주택이 103채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의 주택 문제는 주택 보급의 불공정에 있는 것이지, 주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아파트에 목을 매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자본의 요술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또, 동대문 디지털 플라자(DDP)라는 대표적인 사례도 하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DDP가 있던 자리에 원래는 동대문 운동장 있었습니다. 1925년 건설되어 한국 스포츠의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유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2006년 서울특별시장으로 당선된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노후를 이유로 동대문 운동장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DDP를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에도 한국 근현대 스포츠의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는 동대문 운동장을 이렇게 헐어 버리는 것이 역사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겠냐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그런 말을 전부 무시하고 2007년 드디어 동대문운동장을 싹 밀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을 밀고 났더니 거기에서 조선시대 유적이 발견된 것입니다. 조선시대 최대의 군사 훈련 시설이었던 하도감과 민가, 수로, 가마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된 것입니다. 에초에 일제가 동대문 운동장을 지을 때에도 한양도성을 밀어버리고 지은 탓에 수많은 비판을 받았는데요, 동대문 운동장을 철거하면서 이 때 파묻어 버렸던 과거의 유적이 그대로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요.  오세훈 서울시장은 자신의 치적을 반드시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 하나를 가지고, 그곳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적을 그대로 떠서 여기저기 나누어 다른 곳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유적은 원래 자리에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시골에 있는 집을 헐어서 그걸 서울에 지으면 우리는 그것을 시골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런 이치입니다. 1998년 경춘선 가평역을 지을 때의 일입니다. 역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중 고조선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5년에 걸친 공사 끝에, 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을 만들고, 고조선 시대의 움집과 움무덤터를 그대로 놔두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보존 하였습니다. 또 2005년 부산광역시 4호선 수안역을 공사 할 때에는 임진왜란의 두번째 전투인 동래성 전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동래성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원역을 공사할 때 동래읍성 전시관을 만들어 유물과 유적을 보존하였습니다.  자신의 임기 내에 눈에 보이는 치적을 남기기 위해 DDP를 짓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유적을 싹 밀어버린 오세훈 서울시장의 결단! 그건 실용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어떤 분들은 옛날 무덤, 옛날 집터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넌 지금 한복을 입고 한옥에서 사느냐고 되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이나 명동성당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서 제 삶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하철의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면 제 일상에는 큰 지장이 생깁니다. 당장 노트북이 고장나면 제 삶에는 큰 지장이 생깁니다. 실용이라는 것도 분명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실용 속에서 오히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 만들어지는 열차 속에서, 평범한 빌라나 아파트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오히려 가끔은 존중하고 싶은 순간도 있습니다. 여자들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 성대하고 아름답게 차린 전통 제사상보다, 모두가 함께 차린 단촐한 식사가 더 위대할 수 있습니다.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진솔하고 담백한 한 마디가 더 많은 감동을 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시대의 양식을 따라 만든 드레스나 턱시도, 궁중의 예복을 입고 전통 예법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땀에 젖은 노동자의 모습이 도 아름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가 장릉을 가리며 건설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는지, 조선의 유적을 여기저기 옮겨놓고 지을만큼 DDP가 중요한 건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프랑스나 영국의 박물관은 여기저기에서 훔쳐온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미국과 일본 여기저기에도 한국의 유물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이 장물들을 돌려주지 않겠겠다면서, 문화재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곤 합니다. 낯짝이 두껍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이제 한국의 유물은 돌려받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문화재를 환수하겠다고 할 때, 외국에서 장릉 앞 아파트와 DDP를 거론하면서, 너희는 너희 문화재를 지킬 역량이 없는 나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요? 오히려 장릉 앞 아파트와 DDP가 실용을 해치는 것은 아닐까요? 외국인들이, 혹은 후대의 사람들이 굳이 장릉 앞에 아파트를 건설해야만 하는 당위, 디자인 플라자를 유적지를 옮겨가면서까지 반드시 동대문에 짓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우리는 뭐라고 답을 해야할까요? ‘너희 대한민국은 부동산이라는 거대한 욕망,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자본의 증식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지켜야 한다면서 나머지는 깔아뭉개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국민들, 자기 치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환경도 전통도 자기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정치인을 가진 나라가 아니냐’고 말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까요?
새 이슈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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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시민’이 아니라서 무시하나요? ‘버터나이프크루’ 폐지 논리와 방식이 보여주는 시민의 범위
몇 해 동안 번듯하게 굴러가던 청년 성평등 문화 추진단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이 갑작스레 폐지 논란에 오르내리는 광경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여성가족부 폐지 안건을 이른바 ‘치트키’로 활용한 정권이 무언들 새롭겠냐마는, 이번 상황은 유독 필자의 지난 기억을 더듬게 했다. 버터나이프크루 4기 출범식이 있던 지난 6월 30일, 같은 건물에서 여성가족부가 개최한 ‘청년과 함께 하는 타운홀 미팅’이 진행되었다. 전국에서 모인 2030 청년 23명과 여성가족부 장관이 마주 앉아 젠더 문제에 대해 소통하는 자리였다. 젠더 문제에 대한 청년들의 다양한 경험을 두 시간가량 듣고 난 후 여성가족부 장관은 마무리 발언으로 “그래도 여가부는 폐지한다”고 못 박아 말했다. 그의 발언은 자리를 정리하는 형식적인 절차조차도 아닌, 이미 정해진 답으로 그간의 논의를 모조리 뒤엎어버리는 방점과 같았다. 책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에서는 '시민 참여 사업'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줄곧 비판받는 지점은 “변화를 이끌 힘이 없는 엉터리 참여는 최악의 모독”이라는 점이라고 한다. 위에서 의제를 설정하고 답을 내리는 방식의 사업은 너무나도 쉽게 시민의 참여를 선별하고 약화시켜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관리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성평등이 중요하다고 털어놓은 청년들에게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고 단언하는 행위나 여성가족부 장관의 지지를 받으며 출범식을 마친 사업이 단숨에 고꾸라지는 상황 역시 이와 같다. 그동안의 과정을 모두 무시한 채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주무르는 ‘엉터리 참여’는 기존 사업 성격에 반할뿐더러, 시민에게는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경험을 심어 준다. 그렇다면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이 그간의 궤적과 최소한의 절차를 전부 뛰어넘어 재빠르게 폐지 수순을 밟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현 여당 원내대표의 주장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가 지적한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의 문제점 중 하나는 ‘특정 이념을 국가가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특정 이념이란 그가 선행해서 문제시한 ‘페미니즘’을 뜻하며, 이는 “관제”로 포함되지 않는 개개인의 사상이고 “증폭하는 남녀갈등의 원인”이기에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의 잠정적 중단이 결정된 후 열린 참여자 간담회에서 역시 “‘일반 청년’들이 참여하지 않았기에 중단한다”고 설명했다. 여성, 청소년, 청년, 다문화가정과 같은 주류 사회에 속하지 않는 소수자가 사회의 문턱 안으로 들어가 동등한 시민의 선상에 서기 위해서는 그들을 대변할 기구와 집단이 필요하다. 여성가족부의 설립 목적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소수자가 자신의 권리를 직접 다루는 것이 기존의 관제와 일반적인 범위에 적절하게 녹아들어 있다면 버터나이프크루 사업과 같은 시민 참여 정책은 애당초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버터나이프크루 사업 폐지에 대한 논리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은 긴긴 인류의 역사와 시민의 투쟁이 자연스레 설명한다. 여느 때와 같이 내용과 방법은 상호적으로 호응한다. 성평등과 페미니즘을 시민의 뜻 혹은 발전된 민주주의로 여기지 않고, 개인의 몫으로 축소하거나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떠넘기는 논리는 일방적인 사업 폐지 방식을 마땅한 처사로 만든다. 버터나이프크루 사업 폐지의 근거와 과정은 그들이 짜놓은 틀에 맞지 않은 것은 언제든 내칠 수 있다는 기득권의 위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앞서 말했듯이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의 폐지 과정은 본 건에만 해당하는 사안이 아니다. 이는 여성가족부를 포함한 지금의 정권에서 성평등과 페미니즘 의제가 언제든 혹은 어떻게든 배제될 수 있다는 상황을 뜻한다. 따라서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을 되돌리는 움직임은 그들에 대응하는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여기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 공동대책위원회’가 발 빠르게 움직여 사업 정상화와 성평등을 위한 서명을 받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이들이 서명에 참여하여 어딘가 든든하다. 그러니 어디 한 번 시민의 목소리에 더 넓은 파장을 일으켜보자.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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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덕통사고! 버터나이프 크루와 협동조합운동의 야성(野性)…!!
[온정주의 문화]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번에 있었던 버터나이프 크루 사건과 이후의 과정들을 살펴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운동의 지속가능성은 어디서 오는가”였습니다. 사실 운동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그 역사가 꽤 깁니다. 어느 순간 운동가로, 활동가로 살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부터 운동은 어떻게 지속적으로 사회에 변화를 일으켜내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이러한 고민들을 담아 2017년에 석사학위 논문을 쓰게 됐었고, 제가 관찰하고 발견한 것은 협동조합 조직 내 두가지 상반된 조직 문화였습니다. 하나는 가부장제라고 흔히 불리는 온정주의적 문화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러한 온정주의적 문화에 저항하여 형성된 자유주의적 문화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하면, 이번에 여성가족부가 버터나이프 크루 사업을 최종 중단하게 된 그 매커니즘이 결국 위에서 설명한 온정주의적 조직 문화와 밀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모두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정부조직은 까라면 까의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고 대체로 인민들에게 시혜적입니다. 정부라는 것은 사실 민주적 국가에서 인민들의 세금으로 인민의 뜻(필요)를 위임받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역사적으로 정부와 시장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정부와 시장이 다수의 인민을 배신했고 소수의 인민만을 위해 작동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냉정하게 보자면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빚은 무한 경쟁의 시대 속 불신과 야만의 문화는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언젠가는 좋은날 오겠지, 좋은 사람들, 좋은 뜻은 언젠가 받아들여지겠지라는 최소한의 낙관조차 오만한 생각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배신감, 정의롭지 못하고, 전혀 상식적이지 못한, 그런 일들이 너무나도 쉽게 일어나는 그 시스템과 문화에 대한 절망감과 좌절감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시민사회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에 참여하는 에너지와 이유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협동조합 빠띠’의 문화] 저는 개인적으로 2014년에 처음으로 자본력과 노동 착취가 기본값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 관계가 기본값인 협동조합 경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은 2022년 현재도 협동조합 경제 속에 살아가게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저에게 컸습니다. 삶의 대전환이였습니다. 저의 옛날 얘기는 다음에 더 풀기로 하고요, 다시 돌아와서 솔직히 이번에 '사회적협동조합' '빠띠'를 다시보게됐습니다. 아, 정확히는 제대로 보게되었습니다. 빠띠가 민주주주의적 공론장을 운영하는 사회적협동조합이라는 것은 알고있었지만, 이번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이 중단된 뒤 빠띠가 취한 몇가지 움직임은 빠띠가 단지 사업적인 측면에서만 잘하는 협동조합으로는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버터나이프크루 사건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빠띠가 이 사업을 맡게되었는지 그것이 제일 먼저 궁금했습니다. 찾아보니 빠띠는 2019년과 2020년에 협력사로 버터나이프크루 1,2기의 성과를 함께 빚어낸 적이 있었더라구요. 그때의 좋았던 경험을 기반으로 보다 신중하고도 재밌있게 특히 빠띠의 장점인 공론장을 잘 활용하여 올해 사업을 진행해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장관이 축사까지 진행한 출범식이 열린지 단 3일만에 사업 재검토(이후 최종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건 속에 서로를 격려하며 시작했던 크루들이 그 배신감과 좌절감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사업을 기획한 빠띠 또한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을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서 ‘사회적협동조합 빠띠’는 인민의 뜻과 약속으로 세운 절차를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무시하고 사업을 중단한 여성가족부라는 온정주의적 체제의 상징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반문화(counter culture)를 구축하고자 움직였습니다. 2022년, 그리고 향후 앞으로도 더 이상 우리 사회와 함께 갈 수 없는 가치인 온정주의의 그 권위(a.k.a 통제)와 지원을 과감히 포기하고, 이런 상황에서 빠띠가 가장 잘 할수 있고, 잘해왔던 공론장을 통해 이 문제를 공론화 했으며, 선정된 버터나이프 크루팀의 중단없는 활동을 위해 자체 펀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협동조합운동의 야성(野性)] 학부 시절, 동아리하면서 선배들에게 이런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야성(野性)이 부족하다”  제가 배운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보완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가 숨기고 제거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직하여 복원하는 대안적인 공동체 운동입니다. 역사는 인간의 야만성을 수천년간 증명해왔습니다. 우리가 왜 협동조합입니까? 빠띠가 왜 사회적협동조합입니까? 협동조합은 1섹터인 정부도 믿지 못하고 2섹터인 시장도 믿지 못해서 그리고 그 1,2섹터에서 배신당하고 좌절한 사람들이 주저앉아만 있지 않고 자발적으로, 주도적으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낸 저항과 대안적 운동의 역사적 산물입니다. 우리들의 협동조합은 어떻습니까? 그 누군가의, 내 이웃과 친구들의 좌절감을 듣고 있습니까? 그 좌절감을 들었다면, 그리고 공감했다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해야합니까?  이번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의 운동체적인 움직임은 어쩌면 협동조합에 참여하는 여러 또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우리 협동조합 존재 이유,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자기성찰이 바로 야성의 핵심이라 배웠는데 맞죠 선배님들...? 이미 제가 그렇게 반응하고 있구요 ㅎㅎ 살짝 난데없지만 저는 이 과정에서 ‘협동조합 빠띠’의 운동성에 덕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이러한 반응은 협동조합 운동의 지속가능한 에너지원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야성의 또 다른 핵심은 '돈쭐내기'라고 배웠습니다. 답답해서 직접 뛰겠다는 사람들에게 포카리 정도는 사줄 수 있잖아요?  ○버터나이프 크루의 중단없는 성평등 문화 운동에 연대, 지지, 후원하기 https://secure.donus.org/parti/pay/step1?_ga=2.173218019.1135914756.1654438308-18109579.1634018910○빠띠 후원계좌 : 국민은행 030301-04-186573 (예금주: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소.돈.완(소소한 돈쭐 완료)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함께 해주세요 전화 한 통으로 사라진 청년 성평등 정책을 돌려주세요! 청년들의 버터나이프크루는 어떻게 없어졌을까?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여기에도_성평등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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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행복한 명절을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시민36’입니다. 다들 추석 잘 보내고 계시나요? ☺️ 빠띠 캠페인즈에 올라온 글들을 읽다가 저도 이야기해 보고 싶은 주제가 생겨서 글을 써봤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맘때면 꼭 한 번쯤 듣게 되는 덕담이 있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풍족한 음식,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푸른 가을하늘 등 추석 특유의 설레는 분위기를 강조하고자 하는 이야기겠지요. 그런데 저에게 명절이란 ‘기름 냄새’와 ‘지옥의 설거지 굴레’입니다. 각종 전 부치기와 무수히 쌓여있는 설거지거리를 보면서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과연 누굴 위한 덕담인가 싶을 때가 있어요.  사실 제사나 차례는 집집마다 문화가 다르니 제쳐두더라도, 명절에 오랜만에 친척 모두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는 이벤트에서 음식 준비와 설거지 등의 노동은 수고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 년에 몇 없는 명절,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음식 준비와 설거지를 수행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문제는 특정 성별이 수행하는 역할이 과도하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특정 성별이란 여성이며, 역할은 설거지와 음식 준비 입니다. 저는 N0년간 명절에 설거지 담당을 해왔는데, 주방에서 ‘아버지’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식탁에 올라가는 그 많은 음식들은 모두 ‘어머니’와 ‘딸’의 합작품이었지요. 아버지의 기여도를 꼽아본다면, 이동 시 운전 정도일까요. (물론, 저희집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집은 어떤가요?) 모두가 불합리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절대 바뀌지 않는 문화 중 하나가 명절문화인 거 같습니다. 수년 전부터 명절 시즌에 이혼율이 올라간다는 뉴스 기사를 보신 적 있나요? 명절 전후로 이혼율이 높아지던 추세를 변화시킨 것이 역사상 딱 한 번 있었습니다. 바로 코로나19가 만든 강제 ‘거리두기’ 입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한 거리 두기가 가족 간의 물리적 거리를 만들면서 오히려 가정의 평화를 지킨 셈입니다. (노컷뉴스, 2022.01.24)  2019년 전까지는 명절 이후로 이혼율이 꾸준히 증가했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이런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얼마 전 전북 남원시 동남원 새마을금고에서 여성 직원에게만 밥 짓기, 수건 빨래 등의 업무를 지시하여 논란이 있었습니다. (경향신문, 2022.08.23) 2022년에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데요. 이런 ‘문화’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래전부터 그래왔으니까’, ‘다들 그렇게 하니 너도 따라라’ 하는 분위기가 만연했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의 여성 직원에게 부당한 업무지시가 사회에 알려지고 논란이 되기까지도 수년이 걸렸지요. 직장 내 부당한 성 역할이 시정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하물며 명절문화의 불합리함은 얼마나 걸릴까요. 애초에 누구에게 불합리함을 호소해야 할까요? 조상님?  최근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에서 ‘차례상 표준화 방안’을 내놓았습니다.(한국일보, 2022.09.05) 차례상에는 9가지 정도의 음식만 올리면 된다,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음식은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각종 전과 나물, 갈비찜 등 ‘명절 음식 = 기름진 음식’이라는 공식을 깨는 의외의(?) 내용이었는데요, 성균관이 이런 ‘차례상 표준화 방안’을 내놓은 이유는 “가정의례와 관련하여 경제적 부담은 물론 남녀갈등, 세대갈등을 해결하고 실질적인 차례를 지내는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라는 취지라고 밝혔습니다.  저는 이런 변화가 서서히 문화로 정착되길 기다리기에는 성격이 급합니다. ‘차라리 안 보고 말지’ 하는 인식이 저를 지배하게 될 거 같아요. 그렇지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 한쪽이 뭉클해집니다. 저는 아직 친척들, 가족들을 사랑하거든요. 그리고 다음 해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요.  여러분은 명절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각자 지내는 명절문화를 소개해 주세요.  혹시 즐겁고 행복한 명절 경험이 있다면 어떻게 행복을 누릴 수 있었는지 팁을 던져주세요.  함께 행복해지자구요.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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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간 논쟁을 해요. 여성가족부 '전환'에 대해서-
윤석열 정부가 취임한지 네 달 째, 100일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동안 윤 정부가 해온 정책들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았는데요. 이번엔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여가부 폐지는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쭉 밀고 온 핵심 정책입니다. 이 정책은 국민들을 갈라세운다는 비판을 받아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숙 장관에게 여가부 폐지를 적극적으로 주문하는 등 공약 이행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장관 본인 또한 그 목표를 긍정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입니다. 이 정책은 꾸준히 제기됐던 우려와 같이 국민을 갈라세우는 듯 보입니다. 지난 1월 7일 후보 시절 윤석열 대통령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일곱 글자의 공약 발표가 그 시발점이었죠. 해당 포스팅이 업로드된 날부터, 사람들은 '아! 남/녀가 또 싸우겠구나.'라고 벌써부터 예측가능한 근미래를 그렸을 것입니다. 윤 대통령의 '여가부 폐지' 공약은 실제로 시민을 갈라치기할 뿐더러,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사회에 대한 사고력마저 제약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다른 발전적인 논의는 제쳐둔 채 겨우 '남녀갈등'이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걸 밈으로 띄워 화젯거리로 만들었으니 모두 그 함정에서 벗어난 다른 사회상을 그려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여가부 수호 대 여가부 폐지', 그러니까 '페미니즘 대 반페미니즘' - 나아가 '이대남 대 이대녀'의 양단 중 택일하는 것만이 마치 정치적인 시민의 전부인 양 보입니다. 그 시야 안에서는 다른 생각이라곤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실 여가부 폐지 정책은,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원회 시절인 2008년에 공식화된 전적이 있습니다. 당시 존치하자는 결정이 내려지긴 했지만, 이처럼 여가부 폐지에 대한 논쟁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이에 페미니스트들은 구조적인 성차별을 해소하고 더 나은 성문화를 정착하기 위한 여성가족부의 존치를 십수년간 주장해왔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화두인 '남녀갈등'도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던 2015년부터 거론된 바 있습니다. 이 담론엔 페미니즘을 습득한 사람들이 불평등에 저항한 것마저 양성간 '갈등'으로 오도해버린다는 오류가 있지요. 7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오류는 되풀이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고 계속 여가부 폐지로 논쟁하며 '남녀갈등' 담론에 참여해야 할까요? 이 오래된 이슈를 점화하는 정부의 정치적 노림수에 하는 수 없이 휘둘리는 수밖에 없을까요? 그러기에는, 더 나아간 논쟁을 해야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 진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페미니즘적인 위기 앞에 더 나아간 논쟁거리를 꾹 눌러두고 여성가족부를 존치하고자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절실한 행동을 지지합니다. 이에 누가 될까 필자는 고양이 걸음처럼 조심스러운 심정이지만, 양단의 줄다리기에서 이겨야하는 당위성이 있는만큼 바깥에서 새로운 지대를 말해보는 움직임도 필요하다는 판단입니다. 따라서 웅덩이에 돌을 던져봅니다. 윤석열 정부의 갈라치기에서 벗어나 봅니다. "여가부 '폐지 vs 존치'가 아닌 '전환'을 논해봅시다." 2001년 여성가족부의 전신인 여성부가 출범했을 당시의 소임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멈추자는 것이었습니다. 2005년에는 여성가족부로 개편되면서, 여성과 가족이 함께 묶여 전통적인 성역할과 가족의 규범을 강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여가부는 정부부처 중 유일하게 다문화가정, 한부모가정, 소년소녀가장 등 사각지대에 있는 가족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왔고 각종 페미니즘 사업을 담당해왔습니다. 정권에 따라 적극성이 달라져 올해는 후퇴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지만, 한계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가족과 여성을 위해 기여해왔다는 점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여성가족부의 또 다른 공식명칭은 'Ministry of Gender Equality & Family'입니다. 여기서 괴리가 발생합니다. 'Gender(젠더)'와 'Equality(평등)'라는 두 용어는 단순히 '여성'과 '양성평등'이라는 말로 바꿔본다고 하여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젠더는 성별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아니고, 오히려 성별이분법으로 인해 나타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분석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양성'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폭력을 경험하지 않기를 도모하고,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도록 돕습니다. 이러니 '양성'을 이야기하는 여가부의 방침은 오히려 '젠더'에 반하기까지하는 처사입니다. 'Gender Equality'라 하였습니다. 여가부가 정권에 따라 '양성평등'과 '성평등' 표기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고(경향신문, 2022.05.23.)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젠더적인 관점으로 목표설정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2008년 처음으로 여가부 폐지가 정부에서 논해졌을 때, 이명박 전대통령은 "여성(가족)부는 여성 권력을 주장하는 사람들만의 부서"(한겨례, 2008.01.18.)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여가부 존치론자들이 "차별받는 여성의 권리를 되찾는 부서"라 반론하려 했다면, 이제는 한발짝 '전환'하면 좋겠습니다. 여가부란 모든 성차별적인 구조를 드러내고 '남성'이 아닌 '젠더'를 중심에 두는 부서여야 할 것입니다. 성평등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그동안 여가부와 젠더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쌓아왔습니다. 오늘날의 정치적 술수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여가부 폐지 반대'라는 단순한 주장으로 무너져내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여가부의 폐지도, 존치도 아닌, '전환'을 위한 더 많은 의견을 기대합니다.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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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 차별의 9층 석탑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미국과 유럽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발언과 혐오범죄가 도를 넘고 있다는 기사가 많이 나왔습니다. 오죽하면 2022년 5월에는 BTS가 백악관에 초청받는 상징적인 이벤트까지 열렸을까요? (BBC.2022.05.27.) 아시아인에 대한 구미인의 혐오범죄는 한국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습니다. 특히나 이런 범죄들은 아시아인 중에서도 여성이나 노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독 비열한 느낌을 줍니다. 교양 프로그램의 연예인 패널들이 아시안에 대한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거나 탄식을 내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한국인들이 한국 안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 문제에는 얼마나 목소리를 내왔는가, 저기 눈물을 글썽거리고 한숨을 짓는 연예인 패널들이 한국 안에서 동남아시아인이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하여 저 정도의 목소리라도 내어본 적이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어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한국은 외국에 관심이 있는가? 저는 이런저런 일로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여러 나라 사람을 만나보면 유독 동북아시아 사람들이 다른 나라 소식에 어둡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특히 한국인과 일본인에게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일본 이야기는 차치하고, 한국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한국인이라서요. 한국은 일제 36년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일본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좋든 싫든 미국의 영향을 받았으면서 미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좋든 싫든 중국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그 나라들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제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문화와 역사는 어떤지 정말 모른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수출 의존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한국, 속된 말로 남의 나라 돈으로 먹고 사는 나라인 한국이 그런 것 치고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미국, 일본, 중국에 대해서도 이러한데, 다른 나라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사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종차별국가 중 하나입니다. 베트남 휴양지에 놀러가면서도 베트남에서의 학살에는 눈을 감고, 타국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내전, 재해와 전쟁 앞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무슨 이득과 손해가 있을지만 계산하는 뉴스를 보곤 합니다.  (Korean Harald. 2018.10.8. 예멘 난민 수용 반대 시위) (아주경제.2013.07.07. 2013년 아시아나 항공기 착륙사고 당시 채널A의 뉴스 앵커는 사망자 2명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전하며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 죽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블랙 페이스Black Face는 흑인 차별의 상징이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인들은 이게 왜 문제인지 모른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에 온 이주민 10명 중 7명은 한국에 인종차별이 존재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웰페어뉴스.2020.03.19.) "남편 회사의 공장장이 한국 사람한테는 욕을 안 하는데, 남편한테만 'X새끼 왜 제대로 일 안 하냐'고 말해요." "동사무소에 가면 사람들이 '난민 왔냐'고 큰소리를 지르고 저를 보며 웃어서 기분이 나빴습니다." "길을 가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제 히잡을 벗겼어요." 국가인권위원회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 의뢰해 진행한 조사에서 이주민들이 대답한 실제 피해 사례입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 오래 살면 살수록 인종차별을 체감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연합뉴스.2020.08.19.) 앞서 말했듯이 간혹 동북아시아인들이 미국을 비롯한 백인들에게 혐오발언을 듣거나 혐오범죄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에서는 이 문제를 상당히 중요하고 심각하게 다룹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인터넷 상에서 이런 한국의 모습을 비꼬는 유명한 짤이 하나 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한류(韓流, 韩流, Korean wave)의 영향으로 한국 드라마나 한국 아이돌이 인기가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있습니다만, 한류 덕분에 한국에 관심을 가졌던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의 SNS나 뉴스 댓글,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를 보고 반한/혐한 감정을 가지는 일이 적지 않다는 일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한류의 인기가 뜨거운 만큼, 한국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발언은 물론, 뉴스 댓글과 인터넷 커뮤니티의 인종차별 발언도 빠른 속도로, 그것도 아주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퍼지고 있습니다. 인도나 동남아시아, 이슬람권, 그리고 중남부 아메리카에서는 한류에 관심을 가졌던 많은 청소년, 청년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의 인터넷을 접한 후, 한국의 실상을 알고 실망하고, 심하게는 한국을 혐오하는 현상도 꽤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걸 아는 한국인은 몇이나 될까요? 요즘 한국인들은 입버릇이 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명사 앞에 K를 붙입니다. 특히 문화 콘텐츠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K-pop, K드라마, K영화 등등등. 저는 한류의 종말은 드라마나 노래의 질 때문이 아니라, 한국 안의 다양한 차별이 전세계에 알려지는 그 순간이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 안의 인종차별에 얼마나 관심이 있으십니까 또, 한국의 노동자 중 외국인 노동자의 비중은 3.8%이지만, 중대재해로 인한 사망 노동자 중 외국인 노동자의 비율은 11.2%에 달한다고 합니다. (연합뉴스.2022.01.21.) 사망하지 않은 부상자나 사망을 신고하지 않은 경우, 불법체류자의 산업재해는 더 많을 것입니다. 2020년 12월 20일에는 캄보디아 출신의 이주노동자 속헹 씨가 비닐하우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연평균 매출 10억을 기록하는 농가에서 저임금의 착취를 해가며 최소한의 위생과 사생활도 보장되지 않는 생활환경을 강요받다가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만 속헹 씨는 2022년이 되어서야 산업재해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경향신문.2022.05.02.) <이주와 인권연구소>의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제조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 중 40.3%는 작업장 부속건물에서 지내고 있으며, 15.9%는 임시 가건물에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제도에 미숙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사업주들은 최소한의 생활 보장도 해주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노동뉴스.2021.03.29.) 지금은 2022년, 이 조사 이후로 4년여의 세월이 지났지만 얼마나 바뀌었을까를 생각하면 고개가 가로저어집니다. 우리는 미국과 유럽에서 벌어지는 혐오발언과 폭력에 대한 우려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우리 안의 차별과 폭력에 대해 우려와 관심을 보이고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지방의 교육청에서는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여러 언어로 배부할 수 있도록 다국어 가정통신문 양식을 만들 정도로 결혼이주여성이 많습니다만, 아직도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제도적 복지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미흡하며, 인식은 더더욱 미개합니다.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가정폭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들을 보면서 ‘가난한 나라’ 운운하는 습관도 아직 다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 있는 결혼이주여성 10명 중 4명은 가정폭력을 경험하였는데, 가장 많은 것은 언어폭력이었고, 물리적, 성적, 정신적 학대도 심각하였습니다. (한국일보.2019.12.10.)  인종차별은 한국안의 성차별, 계급차별과 만나 차별의 9층 석탑을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차별의 크로스오버 속에서 각자 일정 부분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 사회를 만들어온 것도 우리고, 만들어갈 것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 훌륭하고 빈틈없는 제도를 갖추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제도를 운용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 개개인이 사회 속에서 도덕적인 책무를 다해야 하는 것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도만 제대로 갖추어지만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하는 제도에 대한 맹신은 영웅주의나 종교적 믿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도의 정비와 인간의 도덕적 함양은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생활과 건강 조건조차 위협받는 상황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다양한 제도를 마련하고 기존 제도의 허점을 정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고, 이것을 위해 우리 사회 모두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부터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이나 안 읽으시는 분들이나 할 것 없이, 우리 안에 차별의 정신이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가의 말 중에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려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수행의 방침으로 제시하여 유명해진 말인데, 원래는 당나라 때 하택신회(荷澤神會, 670~762)가 한 말입니다. 우리의 깨달음은 순간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몸이 기억하여 관성적으로 행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계속 수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성철스님’이라고 부르는 퇴옹성철(退翁性徹, 1912~1993)은 이에 반대하여 돈오돈수(깨달음을 얻었으면 수행도 끝나야 한다)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만, 이것은 엘리트의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재산으로, 학력으로, 학벌로, 장애 여부로, 출신지로, 거주지로, 성별로, 국적으로, 인종으로, 외모로, 옷차림으로, 자기도 모르는 차별의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끝없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자신의 마음과 인격이 건강해지기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알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없습니다. 게다가, 같은 한국인 안에서도 여성과 노동자가 책임을 지고 있는 의무에 비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외국에서는 상당히 널리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성별, 학력, 재산, 출신지, 거주지, 외모, 장애, 연령, 성적 지향, 성 정체성, 종교 등의 이유로 같은 한국인끼리도 차별 발언을 하고 이것을 폄하하는 단어가 하나하나 존재한다는 것도 많은 외국인들이 놀라는 부분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들에 차별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렇게까지 다양한지, 특히나 ‘~충蟲’이라는 표현에 깜짝 놀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는 “남한의 인종차별”과 “한국의 민족주의”라는 항목이 있기도 합니다.) 말로만 세계화라고 하지 마시고 물론, 한국인을 비록한 동북아인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은 진실로 그들의 수치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Korean Times.2016.08.14. 리오 하계 올림픽 중계에 잡힌 눈을 찢는 제스쳐. ) (BBC.2017.07.24. 한국 댄스그룹 KARD의 등장에 브라질 진행자가 보인 눈을 찢는 제스쳐.)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세간의 입에서는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보면 모두가 약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자주 오르내립니다. 기왕 한류가 이렇게까지 크게 세계를 휩쓸고 있다면, 한국이 지난 수백년 동안 인종차별에 앞장서온 백인들에게, 세상의 차별 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단결의 정신을 발휘하여, 차별 받는 사람으로서 보일 수 있는 모범을 보이는 것은 어떨까 바라봅니다. 우리 안에 둥지를 틀고 있는 인종차별과 성차별, 그리고 계급차별과 학력차별이 심각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현재의 상태에 대해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정의를 위한 목소리를 내보기를, 저는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별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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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면 국민의 선택을 받으라’는 말의 오류
 권성동 원내대표는 버터나이프크루를 비판하며 ‘성평등과 페미니즘이 중요하면 자기 돈으로 하면 된다. 자신의 이념이 당당하다면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으며 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체 글도 논증 없는 주장과 비약이 가득하지만 이 두 줄은 정말로 의아합니다. 사상의 ‘자유’시장을 이야기하면서 다수의 선택을 받을 수 없는 이념은 당당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어불성설을 차치하고서라도, 무엇보다 정책과 정부의 기능에 대한 몰이해가 엿보입니다.  정책이란 원래 ‘선택받지 못한’ 가치의 분배   정책은 문제 해결의 수단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합리적 개인들의 ‘자유시장’에서의 선택 행위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입니다. 합리적 개인들의 자유로운 사익 추구가 자연스럽게 공공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전통적인 자유시장의 논리(a.k.a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사회 전체의 합리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즉 자본시장의 논리에 따라 과대/과소 공급되거나 불균등하게 배분되는 자원,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불균등한 자원의 분배가 사회 전체적으로는 생산성을 저하시키게 됩니다. 이것이 시장실패입니다. 정부는 자유시장을 통해 충족할 수 없는 사회적 합리성의 증진을 위해, 정책을 통해 자원을 재분배합니다.   (슬프게도)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의 목표이자 내용인 ‘성평등’은 자유시장에서 쉽게 선택받을 수 없습니다. 현재 사회 다수-양이 아닌 권력 차원에서의 다수-의 개인적 합리적 차원에서, 성평등은 자발적으로 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성평등이 가져올 사회 전체의 효용을 엄밀히 측정하려는 노력보다는, 성별 집단을 ‘갈라치기’하는 데 시간을 쏟는 정치의 탓이 클테지요. 그러나 경제와 노동시장으로 한정해보았을 때도 성평등 지수가 높을수록 GDP를 비롯한 사회 전체의 생산성이 증가한다는 예측이 우세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장실패의 상황에서 정부의 역할은, 나아가 정부의 의무는 ‘성평등’ 또는 이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 가치들을 정책을 통해 분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성동 원내대표는 정부와 정책, 나아가 정치가 수행해야 할 이러한 역할들을 되려 개인과 국민에게 전가시킵니다. ‘네 돈’으로 하든가, ‘국민의 선택’을 받으라는 것이지요. 정책의 기능상실이자 정치의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찍이 넓고 긴 정치의 시공간에서 국가의 역할로 인정된 ‘성평등한 사회의 구축’이라는 미션을 두고, 개별 국민이 이 미션의 타당성을 설득하고 또 자신의 돈으로 해결하라고 합니다. 정부와 정책의 기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는 주장. 거대한 후퇴, 그 자체이군요. ‘이런 식’의 문제제기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권성동 원내대표가 정말 정치인으로서 우리 사회 전체의 효용 증진이라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다면, 국민 세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 ‘진심’이라면, 이런 방식의 문제제기는 무의미합니다. 정부와 정책의 기능과 미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 사업의 효용이 적다는 주장을 논증과 데이터를 통해 뒷받침했어야 합니다. 비약과 매도를 통한 감정적인 혼잣말이 아니라요.   오세훈 시장의 팩트체크 없는 ‘시민단체 ATM’ 발언에 이어 계속되는 시민사회 활동에 대한 근거 없는 적개심의 표출이야말로, 그렇게 비판하던 포퓰리즘의 모습이 아닐지 걱정됩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님께서 설령 버터나이프크루의 존속에 관심이 없더라도 권성동 원내대표의 주장을 짚어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정치가 이 정도의 허술한 논리로, ‘이런 식’으로, 그동안 문제없이 지속되던 사업을 폐기하는 것을 승인하지 맙시다. 우리가 이러한 허술함을 용인하는 순간 앞으로 또다른 불평등과 격차 해소를 내용으로 하는 다른 정책 또한 이런 방식의 졸속 정치로 폐기 및 축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질 앞으로의 사회, 민주주의는 요원해보입니다.  ✋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함께 해주세요 전화 한 통으로 사라진 청년 성평등 정책을 돌려주세요!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여기에도_성평등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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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동 의원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온갖 노력을 했지만..
‘시민참여’라는 말을 꺼내기 하수상한 시절입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7월 28일 2019년부터 추진해온 성평등 문화추진단 ‘버터나이프크루’(이하 버나크)사업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정부 부처의 예산이 재조정되며, 지난 정부의 사업과 정책들이 사라지거나 변경되는 일은 생경하지 않습니다. 버나크 사업의 폐지 수순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지난 7월 4일 여당인 국민의 힘 권성동 의원이 자신의 SNS를 통해 해당 사업이 지닌 생산성, 공공성 등을 문제시한 뒤, 바로 다음날 여성가족부는 사업의 재검토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7월 28일, 여가부는 버나크 운영사 ‘빠띠’에 사업 중단을 통보했습니다.  여기서 좀 의뭉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버나크 사업은 지난 19년부터, 그러니까 지난 정부부터 진행된 사업이지만, 올해 4기의 경우 윤석열 정부 하에서 선정 및 결재 된 바 있습니다. 현 정부에서, 이미 출범식까지 진행한 사업을  갑작스럽게 중단해야 할 이유란 무엇일까요? 버나크 운영사와 활동 팀 등으로 구성된 ‘공동대책위원회’는 해당 사업이 한마디 말로 인해 사라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갑작스런 버나크 중단 사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목된 사람, 권성동 국민의 힘 의원입니다. 그가 어떤 이야기들을 했는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그의 ‘말’이 낳은 효과란 무언지를 함께 살펴볼까요?  권 의원의 말! 7월 4일, 권성동 의원은 자신의 SNS에 장문의 글을 게시합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가부 장관에게 해당 사업에 대한 문제점을 전달했다. 1) 버터나이프 크루의 활동과 프로젝트는 ‘문화 개선’에 효과가 없다. 2) ‘페미니즘’은 갈등을 만들어내는 담론이다. 3) 페미니즘이라는 일개 ‘담론’을 지원하는 것은 국가의 공정성에서 어긋난다. 정권이 바뀌었고 윤 정부는 여가부 폐지를 기조로 삼고 있지만, 관성적으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하여 해당 사업을 없애야 한다.   한편, 권 의원은 그 다음달인 8월 13일에도 재차 버터나이프 크루 사업과 관련해 SNS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재차 밝힌 바 있습니다. 두 번째 글에서 권 의원은  “버터나이프 크루와 같은 사업은 공공성도 생산성도 없습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사업의 대상이 된 지원사업들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여성들이 모여서 함께 운동을 하고, ‘페미니즘 연극’을 연습하는 일이, 또는 성평등과 관련한 소모임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무용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권 의원은 말합니다. “연극, 운전, 운동 배우고 싶으면 자기 돈 내고 학원 다니면 됩니다. 이런 것까지 국민 혈세로 하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권 의원을 이해해보고 싶어서 노력했지만…1 - 국가는 여성의 ‘연극, 운전, 운동’을 지원해서는 안될까?  유치하지만, 이런 말들을 마주하면 하나하나 깨주고 싶기 마련입니다. 진일보한 프레이즈와 의제들이 가득한 가운데, 국회의원을 상대할 때는 고루하고 형식적인 방식일지라도 법이나 협약을 거론하는 게 쉬운 일입니다(법적 제도적 담론의 빈틈과 그 너머를 상상해야 할 국면인 것 같은데 발딛은 현실의 지리멸렬함은 여전히 우리를 여전히 법적 제도적 담론으로 돌아오게 만들곤 합니다)). 소위 여성헌법으로 불리기도 하는 UN의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CEDAW)의 3부 제13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의 권리를 확보할 목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c) 레크리에이션 활동, 체육과 각종 문화생활에 참여할 권리”  한국은 1984년 해당 협약을 비준하였습니다. 그러니 한국은 협약이행의 의무가 있는 약 40년차 당사국인 셈이네요.  국내법도 살펴봅시다. 권 의원은 세 활동, 연극, 운전, 운동을 생산활동과의 대조 속에서 문화생활로 언급합니다. 연극하고 운전하고 운동하는 건 생산이 아닌 소비이고, 생산이 아닌 문화이니 국가가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식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2014년부터 시행된 <문화기본법>의 ‘제4조 국민의 권리’는 다음의 내용을 명시합니다.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정치적 견해,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나 신체적 조건 등에 관계없이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를 향유할 권리(이하 “문화권”이라 한다)를 가진다.” 그리고 그 아래의 5조 1항에는 “국가는 국민의 문화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문화진흥에 관한 정책을 수립ㆍ시행하고, 이를 위한 재원(財源)의 확충과 효율적인 운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뭐, 권 의원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의 자유이겠지요. 그러나 법이 규정하는 국가의 의무와 책임에는 문화활동 내에서 ‘차별’을 시정하고 소거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가가 여성의 연극, 운동, 운전을 지원해도 된다는 것이죠.  권 의원을 이해해보고 싶어서 노력했지만…2 - 왜 ‘여성의’ 운동, 연극, 운전일까?  차별을 시정해야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이지 어디에 ‘여성의’ 운동, 연극, 운전을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이냐 물을 수 있습니다. 운동, 연극, 운전에 있어서 차별이 실재하고 있냐는 것이겠죠. 이것도 참~ 지루한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먼저, ‘운동’과 관련해서는 통계를 들 수 있습니다(굳이 부연하자면 연극의 경우 성차에 관한 통계 자체를 발견하기 힘들고, 운전에서의 차별은 담론적인 측면이 강해 통계로 잘 잡히지 않기 때문인데요). <2021국민생활체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 대 남성의 생활체육 참여율은 61.4%대 60.1%로 여성이 더 높습니다. 권 의원이 반가워할 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생활체육활동 중 참여율이 높은 상위 10개종목 중 팀 스포츠, 혼자서가 아닌 ‘팀’별로 할 수 수행해야 하는 스포츠, 들에서 여성과 남성 간의 유의미한 차이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축구, 풋살의 경우 남성의 13.5%가 생활체육으로 즐기고 있지만, 그러나 여성의 경우 0.4%에 불과하죠.    더불어 생활체육에 있어서의 격차는 성별에 연령코호트를 덧붙일 경우 더욱 극명히 잘 보이기도 합니다. 전 연령대를 보았을 경우 생활체육참여율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근소하게 앞서지만, 20대와 30대에만 한정했을 경우 이는 거꾸로 뒤집힙니다. 규칙적인 체육활동 참여 여부 및 빈도를 묻는 질문에, ‘전혀 규칙적인 체육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비율은 20대 남자에서 27.6%, 30대 남자에서 32.1%인 반면, 20대 여자에서 34.1%, 30대 여자에서 38.6%입니다. 한편, 체육 동호회 조직 가입 여부를 살펴볼 때에도 성별에 따른 격차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가입하여 현재 활동 중이라는 응답이 20대 남자가 14.0%, 30대 남자가 15.1%인 반면, 20대 여성의 경우 6.2%, 30대 여자의 경우 5.4%에 불과합니다.  이것만 가지고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적습니다. 팀스포츠를 꼭 해야할 이유도, 체육동호회 활동을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통계의 굴곡이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여성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의 제한됨을 보여준다면, 아니 그 보다 오늘날 몸을 움직이는 ‘운동’의 의미, 동기가 성별적으로 굴절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증상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체육활동 참여 이유’와 관련해 ‘체중 조절 및 체형 관리’라고 답한 비율은 20대 남성이 47.8%, 30대 남성이 46.2%인 반면, 20대 여성의 경우 71.8%가, 30대 여성의 68.5%가 소위 자신의 몸무게와 몸매를 관리하기 위해 체육활동에 참여했다고 응답한 셈입니다.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지요, 스스로를 가꾸고 정돈하는 일이야 중요하지만, 성평등 혼파망의 한국사회에서 마냥 있는 그대로 읽기 힘든 통계이기도 합니다. 운동의 동기가 어떻게 성별화되어 있는지를 추론할 수 있게 해주는 통계이니까요.  자 그래서, 생활체육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이 없다구요?   운전의 경우도 그렇죠. 자주 온라인 상에서 논란이 되곤 했던 운전사고들은 시시비비가 갈려지지 않은 채, 운전자가 여성이라는 이유 만으로 미숙한 운전자인 소위 ‘김여사’의 과실로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론의 심층 보도를 통해 여성 운전자가 아닌 다른 요인이 사고의 원인으로 밝혀지거나(국민일보.2020.01.22), 실제로 여성운전가 낸 사고는 전체 사고의 약 16%에 불과하기에 여성이 남성보다 더 안전한 운전을 한다는 통계가 제시되기도 했습니다(KBS.2012.06.21). 연극이요? 페미니즘 연극을 지원해야 할 필요성? 2018년 연극계 미투를 비롯한 성폭력 문제 뿐만 아니라, 여성연극인이 예술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경력 겪는 단절들, 예술생산자나 행위자의 측면 뿐만 아니라 연극예술과 관련한 문화적 각본의 편협성에 관한 이야기( “여성이 세상을 바꾸는 해피엔딩이 없다. 아니면 바꾸다가 주인공이 죽는다.”)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죠. 지난 5년간, 10년간, 20년간 말입니다.(한국일보.2017.06.26)  자, 그래서 운전과 연극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이 없다고요?  이제 그 후크송을 그만 끝내야 하지 않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동의하기 힘든 (정말 동의하려고 노력해봤는데도 어려워요) 고리들을 예시로 활용한 권 의원의 글은 결국 익숙한 돌림노래로 마무리됩니다. ‘공공성이 없다, 생산성이 없다, 세금이 아깝다’는 식입니다.   무구한 후크송들 중에서 대중의 귀를 사로잡는 구절이 따로 있듯, 짐짓 고루하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비판의 후렴구들을 그저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겠죠. 이는 거버넌스 사업들, 민관협력 사업들, 특정한 의제를 스스로 밀어붙이기 보다는 시민들과의 협업을 통해 정책의 빈 공간을 발굴하겠다는 정책들, ‘문화’ 또는 ‘일상’을 바꾸겠다는 많은 사업들에 자주 겨눠지기도 하는 비판이기도 합니다. 정책의 효과성을 진단하는 기존의 지표들, 특히 정량적인 지표들로 살피기 어려운 면면들을 들여다보는 정책으로 스스로를 의미화하기에 ‘대체 어떻게 그 생산성을 증명할 것인지’에 관한 의구심과 물음이란 항상 남을 수 밖에 없죠.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거버넌스라는 개념이 유행한지, 등장한지 어언 20여년 입니다. 강산이 두번 바뀔 동안 우리사회에 축적된 거버넌스의 생산성과 공공성을 측정키 위한 도구들이 무구합니다. 버나크를 비판하기 위해서 권 의원은 무어라도 분석의 틀을 가져와야 마땅하죠. 그것이 비단 행정학의 개념이든UNDP(UN개발계획)과 관련해서이든, 무엇이든지요. 부러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한국의 다양한 행정부처들, 지자체들 내에서 그 나름대로 거버넌스의 효과성에 관한 연구들, 거버넌스라는 ‘성과없음이 성과인 정책’의 성과지표에 관한 연구들을 해오고 있습니다.   물론, 권 의원은 이와 같은 설명을, 개념을, 근거를 찾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권 의원의 막무가내 식의 주장은 ‘시민’과 ‘사회’에 관한 동시대 여기의 어떤 통념들의 아카이브이기 때문인데요 -기술은 인간을 따라갈 수 없죠, 트윗봇이란 역시 오래전부터 있던 것이었습니다-. ‘시민’과 ‘사회’는 민주당적인 것, 생산적이지 않은 것, 공공을 위한 것이기 보단 특정한 집단을 위한 것, 그래서 중단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통념 덕분에 많은 설명을 소거하고도 버나크와 같은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죠. 버나크 사태가 분노와 함께 지겨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국사회를 울리는 고루한 후렴구와 후크송을 그만 끝내야 우리는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현재 집권 여당이 열어젖힌 ‘시민'과 ‘사회’에 관한 공론장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에 앞서 해결되어야 할 일이 있죠.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을 포함한 성평등 정책 정상화를 요구합니다.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함께 해주세요 전화 한 통으로 사라진 청년 성평등 정책을 돌려주세요!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여기에도_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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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나이프크루와 '경도'를 다시 생각하기
여가부 존폐 이슈는 지난 대선의 가장 큰 화두였다. 폐지론을 두둔했던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난 후 (폐지하지 않은 데 대한 누군가의 불만과 함께) 여가부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여가부에서 수행되던 다양한 가족/복지정책은 예산을 삭감당하거나 없어졌다. 사실 ‘여성가족부’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뿐만 아니라 청(소)년, 가족 등 여러 계층을 위한 복지 의제를 담당하는 부처이기 때문에 기존에 지원받던 계층은 타격을 피할 수 없다.  최근에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1년 예산 4억 5천 만원의 ‘버터나이프크루’(이하 버나크) 프로젝트였다. 2019년에 시작된 버나크는 이번에 4기를 출범했다. 버나크는 성평등 문화를 위한 모둠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 성평등 문화 확산 2) 젠더 갈등 완화 3) 공정한 청년 일자리 환경 조성 4) 청년 고립/우울감 극복을 위한 마음돌봄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6월 30일 개최된 출범식에 참여하여 “2030 청년들을 중심으로 양성평등 문화를 확산하고, 이 과정에서 성별, 세대 등 더욱 다양한 청년들과 시민들이 참여하여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응원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버나크가 “남녀 갈등을 증폭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여가부 장관과 통화하여 해당 사업에 대한 문제점을 전달했다”고 이야기했다. 권성동 원내대표에 따르면 논지는 “1) (버나크가) 문화 개선에 실효성이 없다, 2) 지원 대상이 페미니즘에 경도됐다 3) 특정 이념(페미니즘)을 국가가 지원해서는 안 된다 4) (여가부가) 전 정부의 사업 방식을 관성적으로 반복하고 있다”(한국일보 2022.7.7)는 것이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버나크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발의했던 여가부 폐지 법안을 더욱 더 강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여가부는 이 발언이 있은 지 바로 다음날 “ 해당 사업의 젠더갈등 해소 효과성, 성별 불균형 등의 문제가 제기된 바 이와 관련하여 사업 추진에 대해 전면 재검토하도록 하겠다”고 나섰다.  “여가부 폐지한다더니 페미니즘 사업을 지원한다”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선 당시 젠더 갈라치기 논란이 있었을지언정, 소위 이대남을 비롯한 남성 유권자들의 호응을 사면서 밀어붙였던 사안이기 때문에 당의 현실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버나크를 ‘악용’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본질적인 문제는 과연 ‘어떤 것’이 ‘특정 이념’이고 ‘어떻게’ 프로젝트가 ‘경도되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버나크의 세부적인 목표가 ‘페미니즘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대응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성평등은 단순 이념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적인 방식에 근거를 두기에, 여성가족부가 그동안 해왔던 사업 내지 정책들은 ‘삶’의 영역을 지원하고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버나크와 같이 네트워크에 기반하는 활동도 역시 삶의 일부로서 의의를 가진다.  지금 특정 이념이 된 것은 폭력적인 관습에 따라 젠더를 갈라치기하며 페미니즘과 성평등을 착취하는 현 정권과 집권여당의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버나크 사업의 중단에서 결국 ‘경도’의 용법은 버나크와 페미니즘이 아니라 ‘버나크 폐지’가 폭력적이고 일방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속에서 다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함께 해주세요 전화 한 통으로 사라진 청년 성평등 정책을 돌려주세요!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여기에도_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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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나랏돈으로 해야 합니다
- 어떤 이는 ‘너는 남자면서 왜 여성주의를 입에 올리느냐?’라 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가족부 폐지를 외치는 여성가족부 장관’도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야! -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함께 해주세요 전화 한 통으로 사라진 청년 성평등 정책을 돌려주세요!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여기에도_성평등 페미니즘(feminism)은 여성주의(女性主義)라고 번역합니다. 페미니즘이 시작될 당시나 지금이나, 이 사상이 성별 격차의 해소와 여성의 권리 보호를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성주의가 여성을 중심에 두고, 여성이 생각의 대상이자 주체가 된다는 점은 두루 아는 사실이지만, 여성주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성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여 여성에 대해 묻고 생각하는 일은, 결국 인간에 대해 묻고 생각하는 일로 귀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안다(知)’와 ‘배운다(學)’ 우리가 안다(知)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안다는 것은 존재 혹은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보고, 어떻게 듣고,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생각하는가, 더 나아가서 존재/사건-판단-생각을 각자의 안에서 얼마나 깊이 체계화하는가에 대한 문제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복잡한 심리 활동입니다. 보고 듣는 것,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지금 어디를 밟고 서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멀리까지 보이고, 깊은 곳에 들어가면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어떨 때엔 아무 일 없이 넘어가지만, 어떨 때는 고깝게 들립니다. 수치를 통해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고차원적인 지식이라고 해도 이런 일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안다는 것은, 이 행위의 주체가 어떤 사회적 조건과 상황 속에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과 자전을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평소에 공전과 자전을 늘 의식하며 살지는 않지요.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들며 시간에 맞춰 일을 하고 밥을 먹는 일에 있어, 공전과 자전을 알고 모르고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해가 동쪽으로 떠서 서쪽으로 지고, 해가 질 무렵이면 동쪽에서 달이 뜨고 새벽이 온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누군가가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이보슈! 틀린 소리를 하는구려!’, ‘해가 뜨고 지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도는 거라오! 당신은 그것도 모릅니까?’ 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모두가 그것을 그렇게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것을 통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돈다는 것도 사실이고,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어느 입장에서 보는가의 문제인 것이지요. 우리는 앎을 얻는 행위를 배운다(學)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자면, 배운다는 것은, 나의 안다가 어느 위치에서 이루어지고 있느냐를 깨닫는 것이고, 그 깨달음을 통해 나의 안다는 어디까지나 수많은 인과관계 중 일부분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다의 문제를 우리 사회의 영역으로 한번 돌려서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우리의 안다가 우리 사회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나의 안다와 다른 이의 안다가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태를 가능하게 하는 총체적인 구조가 있는 것은 아닌지를 끊임없이 뒤돌아보며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안다를 하는 이는 끊임없이 뒤돌아보고 자신의 생각을 반성하고 의심하여 자신의 안다가 일부분에 불과함을 알고 겸손하게 행동하지만, 안다를 못 하는 이는 근거 없는 뜬소문조차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그것을 전하며 자신은 다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다에 사회적 조건이나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작게는 그 사람이 잘못된 안다를 갖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고, 크게는 사회 정의, 인간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매우 오만한 태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성주의란 이런 맥락 속에서 탄생한 중요한 사상입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여성주의의 중요한 구호 중 하나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제가 앞에서 말한 안다와 배운다의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는 중요한 말입니다. 이 구호를 조금 더 풀이하자면, 내가 살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나의 세계, 어려운 말로 하면 인식을 통해 이루어진 개인적인 경험이 사회적인 것과 엄격하게 분리될 수 없으므로, 이런 차원에서 개인의 경험과 사회 구조를 따로, 또 같이 연결하고 분석하면서, 우리가 개인적인 상황에서 얻은 깨달음을 가능하게 한, 각각의 사회 구성원들이 처해있는 사회적인 조건을 살피고, 지금보다 더 나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성의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것은 물론, 여성들이 다양한 활동을 경험하는 것 그 자체가, 여성 당사자들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상식(보편적인 안다)이 강제적이거나 폭력적인 부분은 없었는지, 혹은 우리의 앎과 깨달음을 새롭게 확장할 수 있는지 되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깟 공놀이로 보일 지도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한국 여성들은 공놀이를 해온 역사가 별로 없습니다. 김연경의 활약에 한국 국민들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에게 왜 더 환호를 받는지, SBS의 <골때리는 그녀들>이 왜 인기가 있는 것인지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모를 것입니다. 그저 여성들이 활약하고 있으니까 박수를 치나보다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만,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저 여성들의 공놀이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 점에서 지난 3년여간 시행되어 온 버터나이프크루는 상당히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성평등이라는 큰 의제 아래에서 복지와 안전 같은 제도적인 문제부터 건강과 외모 지상주의까지 다양한 문제를 논의하고 결과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중에는 괄목한 만한 성과도 분명 있었고, 또 설사 그러한 성과가 없었다고 해도, 그 활동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매우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분명한 것입니다. 제도라는 말이 가리고 있는 것 우리 헌법은 제34조에서 여성의 권익을 위해 국가가 노력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인가? 페미니즘은 나랏돈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국가가 여성의 권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법과 제도를 통해 교육, 노동 등에 대하여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도적 기회 보장이 100%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여성에 대한 차별은 제도 그 자체의 문제보다도 가정(家庭)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불평등함에서 기인합니다. 성별 그 자체가 여성이라서, 외모 때문에, 재산 때문에, 교육수준 때문에, 출신지와 거주지 때문에,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 때문에! 우리는 이미 많이 봐왔습니다. 법과 제도가 현실에서 적용될 때, 관례, 관행, 판례 등을 이유로 과거의 생각을 지금의 제도에 이입하고 있는 것을! 또, 많은 경우에 동등한 기회를 준다고 하는 것도 장애가 없고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 이성애자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제도를 기반으로 논의가 진행됩니다. 여성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불평등을 남성들은 경험하지 않습니다. 당장, 임신, 출산, 육아를 경험하는 남성이 얼마나 될까요?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의 남자들이 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법이나 제도만으로 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페미니즘을 나랏돈으로 해야하는, 국가가 여성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전인 2022년 8월 25일, BBC에서는 <남한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다시 기록하였다 South Korea records world's lowest fertility rate again>라는 기사를 냈습니다. (BBC.2022.08.25.) 이 기사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한국 여성들은 교육 수준이 높지만, 아직 일터에서의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은 다른 부유한 나라와 비교했을 때,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높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집안일과 양육은 아직도 여성에게 주어지고 있으며, 여성들이 아이를 낳은 후 일을 중단하거나 경력이 정체되는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많은 여성들이 아직도 직업과 가정 사이에서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경력을 희생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결심하고 있다. 한 여성이 나에게 ‘우리는 아기 낳기를 파업합니다’라고 말한 것 처럼. Women in South Korea are highly educated, yet far from equal in the workplace. The country has the highest gender pay gap of any rich country. Most of the housework and childcare in South Korea still falls to women and it is common for women to stop work after having children or for their careers to stagnate. Essentially, many women here are still forced to choose between having a career and having a family. Increasingly they are deciding they don't want to sacrifice their careers. As one woman put it to me: "we are on a baby-making strike". 저는 점점 기성세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산처럼 쌓여있는 세상의 문젯거리들, 지금의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여러 문젯거리들을 보며, 이것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이렇게 20~30년, 아니 10년, 5년이 흘러버린다면, 저의 다음 세대들이 어떤 세상을 살아가게 될지 상상하곤 합니다.  지금 이런 문제들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몇몇 사람들이 페미니즘은 개인돈으로 하라는 둥, 나랏돈으로 특정 이념을 부추긴다는 둥 하는 것을 보며 통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진실된 앎을 얻어 자신의 앎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알고 겸손한 태도로 세상일을 대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으나, 만약 시중에 아무런 근거 없이 떠드는 사람들의 말을 받아 전하면서 자신은 그것으로도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더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함께 해주세요 전화 한 통으로 사라진 청년 성평등 정책을 돌려주세요! 버터나이프크루 정상화를 위해 #여기에도_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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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와 마트 노동자들의 휴식권
윤석열 정부가 규제 개선 1호 과제로 검토했던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는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제안’ 온라인 투표에서 57만표를 획득하여 1위를 차지했으나, 결국 ‘어뷰징(반복 행위를 통해 클릭수를 조작하는 것)’ 논란이 일면서 투표 자체가 무효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모두가 알고 있듯 핵심적인 논란의 발원은 다른 데 있다. 소상공인 업계와 노동계의 반발이 매우 거셌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논란거리가 되었던 대형마트 의무휴업 제도의 존속 여부와 관련하여  “지금 당장 제도를 변경하거나 이런 것 없이 현행 유지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특히 소상공인 의견을 많이 경청하겠다”고 밝혔다(최상목 경제수석 브리핑). 이는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SSM) 의무휴업”이 “2012년 골목상권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영업시간 제한과 함께 ‘유통산업발전법’을 통해 도입”(중앙일보 2022.8.1)된 맥락과 궤를 같이 한다. 이 제도에 따르면 대형마트에 월 2회 의무적으로 휴업해야 하며, 자정부터 오전 10시까지는 영업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소상공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는 발언에는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에 반대했던 커다란 두 축 중에 하나인 노동계의 입장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석열 정부 대형마트 주말 의무휴업 폐지 저지를 위한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윤석열 정부가 당사자와의 대화나 의견수렴도 없이 역린을 건드렸다”고 직접적으로 꼬집었는데, 결과적으로는 현행 제도 유지가 결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대화’나 협상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2012년에 대형마트에 월 2회 휴업을 의무로 부여한 이유 중 하나는 “마트 노동자들의 신체적 건강과 일/삶의 균형”을 보장하기 위함이기도 했다(아주경제 2022.8.25).  대형마트 노동자들의 휴일은 의무휴업일인 이틀을 빼고는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는 일이 많다. 주말의 경우 매출이 평일보다 높기 때문에 무조건 출근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고, 연휴는 거의 없다시피 할 뿐만 아니라 명절 때도 마트가 영업하지 않는 당일을 빼고는 근무를 독촉한다. 마트가 영업을 종료하는 자정 직전까지는 매장을 비워둘 수 없다. 게다가 마트에 입점해 있는 개별 매장은 이중으로 휴일을 협상해야 한다. 그러나 대형마트의 노동자 중 대부분이 중장년층, 그 중에서도 여성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문제적이다. 이들은 현실적으로 노동시장에서의 협상력이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휴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정해진 휴일이 없어 유동적인 스케줄에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이러한 노동조건을 감내하고자 하는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불안정한 노동의 문제가 안건에서 배제되어 왔던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유독 노동의제가 적었던 이번 대선을 지나 왔고 그 기조는 지속되고 있다.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 논란 속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소비자의 권리/소상공인의 보호 구도이지(혹은 간혹 대형마트, 대기업의 횡포가 언급되기도 하지만) 노동자의 휴식권은 여전히 아득한 뒷자리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 이슈는 어떤 충돌 구도가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 차원에서 재고찰되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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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 김현숙 장관님께 - 최근의 결정에 대하여 -
아직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장관님의 성함이나 이력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뉴스를 통해 접한 바가 있습니다. 제가 일국의 장관을 상대로 글을 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한 것이지만, 김현숙 장관님의 최근 결정에 대하여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버터나이프크루 2019년부터 여성가족부에서는 버터나이프크루라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성평등이라는 큰 의제 아래에서 복지와 안전부터 건강과 외모지상주의까지 다양한 문제를 논의하고 결과물을 만들어 온 버터나이프크루는 4기 출범식을 하고 단 5일만에 세금 도둑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강원도 강릉)의 전화 한통에 3년 가까이 진행되어온 정부 사업이 뒤집어져 버린 것입니다. 권 의원이 장관님께 전화를 했고, 그 전화 이후 여성가족부가 사업 전면 재검토 결정을 내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장관님은 이러한 사태에 아무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다시 장관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2022년 8월 18일,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님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 민주당 한준호 의원이 "여가부를 폐지하는데 국회와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가능한가"라고 묻자, "정부조직법을 국회에 내면 국회에서 논의할 것"이라고 답하셨고, "부처를 폐지하겠다는 장관과 무슨 정책을 논하나. 여가부 폐지를 위해 장관에 임명됐나?"라는 말을 듣자 장관님은 "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MBC.2022.08.18.)  버터나이프크루에 대해서도 장관님은 “여가부가 아닌 위탁운영사 ‘빠띠’가 먼저 중단 통보를 했다”,  “해당 사업이 부적절해서 폐지한다”, “국민에 대한 사과는 필요하나, 참가자에 대한 사과는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여성가족부가 먼저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한 점을 무시하고, “(참가팀은) 내가 학교에서 본 평범한 2030세대와는 차이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며 (대한민국의 모든 2030을 다 만나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청년을, 시민을 갈라치는 발언을 하셨습니다. (한겨레.2022.08.19.)  대한민국은 삼권분립의 기초 아래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김현숙 장관님, 당신은 행정부의 엄연한 한 축이며, 헌법이 국가의 의무로 강조하고 있는 여성의 인권을 위해 존재하는 부서의 수장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한 사람의 전화 한 통에 이미 출범식까지 마친 정책 사업을 하루 아침에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장관님은 행정부의 일축을 담당하고 있는 장관의 직을 맡았다는 자존심도 없는 것입니까? 이것은 장관님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모멸감을 주는 행위입니다. 역사에는 목적도 없고 정해진 방향도 없습니다. 수많은 인과관계의 조합 속에서 인간은 그 결과의 좋고나쁨에 관계없이, 늘 새로운 방향을 창조해 왔습니다. 여성가족부를 없애기 위해 장관이 되셨다는 장관님의 말 한 마디가 훗날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줄 지, 지금 당장이야 알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각 인간은 모두 그 인과관계에 대하여 일정부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장관님 같이 중요한 결정을 하시는 분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정부의 정책 사업을 혈세 낭비라 낙인 찍고서 삼권분립이라는 가치까지 짓밟으며 정책을 없애라고 장관에게 전화를 거는 국회의원의 말 한 마디에, 장관님의 승인 하에 출범식까지 마친, 그것도 3년이나 지속되어 온 사업을 없었던 일처럼 만들어 버리는 장관님의 행동은 한국의 정치를 넘어, 한국 사회, 더 나아가 한국 역사에 어떤 영향을 줄까, 장관님의 이름이 후에 어떻게 기록될까 생각해 보셨는지요? 장관님의 시민단체에 대한 시각에 우려를 표합니다 또, 장관님께서는 과거에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고용복지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시고, 2015년 8월 고용부 차관 직속기구로 설치한 노동시장개혁 상황실이라는 비선 기구를 실질적으로 지휘하셨습니다. 장관님은 이 당시 박근혜 정권의 소위 노동개혁을 홍보하기도 하였고, 친정부 보수 시민단체의 시위를 직접 기획하고 지시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88억 9,000만 원의 예산을 사용하셨는데, 이는 고용부 소관 예산과 고용보험기금을 불법 전용한 것이었습니다. (한겨레.2022.03.17.) 검찰이 비록 이 사건을 무혐의로 처리했지만, 저는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장관님께서 시민단체를 보는 시각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민단체를 시민의 목소리를 주체적으로 제시하는 단체가 아니라 막연하게 모임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장관님께서 여성가족부가 아니라 그 어떤 업무를 맡으시더라도 결국 시민단체에 대해 똑같은 태도, 똑같은 결정을 보여 주시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국정과제1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에서 발췌. 권인숙 의원실 제공 경향신문.2022.04.27.> 장관님의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장관님께 부탁드립니다. 부디 당신의 말 한 마디가 우리 정치와 사회, 더 나아가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렵게 피(血)로 만들어온 인권의 역사와 그 가치를 담은 정부 부서, 그리고 권력의 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모욕하고 뒤흔드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장관님께서 갖고 계신 시민단체에 대한 가치관도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시민단체란 다양한 형태를 통해 시민이 중심이 되어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코자 모인 조직이지, 목적 없이 그냥 모이는 모임도 아니고, 정부가 마음대로 지시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닙니다. 장관님께서는 버터나이프크루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에 대해서 다시 검토해 주시고, 행정부의 한 축으로서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심심한 사과/위로'의 의미를 아시나요?
몇 시간 전 하나의 뉴스를 봤습니다. "심심한 사과? 나는 하나도 안 심심해!"...사과문이 쏘아올린 '문맹' 논란" 사건은 웹툰 작가의 사인회 예약이 마감되어 관계자가 마감 공지를 올리면서 '사인회 예약이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예약 과정 중 불편끼쳐 드린 점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립니다.'라고 적은 SNS에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SNS에서 이 글을 본 사람들이 '심심한 사과'라는 말에 대해 '나는 하나도 안 심심한데,' '심심한 사과라는 것이 어디있냐'라며 항의를 했다고 해요. 이 용어가 논란이 된 이유는 '심심한'이라는 단어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뉴스를 보고 처음에는 '왜 논란이 되지?'라는 생각을 하다가 '사람들이 용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뒤이어 스쳐지나갔습니다. 결국 관계자는 사과문을 다시 발표했죠. <혹시 몰라 한번 더 '심심하다'를 검색해본>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흘'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한참 논란이 있었던 적이 있었죠. 3일인데 왜 4흘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 SNS에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했었어요. 처음에 공유드린 기사에서도 내용이 있지만 '실질 문맹률'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글을 읽을 줄 알지만 뜻을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한민국의 문맹률은 매우 낮지만 실질 문맹률이 75%일만큼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요. 계속해서 어휘력에 관련된 논란이 많아지고 있어서 걱정도 되면서도, 우리나라만의 이슈일까? 싶기도 하더라구요. 다른 분들은 심심한, 사흘, 금일 등의 뜻을 알고 있으신가요?! 혹은 이런 뉴스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글을 적으면서 뉴스를 다시 찾아보니 몇 분 전에도 뉴스가 나오고 그렇네요...‘심심한 사과’는 심심해서?…또 불거진 어휘력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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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수탈형 경제 체제를 극복합시다.
[경자유전] 대한민국 헌법 제121조 ①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 ②농업생산성의 제고와 농지의 합리적인 이용을 위하거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발생하는 농지의 임대차와 위탁경영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인정된다. 제123조 ①국가는 농업 및 어업을 보호ㆍ육성하기 위하여 농ㆍ어촌종합개발과 그 지원등 필요한 계획을 수립ㆍ시행하여야 한다. ②국가는 지역간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의무를 진다. ③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ㆍ육성하여야 한다. ④국가는 농수산물의 수급균형과 유통구조의 개선에 노력하여 가격안정을 도모함으로써 농ㆍ어민의 이익을 보호한다. ⑤국가는 농ㆍ어민과 중소기업의 자조조직을 육성하여야 하며, 그 자율적 활동과 발전을 보장한다. 곡물 가격 급상승, 식량 안보, 농어촌 고령화, 마을의 소멸, 서울 공화국. 이제는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으신 말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정권 이래로 한국 경제는 농어촌에서 식량과 자본, 환경과 노동력을 도시에 그대로 떠서 가져오는 정책을 취하고 있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방의 모든 것을 쭉쭉 빨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보듯, 농어촌 문제의 해결은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사항입니다. 다소 과장된 말로 들리시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과격하게 말하자면, 농촌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정권은 모두 위헌입니다. 주식 문제, 금융 문제를 다루는 공력의 반의 반이라도 농촌에 관심을 가집시다. 도시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도시란 자기 스스로 식량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인간이란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 죽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도시인들은 농수산물과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농어촌 사람들과 교환해야 합니다. 그것이 도시의 본질입니다. 도시 사람들은 농어촌으로부터 식량을 공급 받지 못하면 굶어 죽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의 도시, 특히 서울 사람들은 농어촌에 정당한 대가를 주고 식량을 받아왔는가에 대해 반성해야 합니다. 이것을 어줍지도 않은 수요공급의 법칙으로만 설명하려 하는 것은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대 주류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계산의 편의를 위해 항상 시장을 참여자 모두가 비슷한 조건을 가진, 모두가 시장 앞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조건을 가진, 완전경쟁이 가능한 곳으로 가정하여 설명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모두가 알다시피 독점 아니면 과점입니다.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습니다. 즉, 완전경쟁시장이라는 말 자체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을 처음 배울 때, 수요-공급의 법칙을 설명하면서 항상 이 전제를 먼저 설명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시장은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며 정부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기본 개념을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요,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일까요?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라면 간사한 것이고, 몰라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반성하고 배워야 합니다. 인간과 사회의 기본은 몸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식과 코인에 빠져서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안 먹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본은 몸입니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태어나 몸으로 세상과 교류하며 몸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냅니다. 어떤 의미에서 정신 노동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정신도 몸을 통래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손가락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눈으로 보고 계시고요. 음식의 질이 좋거나 나쁘거나, 우리는 음식을 안 먹으면 죽습니다. 환경문제, 식량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식량 안보, 식량의 전략성도 중요한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안 먹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인간의 역사에서 도시가 탄생했다는 것, 식량을 자기 손을 만들지 않는 사람들이 탄생했다는 것이야말로 상당히 특이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온 국민이 다시 도시를 버리고 농사를 짓고 고깃배를 타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시 중심으로 만들어져 온 한국 문명의 역사를 돌아보며, 착취의 고리를 끊고, 함께 살 수 있는 방법, 도시가 다 빨아들여 왔던 부를 농촌에 공정하게 재분배하는 방법에 대해 다함께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농어촌 문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농어촌의 문제, 둘째는 농어민의 문제, 셋째는 농어업의 문제입니다. 지금 이 세 가지를 따로 떼어서 개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세 가지는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서울에 있는 대기업 하나가 그냥 시골에 띡 가버리면 그걸로 바로 인구 문제가 해결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예를 멀리서 찾으실 것 없습니다. 세종시를 보십시오.  인구 불균형을 해소하려면 농어업이 살아야 합니다. 농어업이 살고 농어촌이 살아야 합니다. 농어촌이 살려면 농어촌에 사는 사람이 잘살 수 있어야 합니다. 농어민이 아니어도 농어촌에 사는 모두가 행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시의 행복은 커녕, 도시 문명 자체가 무너질 지도 모릅니다. 이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함께 토론하길 원합니다. 첫째, 경자유전의 원칙을 되살릴 방법을 토론하길 원합니다. 농사 짓는 자가 땅을 가진다는 원칙이 깨지고, 부재지주(不在地主), 그 지역에 살지 않는 지주들이 늘어나면서 농지도 수익을 위한 매매 상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은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강제적인 방법이라도 동원해야 합니다. 식량 문제를 두고 안보와 전략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전에 식량은 생명이고 환경입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소작을 주거나 수익을 위해 사고 파는 땅에서는, 그 누가 살아도, 그 땅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해도, 그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 농업이 앞으로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토론하길 원합니다. 개인, 혹은 가구 단위의 소농 중심의 농업을 택하여 농지를 가지고 자급자족과 수익 창출이 가능하게 해야 하는지,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사기업 단위의 대농 중심의 농업을 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의하여야 합니다. 지역에 따라, 생산물에 따라 어떤 방식을 택하는 것이 유리한지, 전국 균형 발전이나 식량 안보 같은 거시적인 차원에서도 생각해보고 그리고 농업에 참여하고 농어촌에 사는 주체들의 행복의 차원에서도 생각하면서, 무엇이 더 좋은가, 혹은 옳은가를 논의해야 합니다. 셋째, 농어업은 물론, 농어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지역 주민들을 참여하게 하길 원합니다. 도시 쓰레기 처리 문제도, 재생 에너지 산업 문제도, 지역 주민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 합니다. 저는 원자력 발전에서 벗어나 재생 에너지 중심으로 가는 것에 적극 동의하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재생 에너지 역시 도시에서 사용하는 전력량을 중심으로, 산업용 전기 중심으로 토론한다면 이것 역시 약탈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전력의 민영화를 막고 국가가 직접 나서서 재생 에너지 산업이 이루어지는 지역 주민들에게 그 이득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탈원전 사업을 설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친환경 재생 에너지 사업에 발전소가 지어질지도 모르는 농어촌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적극적으로 반영되기를 바랍니다. 넷째, 정책을 결정하는 관료, 법안을 입안하는 정부와 국회가 농수산물의 수입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기 바랍니다. 특정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전문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농어촌 전문가에는 관료와 정치인, 학자만 있고 농어민이 빠져 있습니다. 농어업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을 전문가로 대우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경청하기 바랍니다. 다소 과격하게 이야기했습니다만, 이 문제에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오기를 바랍니다. 정치인과 관료, 학자 중심의 이야기에서 모든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고 많은 목소리가 나와주기를 바랍니다. 특히 농어촌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기다립니다. 이 글을 보고 비판하시는 많은 분들이 나와 주기시를 바랍니다. 혹 명쾌한 정답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지방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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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토론’ 페이지를 소개합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글 써보자!❞
? 안녕하세요. 빠띠 캠페인즈팀입니다. 항상 캠페인즈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빠띠 캠페인즈팀이 ‘투표·토론’ 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투표·토론’ 페이지는 사회 이슈에 대한 의견을 ‘투표’, ‘글’과 '댓글' 그리고 '좋아요'를 통해 나누는 공간입니다. ?자유롭게 토의하기 ‘투표’는 다양한 이슈에 관한 여러 관점들을 확인하고, 동의하는 의견에 '투표'를 하고, '댓글'로 의견을 덧붙이고 토론하는 공간입니다. 투표안에 동의하는 의견이 없을 경우, 독자적인 의견을 작성해주시면 더욱 좋습니다. '투표'에서 확인한 이슈에 대해 더욱 깊이 논의하고 싶을 경우, '토론'에서 글을 작성하세요!  ‘토론’은 다양한 이슈에 관해 자유롭게 글을 쓰는 공간입니다. 공감이 가는 글에는 ‘하트'를 눌러 공감을 표현하거나, ‘댓글’을 달아 논의를 이어가세요. 동의도 좋고 반론도 좋아요! 긴 반론이 있다면 새로운 글을 작성하세요. 깊이 있는 논설도, 짧지만 임팩트 있는 글도 좋습니다. 자유롭게 부담없이 글을 작성하세요! ?토픽과 이슈 8개의 토픽, 59개의 이슈를 준비하였습니다. 관심있는 토픽과 이슈를 선택해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토픽별로 토론글을 확인할 수 있고, 이슈별로 토론글 뿐만 아니라 관련 투표, 관련 캠페인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적합한 이슈가 없다면, 이슈를 선택하지 않고 글을 쓰거나, 기타 토픽의 ‘새 이슈 제안’ 이슈를 선택하여 이슈를 제안해 주세요! ?이슈 구독 관심있는 이슈가 있다면 ‘이슈 구독’을 눌러서 알림을 받아보세요. 캠페인과 투표가 새롭게 올라오면 이메일로 보내드립니다. 전체 이슈는 전체 이슈 페이지에서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빠띠 캠페인즈팀은 캠페인즈의 토론 공간이 짧은 비아냥의 반응보다는 진솔한 토론들이 모여 공론이 형성되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관점들이 자유롭게 오고가는 안전한 공론장을 만들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이슈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을 자유롭게 나눠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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갭투자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합시다!
투자(投資)와 투기(投機)의 차이는 뭘까? 한자만 보자면, 투(投)는 던진다는 뜻이고, 자(資)는 자본, 기(機)는 기회를 뜻한다. 자본을 던지면 투자고 기회를 던지면 투기인 것일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자.  투자(投資) [명사]    1 이익을 얻기 위하여 어떤 일이나 사업에 자본을 대거나 시간이나 정성을 쏟음.   2 『경제』 이익을 얻기 위하여 주권, 채권 따위를 구입하는 데 자금을 돌리는 일. 투기(投機) [명사]    1 기회를 틈타 큰 이익을 보려고 함. 또는 그 일.   2 시세 변동을 예상하여 차익을 얻기 위하여 하는 매매 거래. 시간이나 정성을 쏟아서 이익을 보면 투자고, 기회를 틈 타 이익을 보면 투기인 것일까? 도무지 감이 안 온다. 그래서 이 말들이 만들어진 일본의 설명을 보려고 하였다. 이와나미 출판에서 만든 『국어사전』을 찾아보자. 투자(投資, 토-시) [명사, 자동사]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사업 등에 자금을 내는 것. 비유적으로, 장래의 이익을 위해 다액의 금전을 투입하는 것. 투기(投機, 토-키)   1 불확실하지만 맞기만 하면 이익이 큰 일을 노리고 하는 행위   2 시가의 단기간 변동 수익만을 노리고 행하는 매매거래 두 나라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기간이 좀 길면 투자고, 기간이 짧으면 투기가 된다 정도로 해석해도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결국 투자와 투기는 기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는 걸까?  자, 나는 왜 이렇게 긴 이야기를 꺼냈을까? 갭투자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갭투자란 부동산을 구매할 때 전세 세입자를 먼저 구해 전세금을 받은 후, 부동산 가격에서 전세금을 뺀 나머지 차액만 자기 돈을 내거나, 대출을 받아 지불하여 부동산을 구매하는 것을 말한다. 혹시 나이가 있는 분이라면 ‘전세 끼고 산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부동산, 특히 주택 가격이 오르면서 전세값이 같이 올라 부동산 매매가와 전세가 사이의 차이가 적어지자 ‘전세 끼고 사는 것’이 갭투자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다. 신혼부부들도 신혼부부대출을 받아서 갭투자를 하고 이것을 자랑하며 책을 내기도 하고, 박 아무개라는 사람은 300채 넘는 집을 갭투자로 구매하고는 자기 이름의 영문 머릿글자를 딴 회사를 만든 후, 갭투자를 하라고 강연을 하고 다니기도 한다. 저렇게 집을 사들이다가 어느 순간 집값이 떨어지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전세금을 돌려줄 수 없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집을 사들인 사람이 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수많은 세입자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2018년 3월에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갭투자를 하다가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게 되자 아파트 48채가 한꺼번에 경매로 나오는 일이 있었다. (한경.2018.03.09.) 2020년 11월에는 대구에서 갭투자를 하다가 전세 보증금 50억 원을 들고 달아난 사람이 화제가 되었다. (중앙일보.2020.11.21.) 2021년 5월에는 서울시 화곡동에서 세 모녀가 갭투자로 500채를 사들이고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MBC.2021.05.29.)  어떤 이들은 투자가 자본주의의 꽃이라고도 말하지만, 나는 감히 이를 도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자본주의가 허락한 도박이라고 말하고 싶다. 도박이란 무엇인가? 노동을 해서 돈을 벌지 않고, 돈을 걸고 이익을 얻으려는 행위가 모두 도박이다. 차라리 복권에 10억을 썼다면, 카지노에서 10억을 썼다면 자기 혼자 망하고 그만이다. 이제 막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는 중소기업에 투자를 하다 망하면 마음은 쓰라리겠지만 누군가의 시작을 위해 희생했다는 자기 위로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갭투자라는 도박은 부동산이 카드고 화투이며 마작이다. 그 중에서도 대부분은 빌라나 오피스텔 같이, 이제 막 새롭게 사회생활을 하며 독립한 청년들이나 큰 부를 손에 잡아보지 못하고 평생 묵묵히 생계를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인생을 저당 잡고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책을 내고 강연을 하면서, 가난은 죄라고, 똑똑하지 못해서 가난한 것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정장 입은 강도들이 너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돌아다닌다.  갭투자라는 요물을 잡기 위해 나름대로 정부도 노력을 하긴 하였다. 여러 채를 보유한 사람에게는 전세 대출을 안 해준다던지, 시가 9억 원이 넘는 집에 대해서는 대출을 안 해준다던지. 이러한 정책들이 나름대로 효과를 보긴 한 것 같지만 그래도 갭투자 자체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집이 과시와 수입이지만, 어떤 이들에게 집은 빌려서 쓰고 있는 생필품이다. 2020년 기준, 한국의 자가보유율은 60.6%다. 자기 집에 사는 가구는 57.9%다. (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39.4%는 자기 집이 없다. 한국에 100 가족이 산다고 치면, 서른 아홉 가족은 자기 집이 없다는 소리다. 2020년 기준, 주택을 소유한 사람은 1,469만 7천 명이다. 이 중 한 채만 소유한 사람은 1,237만 7천 명이다. 2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183만 명(12.5%), 3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29만 7천 명(2.0%), 4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7만 6천 명(0.5%), 5채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은 11만 7천 명(0.8%)이다. 2천 가구는 51채 이상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집이 과시와 수익의 수단이겠지만, 전국의 39% 가족에게는 빌려서 쓰는 생필품이다. 그 생필품으로 장난을 치는 이들을 엄하게 규제하길 바란다. 혹자는 시장의 규칙을 운운하며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죽을 때까지 작게라도 자기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하고 평생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남의 집 살이를 할 때, 누군가는 그것으로 투자라는 이름의 투기를 하면서, 빌라 여러 채를 손 안에 넣고 만지작 거리며 스톱을 할까 고를 할까 고민하고 있다면 그것을 올바른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 만든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자기 힘으로 견뎌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진 현명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자들이 만든 지극히 불합리한 제도를 자연의 불가항력인 것처럼 인정하는 것은 비굴하고 무식한 노예의 사상이고 인간과 인간 사회의 발전을 막는 위험한 사상이다. 나는 갭투자를 비롯한 부동산 투기 세력의 억제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위정자(爲政者)들의 의향에 따라서는 당장 내일부터도 가능한 것이 사실인 것이다. 우리는 보았지 않았는가?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던 그 날을. 혹 이 일에 몇 년이 걸린다 하여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고, 필경 보람이 있는 일이다. 어떤 이는 갭투자는 소수의 나쁜 ‘일부’가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너무나 명백하게 유해한 ‘일부’라면 우리는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쪽에는 너무 큰 피해를 보는 ‘일부’가 존재하니까.  마지막으로 조선 숙종 3년(1677) 12월, 윤휴(尹鑴)의 상소문을 인용하고자 한다. 기존의 군적에서 잘못 올라가 있는 것들을 전부 말소하고 신분과 지역에 상관 없이 1년에 군포 1필을 내게 하는 호포법의 시행을 주장하며 한 말이다. 죽은 사람과 어린 아이의 살가죽을 벗겨내고 골수를 빠개버리는 괴로운 정치로 인해 머리를 쥐어싸고 가슴을 두드리는 근심과 병, 펑펑 노는 선비와 운 좋은 백성이 의무를 피하고 자기가 편한 길로 가고자 하여 생기는 원망, 이 둘 중 무엇이 더 큰 것입니까? 집이 있고 건강한 몸이 있으면 세금을 내고 특산품을 내는 것과 이미 죽은 자나 어린 아이에게 부역을 나가게 하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나은 것입니까? 신은 모르겠습니다. 호포법의 시행이 명분 없는 것입니까, 호포법 반대가 명분 없는 것입니까? 호포법의 시행이 백성의 원망이 되겠습니까, 호포법의 반대가 백성의 원망이 되겠습니까? 민심의 향배나 천명의 거취는 이제 약하고 힘없는 백성의 평안과 불안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운 좋은 백성과 부자들의 편리와 불편에 달린 것이 되는 것입니까? 白骨、兒弱剝膚搥髓之厲政, 疾首叩胸之愁毒, 孰與遊士、倖民避役自便者之怨咨也? 有戶有身者, 有庸有調, 又孰與旣骨、黃口之出役乎? 臣不知。此爲無名乎。彼爲無名乎。此爲民怨乎? 彼爲民怨乎? 民心向背、天命去就, 將不在於小民之安不安, 而乃在於倖民豪右之便不便乎?
경제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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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최근 학제개편(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1년 낮추는)의 이야기를 보면서 문득 ‘학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는 원래 독일에서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만들어졌다고 해요. 가내수공업 중심의 상업 활동에서 공장이 생기면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도시에 많은 인력이 필요해졌고, 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능력을 키우기 위해 학교를 만들었죠. 실제로 독일에서 1819년 현대 의무교육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고 해요. 1.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2. 고분고분한 광산 노동자3. 정부 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4.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5.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하지만 이는 과거의 기원일 뿐이라 생각해요. 최근에는 학교의 역할이 바뀌었죠. 다양한 교육 방식이 나타나고 있고, 공교육을 통해서 교육의 평등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닦기도 했어요. 교육뿐만 아니라 보육과 돌봄과 같은 영역까지 점점 확장되고 있구요. 학교라는 곳에 정말 많은 기대를 하고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그러다보니 때로는 헷갈리기도 합니다. 학교는 어떤 공간이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어떤 경험을 하면 좋을지. 혹시 여러분들은 학교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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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단어가 없어지는 사회를 바랍니다.
“행복한 새해 되세요~” 라는 신년 인사, 모두 한번씩 들어보셨죠? 행복한 하루가 되라는 작별인사도 자주 듣구요. 행복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많이 쓰고 있는 단어라 생각해요. 그런데 슬프게도 '행복하세요?'라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쉽지 않기도 하구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 누구도 정의하기 어려운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혹은 왜 자주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정의하지 못하는 것일까오? 행복이 무엇인지 명확히 규정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행복한 순간’이 있습니다. 또한 그 순간에서 우리는 편안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죠. 이 묘한 감정을, 혹은 고통스럽지 않기를 원하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행복을 정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행복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다다르는 것에 방법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물론 이것이 정의가 명확하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개인이 추구하는 바를 우리가 함부로 짐작할 수 없기에 이를 감히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구요.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있습니다. 순간적인 쾌락과 행복은 다르다는 것이죠. 행복은 결국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발현되기 때문이에요. 시험 성적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시험을 보았을 때 시험을 잘 보았다는 기준을 어디에 삼고 있으신가요? 만약 내가 공부한 것을 확인하고, 부족한 부분을 알기 위해서 시험점수를 확인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보다 내가 몇 점이 높은지를 비교하는 사람은 똑같은 점수로 똑같은 행복을 느끼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차이가 발생합니다. 점수가 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전자의 경우 어느 부분에서 이번에는 부족했는지를 생각하고, 앞으로의 공부 방향을 설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나의 등수에 집착을 하게 되고, 공부를 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죠. 결과가 좋더라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전자는 앞으로의 방향성과 스스로의 성취감을 느끼겠지만 후자는 높은 등수를 좋아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등수를 유지하기 위한 부담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례를 통해 순간적인 쾌락과 행복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례는 나의 목표를 외부(특히 타인과의 비교)에서 찾아 쾌락은 얻었으나 이는 오래가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주위에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원동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따라간다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따라간다는 것은 그들의 모습 중 닮고 싶은 것을 내가 배우겠다는 의지를 표출한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행동하도록 한 결정적 힘이 감각적인 즐거움이 아닌 삶의 의미, 더 정확하게는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지였다.” 굉장히 공감되는 말이었습니다(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안나네요...) 이를 통해 우리는 행복을 명확히 규정짓지는 못하고 있지만 행복에 조금씩 다다를 수 있고, 행복한 삶을 만드는 원동력이 생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탐구하고, 나만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기에 이상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죠. 그렇기에 사람들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쾌락만을 쫓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상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를 전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 걸음 다가가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겠지만 다가가는 순간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끼고, 성취감을 맛보게 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더욱 나은 존재로 발전해갑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왜 매년 부각되고, 소확행과 YOLO 등 사람들에게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단어는 매년 생겨나는 것일까요? 이는 결국 ‘우리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을 찾고, 더 행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싶어하는 거죠. 그렇기에 저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사회를 꿈꿉니다. 모두가 스스로 탐구하고, 나를 위한 목표를 세워서 모든 과정을 그냥 삶으로 받아들였으면 해요. 고통이 없는 것과 행복은 다릅니다. 내가 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 길 속에서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 길의 끝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웃게 됩니다. 모두가 나만의 길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희망하면서 웃을 수 있기를, 그리고 자연스럽게 ‘당신은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이 삶이 제 삶인걸요?’라면서 모두가 행복하냐는 질문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는 그러한 사회를 꿈꿉니다.
새 이슈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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